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믓찐 포오즈 (6/18)

믓찐 포오즈

부공태는 차에 나를 태우고 한참이나 운전해 고속 도로로 서울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공태 씨, 나 지금 납치하는 거예요?”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 장난스럽게 묻자 부공태는 정색을 했다.

“마 그런 넘사시럽은 소리 쫌 하지 마이소.”

“뭐 어때요. 난 공태 씨가 나 납치했으면 좋겠는데. 그럼 일하러도 안 가도 되고 완전 좋죠.”

부공태에게 납치라니, 생각만 해도 설레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몬 산다카이.”

그는 못 말리겠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거의 네 시간을 운전해 간 곳은 경남의 어느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는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바다는 쫌 마이 가 봤십니꺼?”

끝내주는 운전 솜씨로 해안을 달리면서 부공태가 물었다.

“네. 바닷가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꽤 많이 찍었거든요.”

“일하러 간 거 말고예.”

“음….”

일하러 간 거 말고는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았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부공태가 나를 흘끔 보고는 씩 웃었다. 아주 근사하게.

“카믄 오늘 실컷 놀아 봅시데이.”

다소 결의가 느껴지는 말을 지키기 위해 부공태는 나를 변장시키기 시작했다. 일단은 검은 마스크와 등산객 아저씨들이나 쓸 법한 모래색 버킷 햇을 씌웠다. 정점은 그 버킷 햇에 맞춘 듯한 등산복이었다.

“이건… 좀….”

미세 먼지 한 톨 없는 가을 하늘같이 새파란 색깔의 바람막이를 집어 들며 내가 주저하자 그가 스읍, 하는 소리를 냈다.

“에헤이. 여서 이쁘게 입고 댕기믄 사람들이 다 알아본다카이. 안 캐도 얼굴도 이쁘장해 가꼬 저어 짝에서 봐도 눈에 띄는구마.”

…칭찬이지? 어쨌든 이쁘다니까 칭찬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새파란 바람막이를 티셔츠 위에 걸치고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카고 팬츠(이걸 카고 팬츠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으로 갈아입었다. 테가 엄청 두꺼운 뿔테안경도 꼈다.

“그냥 선글라스 끼면 안 돼요?”

“선글라스에다가 시꺼먼 마스크 끼믄 범죄자 같지. 범죄자 같은 그보다 끌배이 긑은 기 더 낫심더.”

“끌배이가 뭐예요?”

“걸배이.”

여전히 못 알아듣자 부공태가 갑갑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아주 천천히 다시 발음해 주었다.

“걸- 배- 애- 이.”

“아… 거렁뱅이요….”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나를 거지로 변장시키겠다는 거네.

“공태 씨도 얼굴 좀 알려졌는데, 가려야 하지 않겠어요?”

내 물음에 그는 뒷좌석에 놓인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적어도 내 사이즈는 아닌 듯했다), 볼캡을 턱으로 가리켰다.

“경호워이 마 얼굴 팔리 봤자지.”

억울한데 반박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몰래 부공태 팬클럽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나만 거지로 변장을 끝낸 우리는 바닷가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해수욕장은 없지만 굉장히 멋진 절벽이 있었다. 꼭 사람이 사각으로 깎은 듯한 각진 절벽은 장엄하고 웅장했다. 부공태는 저런 절벽을 주상 절리라고 부른다고, 화산 지형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와, 진짜 멋있어요. 한국에 이런 데 있는 줄 몰랐는데.”

“여서 영화도 마이 찍는다 카든데.”

“다음에 장소 섭외할 때 말해 봐야겠네요.”

장엄한 절벽을 올려다보며 순수하게 감탄하는데 어쩐지 얼굴 옆이 따가워 슬쩍 돌아보자 부공태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표정 마이 좋아짔네예.”

나도 모르게 그 잘생긴 얼굴을 마주한 채로 멍해졌다. 정신을 차린 뒤에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 얼굴 다 가려 놓고 어떻게 알아요.”

“다 비는데, 내 눈에는.”

내 시야로 장난스럽게 얼굴을 들이밀며 하는 말에는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도수 없는 뿔테안경 너머로 그의 웃는 눈과 마주치자 이번에는 나도 웃음이 나왔다.

“봐라, 웃으니까 을매나 이쁘노.”

…하여튼 두 번 반하게 하는 남자다. 나는 죄가 없다. 부공태가 지나치게 다정한 탓이다.

그는 나를 데리고 낚시터로 갔다. 낚시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그는 알고 보니 강태공이었다.

“와! 진짜 낚았어요? 진짜?”

“하모!”

팽팽해진 낚싯대의 릴을 능숙하게 감으며 부공태가 외쳤다. 그리고 이내 물고기 하나가 딸려 왔다.

“와! 와아아아!”

실제 낚시는 처음 봐서 나는 크게 흥분해 외쳤다. 그 역시 뿌듯하게 낚은 생선을 들어 올려 보였다. 옆에 있던 낚시꾼 아저씨들이 흘끔거렸다. 몇몇은 부공태에게 말을 건넸는데,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칭찬 같았다.

“자, 기다리 보소.”

부공태는 낚시터에서 대여한 간이 테이블에 도마를 펼치고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생선을 그대로 회 치기 시작했다.

“뭐, 뭐 해요, 공태 씨?”

“마, 민어는 잡았을 때 퍼뜩 무 뿌야지 제맛이라예.”

“여기서 먹는다고요?”

