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가진 향기는
부공태는 마치 탐정처럼 주희설의 집 안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아직 울상인 채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지만 딱히 성과는 없었다.
일단 거실과 침실은 이상이 없었다. 부공태가 보고 나간 마지막 상태 그대로였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안과 식기세척기를 살폈다. 식기세척기 안에는 그릇이 없고, 반찬을 덜어 먹은 흔적도 없었다. 밥솥도 깨끗했다.
대신 식탁에 빈 접시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식빵 가루로 추정되는 게 조금 묻어 있었다.
‘밥도 제대로 안 묵꼬 나갔나….’
식빵 봉투를 살펴보니 몇 조각 먹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가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라졌단 사실이 부공태를 가장 슬프게 만들었다. 벌써 점심때가 한참 지났는데 늦게라도 끼니는 챙겨 먹었을까.
한숨을 푹 내쉬며 이번에는 거실을 살폈다. 그의 휴대폰은 탁자 위에 그대로 있었다. 나갈 작정이었다면 휴대폰부터 챙기지 않았겠나. 그러니 절대 자의로 나간 건 아니었다.
부공태가 주목한 곳은 바로 현관이었다. 창문은 철저하게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어서 누가 건드렸다면 업체에 바로 경보가 울렸을 것이다. 그러니 누가 주희설을 데리고 갔다면 현관으로 나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배우님이 직접 문을 열어 줬을 가능성이 높겠제.’
거기까지 판단한 그는 현관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슬리퍼를 발견했다.
스케줄은 당분간 없다고 했으니 밖에 나갈 일도 없었을 테고, 주희설 본인이 직접 한동안 집에 있을 것이라고 언질해 두기도 했다. 게다가 슬리퍼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 걸 보면….
‘나갈 생각이 없는데 그놈아가 끌고 간 긴가.’
빠득, 어금니가 갈리면서 턱 근육이 바짝 섰다. 누군지 몰라도 배우님 몸에 손을 댔다는 사실이 부공태를 분노하게 했다.
그는 혹시라도 다른 흔적이 없는지 현관 주변을 거닐며 인이어를 켰다.
“CCTV 확인 됐심꺼?”
경호 팀에게는 회사에 알리지는 말고 극비로 이 집 CCTV를 확인해 두라고 했었다. 지금쯤 아마 분석이 끝났을 터다.
- 네, 팀장님. 그런데 이거…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와예?”
- CCTV 위치를 다 파악했는지 잡힌 게 하나도 없어요.
부공태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평소 욱하는 성격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또 어금니를 씹었다.
“잡힌 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꺼? 현관 찍으라꼬 놔둔 CCTV 아입니꺼?”
- 그게… 각도가 좀 달라져 있더라고요.
이제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명백한 납치가 맞다. 그것도 철저하게 계획된 범죄.
부공태는 혹시 모르니 다른 CCTV도 한 번씩 더 확인하고 다시 연락 달라는 말을 하곤 통신을 끊었다.
약속하지 않은 누가 찾아와서 잠깐 문을 열어 주었고, 주희설은 불청객을 맞이하기 위해서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부공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희설이 순진하다고는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K전자 유족이라는 사람이 칼을 휘두른 게 며칠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 준다고? 자신이 아는 주희설은 적어도 그보단 똑똑했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이범산이 찾아왔을 수도 있지만, 이미 확인을 끝냈다. 이범산은 주희설의 거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그때 술을 마신 이후로는 만난 적도 없었다. 주희설이 사라진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괜히 일이 복잡해질까 싶어서 실종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카믄 답은 하난데….’
그는 현관 옆에 떨어진 주희설의 슬리퍼를 집어 들었다. 제 발보다 훨씬 작은 슬리퍼에는 주희설을 꼭 닮은 하얀 강아지가 그려져 있었다.
“어떤 새끼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누구든 이 손으로 머리통을 깨부숴 놔야지 직성이 풀릴 것 같단 생각이 드는 와중에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 부공태 씨 되시지예? 여기 병원인데예.
진한 경남 사투리에 부공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서 입원했다는 비보를 전해 왔다. 심각한 건 아니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부공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혼자서 어업에 종사하며 지내고 계셨다. 형과는 연락도 하지 않으니 부공태가 유일한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이 심각합니꺼?”
- 심각한 건 아이고예, 약간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으신 거 같심더.
“충격이예?”
