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랑은 중병이야 (8/18)

사랑은 중병이야

CF 촬영은 무사히 진행되었지만 K전자와 관련된 일은 정리되질 않는 듯했다. 뉴스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니 말이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으니 쉽게 정리되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 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또 안 좋은 소리만 들을 것 같아서 내 일이나 잘하자 싶었다.

촬영이 끝나고 밤에 부공태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나랑만 하도 붙어 있어서 혹시 친구가 없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나처럼 사교성 없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친구 누구 만나러 가시는데요?”

“아아, 댝교 동창 여자 아 하나가 자꼬 보자 안 캅니꺼. 아따 참 사람 구찮구로….”

여자… 만나러 가는구나.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태 씨한테 만나자고 자꾸 말하는 거 보면 호감 있는 분인가 보다….’

내 팬들 중에서는 부공태가 조폭 같고 성격이 불같다며 싫어하는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시원시원하고 터프하다며 좋아하는 분들도 있었다.

게다가 대학교 친구라면 부공태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도 잘 알 거고,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알고 지냈을 거고….

더 길게 생각하면 괜히 땅만 팔 것 같아서 생각을 멈추었다.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앞으로도 편하게 개인 용무 보셔도 돼요. 저 스케줄 있을 때만 같이 움직이심 되잖아요.”

내 집에 같이 살고부터 부공태가 개인 스케줄로 밖에 나가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밀착 경호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나야 좋지만, 그에게도 생활이라는 게 있으니. 하지만 내 말에 부공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그카믄 됩니꺼? 배우님 옆에 딱 붙어 있어야지예.”

그의 말에 약간 울컥하는 감정과 고마운 감정이 뒤섞였다. 이렇게 미련하게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쨌든, 볼일 있으심 편하게 다녀오셔도 돼요. 휴일도 없이 어떻게 살아요.”

“예에. 알겠심더. 아, 맞다, 배우님도 이따 친구분 만나러 간다 안 캤심꺼?”

나는 오늘 이범산의 집에 가서 맥주나 한잔하기로 했었다. 내일은 주말이고, 얼굴 본 지도 오래되었고 해서 말이다.

“네. 제가 운전해서 가면 돼요. 저는 술 안 마실 거니까 올 때도 제가 운전하면 되구요.”

부공태는 영 안심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번에 습격당한 일도 있고, 쫌 안 그렇십니꺼? 쪼매만 기다리 보이소. 제가 퍼뜩 전화만 하고 오겠심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약속 취소하시게요? 그러지 마세요.”

“아입니더. 나중에 보믄 됩니더. 영 그카믄 배우님 모시다 드리고 좀 늦게 가믄 되지예.”

“제가 혼자 갈게요. 괜찮아요. 약속 변경하지 마세요.”

부공태가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내 개인 차량은 한종수도 모르고 나와 가까운 감독이나 배우들도 모른다. 뭐, 한종수가 범인이리라는 증거도 없지만 말이다.

“그캐도 쫌….”

“괜찮아요.”

그가 나를 지키는 게 직업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의 개인적인 일까지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가는 담에 만나도 괘않심더. 배우님 안전이….”

“괜찮다고 했잖아요.”

나도 모르게 조금 날 선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부공태는 내 경호원이지, 내 노예가 아니다.

“얼른 다녀오세요. 저는 걔 퇴근하고 나면 걔네 집으로 가기로 했어요. 단둘이 집에만 있을 거라서 진짜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달래려고 한 말인데 어째 부공태의 표정이 더 안 좋아진다.

“…단둘이… 집에만예? 둘이서 머 하는데예!”

“그냥 맥주 마실 건데요? 저는 무알콜.”

어쩐지 그의 표정이 영 안 좋아서 당혹스러웠다. 이범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하지만 저번에 잠깐 집에 왔던 이범산을 스치듯이 본 것 말고는 딱히 녀석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텐데.

“늦은 밤에 남자랑 있으면 쫌 안 그렇십니꺼?”

“왜요? 저도 남자인데.”

내가 말하자 그는 꼭 바보 도 트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맞네예.”

그러더니 헛기침을 험험, 하는 게 아닌가. 좀 억울했다. 내가 아무리 부공태보다는 몸도 약하고 덩치도 작지만 도대체 날 얼마나 약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카믄 즐겁게 놀다 오이소.”

“공태 씨도요.”

그렇게 겨우 부공태를 보내고 집에는 혼자 남았다. 저번에 온 이상한 문자 메시지 때문에 경비 시스템도 업그레이드했고 휴대폰과 자동차에도 위치 추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으니 딱히 걱정은 안 되었다.

물론 스토커의 정체가 한종수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이 안 되는 까닭도 있었다. 자기도 얼굴 다 알려진 배우인데, 나한테 해코지를 해 봤자 얼마나 하겠냐는 거다.

부공태가 나간 후에도 이범산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기에 시간이 조금 남았다. 이때다 싶어서 내게 온 작은 택배를 열어 보았다. 작은 우편 봉투를 열자 사진 몇 장이 나왔다. 바로 부공태의 사진이었다.

며칠 전 바닷가에 갔을 때 낚시터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한 게 아까 도착했던 것이었다. 장난스러운 포즈들이 그대로 찍힌 사진을 넘겨 보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진짜 귀엽다.’

