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보자고
서울로 돌아가기 정말 싫었지만 스케줄이 잡혀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한종수와 촬영하는 그 CF 말이다. 아버지의 과실을 덮기 위해서, 기업 이미지 변신을 위해서 찍는 CF라는 사실은 끔찍했다.
그리고 윤시 누나와 한종수와 함께 촬영하던 영화는 결국 자진 하차 하기로 긴급 회의에서 결정이 났다. 짝사랑하는 역할이라 몰입할 수 있었는데, 좀 아쉽긴 했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는 없었다. 한종수와 찍는 CF가 남아 있었다.
본래 통보했던 CF 촬영 일정보다 갑자기 시간이 당겨졌다면서 매니저 형이 전화를 걸어 왔기에 부공태와 나는 밥도 먹지 못하고 휴게소 샌드위치로 밥을 때웠다. 도착하니 우리가 마지막이었다.
“자, 빨리 들어가자. 지금 회의 시작했어.”
매니저 형이 나를 급히 끌어당겼다. 부공태를 설핏 돌아보자 표정이 영 걱정스러워 보여서 나는 파이팅의 의미로 주먹을 들어 보였다.
‘잘하고 올게요.’
그러자 그도 그제야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보이며 큼지막한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감독,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이미 결정된 사항들이 대부분이어서 나는 시키는 대로 찍기만 하면 되었다. 불편한 자리이니 그냥 군말 없이 빨리 찍는 게 좋을 듯했다. 문제는 한종수였다.
한종수는 회의 내내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찝찝하고 불쾌한 시선.
경찰에서 휴대폰을 추적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다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일이야 이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 악의가 느껴지는 듯했다. 일종의 감이랄까.
‘그 폰이 대포폰이라 카데예. 아무래도 추적이 더 힘들 거 같심더.’
부공태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그렇게 말하며 꼭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책했다.
「나는 네 비밀을 알고 있어.」
사진 이후에 왔던, 발신자 제한의 문자 메시지도 떠올랐다.
‘선배님 짝사랑 중이시잖아요. 아, 이건 비밀인가?’
그리고 한종수의 말.
한종수가 그 사진과 메시지를 내게 보낸 건 아닐까 싶었지만 심증뿐이었다. 그러니 그를 찝찝해할 필요도 없는데,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나한텐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신경 쓰지 말자.’
회의실 밖에 앉아 있을 부공태를 떠올리자 금세 마음이 든든해졌다.
감독은 남자였는데, 이전에 일해 본 적은 없지만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격이 고압적이라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윤시 누나도 이 감독을 내 앞에서 엄청 흉봤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태프들도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자, 다 결정됐으니까 바로 촬영 들어갑시다.”
감독이 일어나자 스태프들도 제각기 일어섰다. 여전히 내게 시선을 보내는 한종수를 애써 무시하며 감독을 따라갔다.
“저, 제 스타일리스트가 아직 도착 안 해서요.”
감독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화장 못 해요?”
“네?”
감독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되묻자, 이번에는 아예 귀를 파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니, 스타일리스트도 안 데려온 건 그쪽 잘못이지. 그럼 촬영 취소라도 할까? 그딴 건 알아서 준비하라고.”
황당해서 말문이 다 막혔다. 시간을 일방적으로 바꾼 건 그쪽이면서 뭐가 이렇게 당당한지 어이가 없었다.
마침 통화를 끝낸 매니저 형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따라왔다. 나는 입 모양으로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매니저 형은 역시나 전문가답게 싹싹한 얼굴과 말투로 감독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하하, 감독님, 저희 스타일리스트가 지금 거의 다 도착했거든요. 한종수 씨 컷 먼저 찍고 진행하시면 될 것 같은데….”
“장난하나, 진짜.”
그러나 감독의 싸가지는 여전했다.
“아, 우리도 진짜 바쁜데 지금 다른 일들 다 미루고 해 드리는 거라고요. JH 회장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신다고 하셔서요. 아시겠어요?”
매니저 형마저 말문이 막혀 쓴웃음을 애써 짓는데,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선배님, 괜찮으시면 같이 스타일링 받으시죠.”
한종수였다. 내가 그를 불편해한단 사실을 매니저 형도 알고 있었기에 형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아, 저희 스타일리스트 금방 도착하니까….”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러나 내가 매듭을 지어 버렸다. 괜히 시작부터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일정이 저 때문에 늦어지면 안 되니까요. 그렇죠?”