심리적 충격이라니. 혹시 형이 사고라도 친 걸까. 하지만 연락을 안 한 지가 한참 되었는데. 부공태는 일단 알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
주희설의 실종이라는 비상사태에 직면했지만 그래도 부모님 일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며 매니저는 부공태를 보내 주었다.
“어차피 희설이 지금 못 찾을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든 경찰 쪽 설득해 볼게요. 공태 씨는 집에 다녀와요.”
“그케도 우째….”
“희설이 무사할 거예요. 그렇게 쉽게 나쁜 일 당할 애 아니잖아요.”
그 말에는 부공태도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 주희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린 사람이 아니다.
“뭔 일 생기믄 바로 연락하이소.”
“네, 그럴게요.”
보고 있기 안쓰러울 정도로 눈이 퉁퉁 부은 매니저가 어서 가 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부공태는 하는 수 없이 귀향했다. 아버지가 있는 고향으로.
***
병실에 찾아가자마자 아버지는 부공태를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니, 마! 머 하고 댕기노! 내가 니 그래 키았나!”
“뭔 소린교, 아부지.”
불행 중 다행으로 아버지는 정정해 보였다. 환자복 팔을 걷어붙이고 부공태에게 삿대질을 하는 모습은 환자라고 보기에 지나치게 정정할 정도였다.
부공태는 가지고 온 과일 바구니를 협탁에 놓고 보호자용 간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덩치 탓에 자그마한 플라스틱 의자는 부서질 것처럼 삐걱거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역정을 냈다. 당장이라도 부공태를 쫓아낼 기세였다.
“내가 다 들었다, 으이? 내가 니 머 하고 댕기는지 다 들었다카이!”
“쫌 천천히 말씀해 보이소. 뭐를 들었는데 이카노?”
달래듯이 물으며 부공태는 품에서 초코바를 꺼내 아버지에게 건네었다.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초코바를 받아 단숨에 까서 입에 넣었다.
“니, 요새 헛짓거리 하고 댕긴다 카는 이야기 내가 다 들읐다.”
“아, 카이까 누가 그카더냐고.”
아버지는 초코가 묻은 입을 손등으로 닦곤 검지를 들어 보였다. 평생 그물 손질을 해 온 손가락은 굽어 있고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방송국 사람이 와가꼬, 내한테 캤다. 니, 이번에 사람 죽은 그 K전잔가 뭔가 그 범인 경호하고 댕긴다매?”
“뭔 소리고. 아이다!”
기가 찼다. 도대체 방송국 사람 누가? 부공태는 안주머니에서 초코바 하나를 더 꺼내었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자 부공태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초코바를 차지하지 못한 아버지의 얼굴에 노기가 드리웠다.
“내가 와 범인을 경호하노. 미칬다꼬.”
“방송국 사람이 카든데!”
아버지는 ‘방송’에 대한 권위를 굉장히 높게 치는 분이었다. 방송에서 나왔다, 하면 그건 법으로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이니 당연히 ‘방송국 사람’은 아주 높으신 분으로 생각할 터였다.
“카고, 니 요새 여자도 만나고 댕긴다매! 할딱 벗은 가시나들하고 마, 밤마다…! 아이고…!”
말을 하던 아버지가 목뒤를 붙잡았다.
“아부지예!”
부공태는 얼른 간호사를 불렀다. 한바탕 병실이 뒤집어지고 나서야 아버지는 겨우 진정했다.
“니가… 일은 안 하고… 가시나들만 만나고 댕긴다 캄서… 니 찾으러 내한테 왔다 카더라.”
부공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그 방송국 사람이?”
아버지는 누운 채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국 사람 맞나? 진짜가?”
대체 누가 아버지께 쓸데없는 소리를 했을까. 주희설에 대한 평판이 요즘 안 좋다 보니 이런 시골에서도 안티가 설치는 모양이었다.
“진짜다! 그 머꼬, 목에 거는 거! 그것도 비 줬다! 니 막 짤라 뿐다 카믄서, 으이?”
목에 거는 신분증을 뜻하는 모양이었다.
“그른 그는 아무나 만든다. 그래서, 누가 카던데? 그 사람 이름이 뭔데?”
아버지는 자존심이 상한 투로 부공태를 노려보았다.
“이름을 우째 기억하노? 내는 다 늙어 가꼬 그런 거는 기억 몬 한다!”
부공태는 한숨을 삼켰다. 어떤 놈인지 잡아다가 당장 족치고 싶었다.
