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차라리 벌레나 쥐 사체를 던지고 가라. 버리고 간 지 얼마 안 된 듯 집게로 집은 비닐 덩어리에서 희고 걸쭉한 액이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물흐물한 촉감이 손으로 집지 않았는데도 느껴지는 듯했다.
홍화가 칠색 팔색을 하며 쓰레기를 봉투에 쑤셔 박고 골목 이쪽저쪽을 샅샅이 훑었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놀며 까르르 웃는 소리만 골목길을 떠돌 뿐, 변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변태는 나날이 진화했다. 두고 가는 콘돔 수도 늘고 거기다 포장 껍질도 같이 버렸다. 하필이면 홍화네 집 창문 앞에 교묘하게 버려 치울 사람도 홍화가 유일했다.
익명의 투서가 효과를 발해 경찰이 순찰 횟수를 늘리긴 했으나, 얼마나 잽싼 놈인지 순찰하는 시간을 요리조리 피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다. 경찰에 편지도 한 번 더 보내고 빌라 게시판에 집 앞에다 말 못 할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파렴치한 행위는 범죄라고 좋게 돌려 적어놔도 소용없었다.
어떤 놈인지 제 손에 잡히면 아주 요절을 내버리리라. 홍화가 비누로 손을 박박 문질러 닦으며 이를 득득 갈았다.
소속사에서 떠다 먹여준다고는 하나,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조금이라도 통장의 숫자를 늘리려고 홍화는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오디션을 보러 뛰어다녔다. ‘정호’ 역이야, 천운이 따라줘서 그렇다고는 하나 그 천운이 매번 발생하진 않았다.
「얼굴이 너무 못생겼어요. 손 좀 보고 오세요. 최소한 수술하는 정성은 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실물과 카메라에 잡히는 모습이 너무 달라요.」
「어느 연기 학원이 그리 못 가르칩니까. 이름 좀 알려주세요. 피해 가게.」
고배를 죽죽 마시고 악담도 배 터질 만큼 실컷 들었다. 그러나 그딴 폭언쯤은 단련이 된 상태라 웃어넘길 수 있었다. 상처야 받지만, 배역을 포기할 만큼 타격이 크지 않았다. 오기만 생겼다. 언젠가 유백영처럼 알아주는 유명 인사가 되어 저를 비웃던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깔아뭉개겠다는 꿈만 무럭무럭 자라났다.
깨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도전한 끝에 제법 비중 있는 조연을 따냈다. 이 부작 단막극인데도 경쟁률이 무려 백 대 일인 작품이었다. 물에 빠지는 역할도, 화면에 일 분 남짓 나오다가 사라지는 역할도 아니었다. 주인공 옆에서 지고지순한 짝사랑을 보여주는 꽃집 청년 역할이었다. 대사의 분량도, 캐릭터도 매우 훌륭했다. 여러 얽힌 문제로 촬영 일자야 한참 남았어도 그간 먹고살 돈은 모아뒀기에 걱정은 크지 않았다.
“어, 형님.”
오디션 합격 통지를 받고 기뻐 날뛰다가 복도에서 양주석을 만났다. 주석이 먼저 홍화에게 아는 척을 하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이제는 죽은 방이나 다름없는 범죄자 집단 채팅방에서나 가끔 살아있다고 알려주는 사이였다.
고만고만한 단역들 사이에서 주석은 이제 잘 나가는 축에 속했다. 그 역시 <라스트로드>에서 맡은 역할이 날개를 달아주었는지 공중파 드라마에서 종종 얼굴을 내비치곤 했다.
홍화는 진심으로 주석을 축하했다. 단역 인생이 본디 고달프고 배고프다지만, 주석의 설움은 특히나 소설 몇 권은 엮을 수 있을 만큼 구슬펐다. 눈앞에서 배역 뺏기기, 어린 배우에게 뺨 맞기, 스태프들의 구박과 지독한 빈곤, 등등. 단역들이 한 번쯤 겪었을 뼈아픈 차별들을 주석은 아주 오랫동안 많이도 겪었다.
“홍화 오랜만이다. 이거 합격했어?”
“예. 운 좋게 그렇게 됐어요.”
홍화가 싱글싱글 웃었다. 주석이 잘됐다며 홍화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자식, 너 잘될 줄 알았다. 이거 축하주라도 해야겠는데.”
주석이 손목으로 술잔 꺾는 시늉을 하며 시시덕거렸다. 가서 운동 좀 하고 극단 사람들에게 오디션 합격했다고 얼굴이나 비치려고 했더니만.
“안 그래도 아는 피디가 술 한잔하자고 불렀거든. 마침 오늘이니까 같이 가자. 잘 나가는 사람들 많이 오는 곳이거든.”
좋은 말로 거절하려고 했으나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말에 혹했다. 홍화가 흔들리는 걸 눈치챈 주석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치며 은근하게 덧붙였다.
“거기서 줄만 잘 잡으면 인생 역전하는 거야. 이런 오디션 같은 건 따로 안 보러 다녀도 된다고.”
“VVIP 모임이나 뭐 그런 데예요?”
“그런 셈이지.”
주석이 우쭐거렸다. 그런 모임은 유니콘 같은 전설 아니었던가. 박 피디 같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라니, 그야말로 황금어장이었다.
평범하던 주석이 다시 보였다. 고향이 강원도 어드메라고 하더니만, 북쪽에서 온 귀인다웠다. 홍화가 주석의 손을 꼭 잡고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이 껄껄대며 몇 시에 어디로 오라며 문자로 주소를 보내줬다.
“예쁘게 입고 와. 예쁘게 보여야 하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랑합니다, 형님.”
홍화가 두 팔로 크게 하트를 그려 보이며 주석을 향해 갖은 애교를 다 떨었다. 주석이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호탕하게 웃었다.
주석과 헤어지고 극단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홍화는 울리는 전화를 받지 않고 액정에 뜬 이름을 한참 바라봤다. 저번에 수신 차단을 해제하고 깜박해 유백영, 이름 석 자가 고스란히 떴다. 수신 거부를 눌러버리면 그만일 것을, 받지도 끊지도 않고 내려 보기만 했다.
벤치에 앉아 저를 올려다보던 백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주홍빛 가로등 불이 백영의 얼굴을 유독 은은하게 비추었다. 항상 차갑게만 느껴지던 눈동자가 불빛 탓에 온화하고 따스해 보였고, 살짝 벌어진 입술도 술에 젖어 어딘가 야릇했다. 매번 못된 말만 늘어놓던 입이 그때만큼은 보드랍고 달콤한 말만 쏟아낼 듯 빛났다.
홍화가 멍한 눈을 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다가 누가 뒤에서 퍽 친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유백영의 뱀 같은 면상이 예쁘게 보였을까. 맥주도 술이라고 취해가지고 눈깔이 제 역할을 잠시 안 했겠지.
홍화가 손바닥으로 뺨을 세게 퍽퍽 후려쳤다. 찰나라도 유백영의 외모에 현혹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전화도 무시하고 싶지만, 그때마다 속된 말로 지랄을 해대는지라 핸드폰을 귀에 댔다. 다행히 오늘은 자랑할 거리도 있었다.
“왜.”
―어디야.
“무슨 상관.”
―오늘 뭐 해.
“약속 있어.”
―취소해. 내가 너 있는 곳으로 갈 거니까.
“싫은데. 오늘 축하 파티 갈 건데 내가 널 왜 만나.”
―축하 파티?
자연스레 자랑할 기회가 왔다. 홍화가 큼큼 목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귀에 바짝 붙였다.
“오디션 합격했어. 조연이긴 해도 비중이 높아. 나오는 길에 주석 형님 만났는데, 술 한잔하기로 했어.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온대.”
―……. 안 가는 게 좋을걸.
빈말이라도 축하한다는 말부터 해주지. 기분 상한 홍화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네가 뭔데 가라 마라야. 갈 거야.”
―어디서 하는 건데?
“왜, 너도 오려고?”
유백영도 잘 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니 올 자격이야 된다.
―주소는.
평소대로 싫다고 거절하면 그 낯짝 안 봐도 될 텐데. 번지르르한 그 낯짝 보기 싫다고 외치는 이성과 달리 홍화의 입은 착실하게 약속 장소에 언제 갈 거라고 시간까지 뱉었다.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길었다.
―꼭 가야 하냐.
“내 축하 파티인데 당연하지.”
홍화가 주인공인 건 아니지만 꼭 그런 것처럼 주장했다. 그래, 하고 백영이 전화를 끊었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끊는 버르장머리하고는. 홍화는 까매진 액정이 마치 백영의 얼굴이라도 되는 듯이 노려봤다가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뗐다. 괜히 알려줬다.
극단에서 넘칠 만큼 축하를 받고, 때 빼고 광내다 보니 벌써 약속 시간이었다.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외제 차가 즐비한 화려한 건물 앞에서 택시가 섰다. 홍화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차려입은 이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유백영만큼이나 덩치 좋은 가드들이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하며 안으로 들여보냈다. 주석이 줄 서지 말고 도착하면 연락 달라고 했기에 홍화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기도 전에 주석이 팔을 크게 흔들며 뛰어왔다.
“예쁘게 입고 오라고 했더니 정말 예쁘게 입고 왔네.”