기겁하며 묻는 나와 달리 부공태의 손길은 능숙하고 재빨랐다. 이미 회가 일회용 접시에 착착 열을 맞춰 담기기 시작했다. 작은 접시에 겨자와 간장까지 준비한 그는 내게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무 보소.”

물고기야, 미안해. 속으로 사과하면서 회를 한 점 입에 넣었다. 그런데 웬걸, 미안한 마음이 조금 줄어들 정도로 맛있었다.

“노, 녹아요…! 혀에서 녹아요! 없어졌어!”

“없어짔으믄 빨리 더 무라!”

그가 내 입에 회 여러 점을 우르르 떠서 욱여넣어 주었다. 거절하지 않고 바지런히 씹었다. 아니, 씹을 새도 없이 목으로 그냥 꿀떡꿀떡 넘어갔다.

“맛있지예?”

입에 회를 가득 물고 있느라 대답은 못 하고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이걸 어떻게 먹냐고 울상 짓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맛있었다.

“공태 씨는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예요? 낚시도 잘하고, 회도 잘 뜨고.”

내 칭찬에 부공태가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웃었다.

“마, 별거 아입니더.”

‘미친, 겁나 귀여워. 곰돌이 같아.’

당장 젓가락을 들어서 그의 볼을 쑤시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꿎은 젓가락을 입에 넣고 아득아득 씹어 댔다.

“자, 자, 더 무이소.”

그를 보고 있자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른데 그는 자꾸 내 입에 회를 넣어 주었다.

“공태 씨도 먹어요.”

“먹고 있심더.”

문득 이렇게 휴가를 가져 본 적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 하나가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늘 바쁘게 일하곤 했으니까.

아직 젊고 어릴 때, 이 얼굴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연예계는 풍랑 같다고들 흔히 표현하곤 한다. 언제 어떤 파도에 내가 삼켜질지 모르는 거다. 지금이야 천만 배우니 하며 팬들도 많고 인기도 많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지 나조차도 몰랐다.

바로 오늘, 아버지 회사에서 사건이 터진 것처럼 말이다.

‘어쩌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끔찍한 이 사건 앞에서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직접 연관된 건 아니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걸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당장 내일부터 한종수랑 하하호호 친한 척을 하며 기업 이미지 쇄신을 위한 CF나 찍어야 한다니.

심란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부공태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가볍게 친 것인데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상체가 일 미터 정도 좌우로 움직였다. 부공태의 두툼한 손이 내 몸을 제자리로 되돌려 주었다.

“바라바라바라, 또 은친 사람맨치로 똥하이 있제.”

랩인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멀뚱히 있자니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고민해 가꼬 안 나오는 그는 혼자 고마 생각하고, 넘한테 말하든가 생각을 접어 뿌든가 해야지.”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그는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맥주병을 들어 보였다. 병뚜껑도 없는데 어떡하려나 싶었는데 병 끝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그대로 뚝 따 버렸다.

“세상에.”

“와예?”

“이빨 상해요!”

“괘않심더. 멀쩡한데.”

자랑스럽게 이를 씩 드러내 보인 부공태는 종이컵에 맥주를 따라 내게 건네주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각자 잔을 비웠다.

어느새 낚시터도 한산해져 있었다. 여태까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새삼 놀랐다. 서울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분위기 탓인지 맥주 한 캔밖에 안 마셨는데도 취기가 올랐다. 옆에 있는 부공태가 든든했다.

말도 안 했는데 이렇게 먼 곳까지 나를 데려와 준 그가 고마웠다. 혼자 있었다면 어디 갈 생각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고만 있었겠지.

멍하니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 부공태가 눈을 휘며 웃었다.

“울 배우님이 나를 참 이쁘게 보고 있네.”

그 말이 왜 그렇게 달게 들리는지. 나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을 어쩌지 못한 채로 반쯤 꿈을 꾸는 듯이 멍하게 웃고 말았다.

“사진 하나 찍어 주까예?”

“사진요?”

부공태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써 휴대폰을 꺼내 들고 있었다.

“자자, 여 보이소. 이뿌게 웃어 보제이.”

그의 말에 엉겁결에 포즈를 취했다. 찰칵, 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부공태가 씩 웃었다.

“봐 봐요. 잘 찍혔어요?”

내가 다가가자 부공태는 휴대폰을 높이 들었다.

“내만 볼 끼다, 와?”

“그런 게 어딨어요! 내 사진인데!”

“내가 찍었다 아입니꺼.”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지만 키 차이 때문에 나는 까치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그는 팔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내 손을 다 피해 버렸다. 이렇게 그가 얄미운 적이 없었다.

“진짜 치사해요!”

“진쨰 치섀해얘!”

심지어 내 말을 듣도 보도 못한 어조로 따라 하는 게 아닌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나도 공태 씨 찍을 거예요.”

“찍어 보이소.”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렌즈로 그를 겨누었다. 그러자 부공태는 갑자기 태권도 발차기 하는 자세를 취했다.

“뭐 해요?”

“믓찐 포오즈.”

“풉.”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부공태는 검지로 깜찍하게 볼을 찍는 포즈, 화를 내는 곰 같은 포즈, 학원 강사 같은 포즈를 취해 보였다. 나는 신이 나서 포즈 하나마다 두세 컷씩 사진을 찍었다. 어찌나 웃었는지 배가 땅길 지경이었다.

“이제 진짜 멋진 포즈 취해 봐요. 내가 잘 찍어 줄게요.”