그리고 몇 장을 넘기던 어느 지점에서 내 손은 멈췄다. 웃긴 포즈 없이 멋있게 찍은 부공태의 사진이었다.

“…잘 나왔네.”

중얼거리며 사진을 도로 봉투에 넣었다.

인화 사진을 주문할 때는 신이 나고 두근거렸는데, 막상 받아 보니 이걸 내가 왜 주문했나 싶었다.

‘어차피 가지고 다니지도 못하는데.’

내가 일반인이고 부공태가 연예인이었다면 그냥 동경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에 가지고 다닌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 처지로는 그럴 수 없다. 누구한테 들키면 뭐라고 할 건데. 경호원 사진을 지갑에 넣어 다니는 배우가 어디 있단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한 장 정도는 괜찮지 않나.’

어차피 내 지갑은 딱히 열 일도 없다. 이동하면서 생기는 지출은 대부분 매니저 형이 가진 법인 카드로 해결하고 내 개인 카드 중에 그나마 자주 쓰는 것도 카드 바깥 주머니에 들어 있어서였다.

‘뭐, 누가 보겠어?’

그러니 한 장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부공태의 얼굴 주변을 조심스레 가위로 오렸다. 자그마하게 잘린 사진을 지갑 안쪽에 꽂아 넣었다. 투명한 카드 주머니 안에 뒤집힌 채로 넣은 사진을 보니 약간 서글프기도 했지만, 부공태를 이렇게 지갑에 넣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나머지 사진은 봉투 안에 넣고 입구를 잘 접어서 서랍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서랍 안에는 아직도 돌돌이가 잠들어 있었다. 한 번밖에 써 보지 못한 불쌍한 내 돌돌이.

문득 내게 사고가 나면 이 서랍은 열지 말고 불태우라는 유서라도 미리 써 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범산은 아직도 퇴근을 안 했는지 연락이 없었다. 할 일 없이 앉아 있자니 아버지 일이 걱정되어서 슬그머니 검색을 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뉴스 기사가 몇 가지 떠 있었다.

JH 그룹 산하 ‘공장 노동자 사망 사건’ 피해자 유족 단체 고소 절차 밟아

JH 그룹 주 회장 ‘공장 노동자 사망 사건’ 묻자 침묵…

아버지 성격에 기사를 그냥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다 막지 못한 모양이었다. 벌써 ‘공장 노동자 사망 사건’이라고 이름도 붙었고, 유족들이 고소까지 한다니 아마 일이 커질 것이다.

나는 이 상황에서 아버지를 편들 수 없었다. 당연히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 수가 없어서 갑갑했다.

오래 고민하다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다.

- 그래.

짧은 목소리에 피로가 뚝뚝 묻어나는 것 같았다.

“걱정되어서요. 밥은 잘 챙겨 드시는지….”

-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단번에 나온 대답에 조금 멈칫했다. 여러 가지 말이 입 안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께 실망하기 싫어요.’

그러나 말을 내뱉지 못하고 어영부영 통화를 끝냈다. 아버지와 길게 이야기하기 싫은 까닭도 있었다. 정말 실망할까 봐 겁이 나서 말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방금 전에 헤어진 부공태가 더 보고 싶었다.

나는 내 생각보다 부공태에게 더 많이 의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 마음을 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보여서 슬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범산에게 연락이 왔다. 예상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그날 하필이면 이범산도 회사에서 잔뜩 깨지고 온 터라 기분이 많이 좋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맥주 캔을 앞에 두고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야, 진짜 너는 절대 회사 다니지 마라…. 진짜 거지 같아서….”

“짝사랑하면 원래 다 이렇게 멍청해지는 걸까…?”

정말 두서없는 지껄임이었다.

무알콜 맥주만 마시려고 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어느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 운전해서 가야 하는데…. 망했네.”

“대리 부르면 되지, 뭐가 문제야?”

나랑 달리 별로 취하지도 않은 이범산이 짜증스레 말했다.

“…그런가?”

오랜만에 술이 들어가다 보니 머리가 둔해졌다. 그러게, 대리를 부르면 되는데 무슨 걱정인가 싶었다.

“야, 마셔! 내가 불러 줄게! 아니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어, 어. 그러고 보니 나 내일 스케줄 없어. 모레도!”

“그럼 뭐가 걱정이야, 이 자식아.”

이범산이 딸칵! 새 맥주 캔을 따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흔쾌히 캔을 받아 들고 녀석과 건배를 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아, 두 캔이나 마시니까 취하네….”

“그거 도수 2프로짜리야, 멍청아.”

“으어, 취한다…. 짝사랑은 정말… 거지 같아….”

과자를 몇 개 집어 먹고 방바닥에 드러눕자 이범산이 발로 나를 마구 차 댔다. 과자 부스러기 바닥에 흘리지 말라는 녀석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너 아직도 그 경호원한테 마음 있냐?”

나를 신나게 발로 차던 이범산이 불쑥 생각난 듯이 물었다. 하여튼 눈치는 빠른 녀석이다. 어떻게 알았지?! 천재 같은 녀석. 내가 멍하니 있자니 그가 혀를 찼다.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들킬 일 없어, 괜찮아. 고백할 마음도 없고.”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이범산이 혀를 차며 반박했다. 나는 누운 채로 눈만 들었다. 그럼 뭐가 문제냐?

