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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스러운 배우님 (15/18)

내 사랑스러운 배우님

부공태에게는 바쁘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바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최근 들어 일감이 똑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K전자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고 관련되었던 이들이 모두 잡혀가면서 그래도 유족들에게 어느 정도 위안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연예계는 기본적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면 루머를 싫어했다. 나는 아무런 죄가 없지만 사람들은 본래 기억하고 싶은 대로만 기억하는 법이다.

게다가 내가 아버지의 힘을 업고 연말 시상식의 상을 휩쓸어 갔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듯이 보였다.

결국 친아들인 건 맞잖아?

솔직히 ㅈㅎㅅ 연기 진짜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긴 해?ㅋㅋ

ㅈㅎㅅ 예전 인터뷰 인성 보인다

내 지인이 연예계 쪽에서 일하는데 주대갈 유명하대;

심한 비방은 회사에서 막고 있긴 하지만, 익명 사이트에서 퍼지는 글을 모두 막기는 사실상 힘들었다.

부공태는 태권도 반 하나를 더 맡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체육관 관장이 그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도 부공태를 잘 따른다고 했고, 무엇보다 본인이 보람을 느꼈다.

- 마, 바빠 가꼬 정신이 읎네예. 아, 우리 배우님하고 쫌 놀라 카이까네.

“에이, 공태 씨 일이 중요하죠.”

- 배우님은 요즘 괘않십니꺼?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다정해서, 하마터면 그에게 기댈 뻔했다.

“저도 이제 새 일 시작하려고요.”

- 잘됐네예. 응원합니데이.

“고마워요.”

사실 그에게 말한 것과 달리 작품 제안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좋은 일도 아닌데 부공태가 딱히 알 필요는 없으니까 구태여 징징거리지 않았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나날이 다시 이어졌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받아 온 약은 내 수면을 규칙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현대 의학의 힘은 역시 놀라웠다. 그 뒤로도 심장이 갑자기 뛰고 숨이 차는 일이 몇 번 있었지만, 이전보다는 많이 줄었다.

낫기 시작하면서 나는 새삼 허전함을 느꼈다. 큰 작품, 찍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품을 끝내고 나서 느끼던 감정과 비슷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유일한 위안은 부공태와 영상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휴대폰으로나마 보고 나면 용기가 났다. 그가 곁에 있는 것 같았다.

- 오늘 내가 얼라들한테 받은 거 비 주까예? 이거 보이소. 학교에서 맹글었다 캄서 갖고 왔드라.

“오오, 완전 인기 선생님.”

- 인기 선생님 발차기 함 비 주까예?

“네!”

- 딱 있으 봐라.

부공태는 내가 그의 발차기를 엄청 좋아한단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영상 통화를 할 때마다 매번 발차기를 보여 주었다.

- 똬이야쉬!!

그러면 나는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배우 주희설이 아니라 부공태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 사실이 행복했다.

***

매니저 형이 집으로 찾아와서 오랜만에 수다를 떨고 놀았다. 저번에 화를 낸 탓인지, 형은 이제 내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거나 괜찮냐고 묻거나 하지 않았다. 형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내 눈치를 보는 게 미안해서 일부러 밝게 굴었다.

“참, 이번에 시나리오 새로운 거 하나 들어왔다.”

“헉. 진짜요?”

이러다가 소리 소문 없이 잊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다행이다. 형이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었다.

“대신 조연이야.”

그러고 보니 조연 해 본 지가 오래되었다. 뭐든 일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단역이라도 감사히 받았을 것이다.

“읽어 볼게요.”

“무리하지는 말고.”

걱정을 애써 숨기며 무심히 뱉는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는 굉장히 독특했다. 과거와 현재를 정신없이 오가고, 등장하는 인물도 많았다. 내게 제안이 들어온 인물도 말이 조연이지 거의 준주연급이었다.

‘재미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바로 재밌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었다.

유독 눈에 띄는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주인공이 자신의 공포를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어쩐지 내게는 그 장면이 클라이맥스 부분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영상으로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밤이 늦을 때까지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시나리오 옆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

며칠 뒤, 매니저 형에게 연락이 왔다. 준 시나리오를 읽어 봤냐는 것이었다.

전화를 받으며 시나리오를 넘겨 보았다. 내가 메모를 해 둔 부분을 찾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 제작사도 괜찮고, 너 이번에 가볍게 들어가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여. 내 생각에는.