제법 괜찮은 배경을 골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여태껏 멀쩡하게 포즈를 취하던 부공태가 갑자기 큰 덩치를 찌그러뜨리며 목뒤를 긁었다.

“내는 이런 거 잘 몬 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뭔 소리예요. 여태 잘했으면서. 자, 진짜 멋진 포즈, 실시.”

부공태는 머리를 북북 긁더니 ‘내사 마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리며 뻣뻣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포즈는 물 건너간 것 같아서 줌을 당겨 얼굴만 찍기로 했다.

“공태 씨, 조금만 웃어 보실래요?”

부공태는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미소를 천천히 지어 보였다.

“저는 공태 씨 웃을 때가 제일 멋있어요.”

“…진짭니꺼?”

“하모요.”

일부러 말투를 따라 하자 그의 뻣뻣하던 얼굴 근육이 풀어지고, 이내 눈을 휘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촬영 버튼을 눌렀다.

붉게 물들어 가는 수평선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부공태는 바다 그 자체였다.

어떤 색이든 다 어울리는, 뜨거운 여름 오후의 열기마저도 수용해 버리는 넓은 바다 말이다.

***

밤이 깊자 부공태는 근처의 민박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요즘도 민박이라는 게 있는 줄 나는 처음 알았다.

“어무이, 잘 지내셨심꺼?”

어머니? 부공태 어머니라고? 나 옷은 괜찮은가? 머리칼은? 지저분해 보이진 않겠지? 생각하지 못한 만남에 당황해서 이리저리 모습을 다듬고 있자니 민박집 주인인 듯이 보이는 나이 지긋한 여인이 나와서 부공태를 맞이했다.

“마 짜쓱아! 니는 만다꼬 왔노! 방 읍따!”

“에이, 어무이. 요새 이래 낡아 빠진 집에 누가 온다꼬. 저녁은 드싰는교?”

부공태는 아주 능숙하게 올 때 사 온 과일과 주스를 평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면구스럽게 서 있던 나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야는 머꼬? 니 애인이가?”

…와, 편견 없는 분이시네. 포스에 눌려서 대답도 못 하고 마른침만 삼키고 있자니 부공태가 나를 보호하듯이 살짝 앞을 가로막고 서 주었다.

“클 날 소리 하지 마라. 배우님, 여는 민박집 사장님입니더. 어무이, 하루만 자고 가께요.”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 사장님이 맞으셨구나.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인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나와 부공태를 노려보았지만, 그 시선에서 은근한 정이 묻어났다.

“가출 청소년은 안 받는데이.”

“요새 그런 말 안 씁니더, 어무이. 카고 성인이다.”

쯧쯧, 혀를 찬 여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뭔가를 들고 나와 부공태에게 주었다. 자그마한 열쇠였다.

“감사합니더, 어무이.”

“처디비 자라!”

욕을 듣고도 부공태는 기분이 좋은지 씩 웃고는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민박집은 옛날 드라마 같은 데서나 보던 것과 똑같은 광경이었다. 노란 장판에다 반질반질한 요가 장롱 위에 개어져 있고, 지퍼가 달린 캐비닛 옷장이 있었다. 신기해서 한참을 둘러보았다.

“어릴 때 여 어무이한테 신세 마이 졌심더.”

“어릴 때요?”

부공태가 겉옷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집 나오믄 일로 도망 왔그든예.”

부공태가 집을 나오다니…! 지금보다 작은, ‘어린’ 부공태도 상상이 가지 않고 집을 나온 부공태도 상상이 가질 않아서 입이 딱 벌어졌다.

“와, 사장님이 아까 비행 청소년 어쩌고 하신 게 공태 씨 이야기였구나….”

그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 처음에는 내가 덩치도 크고 카이까네 성인인 줄 알고 혼자 와도 방을 주싰는데, 나중에 내가 성인 아인 거 알고는 집에 가라 카시드라꼬예.”

내가 아는 부공태는 늘 성실하고 올곧은 이미지라서, 집을 나오는 것도 혼자 이런 곳에 머무는 것도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근데 하루는 내가 히야한테 맞아 가꼬 마, 이래 눈이 시퍼레져 가꼬 와따 아입니꺼.”

‘히야’가 누군가 잠깐 생각하다가 ‘형’의 사투리라는 것을 떠올렸다.

“…형한테요?”

그에게 형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이력서도 매니저 형이 체크했고, 여태 한 번도 형제 이야기는 한 적 없어서 당연히 나처럼 외동인 줄 알았는데.

“예. 히야가, 행님이, 손버릇이 좀 마이 안 좋았심더. 부모님은 그냥 형제끼리 마 싸울 수도 있지, 카는 입장이었고예. 내가 우짜겠심꺼.”

그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으나 그 내용만은 온화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부모님 안 계시는 날만 골라서 내를 패더라꼬예.”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그가 고생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윽울해 가꼬 운동 배았다 아입니꺼. 맨날 행님한테 뚜들기 맞기만 하기 싫어 가꼬.”

“진짜요?”

“하모. 내가 어릴 때는 몸이 마이 약했다.”

“아, 네.”

약한 부공태라니. 상상도 가지 않아서 대충 영혼 없이 대답했더니 부공태가 귀엽게 눈을 흘겼다.

“아, 안 믿네.”

“믿겠어요?”

지금 님의 덩치를 보세요…. 짱돌로 맞아도 혹 하나 안 나는 몸을 갖고 있으면서 약했다니. 물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지만 말이다.

