소설리스트

7화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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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원래 궤도로 돌아갔다. 유백영이 인생에서 사라졌다. 전화도 오지 않고 문자도 오지 않았다. 돈을 돌려줬으니 이제 더는 얽힐 일이 없었다.

빈 시간에 대본을 붙들고 살거나 바깥으로 나돌았다. 집에 있기 싫었다. 어두운 방에 멀거니 앉아있으면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누가 문을 두드릴 것만 같아 잠을 자도 퍼뜩 깨어나기 일쑤였다. 꿈에서도 이홍화, 부르는 소리를 듣고, 문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현실과 구분이 안 되어 현관문 앞에 앉아 밤을 지새운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사가 빠졌다. 하나가 빠지니 다른 것들이 헐거워지고, 그렇게 생긴 틈으로 정신이 물처럼 흘러나갔다. 걷고 말하고 뛰고 연기하는 자신이 자신답지 않았다. 한 걸음 멀찍이 떨어져 타인 보듯이 바라봤다.

집을 나서는 길에 문득 우편함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때라면 전단지만 가득할 우편함에 다른 형태의 종잇조각이 꽂혀 있었다. 저번에 변태에게서 욕설 적힌 쪽지를 받고 우편함을 내버려 뒀더니, 버려진 땅에 잡초 돋듯이 종이가 무성히 자랐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텅 빈 다른 우편함과 달리 쓰레기로 가득 찬 제 우편함이 눈에 거슬려 홍화는 걸음을 틀었다. 변태인지 스토커인지, 경계가 모호한 범죄자가 남기고 간 쪽지가 빼곡했다. 해봤자 천박한 욕 그 이상의 내용은 없을 거라 확인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읏.”

무심코 한 줌 쥐어 뺐다가 손바닥이 뜨끔해 종이 더미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흩어진 종이 위로 붉은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쪽지 끝에 붙은 날카로운 면도칼에도 피가 묻어있었다.

아, 씨발.

소리 없이 욕하고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하필이면 손바닥의 두툼한 살점을 찢어 상처가 얕아도 핏물은 많이 흘러나왔다. 혀로 슥 핥기엔 양이 많아 대충 반대편 손바닥으로 누르고 지혈했다.

순찰이 강화됐어도 범인은 검거하지 못했다. 변태는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직접 신고할까 마음을 먹었다가도, 얼굴 팔리는 게 무섭고 피해 사실이 입증되지 않은 이상 사건 해결이 어렵다는 발뺌 식 답변이 돌아올 게 뻔해 단념했다.

당분간 집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으나, 의탁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신혼이나 마찬가지인 명식의 집에 꼽사리 끼어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사람들도 단칸방에 갇혀 사는 사정은 홍화와 같았다. 이사도 어려웠다. 반지하라도 이만한 보증금에 월세에, 샤워기와 싱크대까지 딸린 곳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복비 또한 홍화의 주머니 사정상 한 달 생활비에 타격이 올 만큼 커다란 지출이었다.

잠깐 백영의 넓디넓은 집이 떠올랐다. 방 하나가 반지하 방만 했다. 홍화는 고개를 붕붕 흔들며 헛된 생각을 털어버렸다. 이제 백영은 모든 선택지에서 제외해야 할 사람이었다.

홍화는 잠시나마 백영을 떠올린 자신을 벌주듯 상처를 꾹 눌렀다. 뜨끔한 고통이 일자 몽롱하던 정신이 바짝 깨어났다. 손이 다시 베이지 않게 종이를 조심스레 주워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너 손에 그게 웬 피야!”

차에 타자마자 명식이 상처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별거 아니라고, 침 바르면 낫는다고 해도 명식은 약국에서 붕대를 사 와 홍화의 손바닥을 칭칭 감았다.

“내가 물도 조심해서 마시라고 했지. 화보 촬영 날인데 이게 무슨 난리야. 연고 줄 테니까 틈나는 대로 발라. 으,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 흉 지겠다.”

“어, 종이 꺼내다가.”

“이게 종이가 낸 상처라고?”

“아니, 아. 우편함 모서리에 긁혔어.”

변태 이야기를 꺼내면 손바닥 긁힌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날뛸 거라 홍화가 대충 얼버무렸다. 명식이 혀를 쯧쯧 차며 걱정했다.

“이따 촬영할 때는 반창고 붙이고, 가기 전까지는 붕대 감고 있어. 촬영 끝나고 붕대 다시 감아줄게.”

뼈 부러진 것도 아닌데. 관심이 싫지 않아 홍화가 히죽거리며 붕대를 매만졌다. 역시 절 걱정해주는 사람은 명식밖에 없었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둥, 눈 밑에 그늘이 졌다는 둥, 몸 관리가 엉망이라는 둥 명식의 잔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꽃노래도 한두 번이어야지, 끊임없이 쏟아지니 머리가 다 아파왔다. 홍화는 귓등으로 명식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화보 촬영을 떠올렸다. 어디에서 주최하는 무슨 촬영이라고 명식이 알려줬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신인에게 사전 미팅을 해주는 친절을 발휘하는 곳이 아님만은 확실했다.