나랑 오랫동안 일한 형은 나한테 뭐가 어울리는지,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정확하게 알아냈다. 이번 작품도 형이 생각하기에 괜찮다고 하니 마음이 더 동했다. 무엇보다 내가 꼭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겁이 났다.

새벽까지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읽고, 내 나름대로 메모까지 해 둘 때는 언제고 덜컥 두려움부터 앞섰다.

- 혹시 하기 싫은 거면….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의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빨리 작품을 찍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이 역할을 연기할 걸 생각하니 설레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려움은 의욕과 별개였다. 이걸 매니저 형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실 뭐가 겁이 나는지 알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나는 다시 연기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보 같아.’

나 주희설이 이렇게 소심한 바보 멍청이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건 이 두려움을 통제할 수가 없단 거였다.

“죄송해요, 형. 일단…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이룬 것 중 반은 허상이었다. 나 혼자 이룬 게 아니라 감독이, 대본이, 시기가, 투자자를 잘 만나서, 운이 좋아서 이룬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배우 주희설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들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예감은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휴대폰 메시지 알림이 울려 확인해 보니 부공태였다.

우리 배우님 밥은 먹었나?

참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 픽 웃고 답장을 보냈다.

조금 이따 먹으려고요. 공태 씨는요?

읽음 표시가 뜨기 전에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추가로 입력했다.

보고 싶어요.

하지만 보내지는 않고 그냥 지워 버렸다.

또 하나의 두려움을 깨달았다. 나의 이 유약함이 부공태에게로 향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

부공태는 애인이지, 내 보호자가 아니다. 그러니 내 하소연을 들어 주거나 달래 줘야 할 의무는 없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에게 내가 치대지는 않을는지 걱정이 되었다.

‘역시 일을 빨리 해야겠어.’

겁이 나더라도, 정말로 카메라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일단은 내게 들어온 작품을 받아들이는 게 맞을 것이다.

내일까지만 버티고 매니저 형에게 꼭 연락을 해야지, 결심했다.

***

“자자, 자세 똑바로 잡고! 사부님이 머라 캤노. 허리 피라 캤제?”

자세를 잡아 주자 아이는 곧잘 따라 했다. 부공태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있는 다른 아이를 봐주었다.

체육관 일은 굉장히 즐거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이렇게 보람찬 줄 알았더라면 진작 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부공태는 지금 그 보람찬 일을 하면서도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바로 자신의 연인 때문이었다.

‘바빠 가꼬 몬 본다꼬 서운해하믄 우짜지….’

연애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일이 많아져서 그 역시 아쉬웠다. 물론 주희설이 그런 일로 서운해할 만큼 속이 좁지는 않지만 말이다.

‘보고 싶네.’

원래 이렇게 본 지 며칠 안 지났는데도 자꾸 보고 싶고 그런 게 맞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기분을 견디지? 연애가 이렇게 괴롭고 목마른 것이었던가? 부공태는 혼란스러웠다.

쉬는 시간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까 생각했지만 그를 방해하기는 싫었다. 최근 들어 일을 다시 시작했다니 못 만나는 날이 더 잦아질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그케도 내가 배우님을 방해하믄 안 되지….’

부공태는 걱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주희설이라는 대단한 사람에게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그렇게 대단한 배우에게 남자 애인이 있다고 알려진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약점으로 붙잡고 물고 늘어질 터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은 미련 없이 주희설을 떠날 수 있을까.

‘마, 씰데없는 생각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미리 걱정하는 건 부공태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주희설을 욕보이는 놈이 있다면 제 주먹으로 응징해 버리면 될 터다.

부공태는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다시 아이들에게 집중했다. 그가 신호를 주자 조그마한 주먹들이 기합과 함께 뻗어 나갔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퇴근이 기다려지는 제 아이디어를 자화자찬하며 부공태는 씨익 웃었다.

“헐, 사부님 왜 저래…? 무서워.”

“몰라. 너 잘못한 거 아냐?”

“누구 죽일 거 같다….”

어린 제자들의 중얼거림은 이미 귀에 들리지 않았다.