“캐가꼬, 넘에 말 한마디 듣고 이래 히떡 쓰러짔나? 아부지는 그래 아들을 못 믿는교?”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일은 안 하고 여자 만나러 클럽에나 쏘다닌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쓰러진 것이었다.
“아부지는 안 그래도 혈압이 안 좋아 가꼬 조심해야 된다꼬 내가 맻 버이나 안 캤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버지에게는 여러 가지 지병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고혈압이었다.
“오래 살라 카믄 항상 마음을 단디 묵고 있어야지, 쌩판 넘이 머라 칸다꼬 이래 넘어가 삐믄 우짭니꺼?”
그의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팩! 돌리더니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부공태도 더는 잔소리하지 않았다. 웅크리고 누운 아버지의 어깨는 힘이 없어 보였다.
‘아부지 잘못도 아인데….’
그제야 심하게 말한 게 후회가 되었다. 아버지에게 고혈압만 없었어도 쓰러졌다는 말에 이렇게 달려오진 않았을 거다.
한숨을 푹 내쉬던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부지, 내 잠깐 나갔다 오께예.”
아버지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달래 줄 시간이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정을 최대한 빨리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병원을 나온 부공태가 찾아간 곳은 아버지가 자주 들르는 고물상이었다.
고물상의 사장님은 아버지의 친우 중 한 분으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두 집안의 친분이 두터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 함께 있던 자이기도 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다카이. 와 아부지한테 그런 말을 했으꼬.’
심지어 방송국 사람이라고, 아버지가 믿을 만한 신분까지 밝히면서 말이다.
‘일부러 충격받으라꼬 칸 거 맨치로….’
아버지는 원래 아들이 신의를 배신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여자를 만나느라 일을 소홀히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심지어 그 일로 해고될 위기에까지 놓여 있다는 거짓말을 들었으니 쓰러질 만도 했다. 아니, 지금보다 더 심각하지 않아 다행일 정도였다.
‘아부지가 고혈압 있는 거 알고 칸 거 아이가?’
물론 이 동네는 작아서 아버지가 고혈압인 걸 대부분 집에서 알고 있다. 오래된 시골 동네에서는 옆집의 숟가락 개수도 알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방송국 사람이라고 했지 않나. 자기를 찾으러 왔다고, 위조된 신분증까지 보여 주며 말이다.
정말 아버지가 쓰러지길 바라고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면, 그놈은 살인 미수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가 갈렸다. 단단한 턱에 힘이 들어가자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심상찮은 예감을 애써 부정하며 부공태는 고물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마침 사장님이 가게 마당에서 농기구를 고치고 있었다. 부공태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저씨, 잘 계셨심꺼?”
“아이고, 공태 왔나.”
사장님이 반갑게 부공태를 맞았다.
“여보! 공태 왔다!”
소리를 지르자 안에서 아주머니도 나왔다.
“아이고, 공태 마이 컸네.”
“안녕하십니꺼, 아줌니.”
“얼른 저 커피 하나 타와 바라.”
“아이고, 됐심더. 괘않심더.”
부공태가 손을 내저었지만 아주머니는 한사코 기다리라고 하며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아부지 때문에 내리왔나?”
“예.”
“아부지는 좀 어떻노? 내는 가게 때문에 병원에 델따주고 오래도 몬 있었네.”
“혈압 때문에 잠깐 위험했는데, 지금은 괘않답니더. 감사합니더, 아저씨. 퍼뜩 신고해 주신 덕분에 위기 넘깄다 카데예.”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옆에 있던 사장님은 아주 재빠르게 119에 신고를 했다. 평소에 아버지가 고혈압이 있단 사실을 응급 요원에게 이야기해서 덕분에 처치가 빨랐다고 했다.
“아이다. 내가 한 기 머 있노. 니가 고생이 많데이. 서울서 이까지 오고.”
“아입니더.”
사장님은 들고 있던 공구를 놓고 일어나선 허리를 쭉 폈다.
“캐가, 아부지 걱정돼 가꼬 내한테 왔나?”
“예. 안 캐도 아저씨한테 하나 여쭤볼 게 있어 가꼬 왔심더.”
사장님은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으란 손짓을 해 보인 뒤 자신도 걸터앉았다. 부공태는 평상에 앉아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아부지가 카시던데, 방송국 사람이 왔다믄서예.”
“그래. 니 찾으러 왔다 카드라.”