감독에게 웃어 보이며 말하자 감독은 멋대로 하라는 투로 손을 내젓고 먼저 떠나 버렸다.
한종수는 묘한 표정을 짓고는 제 분장실로 안내를 했다. 이동하는 내내 ‘네가 문자 보내고 나 스토킹했냐, 이 새끼야’ 하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심증밖에 없는데도 이상하게 이 새끼가 맞는 것 같았다. 나랑 엮인 일도 거의 없는데 왜 나를 스토킹하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니, 애초에 나를 스토킹해서 얻어 낼 게 있기는 한가? 그도 나름대로 커리어를 잘 쌓고 있는 배우인데. 그런데도 왜 내 감은 자꾸 한종수를 지목할까.
매니저 형은 면구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종수에게 여러 번 고맙다고 이야기를 했다. 스타일리스트가 늦은 게 우리 잘못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비굴한가 싶어서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다.
한종수와 내가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형은 스타일리스트에게 다시 전화를 하러 나갔다. 묘한 침묵이 불편했다.
“그렇게 죄인 행세 할 필요 없어요.”
메이크업을 받던 중 한종수가 뜬금없이 말했다.
“…네?”
“아버님 일 때문에 움츠리고 계시잖아요. 그러실 필요 없다고요.”
뭔 개소리야. 아버지 일은 아버지 일이지.
“그런 적 없습니다만.”
조금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힘줘 대답했고, 한종수는 아무 표정 없이 앞만 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한 놈이었다.
***
촬영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JH그룹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쇄신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콘셉트가 왜 브로맨스가 되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지만 말이다.
뭐, 윗사람들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렇다. 보나마나 요즘 브로맨스가 인기니까 욱여넣어 보라고 했겠지. 나야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또 싫다고 했다간 아버지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기도 하고.
콘셉트 때문에 한종수는 내게 엉겨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 탓에 기분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그렇게 저 싫어하는 티 내시면 곤란해요.”
하지만 한종수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내가 연기를 몇 년이나 했는데. 어릴 때부터 불편한 사람 하나 없었겠냐마는 일하는 중에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프로답지 못한 일이니까.
“아, 티 나요?”
“네.”
뻔뻔하게 묻자 나보다 더 뻔뻔한 대답이 금세 날아온다.
“내가 티 내는데도 왜 맨날 나한테 친한 척해요?”
이번에는 녀석의 헛소리를 받아 줘 보기로 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깐 쉬는 타임에도 스태프들은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촬영장 한쪽 구석에 부공태가 서 있었다. 누구와 무전 중인지 인이어를 누른 채 뭐라 말을 하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도 마주 손을 들어 보였다.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앞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던 한종수가 말했다.
“선배님 비밀 알고 있다고.”
잠깐 침묵. 바쁜 사람들 사이에 우리만 우두커니 앉아 굳어 있었다.
“난 비밀 없는데요.”
“정말요?”
묻는 말에 옆을 보자 한종수가 웃고 있었다.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더 이상 같이 앉아 있기 싫어져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밀인지 뭔지 난 모르겠고, 할 말 있으면 저희 에이전시 통해서 하세요. 지금 매니저 형 있으니까 형 통해서 말해도 되고.”
그대로 돌아서는데 그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잘 생각해 봐요. 진짜 없는지.”
하고.
‘생각은 개뿔.’
나는 하늘에 대고 떳떳하다 말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발가벗겨진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비밀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가 없다는 걸. 무단 횡단 한번 안 하고 산 사람이다, 내가. 그러다가 사진이라도 찍혀서 대서특필되면 배우 인생 쫑 나는 거라고.
‘잠깐, 혹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화장실로 들어가 이범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유일한 친구이자 내가 덩치 좋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놈.
- 어, 웬일이냐.
“야, 너 괜찮아?”
- 난데없이 주말에 전화해서 뭔 소리야.
그러고 보니 오늘 주말이었지. 녀석은 잠을 자다 전화를 받았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혹시 뭐, 협박당하거나 납치당하거나 한 거 아니지?”
- 뭔 개소리야, 미친놈아.
이범산은 그렇게 말하며 길게 하품을 했다. 다행히도 멀쩡한 모양이었다. 한종수가 녀석까지 스토킹하진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면 됐어. 자라.”
전화를 끊으려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혹시 이상한 사람이 아는 척하거나 나에 대해서 물으면 무조건 모른다고 하고, 나한테 연락해. 아니면 매니저 형이나.”
