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희설, 설이, 설아 (17/18)

주희설, 설이, 설아

팬 미팅은 무사히 열렸다. 특별 출연하는 아이돌은 내 대기실까지 찾아와서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갔다.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군기 꽉 잡힌 인사말에 나는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이며 대박 나라는 덕담을 했다. 그래, 애들이 뭔 잘못이겠냐.

아이돌 후배들이 나간 뒤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부공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거대한 꽃다발에 상체가 절반은 가려진 부공태.

“와, 어디서 이렇게 공태 씨 같은 꽃다발을 구하셨어요?”

“마, 슈퍼스타한테 이 정도는 돼야지예.”

뿌듯하게 자기만 한 꽃다발을 내려놓은 부공태는 무늬 없는 검은 와이셔츠에 넥타이 없이 진회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가을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코디였다. 당장 벗기고 덮쳐 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아야 했다.

“오늘, 끝나고 뭐 하실 거예요…?”

대신 지성인답게 합법적으로 부공태를 탐할 수 있는 기회를 잡으려고 그에게 물었다.

“끝나고 배우님하고 놀 낀데?”

“앗, 도장에 안 가셔도 돼요? 오늘 수업 없어요?”

“있는데 띵가 물라꼬 다른 넘한테 미랐으예.”

“헐. 그래도 돼요?”

뭔진 몰라도 어쨌든 미뤘다는 거지? 부공태는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어 보였다.

“하모. 내가 배우님 팬인데 팬 미팅에 와야지.”

그리고 뒤이은 혼잣말로 ‘티켓팅이 으마으마하게 빡시 가꼬….’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스태프들의 목소리에 섞여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설마 진짜 티켓팅을 하진 않았겠지.

“잘하이소. 내가 옆에 있으께.”

부공태가 내 손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누가 볼까 겁도 내지 않고 해 주는 그 사소한 스킨십이 좋아서, 부공태의 체온이 내 손에 오래 남아 있어서 좋았다.

***

예정된 대로 첫 번째는 아이돌의 오프닝 무대였다. 반응이 꽤 좋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오프닝 무대가 끝나고 바로 본격적인 팬 미팅이 시작되었다. 무대로 나가자마자 울려 퍼지는 함성 소리를 듣고 코끝이 찡해졌다.

“오늘의 주인공 주희설 씨에게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와 함성이 귀를 찌를 듯했다. 대관처가 결코 작은 곳이 아닌데 객석도 꽉 차 있었다. 티켓이 열린 지 1분 만에 매진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매니저 형이 나를 위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해 준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아직 내 팬들이 이렇게 많단 사실을 실감하지 못해서 멍하니 있자니 MC가 나를 가운데 자리로 끌고 와 앉혔다.

“여기, 여기예요. 정신 좀 차리시고.”

MC의 너스레에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에 무대에 서자니 긴장이 되어서 자꾸 로봇처럼 뚝딱거렸다. 미리 대본을 다 짜 놓았으니 그대로만 하면 되는데 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신작 이야기가 나왔다. 출연은 정해졌지만 아직 확실한 게 없으니 준비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다들 주희설 씨 신작 기다리고 계시죠?”

“네!”

MC의 말에 수많은 관객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어서 준비해서 보여 드릴 수 있도록….”

준비된 멘트를 하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검어졌다. 일전과 같은 증상이었다.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씨?”

바로 옆에 있는 MC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이를 악물고 겨우 앞을 보았다. 객석까지 거리가 조금 있지만 나를 걱정하는 눈빛만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희설 씨? 괜찮으세요?”

MC의 손이 내 어깨를 짚고서야 시야가 온전히 돌아왔다.

“아, 네! 여러분들 오랜만에 뵈니까 이게, 너무 긴장이 되네요.”

“깜빡 졸던 건 아니고요?”

“들켰나요?”

다행히도 MC의 애드리브와 내 너스레에 분위기는 심각하지 않게 넘어갔다. 슬쩍 옆을 보니 무대에서 가까운 쪽, 경호 요원들과 함께 서 있는 부공태가 보였다. 앉으라고 의자도 줬는데 경호 인력들이랑 같이 서 있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하다나.

그의 얼굴에 걱정이 뚝뚝 묻어났기에 일부러 환하게 웃어 보였다. 부공태 근처에 있던 팬들이 꺄악 소리를 질렀다.

“자, 그럼 이제 여러분들이 가장 기다리던 시간! 바로 QnA 타임입니다. 희설 씨, 준비되셨나요?”

“네.”

“또 막 주무시고 그러면….”

“아이, 아닙니다.”

다시 터진 웃음소리. 다행히도 긴장이 약간 풀렸다.

스태프가 미리 준비한 상자를 가지고 왔다. 투명한 아크릴 상자 안에 작은 쪽지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러분이 주희설 씨에게 궁금한 점들을 적어 주신 쪽지입니다. 이렇게 상자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응모를 해 주셨는데요, 이 중에서 딱 다섯 개만 골라 대답을 들어 보겠습니다.”

사실 저 상자 안에 있는 질문들은 사전에 다 한 번씩 걸러서 오는 것들이다. 무슨 질문이 있고 어떻게 대답할지도 다 알고 있는 상태였다.

MC가 쪽지 하나를 뽑아 들고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펴 보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대기실에서 다시 체크했던 질문과 대답 리스트를 떠올렸다.

“음….”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MC가 이상했다.

“어, 잠시만요. 질문지가… 약간 잘못된 것 같습니다.”

“왜요? 막 속옷 색깔, 이런 건가요?”

아까 MC가 해 준 것처럼 내가 너스레를 떨자 관객들이 웃었다. MC도 웃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굳어 있는 게 바로 옆에 있는 내게는 보였다.