“하긴, 내 긑애도 안 믿겠다. 근데 진짜라카이. 내가 어릴 때는 미숙아로 태어나 가꼬 부모님이 걱정을 마이 하싰심더.”

“헐.”

미숙아 부공태라니…! 이런 어불성설은 처음 들어 봤다. 거짓말이 아닌지 부공태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캐 가꼬 히야한테도 맨날 맞고, 내가 아부지한테 태권도 학원 다닐끼라 카니까 아부지가 을매나 좋아했는데예. 야, 니가 인자 남자가 되겠구나 카믄서.”

“그래서 지금의 이… 튼튼한 몸을 만드신 거예요?”

“예. 덕분에 그 뒤로는 히야한테 안 맞았다카이.”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부공태는 태어날 때부터 ‘마 날씨 좋네’ 하면서 태어났을 거 같은데 말이다.

놀란 내 어깨를 부공태가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내가 벗은 등산객 아저씨 재킷을 옷걸이에 걸었다.

“카니까 배우님도 운동 열심히 하소, 혹시 아나? 내맨키로 클지.”

“…전 이미 다 커서 안 되거든요.”

불퉁하게 대답하면서도 기분이 많이 풀렸다.

“…이야기 더 듣고 싶어요.”

조금 용기를 내어서 말해 보았다.

“공태 씨 이야기, 더 많이 듣고 싶어요. 궁금해요.”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부공태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그가 조금 멋쩍은 투로 목뒤를 문질렀다.

“술 한 잔 더 하까예?”

***

우리는 바닷가에 앉아 맥주를 조금 더 마셨다. 밤바다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게 해 주었다. 검은 어둠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멍해졌다. 맥주의 취기도 한몫했다.

“괘않심꺼? 너무 마이 마시는 거 아이가?”

“괜찮아요. 고작 맥주고 숙소도 바로 옆인데요, 뭐.”

“얼굴이 벌건데?”

그의 말에 내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어두운데 그게 보여요?”

“하모, 내가 눈이 을매나 좋은데.”

밤눈까지 좋다니, 역시 부공태는 완벽하다.

“내는 눈이 좋아서 우리 배우님이 저마이 멀리 있어도 다 알아볼끼라.”

뒤이은 그의 말은 장난스러웠지만 나를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진짜 반칙이다.

“저, 정말요…?”

별소리를 다 하신다며 마주 장난치는 대신 슬그머니 물었다. 그러자 부공태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그리고 조금 과장된 제스처로 받아쳤다.

“마, 그 정도는 돼야 우리 배우님 경호를 하지예!”

…아, 경호. 그래, 결국 일 이야기였구나. 그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 먼 바다까지 데리고 오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고 해도 그는 그냥 내 경호원일 뿐이었다. 계약서 한 장으로 내게서 벗어날 수 있는 관계 말이다.

“…네, 공태 씨 말이 맞아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히도 부공태가 마주 웃어 주었다.

바닷바람이 차가워질 때까지 한동안 더 앉아 있었다. 우리 앞에는 빈 맥주 캔이 쌓여 갔다.

나는 그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중학교 때 이미 키가 180cm를 넘어서 교복을 입지 않으면 늘 성인 요금을 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미친 듯이 웃었다. 부공태는 살짝 삐진 듯이 ‘마, 그래 웃깁니꺼?’라고 했지만 그 삐진 표정이 귀여워서 나는 더 웃었다.

그리고 그가 어릴 때는 바다 수영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름의 청량한 바다와 부공태는 끝내주게 잘 어울려서 절로 상상이 갔다.

‘다음에 수영장 같이 가자고 하면 너무 수작질 같으려나?’

보통 남자들끼리 운동은 같이 다니기도 하니까 괜찮으려나… 고민하다가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부공태는 원래 이 근처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했다. 부산 같은 대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곳 같은 어촌도 아닌, 적당히 사람이 있고 건물이 있는 동네에서 유년을 보내고 고등학교 때 체고를 가면서 그때부터 부모님과 따로 살았다고 했다.

“행님은 내를 못 패니까 나중에는 도박을 하더라꼬예. 그카다가 불법 도박판 큰 거에 걸리 가꼬 징역도 살고… 그 뒤로는 내도 부모님도 소식을 모릅니더.”

그렇게 말하는 부공태의 얼굴에는 약간의 후련함 같은 게 보였다. 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갑자기 어느 날 부공태의 형이란 놈이 나타나서 그를 괴롭히면 어쩌나 싶어서 말이다. 그러지 못하도록 내가 지켜 줘야지.

“여튼, 그래 가꼬 내가 행님 이야기는 넘들한테 안 합니더. 괜히 내 얼굴에 침 뱉는 거 같고….”

“아니에요.”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말을 듣자 내가 다 속이 상했다.

“공태 씨 잘못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부공태는 약간 놀란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희설 씨도 잘못 없심더.”

‘배우님’ 대신 ‘희설 씨’라니. 그가 이름을 불러 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어서 입을 쩍 벌렸다가, 하마터면 대답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저, 저는 왜요.”

“잘몬해따꼬 생각하고 있잖아예.”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회 먹고 바다 구경하면서 많이 풀린 것으로 보일 줄 알았는데.

“…고마워요.”

진심을 담아서 힘줘 말하려고 했는데 모기같이 작은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발성 연습 해 놓은 건 꼭 이럴 때만 발휘되지 않는다.

“으데, 고마울 끼 뭐 있노. 고마우믄 내일도 밥 마이 묵꼬 힘내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나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파도 소리는 너무 크지 않게, 너무 빠르지 않은 박자로 찰랑거렸고 옆에 부공태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사실… 아버지한테 좀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었어요.”