“너 그러다 우울증 온다.”

이 녀석이 그래도 내가 친구라고 걱정해 주는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픽 났다.

“우울증 같은 거야 옛날에 다 앓았었지.”

“그게 그렇게 쉽게 낫는 병이냐.”

“차라리 우울증만 있었으면 좋겠다….”

이범산의 얼굴이 구겨졌다. 뭔 개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사랑은 말이야… 병이다, 친구야. 사랑은… 중병이야….”

“으.”

나는 진지하게 말하는데 이범산은 혀를 내두르며 질린 내색을 했다. 발로 들고 차고 싶었지만 유일한 친구에게 그럴 순 없어서 꾹 참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쉽게 낫지 않을 리가 없어….”

사랑도 연기처럼 노력의 영역이라면, 노력하는 것만으로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시도해 볼 텐데. 이범산이 미친놈, 하고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혼자만의 우울한 무드에 푹 빠졌다.

혼자 생각에 잠겨 있자니 설움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정말 찌질하게도 나는 누운 채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범산이 또 기겁을 했다.

“아, 미친놈아. 취했으면 자라, 제발!”

“흑, 흐윽….”

“너 매니저 형한테 전화한다?”

잔인한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그쳤다.

“알았어, 잘게, 나쁜 놈아….”

그리고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간 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날 새벽, 불쌍한 이범산은 나와 밤을 새웠다는 이유로 초인종을 거세게 눌러 대는 부공태를 맞이해야 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찾아온 부공태는 이범산에게 양해의 말을 구한 뒤 나를 물건처럼 둘러업었다. 나는 채 술이 깨지도 않은 상태였다.

“우와아, 공태 씨가 나 들었다!”

“조용히 하이소. 사람들 깹니더.”

술이 덜 깨어서 거대한 부공태의 어깨에 실려 가는 일이 놀이 기구처럼 재미있게 느껴졌다.

“헤헤, 공태 씨 어깨에 얹혀 가는 거… 완전 좋다…. 맨날 해 주셨음 좋겠다….”

평소의 부공태라면 예에, 예, 하면서 내 말을 맞받아쳤을 텐데 어쩐지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반응 없는 부공태가 얄미워서 버둥거렸지만 딱히 의미 있는 몸짓이 되진 못했다. 부공태가 곧 나를 차 뒷좌석에 짐짝처럼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아야….”

뒷좌석에 누운 채로 몸을 웅크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아프진 않았지만 일부러 아픈 척을 했다. 부공태가 나를 들여다봐 주길 바랐으니까.

짐작대로 부공태는 내 쪽으로 허리를 숙여 왔다. 하지만 앓는 나를 걱정해 주거나 하는 대신 손목을 낚아챘다.

“무슨….”

올려다보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본 적 없는 부공태의 화난 표정이 코앞에 있었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꺼.”

너무 놀라서 딸꾹질을 할 뻔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눈과 휘어진 눈썹, 경직된 턱 근육. 이렇게 화난 부공태는 처음 보았다.

술이 확 깨며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랐다. 부공태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쳐 놓고 술을 미친 듯이 마시곤 외박을 했다. 휴대폰도 관리하지 않고 말이다.

“전화 꺼져 있다 캐 가꼬 식겁해가 왔심더. 내가 배우님 몬 찾았으믄 우째 됐겠심꺼?”

입을 벙긋거렸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내 잘못이 맞으니까. 새벽부터 내가 걱정되어 찾아온 그에게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죄송해요, 공태 씨. 제 잘못이에요. 앞으로 술 먹을 때 휴대폰도 확인 잘 하고, 연락도 하고….”

“뭔가 오해하는 거 긑은데.”

부공태가 내 말을 잘랐다. 여전히 내 손목을 붙든 채였다.

“내는 배우님이 연락을 안 해 가꼬 화가 난 기 아입니더.”

그의 눈빛이 낯설었다. 평소에 보던 부공태와 달라서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다.

“그, 그럼….”

“내 없는 데서 내가 모리는 사람하고 단둘이 술 묵꼬, 그카지 마이소.”

그의 말이 선뜻 이해 가지 않았다. 부공태는 이범산을 아는데…?

“앞으로는 그카지 마이소.”

…어쨌든 부공태가 하지 말라고 하니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공태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하곤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숨이 막히고 긴장이 되었다. 늘 편안하게만 느끼던 부공태에게서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이상했다.

그는 그대로 한참 동안이나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약간 숨이 막히고 간질간질한 것이 꼭….

그리고 갑자기 그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가까웠던 얼굴이 훅 멀어지자 새삼 아쉬웠다.

부공태는 그대로 앞 좌석으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 나는 멋쩍게 바로 앉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바로 했다. 눈곱도 얼른 떼었다. 이 와중에도 초라한 꼴을 부공태가 다 봤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내가 한심했다.

“벨트 하이소.”

“네….”

뒷좌석에 앉은 채 얌전히 벨트를 맸다.

그리고 부공태는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가시방석이었다.

‘진짜 화 많이 났나 보다….’

그러게 왜 술을 마셔서…! 앞으로 진짜 금주해야지, 생각하며 얌전히 그의 등 뒤만 바라보았다.

