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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점이 몇 점이에요?”
부공태에게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나를 측은하게 보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공태 씨도 해 봐요, 얼른.”
“예에.”
부공태도 동전을 넣었다. 그는 기계 앞에서 태권도 발차기 전의 동작처럼 앞뒤로 톡, 톡, 빠르게 제자리 뛰기를 하더니 주먹을 뻥! 하고 날렸다.
“……?”
…그리고 펀치를 때리는 부분이 넘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 머꼬. 와 이라노?”
“공태 씨가 너무 세게 때려서 고장 난 것 같은데요.”
와, 펀치 기계를 고장 내는 남자라니. 역시 부공태는 최고였다. 부공태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커다란 덩치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딱 곰돌이 같았다.
“아이고… 아이고, 이그를 우짜노.”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손목을 덥석 쥐고 나는 비장하게 외쳤다.
“튀어요! 빨리!”
그리고 우리는 망가진 기계를 두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흘끔 돌아보며 고깃집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중에 매니저 형한테 내 통장에서 배상해 주라고 부탁해야지….’
형한테 이런 것까지 시켜서 미안하지만, 전에도 이런 자잘한 일을 처리해 준 적이 몇 번 있었고 인센티브를 넉넉하게 챙겨 주면 형도 싫어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깃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렸다.
그는 이 근처에 타르트를 파는 가게가 있다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걸으면 금방 도착하는 거리지만 날씨도 덥고, 내 신변 문제도 있으니 그는 근처에 주차된 차를 코앞까지 끌고 왔다.
기분이 좋았다. 에어컨은 시원했으며, 옆의 운전석에는 오랜만에 만난 그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데이트 중이다. 이걸 데이트라고 불러도 되겠지? 밥 먹고 카페 가는 게 데이트지. 별게 데이트인가.
“헤헤.”
나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좋은교?”
“네. 오랜만에 공태 씨 얼굴도 보고… 밖에도 나오고.”
사실 첫 번째 이유 때문이지만 괜히 부끄러워서 말을 덧붙인 것이었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공태는 근사하게 씩 웃었다. 운전하면서 이렇게 입꼬리 틀어 올려 웃는 거, 반칙 아닌가?
‘그나저나 정말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이제는 부공태를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때맞춰서 나타난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을 운명이니 뭐니 하고 받아들이기엔 지쳐 있지만, 그렇다고 내치기에는 아직도 마음이 덜 식었나 보다. 아니, 사실은 단 한 번도 부공태에 대한 마음은 식은 적이 없었다.
“배우님, 내가예, 생각을 쬐매 해 봤는데….”
그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할 때였다. 심장이 갑자기 쿵쾅대기 시작했다.
‘휴, 왜 이렇게 난리람.’
아무리 짝사랑 상대가 옆에 있다지만 이건 좀 심하… 지… 않나. 하는 생각과 함께 숨이 턱 막혔다.
부공태가 뭐라고 했지만 들리질 않았다. 눈앞이 검게 변하고 식은땀이 났다. 당장 죽을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전에 카메라를 보고 느꼈던 증상과 똑같았다.
‘왜 하필이면 지금….’
그제야 의사가 말을 덧붙였던 게 기억났다. 갑자기 이유 없이 심장이 뛰고 숨이 막히는 증상이 또 나타날 수 있는데, 당황하지 말라고. 완전 돌팔이다.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당황하지 않느냔 말이야.
“배우님?”
옆에 앉은 부공태의 목소리가 꼭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숨을 쉬려고 애쓰며 헐떡거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려… 주세요.”
“예? 배우님, 병원으로 바로 가입시더. 바로 옆인데.”
“내려 주세요!”
빽 소리를 지르자 놀란 부공태가 차를 세웠다. 잠깐만예, 하고 나를 부르는 것을 무시하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내달렸다. 그저 부공태에게 못난 내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게 무슨 추태야.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부끄러웠다.
어느새 도착한 곳은 어느 건물 사이의 좁은 담벼락이었다. 조금 괜찮아진 호흡을 고르며 얼굴을 닦았다. 뺨이 흠뻑 젖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담벼락 그늘에 숨어 헐떡거리고 있자니 저 멀리서 부공태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뭐 이렇게 잘 찾아!’
정말이지 도망간 보람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슬금슬금 움직이는데 부공태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들려 왔다.
“배우님예!”
사람들 있는 데서 나를 크게 부르다니. 물론 이름은 안 불렀지만 괜히 움찔하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나를 쳐다보는 사람보다 부공태를 쳐다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부공태도 얼굴이 약간 알려진 터라 괜히 내가 얼굴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도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골목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자 점점 어둡고 음침한 길이 나왔다. 쓰레기통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사이사이로 작은 문들이 있는 걸 보니 상가 뒤쪽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듯했다.