그래서 취기를 빌려 슬쩍 운을 떼 보았다. 부공태는 내가 말을 잇길 기다린다는 듯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내게 닿는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그렇잖아요. 친아들도 아닌데 조건 없이 저한테 투자하셨어요. 아무도 없는 저한테 가족이 되어 주셨고요.”

진심이었다. 아버지는 아직 나한테 소중한 분이었다. 비록 내 따귀까지 때렸지만 내게 잘해 주신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은가.

“그래서 언젠가는 제대로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보답, 충분히 하신 거 긑은데예.”

부공태의 조심스러운 말에 쓰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버지한테 저는 아직 부끄러운 자식인가 봐요.”

“에헤이, 그런 말 하지 마이소. 카고 투자가 뭡니꺼? 부모가 자식한테 쏟는 그는 투자가 아이고 사랑이지.”

타이르는 듯한 부공태의 목소리가 좋았다. 다시 한번 쓰게 웃었다.

“아부지랑 어릴 때는 친했십니꺼?”

“음, 사실 아주 어릴 때는 모르는 사람이었고요, 철들고 나서 부자 연 맺은 거라서 친했다고 하기보단 제가 일방적으로 의지했죠.”

“그랬심꺼.”

고개를 끄덕이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주름도 적고 흰머리도 적던, 내가 보기에 ‘멋진 어른’이었다.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재혼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돌아가셨던 내 불쌍한 어머니.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어머니랑 크게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왜 어머니 돌아가시고도 저한테 잘 대해 주셨을까요?”

“배우님 어무이를 마이 좋아하싰나 보지.”

“음,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에 의하면 두 분은 그렇게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결혼하기 전에도 말이다.

‘좀 어머니가 끌려다니시는 느낌이었지.’

나중에 크고서는 아버지가 워낙 부자셔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남자에게 끌려다닐 성격은 아니었다.

‘…두 분 사이에 내가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었나.’

뭐, 어쨌든 아버지는 여태껏 나를 잘 보살펴 주셨으니 불만은 없었다.

“뭔 생각 하는교?”

부공태의 물음에 상념이 멈췄다.

“그냥요. 아버지랑 어머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의 표정이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만큼 좋지 않았다. 내가 뭔가 잘못했을까. 눈치를 보고 있자니 한숨을 푹 내쉰다.

“자책 같은 그는 하지 마이소.”

“안 해요.”

아직도 나를 걱정해 주는구나. 아는 사람이고 고용주니 걱정해 주는 것이겠지만 마음이 따뜻했다.

“내는 배우님이 아주 열심히 사셨다꼬 생각합니더.”

“…그런가요.”

“예에. 그 사실을 아버님도 아실 낍니더.”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고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본 배우님은 누구보다 믓찐 분입니더. 마, 나이가 애리도 본받고 싶을 만큼 말입니더.”

뒤이은 말에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공태가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부공태가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섰다. 멋쩍게 뒤통수를 긁는 모습을 보니 저도 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마, 물 쫌 비우고 오겠심더.”

“네에.”

황급히 떠나는 뒷모습이 꿀단지 찾으러 가는 곰돌이처럼 귀여웠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부공태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모니터링을 좀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아버지 기업 비리 사건이 좀 크게 터졌어야지….’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되니까 나도 미리 모니터링을 좀 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원래 댓글 같은 거 안 보는데.’

어릴 때는 사람들의 반응이 신기해서 내 이름으로 검색도 많이 해 봤지만, 봐 봤자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언제부턴가 깨달았다. 다수의 의견이 무조건 내게 도움이 되리란 보장이 없단 사실 또한 깨달았다.

요즘 신인 배우들은 SNS나 V로그 같은 것으로 팬들이랑 소통도 하던데, 나는 SNS 계정 하나도 없었다. 소통이 싫다기보단 내가 실수할까 겁이 나서였다. 그렇다고 회사가 대신 운영하는 건 더 싫고 말이다.

물론 어릴 때는 잠깐 SNS 계정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네티즌 하나가 셀카 배경으로 나온 곳을 추적해 이상한 루머를 퍼뜨렸다. 그냥 집이었는데 클럽이라고 하며, 나를 서울 어디 클럽에서 매일 봤느니 하는 없는 소문까지 지어낸 것이었다. 회사에서 대처를 했지만 한동안 클럽 죽돌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고생했다. 그 뒤로 계정을 삭제하고 여태 만든 적 없다.

어쨌든 회사에서도 언론 대응을 알아서 해 주고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내 기사 같은 건 안 찾아보는 편인데, 이번에는 워낙 사건이 크니 미리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일이 커질지도 모르니 마음 준비도 좀… 할 겸 말이다.

내 이름을 넣고 검색 버튼을 누르자 몇 가지 기사가 떴다. 예상대로 아버지 회사와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주희설 父, K전자 안전 사고 알고 있었다?

주희설 JH그룹, ‘K전자 공장 사망 사건’ 입장 발표 ‘기다려 달라’

배우 주희설 父의 JH그룹, ‘갑질’ 논란

부친이라는 표기조차 없이 내 이름만 덜렁 써 놓은 타이틀도 있었다. 보통 때라면 회사에서 기사 유출을 막았을 텐데,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이번에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차라리 크게 화제가 되어서 어떻게든 유족들에게 보상이 이뤄지고 원인이 고쳐지는 게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쭉 내리자 뉴스 아래에 어떤 문장이 눈에 띄었다.