주석이 홍화를 위아래로 훑으며 칭찬했다. 모처럼 뒤로 넘긴 머리를 긁적이며 홍화가 부끄럽다는 듯 몸을 꼬았다. 이 정도면 바로 합격이라고 주석이 홍화의 팔을 끌었다.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입구였다. 커튼으로 가려진 입구를 지키던 가드가 주석을 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복도가 좁고 어두웠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게 꺾여 있는 데다가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클럽 특유의 웅웅거리는 울림도 복도 벽을 둥둥 두드렸다.
“형님, 다른 사람들은 다른 데서 기다리던데…….”
“에헤이, 그 인간들이 우리랑 같나. 우리는 연예인이잖아. 나만 믿고 따라와.”
주석이 익숙한 듯 여러 갈래의 복도를 종횡무진 걸었다. 소음이 점점 커졌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에 묻힐 만큼 커다래질 때쯤 휘황찬란한 홀이 나왔다.
홍화는 순간 귀를 틀어막았다.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클럽은 생전 와본 적 없어서, 이렇게 음악 소리가 커다랄 줄은 몰랐다. 콩나물시루처럼 홀을 빼곡하게 채운 사람들이 신내림 받은 것처럼 몸을 흔들어대고, 허공에서는 흰 거품과 종이 가루가 눈송이처럼 휘날렸다. 눈 아픈 조명이 노래방 미러볼처럼 핑글핑글 돌아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주석이 옆에서 뭐라고 떠드는 것도 못 들었다.
“못 들었어요, 형님!”
“잠깐 가서 허락 맡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다른 데 가지 말고! 아님 바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있던가!”
귀 옆에서 소릴 질러 간신히 알아들었다. 홍화가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를 발견했다. 계속 이 자리에 서 있다가는 인파에 휩쓸려 저 역시 콩나물이 되리라.
바는 그래도 홀 구석에 있어 소음이 조금이나마 덜했다. 홍화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흔들며 메뉴판을 찾았다. 홍화가 알고 있는 가격에 죄다 공 하나가 더 붙은 데다가, 그마저도 영어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홍화가 메뉴를 쭉 훑다가 그나마 저렴한 ‘shooter’란에서 하나를 콕 짚었다.
“이거 주세요.”
베스트를 차려입은 바텐더가 홍화의 손가락이 짚은 곳을 보다가 홍화의 얼굴을 쳐다봤다. 표정이 오묘했다.
“블로우 잡blow job이요?”
“네. 그거요.”
바텐더가 곧 능숙하게 팔을 움직이며 손가락만 한 잔에 술을 채웠다. 밑은 초코우유 색에, 위에는 생크림이 올라간 술이었다.
이 조그만 게 이 가격이라니.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에 홍화가 속으로 울며 카드를 내밀었다. 그 카드 앞으로 다른 카드가 먼저 내밀어졌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편의점과 같은 상황이었다. 예쁘게 보이려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올리고 온 홍화와 달리, 새카만 캡 모자에 후드까지 눌러쓴 백영이 홍화를 내려다봤다.
“뭐 시켰냐.”
잘 안 들려서 뭐라고, 하고 되물으니 백영이 한숨 쉬며 고개를 숙였다. 살짝 튼 고개에, 입술이 귓가에 붙었다. 간지럽고 뜨거워 홍화가 어깨를 움츠리자 백영이 큰손으로 머리를 콱 움켜쥐었다. 뭐 시켰냐고, 백영이 속삭였다. 귓구멍에 바로 기어들어 온 낮은 목소리가, 쿵쾅대는 소음을 막고 고막을 느릿느릿 쓸었다. 홍화가 열 오른 귓바퀴를 벅벅 문지르며 물러섰다.
“블로우 잡!”
바텐더에게서 맥주 한 병을 건네받고 한 모금 마시던 백영이 풉, 하고 그대로 뿜어냈다. 해맑게 대답한 홍화가 백영의 반응을 낄낄대며 비웃고는 잔을 비웠다. 생크림이 입술 위쪽에 카푸치노 거품 자국처럼 하얗게 묻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마시냐.”
명백한 무시였다. 영어에 약하고, 방금 마신 술 이름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무시당하는 건 기분 나빴다.
“알아.”
“알면서 마셨다고. 그거 좋아해?”
“응.”
처음 마시는 티 내기 싫어 얼른 대답했다. 백영이 홍화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돌리면 저 눈치 빠른 녀석이 거짓말임을 알아챌까 봐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백영의 시선이 홍화의 눈에서 코끝으로, 그리고 입술로 내려왔다.
“이렇게 작아서는…….”
긴 손가락이 위로 올라와 입술 옆에 닿았다. 상상치도 못한 접촉에 홍화가 지레 놀라 고개를 홱 소리 나게 돌렸다. 백영이 홍화의 턱을 잡아 어디로 돌리지 못하게 고정하고, 엄지로 입술 위를 쓸었다.
“칠칠찮게 묻히고 다녀. 그거 좋아한다고 광고하고 다니게.”
양 볼에 열이 확 올랐다. 홍화가 백영의 팔목을 있는 힘껏 쳐냈다. 급작스레 쳐내느라 손바닥이 얼얼했다. 더러운 거라도 묻은 것처럼, 홍화가 소맷부리를 잡아 늘여다가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아무리 문질러도 타들어 가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백영이 짜증내며 쳐다봤다.
“그냥 닦아주는…….”
저기요, 하고 부르는 소리에 말이 끊겼다. 백영에게 다가온 여자들이 혹시, 하며 말문을 열었다.
“저기, 유백영 씨 아니에요?”
“아닌데.”
“맞는 거 같은데…….”
“그렇게 닮았어? 다들 닮았다 그러네.”
백영이 능청스레 대꾸했다. 조명이 어두운 데다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턱을 가려 이목구비가 선명치 않았다. 경찰처럼 신분증 까보라고 할 수도 없으니, 주장을 믿어줄 수밖에. 여자들이 유백영의 가식과 거짓에 홀랑 넘어갔다. 아닌가 봐, 하며 일행과 마주 보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도 잘생겨서 좋다며 유백영에게 팔짱을 끼고 들러붙었다.
괜히 속이 끓었다. 부아가 치밀고 멀미가 날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홍화가 후아, 크게 숨을 쉬자 백영이 홍화를 흘긋 쳐다봤다. 여자를 볼 때는 눈 끝을 휘며 곱게도 웃더니, 홍화를 볼 때는 다른 때와 똑같이 싸늘했다.
여기까지 와서 인기 자랑할 필요는 없잖아.
편의점에서도 그렇고, 클럽에서도 그렇고. 위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홍화 속만 아팠다. 열등감인지 아니면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먹구름같이 깜깜하고 우울한 감정이 위장과 가슴에 시커멓게 끼었다.
홍화가 꽉 막힌 가슴을 손으로 문지르며 애써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좀 더 느린 곡으로 바뀌자 틈을 타 사람들이 바 쪽으로 몰려들었다. 파도처럼 몰려와 홍화와 백영 사이를 메웠다.
사라지려면 지금이 적시이리라. 파티고 뭐고 다 싫어져서 주석에게 먼저 가겠다고 문자를 보내려는 참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 나타난 주석이 홍화의 팔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한참 찾았네. 허락받았다. 가자.”
백영 쪽을 돌아봤다. 여자들과 헤헤거리느라 홍화는 안중에도 없었다. 유백영도 저렇게 재미있게 노는데 저라고 못 놀쏘냐. 울컥한 홍화가 주석의 손을 꽉 쥐고 백영과 멀어졌다. 일부러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유백영보다 신나게 놀 생각만 했다.
복도 구석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왔다. 소음이 적기는 해도 쿵쿵거리는 울림은 여전했다. 담배 냄새가 섞인 흰 연기가 복도에 안개처럼 깔려있었다. 대리석 벽에는 방문이 여럿이었다. 주석이 익숙하게 앞장서며 가장 구석에 있는 방 앞에서 걸음을 세웠다. 가드까지 서 있는 방이었다.
가드가 쫙 찢어진 눈으로 홍화와 주석을 훑었다. 주석이 비굴하게 어깨를 굽히고 내시처럼 고하자 문을 열었다.
“…….”
홍화는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진한 담배 냄새는 그렇다 치고, 방 안에 펼쳐진 진풍경이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헐벗은 사람들끼리 엉켜있는 모습이 일본의 질 낮은 비디오에서 나오는 장면과 비슷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아랫도리만 안 벗었다뿐이지 이미 포르노 제작 중이었다. 성별 구분할 것 없이 짝짓기하는 뱀처럼 얽힌 모습이 가히 보기 좋지 않았다.
“형님, 잘못 온 것 같은데요…….”
“순진하긴. 맞아, 인마. 안 들어오고 뭐 해. 인사드려야지.”
테이블에 코를 박고 둥글게 만 지폐로 흰 가루를 흠뻑 들이마시던 남자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곧 죽을 사람처럼 눈 밑이 퀭하고 낯빛이 희다 못해 퍼랬다. 얼굴 곳곳에 살이 움푹 팬 곰보 자국이 있고, 헤 벌어진 입술에 치아가 노랗게 보일 정도로 누랬다.
“네가 저놈이 말한 걔냐?”