“운동은 하고 있냐. 살 뺀다고 밥 거르지 말고. 잘 먹고 운동해서 근육이나 좀 키워. 체력도 키우고. 정 밥 먹기 싫으면 가게로 오라니까. 나영이도…….”

“괜찮다니까. 요새 이홍화 인생 최고로 건강해.”

“진짜 괜찮아?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래. 걱정 말아.”

잠이 들라치면 귓가에 자꾸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깨어나야 사라지는 환상이었다. 벨 소리도 들리는 듯해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쳐다봤다. 액정이 꺼멓기만 했다.

명식이 시동을 걸고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음을 쫓아냈다.

홍화는 억지로 눈을 감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환청이 사라진 지금 이 순간에 조금이라도 자두어야 했다.

자는 건 실패했다. 조용히 가던 차에 벨 소리가 요란했다. 공교롭게도 홍화와 같은 벨 소리였다. 홍화가 눈을 번쩍 뜨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제 것이 아니었다. 명식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전화를 받았다.

“어, 자기야. 나 지금 운전 중이야. ……뭐라고?”

놀란 목소리였다. 홍화도 덩달아 놀라 의자에서 등을 떼고 운전석을 쳐다봤다. 명식의 표정이 진지하고 심각했다. 핸드폰 너머로 얼핏 들리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잔뜩 끼어있었다. 혹시 큰일이라도 났을까 봐 홍화의 입술도 딱딱하게 굳었다.

“홍화야, 진짜 미안한데……. 우리 맹꽁이가 토하고 난리 났단다. 밥도 안 먹고 축 늘어졌대. 어떡하냐.”

맹꽁이라면 홍화도 알았다. 최근 명식이 집으로 데려간 길고양이였다. 삼색에 연둣빛 눈이 예쁜 뚱뚱한 고양이가, 음식이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드는 고양이가 밥을 거부하다니. 심각한 문제가 맞았다. 명식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고 뚱땡이가 간식도 입에 안 댄대. 병원 빨리 가봐야 하는데 나영인 지금 조카에게 가봐야 한대. 조카도 병원에 있다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액셀 대신 브레이크라도 밟을 성싶었다. 최근 입만 열면 고양이 자랑과 여자 친구 자랑만 일삼는 명식에게 하늘이 무너진 것과 동급인 비보였다.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줘. 주소 알려주면 알아서 갈게.”

“그건 내가 너무 미안해서 안 돼. 빨리 데려다주고 병원 좀 다녀올게.”

“괜찮으니까 나 저기다 내려주고 얼른 가봐. 정 길 모르겠으면 택시 타고 가지, 뭘.”

“안 된다니까.”

명식이 단호하게 말하고 액셀을 밟았다. 속도가 올라가며 홍화의 등이 의자에 도로 붙었다. 차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솜씨가 추격 영화 저리 가라였다. 홍화는 말없이 안전벨트만 꽉 쥐었다. 사고가 안 나길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식이 도로 한복판에서 분노의 질주를 찍은 덕택에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했다. 명식은 홍화를 내려주기 무섭게 카레이서에 빙의해 차를 몰고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이홍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대에서 어르신들에게 사랑받던 모습을 꾸며내어 힘차게 인사했다. 촬영 준비로 분주하던 스태프들이 일제히 홍화를 쳐다봤다. 온몸에 꽂힌 시선이 따끔따끔했지만 홍화는 최선을 다해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요. 일찍 왔네.”

의상을 만지작거리던 여자만이 홍화의 인사를 받아줬다. 늦었다가 무슨 욕을 얻어먹으려고. 홍화가 부끄러운 척 뒷머리를 긁적이며 얼른 주변을 살폈다. 다른 이들은 홍화를 힐끗거리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꽁지머리를 한 남자만이 홍화 옆으로 다가왔다.

“피부 좋다고 들었는데 엉망이네. 이거 커버하는 데 시간 좀 걸리겠다. 화보 촬영 앞두고 관리 제대로 안 했나 봐. 이게 뭐야. 푸석푸석해서는.”

남자가 홍화의 볼을 찰떡처럼 주물럭거리며 불평했다. 댁보다야 고운 피부라는 진심을 속으로 삼키고 홍화가 비굴하게 웃었다.

“손은 또 왜 그래?”

“아, 좀 다쳐서.”

“큰 상처야?”

“아뇨, 별것 아닌…….”

“화보를 앞두고 다쳐? 정신이 있어, 없어. 그따위로 몸 굴리면서 무슨 화보를 찍는다고 그래?”

홍화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다다다 쏘아대면서 손에 감긴 붕대를 마구잡이로 풀어냈다. 핏물이 엉겨 붙어있는 붕대를 힘껏 잡아 뜯어 입 다문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뜨끔해서 윽, 하고 신음해도 남자는 홍화의 고통 따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살색 반창고로 대충 상처를 가리고 남자가 홍화의 품에 갈아입을 옷을 안겼다.