그 배우 아빠패스 받아서 잘된 거 모르는 사람도 있음?ㅋ

뭔가 싶어 눌러 보았다. 익명 홈페이지인 듯한 사이트가 열렸다. 본문에는 내가 출연한 작품들이 목록처럼 쭉 나열되어 있었다.

그 배우 아빠패스 받아서 잘된 거 모르는 사람도 있음?ㅋ

7월의 편지: 제작사 A. JH그룹 계열사 B미디어 출신 감독이 입사한 제작사.

펑키 고: 배급이 JH그룹 계열사

귀족의 시대: B미디어가 공동제작

낭만주의적 그대에게: 감독이 B미디어 영화만 찍는 걸로 유명

…이건 솔직히 말이 안 되었다. ‘귀족의 시대’가 제일 최근작인데, 이거 말고는 B미디어가 JH 계열로 흡수되기 전에 찍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한 제작사와 계속 같이 일을 하길 선호하는 배우는 흔하다. 영화는 공동 작업인 만큼 제작진과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오히려 <펑키 고>는 내가 반항아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작품인데, 아버지가 처음에 반대하셔서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내 이름도 안 적었는데 검색에는 어떻게 걸린 거야.’

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화면을 내리자 다른 글이 나왔다. 보아하니 배우들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커뮤니티였는데, JH그룹 사건이 워낙 화제가 되다 보니 내 이야기가 꽤 올라오는 듯했다.

[댓글]

주희설 인터뷰 잘 안하고 예능 안 나오는 거 신비주의 컨셉질 ㅋ

솔직히 주희설 연기력은 거품이지 연기 10년 했는데 아직도 감정 못잡음

아빠빨로 뜬거 모르는 사람도 있음??

주희설이 여배우 쳐다보는 눈.jpg 우웩ㅋㅋ

몇몇 글은 안 봐도 수위가 도를 넘은 듯했다. 매니저 형한테 말해서 한번 정리해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원색적인 비난으로 가득한 제목을 쭉 넘기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글이 있어서 손가락을 멈췄다.

나 주희설 팬이었는데 좀 실망이 크네.

봐서 좋을 거 하나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손은 글을 누른 뒤였다.

나 주희설 팬이었는데 좀 실망이 크네.

어릴 때부터 팬이었거든...

그래서 이번 사태에 입 꾹 다물고 있는 거 이해가 안 가.

평소에 소외계층에 기부도 하고 봉사활동도 조용히 하는 스타일이라서

어디 가서 내 배우 부끄럽지 않게 자랑할 수 있었거든.

일전 인터뷰에서 주희설이 말한 게 있어...

자기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그게 자기 신조라고...

그런데 자기 가족한테는 입 다물고 있는 게 부끄럽지 않은가봐.

솔직히 실망이 크다. 배신감도 들고.

다시는 이 배우 작품 못볼 거 같아ㅠㅠ

마지막 말에 마음이 아렸다. 다시는 내 작품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말.

지금이라도 휴대폰을 꺼야 하는데, 망할 손가락은 자꾸만 다른 글을 더 보길 원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고 싶었다. 얼마나 실망을 주었는지, 얼마나 엉망인지 알아야 내가 대처를 하지, 하는 스스로의 변명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댓글]

나 주희설 관심 없어서 JH그룹 회장 아들인 거 이제 알았거든 근데 동영상 이거 뭐야?

그리고 이어진 동영상은 몇 년 전에 찍은 인터뷰였다.

하루에 20시간 촬영...? 노동법 위반 아닌지..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큰일 나요.”

자막으로 나온 물음에 대해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나와 거기서 뚝 끊기는 영상. 화면을 내리자 아래 글이 더 있었다.

웃자고 한 말인 거 아는데 그래도 방송에서 자기 아빠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 같아서... 흠좀.

우리 아버지가 알면 너네 다 다친다 이런 뜻 아냐 ㅋㅋ.

밑에는 댓글도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댓글]

이제 슬슬 뇌절로 가네

└ 뭐가 뇌절?

└ 뇌절은 무슨ㅋㅋ 딱 봐도 아버지빨 내세우는 건데

└└ 자기 아버지가 법관도 아니고 뭘 내세워;; 그냥 아버지가 그만큼 나 걱정해준다고 장난스럽게 어필한 거지

└└└ 응 다음 희돌댁알 팬

‘희돌댁알’은 내 멸칭인가…. 사실 저 인터뷰 뒤에 미성년자는 규정대로 보호자와 함께 근무했고 근무 시간도 지켰다며 나름 진지하게 이야기한 것도 있는데, 편집이 되었었는지 어쨌는지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나질 않았다.

머리가 아파 왔다. 그제야 휴대폰을 닫을 정신이 들어 탭과 화면을 차례대로 껐다. 마침 부공태가 화장실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배우님, 괜찮심꺼? 안색이 와 그라노.”

하여튼 눈치는 귀신이다.

“네, 괜찮아요. 오랜만에 술 마셔서 그런가 봐요.”

우야노,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그를 두고 먼저 숙소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부공태가 내 앞을 가로막고는 거대한 등짝을 보이고 쭈그려 앉았다.

“업히소.”

“네에? 아니에요.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퍼뜩!”

부공태는 알까,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면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사실을….

절대 그에게 업히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퍼뜩’ 업히라고 했기에 나는 순순히 그렇게 했다. 휘청, 하면서 시야가 높아지자 취기가 더 올랐다.

