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실의 힘 (12/18)

진실의 힘

JH그룹 회장실. 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전면 창 앞에 서 있는 주 회장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서가 방금 전에 언론 대응 팀 팀장이 왔다고 전한 터였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정장을 갖춰 입었으나 떡이 진 머리에 퀭한 얼굴로 며칠 동안의 철야가 티 나는 남자가 들어왔다.

“회장님, 일단 보도는 끝났습니다. 현재 기사 다 뜬 상태입니다.”

주 회장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기사를 확인하자거나, 또 다른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다.

“저…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조금 고민하던 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제야 주 회장은 돌아섰다. 그 역시 얼굴이 많이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의자로 가서 몸을 파묻듯이 앉았다.

“진실의 힘은 강하지.”

그리고 눈을 감았다. 마치 이대로 잠이라도 잘 것처럼.

“다른 진실이 나오기 전까지 누군가의 목을 틀어쥘 수 있을 만큼.”

팀장은 딱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무슨 뜻인지 짐작은 했지만, 자신이 입을 털 위치는 아님을 알았다.

이제 그만 가 보겠다고 고하려는데 문득 주 회장이 눈을 떴다.

“…그런데, 주희설이는 지금 어디 있나? 집에 있나?”

***

나는 멍한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출생의 비밀에 충격을 받을 만큼 내가 미숙했던가? 아니면 한종수 놈이 망치로 후려친 것 때문에 이렇게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걸까?

한종수는 내가 멍하니 있는 동안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랑 하는 말이었으면 모르겠는데, 회장님 비서랑 단둘이 있을 때 한 말이야.”

…그렇다면 진짜일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지금 아버지 비서는 아버지를 이십 년 넘게 모셔 온 분이니 아마 나에 대해서도 잘 알 것이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났을 시기에 양아버지는 이미 배우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바람피워서 낳은 자식이란 거네. 그래서 여태 숨긴 거고.’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내 친어머니가 가여웠다. 정신병 있는 남편을 수발하느라 고생하고, 배우자도 아닌 사람의 아이를 낳고, 병에 시달리다가 떠나셨구나.

하지만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머니도 내가 지금 눈물이나 짜고 있길 바라시진 않을 거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한종수가 시뻘건 눈을 찌푸렸다. 아, 진짜 꿈에 나올까 무서운 얼굴이다. 좀비 역할 한번 해 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감방 갔다 오고 나서.

“네 말대로 양아버지가 아니고 친아버지라고 치자고. 그게 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내가 이해 안 간다는 투였다.

“그 사실이 다 까발려져도 당신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뭐래.”

“당신만 아니었으면, 나한테도 기회가 왔을 거라고.”

오호라. 평소에 나한테 싸하게 굴더니, 그런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구나.

“뭐, 내가 그쪽 작품을 빼앗아 가기라도 했다는 뜻처럼 들리네?”

“당신이 아니었으면, 당신 아버지가 밀어주지 않았으면 그 작품들 중에 몇 개는 내가 가져갔을 거야.”

헛웃음을 지었다.

“한종수 후배님, 넌 네가 무슨 대단한 고발자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것 같은데….”

손이 자유로웠으면 보통 영화처럼 이쯤에서 멋있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을 텐데, 묶인 게 아쉬웠다.

“넌 그냥 열등감에 절어 있는 삼류 배우야.”

한종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역시 열등감 맞네. 열등감 없으면 이런 말에 반응도 안 한다. 기회다 싶어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친아버지라서, 내가 배우 생활 잘하도록 여기저기 꽂아 주고 밀어주고 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아니라니까?”

“닥쳐! 원래 수혜를 받는 사람은 자기가 혜택을 받는 줄도 모르는 법이야!”

“아오, 진짜.”

갑갑해 죽을 것 같았다. 나도 아버지 혜택 빵빵하게 받았으면 말도 안 한다! 오히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은 다 먼저 쳐 낸 분이다.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데 발도 묶여 있어서 더 갑갑했다. 그냥 버둥거리는 걸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한종수 후배님. 그쪽 말대로 내가 아버지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치자.”

외국인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외국인은 보디랭귀지라도 통하지.

“내가 아버지 혜택으로 이까지 왔으면, 넌 지금쯤 죽은 목숨이겠네. 안 그래?”

이번에는 한종수도 좀 진지하게 말을 듣는 것 같았다.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는 걸 보니 내 말이 먹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친’아들이 없어졌는데, 아버지가 안 찾겠어?”

그렇잖은가. 그렇게 밀어주는 사랑하는 아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까. JH그룹의 재력이면 당장 사람 하나 찾아내는 것쯤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그런다고 쫄 거 같아요?”

“아니, 뭐, 쫄라고 한 말은 아니고. 조심하란 거지. 그리고 말이야… 후배님, 네가 진짜 착각하는 게 있어.”

나는 녀석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슬그머니 묶인 발을 바닥에 디뎌 보았다. 멍청한 자식. 묶을 거면 발목만 묶을 게 아니라 다리 전체를 의자에 고정해 뒀어야지.

“너는 나 때문에 재능을 못 펼친 게 아니야. 그냥 재능이, 아니, 실력이 없는 거지.”

한종수의 눈에 분노가 일었다. 나는 거기에 불을 질러 줄 생각이었다.

“잠 안 자고 연습? 남의 대사 외우기? 일 닥치는 대로 다 하기? 그거, 나도 매일 하는 거야. 생각해 봐. 촬영 현장에 누가 제일 일찍 왔는지.”