“옷에 피 묻지 않게 조심해. 비싼 옷들이니까.”

뜨지 않으면 옷보다도 못한 존재라지. 홍화가 애써 웃고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혹여 핏물이 샐까 봐 주먹을 꽉 쥐고 소매를 꿰입었더니 반창고에 핏물이 벌겋게 올라왔다.

탈의실에서 나오자마자 거울 앞으로 끌려갔다. 나름 준비한다고 단정하게 하고 왔는데, 얼굴 위를 오가는 브러시가 바닥 쓰는 빗자루처럼 거칠었다. 얼굴은 그림판이 되고 뒤에선 드라이기와 빗이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우리 선생님 성함은 알죠? 박상국 선생님이세요. 근데 본명으로는 절대 부르지 말아요. 본인 이름 촌스럽다고 엄청 싫어하거든. 무조건 제임스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유학 시절 이름이라나 뭐라나.”

머리를 매만지던 여자가 코웃음을 핏 치면서 설명했다. 홍화가 어설피 따라 웃으며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 맞은편에서 보조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땅딸막한 남자가 박상국이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아 입을 벙긋하며 연습했다.

손길이 지나간 다음 거울을 보니 이홍화 아닌 이홍화가 앉아있었다. 흰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 머리를 내려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이홍화가. 색 나는 틴트를 발라 입술은 반짝반짝하고, 눈덩이 위에는 분가루를 뿌려 평소보다 좀 더 멍해 보였다.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고 봐도 자신이 아닌 듯 낯설다.

준비는 다 했는데 다들 장비만 만지작거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약속한 시간은 진즉에 넘겼다. 이십 분, 삼십 분이 지나도 다들 입이 얼어붙은 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도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왜 아직도 안 와? 빨리 전화해봐!”

언제 시작할는지 홍화가 눈치만 보고 있을 무렵, 박상국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보조를 다그쳤다. 보조도 안절부절못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거렸다.

“늦을 분이 아닌데…….”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보조가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벨 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보조가 후다닥 뛰어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남자가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이며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물에 빠진 홍화를 집까지 태워다준, 안면이 익은 사람이었다. 뒤에 있는 인간도 낯이 익었다. 다들 기다리게 해놓고선 어찌 그리 뻔뻔한지, 고개만 까닥하고 끝이었다.

“백영 씨 왔어요? 보고 싶어서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보조에게 입에서 불을 뿜을 듯 화내던 인간은 사라지고 한 마리 순한 양만 남았다. 박상국이 내시처럼 허리를 굽히고서 백영을 맞이했다. 사람이 늦을 수도 있다며, 전화를 건 보조에게 그것 하나 기다리지 못하냐고 괜히 무안을 줬다. 보조는 그런 누명에 익숙한 듯 어색하게 입매를 비틀며 물러났다.

“세상에, 너무 완벽해.”

홍화의 피부 상태를 지적했던 남자가 백영 앞에선 입에서 침을 튀기며 칭찬을 해댔다. 머리도 메이크업도 흠잡을 곳 없다고, 옷만 갈아입고 바로 시작하면 되겠다며 지켜보는 이가 몸 둘 바 모를 아부를 떨었다.

옷도 홍화에겐 잡히는 대로 던져주더니, 백영에겐 두 팔에 얹어 대령해줬다. 백영은 그조차도 마음에 차지 않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매대에 걸린 옷을 손으로 휙휙 밀어제쳤다. 한 벌씩 멀어질 때마다 코디의 얼굴이 희게 식었다.

홍화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백영을 쳐다봤다. 백영의 시선도 홍화에게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스태프 중 한 명이라고 여기나 싶을 정도로 무심한 눈빛이었다. 계속 보고 있다가 다시 눈이라도 마주칠라, 홍화가 황급히 딴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저, 오늘 무슨 촬영이라고 했죠?”

그제야 용기를 내서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봤다. 다른 모델과 같이 촬영한다는 것만 얼핏 들었을 뿐, 누구와 찍는 줄은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왔냐는 타박과 설명이 같이 돌아왔다. 홍화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도무지 다물어지지 않았다.

거두절미하자면, 기획사의 프로젝트 중 하나로 신인 배우와 기존 소속사 배우를 짝지어 화보를 촬영한다는 이야기였다. 띄워주기의 일환이라나, 뭐라나. 띄워줄 거면 차라리 배역이나 박 씨처럼 물어줄 것이지 이거야말로 쓸데없는 예산 낭비였다. 개인 화보 아니었냐고, 이딴 화보를 왜 찍냐며 신인 주제에 다 때려치우라고 생떼를 부릴 수 있을 리가. 비싼 장비 임대료 물라고 윽박지를 수도 있으니 찍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게 상책이었다.