“질문지가 아닌 게 섞여 들어간 것 같아서, 다시 뽑아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휴, 쓰레기를 여기다 버리고 그러시면 어떡해요, 희설 씨.”

다시 웃음. 나는 객석에게 도움을 요청하듯이 황당한 얼굴을 하고 두 손을 들어 보였다.

MC가 두 번째로 쪽지를 펴 들고도 아무런 말이 없이 굳어 있기에, 결국 내가 일어서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사고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팬 미팅의 모든 건 라이브로 진행되고 있다. 촬영을 엄하게 금지하고 있긴 해도 몰래 찍는 사람이 있을 테고, 이렇게 사고가 있는 팬 미팅이 외부로 유출되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대처를 하기 위해서 MC가 들고 있는 쪽지를 가볍게 빼앗았다. MC는 장난처럼 안 빼앗기려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뭔데 그래요.”

그리고 쪽지를 읽기 시작한 나도 굳고야 말았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웃으면서 행사할 기분이 드나?

MC가 뽑은 것이 두 개니까 연속 두 개의 쪽지가 엉뚱한 걸로 뽑혔단 거다.

‘스태프 중에 누가 손을 쓴 모양인데.’

사전에 질문 리스트를 뽑을 때도 다 나와 협의를 했는데, 제작 과정에서 누군가 장난질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은 팬 미팅을 진행해야 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적당히 난감하면서도 분위기가 이상해지진 않을 정도의 가짜 질문. 뭐가 있을까.

“‘상대 배우의 베드 신에 질투한 적이 있다?’ 아뇨? 제가 왜요? 베드 신 힘들어요. 진짜 어렵거든요. 안 찍으면 이득입니다.”

일부러 덤덤한 척 엄지까지 세워 보이자 관객석에서 장난스러운 야유가 터져 나왔다.

“무슨 대답을 기대하신 거예요? 예?”

귀여운 척 눈을 흘기기까지 하는 것으로 깔끔한 마무리.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성공했다.

MC가 많이 당황한 듯이 보였기에 나는 내가 직접 종이를 뽑아서 대답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종이를 일부러 읽지 않은 채 반만 폈다. 또 이상한 질문이 걸리면 그땐 멘탈이 나갈 것 같아서였다.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배우! 음… 저는 일단 저를 편하게 대해 주는 분이랑 연기 합이 유독 좋은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그렇게 기존 질문 리스트와 대답을 떠올려 자문자답하는 것으로 다섯 번의 QnA 타임을 마쳤다.

다행히도 이후로는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팬을 무대 위로 올려서 하는 코너 같은 것은 모두 빼자고 PD가 말했을 때 좀 과보호가 아닌가, 싶었는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다행으로 느껴졌다.

남은 팬 미팅을 진행하는 내내 부공태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부공태와 눈이 마주치면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 지금은 그래선 안 되었다.

모든 코너가 마침내 끝났다. 어떻게 진행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쪽지 상자 하나 바뀐 것 따위 별거 아닌데. 프로답게 대처도 잘했고, 이제 스태프들을 고용한 인사 팀에서 조사만 들어가면 되는데, 이상하게 숨이 가쁘고 두려웠다.

구십 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고 객석을 향해 여러 번 손을 흔들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저들 중 내 안티가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단 거였다.

모두 나를 보러 와 준 사람들인데, 나의 팬인데, 나는 저 사람들을 의심하고 있다니. 조건 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의심하는 것만큼 나쁜 일이 어디 있을까.

대기실로 돌아가자마자 부공태와 마주쳤다.

“배우님.”

부공태의 표정이 많이 안 좋았다. 나는 애써 웃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애써 웃으려고 했다.

바보처럼 고작 쪽지 하나 봤다고, 그걸로 당황해서 질질 짜기는 싫었다. 연예계에 거의 평생을 몸담은 사람이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 그것도 애인 앞에서.

“공태 씨, 놀러 가요.”

그래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일부러 밝은 어조로 말했다. 부공태는 대답 대신 내 손을 덥석 쥐었다. 대기실에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문 쪽을 흘끔 보는 동안 부공태가 재킷을 벗었다. 이내 내 시야가 검은 재킷으로 뒤덮였다.

“손이 얼음장 긑심더.”

“…….”

아무 말도 않았는데 내 상태를 알아주는 부공태가 고마웠다. 그런데 괜히 얄밉기도 했다. 내가 내보이기 싫은 모습까지 모조리 들킨 것 같아서. 바보 같은 모습까지 다 보인 것만 같아서.

그의 체취가 상반신을 감싸니 훨씬 숨 쉬기가 편해졌다. 익숙한 냄새를 들이마시고, 내뱉자 나는 그제야 내가 몹시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공태 씨.”

“…….”

“배우는요, 진짜 드러운 것까지 다 연기해야 되거든요. 싫어도요. 살인자든, 변태든, 뭐든.”

그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 자신의 옷으로 나를 감싼 채. 든든한 방벽처럼.

“근데 공태 씨 앞에서는 그러기가 싫어요. 연기하기가 싫어요. 배우 하기 싫어요.”

마음에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무언가 자꾸 부서지는데, 나는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너머에 부공태가 있다. 부서지는 포말을 받아 내며 자리에 서 있는 그가. 바닷가로 도망치듯 놀러 갔던 그날, 파도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던 그 모습처럼.

“배우 안 해도 됩니더.”

그의 옷깃을 꾹 쥐었다. 부공태가 나를 껴안는 게 재킷 너머로 느껴졌다. 체취가 더 짙어졌다.