사장님의 눈빛에는 친구 아들에 대한 옅은 원망과 의심의 기색이 보였으나, 부공태는 애써 오해를 풀기보단 이곳에 온 목적대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혹시 우예 생깄는가 기억하십니꺼?”
사장님이 기억을 더듬는 듯 먼 산을 바라봤다. 그러나 나온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그때 느그 아부지 살피 보니라꼬 얼굴은 잘…. 모자 쓰고 있어 가꼬 잘 안 비드라.”
그럴 줄 알았다. 일부러 거짓말을 퍼뜨릴 놈이면 얼굴을 쉽게 까고 다니진 않겠지.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며 돌아서려는데, 마침 아주머니가 쟁반에 종이컵을 받쳐 들고 나왔다. 아저씨는 다시 고물을 고치기 시작했다.
“내 생각난다! 얼굴 생각난다.”
종이컵을 내밀며 아주머니가 하는 말에 부공태가 반색했다.
“진짭니꺼?”
“그래. 윽수로 잘생깄드라.”
“우째 잘생깄심꺼? 자세히 말해 보이소.”
부공태는 안달이 났다. 어쩌면 소문을 퍼뜨린 놈이 주희설의 실종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눈은 요래, 요래 크고, 쌍꺼풀 짔고.”
“예.”
“턱은 딱, 요래, 잘생깄고.”
“…코는예?”
“잘생깄고.”
안타깝게도 아주머니의 묘사로는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용의자라도 좁혀지면 사진을 보여 줄 텐데.
역시 포기해야 하나, 절망하며 아주머니가 주신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거, 뭐꼬, 공태 니 이야기 들으니까 쫌 이상한 기 하나 있는데.”
고물을 고치던 아저씨가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예, 말씀하이소, 아저씨.”
“느그 아부지 병원에 델따줄라꼬 신고하고 나니까 그 사람이 안 비더라꼬.”
부공태는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사라짔다, 이 말씀입니꺼.”
“그래. 보통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면은, 놀래 가꼬라도 옆에 있지 않겠나?”
맞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괜찮으냐고 물으며 옆에 있겠지.
“근데 신고하고 정신 채리 보이까네 그 사람이 엄서짔더라꼬. 꼭 구신 같데….”
“맞다, 맞다. 내도 이상하다 캤다 아이가!”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난 듯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아이고, 맞다! 그 사람, 어데서 마이 본 얼굴 같드라.”
“어데서예?”
“그, 와, 테레비에 나온 아 있다 아이가. 그 머꼬.”
“테레비요?”
아주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고, 옆에 있던 아저씨는 다시 농기구를 고쳤다.
“어데서 보셨는데예? 천천히 기억해 보이소.”
부공태는 종이컵을 손에서 구기며 함께 안달을 냈다. TV에서 봤다면 유명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유명인이 이 산골 동네에 왜 온단 말인가. 그리고 왜 주희설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린단 말인가.
한참이나 애를 쓰고서야 아주머니는 무언가를 기억해 낸 듯 박수를 짝! 쳤다.
“남자, <남자가 가진 향기는>! 드라마! 거기 남자주인공!”
그 유명인은 한종수였다.
***
부공태는 곧바로 서울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주희설을 찾는 게 더 급했다. 올라가는 동안에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 한종수 원래 걔가 좀 싸하긴 했어요! 그럼 그 새끼가 우리 희수를 데려갔단 말이죠?
“일단은 그래 생각 해야겠심더. 배우님 뒷조사를 단다이 한 거 같심더. 우리 아부지한테까지 찾아간 거 보믄 보통이 아입니더.”
매니저가 전화기 너머에서 푹 한숨을 쉬었다.
-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공태 씨 아버지한테는 왜 거짓말까지 했고요?
부공태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마… 지를 떼 놓을라꼬 그런 거 같심더.”
그것 말고는 딱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가 경호원이니까, 일단 떼 놓을라꼬 한 거 아이겠심꺼.”
그래도 뭔가가 찝찝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뒤로한 채 부공태는 차 속도를 조금 더 빨리 했다.
- 그럼 도대체 우리 희설이를 왜 데려간 걸까요.
“…그거는 만나가 직접 물어봐야 안 되겠심꺼.”
- 휴…. 그래요, 일단 제가 한종수 매니저한테 연락해 볼게요. 어디 있는지나 좀 알아보죠.
“예. 조심하이소.”