주제도 주제였다. 남자와 소년이라느니, 아폴론과 에로스라느니, 모던 앤 시크라느니 이해할 수 없는 주제만 나열했다. 청순하면서도 위험하고, 밝으면서도 어두워야 한단다. 말인지 소인지 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홍화는 정신없이 알아들은 척 고개만 끄덕였다.

스태프들이 먹이 옮기는 개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개인 촬영이 먼저 진행되었다. 유백영이 먼저 촬영하고 그다음이 홍화의 순서였다. 사진사의 지시에 따라―지시라기보다는 잘생겼다, 잘한다, 멋지다 등등의 남부끄러울 찬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유백영의 촬영이 이어졌다.

홍화는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허벅지 사이에 손을 꽂아 넣고 어깨를 움츠렸다. 손을 바깥으로 뺏다가는 버릇처럼 손끝을 잘근잘근 씹을 것만 같았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시선도, 자세도 자연스러웠다. 좋아, 그렇게, 고개를 조금 더 왼쪽으로. 사진사의 지시 사항을 군말 없이 따르는 모습이 지금껏 봐온 백영과 달랐다. 연기할 때의 가식적인 모습만 보다가, 입을 다물고 진지한 눈빛을 하거나 미소 짓는 얼굴을 보니 한없이 생소했다.

다른 곳을 보려고 해도 시선은 결국 홀린 듯 유백영을 좇았다. 소매를 걷어 드러난 아래팔, 시계를 찬 굵고 단단한 손목, 단추를 채운 베스트와 목을 죄는 자잘한 체크무늬 넥타이 따위에.

“모든 컷이 A컷이야. 어떻게 고르라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며 작가가 호들갑을 떨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사진을 찍는 것도 기다린 시간에 비해 훅훅 지나갔다. 입까지 헤 벌리고 쳐다보다 보니 어느덧 백영의 촬영이 모두 끝나 있었다.

드디어 홍화 차례였다. 기계처럼 뻣뻣하게 카메라 앞에 섰다. 오디션을 볼 때보다 더욱 긴장했다. 목구멍이 메말라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어색하게 자세를 잡았다.

조명이 머리 위에서 해처럼 이글거렸다. 여름 볕을 내리쬔 듯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작가가 사진을 확인하는 틈틈이 사람이 달려와 분칠을 더해도 몇 컷 찍은 다음에는 땀이 흘러 지워졌다.

“고개 오른쪽으로 틀고 왼쪽 어깨 내려. 네 오른손은 장식이야? 의수 달았어?”

“죄송합니다.”

“카메라 보라고, 카메라! 그렇게 있으면 목 짧아 보여. 안 그래도 짧은데 아예 없애게? 오른손 좀 어떻게 해봐, 병신처럼 흔들지 말고!”

“죄송합니다…….”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그간 입에 붙은 죄송하단 말만 줄줄이 읊었다. 사과할 시간에 자세나 좀 어떻게 하라며 사진사가 카메라를 집어 던질 듯이 화를 냈다. 이 컷도, 저 컷도 다 버려야겠다고 욕까지 섞어 툴툴댔다.

덥고, 졸리고, 힘들었다. 저쪽에서 뚫어지라 쳐다보는 인물도 방해의 요인이었다. 억지로 카메라에 집중해봐도 자꾸만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 장난해? 촬영 처음 해봐? 제대로 못 해? 그쪽 때문에 시간 버리면 날아가는 돈이 얼마인 줄은 알아? 갚을 능력 없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앉으라는 말을 놓치고 딴 자세를 취했다가 호된 질타를 받았다. 땀을 닦아주던 사람도 어휴, 하며 한심하단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힐끗 보니 백영을 기다린 시간보다 촬영한 시간이 짧았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수도 없는 힐난이 홍화를 할퀴고 지나갔다.

“좀 쉬다 하죠.”

찰칵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운 가운데, 백영이 사진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권했다. 벌컥 화를 내려던 사진사가 백영의 얼굴을 보고 헤벌쭉 웃었다.

“그럴까? 백영 씨도 힘들 텐데, 내 정신 좀 봐. 잠깐 커피 좀 마시면서 쉽시다. 우리 사진도 좀 보고.”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백영이 팠으니 오아시스에 독이 가득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넙죽 마시기로 했다. 홍화는 뜨거운 조명에서 멀어져 구석으로 숨었다. 아무도 발견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쉬고 싶었다.

“뭐 드실래요?”

아까 사진사가 누명을 씌웠던 보조가 스튜디오 구석에 숨어있는 홍화를 찾아내 물었다. 홍화가 눈치껏 가장 저렴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보조가 주문을 받아 적다 말고 고개를 홱 들어 홍화 얼굴 곳곳을 살폈다. 혹시 울기라도 했나 궁금한 듯 구석구석을. 멀쩡한 눈가를 보고는 아이처럼 씩 웃었다.

“원래 저 인간이 좀 재수 없어요. 한 번씩은 다 겪는 일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만 해도 매일 당하는데요, 뭘.”