영화나 드라마를 찍을 때 나는 다른 스케줄이 없으면 항상 촬영 현장에 먼저 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감독님이나 스태프들과 소통했다. 같은 작품을 찍을 때 한종수가 나보다 먼저 온 적은 적어도 내 기억으론 없었다. 연습 시간? 적어도 내가 더 많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나는 역할이 제대로 익을 때까지 잠도 안 자고 연습하니까.

“그놈의 노력, 너만 하는 게 아니고 다 하는 거야. 아니, 네가 남들보다 적게 했겠지. 그러니까 네가 아직까지 그 꼴인 거고.”

마침내 한종수가 폭발한 듯 덤벼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도 묶인 발을 바닥에 딛고 몸을 있는 힘껏 회전시켰다. 내 몸에 묶여 있던 의자가 휙, 돌아가며 한종수를 치는 게 느껴졌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몇 번을 더 좌우로 움직였다. 공간이 넓으면 몰라도 좁은 원룸에서는 이것만으로도 큰 위협이 될 터다.

“씨발…! 당신이 뭘 알아!”

한종수가 외쳤다. 내가 뭐 알아야 하나? 되묻는 대신 다시 등에 멘 의자를 휘둘렀다. 퍽, 퍽, 부딪치는 소리가 여러 번 났는데 그게 한종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기를 쓰고 몇 번을 더 움직였다. 이대로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아직 공태 씨 가슴도 제대로 못 만졌단 말이야!’

온 힘을 다해 뒤에 묶인 의자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걸리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위험할 것 같아서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뒤로 돌진했다.

“으이익!”

제발 저 미친놈이 내가 휘두른 의자에 부딪히길 바라면서.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멍청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닿은 곳은 맨 벽이었다.

“아….”

책상 밑에 웅크리고 있던 한종수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씩 웃는 게 보였다.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려 피했지만 한종수가 조금 더 빨랐다. 그의 손이 뻗어 와 내 어깨를 잡아챘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의자에 묶인 채 나뒹굴었다.

“내가 이대로 포기할 줄 알아?”

한종수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주먹이 날아왔다. 그대로 내 얼굴에 꽂히는 소리가 먼저였고, 통증은 한 박자 늦게 왔다.

“너 따위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몰라…!”

아니, 꼭 알아야 하냐고….

한종수는 계속 내게 주먹질을 했다. 입 안에 피 맛이 돌고 뺨에는 점점 감각이 사라졌다. 눈앞이 흐렸다.

어느 순간 통증이 멈췄다 싶을 때, 흐린 시야에 한종수가 망치를 쳐드는 것이 보였다. 나, 진짜 이대로 죽는 건가….

그리고 어디선가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종수가 뒤를 돌아보았고, 한종수의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광경이 꿈같았다.

“이 미친노무 새끼가, 마, 디질라꼬….”

부공태가 부서진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공태 씨….”

눈물이 핑 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와 주길 기대하지 않았다. 부공태가 신도 아니고,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도 나타나 준 그를 보니 순식간에 마음이 놓였다.

문제는 한종수 놈이었다. 나를 실컷 패던 놈은 쇠망치를 들고 이제 부공태에게 달려들었다.

“흐아아악!”

괴성까지 지르면서 말이다.

부공태는 개의치 않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의 모습은 내가 보고 찍은 그 어느 영화의 인물보다 더 멋있었다.

기쁨도 잠시, 한종수가 그의 머리를 향해 망치를 쳐들었다. 부공태는 머리를 가리는 대신 오히려 주먹을 아래쪽으로 뻗었다.

“공태 씨, 위험…!”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놈의 망치가 부공태의 머리에 닿아 있었다.

‘공태 씨 어떡해….’

마음이 쿵, 무너졌다. 부공태가 나를 구하려다가 다쳤다니.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휘청거리는 쪽은 부공태가 아니라 한종수였다. 그의 복부에 부공태의 주먹이 정확하게 꽂혀 있었다.

“이 씨벌 노므 새끼가….”

거친 욕을 뱉는 부공태는 멀쩡해 보였다. 그제야 나는 부공태가 일전에 짱돌을 머리에 맞고도 가벼운 타박상만 입었던 것을 떠올렸다.

“디질라꼬 환장했나!”

사자후처럼 어마어마한 외침과 함께 부공태가 니킥을 날렸다. 날카롭게 뻗어 나간 무릎이 한종수의 중심을 정확하게 찍었다!

아주 끔찍한 비명과 함께 한종수가 나가떨어졌다. 망치도 떨어뜨렸다. 부공태는 곧바로 그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렀다.

이제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주먹만 휘두를 뿐이었다. 마치 한종수가 철천지수라도 되는 것처럼 사납게.

‘엄청… 화나 보인다, 공태 씨….’

어느 순간 그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나는 그게 두려웠다. 의자에 묶여 있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낑낑거리며 무릎으로 그를 향해 기어갔다. 한종수는 이미 피떡이 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때리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공태 씨, 그만, 그만하세요.”

무엇이 이토록 그를 화나게 했을까. 부공태는 내 말을 듣고서야 주먹질을 멈췄다. 그의 주먹도 엉망이었다. 한종수를 때리면서 자신도 다쳤을 게 뻔했다.

“저 이제 괜찮아요, 공태 씨.”

부공태가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나를 보았다.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공태 씨가 와 줘서, 이제 괜찮아요….”

아버지도, 매니저 형도 나를 찾지 못할 줄 알았다. 팬들도 내가 여기 있는 줄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경호원은 기어코 나를 찾아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부공태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의자에 묶인 채 볼품없이 꾀죄죄한 나를 껴안았다.

나는 부공태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여태 그렇게 안도감을 느낀 날이 없었다.