- 뭐? 너야말로 뭔 일 있냐?
“그냥 혹시나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 쉬어.”
모처럼 쉬는 녀석을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전화를 끊고 화장실을 나왔다.
한종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감독과 이야기 중이었다. 한종수가 말하는 비밀이라는 게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지만, 그와 엮이기는 싫었다.
어쨌든 일은 일이니 나는 한종수를 최대한 무시하며 CF를 촬영했다. 하루에 끝나지 않는다는 게 좀 고역이긴 했다.
그래도 한 가지 기분 좋은 것은 부공태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촬영장을 든든히 지키고 있단 점이었다.
옆에 있는 한종수가 아무리 짜증 나도 부공태와 눈이 마주치면 짜증이 금세 날아갔다. 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척에 있는 부공태가 축복처럼 느껴졌다.
***
매니저 형은 스케줄이 끝난 저녁에 집으로 새 시나리오를 들고 왔다. 심지어 액션물의 형사 역할이라고 했다. 찍던 영화도 자진 하차 했는데, 새 영화라니.
“요즘 분위기도 좀 그런데, 그냥 당분간 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가 소심하게 묻자 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윗분들 생각은 다른가 봐. 인터뷰만 피하고 영화 같은 건 계속 하라시네.”
“…아버지 때문이네요.”
한숨을 섞어 말하자 매니저 형이 힘없이 웃었다. 이제 보니 눈이 충혈되고 볼도 움푹 팬 것이 형도 최근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아마 나 대신 내 이미지 관리를 해 주느라 불철주야 뛰고 있을 것이다.
“죄송해요, 형.”
“야, 그런 말 마라. 네가 뭐가 죄송해.”
딱 잘라 말해 주는 형이 고마웠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형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네 잘못 없어. 그렇게 풀 죽지 말고, 시놉시스나 잘 읽어 봐.”
“그럴게요.”
인물 소개를 다시 읽어 보고 있는 동안 매니저 형은 주방에 가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이거 한종수한테도 간 거야.”
“한종수한테요?”
“응. 근데 네가 하고 싶다고만 하면 바로 맡을 수 있을 분위기야.”
역시나 아버지가 손을 써 놨겠지. 시선을 돌리자 전면 창 밖으로 줄넘기 중인 부공태의 뒷모습이 보였다. 딱 붙는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 차림이라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걔한테도 갔다니까 이상하게 하고 싶어지네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자 내가 한종수를 불편해한다는 것을 아는 매니저 형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럼 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래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다.”
우리 아버지만 빼고요… 라는 말이 입 끝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대신 고맙다고 말하자 형은 웃은 뒤 소파에 늘어져 앉아 쉬기 시작했다.
창밖의 부공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느새 줄넘기를 멈추고 권투를 하듯 허공에 잽을 날리고 있었다.
내가 웃어 보이자 부공태도 눈을 휘며 웃었다. 동그랗게 솟아오른 광대를 보자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역시 부공태가 내게는 피로 회복제였다.
‘몸이 어쩜 저렇게 좋지.’
땀에 흠뻑 젖은 팔뚝과 복근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사납게 불끈거렸다. 손은 또 어찌나 큰지. 내 발보다 그의 손이 더 클 것이다. 땀에 젖은 거대한 수컷이 훅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문득 단둘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 탐스러운 몸을 만질 수 있다면 더 좋을 테고 말이다.
“형, 근데 집에 언제 가요?”
소파에 늘어진 매니저 형에게 묻자 형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세상 서러운 듯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민망함에 쩝, 입맛을 다셨다.
***
“어서 오세요, 선배님.”
다음 날, 한종수는 평소처럼 입만 공손하게 내게 인사했고 나 역시 스태프들과 감독님께만 예의 바른 인사를 했다.
곧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오늘 찍을 부분은 한종수와 내가 얼굴을 맞대고 무언가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쑥덕거리는 컷이었다. 마이크가 꺼져 있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 되었다. 할 말이 없으면 입만 벙긋거려도 되고.
그런데 한종수 이 자식이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주연 포기하세요. 이번에 시나리오 받으신 거.”
처음에는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촬영 콘셉트에 맞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지만 웃음을 띤 명랑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 역시 미미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그럼 저도 참을게요.”
“뭘 참아요?”
“말했잖아요. 난 선배님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했잖아요. 난 비밀 없다고.”