***

매니저 형과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받은 시나리오를 하겠다고 말했다. 매니저 형은 정말 잘 생각했다며, 잘될 거라고 나를 격려했다. 하지만 걱정은 여전했다. 자칫 병이 도져서 또 카메라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면 어쩌나, 하는 바보 같은 걱정을 왜 떨칠 수가 없는지 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부공태와는 잘 지냈다. 그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 잠깐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짧게나마 그를 만나는 순간은 마치 물속에 잠겨 있다가 물 밖으로 나와 숨통이 트이는 순간같이 청량했다.

나는 그에게 내 고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좋은 일도 아닌데, 굳이 말해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병은 금방 나을 거니까.

그러던 어느 날, 택배로 무언가가 배달되었다. 주문한 게 딱히 없는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상자를 열어 보자 노트가 들어 있었다.

‘뭐지?’

혹시라도 스토커가 이상한 걸 보내진 않았겠지. 반사적으로 약간 겁이 났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기에 감을 믿고 노트를 집어 들었다. 부공태가 있었다면 분명 노트와 상자를 꼼꼼하게 몇 번씩이나 확인했을 텐데.

그리고 노트 위에 적힌 글씨를 보고 나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우리 배우님에게

‘우리’ 배우님이래. 간질간질한 호칭에 몸이 꼬였다.

노트를 펼친 순간, 나는 그대로 굳고야 말았다.

이 노트는 부공태가 만든 영화 감상 노트였다. 내가 나오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고, 캡처를 해서 프린트를 하고, 그 장면에 대한 세세한 감상까지 모두 적어 놓은 감상 노트.

부공태의 글씨는 그답게 시원시원하며 큼직했다. 별달리 꾸미거나 한 흔적은 없지만 빼곡하게 쓴 글자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동했다.

팬들에게서 작품 관련된 팬 아트나 좋은 댓글 모음집 같은 것은 받아 봤지만, 이렇게 모든 작품을 다 보고 한꺼번에 적은 감상문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출연작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부공태는 무려 스물두 개의 영화와 드라마를 다 찾아보고 그에 대한 감상을 하나하나 다 남겼다. 이제 보니 VOD는 캡처하기가 힘들었는지 몇 개는 TV를 휴대폰으로 직접 찍은 듯했다. 그것도 부공태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긴 감상문은 조금만 읽어도 애정이 느껴졌다. 캐릭터가 아닌, 배우 주희설에 대한 애정 말이다. 작품과 캐릭터에 집중하는 평론가의 해석과는 결이 달랐다.

배우님의 첫 번째 팬은 못 되었지만 배우님의 가장 열렬한 팬은 될 자신이 있습니다.

노트의 마지막에 쓰인 문구를 보니 코끝이 찡했다.

다 읽자마자 나는 부공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공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놀라고 들떠서 횡설수설하는 내 말을 그는 차분히 들어 주었다. 그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 빌꺼는 아이고… 배우님 얼굴 볼라꼬 영화 틀었다가 마, 이참에 감상이나 써 보자 싶어 가꼬 대충 써 봤심더.

“대충이 아니던데요! 노트 한 권을 거의 다 채웠잖아요.”

- 에이, 뭐 그기 빌끼라꼬. 배우님 얼굴 보는 김에 썼다카이.

수줍어하는 그의 얼굴이 상상 가서 웃음이 났다.

“내 얼굴이 보고 싶었어요?”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뚝 끊겼다. …정말인가 보네. 덩달아서 나도 얼굴이 붉어졌다.

“저도… 보고 싶어요.”

작게 말하자 으흠, 하고 수줍어하는 듯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열심히 썼는지 꼬깃꼬깃해진 노트 끝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생각했다. 부공태는 내가 가진 가장 큰 행운이니 이 행운이 조금만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

며칠 뒤, 감독과 작가, 제작사와의 미팅이 있었다.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오랜만에 일 관련된 사람을 만나니 나도 기분이 좋았지만, 언제 또 저번처럼 상태가 안 좋아져 미팅을 망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매니저 형 역시 내가 걱정이 되는지 옆에 앉아서 내 쪽을 흘끔거렸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을 때쯤 내가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내어 보았다.

“참, 그리고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감독이 사람 좋게 웃어 보였으나 제작사 측은 딱히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약간 주눅이 들었지만 내색 않고 말을 꺼냈다.

“아, 저, 별건 아니고요. 시나리오를 읽다가 보니 한 가지 의견이 떠올라서요.”