나는 부공태의 등에 코를 묻었다. 평소와 달리 편한 티셔츠를 입은 넓은 등짝은 딱딱하지만 또 부드러웠다.

‘공태 씨 냄새….’

보디 로션은커녕 토너도 안 바른다는 그는 몸도 대충 마트에서 산 보디 워시로 씻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날 수 있나? 나도 모르게 킁킁거리며 부공태의 뒷덜미에 코를 박았다.

“와 자꾸 냄새를 맡십니꺼. 강새이도 아이고.”

“헤헤.”

강새이는 뭘까. 강냉이일까? 뭔지 몰라도 부공태가 말하니 좋은 단어일 것이다.

“아이고, 우리 배우님 마이 취했네. 집에 가서 코 자야겠네.”

아이를 달래듯 하는 그의 말투도 오늘은 좋았다. 그래, 하루쯤은 어리광 부려도 되지 않을까. 그는 내 경호원이잖아….

“공태 씨….”

“예에.”

“저는 진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어요….”

정말 취한 것인지 슬슬 혀가 꼬였다. 정신은 말짱한데 혀가 말을 듣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배우님은 그래 살고 있심니더.”

“아니에요….”

“…….”

“나는 내가 부끄러워요….”

그리 말하고 잠깐 졸았던 것 같다. 부공태의 넓고 단단한 등에 기대서 말이다.

눈을 떴을 때는 민박집이었다. 부공태가 나를 요 위에 눕히고 있었다.

내 위에 있는 부공태를 보는 순간, 반쯤 취기에 찌든 나는 확신했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이고,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공태 씨….”

그의 허리에 매달리며 몸을 끌어당겼다. 부공태는 약간 당황한 듯이 보였으나 순순히 상체를 굽혀 왔다.

“하아… 공태 씨…. 나 오늘 재워 주면 안 돼요…?”

손은 이미 부공태의 티셔츠를 마구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는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색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지금 나는 베드 신에서 상대를 유혹하는 역할이다, 생각하면서.

“마, 와 이카노. 와 이카노.”

하지만 부공태는 쉬운 공략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내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는 이불로 나를 돌돌 말기 시작했다.

“아, 더워요…. 이불 싫어…. 옷도 싫어….”

“우짜노.”

내가 이불을 헤치고 셔츠를 벗으려 하자 부공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내 옷깃을 끌어 내렸다. 그 손길이 너무 필사적이어서 내가 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니, 그렇게 싫으냐고!

하지만 나 주희설, 포기를 쉽게 알았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손을 뻗어 부공태의 몸을 마구 더듬었다.

“배우님, 손이 와 자꾸 젖을….”

아, 딱딱한 가슴. 내가 원하던 가슴이 손에 잡히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술기운도 올랐겠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단단한 가슴을 손으로 마구 주무르기 시작했다.

“배우님요! 정신 쫌 차리 보소! 배우님 지금 내 젖 만지고 있다!”

알아, 이 자식아. 이참에 만져 봐야지 언제 만지겠냐고!

나는 부공태와 씨름이라도 하듯이(물론 일방적으로 내가 짓눌리고 지는 씨름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뒤엉켰다.

“아, 좀 가만있어 봐요, 공태 씨…!”

“아이고, 배우님예, 조심, 조심, 거 내 꼬추 찰라, 조심!”

부공태는 아주 교묘하게 내 손길을 쏙쏙 피했다. 덩치는 큰데 어찌나 날렵한지 약이 오를 정도였다.

“자자, 배우님, 착하지예, 가마이 눕어가 잡시데이.”

싫다고 말하려는데 입까지 이불에 돌돌 말렸다. 나는 그의 가슴을 한 번이라도 더 만지려고 버둥거렸지만 부공태를 이길 수 없었다.

“착하지예, 착하지예.”

뭘 착해! 하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부공태는 내 이불을 단단히 여미곤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방을 나가 버렸다.

‘우씨….’

억울했다. 입맛만 버렸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이불에 가려진 손에는 부공태의 단단한 가슴 감촉이 남아 있는데 더 이상 만질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도 잠시, 나는 술기운과 피로를 느끼며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난리를 피운 탓에 돌돌 싸인 이불을 차 낼 힘도 없었다. 물론 부공태가 이불을 하도 단단히 싸 놓은 탓도 있지만.

‘공태 씨 가슴 만지고 싶다….’

꿈에서라도 마음껏 만져야지,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나가기 전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던 것 같았는데, 착각이겠지. 그래, 착각일 것이다. 사내끼리 내외하느냐며 속옷까지 서슴없이 벗던 그였으니까.

***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그리고 부공태가 돌아와 있었다.

내 옆에 누워서 잠든 부공태는 조금 낯설어 보였다. 내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커다란 덩치를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에휴, 왜 이렇게 불쌍하게 자.’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려다가, 약간 욕심이 생겨 손을 멈췄다.

‘지금 아니면 언제 얼굴 구경해.’

물론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대놓고 빤히 쳐다보지는 못하니까.

나는 부공태의 바로 앞까지 꾸물꾸물 기어가서 그를 마주 보고 누웠다. 혹시라도 내 숨결이 그를 깨울까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잘생겼다.’

진짜, 매번 감탄하지만 다시 봐도 정말 잘생겼다.

쌍꺼풀이 얼마나 짙은지 눈을 감고 있어도 선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 위로 이어지는 이마 라인은 단단한 성정을 보여 주는 듯했다. 눈썹은 어떻고. 뛰어난 조각가가 정확한 대칭으로 깎은 것 같다.