쑥덕거리고 있자니 감독이 다시 테이블 위를 쳐다보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멍청이들처럼 빈 테이블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그리고 입술은 복화술처럼 조금씩 움직이며 말을 주고받았다.
“본인도 모르는 비밀이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세요?”
“나도 모르는 비밀이 무슨 소용이에요. 비밀은 감추고 싶어야 가치가 있는 건데.”
“그게 선배님의 커리어를 무너뜨리는 거라고 해도요?”
이번에는 정말로 한종수를 쳐다볼 뻔했다. 티가 안 나게 마른침을 삼키곤 얼굴은 연기에 집중했다.
“선배님한테는 지나가는 작품인지 몰라도, 저는 꼭 그 영화 주연 맡아야 해요.”
“저한테 지나가는 작품은 없는데요.”
“양보 못 하시겠다는 뜻? 그럼 협상 결렬이네요.”
한종수가 뭘 믿는지는 몰라도 나는 정말로 감추는 게 없었다. 순간 아버지가 떠올랐지만, 어차피 아버지가 내 양아버지라는 사실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그러니 꿀릴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기분이 더러운 것을 촬영장에서 내색할 수는 없으니 더더욱 방긋방긋 웃었다.
“희설 씨 표정 아주 좋네. 둘이 아주 사이 좋아 보인다. 그대로, 그렇지.”
그렇게 더럽고 찝찝한 기분으로 촬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촬영장에서 나오자마자 깨달았다. 오늘의 찝찝함은 사실 한종수 때문이 아니라 다른 나쁜 사건이 일어날 예고였음을.
오늘은 기자 두세 명이 스튜디오 밖 야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촬영 관련해서 한종수의 인터뷰가 있다고 했다.
나도 같이 인터뷰를 하려나 싶었는데, 매니저 형은 당분간 언론 접촉을 막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여론이 안 좋으니 나와서 좋을 게 없단 뜻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귀찮기도 하고, 오히려 한종수랑 친한 척을 안 해도 되니 좋았다.
“건물 앞 테라스에서 인터뷰 촬영한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조용히 나가자.”
매니저 형의 말대로 우리 일행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갔다. 밖에는 기자들이 제법 많았다. 오늘 날을 잡고 한꺼번에 여러 곳과 인터뷰할 모양이었다.
일행들과 같이 나가자 경호원들이 내 몸을 자연스럽게 가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부공태가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로 슬그머니 테라스 쪽을 살폈다. 사람이 많았다. 소식을 듣고 왔는지 한종수의 팬으로 추정되는 무리도 보였다. 나야 그 녀석을 좀 찝찝해하지만 그래도 마니아층에서 수요가 있는 배우였다.
‘근데 생각보다 한종수 팬이 많네…,’
절대 질투는 아니었다. 며칠 전에 괜히 들여다봤던 커뮤니티 글들도 생각나고 해서 기분이 싱숭생숭한 것뿐이었다.
이번 일로 내 팬들 중에 돌아선 분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할 필요 없단 걸 아는데도 머릿속은 말을 듣질 않았다. 지금 고민해 봐야 해결할 방법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선 부공태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부공태는 평소에 이동할 때처럼 바짝 날이 선 상태였다.
순간 그의 존재가 든든한 둑처럼 느껴졌다.
부공태가 없었더라면 나는 더 불안해하고 더 삽질을 했겠지.
그는 경호원으로 나를 만났지만 나한테는 이미 경호원 이상이었다. 뭐든 다 막아 줄 것 같은 든든한 기분이 나를 위로했다.
‘힘내자.’
한숨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내 또래의 젊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희설 형!”
누군가 나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팬인 모양이었다. 나한테 남팬은 잘 없으니 귀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늘 하듯이 인사를 건네며 웃어 보였다. 그런데 기분이 영 이상했다. 남자의 눈빛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뭔가 번뜩거리는 듯하더니 남자가 내게 달려들었다.
“희설아!”
매니저 형의 외침보다 조금 더 빨리 부공태가 움직였다. 그가 손으로 무언가를 막아 냈다. 남자가 휘두른 칼날이었다.
부공태가 칼을 날째 잡고 놔 주지 않으니 남자는 곧바로 다른 손 주먹을 뻗어 부공태의 얼굴 쪽을 향했으나 부공태가 고개를 틀어 피했다.