혀가 납작하게 눌린 듯 말투가 어눌했다. 뭘 보든 주석의 연식이 훨씬 높은데도 하대가 자연스러웠다. 주석이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홍화의 양어깨를 잡아다가 상품처럼 내밀었다. 홍화가 뒷걸음질 치자 못 가게 단단히 막았다.
“인사드려. 귀한 분이시다.”
“이거 놔요. 나갈 겁니다.”
홍화가 주석을 뿌리쳤다. 소파에 앉은 남자가 흥미로운 꼴 구경하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주석이 졸렬하게 굽실거리더니 홍화의 멱살을 잡고 문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야, 이 씨발, 내가 허락받으려고 저 새끼들 똥구멍을 얼마나 빨았는데 여기서 내빼. 사람 정성을 이렇게 무시하기야?”
“형님. 저 꼴을 보고도 방에 붙어있으라고요? 미쳤어요? 싫습니다.”
“내가 몸 팔라고 했어? 그냥 술 한 잔만 같이 먹어주면 되는 거야. 내가 이 판 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네가 그걸 물거품으로 만들려고 해. 야, 이홍화.”
주석이 머리카락을 헝클며 욕을 짓씹어 뱉었다. 가드가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자 홍화의 손목을 잡고 구석으로 질질 끌고 갔다. 홍화가 내치려고 해도 아이 혼내듯 씁, 눈을 부라리며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싫습니다. 이거 놔요.”
“야, 내가 저 사람들한테 너 팔러 데려온 거 같냐. 저 사람들, 다 너 오디션 합격한 거 알고 축하해주려고 온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해. 이 씹…….”
화가 치밀자 말도 짧아졌다. 뒤에 붙어 나오던 욕설은 간신히 참았다. 홍화의 흉흉한 분위기를 읽은 주석이 태세를 전환했다. 연기인지 진심인지 모를 간절한 표정으로 홍화를 붙들고 늘어졌다.
“홍화야, 딱 한 번만 봐줘라. 그냥 술 한 잔만 마셔주고 가면 돼. 너 내가 이 바닥에서 매장되는 거 기어이 보고 싶어서 그러냐. 나 좀 살려주라. 너 아님 나 죽어. 나 진짜 살고 싶다. 나, 거지 같은 단역만 오 년째야. 바닥만 기다가 이제야 햇빛 좀 비치는데 홍화 네가 이러면 안 되지. 응? 술 딱 한 잔만. 그것만 하고 가면 돼. 한 잔만 마시면 사람 하나 살려주는 거야.”
주석이 사정사정했다. 홍화가 냉정하게 내치고 가려 하니 갑자기 무릎까지 꿇더니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며, 여기서 네가 그냥 가면 그간 쌓은 신뢰 잃고 다시 단역 신세라며 꺼이꺼이 울었다.
냉정하게 내치고 가야 하건만, 무명의 서글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 주석을 발로 찰 수 없었다. 저는 중간에 군대로 도망치기라도 했지, 주석은 수년째 바닥 신세였다. 주석이 얼마나 고된 차별을 겪었는지, 구구절절한 사연을 옆에서 보고 듣지 않았던가.
“딱 한 잔만. 제발, 홍화야.”
그깟 한 잔. 아까 마신 술처럼 홀딱 마시면 끝날 일이다.
“……한 잔만. 딱 한 잔만 마시고 갈 겁니다.”
주석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벌떡 일어나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 홍화가 가슴 깊이 한숨을 끌어올려 내쉬는데도 주석은 기쁘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홍화는 침대 쪽으로 눈이 가지 않게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정면만 쳐다봤다. 뒤에서 포르노 뺨치는 신음에 처덕처덕 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체했다. 일부러 테이블만 죽으라고 노려봤다. 양주, 얼음 통, 흰 가루, 바늘이 휘어진 주사기, 결정이 말라붙은 숟가락, 노란 껍질을 입은 약병과 색색의 알약들, 안주들을.
술 한 잔. 딱 한 잔.
“예쁘게 생겼네.”
옆에 앉은 남자가 홍화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두르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입에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손이 어깨를 넘어 팔뚝으로 실뱀처럼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희롱하는 손길이 징그러워 홍화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소파 구석으로 물러났다.
“한 잔만 마시고 갈 겁니다.”
“거기다 귀엽기까지.”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홍화가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혹, 탁자 위를 굴러다니는 약이 들어갔을지 몰라 유리잔 안을 자세히 살폈다. 투명한 금색 액체에 기포만 뽀르르 올라왔다.
남자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어서 마시고 한시라도 바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홍화가 유리잔에 입술을 대고 꿀꺽꿀꺽 삼켰다. 한 번에 다 비우고 나서 입을 닦으며 일어났다. 약속대로 한 잔 마셨으니 주석도 더는 붙잡지 못할 것이다. 남자가 억지로 벗긴 외투를 챙겨 들고 문 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순간, 머리가 어찔했다. 양탄자가 너울처럼 꿀렁이더니 위로 훅 올라왔다가 꺼졌다. 눈을 깜박이고 나니 무릎은 꿇려 있고 힘 풀린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잡아.”
가만히 쳐다보던 남자가 다른 이들에게 명령했다. 사냥개 토끼몰이 하듯 점점 포위망을 좁힌 남자들이 홍화의 양팔을 낚아챘다. 이거 놓으라고 발버둥 쳐도 그럴수록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물에 걸려 날뛰는 짐승 보듯이, 남자가 킬킬대며 비척비척 걸어왔다. 홍화가 다급히 주석에게 도와달라고 외쳤으나 소용없었다. 주석은 홍화와 분명 눈이 마주쳤음에도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긴, 이 소굴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 도움의 손길을 줄 리 없었다.
“팔팔하네. 그래, 너도 할 맘이 들긴 해야지.”
남자가 홍화의 코밑에 작은 약병을 들이댔다. 노란색 껍질로 둘러싸인 작은 약병에서 알 수 없는 향이 났다. 홍화가 숨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홍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뒤로 잡아당겼다. 홍화가 남자를 차려고 발을 뻗었다가 옆에 있는 이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가 득달같이 그 위에 올라타 홍화의 코 위에 기름 같은 액체를 뚝뚝 떨어트렸다.
“읍……!”
“나쁜 거 아니야. 얌전히 있어.”
최대한 숨을 참자 남자가 홍화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것을 내리누르고, 한참 후에 코만 놔줬다. 막혔던 숨을 힘껏 들이마시자 노란 약병에서 향이 훅 끼쳐왔다. 머리가 어찔한 향이었다. 두 번, 세 번 깊게 마시자 호흡이 거칠어지고 시야가 까마득해졌다가 물속처럼 울렁였다. 벗어나려고 했으나 헛발질만 거푸 나갔다.
바르작거리던 홍화가 축 늘어지자 남자가 히죽 웃었다. 약병을 던져놓고 윗도리를 밀어 올렸다. 얄팍한 배와 늘씬한 옆구리가 테이블에 놓인 가루처럼 희멀갰다.
입술을 대려는 그때 쾅, 하고 문밖에서 부딪치는 소음이 끼어들었다. 쿵, 문이 또다시 지진처럼 흔들렸다.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 문 쪽을 바라봤다.
쾅, 세 번째였다. 문이 열렸다. 긴 다리가 문을 박찼다. 열린 문틈으로 가드가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새까만 마스크에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안을 쭉 둘러보더니 널브러진 홍화 위에서 시선이 멎었다.
“잘든 논다.”
입술 끝을 비뚜름히 밀어 올린 백영이 빈정댔다. 백영은 마치 초대받은 일원인 양 자연스레 방 안에 들어서서 문부터 걸어 잠갔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 누구냐고 묻지도 못했다.
백영이 여유롭게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홍화 위에 앉아있던 이부터 걷어찼다. 그제야 다른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백영에게 달려들었다. 백영은 당황하지도 않았다. 대신 옆에 놓인 꽃병을 들고 달려든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다. 꽃병이 와장창 깨져 바닥에 흩어졌다. 머리를 후려 맞은 남자가 소리도 못 지르고 쓰러지자 그다음엔 같이 달려든 이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우두둑, 생뼈 어긋나는 소리가 나며 남자의 팔이 기이한 모양으로 꺾였다. 꺽꺽거리며 비명을 지르자 백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발로 남자의 명치를 걷어찼다. 얼마나 거세게 발길질을 했는지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여자들과 남자 두셋은 뒷문으로 이미 꽁무니 빠져라 도망갔고, 주석만 미처 튀지 못하고 구석에서 벌벌 떨었다. 백영이 상황 파악 못 하고 해롱대는 이까지 마저 기절시키고 나서 홍화 쪽으로 다가왔다. 홍화에게 약을 부었던 남자가 깨진 꽃병 조각을 칼처럼 들이밀며 벌벌 떨었다.
“너, 너 뭐야.”