“내한테는 배우 안 해도 됩니더, 희설 씨.”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체취에 익숙해지는 것마저도 아쉬웠다. 부공태가 나를 더 꽉 껴안았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에 대한 대답인지 나를 안은 팔에 힘이 더 꽉 들어갔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좋아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고, 공태 씨, 근데 나 숨 막혀요….”

“아이고!”

부공태가 그제야 팔을 풀었다. 내 상체를 푹 덮은 재킷 앞쪽이 살짝 들렸다. 그 틈으로 보인 부공태에게 히, 하고 웃어 보였다. 부공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가요, 우리.”

“자, 잠깐만예. 내 화장실 좀.”

“같이 갈까요?”

“으은지. 퍼뜩 갔다 오꾸마.”

그가 황급히 대기실을 나섰다. 많이 급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벗어 두고 간 재킷을 코로 가져가서 크게 들이마셔 보았다. 다행히도 그의 체취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계속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싶었다. 계속 맡을 수 있게.

***

부공태는 팬 미팅이 끝난 뒤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고 숨을 쉬기가 편해졌다.

묵직한 그의 존재감은 비단 큰 덩치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었다. 부공태라는 사람이 내게 주는 안도감은 표현하기 힘들 만큼 거대했다. 마치 밤하늘이 모두 내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일단 주차장에 세워 둔 그의 차로 이동했다. 부공태의 차는 종을 알 수 없지만 엄청 큰 SUV 종류였다. 차에 타자마자 그는 좌석을 한껏 뒤로 젖혀서 내가 누울 수 있게 해 줬다.

“그냥 뒷좌석에서 편하게 한잠 잘래예?”

“아뇨, 전 공태 씨 옆에 있는 게 더 좋아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한 말인데, 부공태는 엄청 감동한 표정을 했다.

“우예 이래 말도 이쁘게 하노.”

조금 부끄러워서 코를 문지르며 웃었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 가방을 뒤졌다.

“참, 저 공태 씨 드릴 거 있어요.”

“뭔데예?”

“선물.”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자 부공태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나와 상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의 커다란 가슴에다 상자를 턱 안겨 주었다.

“보지만 말고 열어 봐요.”

“갑자기 뭔 선물입니꺼….”

“그냥, 제가 주고 싶어서요.”

그제야 그가 상자를 열었다. 포장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굵직한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뜯는 모습이 귀여웠다.

내가 그에게 준 것은 세로로 된 사각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얼핏 평범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각의 가느다란 세로 펜던트는 다이아와 파란 토파즈가 섞여 있어서 빛을 받으면 윤슬 같은 빛이 화사하게 비쳤다.

“이그를… 내한테 준다꼬예?”

“네. 어울릴 거 같아서요.”

정말로 큰 의미는 없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부공태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였다.

그러나 부공태는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더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사람 눈썹이 그렇게 완벽한 팔八자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처음 알았다.

“우야노….”

“어쩌긴 어째요. 이리 줘 봐요. 내가 걸어 줄게.”

그에게서 목걸이를 받아 들고 직접 목에 걸어 주었다. 생각보다 줄이 조금 짧아서 난감했지만, 아주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줄이야 바꾸면 되니까.

펜던트를 손에 살짝 쥐고서 상체를 살짝 뒤로 젖혀 조화를 가늠해 보았다. 검은 와이셔츠 위로 늘어진 펜던트는 부공태와 제법 잘 어울렸다. 역시 내 안목은 나쁘지 않다니까.

“완전 잘 어울리네요. 앞으로 맨날 하고 다녀요.”

“고맙심데이….”

여전히 팔자 눈썹을 한 부공태가 입꼬리까지 늘어뜨렸다. 이러다 울겠다 싶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가 손을 놓자마자 그 예쁜 펜던트가 부공태의 가슴 사이로 폭 파묻혀 버린 것이다.

“…….”

내가 그의 가슴을 노려보자 부공태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와이샤쓰만 입으믄 이래 골이 생기 가꼬….”

그가 가슴에 파묻힌 펜던트를 손으로 끄집어내었다. 하지만 펜던트는 잠깐을 못 참고 다시 가슴골에 파묻혔다. 영롱한 보석은 보이지도 않았다. 부공태는 울상이 되었다.

“내는 젖탱이가 와 이래 클꼬….”

가슴에 가려지는 것을 봤을 때까지는 참았는데, 그 서글픈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안의 음심이 터지고 말았다.

“공태 씨.”

“예?”

“지금 빨아도 돼요?”

“예에에에?”

부공태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나는 개의치 않고 그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가, 가만있어 보소. 배우님! 호텔이라도 가 가꼬….”

“언제 가요. 너무 멀어.”

호텔 좋아하네. 갓 나온 따끈따끈한 피자를 앞에 두고 식혀서 먹으란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부공태의 두툼한 손을 열심히 파헤쳐서 마침내 허리띠를 찾아냈다. 허겁지겁 풀어 내고 지퍼도 내렸다.

“배, 배우님…. 희설 씨.”

속옷도 끌어 내리자 검붉은 살덩어리가 퉁, 하고 튀어 올랐다. 참 나, 자기도 발기했으면서 왜 내숭이람? 그대로 그의 것을 입에 덥석 물었다.

“아…!”

부공태가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아예 상체를 비틀며 자세를 고쳤다. 그를 향해 엎드린 채로 굵직한 것을 입에 넣고 열심히 빨았지만 그의 것이 하도 큰 탓에 입에 반도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자, 잠깐만예.”

뭘 자꾸 잠깐만이래. 무시하고 더 열심히 빨려는데 부공태가 내 어깨를 붙들고서 우는소리를 했다.

“누가 오는 거 긑은데….”

그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재킷을 내 몸 위에다 덮어 주었다. 시야가 차단되니 괜히 더 흥분되었다. 그의 체취도 더 짙게 났다.