“공태 씨…!”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기자들은 이 와중에도 우리 쪽으로 몰려와 사진을 찍어 댔다.
“사진 찍지 마세요! 비키세요!”
매니저 형과 다른 경호원들이 말려도 기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가뜩이나 요즘 핫한 이슈를 몰고 있는 나와 관련된 일이니 놓칠 리가 없었다.
다른 경호원들이 나와 부공태를 떼어 놓았다. 나는 부공태가 멀쩡한지 보고 싶었지만 사내들의 덩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얼핏 보니 부공태가 남자와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물론 부공태가 일방적으로 남자를 막아서는 쪽에 가까웠다. 남자가 들고 있던 칼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너희 아버지 때문에 우리 아빠가 죽었어!”
거의 반쯤 포기한 투로 남자가 외쳤다.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러니까 남자의 아버지는 K전자의 피해자인 모양이었다.
“형 팬이었다구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 팬이었다는 말이 이렇게 슬픈 말인 줄 처음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미안하게도, 당장은 부공태가 걱정되었다. 이 와중에도 짝사랑하는 남자나 걱정하는 내가 한심했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내 아버지 때문에. 하지만….
찰칵, 찰칵, 사진 찍는 소리와 눈을 아리게 하는 플래시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들. 모든 게 먹먹하게 멀어졌다.
남자는 다시 도망치려 했으나 부공태에게 붙들렸다. 부공태는 경찰들이 범인을 제압하듯이 남자의 두 팔을 뒤로 꺾고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제야 부공태의 와이셔츠 소매 부분이 피로 젖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날을 맨손으로 잡았으니 안 다치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뭐 하는교! 퍼뜩 배우님 안 모시고!”
“아, 예!”
그가 소리 지르자 경호원들이 나를 끌어당겼다. 부공태는 내 쪽을 보지 않았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힘없는 몸뚱이가 밴에 구겨지듯 들어갔다.
***
회사로 이동하고 나서야 부공태가 괜찮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습격했던 남자는 경찰들이 데려갔다고 했다.
“병원 어디예요? 제가 갈게요.”
“병원요?”
되묻는 경호원에게 괜히 갑갑함이 솟구쳤다.
“공태 씨 다쳤잖아요. 병원 갔을 거 아니에요.”
“아, 경호 팀장님 병원 가신 게 아니라 경찰서에서 곧장 여기로 복귀하신다고….”
“네? 손이 너덜너덜해졌을 텐데 왜 병원엘 안 가요!”
결국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죄 없는 경호원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문득 나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세차게 내젓자 경호원은 더 당황했다.
“희, 희설 씨. 그게, 저희도 잘….”
“화내서 죄송해요. 지금 바로 온다고 하던가요?”
“아닙니다. 예, 벌써 오고 있다고….”
경호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무실이 쾅, 하고 열렸다. 커다란, 아주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우님요!”
부공태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목으로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무언가를 억지로 삼켜 내렸다.
내 표정을 살핀 부공태가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나가란 손짓을 했다. 덕분에 사무실에는 나와 부공태 둘만 남게 되었다.
대충 응급 처치는 한 것인지 그의 손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두꺼운 붕대 위로도 피가 비칠 만큼 많이 다쳤는데, 어째서 병원이 아닌 이곳으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배우님, 괘않십니꺼?”
조심스레 묻는 어조에 배려가 묻어난다. 어이가 없어서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괜찮냐고? 내가?’
이 미련한 곰탱이는 자기 손이 너덜너덜해지고서도 내 마음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나를 습격했던 남자가 아버지를 들먹여서. 그래서 내 마음이 다쳤을까 봐.
갑갑하고 미웠다. 하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 감정을.
“저는 괜찮아요. 손 좀 봐요. 응급 처치는 했어요?”
“하이고, 쬐매 긁힌 거 가꼬 먼 응급 처칩니꺼. 대충 놔뚜면 낫십니더.”
“안 돼요! 기다려요, 구급상자 들고 올게요.”
내가 덜렁거리다 어딘가 베이고 멍이 든 적이 꽤 있어서 사무실에는 상비약이 늘 있었다. 내 트로피가 진열된 장식장 아래쪽 문을 열어 구급상자를 꺼냈다.
“진짜 괘않은데….”
“가만있어요.”
대충 감아 놓은 붕대는 이제 보니 붕대가 아니라 부공태의 와이셔츠를 찢은 것이었다. 안에는 소독도 안 했는지 퉁퉁 부은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나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지혈도 안 하고!”