진부한 대사였다. 백영이 남자 앞에 쪼그려 앉아 가만히 그를 굽어보았다. 말없이 쳐다보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 하고 남자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꽂아 넣었다. 빗질하듯 느리고 친절하게 쓸어 넘기다가 불시에 뒤통수를 콱 움켜잡았다.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백영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잡아당겼다.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릴 듯이 쥐고서 테이블까지 질질 끌고 갔다. 남자가 손목을 쥐고 별짓을 다 해도 악력이 워낙 강해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백영이 남자를 소파 위에 내동댕이쳤다. 남자가 온갖 욕을 하며 손발을 휘저었다. 약과 술에 취한 주제에 반항하면 얼마나 하겠다고. 백영이 비웃으며 남자의 머리를 쥐고 테이블 위로 내리눌렀다. 남자의 코가 흰 가루를 볼록하게 쌓아놓은 더미 위에 납작하게 짜부라졌다. 폴폴 날리는 흰 가루에 남자가 쿨럭쿨럭 요란하게 기침을 해댔다.
“마셔.”
남자가 충혈된 흰자위를 번뜩이며 욕만 뱉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네가 이러고 무사할 줄 아냐며 흡사 악당 같은 대사만 짓씹었다.
“다 들이마시라고. 못 하겠어?”
친구에게 술 한 잔 권하듯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손길만 달랐다. 그악스러운 손길로 남자의 머리채를 쥔 백영이 종이를 고이 잘 접어 가루를 모았다. 남자의 고개를 뒤로 넘기고 턱을 쥐어 입을 벌렸다. 백태 낀 혓바닥 위에 가루를 탈탈 털어 넣고 개에게 약 먹이듯 윗머리와 턱을 잡아 위아래로 압박했다.
“옳지, 그래. 이제 잘 먹네.”
입이 막힌 남자가 온몸을 떨어대며 기침했다. 콧구멍으로 가루가 넘어갔는지 흰자에 시뻘건 핏줄이 어리고 눈물이 고였다. 백영은 남자가 괴로워서 아등바등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옆에 놓인 양주 주둥이를 쥐었다.
“참, 마실 것도 줘야 하는데 내가 깜박했네.”
백영이 남자의 입을 다시 벌리고 양주병 주둥이를 꽂았다. 사약을 먹이는 것처럼, 거위 간을 키우려고 음식물을 쑤셔 넣는 것처럼 가차 없이 부었다. 양이 상당해 쇼크가 올지도 모르나 백영은 관심 없었다. 오히려 과다 복용으로 죽으면 증거 인멸도 되고 좋았다. 약 하다 죽은 약쟁이, 잘 나가는 도련님인들 추한 죽음을 누가 밝히려 들까. 삼류 잡지 구석에 한 줄 실리고 말겠지.
남자의 눈이 흐리멍덩히 빛을 잃었다. 백영은 경련하는 남자를 소파에 내팽개치고 남은 양주로 손을 씻어냈다. 묻은 술을 툭툭 털어내고서 홍화에게 다가갔다.
발끝으로 툭 쳐도 신음만 흘린다. 마신 술에 물뽕이나 엑스터시라도 섞었나 보지. 등신같이 쫄래쫄래 따라 들어와서 정체 모를 술이나 넙죽넙죽 받아 처마시다니, 한심함이 도가 지나쳐 욕도 안 나왔다.
백영이 쯧, 혀를 차며 홍화를 어깨에 짊어졌다. 구석을 돌아보니 모두 다 지켜본 주석이 흡사 귀신 본 얼굴로 달달 떨고 있었다.
“못 본 걸로 쳐요. 입도 다물고. 그럼 포주 짓 한 거 한 번은 눈감아줄게.”
대신 다음에 걸리면 목이 날아갈 거란 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주석은 알아들었다. 주석이 턱이 떨어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백영이 정신을 잃은 채로도 싫다고 웅얼대는 홍화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 ∞ ∞
몸이 뜨겁다. 미열이 이마에서 치솟다가 발톱까지 물들였다. 깨알 같은 개미들이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듯 가려웠다. 팔뚝과 목을 긁다가 팔을 바닥으로 툭 떨어트렸다.
힘이 없었다. 목도 말랐다. 간신히 목구멍을 쥐어짜 물, 하고 중얼대니 입술에 물통 주둥이가 닿았다.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물부터 꼴깍꼴깍 삼켰다. 혀가 굳어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턱 밑으로 흘리는 양이 더 많았다.
‘손이 많이 가네.’
누군가의 손등이 턱을 닦고 지나갔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정체를 확인하고 싶건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 잘 보이지 않는다. 독한 감기에 시달리는 것처럼 몸이 들떴다.
몸이 이상해.
긁어도 간지럼증이 남아있다. 개미 한 마리를 잡으면, 복수하듯 수십 마리가 올라와 그 자리를 작은 발로 짓밟고 지나갔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감각이 허벅지 안쪽으로 자꾸만 몰려갔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야한 장면을 맞닥뜨린 것처럼 다리 사이가 욱신댔다. 남에게 들킬까 봐 힘겹게 몸을 굴리고 옹송그렸다. 어깨가 잡히고, 바닥에 눌렸다. 등 뒤에 닿는 바닥이 물 채운 튜브처럼 꿀렁였다.
‘뭐 주워 먹었어. 아님 주사?’
주워 먹은 것도, 주사도 아니었다. 꽃 향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던 노란 약병이었다. 입을 열었지만 뻐끔거리기만 했다. 툭, 툭 하고 손바닥이 뺨을 두드렸다. 제법 힘이 들어가 뺨이 얼얼한데도 정신은 여전히 혼미했다. 아픔이 짜릿했다. 살갗이 닿는 자체가 야릇했다.
노란, 노란 약…….
‘다른 건 안 했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퍼poppers까지.’
그게 뭔지 몰랐다. 뺨에 손이 닿았다. 아까보다 세게 후려칠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은지 살펴볼 것처럼, 손바닥이 천천히 이마를 덮었다. 온화한 손길이었는데도 눈물이 났다. 이 손으로 뺨을 만져줬으면 좋겠다. 목을, 가슴을, 그 아래를 부드럽게 쓸어줬으면 좋겠다. 피부 아래를 기어 다니는 개미들을 짓눌러 없애줬으면 좋겠다.
이마에서 떨어지려는 손을 잡아 뺨을 기댔다.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팔에 매달렸다. 딱딱하게 굳은 손목과 아래팔을 쓸어 올렸다. 그 위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다.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도와줘.
물을 바랐을 때만큼 간절하게 속삭였다. 당장 유일하게 바라는 소원이었다. 이뤄만 준다면 그가 누구든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리라. 미동 없는 팔을 뱀처럼 휘어 감고는 몸을 기댔다. 얼굴에 닿는 어디든 고양이처럼 애타게 비비며 도와달라고 가늘게 울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달라붙냐.’
몰라. 몰라도 상관없잖아. 네가 누구든.
팔이 떨어져 나갔다. 싫었다. 그 팔만이 구원이었다. 더듬거리며 따스했던 손을 찾았다. 우악스레 머리카락이 잡혔다. 두 손으로 허우적거려도 머리카락을 움켜쥔 팔목이 잡히지 않았다. 바닥에 뒷머리가 처박혔다. 하체 위에 묵직한 바윗덩이가 올라탔다. 저를 바닥에 압사시켜버릴 듯이 짓누르고 뭉갰다. 그것조차 자극이었다. 아래가 불쑥 치밀었다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나른하지 않았다. 모자랐다.
‘누구든 상관없다고. 하긴. 네가 이런 인간인 걸 그간 깜박했어. 즐기려고 제 발로 들어갔을 텐데, 내가 눈치가 없었네.’
올라탄 게 이빨 드러낸 늑대였다. 눈물이 가린 시야에 흰 이만 보였다. 무서워서, 발꿈치로 발에 닿는 모든 걸 밀고 버둥거렸다. 위에 올라탄 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와달라고 손 내민 곳이 독사 밭일 줄은. 늑대가 드러난 목덜미를 물었다. 송곳니가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피부 아래로 박혀들었다.
배 속이 아팠다. 아랫배를 손으로 움켜쥐고 꾹 눌렀다. 손바닥에 얼핏 느껴지던 윤곽이 바깥으로 쑥 빠져나갔다가 다시금 치고 들어왔다. 아프고 야했다. 몸이 제멋대로 흥분하며 발가락과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오동통한 엉덩이에 힘이 쫙 들어가고 보조개가 움푹 패더니, 아랫배 부근에 희끄무레한 정액이 튀었다. 시트도 손등도 축축하다.
도망가려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을 남자가 막았다. 허리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찍어 누르고 궁둥이만 천장 높이 들어 올렸다.
“아, 아흐, 아, 아……! 제발, 으, 응!”
“시끄러.”
매정한 목소리가 서글펐다. 홍화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베갯잇에 이마를 비볐다. 훌쩍이며 우는데도 봐주지 않았다. 울지 말라고 달래는 말도 없었다. 구멍만이 목적인 것처럼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끝까지 나갔다가 한 번에 들어오면, 서글퍼서 울다가도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배꼽 위쪽까지 아팠다. 제발 살살 해달라고, 살려달라고, 개미들 다 죽었다고 팔목을 붙들어도 냉정하게 내치고 찔러댔다.
구멍 근처 살이 통통하게 부어올라 부딪칠 때마다 쓰라린데도, 철벅거리는 소리가 귓구멍을 뚫을 때마다 아래 기둥이 물을 머금었다. 이제 더 쌀 정액도 없었다. 흰 물은 몇 번이나 뱉어서 찔끔찔끔 새어 나가는 정액엔 색이 거의 없었다.