그날 부공태는 내 방에 나를 눕혀 놓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곤 침대 위에 머리를 싸매고 뒹굴었다.

“으으…. 주희설 이 멍청아!”

예쁘게 보여도 모자랄 판에 단단히 찍혔단 생각이 들어서 속상했다. 나 자신이 미웠다.

“잘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도 부공태가 내 연인이 될 가능성은 제로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더 비참해졌다.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우우, 소리를 냈다.

문득 밖에서 부공태가 지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이른 아침이라도 먹으러 주방에 가는 걸까. 집 살림 봐주시는 도우미분께 어차피 나는 다이어트 식단 위주로 먹으니 부공태가 좋아하는 걸로 냉장고를 채워 달라고 했었다. 그 사실을 부공태는 알고 있을까. 알면 뭐가 달라지긴 할까.

가신 취기 대신에 잡생각이 밀려들다가,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

눈을 뜨자마자 전날의 추태가 떠올라 스스로를 기절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공태는 그날 오전부터 평소처럼 행동해 주었다.

“이거 마시이소.”

내 방으로 들어온 부공태가 컵에 담긴 뭔가를 불쑥 내밀었고,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홀짝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자니 부공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지 알고 덥석 마시는교?”

“꿀물… 이네요.”

달달하고 따뜻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숙취로 인한 두통도 가라앉는 듯했다. 역시 다정하다니까.

“맛있어요. 감사해요.”

조금 겸연쩍지만 감사 인사까지 했는데, 부공태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독이라도 탔으믄 우짤라꼬 그캅니꺼?”

그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공태 씨가 왜 저한테 독을 먹여요?”

그러자 부공태는 정말 갑갑하다는 듯이 또 한숨을 푹 쉬곤 손으로 자기 무릎을 퍽퍽 쳤다. 깜짝 놀랐다. 아직 손이 다 낫지도 않았을 텐데.

“배우님은 와 그래 조심성이 없습니꺼!”

“…….”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배우님은예, 자기 자신을 좀 더 돌볼 필요가 있습니더.”

“저 관리 열심히 하는데…. 운동도 하고…. 일도 열심히….”

“아이고, 아이고….”

부공태는 이제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펑펑 두드려 댔다. 갑갑해서 못 견디겠다는 투였다. 내가 뭐가 그렇게 갑갑하기에…. 솔직히 억울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안 보입니꺼?”

그리고 뒤이은 말에 하마터면 뜨거운 잔을 놓칠 뻔했다.

“그… 그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꿀물을 마시는 척하며 컵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공태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그가 왜 화를 내는지 깨달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람. 혼이 나도 싸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럴수록 사과는 똑바로 해야 하는 법이다.

“뭐가 죄송한지는 아는교?”

부공태가 물었다. 이 와중에도 연인끼리 ‘넌 내가 왜 화났는지 알아?’ 하고 싸울 때 하는 대사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게… 공태 씨는 제 경호원이시고… 힘들게 일하고 계신데, 제가 일종의 업무 방해를 해서….”

“하아.”

말하던 도중에 부공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게 아닌가. 그의 눈치를 보고 있자니 부공태가 쓰게 웃었다.

“우리 배우님, 그래 쫄아 있으믄 누가 잡아갑니더.”

“…잡아가요?”

“강새이 맨키로 쪼만하이 쫄아 있으면 들고 튀고 싶다 아입니꺼.”

그… 러니까, 내가 개 같아서 개장수가 그러듯 잡아가고 싶다는 뜻인가? 개장수는 불법이고 그건 동물 학대인데…. 실제로 납치당할 뻔한 적도 있지만 그 말을 지금 하는 건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있는 부공태의 표정이 묘하게 깊어졌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이 쿵쿵 뛰었다. 진정하자, 난 지금 혼나는 중이다.

“걱정했습니더.”

‘걱정’이라는 단어가, 그리고 진지하기 그지없는 그의 표정이 마음을 떨리게 했다.

…혼나는 중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할까. 두근거리고, 숨이 차고, 얼굴이 붉어지고.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에게 두근거리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도 모자랄 판에 부공태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다니. 진짜 바보 같다.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하란 말이야.’

걱정했다는 말이 이렇게 기분 좋고 설레는 말인 줄 처음 알았다. 부공태가 나를 이렇게 봐 줄 줄은 몰랐다.

“진짜로, 마이 걱정했습니더.”

덧붙이는 말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꾸 착각하면 안 되는데. 이건 반칙 아닌가.

결국 내 눈에 습기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미쳤나 보다. 얼른 눈물을 닦으려는데 부공태의 손이 얼굴로 뻗어 왔다. 미처 피하기도 전에 그가 내 눈물을 닦아 냈다.

“와 우는교.”

“호, 혼내고 계시잖아요….”

“하이고….”

그가 음절을 길게 끌며 ‘하이고’라고 말할 때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인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고였다. 미쳤나 보다.

“울지 마라! 남자는 우는 거 아이다!”

눈물이 나려다가 쏙 들어갔다.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빤히 보았다. 성별이 무슨 상관인데!

그러자 부공태는 화들짝 놀라더니 얼굴을 붉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가 나는 걸 삭이는 모양이었다.

“…울 수도 있지. 그래, 이쁘믄 울 수도 있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부공태가 낯설었다. 와중에도 예쁘다는 말이 귀에 박혔다. 내가 정말 예쁘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꾹 참았다.