저 멀리서 서로 운전하라며 투닥거리는 나이 든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가까이 오지도 않는 것 같은데, 부공태는 바짝 얼어붙었다.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의 것이 더 빳빳하게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부공태가 나 때문에 흥분하는 게 좋았다. 덮인 재킷 위로 어쩔 줄 모르고 손이 오가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그의 기둥을 더 세게 물고 빨며 혀끝으로 기둥을 꾹꾹 눌러 자극했다. 귀두도 핥았다.

“배, 배우님, 나올 거 긑심더….”

내 입에 싸도 된다는 뜻으로 그의 것을 오히려 더 빠르게 빨아들였는데, 부공태는 기어코 내 상체를 일으켰다. 행여 나한테 튀지는 않을까 얼른 밀치며 티슈에다 토정하는 걸 보니 조금 아쉬웠다.

그는 바지춤을 추스르기도 전에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놀라서 엉덩이를 뒤로 슬금슬금 빼냈다.

“왜, 왜요.”

“내만 좋으믄 되나. 딱 대이소.”

“아니, 전 괜찮은…!”

변명은 씨도 안 먹혔다. 그는 내 바지춤을 내리고 눈치 없이도 발기한 나의 똘똘이를 쥐었다. 솔직히 내 성기가 작다고는 생각한 적 없는데, 그의 손이 하도 크다 보니 폭 감싸인 내 성기가 좀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커다란 손이 내 성기를 감싸고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거친 손바닥이 귀두부터 시작해 뿌리 끝까지 싹, 싸악, 쓸어내렸다가 다시 쓸어 올렸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흑! 아! 흡!”

“소리 크게 내믄 밖에 다 들린데이.”

코앞에서 하는 말이 얄미웠다. 누구 때문인데. 하지만 주희설이 주차장에서 카섹스를 하더라 하는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었다.

이내 그가 고개를 숙여 왔다. 잠깐만요, 또 애원하려 했지만 역시나 그는 듣지 않았다.

부공태의 혀가 내 성기를 핥고 빠는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차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잔뜩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밀폐된 공간이지만 밖이라서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게 많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지, 카메라는 없을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어서 평소보다 감각이 몇 배는 짙었다.

“흣, 공태 씨….”

그의 입술이 내 기둥을 단단하게 오르내렸다. 잔뜩 오므린 입이 힘주어서 내 것을 빨아들였다. 압박감을 참기가 힘들었다. 부공태의 어깨를 콩콩 두드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요…! 읏!”

정말 사정할 것 같아서 그의 어깨를 쥐고 억지로라도 일으키려는데, 부공태가 내 손목을 콱 붙들었다. 두 손목이 붙들린 채 나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억울했다. 두 손을 쓰지 않고도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이런 것도 타고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흡, 흐윽….”

사정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나는 그대로 부공태의 입에 정액을 쏟아 냈다.

“읏, 흐으, 흐, 아! 흑!”

부공태는 내가 사정하고도 한참 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성기가 꼼짝없이 그의 입에 갇힌 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꾸물거렸다.

절정보다 조금 더 약한 감각이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밀려왔다. 온몸이 따뜻한 물에 기분 좋게 젖는 것 같았다. 나는 부공태에게 성기를 물린 채 그렇게 한참을 헐떡거렸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야 정신이 들었다. 얼른 티슈부터 건넸다.

“어, 어서 뱉어요.”

“다 뭈는데?”

“…그걸 왜 먹어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내 심정도 모르고 씩 웃어 보였다.

“술 한잔하러 가까예? 괜찮은 데 아는데.”

“…네.”

대답하면서 입가에 묻은 내 정액을 닦아 주었다. 처음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창피한지 알 수 없었다. 밖에서 해서 그런가. 차 안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밖은… 아니라고 봐야 하나…. 그래도 주차장이니까…. 모르겠다.

어쨌든 좋긴 좋았기에 웃음이 실실 나왔다. 부공태 역시 나를 보며 마주 웃어 보였다. 그의 가슴골에 파묻힌 펜던트가 조금 아쉬웠지만, 다음에는 안 파묻히게 더 큰 걸로 사 줘야지 생각하니 금세 기분이 나아졌다.

‘가진 게 돈밖에 없어서 다행이다.’

물론 지금은 부공태도 가졌지만.

***

어떻게 찾았는지 부공태는 제법 조용하고 분위기 괜찮은 바로 나를 데려갔다. 금주법 시대 미국 술집을 흉내 낸 곳이어서 입구부터 골목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바 테이블에는 혼자 온 손님 하나가 있었고, 플로어에 두어 팀이 있는 듯했다. 우리는 제일 구석으로 자리 잡았다.

“와, 여기 괜찮네요. 파티션도 높고, 어두워서 얼굴도 안 보이고.”

“그래서 골랐심더. 술도 괘안타 카데예.”

직원이 다가오려 하자 부공태는 가볍게 손을 들어서 기다려 달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필요 없는데, 하는 미안함과 그의 세심함이 멋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의 시선이 논알콜 메뉴에 머물기에 메뉴판을 짚은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짝 때리듯 장난스럽게 건드렸다.

“그냥 술 마셔요. 대리 부르면 되죠.”

“…안 그래도 마실라 캤는데예?”

“진짜요? 괜히 내가 싫어할까 봐 대리 안 부르려고, 이 밤에 운전하려고 논알콜 마시려고 한 거 아니고요?”

사실 나보다 부공태가 내 얼굴 보이는 걸 더 신경 쓰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전에도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을 불러 주려고 하니까 ‘그러면 배우님이 불편하시지 않으냐’며 구태여 택시를 타고 갔다. 오늘도 그런 이유인가, 했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기 아이고예…. 근처에 호텔 잡아 놨심더.”