한숨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만약 한종수가 주희설을 데리고 있지 않다면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부공태는 그가 범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카고 보이까네, 배우님이 금마를 별로 안 좋아했제.’
부공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눈치가 없는 편인데, 그런 그가 느끼기에도 주희설은 한종수를 불편해했다. 특히 최근에 함께 촬영하면서는 더더욱 티가 났더랬다.
‘금마 관상이 쫌 드릅기는 했다카이.’
지금 생각해 보니 인상도 아주 더럽고 흉포했다.
‘마, 눈도 요래 쪽 째지 가꼬, 마, 배우님 노리보는 눈깔이 영 깨름치이익하든데.’
한종수가 무척이나 잘생겼더라며, 몸도 좋고 멋있더라며 칭찬하던 일은 모조리 잊어버린 부공태였다.
그는 고속 도로를 달리며 주희설을 생각했다. 덩치가 제 절반인 주희설. 웃는 게 귀여운 주희설. 피부가 닭 다리처럼 하얀 주희설. 제게 좋다고 고백해 오던 주희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가슴 깊은 곳이 꽉 막힌 것도 같고, 반대로 뻥 뚫린 것도 같았다.
사나이 부공태, 갑갑한 것은 결코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청승맞은 것도 못 견뎌 했다. 그러니 이런 막막하면서도 슬픈 기분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이상하게도 주희설을 생각하면 제가 가진 이성을 모두 빼앗기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랬고, 그가 사라진 지금은 극심했다.
그를 빨리 찾아야 한단 생각만 머릿속에 그득했다. 단순히 자신이 그의 경호원이어서가 아니었다.
부공태는 그가 없이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란 강한 예감을 느꼈다.
주희설을 납치한 게 누구든, 그 이유가 무엇이든 부공태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쁜 놈이 뭐 이유가 정당해서 나쁜 짓을 하나? 그리고 그런 놈의 이유를 따지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당장 주희설을 찾는 것만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그때, 그는 백미러로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까부터 차선을 계속 바꾸는데도 따라오는 차량이 세 대나 있었다.
‘…너거는 뭐꼬.’
백미러를 노려보는 눈빛이 선득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핸들을 꺾어 갓길로 향했다. 차를 세울 셈이었다.
***
몇 시간인지 혹은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뒤 한종수가 돌아왔다. 나는 지쳐서 누워 있었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방방 뛰어다니느라 지친 상태였다.
“아, 제가 깜빡하고 말을 안 했네요. 여기 앞뒤 아래로 아무도 안 살아요. 위층에도.”
난장판이 된 집을 보고 한종수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깜빡하기는 개뿔이…. 하지만 거짓말일 수도 있단 생각 역시 들었다. 정작 옆집에 사람이 들어오는 시간에는 내가 진이 빠지게 만들려고 일부러 늦게 말한다거나.
일단 한종수는 내가 절반 정도 비운 물통부터 주워 들었다. 그리고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물의 양을 확인했다.
“이거 다 마시고 여기다 용변도 처리하라고 준 건데.”
개자식이, 농담을 진지하게 하네. 누운 채로 노려봤지만 한종수는 농담이었다는 말을 하지 않고 대신 들고 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소한 냄새가 순식간에 코에 닿았다.
한종수가 꺼낸 것은 영화관에서 파는 버터구이오징어였다. 일부러 냄새가 어마어마하게 자극적인 메뉴로 고른 모양이었다. 나 엿 먹이려고.
하지만 나 주희설, 촬영 전에 심할 땐 하루 종일 오이랑 샐러리, 닭 가슴살 두 덩이만 먹고 산 적도 있었다. 이깟 일차적인 유혹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드세요.”
그런데 웬걸, 녀석은 저번처럼 나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어 치우지 않고 내게 내밀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배가 죽도록 고팠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 먹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인상을 구겼다. 땀이 빠질빠질 나는 것이 느껴졌다. 한종수의 눈에 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보일 정도로.
“선배님? 어디 아프세요?”
“…닥쳐.”
몸이 떨렸지만 역시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깨가 후들거리고, 이가 부딪쳤다.
“벌써 죽으면 안 되는데? 왜 그래요?”
“안 죽는다고.”
이를 갈며 말하는 목소리 역시 떨렸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이윽고 녀석이 내 쪽으로 허리를 숙여 왔다.
“어디, 열이라도 있는 건….”
그리고 그때였다.
‘됐다!’