그리고 나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 메모했던 내용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별건 아니고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들이었다.

“음, 흥미롭기는 하네요.”

딱히 기대는 안 했지만, 감독의 표정이 딱히 좋지 않은 걸 보니 좀 섭섭했다. 뭐, 그냥 제안이니까 안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끼리 의논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네, 당연하죠. 천천히….”

의논하시라고 말하려는데, 제작사 쪽 사람이 끼어들었다.

“영화 모르는 사람의 의견을 다 받아들이다 보면 사실, 작품이 산으로 가게 마련이거든요.”

“…….”

뒤이은 말에는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제작 전문가가 아닌 건 사실이긴 한데….

“이런저런 잡다한 말을 다 수용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가 엎어진 영화가 꽤 돼요. 모르시겠지만.”

기분이 묘하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고개만 끄덕였다.

“뭐, 어쨌든 이렇게 의견도 내 주시고 하니 아주 대견하십니다. 하하.”

“아, 네, 감사합니다….”

칭찬인데도 어쩐지 좀 얼떨떨해서 어색하게 대답해 버렸다.

어쨌든 미팅은 무사히 마쳤다. 매니저 형은 여전히 내가 걱정되는 모양인지 제작사에서 한 말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신경 안 쓰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웃어 주었다.

“안 바쁘면 오랜만에 회사 근처에서 밥이나 먹고 가자. 할 이야기도 있고.”

생각해 보니 형이랑 밥 먹은 지도 꽤 되었기에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딱히 멀리 가기도 귀찮고 해서 회사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모자를 벗고 있어도 쳐다보는 시선이 없어 편했다.

“할 말이 뭐예요, 형?”

“아, 그게….”

형은 조금 뜸을 들이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팬 미팅을 하자고 하더라고.”

좀 의외였다.

“지금요? 시기가 안 좋지 않나.”

내 몫의 돈가스를 자르며 무심히 말했다. 안 그래도 안티가 늘어난 시기에 팬 미팅이라니. 보통은 이런 때는 피하게 마련이었다.

“음… 회사에서 버즈를 타고 싶은가 봐.”

“아, 신인 가수 나와요?”

매니저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해했다. 내 팬 미팅에 게스트로 신인 가수를 불러서 이름을 좀 알리겠다는 거였다.

“뭐, 해야죠. 좋은 일인데. 그나저나 오히려 폐가 되지 않으려나, 그게 걱정이네요.”

“그럴 리 있냐! 그쪽이 감사하다고 해야지! 감히 누구 덕을 보려는 건데…!”

형이 버럭 하더니 갑자기 앞접시에 라면을 덜어서 내게 내밀었다.

“많이 먹어! 먹기 싫어도 먹어!”

“고마워요.”

오랜만에 먹는 라면은 굉장히 맛있었다.

배부르게 잘 먹고 구내식당을 나오는데, 누군가 내 쪽을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회사 안이기도 하고 형이랑 이야기를 편하게 하고 싶어서 경호 팀은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바로 뒤에 있는 식당에도 사람이 많지만, 괜히 신경이 쓰여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매니저 형은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잡겠다며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저….”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가까워지더니 팔을 붙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번엔 뭐가 날아올까. 칼만 아니면 좋겠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자니 붙들고 있던 손이 조심스레 떨어졌다.

“저… 팬이에요.”

습격이 아닌가…? 슬그머니 고개를 드니 나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여자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영광이에요! 힘내세요, 배우님!”

기분이 이상했다. 습격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보다 창피함이 더 컸다.

“…감사합니다.”

겨우 대답하고 매니저 형을 따라갔다. 힘내라는 말이 귓가에 오래 남았다.

***

애인이 생긴 뒤,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방을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부공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주희설의 필모그래피를 모조리 훑었으며, 밤을 지새워서 감상을 손으로 썼다. 그리고 그것을 선물로 주었을 때 주희설의 반응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연애가 처음이니 이런저런 조언을 찾아 보고, 또 구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친구들의 놀림을 왕창 받아야 했지만, 좋은 데이트 코스와 밀당의 기술을 전수받았으니 보람 있었다.

부공태는 열심히 준비를 했다. 주희설과 더 열렬하게 연애할 준비 말이다.

오늘은 바로 그 ‘준비’를 마칠 날이었다.

그는 한 건물 앞에 서서 비장하게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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