보조의 따스한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시큰해지고 속에서 울컥하며 감동이 밀려왔다. 싸늘하고 차갑기만 한 사회에서 한 줄기의 온기였다.

“원래는 여자 모델들하고만 작업했거든요. 알잖아요. 비키니나 속옷 같은 거……. 그러다가 운 좋게 배우랑 찍게 됐는데, 그 뒤로 저 지랄이 더 심해졌어요. 요샌 아주 발작이야.”

보조가 사진사의 귀에 들리지 않을 거리인 걸 확인하고 조용히 흉을 봤다. 나름의 위로였다. 홍화가 대놓고 동조는 못 하고 열없이 웃었다.

“선생님이 뭐라 하든 그쪽 잘생겼어요. 눈도 선하게 생겨서……. 어, 그러고 보니 혹시 예전에 드라마 출현한 적 있어요? 낯이 익은데.”

“예. <라스트로드> 초반에 살인자 역할 맡았었어요. 그 드라마 보셨어요?”

“당연히 봤죠! 원래 드라마 안 보는데 그건 꼭 챙겨 봤어요. 야근시키면 그거 못 봐서 화났다니까요. 그때 맡은 역이…… 아. 처음에 나온 그 시골 남자 역이구나! 인상 깊었는데 왜 몰랐지?”

보조가 용케 알아보고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홍화가 무심결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하다가, 머리가 흐트러진다는 지적을 받고 손을 내렸다. 대신 입술이 벙긋 벌어졌다. 입술을 앙 물며 기쁜 기색을 숨기려고 해도 입 끝이 자꾸만 위로 쑥쑥 올라갔다.

“연기 엄청 잘하시던데.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사인이나 해주세요!”

홍화의 입술이 광대를 밀어냈다. 볼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르고 두 눈에 별이 떴다. 사인이야, 극단에 입단했을 때부터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연습했다. 트로트로 전국 무대를 돌 때 아주머니들의 극성에 못 이겨 사인해준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배우로서는. 오른손에 상처가 있지만 사인 한 번 못 하랴. 보조의 마음이 바뀔세라 홍화가 두리번거리며 종이와 펜을 찾았다. 그러다가, 허공에서 백영과 딱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던 건지. 백영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팔짱을 끼고, 잘들 논다는 눈초리로 보조와 홍화를 번갈아 보았다. 보조야 백영을 등지고 서 있느라 못 본다 쳐도 홍화에겐 매우 잘 보였다. 눈매가 가느스름하고 입매에도 같잖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백영이 홍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사진사에게 말을 붙였다.

“촬영 시작하죠.”

“아니, 커피는?”

“마시면서 하면 되죠. 대여비 아깝잖아요. 쉴 시간이 어디 있어.”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틀린 말도 백영이 하면 옳은 말이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장비 대여금도 만만치 않게 올라갔다. 사진사가 아쉬워하는 스태프들에게 꾸물거리지 말라며 닦달했다. 오아시스가 신기루로 사라져버리고, 다시금 사막 같은 고행길이 펼쳐졌다.

상황을 주고 연기를 하라면 하겠으나 추상적인 주제만 던져주고 몸짓으로 표현하려니 홍화는 죽을 맛이었다. 발랄한 소년처럼 웃어보라느니, 청년과 소년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온몸으로 표현하라느니 사진사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주문만 던졌다. 고개를 들라 해서 들었는데도 목이 짧고 굵다며 자세를 바꾸라는 소리만 실컷 들었다. 오른손에 신경 쓰면 왼손이 병신 된다는 잔소리는 잔소리 축에도 들지 않았다.

사진사의 날 선 목소리에 분노가 점점 짙게 차올랐다. 간신히 세 번째 옷을 끝내고 마지막 한 벌로 갈아입었을 때는 절정이었다.

“야, 이 개새끼야! 구둣발로 뭉개놓은 것 같은 새끼가. 이럴 거면 때려치워, 씨발!”

드디어 쌍욕도 얻어먹었다. 홍화가 어깨를 움츠렸다. 연신 사과를 해도 작가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욕이야 하도 많이 얻어먹어서 웬만한 건 면역이 있다고 생각했건만. 백영 앞에서 당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자존심이 다 쓴 햄버거 포장지처럼 더럽게 구겨졌다. 눈가에 눈물도 맺혔다. 입술을 씹고 이를 악물며 억지로 참아내도 기어코 속눈썹이 젖었다.

바닥에 눈물을 떨어트리는 건 마지막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홍화가 콧구멍을 벌름대며 눈을 부릅떠 눈물이 떨어지는 것만은 막았다. 이건 눈물이 아니다. 조명이 너무 뜨거운 나머지 흐르는 땀이다. 이마에, 관자놀이에, 콧대에 맺힌 땀방울이 눈가에 모인 것뿐이다.

백영은 잠자코 쳐다보고만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재미없는 영화 보듯이 눈 앞에 펼쳐진 망신살을 구경했다.