“…와.”

박수라도 칠 뻔했다.

“와 그래 놀라는교? 부끄럽구로.”

“제 애인이 철저한 준비성을 가졌다는 데에 감탄한 거예요.”

부공태는 곰돌이처럼 히히, 하고 웃었고 나도 그를 흉내 내어 히히, 웃었다.

자연스럽게 일상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집안 이야기가 나왔다. 몰랐는데, 부공태는 어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다고 했다.

“사실 아부지 때문임더. 내 긑애도 남편이 식모 취급만 하고 맨날 욕하고 암꺼도 몬 하게 하고 하믄 도망가지.”

“…아버지랑 어머니 사이가 별로 안 좋으셨나 봐요.”

부공태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세대 양반들은 원래 서로 안 맞아도 윽지로 참고 산다 아입니꺼. 근데 나는 그게 싫었심더. 어무이도 사람인데 와 무시당하는 거 혼자 참고 살아야 되는데?”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케가 나는 어무이 가출한 거는 아무 원망 안 합니더.”

원망 안 한다는 부공태의 말과 달리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말없이 기다리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조금 뜸을 들이던 부공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암만 생각해도 자식새끼 한 번도 안 찾아온 거는 너무한 거 아입니꺼.”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설프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간 그의 마음만 다칠까 두려워서 그저 테이블 위의 손에 내 손만 살짝 겹쳤다. 부공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은 지도 다 이해합니더. 어무이 가출하실 때 형이랑 내가 얼라도 아니랐고, 우리 만나믄 아부지 귀에도 들어갈 거니까….”

“…맞아요. 어쩔 수 없으셨을 거예요….”

겨우 한마디를 덧붙이자 부공태는 쓰게 웃었다.

“그렇겠지예?”

“그럼요.”

부공태는 내가 쥔 손을 살짝 뒤집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내 손이 담긴 모양새가 되었다.

“어무이가 어쩔 수 없었다는 거 내도 압니더. 근데 원망시럽은 거는 또 별개더라고예.”

“그쵸.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나야 뭐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케이스라 그의 마음을 백 퍼센트 이해할 순 없지만.

“근데 이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기 가끔 슬픕니더.”

“…….”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와 겹친 우리의 두 손을 향했다. 부공태의 손바닥에 담긴 내 손이 유독 작아 보였다.

“배우님 사정은 내가 자세히 모르지만, 아부지 원망 안 할라고 애쓰지는 마이소.”

뒤이은 그의 말은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니까, 그래도 나를 지원해 주셨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린 나를 버릴 수도 있었지만 양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어릴 때부터 계속 지켜 주셨으니까 원망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서운해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체한 상태로 내려가지 않는 죄책감은 앞으로도 늘 품고 살아야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공태의 말을 들으니 조금 편해졌다. 오랫동안 쿡쿡 쑤시던 곳이 녹는 기분이었다.

문득 내 아버지는 어떨지 생각했다. 아버지가 나를 원망하거나 한 적은 없을까. 아들이 유명한 배우라는 사실이 아버지에게 걸림돌이 된 적도 분명 있을 텐데 말이다.

“배우님은 혹시 그런 적 있습니꺼?”

“어떤 거요?”

“나 자신한테 서운한 적.”

머들러를 입에 문 채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나 자신에게 서운한 적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서였다.

“앞으로 배우님 자신한테는 쪼매 덜 서운해하고, 넘한테 서운해하이소. 내한테도 마찬가지고.”

“공태 씨한테도요?”

“예에. 섭한 거 있으믄 바로 이야기하이소. 칵 때리 뿌도 되고! 내사 튼튼하다 아이가.”

하긴, 짱돌로 머리를 맞아도 멀쩡한 부공태인데 내가 좀 때린다고 해서 흠집이나 날까 모르겠다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어째 오늘 웬일로 술집을 오자고 하더니, 이런 이야기 하고 싶으셨구나, 공태 씨.”

“음? 아인데.”

“그럼요?”

부공태가 손바닥을 오므려 내 손을 그러쥐었다. 커다란 손이 체온을 전해 왔다. 그냥 손을 잡는 것뿐인데도 가슴이 꽉 찰 정도로 좋았다.

“술 먹고 꼬실라꼬 오자 했는데.”

씩 웃는 얼굴은 진짜 반칙이다 싶었다.

그날 밤 부공태는 나를 무척이나 부드럽게 다뤘다. 속살 곳곳에 닿는 입술이 뜨겁고도 달았다.

쾌감을 견디기 힘든 내가 시트를 부여잡자 그는 제 손을 끼워 넣어 깍지를 끼게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나를 일으켜 무릎 위에 앉히고 놔주질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 말고는 아무것도 닿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그와 몸을 섞는 내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이 짓거리만 계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없이 어깨와 등을 긁어 대어도 부공태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그가 하도 몰아친 탓에 먼저 곯아떨어진 건 나였지만 새벽에 목이 말라서 한 번 깼다. 부공태는 바로 옆에서 나를 꽉 껴안고 자고 있었다. 어찌나 단단하게 껴안았는지 팔을 풀기도 힘들었다.

물론 그의 거대한 몸이 나를 짓누르는 게 끝내주게 좋았지만, 당장 목이 말랐기에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끄응.”

팔뚝이 무슨 전봇대 같아서 꿈쩍도 않아 벗어나는 데 꽤 애를 먹었지만, 어쨌든 목숨은 건졌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돌아와 자는 부공태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품에서 벗어나려 용을 썼는데도 부공태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잠든 그를 구경할 기회가 드물기에 나는 아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리 봐도 감탄이 나오는 얼굴이었다. 턱선은 단단해 보이고 콧대는 높고, 굳게 다물린 입술은 근엄해 보였다.