속상함에 버럭 소리를 지르자 부공태가 큰 덩치를 움찔했다. 나는 가차 없이 지혈제부터 뿌렸다.
“아, 따따따따!”
“꿰매야 할 거 같은데.”
엄살 부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자 부공태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아입니더! 꿰매기는예! 그 정도는 아이지!”
“왜요, 무서워요?”
“무습기는예!”
바로 부정하는 걸 보니 조금 의심이 가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았다. 부공태가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 와중에도 그가 귀엽게 느껴지다니, 정말 나도 답이 없다.
“…일단 응급 처치부터 해요.”
한숨을 푹 내쉬곤 그의 상처에 소독약과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자꾸 속이 상했다. 경호원이란 직업이 뭔지 빤히 아는데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갑자기 울컥했다.
“무슨 경호원이 응급 처치도 할 줄 몰라요?”
“간단한 거는 배았는데, 써먹을 데가 있어야지예.”
“그래도 운동도 많이 하셨는데, 다친 적 별로 없으세요?”
부공태는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문질렀다.
“뭐, 대충 놔뚜면 알아서 다 낫더라꼬예.”
황당해서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럼 여태 다치시면 그냥… 방치했다는 말씀이세요?”
“아이지, 캐도 마이 아프믄 내도 병원 가고 카지예….”
대답하는 폼이 영 자신 없는 걸 보니 그냥 잘 다치지 않는 몸인 것 같았다. 그런 몸이 이렇게 피가 철철 날 정도로 다쳤으니, 얼마나 아플까 싶어서 또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를 조건 없이 생각해 주고 위해 주는 사람은 팬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매니저 형도, 회사 사람들도 모두 내게 잘 대해 주지만 결국은 계약으로 이뤄진 관계였다. 이범산도 내게는 유일한 친구였지만 녀석에게는 나보다 더 마음을 쓰는 친구들이 많았다.
부공태도, 나의 경호원으로 고용된 이 사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몸을 날리면서까지 나를 지키는 것은 단지 계약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아는데 마음이 왜 이럴까.
어차피 계약 끝나면 남이 될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착각하게 된다. 부공태가 나를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거라고.
“배우님.”
그가 나를 불렀으나 마주할 수 없었다.
“희설 씨.”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호칭으로 나를 부른다. 묵직한 저음이 달콤해서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데, 그의 얼굴이 내 시야로 불쑥 침범했다. 커다란 덩치를 접으며 나와 눈높이를 맞춘 것이었다.
시야가 흐린 것을 깨닫고서야 내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다시 시선을 떨구자 부공태의 붕대 감은 손이 보였다.
“미안… 해요.”
결국 그의 앞에서 나는 울고 말았다. 소리 내어서 펑펑, 아이처럼.
“미안해요, 흐윽, 흑, 공태 씨. 미안해요.”
좋아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인 줄 몰랐다.
왜 그는 나의 경호원일까. 매니저나 감독으로 만났으면 나 때문에 그가 다칠 일은 없을 텐데.
“배우님.”
부공태가 진지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흐린 시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내는요, 배우님을 지키는 게 내 사명입니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들어가 있다. 갑자기 우는 내가 짜증 날 만도 한데 부공태의 얼굴에서 부정적인 감정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경호하다 보믄 흔하게 있는 일입니더. 크게 다친 것도 아이고예.”
“꿰매야 할 정도로 베였는데, 흑, 흐으, 어떻게 크게 다친 게, 흑, 아녜요.”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막지도 못한 채 웅얼거리며 대답하자 부공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붕대 감은 손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배우님, 내는 경호원임더. 쬐매 빈 거 가꼬 이래 울믄 내가 배우님한테 미안해 가꼬 우얍니꺼.”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경호원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나는 계속 울었다.
그리고 부공태는 내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손을 맞잡은 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나를 마주 보면서. 내 못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붓는 것을 다 보면서.
거의 십 분 정도를 오열하고서야 눈물을 그쳤다. 나 스스로가 너무 못나서 그를 마주 볼 자신도 없는데, 부공태는 구태여 내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하이고, 세상 서럽은 찐빵이 여 하나 있네.”
“놀리지 마세요….”
부공태가 테이블 위의 티슈를 몇 장 뽑아 내 코에 들이밀었다.
“코 풀자, 흥 하이소.”