그의 품에 기댄 채 힘을 뺀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휴식을 취해 본 사람처럼 온몸에 힘을 빼고 기대었다. 넓은 품이 내 바보 같은 울음을 모조리 받아 주었다.

***

부공태를 뒤따라온 경찰들은 한종수를 곧바로 연행해 갔다. 나는 경찰들이 건네준 담요를 덮고 매니저 형이 울며 갖다준 죽과 물을 조금씩 먹었다. 물론 화장실부터 갔다 왔고 말이다.

매니저 형은 경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와 부공태는 열린 구급차에 나란히 걸터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종수 놈의 죄목은 나를 납치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마, 깡패 새끼들까지 고용해 가꼬 내를 제낄라 캤드라고예.”

“헐…. 공태 씨, 근데도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얼른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한종수를 두드려 패던 주먹이 다친 것 말고는 딱히 외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이깄지. 다 조지 뿟지.”

뿌듯하게 말하는 그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내가 아니라 공태 씨가 큰일 날 뻔했네요….”

“뭔 말인교!”

그 특유의 버럭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하여튼 그의 목소리 크기는 적응이 되질 않는다.

“며칠 동안 갇히 가꼬 피골이 상접해꾸만! 누가 누구를 걱정합니꺼!”

하긴, 그의 말도 맞아서 힘없이 웃었다.

“…그러게요.”

그래도 당신이 걱정되는 걸 어떡해요. 그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고마워요, 공태 씨.”

대신 내가 해야 할 말을 했다. 아무리 그의 직업이 나를 지키는 것이라 해도, 이렇게 납치범의 거처까지 쳐들어오기는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부공태는 그게 별게 아니라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입술을 한 번 씰룩거렸다.

“깡패 놈들 뚜들기 패 가꼬 한종수 집 알아내는 거는 일또 아니었심더. 몇 대 패 뿌니까 술술 불드만.”

“하하….”

웃을 말이 아닌데, 부공태의 장난스러운 어투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안도감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점마들 보스가 한종수 금마 고닥교 동창이라 카데예.”

“고등학교 동창요?”

그래서 별것 없는 놈이 조폭을 고용할 수 있었구나.

“매애애앤 배우님 얘기만 해 가꼬 금마들도 돌아 뿔 뻔했다 카데예.”

“…그래요?”

“예. 주디만 열믄 배우님 욕을 했다카이. 카아아악 주디를 찢어 뿔 꺼를….”

“그러게요…! 확, 그냥…!”

생각해 보니 열이 뻗쳐서 부공태의 말에 동의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부공태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야, 우리 배우님, 이래 싸나운 면도 있네?”

“저, 한종수 목도 조르고 의자로 후려치기도 했거든요?”

“아이고, 잘했심더. 쫌 맞아야 된다, 금마는.”

내 등을 툭툭 두들기는 손에 상체가 앞으로 휙! 휙! 쏠렸다. 아팠지만 딱히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부공태의 손길이 다정하게 느껴졌으니까.

구급 요원이 가져다준 따뜻한 물을 조금 더 마시며 오랜만에 부른 배를 다스리고 있는 동안 부공태는 내 옆에 계속 있어 주었다. 닿아 있는 다리로 체온이 전해졌다. 부공태의 몸은 항상 나보다 더 뜨거웠다.

허벅지가 맞붙은 데에 어떤 시그널을 부여하고 싶었지만, 그가 이미 내게 거절을 한 상태에서 그러는 건 나만 비참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의 말에 열심히 대꾸했다.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저, 희설아.”

경찰이랑 한참 동안 대화하던 매니저 형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한종수도 잡았는데, 표정이 어째 별로 좋지 않았다.

“네, 형.”

“그, 뭐야… 회장님께서 기사를 하나 보도하신 것 같아. 네가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

매니저 형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받아 들자마자 커다란 글씨로 적힌 기사 제목이 보였다.

JH 주 회장, ‘주희설 내 아들 맞다’ 친자 사실 밝혀

그리고 뒤이은 내용은 한종수에게 들은 것과 같았다. 내가 아버지의 친자식이 맞고, 내가 태어난 시기로 보았을 때 혼외 자식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나는 아버지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다.

“뭔 일입니꺼?”

부공태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아버지가 사고를 치셨네요.”

이렇게 대대적으로 보도한 이유야 듣지 않아도 뻔했다. 이걸로 K전자 안전사고 사건을 덮으려는 거겠지.

내가 아는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제 흠집을 덮기 위해 방도를 찾을 것이었다. 설령 그게 제 아들에 관련된 일이라도 말이다.

“배우님요.”

부공태가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어조만큼이나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이 날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조금 민망하고 미안해서 살짝 시선을 피했다.

“일단은 배우님 본인부터 추스르이소. 캐야 머를 하든 하지예.”

그래, 부공태의 말도 맞았다. 매니저 형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자 형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어디론가 바삐 걸어갔다.

“…네, 그럴게요.”

매니저 형의 등을 보며 대답했다. 이만 일어서려는데, 커다란 것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부공태의 앞발, 아니, 손이었다. 그가 내 턱을 쥐고 눈을 다시 마주치게 했다. 아 씨, 잘생겼다.

“배우님.”

“…네.”

“내 아직도 좋아합니꺼?”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나 여기 있다는 듯이 펑펑 뛰기 시작했다.

“내를 아직도 좋아하믄, 내 말 들으이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앞에서는 연기도 소용없다. 몸부터 반응하니까.

“네, 그럴게요.”

“앞으로 아무도 믿지 말고, 단디 마음 묵꼬 지내이소.”