한편 콧대는 어찌나 높고 곧은지 내가 일전에 촬영하다가 깜빡 떨어질 뻔한 한국의 절벽 명소를 떠올리게 했다. 입술은 그리 굵지도 얇지도 않은 두께에 굳게 닫혀 있는데, 손가락을 넣어서 함부로 헤집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그의 얼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단연 턱선이었다. 어떻게 턱이 이렇게 잘생겼지? 각이 딱딱 져서 선이 굵은 턱은 그의 남성성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턱이 자아를 가지고 경상도 사투리를 내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진 찍고 싶다.’

그와 한방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믿기지 않았다. 매일 같이 자면서도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복 받은 놈인지도 모른다. 짝사랑하는 상대방을 이렇게 매일 곁에 두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을 슬픈 짝사랑에 비해서 나는 훨씬 나은 편이 아닌가.

부공태에게 고백을 하고 그와 특별한 사이가 되는 일은 사실 반쯤 포기했다. 될 인연이었으면 지금쯤 벌써 이어졌겠지. 부공태와 내 사이는 고용주와 고용인 그 이상이 아니라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끔 사람을 흔든단 말이지.’

오늘처럼, 이렇게 ‘경호원’ 부공태가 아닌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만다. 바보 같은 희망을 갖고 만다.

혹시라도 우리 관계가 변할 가능성은 없을까, 하고. 그럴 리가 없는데.

“…공태 씨, 그거 알아요?”

그가 깨어 있을 때는 하지 못할 말을 슬그머니 꺼내 보았다.

하지만 용기 없는 나는 고작 한마디를 하는 것도 어려워서 말을 고르고 또 고른다.

“나는 공태 씨가 정말 좋아요.”

그렇게 어렵사리 고른 말이 겨우 이것이었다. 이 정도면 행여 그가 깨어나서 듣더라도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닐 터다.

‘뭐 하는 거냐, 자는 사람 앞에 두고.’

내가 조금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든 차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의미 없는 가정이라는 걸 안다.

아니다, 지금도 괜찮다, 더 욕심내지 말자, 스스로 다짐하며 부공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일어났다.

이불을 끌어다 그에게 덮어 주려는데, 부공태가 뒤척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나 때문에 깼어요?”

“은지예. 아입니더. 마이 잤심더.”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졸음이 뚝뚝 묻어났다. 세 겹이 된 쌍꺼풀을 문지르며 일어나려는 그를 도로 눕혔다. 은근슬쩍 가슴을 누르며 말이다.

“더 주무세요. 아직 해도 안 떴어요.”

“아입니더. 배우님이야말로 저 때문에 깬 거 아입니꺼?”

“아니에요. 제가 먼저 잠들었잖아요.”

부공태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투로 편하게 누웠다.

“괜찮아요, 공태 씨? 피곤해 보여요.”

“아, 긴장하는 게 버릇이 돼 가꼬. 괘않심더.”

경호원으로서 지내는 생활이 익숙해서 그런 거구나. 그리 생각하자 그에게 좀 미안했다. 내가 잘 때도 항상 이렇게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다시 주무셔야죠.”

“예…. 잠이 안 오네예.”

“손, 잡아 드릴까요?”

얼떨결에 꺼낸 말에 부공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봤다.

“저, 저는, 누가 손잡아 주면… 잠이 잘 오더라구요. 저는 그래서, 혹시, 공태 씨도….”

내가 미쳤지. 무슨 말을. 어영부영 변명하고 있는데 부공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워서 잘못 봤나 했다.

“예, 잡아 주이소.”

듣고도 멍하니 있자 부공태가 먼저 내 손을 덥석 쥐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상체까지 끌려가는 바람에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정작 부공태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나를 제 얼굴 앞까지 끌어당겨 놓고 말이다.

“이카이까 진짜로 잠이 잘 오네예.”

그가 눈을 감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이네요.”

숨결이 닿는 것을 의식하느라 내 목소리 또한 기어들어 갔다.

“근데예.”

“네?”

“누가 손을 잡아 줬심꺼?”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뚝 굳었다. 변명하려고 아무렇게나 뱉은 말인데 이렇게 정곡을 찔릴 줄은 몰랐다.

“그, 그게….”

“말하기 싫으믄 하지 마이소.”

부공태는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새초롬하게 내밀었다.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인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릴 때 엄마하고 자면서요.”

혹여 그를 더 화나게 할까 얼른 대답하자 부공태의 얼굴에 안도감이 보였다. 나를 문란한 남자로 생각했다가 그런 게 아니라 안심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사람이 순수하다니까.

완전히 안도한 그가 눈을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근사해서 이건 진짜 반칙이다, 생각될 만큼 말이다.

“배우님.”

“네.”

뭔가를 말하려다가 만 것이지 부공태는 입을 벌렸다가 닫아 버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궁금했지만 왠지 궁금증으로 놔두고 싶기도 했다.

“…아입니더. 자입시더.”

“그래요. 어서 자요, 공태 씨.”

착한 곰돌이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부공태는 그 상태로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긴장은 무슨. 이렇게 잘 자면서. 그에 대한 원망이 뾰족하게 자랐지만 그보다 그가 편히 잠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위안이 더 컸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래도 어떡하나, 나는 그가 좋으니.

눈을 감고 나 또한 잠을 청했다. 쉽게 잠들 것 같지 않으리라 예상한 내 생각과는 달리 졸음은 달콤하고 성급하게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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