“음냐… 햄버거를 세 개뿌이 안 무 가꼬….”

굳게 다물려 있을 때만 말이다.

킹 침대 절반을 당당하게 차지한, 떡 벌어진 어깨 아래 가슴으로 눈이 갔다. 춥지도 않은지 이불은 아랫도리만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선물했던 펜던트는 역시나 가슴골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누워 있는데 어떻게 가슴이 안 퍼지지? 신기해서 만져 보고 싶었지만, 곤히 자는 애인을 깨우고 싶진 않았기에 꾹 참았다.

‘아무래도 진짜 새걸로 사 줘야겠다.’

부공태의 가슴을 다시는 얕잡아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팬 미팅이 있은 지 며칠 뒤, 매니저 형이 연락을 해 왔다. 질문지에 장난을 친 범인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내 사생팬 중 하나가 행사 대행업체에서 스태프 조끼와 ID카드를 훔쳐서 행사 당일에 질문함을 바꿔치기한 거였다.

대행업체는 관리를 잘못한 죄로 보상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문제는 범인의 죄질이 애매하단 거였다. 절도 혐의로 잡아 두기는 했지만 범인이 없앤 질문지는 그저 종잇조각일 뿐이라 가치를 측정하기도 그렇고, 어쨌든 행사는 무사히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제가 가서 만나 볼게요.”

내가 직접 경찰서로 가 보겠다는 말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럴 필요 없어, 희설아. 가서 어쩌게.”

“맞아요, 희설 씨는 그냥 경찰에 다 맡겨요. 괜히 애쓰실 필요 없어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그분이랑요.”

매니저 형이랑 새 경호 팀장은 머리를 싸매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스토커 사건도 여러 번 있었고, 사생팬도 처음이 아닌데 내가 당사자를 직접 만나겠다고 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안전 문제 때문에 걱정하시는 거 알아요. 근데 저를 해칠 것 같진 않잖아요? 20대 여자분이라면서요. 그리고 진짜 대화만 할 거예요.”

나도 솔직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스스로 알 수 없지만, 이번에는 대면하고 싶었다.

내게 망신을 주고, 팬 미팅을 망치려고 한 그 사람을 대면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 남아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수많은 악플과 대면하고 싶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도 나는 팬 미팅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저 중에 내 안티가 있지는 않을지 두려움에 떨 것이었다. 지나가다 나를 알아본 사람이 있으면 사인이나 사진보다 도망을 먼저 생각할 것이었다.

사실은 한종수 사건 이후로, 아니, 아버지 회사 일 이후로 계속 도피해 왔던 것 같았다. 아직도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거나 눈앞이 검어지는 증세가 가끔 나타났다. 아직도 나는 극복하지 못했는데 극복한 척을 하려고만 했다.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 저 자신한테 서운할 거 같아요.”

나는 이제 나 자신에게 서운하기 싫었다.

***

범인은 생각보다 나이가 무척이나 어렸고, 몸집도 작았다.

사실 사람들한테 말한 것과 달리 경찰서로 가는 길이 약간 무섭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를 작정하고 해치려고 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막상 만나자 아무렇지도 않았다.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홱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말을 쏟아 냈다.

“어차피 저 이따 풀려나요. 경찰에서도 혐의 애매하다고 다 이야기했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빠네 회사에서 일 크게 안 만들려고 그냥 넘기려는 거, 다 아시죠? 오빠네 변호사도 왔다 간 거 알아요.”

덤덤한 척하는 표정과 일부러 톤을 높인 듯한 목소리. 아무리 봐도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었다.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아마 다른 연예인들도 당했을 겁니다.’

회사 변호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었다. 그리고 나보고 조심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막상 만난 범인은 평범해 보였다. 물론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이 특이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편견이지만 말이다.

나는 말없이 여자의 앞에 마주 앉았다. 내가 마주 앉을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는 티가 역력했다.

“왜 오셨어요? 어차피 저 이제 가 볼 거라니까요?”

대답을 바로 안 하자 여자는 더 불안해했다. 다리를 떨고 손을 맞잡은 채로 달달 떨면서도 어떻게든 덤덤한 척하려는 모습이 이제는 슬슬 안쓰럽기까지 했다.

“궁금해서요.”

내가 운을 떼자 갈 곳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시선이 겨우 내 쪽을 향했다.

“궁금해서 왔어요. 어떤 분인지, 왜 그랬는지.”

여자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더니 황당하단 표정을 했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보통 연예인은 이런 데 잘 오지 않으니까. 변호사도 괜한 빌미를 줄 수 있으니 안 가는 게 좋지 않으냐고 했다. 이런 사소한 행동이 나한테 불리해질 수도 있단 거였다.

“그것뿐입니다.”

말을 마무리하자 여자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뜸을 들이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저도….”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왜 그랬는지.”

“…….”

“안 믿으시겠지만 저 아직도 오빠 팬이에요. 그런데 왜 자꾸 이런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오빠가 잘됐으면 좋겠는데, 부럽고 미워요.”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원래 팬심이란 게 뒤틀리게 마련이란 사실은 스토커를 통해서 이미 겪어 봤다. 다만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제가 왜 미운지는 생각해 봤어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완벽해 보여서 짜증 났어요.”

…그 대답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가 완벽해 보여요?”

겨우 되묻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잣집에 살고, 어릴 때부터 연기 잘했고, 잘생겼고, 인성 좋고…. 연예인들도 다들 오빠 좋아하잖아요.”

아직 대답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아 멍하니 있자 그녀는 약간 격양된 어조로 말을 더 이었다.