나 자신을 추스르라고 하는 뜻인 줄 알았는데, 뒤에 붙은 말에 돌연 불길함이 느껴졌다.

“…무슨 말이에요?”

정작 내가 물음을 꺼내자 부공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왜 꼭 어디 갈 사람처럼 말해요…?”

부공태가 일어났다. 한껏 높아진 그의 얼굴을 목이 부러져라 올려다보았다.

“…잘 계시이소. 밥 잘 챙겨 묵꼬예.”

“네? 무슨… 공태 씨, 왜 그런 말을 해요!”

나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갇혀 있던 후유증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고 어지러워서 휘청거렸다. 그러나 부공태는 나를 잡아 주지 않았다.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내 쪽으로 뻗으려다 빈주먹을 쥐는 그의 손을.

부공태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따라가려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또 넘어졌다.

“공태 씨…! 공태 씨! 어디 가요!”

구급 요원들이 달려와서 나를 일으켜 주었다. 뿌리치려 했지만 힘이 없었다. 붙들린 채로 부공태를 계속 불렀지만,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부공태의 모습이었다.

***

아버지가 부공태를 해고했다는 사실은 그날 저녁에 들었다. 아버지가 보낸 직원들이 내 짐을 챙기러 왔을 때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가 소리를 질러도 직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돌돌이가 들어 있는 내 침실 서랍을 열려고 해서 기겁했다.

“그, 그건 제가 챙길게요!”

얼른 몸으로 가리고 서랍 안에 든 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어차피 이제 부공태도 못 만나는 마당에 연습할 돌돌이가 필요한가 싶기도 했지만.

몹시 억울했지만 나는 그날부터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와서 살라는 명을 받았다. 당연히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집이 싹 비어 버렸으니 잘 곳도 없고 말이다.

오랜만에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거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저 진짜 여기서 지내요? 늘 혼자 사시다가 저 있으면 안 불편하시겠어요?”

“납치까지 당한 놈이 무슨 군말이 많아. 한국에서 내 집만큼 보안 좋은 곳 없다.”

아버지의 말은 틀린 데가 없어서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걱정을 조금이라도 해 주시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제 경호원은 어떻게 하셨어요?”

서류를 검토하던 아버지가 안경 위로 눈빛을 슬쩍 보냈다가 다시 아래를 보았다.

“내가 뭐 어디 묻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충분히 그러실 수 있잖아요.”

나는 사춘기 때도 반항 한번 해 보지 않은 착한 아이였다. 그러니 나이 들어서 반항 좀 한다고 해도 솔직히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 순 없을 거다. 여태까지는 말 잘 듣는 애였으니까.

“진짜 어떻게 하신 건 아니죠? 착한 사람이에요.”

“그런 것 같더구나.”

그래, 아무리 아버지라도 멀쩡한 사람을 묻어 버리거나 하진 않았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힘없이 한숨을 내쉬고 인사 대신 고개만 까딱 숙여 보이곤 돌아섰다.

“더 물어볼 건 없니?”

막 거실을 벗어나려는데 아버지가 물었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내가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혔는데, 아무렇지 않으냐는 뜻이겠지. 하지만 당장은 그런 깊은 대화를 나누기가 싫었다.

“네, 없어요.”

간단히 대답한 뒤 내 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으리으리한 저택의 2층으로 올라갔다.

내 새로운 방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 있었다. 침대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오늘은 한 것도 없는데 피곤했다.

‘…공태 씨는 뭐 하고 있으려나.’

벌써 새 직장을 얻어서 다른 사람을 경호하고 있을까. 그의 직업이 경호원이니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괜히 질투가 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부공태를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채였고, 앞으로 만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이범산을 만나 술이라도 퍼먹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어릴 때도 외출을 금지당한 적은 없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이범산과 화상 통화를 하며 아버지의 서재에서 훔쳐 온 위스키를 병째로 홀짝거렸다.

- 야, 진짜 내가 너희 매니저 형한테서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넌 지금 그 공태 씨인가 곰탱 씨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네 몸부터 챙겨야 돼, 미친놈아!

이범산은 잔소리를 해 댔다.

“넌 아무것도 몰라….”

- 얼씨구.

“넌 사랑을 몰라….”

- 으, 돌겠네.

화면 속에서 턱을 쭈글쭈글한 호두처럼 당기고 오만상을 쓴 이범산을 무시하고 술을 더 홀짝거렸다. 훔친 거라 그런지 잘 넘어갔다.

“나는… 덩치 큰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공태 씨가 좋은가 봐.”

내 침대 위에는 일전에 돌돌이를 사면서 받은 반라의 남성들 사진이 실린 포토 카드가 널려 있었다. 하나같이 덩치가 좋아 보였지만 조금도 끌리질 않았다.

- 예, 예에.

“공태 씨 보고 싶다….”

- 아, 내일 회사 가기 싫다.

우리는 절친답게 각자 헛소리를 하며 각자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잔뜩 술에 취해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땐 대낮이었다.

매니저 형에게서 전화가 와서 나는 몇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 알고 보니 한종수 그놈이 회사에 당한 게 좀 많나 봐. 계약도 완전 노예 계약서더라고.

그제야 녀석의 집이 명성에 비해 단출했던 이유가 설명되었다.

- 그래서 더 너한테 열폭했나 보다. 그때 너한테 발신자 제한 번호로 전화 걸고, 사진 찍어서 실시간으로 보낸 것도 그놈이더라고. 어휴…. 안타깝지도 않아.