나는 순순히 그가 준 휴지에 대고 코를 패앵 풀었다.
“어디 가서 소문내시면 안 돼요.”
“알았심더.”
얼굴을 소매로 쓱쓱 닦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굳어 버렸다.
부공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게 아닌가. 혹시 아픈가.
“…더우세요?”
“예? 와예? 안 더운데?”
부공태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 보니 얼굴뿐만 아니라 귀 끝까지 붉어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공태 씨 얼굴이 빨개요.”
“제가 원래 쫌 얼굴이 벌겋십니더. 술 문 거 맨키로. 술톤임더.”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다가가서 그의 이마에 손을 짚어 보았다.
“혹시 손에 염증 때문에 열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지금 당장 병원 가야 되는데.”
“으, 으데! 아입니더, 아입니더!”
그는 화들짝 놀라며 한 발짝을 물러났다. 그리고 멋쩍은 투로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사실은예…. 배우님 우시는 게, 마….”
그리고 그답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아닌가.
“저 우는 게 그렇게 이상했어요?”
“아이, 그기 아이고….”
부공태는 이리저리 손을 내젓고 목덜미를 긁고 하며 필사적으로 내 말을 부정했다.
“다 큰 사내놈이 펑펑 우니까 놀라실 수도 있죠. 괜찮아요.”
“그기 아인데….”
더 벌게져서 거의 검붉은 빛을 띠는 얼굴로 끝까지 부정하는 걸 보니 역시 그는 예의 바른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렇다고 해도 화 안 낼 건데 말이다.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좀 놀랐나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고….”
그를 달래려고 한 말인데 부공태는 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게… 남자가 우는 거 보고 이런… 적이 첨이라가꼬….”
뭐라고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아 보이긴 하는데, 아마 내 착각이겠지.
‘전에도 나 운 거 본 적 있는데?’
아버지한테 맞았을 때 말이다. 그때도 놀라지 않았나. 무슨 차이지. 어쨌든 놀랐나 보다.
“네, 그러니까요. 다 큰 사내놈이 울기나 하고…. 이제 안 울게요.”
“그 뜻이 아이고… 일 났네, 클 났네….”
뭐가 큰일 났다는 걸까? 궁금했지만 이러다간 그의 얼굴이 터질 것 같아서 슬슬 말을 돌려야 할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은 어떻게… 경찰 쪽으로 완전히 인계된 거예요?”
아까 나를 습격하려던 남자 팬을 말하는 거였다. 그제야 부공태는 조금 진정하는 투로 헛기침을 했다. 우리는 자연스레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그기, 쫌 이상한 점이 있습니더.”
“이상한 점요?”
“예.”
부공태는 언제 안절부절못했냐는 투로 금세 진지한 눈빛을 했다.
“보통 사람들이 칼을 휘두를라 카다가 손이 붙들리믄예, 일단은 당황하는 기 먼저거든예.”
아까 전에 보았던 칼날이, 햇빛 아래 번뜩거리던 그 날붙이가 떠올라서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부공태는 그 끔찍하던 순간을 구태여 떠올리는 듯이 시선을 멀리 두며 말을 이었다.
“근데 아까 금마는 내가 딱, 막으니까 바로 고마 쎄리 주먹을 내질렀다 아입니꺼.”
“…맞아요. 엄청 빨랐어요.”
“암만 생각해 봐도 몸 놀리는 기 딱 훈련받은 놈이었심더.”
“그럼….”
부공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누구 의뢰 받고 움직인 놈 같심더.”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키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오늘 저를 덮쳤을까요. 저 스케줄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부공태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기자들.”
생각난 것을 입으로 꺼내자 부공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들 있는 데서 일부러 그런 거네요. 보라고요.”
헛웃음이 나왔다. 부공태는 분을 삭이느라 어금니를 빠득 소리 나게 갈았다.
‘한종수 이 자식이….’
요즘 매니저 형이 내 스케줄 보안에 엄청 신경 쓰고 있기 때문에 내 행방을 아는 사람은 회사 사람들 중에서도 경호 팀과 스타일리스트 팀밖에 없다.
스타일리스트 팀은 내가 아니라 회사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워낙 일도 바쁘고 부르면 그제야 달려오는 때가 많아서 스케줄을 줄줄이 꿰고 있진 못하다. 그리고 경호 팀은 철저하게 신원을 파악한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내부에서 정보가 빠져나간 건 아니고, 그날 기자가 온다는 걸 아는 사람은 한종수 말고 더 있나.