“솔직히 이런 말 웃긴데, 오빠가 뭐라고 다들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운 좋아서 부잣집에 태어나서 연기한 건데. 대학도 연예인 특별 전형으로 들어갔잖아요. 아역 때 찍었던 A사 광고도 오빠네 아버지 계열사고.”

나에 대해서 관심이 엄청 많구나. 이래서 안티로 돌아선 팬이 무섭다고들 하는 건가. 좋아하는 만큼 알게 되었지만, 아는 만큼 더 많이 미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는 내 눈치를 보더니 얼떨결에 같이 일어섰다. 앉으란 손짓을 하고 돌아섰다.

“오빠, 가는 거예요?”

딱히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나섰다. 그녀가 미운 건 아니었다. 미울 만큼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단지 조금 충격을 받았을 뿐이었다. 뻔히 알고 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음에.

그녀는 착각하고 있다. 나는 완벽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다. 운이 좋은 건 사실일지 몰라도 말이다.

아무리 잘하고 완벽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실은 내가 열다섯 살도 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왜 잊었을까,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보이는 직업으로 살았으면서. 바보 주희설.

“오빠, 진짜 가요?”

여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매니저 형은 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나오자마자 잔소리를 퍼부었다. 법무 팀에서 난리가 났다느니, 사장님이 전화를 몇 통 하셨다느니, 심지어 자기가 미워서 말을 안 듣느냔 말까지 하는 걸 보니 이번엔 정말 내가 잘못했구나 싶었다.

“죄송해요.”

진지하게 사과하자 매니저 형은 약간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됐다….”

음, 진짜 미안해졌다. 회사에 말해서 형 월급 올려 달라고 해야지.

“그건 그렇고, 전에 너랑 미팅했던 그 영화.”

“아, 네.”

“연락 왔더라. 네가 말한 수정 방향이 마음에 든다면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던데?”

“어, 정말요? 그땐 분위기 완전 구리더니?”

매니저 형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기들끼리 생각해 보니까 좋았나 보지.”

“와….”

약간 얼떨떨했다. 사실 영화라는 게 배우가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바꿀 수 있다 해도 앞으로 거쳐야 할 컨펌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안한 의견이 받아들여졌단 사실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우리 희설이, 이제 프로듀싱도 하는 거야?”

“하하.”

머쓱하게 뒤통수를 문질렀다.

“형.”

“왜.”

“나, 영화 회사 차릴까요?”

“…….”

“농담이에요, 정색하지 마세요.”

“응, 그렇지?”

사람 얼굴이 그렇게 순식간에 썩어 갈 수 있단 사실을 처음 알았다.

***

두 번째 미팅은 성공적이었다. 제작 팀은 최대한 내 의견을 반영하고 싶다고 하며 이것저것 물어 왔다. 나는 신이 나서 떠오르는 생각을 다 말했다. 말하고 나니 너무 나댔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 배우가 직접 제작에 참여할 기회가 별로 없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제작사 측과 감독님이 이전보다 조금 더 호의적인 게 티가 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부공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공태 씨, 나 천재인가 봐요.

쉬는 시간인지 답변이 금세 왔다.

이제 알았습니까?

난 진작 알고 있었는데.

진짜, 부공태가 문자할 때 사투리 적게 쓰는 건 솔직히 좀 불법인 것 같다. 업무상 보내는 메시지에는 사투리를 쓸 수 없어서 버릇을 일부러 들였다는 말을 일전에 해 준 적이 있었다.

오늘도 파이팅이에요, 내 사랑.

그를 닮은 곰돌이 이모티콘도 연달아 보냈다.

미팅이 끝나고 바로 찾아간 곳은 아버지네 회사였다. 회의 중이라고 해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회의를 중단하고 나를 불러들였다.

“회의 멈추실 거까진 없는데.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빈 회의실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지친 기색으로 안경을 벗었다.

“됐다. 어차피 다 보고받은 거 형식적으로 한 번 더 주절거리는 자리라.”

나는 아버지와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네가 찾아온 걸 보면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일은 아니고…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잠깐 긴장되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저, 완전히 독립하고 싶습니다.”

곧바로 화를 내거나 무시하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의외로 덤덤한 표정이었다.

“제집으로 이사 가는 것만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이제 작품 고르는 일 포함해서 제 일들, 그리고 사적인 영역 모두 알아서 다 할 거예요.”

“이미 다 결정하고 온 거구나.”

참았던 숨을 작게 내쉬었다.

“…네.”

아버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가 아니라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네게 문제가 생겨도 크게 불거지지 않은 건 내 덕이었다.”

“…알고 있어요.”

“이 세상은 거대한 사냥터다. 연예인이란 직업은 더더욱 잡아먹히기 좋아. 너처럼 순진한 녀석이라면 표적이 되기 십상이고.”

아버지 말은 사실이다. 아역 때부터 밀어준 것도 사실이고, 내가 순진한 것도 사실이다.

“독립하겠단 말은, 네게 있어 가장 큰 방패를 스스로 내버리겠다는 말과 같아. 그래도 괜찮으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온 것도 아니고,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도 아니었다. 사실은 영화 첫 미팅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이제 저도 제 방패를 만들려고요.”

사실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다. 아버지 후광으로 떴다는 말이 신경 쓰이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독립을 완전히 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는 나올 거다.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달고 다니겠지. 어쩌겠나. 내가 아버지 아들로 태어난 걸.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고 말이다.

물론 앞으로 아버지를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건 아버지와 아들로서여야 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랑 저는 평범한 부자지간이 아니었잖아요.”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그렇고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도, 내 직업도 앞으로 우리 부자 관계를 평범하게 해 주진 못할 터다.

“그래도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보니 흰머리가 많이 늘어나 머리칼의 절반 정도가 희끗했다. 염색할 시간도 없으신가.