“흐, 으읏, 읍-……!”
소리를 내면 죽일 것처럼 박아서 잇새에 베갯잇을 물고 참았다. 뱀 대가리 같은 것이 안을 헤집을 때마다 조막만 한 불알이 더욱 쪼그라들었다. 뱉을 액이 없어서 기둥만 말랑말랑 살찌우고 대가리 끝에 반투명한 물방울만 매달았다.
몸이 뒤집혔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앉은 남자가 태산처럼 거대했다. 어두운 그림자가 무서워 두 손으로 남자의 아랫배를 밀었다. 손바닥에 닿은 살갗이 단단하고 울룩불룩했다. 남자가 보답하듯 부은 속살을 비집고 들어왔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치켜든 기둥 끝이 버르르 떨렸다. 안으로 파고든 대가리가 속살 어느 부분을 꾹 누르면 온몸이 물기를 쥐어짜내 기둥 끝으로 밀었다.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절정인데도, 기둥 끝에서는 어느 물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마른 절정이었다.
홍화가 엉엉 울면서 그만하라고 사정했다. 약 기운은 다 가셨다. 약을 사발로 들이부었어도 그간 싼 정액으로 다 빠져나갔을 터다. 죽을 것 같은 홍화를 밑에 깔고 남자가 일부러 더 깊게, 불알까지 처넣을 것처럼 틈 없이 들어왔다. 비좁은 구멍에서 질컥이며 액이 새어 나와 탄탄한 허벅지와 벌겋게 익은 홍화의 엉덩이 위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흰 가슴팍에서 혼자 색 있는 젖꼭지를 잇새로 잘근잘근 씹고, 따 먹을 기세로 쪽쪽 빨았다. 꼭지에 바늘로 콕 찍은 점처럼 핏물이 올라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홍화가 팔다리를 버둥대며 울었다. 눈 밑도 구멍 주위처럼 붉게 익었다. 살려달라는 의미 없는 호소만 반복했다.
“다, 쌌어. 안 나와. 이제, 다 싸서, 더, 는, 못…….”
팔뚝이 잡혀 강제로 일어났다. 남자의 허벅지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무릎으로 앉아있었다. 안 돼, 홍화가 눈만 커다랗게 뜨고 백영을 바라봤다. 죽을 거야. 죽이지 마. 안 돼, 안 돼. 입술을 후덜덜 떨며 남자의 어깰 쥐고 고개를 흔들었다.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턱이 잡히고, 입술이 입술 위를 배회했다. 애교를 떨면 살려줄까, 희망을 갖고 입술을 벌렸다. 혀로 입술을 핥으려는 그 순간에 양손에 엉덩이를 잡혔다. 벌어졌다. 굵은 장대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기둥 위에, 그대로 주저앉혔다.
“……―!”
단번에 쑥 들어왔다. 반만 들어와도 배 속을 가득 채우는 기둥이 제 굵기, 제 길이를 모르고 깊숙한 안까지 다 들어왔다. 홍화가 칼 찔린 사람처럼 입술을 벌렸다. 숨이 막혔다. 아무리 입을 벌려도 숨통이 트이지 않았다. 흰자가 위아래로 보일 만큼 크게 벌어진 눈에서 눈물이 빼곡하게 차오르더니 볼 위로 후드득, 후드득 떨어졌다. 신음도 못 지르고 어깨 쥔 손가락만 굽혔다. 손톱이 힘줄 선 어깨를 빠득빠득 긁었다.
하얗게 번진 시야에 웃는 입매가 들어왔다. 미소가 비소誹笑였다. 붉은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혀가 입술보다 붉고 가지런한 이가 하얬다.
홍화가 죽음을 앞둔 것처럼 숨만 깔딱거렸다. 남자가 그런 홍화의 머리를 쥐어 옆으로 잡아당기고는,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다. 아직도 벌벌 떠는 홍화를 굳세게 안고서 맥이 팔딱이는 목선을 부드럽게 빨아올렸다. 홍화의 손이 남자의 어깨에서 등으로 움찔거리며 기어 내려갔다.
콰득, 하고 여린 살갗 위로 피가 배어 나왔다. 흰 송곳니가 붉게 익은 살을 찢고 만족스레 빠져나왔다. 홍화가 남자의 어깨에 이마를 박고 입을 벌렸다. 남자가 손바닥으로 홍화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그 안에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고통이, 통증이, 쾌락이 내장을 싹싹 훑고 지나갔다. 배 속에 그득한 것이 더 부풀어 올랐다. 틈 없는 속살이 굵다란 장대를 쥐어짰다. 맑고 투명한 물이 홍화의 기둥 끝에서 정액처럼 뿜어져 나왔다. 허벅지가, 어깨가, 뱃가죽이 가늘게 떨렸다. 오줌처럼 질질 흘러나온 물줄기가 남자의 뱃가죽을 적시고 홍화의 허벅지 안쪽을, 샅을 적셨다. 남자가 낮게 신음했다. 홍화의 배 속도 젖었다. 정액이, 젤이 가득한 내장이 다시금 새로이 젖었다.
남자가 손을 놓자 홍화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절정이 채 가시지 않은 사람처럼 입술을 바르르 떨며 숨만 쌕쌕 쉬었다. 활짝 벌어진 다리 틈으로, 몸이 이어진 틈으로 액이 차고 넘쳤다.
남자는 몸을 뒤로 물리지 않았다. 꿈지럭거리는 홍화의 다리 한쪽만 어깨에 걸쳤다. 끝난 사람은 홍화 홀로였다. 홍화가 넋을 잃은 눈으로 올려 봐도, 그만하라고 온몸으로 말해도 상관없었다. 뭐라 말하든 상관없는 사이, 딱 그 정도 사이였다.
∞ ∞ ∞
“어윽…….”
머리통이 깨질 것 같았다. 누가 드릴로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조져댔다. 뇌가 토끼 뜀박질하듯 쿵쿵댔다. 시끄럽고 아파서 머리통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이를 악물고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귓속을 먹먹하게 만든 두통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불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에 허리를 폈다. 이불 바깥으로 고개를 빼고 주변을 둘러봤다. 천장도, 이불도 모두 낯설다.
제집이 아니다. 모텔도 아니었다.
어젯밤 기억이 희미했다. 축하 파티 한다고 클럽에 갔고, 백영을 만났고, 주석을 따라간 다음은 까마득했다. 이상한 방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매캐한 냄새와 연기만 어렴풋이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홍화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으윽, 하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두통이 가시니 몸의 통증이 뒤따랐다. 허리도, 허벅지 안쪽도, 엉덩이와 구멍과 구멍 안쪽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목덜미와 젖꼭지마저도 뜨끔했다.
이 익숙한 고통은 분명.
이불을 젖히고 보니 알몸이었다. 추측이 확신이 되었다. 누군가와 밤을 보냈다. 옆자리에 있었으면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안심을 하든, 죽여서 증거 인멸을 하든 선택이나 하지,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니 불안하고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두리번거리며 옷가지를 찾았다. 침대 밑에 흩어져 있었다. 간신히 허리를 굽혀 옷을 주워 들고, 수전증 환자처럼 발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껴입었다. 몸부터 씻고 싶지만 누구 집인지도 모르기에 탈출을 우선순위에 뒀다.
절룩거리며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이 넓디넓었다. 언젠가 성공하면 가지겠노라 꿈꿔온 집이었다. 그러나 정경을 구경할 새는 없었다. 정신없어 몰랐던 담배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공기청정기가 벌건 불을 번쩍거리며 돌아가도 모든 연기를 삼키지는 못했다.
쿨럭거리며 연기가 새어 나오는 곳을 바라봤다. 너른 소파 위로 검은 머리통이 우뚝 솟아있었다. 흰 연기의 출처가 거기였다.
창문이나 열고 피울 것이지.
침실 문을 여는 순간 어젯밤 살갗을 맞댄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쿵쾅거리며 뛰던 가슴이 잠잠해졌다.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도 나왔다.
안도라니.
유백영과 자고 안도라니.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감정이었다. 홍화는 뺨을 짝짝 때리며 집 나간 정신을 끌고 오려 애를 썼다. 아무래도 어젯밤 겪은 일이 워낙 충격적이라 감정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는 모양이었다.
백영은 홍화가 나온 걸 알았을 텐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담배만 마저 피웠다. 실내에서 금연 아니던가. 물으려다가 뒤통수만 긁적였다. 제집에서 뭘 하든 주인 맘이지 손님이 지적할 게 아니었다.
돌아볼 생각을 안 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연기가 잦아들었다. 담배를 비벼 끈 백영이 드디어 일어났다. 헐렁한 바지만 걸쳐 입고 상체를 헐벗었다. 빛 아래 드러난 몸이 시합을 앞둔 선수처럼 팽팽했다. 시선이 너른 가슴과 나눠진 복근과 통나무처럼 튼튼한 옆구리와 가슴통, 저가 매달려 울었을 탄탄한 팔뚝을 훑고 올라갔다.
변태도 아니고.
기분이 묘했다. 새삼스레 부끄러웠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침대 위에서의 기억은 뜨문뜨문 이어졌다. 몸의 상태를 보건대 아마, 기억보다 더 진한…….