“…죄송해요.”

부공태가 다시 내 쪽으로 손을 뻗어 오려다가, 도로 거두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눈물 콧물 젖은 얼굴이 더럽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자신 없이 덧붙이자 부공태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편해졌다. 다행이었다.

부공태는 나를 보며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이라도 하는 듯 입술을 한참 달싹거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울지 마이소.”

네, 하고 목소리를 내면 또 바보같이 눈물이 나올까 봐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내가 부공태의 옷깃을 꾹 쥐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놓기 싫어서 일부러 모른 척하며 한참을 더 붙들고 있었다.

‘좋아해요.’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이 너무 아파서 뱉어 버리고만 싶었다.

‘공태 씨, 진짜로 좋아해요.’

***

다행히도 한종수와 싸우지 않고 프로답게, 의젓하게 마지막 날까지 촬영을 마쳤다. 감독도 처음에는 까다롭게 굴더니 촬영이 순조로우니 풀리는 게 눈에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장을 나서며 스태프들과 감독에게 인사했다. 한종수랑 내내 부대껴 있던 게 억울했지만 부공태로 눈을 씻기로 했다.

그는 복도로 나가서 인이어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며 내 쪽을 보았다.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보이고 있는데, 매니저 형이 급히 다가왔다.

“희설아, 소지품 좀 챙겨 주라. 나 감독님이랑 이야기 좀.”

“네, 형. 걱정 마세요.”

쩔쩔매며 달려가는 매니저 형의 뒷모습을 보니 좀 안쓰러웠다.

원래 내 소지품을 챙기는 건 매니저 형의 일이지만 내가 애도 아니고, 이런 것쯤이야 혼자 할 수 있었다.

소지품을 챙겨서 나가려던 나는 뒤늦게야 지갑을 놔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 매니저 형이 있는 거구나, 새삼 깨달으며 스튜디오로 도로 들어갔다.

“좀 실망이더라.”

스튜디오 한쪽에 쳐 놓은 칸막이 안쪽에서 스태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지 않고 내 지갑을 찾아다니려 했지만 말하는 내용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JH 그룹 때문에 요즘 뉴스고 뭐고 다 난리인데, 좀 자중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물론 자기 잘못은 아니겠지만, 저렇게 환하게 웃고 다닐 수가 있나. 사람들이 그렇게 죽었는데….”

…아무래도 스튜디오가 아니라 다른 곳에 지갑을 두고 온 것 같아서 조용히 기척 없이 도로 나왔다.

어제 부공태가 자리를 비웠을 때 확인했던 익명 글과 댓글이 몇 개 떠올랐다. 험한 말도 있었지.

배우라는 직업은 언제나 오해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 어릴 때는 그 오해를 해명하려고 애쓰기도 했지만 가장 좋은 해명은 곧 새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나에 대한 소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순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클럽 죽돌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여자를 너무 밝혀서 혼전 임신을 시켰다는 심한 말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의 불화설, 어릴 때는 학업 태만설 등등 자잘한 것까지 합하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근거 없는 헛소리라서 며칠 지나면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 묻히지 않는 소문은 새 작품이 나오면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결국 내 사생활보다는 스크린에 비친 내 모습에 더 관심이 있으니까.

적어도 나와 직접 일한 스태프들, 관계자들은 나중에 가서 나쁜 말을 하는 경우가 없었다. 나 나름대로는 진실되게 사람을 대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스케줄을 멋대로 어기거나 내 지위를 이용하려 한 적도 없고, 무턱대고 사람에게 화를 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아마 알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믿었다.

“아이고, 배우님!”

복도로 나오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머리 하나는 더 큰 부공태의 모습이 보였다.

“저 찾으셨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나왔다. 방금 전까지 우울하던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배우님, 지갑을 이래 아무 떼나 놔뚜고 댕기믄 우짭니꺼.”

“네?”

그가 내 지갑을 내미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겁했다. 지갑 안에 넣어 놓은 부공태의 사진이 떠올라서였다.

“고마워요.”

“은지예.”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 들었고, 부공태도 별 반응이 없었다.

‘못 봤겠지?’

봤으면 자기 사진을 왜 넣어 다니냐고 물었을 것이다. 부공태는 그런 사람이니까.

“아이고, 날이 아직도 듭네. 빨리 가입시더. 자자, 배우님 이동합니데이.”

역시 아무렇지 않게 이동하는 그를 보니 지갑 안에 있는 내 사진은 못 본 듯했다.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갔는데, 매니저 형의 안색이 영 안 좋았다. 대충 무슨 일인지 감은 왔다.

“형,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냐. 차에 타자. 오늘 회사 가는 날이지?”

부공태는 뭐가 급한지 먼저 운전석에 탔고, 매니저 형은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손을 내저었지만 안색을 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 칼 들고 뛰어온 사람… 때문에 그러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매니저 형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떴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형이 내미는 휴대폰을 받아 들며 차 뒷좌석에 탔다. 대체 뭐라고 썼을지 궁금해서 바로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K전자 사망 유족, 배우 주희설 대낮에 습격

‘K전자 공장 사망 사건’ 주 회장은 침묵, 양아들은 칼 맞아…

‘와, 제목 한번 자극적이네.’