“네 생각이 그렇다면 독립인지 뭔지, 한번 해 봐라. 나중에 징징거리진 말고.”

“에이, 그래도 저 양심 있는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키우셨잖아요.”

아버지랑 나 사이의 앙금은 아마 오늘 하루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작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앞으로 혼자서 잘 살아 볼게요. 아버지, 너무 제 걱정은 마세요.”

문득 아버지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존심이 상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착각이겠지?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어쨌든 그 말씀 드리려고 왔어요. 아버지 괜찮으신지도 볼 겸 해서요.”

“네 앞가림이나 잘하려무나.”

허리를 꾸벅 숙이고 문을 열기 직전, 한마디가 생각나 얼른 덧붙였다.

“참, 아버지. 백발 은근 잘 어울리세요.”

아버지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무시하고 얼른 회의실을 나와 버렸다.

***

날씨는 화려할 정도로 좋았다. 나는 컴백을 위해 본격적으로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했다.

바로 부공태에게 말이다.

부공태를 경호원으로 고용하는 건 회사 쪽에서도 난감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징계를 받고 사직서를 낸 사람이니 말이다. 물론 나는 그게 부공태의 잘못이라고 생각 안 하지만.

하지만 트레이너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회사에서도 그것까진 반대를 하지 못했다. 물론 내가 좀 우긴 것도 있었다.

문제는 부공태가 너무나 열성적이란 점이었다. 내 애인이 개인 트레이너라는 건, 하루 종일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과 같았다. 물론 부공태는 괴롭힘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아, 죽을 것 같아요….”

“사람은 그래 쉽게 안 죽심더.”

운동을 끝내고 누워 있는 내 옆에 부공태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툼한 허벅지가 얼굴 옆에 자연스레 위치하자마자 그 튼튼한 것을 당겨 머리를 베고 모로 누웠다. 부공태는 익숙하게 다리를 조금 벌려 내가 베고 눕기 편하게 해 주었다. 물론 그래 봤자 딱딱한 건 내가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부공태는 내 식단과 생활 습관을 교정해 준다는 명목으로 다시 내 집에 와서 살고 있었다. 한 침대를 쓰면서 말이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매일, 혹은 하루에 몇 번씩 몸을 섞는다는 것, 그리고 운동할 때만큼은 침대에서와 달리 나를 봐주지 않는다는 것.

아버지의 회사는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팬 미팅을 망치려 했던 사생팬은 훈방 조치로 풀려났다. 대신 자발적으로 내게 자필 사과문을 써서 보내왔다. 사과문은 꽤 정성스러웠다.

나는 공황 장애 치료를 계속 받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 가는 횟수와 먹는 약 개수는 줄어들었다.

찍기로 한 영화는 회의를 거쳐 각본 수정에 들어갔다. 다른 출연자들도 거의 다 섭외되었다.

“공태 씨.”

“예.”

“나 하고 싶은 게 하나 생겼어요.”

“뭔데예?”

단단하기 그지없어서 베개로는 완전 꽝인 그의 허벅지를 억지로 꾹꾹 눌러 베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회사 하나 차리려고요.”

“오오, 사장님 되는 깁니꺼?”

“뭐… 그 전에 준비하고 공부할 게 좀 많겠지만요.”

일단 대학부터 다시 다닐 생각이었다. 연기 말고 연출 전공으로. 그리고 차근차근 실력이 쌓이면 조금씩 인력들을 납치… 아니, 스카우트해야지. 일단 매니저 형부터.

그리고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 것이다. 영화 전반에 대해 먼저 공부해야겠지만, 나는 연기만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일이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연기를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프로듀싱을 하고 싶었다. 연기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나는 내 세계가 연기에 갇혀 있길 바라지 않았다. 더 많은 걸 배우고, 더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또 여러 가지를 배우고 싶었다. 프로듀싱은 아마 그 첫 걸음이 될 것이다.

“공태 씨는 나 회사 차리면 무조건 와야 해요.”

“하모요. 당연하제.”

“경호원 말고, 다른 걸로요.”

“경호 말고 뭐?”

“몰라, 그때 가서 생각해요.”

부공태의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쓸었다.

“내는 우리 희설이 경호하는 게 제일 좋은데?”

살포시 웃는 얼굴이 무해했다.

“…진짜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눈을 감았다.

갑작스레 숨이 막히고 가슴이 뛰는 이 병은 언젠간 나을 것이다. 지금처럼 부공태가 옆에 있을 땐 아무렇지 않다는 게 그 증거였다.

“희설아.”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아서 일부러 대답 않고, 눈을 감은 채 장난스럽게 미소만 띠었다.

“설아.”

그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있자니 그의 손가락이 장난치듯 내 얼굴 곳곳을 만져 댔다. 키득거리며 그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앞으로 배우 주희설은 많은 일을 겪게 될 것이다.

또 한종수 같은 미친놈이 덤벼들 수도 있고, 스토커는 계속 생겨날 거고, 아버지와 화해하는 일은 평생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대도 뭐 어떤가. 나는 연애 한번 못 해 보고도 이렇게 잘난 남자를 애인으로 얻었으니, 다른 일도 어떻게든 되겠지.

사냥법을 알아야만 사냥에 성공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리숙하다고 무조건 당하고만 사는 것도 아니다. 이 매정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부공태가 내 얼굴을 만지는 것을 멈추고 제 허벅지에다 내 머리를 바로 얹어 주었다. 운동 후의 기분 좋은 피로가 밀려들자 절로 졸음이 쏟아졌다.

내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내 사랑스럽고 우직한 곰탱이가 곁을 지키고 있으니 조금 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곰탱이 사냥법’ 끝, 외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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