난 사실 좀 안타까웠다. 나야 운이 좋아서 좋은 조건으로 계약했지만, 사실상 신인 배우는 부당한 계약서에 사인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으니까. 주변에 전문가가 없으면 더하겠지.

어쨌든 범죄를 저지른 건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결국 징역을 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이 더 있었다.

- K전자 사건 말이야…. 들어 보니까 회장님께서 직접 감사를 몇 번 보내셨대. 안전 문제가 미흡하다고 보고가 들어갔었거든.

“네? 정말요? 그런데 왜 그렇게 사고가 난 거래요?”

- 중간에서 보고를 이상하게 했나 봐.

회장이 직접 감사를 지시했는데도 안전 문제가 생긴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럼 아버지는 어쨌든 안전 점검을 지시했는데, 중간에서 보고가 잘못된 거네요.”

- 응. 그게… 안전 장비를 설치하고 보수하려면 돈이 드는데, 그 돈을 먹었나 봐. 그 중간 새끼가.

“하.”

그래서 사람이 그렇게 죽었구나. 이가 갈렸다.

- 회장님께서 그놈이 JH 내부에 있는 것 같아서 조용히 조사하려고 하셨나 봐.

어쨌든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진 않는다.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 어쨌거나 범인은 찾았으니 다행이지. 많이도 해 처먹었더라.

씁쓸한 현실이었다. 와중에도 나는 부공태가 이 사실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수많은 생명이 죽은 걸 알고도 묵인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 근데 희설아.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네? 어떤 소식이요?”

- 그… 너 이번에 주연 맡기로 한 영화 있잖아. 거기 투자처가 좀… 까다롭거든.

“…아.”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내가 뉴스에 오르내리니까 주연으로 쓰기에는 좀 위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화제성을 노리고 나를 쓸 수도 있지만, 여론이 좋지 않다면….

‘내 평판이 떨어지고 있단 뜻이겠지.’

그러니 나를 그렇게 쓰고 싶어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일 테다.

“어차피 그거 별로 안 하고 싶었어요, 저.”

- 그래. 솔직히 시놉 구리더라.

“맞아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는데….

매니저 형이 뜸을 들였다.

“왜요, 형?”

- 내가 들은 건데, 회장님께서 공태 씨한테 단단히 주의를… 줬나 봐.

“…….”

주의라. 말이 주의지 협박일 것이다.

“무슨 주의요?”

대충 짐작이 갔지만 일부러 물어봤다.

- 너한테 앞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하셨댄다.

매니저 형이 내가 그를 좋아한단 사실을 알진 못할 테고, 형도 부공태를 꽤 좋아했으니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 그리고 공태 씨가 너 납치 된 거 다 자기 탓이라면서 받아들이기로 했다나 봐. 안 그러면 경호 팀 전체가 다 해고될 위기였거든.

형은 크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 공태 씨 잘못도 아닌데, 참 그렇다. 어쨌든 희설이 너도 조심히 잘 지내고 있어. 이참에 휴가받았다고 생각하고.

가슴이 조금 아팠지만 매니저 형에게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알겠다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부공태가 보고 싶었다. 몹시도.

***

며칠 동안 지루한 나날이 이어졌다. 납치 사건은 회사 측에서 최대한 소문이 안 나도록 막았다고 했다. 가뜩이나 K전자 사건 이후로 내가 뉴스에 계속 오르내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납치 사건은 내 잘못도 아니고, 오히려 동정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이미지 손상만 더 키울 거라는 게 회사 쪽 입장이었다.

스케줄도 없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니 할 일도 없었다. 몸이 너무 망가지면 안 되니 트레이너가 와서 앞마당에 나가 잠깐 운동을 한 게 다였다.

‘공태 씨가 나 직접 운동시켜 준다고 했는데….’

그때 스토커 놈(한종수 말고)이 부공태의 머리를 까는 바람에 이후에 제대로 또 트레이닝을 받지 못한 게 한이었다.

부공태를 잊겠다고 결심하려 해도 그 핑계로 어느새 나는 또 부공태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하루 종일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문을 닫는다고 해서 밖의 더위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은가. 에어컨 바람을 쐬며 백수처럼 늘어져 있어도 어느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건 쨍쨍한 태양이었다. 부공태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무리 틀어박혀도, 숨는 척해도, 결국 나는 그의 영향 아래 있었다.

할 일이 없으니 연기 연습이나 하자 싶어서 지난 대본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할 게 없으니 잡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슬그머니 휴대폰을 들고 이리저리 웹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연예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익명 사이트를 발견했다. 전에 보았던 곳과는 또 다른 데였다.

ㅈㅎㅅ 브브스 연기대상도 결국 아빠찬스 맞았다는 거네 ㅋㅋ

ㅈㅎㅅ이 누군가 싶어서 눌러 보았고, 누르는 순간 후회했다. 곧바로 뜬 화면에 아버지가 내 친아버지라는 기사 캡처가 있어서였다.

ㅈㅎㅅ 브브스 연기대상도 결국 아빠찬스 맞았다는 거네 ㅋㅋ

친아빠라며?

연기대상 최연소니 뭐니 하면서 그렇게 언플해대더니

결국 아빠찬스로 받은 거 아냐 ㅋㅋ

참 자랑스럽겠다

뭐라고 댓글도 많이 달려 있었지만 보지 않고 그대로 창을 껐다.

갑자기 심장이 뛰고 숨이 찼다. 그깟 글 몇 줄이 뭐라고.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오늘따라 이렇게 상처가 될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잠을 청했지만, 잠이 들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또 쫓겼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를 따라왔다. 어떤 사람들은 칼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서 도망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베갯잇이 축축했다.