당장은 나한테 유리한 것 같아 보이는 기사지만, 이렇게 편을 드는 기사는 결국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다. 이 타이틀을 보고 아버지가 얼마나 열이 받으셨을지 생각하면 끔찍하기까지 했다.

“저, 아버지한테 가볼게요.”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부공태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수석에 앉은 매니저 형이 휘둥그레 뜬 눈으로 돌아보았다.

“희설아, 안 돼!”

“가야 돼요. 공태 씨, 가요.”

매니저 형은 앓는 소리를 냈고, 부공태는 침묵했다. 나는 운전석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공태를 재촉했다.

“어서 가요.”

“…싫습니더.”

부공태의 말에 조금 놀랐다. 아무래도 전에 내가 뺨 맞은 게 그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이야기만 하고 올 거예요. 저 촬영 중이니까 아버지도 저 못 때려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공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니저 형도 도끼눈을 하고 나를 노려봤다. 눈이 마주치자 절대 그러지 말라는 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사건, 해결할 방법 하나밖에 없어요. 아버지가 직접 유족들한테 사죄하고 배상하는 거요.”

물론 K전자 측에서도 이뤄져야 할 일이지만, 거기도 JH그룹의 하청업체였으니 총책임자가 책임을 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연기만 알고 자랐고, 세상 물정 모르는 나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책임은 총책임자가 져야 한다는 것.

부공태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고 갓길에 선 차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매니저 형은 전화를 받더니 조수석에서 내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언뜻 통화 내용을 들어 보니 내가 찍을 신작 영화, 그러니까 한종수랑 주연을 다툰 그 작품 관련 내용인 것 같았다.

차 안에 둘만 남자 뻣뻣한 침묵이 들어찼다. 부공태가 이렇게 고집이 센 사람이었던가.

“공태 씨는 제 경호원이잖아요. 제가 가자는 곳으로 무조건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참다못해 한마디를 하자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내는 배우님 시키는 대로 하는 쫄따구가 아이고, 배우님 안전을 위해 고용된 사람임더. 안전하지 않은 일은 내 선에서 끊고 안 하는 기 맞심더.”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라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는 달랐다.

“나라도 아버지를 설득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야 그때처럼….”

그때처럼 공태 씨가 다치지 않죠. 그 말은 삼켰다. 대신 떼를 썼다.

“빨리 가요. 아버지 회사로.”

부공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갑자기 앞으로 가는 바람에 벨트에 갇힌 몸이 휘청, 기울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 해요!”

뒤를 보자 담배를 피우던 매니저 형이 놀라서 달려오고 있었지만, 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부공태가 향하는 방향은 아버지 회사 쪽이 아니었다.

“공태 씨.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부공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미친 속도로 차를 몰 뿐이었다.

내가 아는 부공태는 신호 한번 어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폭주를 하고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공태 씨, 어디로 가는지라도 이야기해 줘요. 저 무서워요.”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은 참고 있기가 싫었다.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시면 저 공태 씨 해고할 거예요!”

버럭 소리 지르자 그제야 차가 엄청난 속도를 갑자기 줄이며 멈춰 섰다. 상체가 앞으로 휙, 쏠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짜를라믄 짤라 보이소.”

돌아보는 부공태의 얼굴에 분노가 뚝뚝 묻어났다. 며칠 전 내가 이범산의 집에서 밤새우고 왔을 때처럼 말이다. 아니, 그때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가슴이 아려 왔다. 이렇게 노려볼 만큼 내가 잘못한 건가.

“회장님이 배우님 말한다꼬 들으실 거 같십니꺼?”

아버지가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란 사실은 나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부공태의 화가 난 얼굴이 무서웠다. 그가 나를 노려보고 있단 사실에 마음이 아팠지만, 내색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람이 엄청 많이 죽었어요. 아버지한테 책임이 있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밖에 없어요.”

또 뺨을 맞거나 괜한 간섭 말란 이야기를 듣겠지. 그게 뭐 어때서.

“저는 아버지한테 혼나고 말지만, 그분들은 어떡해요?”

부공태의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다. 갑갑하단 투였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 습격한 사람, 그 사람은 내 아버지를 만나 봤을까.”

엄마를 병으로 잃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게 어떤 건지 안다. 심지어 그 죽음의 잘못이 남에게 있다면. 그 울분이 얼마나 클까.

“못 찾아갔겠죠. 경비가 얼마나 삼엄한데. 그래서 저를 찾아왔을 거예요.”

“그캐도….”

부공태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나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누구 의뢰를 받고 저한테 덤볐든, 그분 가족이 억울한 일을 당한 건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부공태가 그제야 내게서 시선을 떼었다. 넥타이를 잡아 푸는 손길이 거칠었다. 손이 낫지 않아서 아직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래가 내는 못 갑니더.”

그가 앞을 보고 말했다.

“내는 회장님한테 고용된 사람이지만, 내 임무는 배우님을 안 다치게 하는 겁니더.”

한 마디 한 마디가 부공태 그 자체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희설 씨가 다칠 곳에는 절대 안 갑니더. 다치는 게 몸이든, 마음이든.”

숨이 턱 막혔다. 먹어서는 안 되는 독하고 달콤한 무언가를 목에 삼킨 것 같았다.