속이 후련하겠지, 그래. 번번이 욕만 하던 별 볼 일 없는 놈이 사진 한 장 제대로 못 찍고 쩔쩔매니 그 맛이 갓 짠 기름 맛일 테지. 무표정 아래로 코웃음을 치거나 비웃고 있겠지. 백영이 감춘 표정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그릴 수 있었다.

하도 아랫입술을 질끈 씹어 혀끝에서 피 맛이 났다. 쏟아지는 욕설은 끝날 줄을 몰랐다. 다른 스태프들도 괜히 딴청을 피우는 동안에 보조만 홍화를 가엾게 여겨 사진사를 말리려 했다.

“……아, 씨발. 못 해먹겠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터라 홍화는 사진사가 한 말인 줄 알았다. 사진사치고는 목소리가 굵고 낮은 데다가, 그 말이 나온 후로 갑자기 싸한 정적이 찾아왔다. 홍화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백영에게 쏠려 있었다. 사진사마저 눈알이 튀어나와라 크게 뜨고 백영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곧 홍화에게 한 말인 줄 알고 간신배처럼 히죽댔다.

“그치, 백영 씨도 답답하지. 저 친구가 촬영이 처음인지 자꾸 병신처럼 구네. 최대한 빨리 끝낼게. 조금만 참아, 응?”

글썽글썽하던 눈물이 기어코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재빨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홍화가 딴 곳을 쳐다봤다. 백영에게 민폐를 끼친 건 사실이니, 사진사에게 그랬듯 죄송하다고 인사를 해야 직업 순리상 맞았다. 그러나 싫었다. 곧 죽어도 못 하겠다.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거 말고.”

백영이 넥타이 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사진사가 홍화에게 야차 같은 표정을 보이기 바로 전이었다. 부드럽게 고리를 끌어 내린 백영이 느릿한 손길로 조끼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손가락이 옷깃을 스칠 때마다 쇄골과 가슴골과 근육이 드러났으나, 잘 빠진 몸매 구경할 순간이 아니었다.

난데없는 스트립쇼에 스태프 전원이 석상처럼 굳었다. 홍화도 마찬가지였다. 보는 눈이 수십이 넘는데도 정작 속살을 드러낸 본인은 태연했다.

“기획팀 팀장한테 접대하고 화보 따낸 거까진 내가 이해해. 능력이 좆도 없으면 영업이라도 잘해야지. 그런 점은 높이 삽니다. ……그런데.”

셔츠를 훌렁 벗어 던지고 백영이 벨트를 잡았다. 철컥 소리가 나자 매니저가 기겁해서 달려들었다. 백영이 매니저를 비켜 세우고 바지까지 홱 벗었다. 고개를 돌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돌릴 수가 없었다. 딱 들러붙는 드로즈에 심지어 여성 스태프의 눈까지 고정됐다. 그 안에 다른 무언가를 집어넣어야지만 성립 가능한 윤곽에, 어떤 이는 경망스레 침마저 삼켰다.

“사진도 좆같이 찍으면서 인성까지 개 같으면 쓰나. 그깟 신인 하나 못 다루고 쩔쩔매면서 프로는 개뿔. 삼촌도 감이 떨어졌나, 이딴 개쓰레기를 나한테 붙이네. 오른손이 좆같으면 왼손이라도 괜찮아야지. 왼손은 등신이고 인성은 씨발인데 대가리까지 답이 없어. 거기다 멍청하기까지.”

원색적인 비난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쩡쩡 얼어붙었다. 그나마 이성적인 매니저가 나서서 백영을 말리며 사진사를 향해 허리가 부러지라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각했을 때도 그러더니, 사과할 때는 항상 매니저가 나섰다.

“죄송합니다. 백영이가 요새 잠을 잘 못 자서 좀 날카롭…….”

“형은 옷이나 가져와.”

노란 싹수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유백영이었다. 어떻게든 수습하려던 매니저가 긴 한숨을 뽑아냈다. 안간힘을 써도 개새끼 발동 걸린 백영을 말릴 재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사진사는 백영이 옷을 다 갖춰 입을 때까지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어린놈에게 욕을 얻어먹는 경험이 참신한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들 뭘 그렇게 봅니까. 생각해서 일찍 때려치워줬잖아. 조기 퇴근 싫어?”

스태프 중 누구도 백영에게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하고 슬금슬금 사진사의 눈치만 봤다. 사진사도 입을 꾹 다문 채 주먹만 쥐고 있었다. 함부로 건드리기엔 백영이 가진 배경과 입지가 유전油田이자 백금과 다이아몬드 광산급이었다. 사진사가 내로라하는 인물이면 모를까, 이제 막 배우들과 촬영하는 단계라 백영에겐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백영은 본인이 가진 지위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았다. 이 바닥 생리라는 게 잔인할 정도로 약육강식이기에, 백영은 거칠 것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판 치고 나가도 상관없었다. 힘없는 사진사 한 명에게 지랄을 해대도 단단히 굳힌 평판에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이었다.