***

집에만 있다 보니 자고 먹는 것 말곤 딱히 할 게 없었다. 트레이너가 시키는 운동 외에는 딱히 움직일 일도 없으니 밥맛도 없어서 굶기 일쑤였다.

점점 잠이 늘어났다. 그래도 자고 있을 때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악몽을 꿔서 일어나면 피곤하긴 하지만 말이다.

어느 날 밤, 뒤숭숭한 꿈을 꾸고 일어난 나는 침실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의 대저택은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별을 볼 수 있게 발코니가 잘되어 있었다.

별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헤아리기에는 충분했다.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뭘 하고 싶다는 의지도, 뭔가 해야겠다는 경각심도 들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졸리지가 않아 이상했다.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보고, 책을 읽고, 대본집을 보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밤이 되자 다행히도 조금 졸렸다. 침대에서 한참 뒤척이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또 악몽을 꿨다.

꿈에서 나는 다시 한종수에게 납치되어 있었다. 손발이 묶이고, 이번에는 입도 묶이고 눈도 가려져 있었다. 눈이 가려져 있으니 앞이 보이지 않는데 한종수의 목소리만 들렸다.

‘결국은 내 바람대로 됐네요?’

무슨 개소리야.

‘사람들이 당신 싫어하잖아요, 엄청. 인터넷에 난리 났던데?’

난 그런 거 안 봐.

‘거짓말. 며칠 전에도 봤잖아요. 신경 쓰이죠?’

다시 작품 찍으면 사라질 말들이야.

‘아아, ‘배우는 작품으로 말한다’ 뭐 이런 거예요? 나는 실력이 없으니까 안 되지만 본인은 된다?’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빨리 꿈에서 깨고 싶어서였다. 한종수가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었다. 녀석은 저렇게 안 웃으니까. 꿈이란 게 실감 났다.

한종수는 그날 이후 구속되었고, 지금은 교도소에 있다. 지금은 나를 해칠 수 없다.

‘난 괜찮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숨도 막혔지만 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난 이제 안전해.’

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꿈에서 깨어났다.

“한종수 개새끼….”

욕을 하며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고개를 드니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관리를 안 해서인지 피부도 푸석해졌고, 머리도 엉망이었다. 거기다 숨까지 헉헉거리고 있으니 가관이었다. 사람들이 보면 자기관리 안 한다고 뭐라고 하겠네.

이 와중에 부공태의 가슴을 만지면 진정될 것 같다는 생각이 왜 드는지 알 수 없었다.

***

매니저 형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이범산에게서 온 전화는 받았다. 그는 쓸데없이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 너 진짜 괜찮냐?

“응. 근데 잠이 안 왔다가 너무 많이 왔다가 하네.”

- 그거 수면 장애다. 병원 가 봐라.

“귀찮아….”

이범산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너 전에 말했던 회사 그 사람 이야기나 좀 해 봐. 그래서 어떻게 됐어?”

- 그게, 그래서….

녀석의 수다를 듣고 있자니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지긴 했다. 친구 좋은 게 이런 건가 보다.

그리고 며칠 만에 외출 허가령이 떨어졌다. 매니저 형이 새로운 작은 일거리를 구해다 준 것이다.

내용은 간단했다. 희귀병 환우를 위한 캠페인 영상에 쓰일 짧은 멘트를 읊는 것이었다. 다해서 20초도 되지 않았다. 취지도 좋고 하니 아버지가 허락해 주신 듯했다. 딱히 스튜디오도 필요 없어서 회사에 있는 오디션실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아이고, 우리 희설이, 얼굴이 완전 반쪽 됐다. 어떡하냐?”

매니저 형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형은 걱정이 많아서 탈이었다.

“에이, 형이야말로 살 빠지셨는데요? 오오, 운동하셨어요?”

“어, 나 관리 좀 하려고. 나이도 있고. 그나저나 너 진짜… 괜찮아?”

괜찮냐고 묻는 말이 뭐길래,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 자꾸 나한테 다들 괜찮냐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희설아.”

조금 놀란 듯이 굳은 형을 보고도 이놈의 입은 멈추질 않았다.

“괜찮냐고 묻는 것도 솔직히 지겨워요. 부잣집에서 부자 친아버지 보호 받으며 잘 먹고 백수처럼 팽팽 놀고 있는데, 통장에는 돈이 쌓여 가요. 그런데 안 괜찮을 건 뭐예요?”

“…….”

“이제 차기작 준비해야죠. 그래도 기다리는 사람들 있을 거니까, 슬슬 정신 차려야 되는데 일하기가 싫어서 빈둥거리는 것뿐이에요.”

이러면 안 되는데. 형이 무슨 잘못이라고. 못된 주희설 같으니. 스스로를 꾸짖고서야 겨우 말을 멈출 수 있었다.

“…죄송해요, 형.”

“아니, 아니야.”

매니저 형이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형이 더 미안한 얼굴을 했다. 내 입이라도 때리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곧바로 스태프들이 들어와서 촬영을 시작했다. 간단한 기초 메이크업만 받은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지.’

조명이 켜지고,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표정을 정리하고 외운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배우 주희설입니다. 희귀병 환우들을 위한… 어….”

첫 번째로 NG가 났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다시 갑시다.”

아주 짧은 멘트인데 이걸 왜 버벅거리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리고 입을 여는 순간,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도 같고 구역질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숨이 막혔다.

“아….”

그 자리에서 가슴을 쥐고 허리를 숙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매니저 형이 나를 일으켜 주었다.

“희설아, 괜찮아? 왜 그래? 구급차 부를까?”