“크흠.”
아침부터 낯붉히고 싶지 않다. 홍화가 고개를 돌려 잘 익은 얼굴을 숨겼다. 백영이 빤히 쳐다봤다. 혹시 데려다준다고 하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여야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능청스레 묻고, 기억이 없다고 우겨야지. 여우 같은 바람을 품고 백영을 마주 봤다.
백영이 다가왔다. 심장이 두근, 두근 뛰는 소리가 귀 밑까지 올라왔다. 옷을 입었을 때보다 더욱 넓고 든든해 보이는 어깨에 손톱자국이 남아있었다. 홍화 자신이 남겼으리라. 적나라한 증거였다.
백영이 바로 앞에 섰다. 내려다보는 눈에 피곤이 묻어있다. 백영이 잠시 다른 곳을 보았다. 머리를 쓸어 올렸고, 한숨을 지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까만 지갑을 꺼냈다. 두툼한 지갑에서 지폐를 다발로 꺼내 홍화의 코트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택시비. 잘 가라.”
백영이 홍화의 어깨를 툭, 툭 느리게 두드렸다. 홍화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주머니 위로 노란 지폐 모서리가 삐져나왔다. 멍한 홍화 뒤로 침실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홍화는 멍청하게 서 있었다.
홍화는 택시를 타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왔다. 바닥이 덜컹거릴 때마다 온몸이 쑤셨으나 몸의 고통이 멀게 느껴질 만큼 정신이 황망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빳빳한 지폐가 다발로 만져졌다. 돈을 주던 백영의 표정이, 얼굴이, 눈빛이 눈앞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집에 기어들어 와 기계적으로 옷을 벗었다. 샤워기 밑에 쪼그려 앉아 상흔이 남은 몸을 씻었다. 개미가 기어 다니다가 물고 간 것처럼 벌건 자국이 온 곳에 꽃처럼 피었다. 젖꼭지는 건포도가 술독에 빠진 듯 부풀어서 물줄기가 닿기만 해도 쓰라렸다.
몸을 씻고 이불 위에 누웠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명식에게서 온 문자, 부재중 통화, 스팸 문자, 그런 것들만 가득했다. 핸드폰을 툭 던졌다. 하필이면 코트 위였다. 코트를 가까이 잡아당겼다. 지폐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고 다 끄집어냈다. 택시비로 차고 넘치는 금액이었다. 두께가 상당했다. 얼마인지는 따져보지 않았다.
“……씨발.”
목소리가 쉬었다. 어젯밤 내내 소릴 질러댔을 테다.
손톱으로 어깨를 긁고 등짝을 긁어댔겠지. 구멍을 내주고, 싸지르고, 몸에 매달려 교성을 질러댔겠지. 수퇘지처럼 꽥꽥거리며 침대 위를 굴러다녔겠지. 싸달라고 졸랐겠지. 돈 받은 만큼은 했을 테지. 돈 받은 만큼 정액을 싸게 했겠지!
“씨발!”
손에 든 돈을 허공에 집어 던졌다. 지폐가 위로 훅 날아갔다가 홍화의 몸 위로 나풀나풀 떨어졌다. 지폐 한 장, 한 장에 백영의 얼굴이 그려졌다. 싸늘하게 바라보던 그 얼굴이, 화대를 치르고 내쫓던 그 얼굴이. 전처럼 전화를 걸고 욕을 퍼부으면 기분이 나아질까. 그럴 리가. 멱살을 쥐고 주먹으로 후려쳐도 앙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빚을 갚으라 요구하고, 물에 빠진 절 구해주고, 집에 데려다주고, 밤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화대를 줬다.
전보다 비참했다. 백영과 처음 밤을 보낸 그 날보다 처참했다.
“…….”
눈 위로 지폐가 떨어졌다. 치우지 않았다. 잡기도 싫었다.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홍화는 시체처럼 미동 없이 누워있었다. 가슴팍도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다.
죽은 듯이 있다가 나중에서야 눈 위에 있는 지폐를 집어 들었다. 젖어있었다.
∞ ∞ ∞
의욕이 사라졌다. 다 하기 싫었다. 숨 쉬는 것도 귀찮았다. 다른 오디션은 아예 알아보지도 않았다. 간신히 얻은 드라마 대본도 읽는 둥 마는 둥 손에만 쥐고 있었다. 극단에 가서도 우울한 기운만 뿜어대니 다른 이들이 차라리 집에서 쉬라며 등을 떠밀었다.
집마저도 싫었다. 순찰 도는 횟수가 많아졌어도 변태는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면 어김없이 선물처럼 창 앞에 다 쓴 콘돔이 늘어져 있었다. 홍화가 경찰에 신고하고 게시판에 글을 남긴 사람이란 걸 알아챈 듯 홍화네 집 우편함에 욕설이 담긴 쪽지와 면도칼도 넣었다. 빨간 펜으로 ‘걸레 같은 년’이라고 적어놨는데, 천박한 욕이 묘하게 제 상황과 맞아떨어져 무섭지 않고 그저 웃기기만 했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며칠 후에 기억이 났다. 주석을 따라 높은 님들이 있다던 방에 들어갔고, 붙잡혀서 이상한 약 냄새를 맡았다. 깨어보니 침대 위였고, 백영과 몸을 섞었고, 돈을 받고 쫓겨났다. 자초지종을 알고 화를 내려고 주석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주석의 행방을 캐물어봐도 어느 순간 안 보인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다 얼간이 같은 제 탓이다. 아무리 사정해도 한 잔만 마시고 간다며 무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운이 나빴다고 넘어가려 해도,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아둔 돈뭉치를 떠올리면 풀리지 않는 울화가 울컥울컥 치솟았다. 무대 바닥을 닦다가도 손길이 거칠어지고, 가만히 있다가도 뭘 잘못 먹은 사람처럼 콧구멍을 벌렁대며 씨근덕거렸다. 종잡을 수 없는 홍화의 상태를 지켜보던 윤진이, 참다못해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아니긴. 다 털어놔 봐. 누나가 들어줄게.”
홍화가 입술을 앙다물고 바닥을 쏘아봤다. 거기에 원인 제공자의 얼굴이라도 있으면 구멍을 뚫어버릴 것처럼 집요하게. 윤진이 혀를 차며 홍화를 인적이 드문 자판기 근처로 끌고 갔다. 술이라도 조금 들어가면 술술 불겠으나, 어느 날부터인지 홍화가 술자리를 모두 마다하고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뽑아 건네자 홍화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누가 보면 커피가 아니라 구정물을 건네줬다 여길 얼굴이었다.
“말은 안 해도 다들 네 걱정하느라 정신없다. 극단 물 흐리지 말고 말해봐. 털어놓으면 좀 괜찮아질 거야.”
윤진이 부추겼다. 이렇게 찔러대는데도 입을 열지 않으면 본인이 뭐라 하든 술을 먹일 작정이었다. 윤진이 은근하게 타이르자 홍화가 머뭇거리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내 친구 이야긴데.”
본인 이야기구먼. 윤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걔가 어떤 인간이랑 잤는데, 그 인간이 돈을 줬대. 택시비 하라고 준 건데 액수가 너무 커서…… 화대 같았대.”
오죽 답답했으면 말문 열기 무섭게 줄줄이 쏟아진다. 윤진이 남 이야기 듣듯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래? 근데 그걸 네가 왜 걱정해. 그 친구 문제지.”
“아, 친한 친구니까 그러지. 가족 같은 친구라 걔 고민이 내 고민이야.”
“먼 곳에 사는 줄 알고 많이 줬나 보지. 그냥 땡 잡았다 하고 가지면 될 것을.”
“돈이 땅끝까지 몇 번 왕복하고도 남는 액수였다니까.”
홍화가 식은 커피를 홀딱 비우고 종이컵 테두리를 잘근잘근 씹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치미는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씩씩댔다.
“그럼 남은 금액은 돌려주고 끝내라고 해. 뭐가 그리 큰 문제야. 따먹히고 버림받은 기분이라?”
“미친, 아냐!”
홍화가 꽥 소릴 질렀다. 얼굴은 물론 꽉 쥔 주먹의 손등까지 빨갛다. 윤진이 얼얼한 귀를 막고서 거참 한 몸 같은 친구라며 빈정댔다. 홍화가 이내 주먹을 풀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소릴 질러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아니면 그 친구, 그 사람을 좋아하기라도 한대?”
홍화가 고개를 저었다. 고갯짓이 끄덕임과 헷갈릴 만큼 미약했다.
“그런 거 아니면 돈 돌려주고 끝내라 그래. 찝찝하지 않게.”
“역시…… 그게 최선이겠지.”
본인이 생각한 바와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홍화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입술서 샌 한숨이 짙고 무거웠다. 윤진은 커피를 홀짝이며 홍화의 면면을 살폈다. 소매가 내려와 드러난 손목이 전보다 야위었다. 통통하던 볼살도 빠져 턱선이 날카롭게 살아났고, 보기 좋게 살이 올랐던 몸도 전보다 홀쭉했다.
살 빼기에 맘고생이 최고라지. 윤진은 남은 커피를 마저 털어 넣고 뭘 해도 불쌍한 홍화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마른 어깨가 한없이 축 처져 있었다.