재빨리 몸을 돌려 묶인 손을 녀석의 목 쪽으로 뻗었다. 한종수가 미처 피하기 전에 그의 턱이 무언가에 턱, 걸렸다.
바로 내가 감춘 채로 쥐고 있던 전선이었다.
전선이 가느다란 휴대폰 충전기 정도야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한종수는 충전기를 대충 책 사이에 감춰 두었었다.
나는 녀석이 오기 전에 충전기 전선을 양쪽 손에 붙잡고 있었다. 손목은 묶여 있어도 손가락은 묶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전선을 최대한 옷 안쪽으로 감추고, 어색한 티가 나지 않도록 아픈 연기를 했다. 아픈 척을 하느라고 목이 마른데도 반밖에 안 마셨단 말이다.
그리고 기다렸다. 녀석이 내 쪽으로 얼굴을 숙여 오기만을.
곧바로 몸을 돌려 손에 쥐고 있던 전선을 녀석의 턱에 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기 전에 의자 헤드로 몇 번이나 연습해 보았다.
녀석은 아마 몰랐을 거다. 내가 그 충전기 전선으로 제 목을 조를 줄은.
그리고 내가 나름대로 액션 교육까지 받았다는 점은 더더욱 몰랐겠지! 내 대외적 이미지는 예쁘장한 연하남이지만 나름대로 탈피하려고 애 많이 썼다 이거야. 그게 이 결과물이다, 이 자식아.
“컥, 으윽! 지금 무슨….”
제대로 조른 게 아닌지 말할 힘이 남아 있네, 싶어서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턱 바로 아래가 전선에 단단하게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아니, 토할 것처럼 역겨운 감각이었다.
한종수가 버둥거렸다. 원래대로라면 녀석의 피지컬이 나보다 조금 우월하지만, 둘 다 누운 상태에서 녀석의 발이 내 몸에 닿지 않고 내가 일방적으로 당기고 있으니 해 볼 만했다. 녀석이 치는 발버둥은 애꿎은 물건들만 뭉갤 뿐이었다.
하지만 한종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독한 새끼였다. 온몸에 힘을 주는가 싶더니 목이 졸린 그대로 나를 끌고 가는 게 아닌가.
‘미친놈이!’
하지만 나도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쉽게 져 줄 생각은 없었다. 나 역시 있는 힘을 모두 짜냈다.
녀석이 몸을 비틀었다. 그 기세에 나도 딸려 갔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녀석과 뒹굴었다.
“이, 씨발!”
험한 욕이 한종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도 온몸이 부딪쳐서 앓는 소리를 냈다. 최대한 빨리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달려갔다.
‘나가야 해.’
그러나 문손잡이는 철컥거리는 소리만 낼 뿐, 열리질 않았다.
망했다, 하는 생각과 함께 등줄기에 소름이 쭈욱 끼쳤다. 뒤를 돌아보자 한종수가 이마에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벌게진 얼굴로.
“하…. 선배님, 왜 그래요, 진짜?”
짜증 잔뜩 섞인 목소리를 내뱉은 그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한눈에도 묵직해 보이는 쇠망치였다.
‘저 미친놈이….’
그가 망치를 쳐들며 내게 달려들었다.
***
부공태는 갓길에 차를 세워 두고 내리지는 않았다. 세 대의 시커먼 차가 그의 차를 포위하듯이 좁은 갓길에 다닥다닥 붙어 섰다.
‘뭐 하는 놈들이고….’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CCTV가 찍히는 곳으로 일단 자리를 잡았지만, 제대로 미친놈이라면 저딴 것 상관이 없을 수도 있었다.
부공태를 둘러싼 차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죄다 검은 옷을 입은 덩치들이었다.
‘느낌이 영 안 좋네.’
한눈에도 불량스러운 태도로 껄렁껄렁 다가온 남자들은 부공태가 탄 차의 닫힌 창문을 두드렸다.
“어이, 내려 보쇼.”
부공태는 빠르게 남자들의 모습을 훑었다. 총 여섯 명…. 차 안에 있을 인원까지 감안하면 열 명이 넘을 터다. 몇몇은 비무장이고 몇몇은 재킷 안에 칼을 감추고 있었다.
“내려 보라니까.”
남자들이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리며 닫힌 차창을 두드렸다. 부공태는 눈도 깜짝 않고 놈들을 기민하게 살폈다. 몇몇 놈들은 부공태가 대충 팔만 휘둘러도 뼈가 부러져서 누울 것 같았다. 하지만 위험해 보이는 놈들도 있었다.