위험해. 방어 기제처럼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이러면 안 된다. 더 넘어가선 안 된다. 감동하면 안 돼. 부공태는 단지 자신의 직업에 지나치게 성실할 뿐이다!

하지만 부공태의 눈을 마주하자 자꾸 마음이 무너진다. 이 감정은 애초에 내가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첫사랑이 거대한 파도와 같다고 누군가 알려 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대책 없이 쓸려 버리지 않았을 텐데.

부공태가 운전석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가 몸을 돌리고 의자 사이로 몸을 밀어 넣듯 상체를 숙여 왔다. 얼굴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내한테, 할 말 없습니꺼.”

부공태는 그렇게 묻고 침묵했다. 마치 내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이.

“배우님 내한테 할 말 있잖아예.”

그러니 어떻게 그 얼굴에 대고 할 말 없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태연할 수 있을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를 보는 부공태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몸에서 나는 비누 향기가 몸 안을 간질간질하게 맴도는 듯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팠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좋아해요.”

그가 내게서 원하는 말이 뭔지는 몰라도, 나는 그것 말고 할 말이 없었다.

부공태를 좋아한다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된, 주희설은 지금 바보 천치였다.

“처음부터 좋아했어요. 공태 씨.”

부공태의 두 눈이 커지고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니, 붉어지는 걸 넘어서서 거의 검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대로 차에서 뛰쳐나와 우리가 온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배우님!”

부공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갓길을 따라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눈앞이 흐렸다.

“배우님! 위험합니더!”

잡히면 안 돼! 뒤늦게 내가 한 짓이 후회되었다. 미쳤나 보다, 뜬금없이 고백이라니.

정말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지만 애초에 나는 부공태를 따돌릴 수 없었다. 체감상 백 미터도 가지 못하고 붙들렸다.

그가 나를 뒤에서 안듯이 붙잡았다. 쪽팔려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힘껏 몸을 비틀었지만 그런다고 놔줄 부공태가 아니지.

“이거, 놔요…! 안 도망갈게요!”

“배우님.”

“놔, 놔 달라구요….”

“주희설 씨!”

낮고 굵게 내지르는 목소리에 딸꾹, 하고 딸꾹질이 요란하게 터졌다. 그를 억지로 마주했다.

부공태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고, 다시 입을 열길 반복했다. 그만 좀 뜸 들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무렵에야 겨우 그의 말문이 트였다.

“배우님, 지는….”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그때, 매니저 형이 저 멀리서 죽어라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야아! 부공태!”

부공태에게 늘 존댓말을 쓰는 매니저 형인데, 이번에는 진심으로 빡친 모양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흉흉해서 나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잠깐 담배 피우러 나갔는데 부공태가 차를 몰고 급발진을 했으니.

“아, 그렇게 차를 몰고 가 버리면 어떡해요!”

부공태는 평소의 순한 곰돌이로 돌아와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조금 전까지 내게 위압적으로 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미안합니데이…. 내가 와 그캤나 몰라….”

“진짜, 희설이 공태 씨한테 납치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심꺼, 미안합니데이, 미안합니데이….”

매니저 형보다 두 배는 덩치가 더 큰 부공태가 어쩔 줄 모르고 허리를 연신 숙여 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아까 부공태가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얼떨결에 고백을 했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그냥 평범하게 좋아한다는 뜻이 아닌 걸 알아들은 것 같은데.

‘아마 거절의 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차라리 매니저 형이 우리 대화를 끊어 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 올라타서도 매니저 형은 부공태에게 잔소리를 했다. 이해할 만했다. 얼마 전에는 습격도 있었고, 요즘 도 넘은 댓글들을 처리하느라 형은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고생 중이니.

“진짜, 경호원이 그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진짜 한 번만 더 이런 일 있으면 바로 윗선에 보고할 겁니다.”

“예, 예에, 잘못했심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낍니더.”

부공태는 매니저 형에게 착실히 대답했다. 어쩐지 반성하고 후회하는 기색보다 그냥 정신이 없이 멍해 보였다.

왜 멍한지는… 나만 알 수 있었다. 내 고백 폭격을 받고 충격받은 거겠지.

‘멍청이 주희설….’

다시 나 자신을 탓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운전석의 부공태를 흘끔거렸고, 부공태는 백미러로 내 모습을 흘끔거렸으나 매니저 형은 이곳저곳과 통화하느라 바빠서 우리의 어색한 기류를 읽어 내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내일부터 당분간 스케줄이 없다는 게 그나마 내게는 위안이었다. 부공태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물론 부공태가 집에 있지 않아야 하지만…. 경호할 일이 없으니 밖으로 나가지 않을까….

중간에 매니저 형을 회사에 내려 준 뒤 나와 부공태는 우리 집으로 향했다.

매니저 형의 부산스러운 통화 소리가 사라지자 차 안은 놀라울 정도로 적막했다. 부공태와 내가 이동할 때 이런 분위기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더 어색했다.

‘차라리 그냥 빨리 거절해 주지.’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데, 매도 일찍 맞는 게 낫지 않을까.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공태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운전만 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저 내일부터 스케줄 없으니까, 공태 씨도 댁에 돌아가셔서 쉬세요.”