계약서를 받았을 땐 곧장 길길이 날뛰며 연락했건만, 정작 전화해야 할 순간이 오니 망설임이 컸다. 백영의 번호만 화면에 띄우면 왜 이렇게 방이 지저분해 보이는지. 대본은 왜 이렇게 잘 읽히고 설거짓감이며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지. 다른 일을 먼저 처리하고 핸드폰을 돌아보면 화면이 꺼멓게 죽어서 그 번호를 다시 띄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백영도 유백영이었다. 택시비 명목으로 돈을 줬으면, 사람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 겸 문자라도 한 통 보낼 것이지 여태껏 깜깜무소식이었다. 먼저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싶다가도, 그러다 영영 돈을 돌려줄 기회가 사라질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고사 지내는 사람처럼 핸드폰을 앞에 두고 며칠을 고민했다. 아침에는 해야지, 청소하고 할 거야, 점심은 먹고 하자, 졸리니 일단 자고 내일 아침에는 꼭…….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덧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돈은 여태껏 서랍에 처박혀 있었다.
낮잠을 실컷 자고 일어났더니 저녁이었다. 이제 방이 더럽지도, 졸리지도 않았다. 제 몫의 대사도 다 외웠다. 더는 미룰 핑계가 없었다. 홍화는 마음을 굳게 먹고 핸드폰을 들었다. 자는 동안 전화가 올지도 몰라 음량을 최대한 높이고 잤으나 쓸모없는 수고였다.
이제는 외울 만큼 익숙한 번호에 전화를 걸며 두 눈을 꾹 감았다. 받길 바라는 마음 반, 안 받길 바라는 마음 반이었다. 받으면 뭐라고 할지 머릿속으로 바쁘게 정리하며 신호음을 들었다. 고요한 방에 귀를 뚫는 신호음이 천둥 같았다.
단조로운 음만 계속 뚝, 뚝 흐르다가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낭랑한 안내가 나왔다. 고마운 동시에 기운이 쭉 빠졌다. 홍화는 핸드폰을 멀리 던지고 굴 파고드는 토끼처럼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바쁘면 안 받을 수도 있지. 수신 차단 안 한 게 어디야. 아니다. 차단이라니. 저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잘못은 돈 가지고 사람 바보 취급한 유백영이 했지.
우울했다가, 감정이 격해졌다가 그래프의 곡선이 파도처럼 울렁였다. 속도 울렁이며 멀미가 나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속이 답답해져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쳤다. 돈 받은 다음 날부터 생긴 증상이었다. 유백영을 떠올리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우울했다. 속을 그리 박박 긁어대더니 긁어낸 자리에 기어이 울화병을 심고 갔다.
이 일을 해결하려면 윤진의 말마따나 돈을 돌려주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홍화가 이를 바드득 갈고 다시 핸드폰을 쥐었다. 전화를 걸려는데, 홍화가 뭘 할지 미리 안 것처럼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며 크게 울었다. 화들짝 놀란 홍화가 뜨거운 돌멩이 쥔 듯 핸드폰을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후다닥 물러나 벽에 등을 딱 붙이고 핸드폰을 쳐다봤다. 가슴이 심하게 벌렁댔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니 식은땀까지 났다.
홍화가 두 손바닥을 옷자락에 쓱쓱 닦았다. 달군 돌이라도 집으려는 참이었다. 요란하게 울던 벨 소리가 뚝 멎었다. 체감상 일 분도 안 울렸다. 다른 거 하다가 잘못 눌렀나 보다고, 홍화가 바짝 졸아든 마음을 애써 다스리려 했다. 벨이 다시금 울었다. 빌라 전체 사람들을 다 깨울 시끄러운 트로트였다.
저도 모르게 수신 거부를 눌렀다. 누르고 나서야 아차 했지만 전화는 끊겨 있었다. 홍화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엎어졌다. 두 번이나 못 받았으니 유백영도 다시 걸지는 않을 테다. 그렇다면 저가 걸어야 한다는 말인데, 똑같은 번호를 누르기엔 용기가 좁쌀만 했다. 주머니에 돈을 꽂던 냉랭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세 번째. 예상을 깨고 전화가 왔다. 유백영이었다. 홍화가 벼락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머리는 당장 받으라는데 빌어먹을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만 맴돌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손가락으로 액정을 꾹 눌렀다. 잘못 눌렀는지 벨 소리가 끊겼다.
세 번이나 못 받았다. 처음이야 놓쳤다고 변명이나 하지, 나머지 두 번은 수신 거부였다. 이제 다시 전화를 건다 해도 유백영이 거부할 판이었다.
만나서 돈뭉치로 따귀를 갈기려던 야심 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홍화는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혹, 유백영이 다시 전화할까 노심초사 기다리기도 싫었다. 그러잖아도 충분히 초라했다.
깜빡 잠들었다. 홍화는 쿵쿵거리며 계단 밟는 소리에 일어났다.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어느 진상이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에 발꿈치에 망치를 달고 돌아다니는지. 반지하라도 한적해서 좋았건만 변태가 출몰하질 않나, 새벽에 시끄럽게 구는 진상이 있지 않나. 좋다는 말도 다 옛말이다.
베개로 귀를 막아도 딩동딩동 초인종 누르는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참다못한 주민 한 명이 문을 열고 “잠 좀 자자, 이 개새끼야!” 하고 소릴 질렀다. 홍화도 동참하고 싶었다. 걸쭉한 욕설에 초인종 소리가 잦아졌다가, 다시 터졌다. 삼 층에서 이 층으로 내려왔다. 종교 권유라도 하는지 한 집, 한 집 끈질기게 눌러댔다.
초인종 소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이제 일 층도 끝났다. 제집만 남았다. 계단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간 모양이었다.
잠이 싹 달아났다. 눈이 말똥말똥했다. 저렇게 사람들 다 깨우고 다니는 인간이 변태일 리는 없고. 누군지 참 부지런한 진상이었다. 인상착의나 확인해놓고 보이면 피해야지 싶어 창문을 열었다. 창살 너머로 사람 없는 길거리만 보였다. 진상은 이미 멀리 가고 없는 듯했다.
밤이 채 가시지 않아 거리에 짙푸른 빛이 깔려있었다. 찬 공기가 뜨끈한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솜털이 일어난 팔뚝을 비비며 창문을 닫으려 했다. 저쪽에서, 땅바닥을 가볍게 차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홍화가 창살에 바짝 얼굴을 기댔다. 창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운동화가 멈춰 섰다. 새카만 바지와 새카만 운동화였다.
남자는 빌라를 올려보듯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홍화가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남자를 올려다보려 했다. 이자가 새벽에 온 빌라 사람들을 다 깨운 진상이란 감이 왔다. 운동화가 방향을 틀려다가 멈칫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남자의 옷자락이 살짝 흔들렸다. 홍화도 코끝을 바깥에 내밀 듯이 창살에 얼굴을 붙였다. 상의까지 얼핏 보였다. 똑같은 검은색이었다. 검은 운동화, 검은 바지, 검은 상의. 검은 갓만 쓰면 영락없이 저승사자였다.
남자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마스크로 가린 턱이 보였다. 마스크 또한 검은색이었다.
남자가 마스크의 콧대 부분에 손가락을 걸고 끌어 내렸다. 도톰하고 잘생긴 입술선이 낯익었다. 홍화가 눈을 비볐다. 봐선 안 될 것이 겹쳐 보였다. 남자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기울어진 그릇같이.
남자가 고개를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갓 대신 검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저승사자가 홍화와 눈을 맞추었다.
“이홍화.”
한 번 불렀다.
“이홍화.”
두 번 불렀다. 한 번 더 부르면 삼도천 앞으로 끌려갈 것이다. 홍화가 퍽 소리 나게 창문을 닫았다. 잠가야 하는데 헛손질만 이어졌다. 창살 틈으로 긴 손가락이 들어와 창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가 귀신 소복이 바닥을 쓸고 가는 소리와 비슷했다. 이홍화, 하는 세 번째 부름이 찬 공기와 함께 방 안으로 스미었다. 홍화의 낯빛이 시체보다 창백하게 식었다.
도망갈 곳이 없다. 이 좁은 방에서 뛰쳐나간다 한들 문 앞에 유백영이 떡하니 지키고 서 있는데 퇴로가 어디 있으랴. 홍화가 좁은 창문으로 몸을 욱여넣으려다가 이성을 되찾고 발만 동동 굴렀다. 유백영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쿵, 쿵, 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문 열어.”
너 같으면 넙죽 열겠냐. 홍화가 문고리를 잡고 코딱지만 한 현관에 주저앉았다. 손이 달달 떨렸다. 서랍 구석에 박아둔 돈뭉치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얼른 가자고 재촉하는 저승사자처럼 낮고 무서웠다.
“부수기 전에.”
한낱 사람의 힘으로 두꺼운 철문을 부수기야 하겠느냐마는. 유백영이라면 어디서 쇠몽둥이를 가져와 냅다 문을 내려찍을 것만 같았다. 문을 부수고 쳐들어와 저도 두들겨 팰지도 몰라, 홍화가 후들후들 떨며 숨소리를 죽였다. 쿵, 하고 문이 흔들렸다. 홍화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고개를 바짝 들었다. 머릿속에 번개처럼 지나간 생각에 문을 꿰뚫어 보듯 쳐다봤다.