“빨리 안 내려, 씨발!”
급기야 소리를 지른 남자 하나가 주먹으로 차창을 마구 때려 댔다. 부공태의 눈썹이 그제야 슬며시 휘었다. 안전벨트를 푸는 동작이 무척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이, 씨발,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돼지 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내뱉은 남자가 나가떨어졌다. 부공태가 강하게 밀치듯 연 문에 얼굴을 부딪힌 것이었다.
‘딩시 새끼 아이가.’
문짝 하나도 못 피하다니. 한종수가 보낸 놈들인가? 어디서 이렇게 막되어 먹은 놈들을 데려왔을까…. 부공태는 한숨을 삼키며 넥타이를 잡아 풀었다.
경호원 일을 오래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이제는 정장을 입고 하는 싸움이 편하다는 점이었다. …이 일로 주희설을 만난 것이야 장점으로 굳이 꼽을 필요도 없을 정도고.
“야, 뭐 하냐. 잡아!”
남자 하나가 외치자 나머지 놈들이 떼로 달려들었다. 부공태는 능숙하게 놈들의 주먹을 피했다.
‘처느려 빠짔네.’
말없이 허리를 숙이고, 다시 펴고, 주먹을 뻗어 눈앞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가, 다리를 뒤로 뻗어 뒤에서 달려드는 놈을 차 냈다.
온갖 무술을 섭렵한 부공태였다. 길거리 싸움에 익숙한 깡패들에게도 밀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부공태는,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
‘개자석들, 함 해보자꼬.’
두 놈은 이제 인사불성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얼굴이 피떡이 된 채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찻길에 나뒹구는 걸 보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문제는 한 놈이 유독 살기가 등등하단 거였다. 옷 안에 칼을 감추고 있는 놈이었다.
부공태는 차례대로 다른 놈들부터 쓰러뜨렸다. 주먹을 얼굴에 그대로 꽂아 기절시키고, 발차기로 턱주가리를 제대로 돌려 버렸다. 그리고 어떤 놈들은 목덜미를 양손에 하나씩 잡아 저들끼리 머리를 부딪쳐 박살을 내 버렸다. 부공태의 피지컬이 워낙에 우월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머리가 박살 난 놈의 한쪽 팔을 밟자 와작, 하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죽어라 비명을 내질렀다. 부공태는 그 끔찍한 소리를 무시하며 남자의 품에서 칼을 꺼냈다. 짧은 잭나이프였다.
“하여튼 간에 서울 것들은 씨바씨바 카믄서 아가리만 털믄 다 되는 줄 안다카이.”
그는 잭나이프를 한 손으로 휘휘 돌렸다. 이미 피가 묻은 부공태의 손은 워낙 거대해서 빙글빙글 도는 잭나이프가 꼭 쪽가위처럼 작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자도 칼을 꺼냈다. 이번에는 잭나이프가 아닌 제대로 된 단검이었다. 부공태는 허,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깡패 새끼가 빌껄 다 가꼬 댕기네. 니 무기 소지 허가는 받았나?”
남자가 대답 대신 단검을 휘둘렀다. 부공태는 살짝 상체를 젖히는 것으로 피했다. 사내가 다시 덤벼들자 이번에는 옆으로 고개를 살짝 젖혀 피했다.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몸짓이었다. 부공태의 덩치가 훨씬 더 크단 사실을 감안하면 더 심했다.
부공태는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고작 이깟 놈들을 데리고 나를 잡으려고 했다고? 한종수인지 나발인지 그놈을 만나면 제대로 갚아 주리라.
“어데서 굴러 묵다 온 양아치 새낀지는 모리겠는데, 니 정장 어깨, 거, 커 가꼬 하나도 안 맞다. 운동 쫌 해라.”
사내의 얼굴이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내내 말이 없던 부공태가 계속 헛소리를 하는 건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헛소리를 해서 주의를 흐트러뜨려 놓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큰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생긴 거는 멀쩡해 가꼬 와 이런 짓 하고 댕기노?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보통 부모 욕을 못 견디는 놈들이 대부분인데, 이놈은 어찌 된 일인지 애비 욕을 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걸 보니 독종이었다.
그리고 부공태는 곧 깨달았다. 이놈이 독종인 게 아니었다. 막 차에서 기어 나온 놈들을 보느라 대답하지 않은 거였다.