일단 거대한 쓰레기통 뒤로 숨었다. 솔직히 내가 왜 도망치는지도 모르겠고, 이렇게까지 도망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솔직히 부공태의 거대한 몸뚱이가 날아오듯이 다가오면 누구라도 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공태는 기어코 쓰레기통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뒤에서 끌어내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쓰레기통을 붙들고 매달렸다. 안에 쓰레기봉투가 가득 차 있는 거대한 쓰레기통이 내 마지막 방어벽이었다.
“위험합니더.”
내 앞을 버티고 있는 든든한 방어벽이 갑자기 덜컹, 흔들리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들려 올라갔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더 도망칠 생각도 안 하고 멍하니 허공에 들린 거대한 쓰레기통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무슨 사람이 이렇게 힘이 세냐고!’
저거 보통 장정 두세 명이서 겨우 기울이는 거 아니냐고.
부공태는 들어 올린 쓰레기통을 옆에 사뿐하게 내려놓더니 청바지에 손을 쓱쓱 닦고는 내게 내밀었다.
“괘않심꺼?”
“저, 저 주희설 아니에요….”
얼굴을 가리고 마지막 발악을 했지만 부공태의 손목에 내 손이 붙들렸다.
고개를 들자 부공태의 얼굴이 보였다. 역광을 받은 그는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를 찾으려고 근처를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더는 내한테서 숨지 마이소.”
늦여름의 지독한 태양이 그늘을 이기고 뚫고 들어왔다. 뜨겁고 열렬한 계절이 묵직하게 내 위로 내리꽂혔다.
“그칼 때마다 내가 돌아 삘 거 같다, 마.”
나를 그렇게 걱정해 줄 필요 없다고,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튼튼하다고 변명하려는데 부공태가 나를 번쩍 들었다. 내 몸뚱이는 솜 인형처럼 가볍게 들려 부공태의 너른 어깨 위에 짐짝처럼 얹혔다.
“사, 사람들이 봐요!”
“보믄 우짤낀데.”
부공태답지 않은 대답인데, 이상하게 설렜다.
“그게 경호원이 할 대답이에요?”
“내 이제 니 경호원 아인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와중에도 ‘너’라는 호칭에 설레는 나는 정말 대책 없는 인간이다.
부공태는 나를 자신의 차 옆에다 내려놓았다. 병원으로 데리고 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부공태는 끝내주게 주차를 잘하는데, 주차선을 벗어나 삐딱하게 댄 차를 보니 그가 얼마나 급했는지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차 타기 싫으믄 택시 잡아 주께예. 아이믄 윤 실장님한테 연락하고.”
“아니, 아니에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있고 싶어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내가 부공태의 옷자락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부공태의 시선도 내 시선을 따라 붙들린 옷깃을 향했다.
“그래 안 잡고 있어도 같이 있을 끼다.”
괜히 부끄러워서 뿌리치듯 놓았다.
“왜, 왜 옷은 티셔츠에 청바지 같은 거 입고 오고 그래요!”
“와 시빈데! 귀엽구로!”
내 생떼 같은 트집에 또 잠깐 어색함이 흘렀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우물쭈물 부공태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깐 죄송했어요.”
진지하게 말하자 부공태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내한테 죄송할 게 뭐 있십니꺼. …매니저님한테 들었심더. 배우님 아프다 카는 거.”
하여튼 형은 별말을 다 해…. 뭐, 숨기거나 할 건 아니니까.
“별로 심각한 건 아니에요….”
걱정하지 말라고 한 말인데, 어째 부공태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사실은, 매니저님한테 내가 배우님 만나게 해 달라 캤심더.”
그리고 덧붙인 말.
“힘들다, 회장님 아시믄 클 난다 카는 거를 빡빡 우기 가꼬 제발 쫌 만나게 해 달라 캐가 이래 만난 깁니더.”
“…왜요?”
우연이 아닌 줄은 짐작하고 있었다만, 그가 매니저 형한테 간곡히 부탁했을 줄은 몰랐다.
“배우님이 보고 싶은 걸 우짭니꺼.”
…아, 이건 진짜, 진짜 반칙이다.
“안 보고는 못 배기겠는 걸, 우째야 됩니꺼.”
눈도 깜박이지 않고 쏟아지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부공태의 진지하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괘않십니꺼?”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당신이 계속 보고 싶었다고, 안 보고 견딜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나도 공태 씨와 같다고….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아니야, 아닐 거다. 헛물켜지 말자.
“하튼 간에… 내는 하루 종일 배우님만 생각나서 마, 내 대가리가 우째 됐나 싶을 정도로 정신이 읎고…. 캐가 만날 수밖에 없었심더.”
‘맞나…?’
헛웃음이 나왔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짝사랑하는 상대가 코앞에서 사랑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을 하고 있다.
수많은 작품을 찍었고, 그 속에서 수많은 상황과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내가 직접 그 상황이 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 러면….”