만약 사람들이 다 나와 이 일을 구경이라도 한다면.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다. <유명인 유 모 씨, 새벽에 반지하에서 난동 부려>라는 기사 제목이 가장 먼저 스쳐 갔다. 뒤이을 기사는 분명 유 모 씨와 얽히고설킨 홍화에 대해 주야장천 떠들어댈 것이다. 대체 무슨 사이기에 유 모 씨가 새벽부터 난동을 부렸나. 본 적도 없건만, 유 모 씨와 이 모 씨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추측하는 저질스러운 추측성 기사가 눈앞에 책처럼 펼쳐졌다.
밖에 있는 유백영보다 추문에 휩싸일 사태가 더 무서웠다. 홍화가 내키지 않는 손길로 문고리를 돌렸다. 빼꼼 열린 문틈으로 손가락이 기어들어 왔다. 홱 문이 열렸고, 유백영이 성큼 들어왔다. 유백영의 머리끝과 천장 사이의 틈이 아슬아슬했다.
홍화는 문을 열고도 혹시 때리려고 하면 도망칠 각오로 문 쪽을 힐끔댔다. 유백영이 홍화의 얄팍한 수를 알아챈 것처럼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도 백영은 말이 없었다. 홍화만 싸늘한 눈초리로 내려다봤다. 홍화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좁은 방에서 물러나 봤자 백영의 시야 안이었다.
새벽빛이 밝아졌음에도 단칸방 안은 어두웠다. 모자를 눌러써 눈 밑에 그늘이 드리워진 백영은 더욱 캄캄했다. 속내도 그만큼 어두워 홍화는 도통 그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왜 왔어.”
고작 뱉은 말이 그딴 말이었다. 백영이 입술을 비틀었다. 홍화의 말이 우스워서 죽겠다는 듯 눈매도 휘었다. 안에 든 차가운 기는 그대로였다.
“삼 층 산다며.”
“이사했어. 얼마 전에. 삼 층에 웃풍이 심하더라고.”
알량한 자존심에 거짓말이 술술 새어 나왔다. 뻔뻔하게 쳐다볼 순 없어서 현관문 구석만 쳐다봤다. 유백영의 발치만 보였다.
“왜 왔냐니까.”
“네가 전화했잖아.”
전화는 했지만 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남창 취급할 땐 언제고 부재중 전화 한 통에 이리 무섭게 달려온 백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홍화가 고개를 푹 숙이고 삐져나온 이불만 발끝으로 툭툭 밀다가 서랍장으로 쪼르륵 달려갔다. 이왕 집에 온 거 물 한 잔이라도 주어야 예의라지만, 서로 지킬 예의가 남아있을 때 이야기다. 돈 주면 끝날 일, 홍화가 돈 봉투를 들고 쭈뼛쭈뼛 다가갔다.
“이거 돌려주려고.”
“이게 뭔데.”
“택싯값 정도는 나도 있어. 너랑 이런 거 주고 받을 사이 아니니까, 도로 가져가.”
받을 생각을 안 해 백영의 품에 억지로 안겨줬다. 백영이 봉투 안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것 때문에 전화했다고. 고작 돈 때문에.”
마치 그 외의 것이라도 기대했다는 어투였다. 본인의 착각이라 여기고, 홍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날 기억은 나냐?”
“……어느 정도는.”
침대 위에서 흔들렸던 기억은 뚝뚝 끊긴 채로 남아있었다. 죽을 것 같아서 엉엉 울던 기억과 백영의 입술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던 것과 살려달라고 빌었던 기억 같은 것들만. 그조차도 끝이 확실하지 않았다.
홍화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방이 어두워 천만다행이었다.
“그 새끼들한테 못 받은 거 내가 준 건데, 왜. 너 돈 필요한 거 아니었냐. 돈이 아니라 배역이 필요한 거면 말해. 알아볼 테니까.”
홍조가 단박에 사라졌다. 홍화가 멍한 눈으로 백영을 쳐다봤다. 백영이 홍화의 옷깃을 쓱 젖히고 가슴팍에 돈 봉투를 끼워 넣었다. 맨살에 차가운 봉투가 닿자 뒷골까지 소름이 돋았다. 홍화가 진저리치며 돈 봉투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떨어진 봉투에서 지폐가 풀풀 기어 나왔다.
“누굴 남창 취급해.”
분노가 지나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겨우 이딴 취급 받으려고 그토록 고민하고 전화를 건 게 아니었다.
“네 입으로 한 말 기억 안 나?”
“뭐라 했든 너에게 이런 취급당할 이유 없어. 돈 갖고 꺼져. 당장.”
빌라가 떠나가라 소리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느라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에 힘줄이 불거지고 핏줄도 푸르게 올라왔다.
쫓겨난 그 날은, 그럴싸한 명목이라도 붙었으니 상관없었다. 화대 같다는 느낌일 뿐이지 화대라 도장을 쾅쾅 찍지 않았기에 넘길 수 있었다. 돈을 준 장본인이 화대라 명명한 것과 천지 차이였다.
자존심에 제대로 금이 갔다. 와장창 부서져 발바닥 아래에 날카로운 조각으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위를 밟고 서서,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줄줄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 파티, 네가 원해서 갔는데 내가 방해했잖아. 이건 그에 대한 위로금이라고 생각해. 배역은 따로 줄…,”
더는 들어줄 수 없어 백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키 차이가 나서 세게 쥐어도 의미가 없었다. 멀리 떨어진 얼굴을 가까이 잡아당겼다. 큰소리로 외치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다. 코끝을 맞댈 것처럼 마주 대고서는, 홍화가 악문 소리로 속삭였다.
“그딴 거 원한 적 없어.”
“…….”
“단 한 번도.”
멱살을 놓고 떨어진 돈 봉투를 주워 들었다. 지갑에서 지폐를 빼듯 봉투에서 돈을 꺼내 백영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노란 지폐가 까만 옷자락 위로 대가리를 빠끔 내밀었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툭, 툭 두드리고서 홍화가 앞서서 문을 열었다.
“택시비. 잘 가라.”
기다려도 나가지 않아 등을 떠밀었다. 순순히 밀려주었다. 큼지막한 운동화가 현관 밖으로 물러났고, 홍화는 문을 닫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배우의 퇴장을 알리는 소리였다. 유백영이 퇴장했다.
현관문에 등을 기댔다. 걸음 소리가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다. 문을 열라며 화내는 소리도, 발로 차는 소리도 없었다. 궁둥이가 차가운 현관 바닥에 눌어붙을 때쯤 계단 올라가는 소리가 났다. 숨죽이고 있던 홍화가 그제야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 ∞ ∞
왜 여기까지 왔지.
핸들을 잡았지만 시동을 켤 생각은 들지 않았다. 중요한 무언가를 어딘가에 두고 온 기분이었다. 백영은 핸들을 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주머니에 손을 푹 꽂아 넣자 얇고 딱딱한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긁었다. 한 움큼 쥐어 꺼냈다. 노란색 지폐였다. 이홍화가 꽂아준 돈이었고, 돌려받은 돈이었다.
왜 왔더라.
새벽에 전화가 왔다. 선잠을 깨우는 전화였다. 받으려는 순간 끊어졌다. 화면에 이름이 떠 있었다. 그간 부단히 신경을 긁어댄 인물이었다. 예상치 못한 어느 순간에 환영처럼 불쑥 보였다가 사라지곤 하는. 앞으로 볼 일 없을 거라 이성이 말하던 그 이름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도 번번이 거절만 당했다. 끝에는 전원이 꺼졌다는 안내가 나왔다. 질기고 튼튼한 줄이 뚝 끊기는 소리도 이어졌다. 잡아서 죽여야 속이 풀릴 거라며, 끊긴 줄이 속삭였다. 속삭임에 홀려 옷을 입고 차 키를 주워 들었다. 딱 한 번 가본 길이 여러 번 가본 것처럼 익숙했다.
쓰러질 것 같은 빌라 앞에 서서 삼 층을 바라봤다. 불이 꺼져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한참 두드린 끝에 사람이 나왔다. 이홍화 집이 아니냐고 묻는 말에 집주인이 잔뜩 짜증 섞인 목소리로 욕을 했다. 이 층에도, 일 층에도 이홍화는 없었다.
빌라를 벗어난 다음에 이홍화를 발견했다. 하수구 속 쥐처럼 반지하 창가에 매달려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고 있었다. 쥐꼬리를 보이며 내빼기에 기꺼이 굴 안으로 쳐들어갔다. 잡아서, 어찌하려던 생각이었더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겁에 질려 덜덜 떠는 모습을 보니 김이 빠졌다.
누굴 남창 취급하냐고. 제 입으로 몸 섞는 이가 누구든 상관없다고 밝힌 주제에 순진한 척하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사는 곳이 어디인지도, 무엇을 원하는지도, 입만 열면 거짓말이었다.
“Fucking liar.”
지폐가 거추장스럽다. 옆자리에 던져버리고 백영이 핸들을 틀었다. 여기까지 개처럼 달려온 자신이 가장 혐오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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