“허.”
여태껏 그와 싸운 놈들은 죄다 피라미고, 차에서 나온 놈들이 진짜였다. 체구도 그렇고 각기 단검과 야구 배트를 쥔 모양새도 달랐다.
부공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식었다. 그는 좌우로 목을 뚝, 뚝, 꺾고는 자세를 고쳤다. 칼과 야구 배트, 그리고 주먹이 부공태를 향해 동시에 날아들었다.
***
어마어마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아니, 이걸 두통이라고 불러야 할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머리가 실제로 깨졌음을 깨달았다. 눈앞에 쇠망치가 놓여 있어서였다.
“이, 미친… 놈이….”
몹시 어지러운 걸 보니 제대로 두들겨 맞은 모양이다. 일단 손발부터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도 사지의 감각에는 이상이 없었다. 다만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아까와 달리, 어깨부터 허리까지 상체 전체가 의자에 묶인 듯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한종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기절하기 전에 녀석의 목을 졸랐던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목소리가 많이 잠겨 있었다. 녀석도 아마 멀쩡하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냥 나 좀 풀어 주라. 이게 도대체 뭔 짓이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범죄자의 뻔한 대사였다. 그럼 안 하면 되잖아. 미친놈이.
한종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뒤에 있는 책상에 앉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래도 노력했어요. 남들 자는 시간에 연습하고, 남의 대사까지 다 외우고, 일 들어오면 쳐 내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다 했어요.”
놈의 목소리가 좀 지친 듯이 들렸다. 나한테는 기회라는 소리다.
“그런데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자빠졌나. 노오력만 한다고 다 되면 세상이 이 꼴이겠어?
속으로만 어이없어하는데, 한종수가 돌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목은 전선 자국이 그대로 남아서 아주 끔찍했다. 호러 영화에 나오는 악당의 죽기 전 모습 같았다.
“내가 그렇게 노력하는 동안, 선배님은 편하게 그 자리까지 올라가더라고요.”
이번에는 정말로 헛웃음이 나왔다.
“뭔 개소리야.”
연기 경력부터 십 년은 넘게 차이 나고, 필모그래피 개수는 열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누군 노력 안 한 줄 아나.
“너는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 자리고, 나는 편하게 이 자리에 왔다, 이거야? 그게 말이 돼?”
말이 끝나자마자 놈의 손이 뻗어 오더니 내 목을 움켜쥐었다. 악력에 목이 터질 것 같았다.
“그게 당신 힘으로 올라간 자리 같아?”
뭔지는 몰라도 녀석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네요. 당신 아버지 덕은 있는 대로 다 보고, 그걸 자기 성과라고 생각해?”
아, 이제 알았다. 녀석이 열폭하는 지점이 이거였구나.
“아, 버지는… 나한테 혜택 줄 분이 아니야.”
목이 졸린 와중에도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녀석이 내 말을 더 듣고 싶다는 듯이 손을 조금 풀어줬다. 쿨럭대며 고개를 앞으로 쏟았다. 한참 기침을 하고서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후우…. 내 아버지는 양아들에게 투자할 돈 있으면 그걸로 자기 사업 불리는 분이야. 저번에 너랑 CF 찍게 한 거 보면 몰라?”
목이 아파서 몇 번 기침을 더 했다. 녀석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그래도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더 세게 조를걸.
“양아들이라도 자기한테 방해된다 싶으면 바로 치워 버릴 분이란 말이야.”
설마 인터넷에 떠도는 몇몇 글을 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만에 하나 아버지가 나를 밀어주려고 작정한다고 해도 결국 내가 잘하지 않으면 못 뜨는 게 이 판이라는 걸, 녀석은 모르는 걸까.
“진짜 양아들이라면 그렇겠지.”
뒤이은 한종수의 말에 눈이 크게 떠졌다.
“…뭐?”
한종수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힘없이 웃었다.
“양아들이 아니고, 친아들이잖아.”
머리가 띵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뭘 착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다 들었어. 당신 아버지한테 직접 들었어.”
황당해서 입을 닫았다.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볼 셈이었다.
“그 CF 건 때문에 회장님이 오셨을 때, 지나가다가 들었어. 당신 이야기 하는 거.”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데?”
한종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말을 마저 이었다.
“친아들이라서 당신 입양한 거라고. 아니었으면 ‘그 여자’가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