잘 나가는 인간이라도 백영 눈 밖으로 나면 불똥을 피해 갈 수는 없었겠지만. 기실 제 위에 사람도 신도 없는 백영이었다.

백영은 다른 시선들을 무시하고 홍화만 봤다. 이 상황에 적잖이 놀랐는지 히끅, 하며 딸꾹질을 한다. 어깨를 올렸다가 내리는 꼴이 푸드덕거리는 미운 오리 새끼 같았다. 주둥이가 툭 튀어나와서는, 검은 눈이 동그래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는 그런 작은 생명체.

“뭐 해. 안 나와?”

홍화가 저를 가리킨 말인 줄 모르고 주변을 홱홱 돌아봤다. 저임을 알고도 섣불리 발을 옮기지 않았다. 잘 나가는 배우야 깽판을 쳐도 상관이 없다지만, 홍화는 신인이고 무명이었다. 눈치를 봐야 하고, 기어야 하고,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는.

“빨리 와.”

머뭇거리자 백영이 재촉했다. 따라가지 않으면 멱살을 잡을 것처럼 이쪽으로 상체를 슬쩍 틀었다.

홀로 남아 손이 발이 될 때까지 싹싹 빈다 한들 이 촬영이 이어질까. 주인공은 백영이지 저가 아니었다. 홍화는 사진사에게 붙느냐, 백영에게 붙느냐 재빨리 주판알을 튕겼다. 답은 금방 나왔다.

죽어도 힘 있는 놈에게 붙어 죽는 게 낫지. 때깔이라도 곱게 죽여주지 않겠나.

내키지는 않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결정을 내린 홍화가 부리나케 탈의실 쪽으로 향했다. 제 옷이 아니기에 갈아입고 가야 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백영이 어디로 못 가도록 팔목을 잡았다. 홍화가 흠칫하며 손을 빼려 했으나 손아귀가 흡사 굵은 밧줄 같았다.

“그냥 입고 와.”

“내 옷 아닌데…….”

“잔말 말고.”

남아있겠다고 마음을 바꿔도 유백영은 저를 어깨에 둘러메고 과부 보쌈하듯이 내뺄 것이다. 납치당하는 과부 심정으로―본인이 문고리를 빼놓기는 했으나― 저 좀 구해달라며 홍화가 다른 이들을 애타게 쳐다봤다. 혹, 엮여서 피라도 볼세라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홍화를 외면했다. 사진사만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둘을 노려봤다.

고함에, 의자 넘어지는 소리에, 분을 이기지 못한 괴성이 닫힌 문을 뚫고 나왔다. 백영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계단을 척척 걸어갔다. 매니저가 뒤에서 백영을 말리려다가, 차나 가져오라는 한마디에 다른 길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홍화는 맥없이 끌려가다 스튜디오를 완전히 벗어난 다음에야 우뚝 섰다. 홍화의 팔목엔 아직도 백영의 손이 족쇄처럼 걸려 있었다.

“이제 그만 놓지. 아픈데.”

따라 나왔다고는 하나 홍화의 속은 영 편치 않았다. 지금이라도 들어가 나 죽었소, 빌어야 하는 건 아닌지 갈등이 커다랬다. 그런 홍화를 꿰뚫어 본 것처럼 백영이 코웃음 쳤다.

“찍히는 거 걱정해? 네 발로 나온 순간 넌 저 새끼하고 평생 작업 못 해. 서로 마주칠 일도 없을걸. 설마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사람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괜히 적 한 명 늘렸다는 걱정부터 들었다. 그 걱정은 곧 백영을 향한 얄미움으로 방향을 달리했다. 촬영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도 저는 피해 볼 것 없다며 뻔뻔하기 짝이 없는 백영에게. 홍화의 앞날에 무슨 파도가 몰아칠지 알면서도 난장을 피운 백영에게.

“넌 왜 다 네 멋대로냐?”

나가는 말이 곱지 않았다. 홍화는 백영이 미웠다. 멋대로 왔다가 멋대로 가고, 멋대로 연락을 하지 않다가 불현듯 찾아와 존재감을 과시한다. 잊으려고 하면 잊히려는 순간을 귀신같이 알아서 잊지도 못하게 한다. 홍화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주제에 꼭 걱정하는 것처럼 굴었다.

죄다 짜증이 났다. 미워서 정강이를 발로 차고 싶었다. 제 인생에서 뻥 차버리고 싶었다.

“……뭐?”

백영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너야 잘 나가니 그딴 개판을 쳐도 상관없겠지. 난 아냐. 네가 불을 지르면 타 죽는 건 나고, 네가 물을 튀겨도 익사하는 건 나야. 네가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고 네가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난 밟혀 죽는 개미 새끼라고! 왜 그걸 몰라!”