“하, 진짜….”
“와 그랍니꺼.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습니꺼?”
눈치 빠른 부공태는 역시나 내가 뭘 알아냈다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 때문에 그가 위험에 처하는 건 싫었다. 이번 한 번으로 충분했다.
“아니에요. 경찰에서 알아서 하겠죠, 뭐.”
“맞심더. 경찰에서 다 알아서 할 낍니더. 배우님은 걱정 마시고 잘 묵꼬 잘 주무시이소. 스트레서받으믄 피부 상합니더.”
부공태는 내가 이번 습격을 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안도하는 얼굴로 말했다.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있지만… 구태여 그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순히 대답하자 부공태는 눈을 휘며 웃었다. 그 곰돌이 같은 모습에 나도 마음이 좀 편해졌다.
***
그날 밤, 부공태는 단백질을 보충해야 한다며 두 마리 치킨을 시켜 먹었고 나는 그가 두 마리 치킨을 혼자 다 먹을 동안 매니저 형이 준 시나리오를 읽었다.
물론 그의 권유에 못 이겨서 튀김옷을 뗀 닭 가슴살은 조금 먹었다. 부공태는 내가 풀떼기만 먹고 살아서 어쩌냐고 자꾸 걱정했지만 아까도 단백질 셰이크를 먹었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나는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매니저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작품 저 할게요.
해 보자고, 이 자식아. 눈앞에 없는 한종수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치킨을 다 먹은 부공태는 마당으로 나가 순찰 겸 운동을 하고 들어왔다.
“여름이라가 윽수로 듭네예.”
“그러게요.”
나도 더워서 거의 드로어즈나 마찬가지인 반바지만 입고 있었다. 상의는 가슴이 다 비치는 민소매 셔츠였다.
예전이라면 짝사랑하는 부공태의 앞에서 이렇게 몸을 드러내고 있는 게 부끄러웠을 텐데, 이제는 별 상관 없었다. 어차피 부공태는 남자 몸을 보고 반응하는 타입도 아니고 나도 이제 그 사실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조금씩 짝사랑에 익숙해지고 무뎌지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지금도 부공태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 보니 말이다.
운동을 했으니 욕실로 직행할 줄 알았는데, 부공태는 거실에 우두커니 선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불안해 보여서 보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러자 부공태는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표정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내 몸을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내가 그를 보자 얼른 눈을 피했다. 내가 헐벗고 있는 게 좀 부담스러운 걸까?
“아, 아입니더. 일 보소.”
땀을 뻘뻘 흘리는 걸 보니 운동을 꽤 열심히 한 모양이다. 빨리 씻어야 감기 안 걸릴 텐데.
“얼른 씻으세요.”
“아, 예. 그래야지예.”
그제야 그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이고, 내가 마 와이카노’ 하는 말이 얼핏 들리더니 몇 걸음 가지 않고 부공태는 멈춰 섰다.
“오, 오늘은 제 방에 가서 자겠심더. 뭔 일 있으믄 호출하시고예.”
“네? 왜요?”
“배우님 불편하실 거 같아서예. 그케도 바로 위층이니까 괘않치예?”
“네, 저야 뭐….”
고개를 끄덕이자 부공태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2층 욕실을 쓰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요즘 너무 부담스럽게 굴었나.’
하긴, 부공태가 잘 대해 준다고 가정사를 훌훌 털어놓기도 하고 그가 다쳤다고 막 울기까지 했지.
보통 남자라면, 그리고 부공태 같은 마초라면 최근 내 모습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앞으로 거리를 좀 둬야 하나….’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기는 했다. 물론 입주 경호원이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말이다.
이러다가 부공태가 나에게 완전히 질려서, 그러니까… 내가 인간적으로 싫어져서 일을 관두기라도 한다면 어쩐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가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그저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그리고 나는 그 결심을 곧바로 실행했다.
“공태 씨.”
계단을 올라가던 부공태가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원하실 때는 편하게 공태 씨 방에서 주무세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요.”
부공태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활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여기가 집인데, 뭐 별일 있겠어요? 그리고 무슨 일 생기면 공태 씨가 제 방으로 바로 와 주실 거잖아요!”
나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냥 아무 관계가 아니어도 좋으니, 같은 집에서 안 살아도 좋으니 내 경호원으로만 남아 있어도 족했다.
그리고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연기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부공태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계단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