대답이 나오질 않아서 손만 내저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했지만 눈앞이 하얬다. 스태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떡해, 하고 속삭이는 대화도 들렸다. 그 대화가, 속삭임이 숨 막혔다. 나를 비웃는 게 아님을 아는데도 벌거벗겨진 것 같았다.

“잠시, 만요. 죄송합니다.”

나는 매니저 형을 뿌리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정신이 들질 않았다.

“하아….”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매니저 형을 비롯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누나가 물 묻은 내 얼굴을 고쳐 주었다.

빠르게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대사를 읊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아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숨이 찬데 호흡을 고를 수가 없었다.

“희설아. 잠깐만 쉬자. 너 얼굴이 말이 아니야, 지금.”

매니저 형이 안타까움 그득한 얼굴로 말했다. 평소의 나라면 괜찮다고 말할 텐데, 오늘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고집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민폐다.

“저, 안 되겠어요.”

나 자신이 이렇게 창피한 적이 없었다.

“…못 하겠습니다.”

못 하겠다고 한 적이 있던가. 배우가 되고 나서부터. 어릴 때는 어려서, 머리 굵어지고부터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서 못 하겠다는 말을 한 적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정말로, 못 할 것 같았다. 고작 멘트 한 줄을 읽는 일을.

아직도 심장이 뛰고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데, 내 증세를 말할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해 달려온 스태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우선이니까.

“죄송합니다.”

허리를 깊게 숙여 보였다. 이를 악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다행히도 스태프들은 흔쾌히 철수해 주었다. 철수하면서도 걱정을 하는 걸 보니 내가 아픈 티를 많이 냈구나 싶었다. 매니저 형은 나를 응급실로 데려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극구 거부했다.

“응급실 갔다가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떡해요. 그리고 지금은 괜찮아요.”

사실 아직도 심장이 좀 뛰긴 했지만, 카메라 앞에서보다는 훨씬 편해졌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희설아, 지금 아니더라도 너 진짜 병원 가야 될 것 같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네, 그럴게요.”

형이 나를 걱정하는 거야 잘 알기에 일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겨우 얻어 낸 일자리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했다.

그리고 쓸데없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혹시라도… 앞으로 카메라를 볼 때마다 아까처럼 패닉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에이, 설마.’

내 경력이 얼만데. 괜찮을 거다.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 차의 으리으리한 뒷좌석에서 혼자 웃어 보았다.

***

밖에 나가서 활동을 안 하다 보니 운동을 안 하는 날은 거의 안 먹게 되었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자꾸 굶으면 근 손실이 온다고 혼을 냈지만 밥을 먹는 게 너무 귀찮았다.

“저, 식사 안 해요?”

아버지 집의 가사 도우미분이 조심스레 문밖에서 물었을 때도 나는 쫄쫄 굶으며 태블릿 PC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배 안 고파서요.”

“그래도 오늘 한 끼도 안 드셨는데….”

걱정하는 목소리를 남겨 둔 가사 도우미는 내가 더 말하지 않자 그대로 멀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직접 내 방에 찾아왔다.

“나와서 밥 먹어라.”

그래도 아버지 앞에서 드러누운 꼴을 보일 순 없으니 일어나서 대충 머리칼을 매만졌다. 까치집을 진 뒤통수가 만져졌다.

“별로 배가 안 고파요.”

“식사는 배가 고파서 하는 거 아니다. 때 되면 하는 거지. 나와라.”

어쩔 수 없이 방 밖으로 나와야 했다. 촬영에 실패하고 틀어박힌 지 며칠 만이었다.

진수성찬이 차려진 넓은 식탁에 앉은 아버지와 나는 말없이 식사를 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혼자 드시는 거 좋아하면서 왜 나를 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 전에 촬영 거부한 걸로 혼이 나려나.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내 밥그릇이 절반 빌 때쯤 입을 열었다.

“좀 나갔다 와라.”

“…어디요?”

아버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일이라도 시키려는 건가. 그렇다기엔 매니저 형에게서 연락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휴대폰을 한동안 충전하지 않고 확인도 하지 않은 게 떠올랐다. 내가 연락 못 받았을 수도 있겠네.

“밥 먹고 윤 실장이 태워 줄 게다.”

“네.”

뭐 어차피 집에서 할 일도 없으니 고분고분 말을 들을 수밖에. 아버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남은 밥을 입에 쑤셔 넣었다.

윤 실장이 다음 날 오전에 나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아버지가 나를 보낸 곳이 어딘지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기에 행선지를 딱히 묻지는 않았다.

차가 도착한 곳은 대학 병원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라고 적힌 곳으로 윤 실장이 나를 데리고 갔다.

진료는 별게 없었다. 의사에게 내 요즘 생활을 대충 설명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더니 뭔가를 열심히 기록했다. 그리고 병명이 뭔지는 내게 알려 주지 않았다.

밖에 나오자 윤 실장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화장실에라도 가셨나, 싶어서 대충 대기 의자에 몸을 구겨 앉고 기다렸다.

‘아무도 못 알아보네.’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병원에 사람이 꽤 많은데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서 집에 가서 다시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윤 실장에게 전화를 해 보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드디어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 싶어 돌아보니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엄미야! 이게 얼마 만인교?”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사람이 있는데, 입을 열 수도 반갑게 포옹할 수도 없었다. 헤어져 있던 동안 마음이 뻣뻣하게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바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부공태는 내 앞에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이더니 씩 웃었다.

“아이고, 마, 완저이 우연이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마, 희한하네! 우째 이런 일이!”