부공태는 뭐라고 대답하려는 듯이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당연히 거절당하겠지, 짐작이야 하고 있는데 막상 그의 입에서 나를 거부하는 말이 나올 거라 생각하니 듣기가 무서웠다.

“그럼, 가세요. 전 방에 있을게요. 나중에… 뵈어요.”

그가 말을 더 뱉기 전에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부공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미치게 궁금했지만 침실로 직행했다.

‘당분간 떨어져 있다 보면 어색함도 사라지겠지.’

그리고 내가 소름 끼치거나 하면… 부공태가 알아서 사표를 낼 거고.

침대에 엎드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내 첫사랑이 끝나는 걸까. 뒤늦은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너무 허무하게 끝난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이런 게 아닌데.

부공태가 정말로 나를 떠나 버리면 어떡하지. 아니, 차라리 그게 다행인가. 얼굴 못 보면 나도 그를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농담이라고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해 볼까….’

하하, 제가 요즘 스트레스가 많이 심했나 봐요. 아까 한 말은 그냥 잊어 주세요. 아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부공태를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혼자 청승을 떨고 있자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배우님요.”

부공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 않고 있자니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부공태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내 안 볼 낍니꺼?”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 보기가 부끄러웠다.

“배우님, 배우님이 뭐라 생각하시는지는 모리겠지만….”

그의 목소리 한 음절 한 음절이 방문을 걸러 들어와 이불까지 파고들었다. 그는 나를 침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는 배우님 안 싫어합니더.”

“……!”

그 말은… 설마….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쿵, 쿵, 내 심장 소리가 그의 말을 듣지 못하게 방해할까 싶었지만 이불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로 숨만 죽이고 있었다.

“카이까네 그… 편하게… 대해 주이소.”

이어진 말이 무슨 뜻인지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자니 부공태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편하게 대해 달라고?’

멍한 머리를 억지로 굴려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 고백은 받지 않겠다는 거네.

고백을 받을 거였으면 편하게 대해 달라는 말 대신 나도 좋아한다거나, 애인 하자거나…. 여튼 다른 말을 했겠지.

결과적으로 나는 부공태에게 차였다.

당연한 결과인데도 왜 마음이 부서질 듯 아픈지 알 수 없었다.

곰돌이같이 귀엽게 웃는 그의 얼굴과 내 것보다 훨씬 큰 신발, 취해서 내 위에 쓰러졌던 부공태, 내 다리를 보고 닭 다리 같다면서 감탄하던 말, 나한테 떠 주던 회, 바닷가를 배경으로 웃던 그 모습, 부공태와 관련된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

나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혹시라도 내가 운단 사실을 밖에 있는 그에게 들킬까 봐. 마지막으로 알량하게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

숨죽여 울다가 지쳐 눈을 떴을 때 집 안에 부공태의 기척은 없었다. 처음에는 욕실에 있나, 했는데 휴대폰을 확인하자 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잠깐 경호 팀 회의하러 갔다옵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그래, 상대는 부공태다. 내가 당신처럼 덩치 큰 남자에게 깔리는 게 성적 취향이라고 고백해도 어색하게 웃으며 넘어갈 사람이란 말이다. 뭐라고 할지 상상도 할 수 있었다. 하하, 배우님, 윽수로 특이하시네예.

‘오면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지….’

아침밥으로 맨식빵을 씹으며 그에게 할 말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고백을 하긴 했지만 공태 씨가 받아 줄 의무는 없어요. 그리고 공태 씨가 남자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평소처럼….’

혼자서 할 말을 정리하다가 결국 머리를 쥐어 싸맸다.

“아니, 너무 구차한 거 아닌가?”

그리고 충격을 받았을 부공태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터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고 휴대폰을 들었다.

저 스케줄 없으니까 집에만 있을 거예요. 당분간 출근 안 하셔도 돼요. 정말 괜찮아요.

나 때문에 평소에 사생활도 없이 지내는 부공태인데, 이참에 휴가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다. 그래도 온다면 그때 이야기를 하면 될 거고.

사실은 부공태보다 나한테 더 시간이 필요했다. 냅다 고백해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하아….”

또 한숨이 나왔다. 시간을 되돌리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남은 식빵을 입에 욱여넣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문 앞에 놓고 가 주세요. 감사합니다.”

“예에.”

내 택배는 이범산이 보내는 게 거의 다기 때문에 오기 전에 녀석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그러니 아마 저건 부공태의 것이겠지.

‘혹시 모르니까 안에 들여놔야지.’

인터폰 화면으로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택배를 찾으려 둘러보았지만… 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단 사실을 깨닫자마자 뒤에서 누군가 나를 끌어당겼다. 동시에 코와 입이 막혔다. 두꺼운 수건 같은 것이 얼굴 전체를 덮었다. 독한 약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누구….’

한종수 그 미친 새끼가 기어코 일을 친 건가? 아니면 또 다른 K전자 사망 사건 피해자가 내게 앙심을 품고 왔을 수도….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누구인지 모를 단단한 힘에 손목이 붙들렸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등 뒤로 대강 느껴지는 키와 힘, 체격으로 가늠해 봤을 때 남자가 분명했다.

있는 힘껏 뒤로 발길질했다. 그러나 슬리퍼만 벗겨져 저 멀리 나뒹구는 소리가 들릴 뿐, 범인에게 타격은 주지 못한 듯했다. 사지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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