“암만 생각해도 내는 배우님 옆에 붙어 있어야 될 거 같심더.”
나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부공태가 미련 곰탱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미련 곰탱이였다.
“공태 씨.”
“예.”
“나 좋아해요?”
막상 물음을 내뱉을 때의 내 목소리는 덤덤했다. 부공태는 얼굴을 붉히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부공태는 곰 같은 사내지만, 절대 바보는 아니었다. 누가 부공태더러 바보라고 하면 흠씬 두들겨 패 줄 자신도 있었다.
내가 짝사랑하는 이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운동도 잘하고, 경호도 잘하고, 무엇보다 나만큼이나 고집이 세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나와 닮았다.
“예.”
단단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이 남자를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혹은 평생 사랑할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좋아합니더. 배우님. 그 말 할라꼬 오늘 보자 캤심더.”
생전 처음으로 짝사랑을 했는데, 그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꿈같은 행운이 내게 와도 괜찮은 걸까.
나를 내려다보는 부공태의 눈빛이 점점 그윽해지며 가까워진다 싶을 때쯤, 시선이 느껴졌다. 옆을 보자 누군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를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 혹시 주희설 배우 아니세요?”
큰일 났다. 나를 알아본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입니더!”
부공태가 대신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쪽이 대답하는 게 더 수상쩍어 보이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말을 건 사람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우리를 빤히 봤다.
“맞는 것 같은데…. 옆에는 그 유명하신 경호원분 같고….”
반짝이는 눈을 보니 다행히도 내 팬이신 것 같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나인 걸 밝혔다간 사람들이 몰려들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하, 잘못 보셨어요. 야, 가자, 공주야!”
공, 까지 말했다가 눈앞의 사람이 부공태를 알아봤단 사실을 떠올리고 얼른 이름을 바꿨는데, 좀 이상해졌다. 부공태는 한쪽 눈썹을 으쓱 들어 올리더니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어서 가자, 희석아.”
…방금 서울 말씨 쓴 건가? 묘하게 높아지고 어색한 음색이 낯설었지만 그건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그와 나는 친구처럼 손을 잡고 조금 떨어진 부공태의 차로 걸어갔다.
차에 타고 나니 긴장감이 풀리며 웃음이 났다. 옆에 앉은 부공태도 마찬가지인지 픽, 헛웃음을 흘렸다.
“뭐가 웃긴교? 클 날 뻔했구마.”
“공태 씨도 웃었잖아요? 나만 웃으면 안 돼요?”
“예. 안 됩니더.”
“왜요?”
부공태는 대답 대신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시동을 걸었다.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내 참, 대답이나 하지. 하지만 어쩐지 묻고 싶은 마음은 안 들어서 그냥 조용히 앞만 보고 있었다.
***
계속 주차한 곳에 있을 순 없으니 일단 우리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말할 수 없이 어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에 서로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둘 다 알지 못했다.
‘나야 그렇다 치지만, 부공태는 그래도 연애 안 해 봤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의 거시기가 보통 거시기가 아니니 절대 간수 잘하라던 그의 아버지 말이 생각났다.
뭐라도 말을 꺼내려고 애써 머리를 쥐어짜 내려는데, 부공태도 비슷한 마음인지 차 라디오를 켰다.
“오늘 사연은 미련 곰탱이처럼 자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게 된 커플의 이야기인데요.”
…그리고 바로 꺼 버렸다.
“어험, 험. 아, 마, 덥거나 춥으믄 이야기하이소.”
“네….”
“좀 쉬었다 가까예?”
“쉬었다 가요?”
옆을 보자 여관들이 즐비하게 있는 골목이었다.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나야 완전 땡큐지만.
“하하, 여는 뭐가 이래 없노….”
“그, 그럼 잠깐 쉬….”
“아이고, 파란불이네! 퍼뜩 가야지!”
쉬었다 가자고 하려 했는데 부공태가 액셀러레이터를 꽉 밟았다. 벨트를 안 맸으면 상체를 유리창에 박았을 것이다.
마침내 8차선 도로의 빨간불에서 잠깐 멈추어 섰을 때, 핸들을 쥔 부공태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배우님, 아직 내 좋아합니꺼?”
그렇게 묻는 부공태는 나를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핸들만 내려다보는 그가 귀여워서 당장 덮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공태 씨 안 좋아한 적 없어요.”
첫눈에 반했고, 지금까지 좋아하고 있다. 심지어 첫사랑이라고요.
부공태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나를 향했다. 얼굴색은 여전히 붉었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카믄, 우리 연애 함 화끈하이 해 볼래예, 배우님.”
“네!”
…너무 빨리 대답했나, 싶어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부공태의 눈이 천천히 휘더니 이내 웃음을 담아 냈다.
내가 본 부공태의 웃음 중에 가장 근사한 웃음이 그곳에 있었다. 나를 향한 채로. 오직 나만 보여 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