백영 손에 죽는 게 그나마 낫다고 여겨 져주는 척 빠져나왔다. 결과가 나오지 않아 맞는 선택일는지는 아직 모른다. 홍화는 그저 화가 났고, 그 불똥을 어디든 튕겨내고 싶었다. 마침 눈앞에 있는 게 백영이었다. 보이는 것만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열이 나게 하는 존재. 홍화가 가장 숨기고픈 모습만 쏙쏙 골라 보는 얄미운 상대였다.

욕을 먹고 끝까지 버티면 그래, 백영이 끝까지 모른 척 넘어갔다면 그래, 화보는 찍었겠지. 자존심이 문드러졌든 어쨌든 결과물은 품에 안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격 모독이 이루어졌어도 그런 일이 한두 번이던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 구정물이더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네가 무슨 권리로 훼방을 놔! 나는, 난 너랑 달라서 한 번이라도 더 보여야 해. 그게 사진이든 뭐든, 개처럼 취급하든 어쨌든 기회면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네가 뭐라고, 네까짓 게 뭐라고-…!”

멱살이라도 잡아야 했다. 잡고, 흔들고 제 분노를 마음껏 표출해야 했다. 극단에서 연기했을 때처럼,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객석의 모든 이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과장된 몸짓으로.

홍화는 백영의 멱살을 쥐지 못하고 제 주먹만 쥐었다.

“……하.”

푹 숙인 홍화의 뒷머리에 냉소가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 무게 때문에 홍화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럼 다시 가든가. 가서 개처럼 꼬리 치든가. 무릎 꿇고 빌면 그 개새끼가 잘도 봐주겠네. 존나 잘 봐줘서 화보도 찍고 예뻐해주겠네. ……뭐 해. 안 들어가? 직접 모셔다드려야 해?”

사진작가가 퍼부어댄 폭언보다는 약했다. 그런데도 백영이 한마디 뱉을 때마다 날카로운 바늘로 가슴을 푹푹 찌르는 고통이 일었다. 그만하라는 애원을 피처럼 토해낼 것만 같았다. 저가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하지 말라느니 어쨌느니, 꼴이 우스울 게 뻔해 홍화는 애원을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뭘 꾸물거려. 당장 꺼지라고!”

목청이 커졌다. 홍화가 대꼬챙이에 찔린 것처럼 온몸을 움찔하며 떨었다. 홍화에게 퍼부을 말은 거기까지였던 듯 백영이 몸을 돌렸다. 백영의 매니저가 도로변에서 무슨 일인지 궁금한 얼굴로 창을 내렸다. 백영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밴에 올라탔다. 뒷좌석을 돌아본 매니저가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채 차를 출발시켰다.

드디어 홀로 남았다. 홍화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손바닥 상처가 또다시 터져 핏물이 반창고 틈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반창고를 떼어 보니 속살이 벌어진 상처가 눈살 찌푸려질 정도로 참혹했다.

“아프다.”

손바닥 전체가 욱신거렸다. 상처 부근은 화끈화끈하니 열도 났다. 너무 아파서, 누구에게든 아프다고 칭얼대고 싶었다. 명식이 이미 걱정해줬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조금 더 다정하고 따스한 위로가 고팠다. 왜 다쳤냐고 물어봐주고, 아프지 않았냐고 달래주고, 피를 닦아주고, 약을 발라주고, 반창고를 붙어줬으면 좋겠다. 오늘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봐주고, 투정을 부리면 그랬느냐고 안아주고, 등을 쓰다듬어주고, 온기를 나눠줬으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넘어진 아이처럼 홍화는 울지 않았다. 상처만 멍한 눈길로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누가 화를 내야 하는데 적반하장인지. 얌전히 넘어갔으면 그래도 이력에 한 줄 그을 일은 생겼잖아. 욕을 먹든 얻어맞든 신경 쓰지 말 것이지. 그냥 놔두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척하지.

홍화가 이마를 짚으며 건물 계단 구석에 주저앉았다. 백영이 사라지자 마음을 먹먹하게 채우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이성이 자리를 되찾았다. 백영이 뒤집고 간 상황을 반추하며 왜 그랬을까, 의문을 제기했다.

백영 마음대로 상황이 굴러가지 않아서. 사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피곤하고 힘들어서. 혹은 이홍화가 욕먹고 있는 게 싫어서.

마지막 추측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홍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유백영이 저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생각은 하기 싫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유백영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비난한 저가 너무나도 못되고 못나 보일 것만 같았다.

문득,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외운 대사가 떠올랐다. 만년 2등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1등에게 하던 말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유백영은 감히 오를 생각도 못 할 나무이며, 홍화는 바닥에 눌어붙은 하루살이 들풀인데도 그 대사가 저가 처한 상황과 비슷해 보여 가슴에 푹 박혔다.

자존심은 있는데 자존감은 없어. 그럼 뭐만 남는 줄 알아? 열등감만 남아.

이건 열등감이다. 사람을 개미 새끼보다 못하게 만드는, 끔찍한 열등감이었다.

2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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