약간 오버스럽게, 그리고 호들갑스럽게 그가 소란을 피웠다.

누가 봐도 ‘자기는 우연히 주희설을 만났을 뿐이고, 주 회장이 주희설을 만나지 말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우연일 뿐이니 불가항력적이었다’고 누군가에게 항변하는 모양새였다.

“우리 배우님이 마이 놀랬는갑네. 살은 와 이래 빠짔는교? 밥도 안 묵고 댕기제?”

커다란 손이 뻗어 오더니 내 정수리 위를 덮었다. 묵직하고 커다란 손길이 닿자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부공태가 눈앞에 있는 것을 실감하지 못해서 여태 멍했던 것이었음을.

눈으로 열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부공태의 손은 여전히 내 정수리에 얹혀 있었다.

“우리 배우님.”

우리 배우님. 내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목소리.

“내 안 보고 싶었나?”

고개를 들자 부공태가 슬프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눈물을 참지 못했다.

뚝, 뚝, 바보같이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부공태는 커다란 손으로 일일이 닦아 주었다.

“하이고, 우리 배우님….”

마치 내가 그 호칭을 좋아한단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듯이, 그는 계속 우리 배우님, 우리 배우님, 하며 여러 번 말을 반복했다. 귀에 그 목소리만 남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을 때까지.

***

눈이 붕어처럼 땡땡 부을 때까지 울었다. 그리고 부공태는 다정하게도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볼까 싶어 병원 계단실로 나를 데리고 간 그는 자신의 손수건까지 내밀었다. 받아 들고 눈물을 찍어 닦은 뒤 코를 패앵 풀었다.

“그러니까… 매니저 형이 내가 병원 오는 거 알려 줬다구요?”

“예. 윤 실장님 카는 분한테서 들었다 카데예.”

그제야 부공태가 여기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하지만 윤 실장님은 나와 별 친분도 없는데, 왜 말해 주었을까? 어쨌든 그를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건 사실이었다.

“맛있는 거 무러 가까예?”

하지만 오랫동안 밖에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알면 부공태까지 화를 입을 터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들어가 봐야 돼요. 딴짓하다 가면 아버지가 화내실 거예요.”

“윤 실장님은 두 시간 정도 시간 있다 카든데예?”

“네? 정말요?”

“예. 이야기 실컷 하고 연락 달라 캤심더. 연락처도 받았는데.”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부공태가 내 손을 덥석 쥐었다.

“마, 오랜만에 나왔는데 그냥 들어갈 낍니꺼? 내랑 맛있는 거 무러 가자!”

어쩔 수 없이 나는 부공태에게 끌려 병원을 나왔다.

부공태는 고깃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룸에 들어간 우리는 눈치를 보지 않고 실컷 고기를 먹었다.

요 며칠 식욕이 그렇게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고기가 잘만 넘어갔다. 한동안 없어진 식욕이 갑자기 돌아온 것 같았다. 부공태는 천천히 먹으라고 하며 멀리 있는 반찬 그릇을 내 쪽으로 죄다 몰아 주었다.

“모름지기 성인이라 카믄 고기 5인분은 혼자 묵을 줄 알아야 으른 구실을 한다 캤심더. 퍼뜩 무이소.”

“어떻게 사람이 5인분을 먹어요?”

기겁하며 묻자 부공태가 머쓱하게 뒤통수를 문질렀다.

“내는 10인분도 묵는데….”

“전 잘 먹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엄지를 세우며 얼른 덧붙이자 그제야 그의 머쓱한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요즘 아는 사람의 체육관에서 사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도 운동을 좋아했으니 지금 일도 나쁘지 않다나. 가르치는 학생들도 다 자기를 좋아한다며 뿌듯해했다.

어쩌면 경호 일을 다시 하지 않는 건 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구태여 입으로 꺼내 묻지는 않았다.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대신 그렇게 말하자 부공태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 슬퍼 보이기도 하고, 아주 조금 화가 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배우님은 우째 지냅니꺼?”

“저야 뭐….”

대답을 하려는데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요즘의 내 생활에 대해서 그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잘 지내요.”

일부러 씩 웃어 보이기까지 하며 대답했는데, 부공태의 표정이 어쩐지 별로 좋지 않았다.

“고기 더 무이소.”

그는 고기 몇 점을 내 접시 위에 얹어 주었다. 부공태가 고기를 끝내주게 잘 굽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그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거의 한 달 만에 만난 그는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염치없게도 기뻐했다.

고기를 먹고 나서 카페에 가자는 부공태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날이 더운데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어 땀이 줄줄 났다. 부공태는 손수건으로 열심히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이고, 우리 배우님, 몸이 마이 허해짔나.”

“근데 이거 제가 아까 코 푼 건데.”

문득 기억나서 말하자 부공태가 머쓱하게 손수건을 도로 집어넣었다.

고깃집 바로 옆에는 오락 기구가 몇 개 있었다. 하나는 두더지 게임, 하나는 펀치 기계였다.

“공태 씨, 이거 해 봐요!”

오랜만에 나왔겠다, 스트레스를 풀 겸 나는 멋지게 펀치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부공태가 옆에서 혀를 찼다.

“돈부터 여야지예.”

“아 맞다….”

머쓱하게 옷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내가 지갑도 들고 오지 않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부공태를 슬그머니 보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배우님 그지네, 그지. 알그지.”

“아닌데….”

“백 원짜리 하나도 읎는데 그지지 머꼬.”

그는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능숙하게 펀치 기계에 넣었다. 부공태가 내게 차례를 양보했기에 나는 기꺼이 먼저 펀치 기계를 후려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계에 점수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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