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비밀을 안다
잠을 조금 설친 탓에 다음 날은 아침부터 피곤했다. 아침 촬영만 끝나면 오후부터 널널하기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뭐, 내가 신인도 아니고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졸음 따위는 일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없었다.
부공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다만 평소보다 좀 더 날이 서 있었다. 와중에도 날을 세우고 있는 그의 모습이 섹시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진짜 나는 답이 없었다.
“마이 피곤하십니꺼?”
촬영 막바지에 부공태가 내게 와서 물었다. 나는 그가 주는 물을 받으며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뇨, 저보다 공태 씨가 피곤하시죠. 밤늦게까지 경비업체랑 말씀 나누시던데.”
듣자 하니 안 그래도 삼엄한 경비가 더 단단해지고 실무 담당자들은 비상이 걸린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유명인이고 VIP 고객이기도 하니까.
“고작 전화 한 통에 사진 두 장인데 다들 왜 이렇게 난리신지 모르겠어요. 감사하긴 하지만….”
불편한 내색을 하며 말하자 부공태가 얼른 정색했다.
“으데예! 안 그래도 저번에 집에 들어온 놈 때문에 한 번 발칵 디집힜다 아입니꺼.”
“아, 그때요? 그냥 조용히 구속하고 넘어간 거 아니었어요?”
“하이고, 조용히 넘어가겠십니꺼? 담당자들 그날 다 경질되고 난리 났심더.”
“아….”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내 무심함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자 부공태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키 차이가 꽤 나서 그가 쪼그리고 앉은 키가 의자에 앉은 내 키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가 두툼하고 큰 손을 뻗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높은 체온 탓인지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배우님예, 혹시나 드리는 말씀인데, 절대로 자책 긑은 거는 하지 마이소.”
“안 해요.”
“안 하기는. 얼굴에 마 내 미안해가 죽겠다 다 써 있구만.”
할 말이 없어 쓰게 웃었다. 부공태의 다정함이 와닿았다. 와중에도 이 다정함을 내게만 보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도 들었다.
“아버지는… 아직 모르시죠?”
“회장님예? 아실걸예.”
“헐.”
큰일 났다. 아버지 성격상 난리가 났을 텐데.
“공태 씨, 괜찮아요?”
“마, 아직은 연락이 없으시네예.”
부공태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나는 불안했다.
‘공태 씨 잘리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그를 내 곁에 붙들어 놓아야 했다. 방법이 없을까.
“앞으로 물도 내가 주는 거만 마시이소. 밥도 내가 먼저 먹어 볼 끼고예.”
“아니, 무슨 기미 상궁도 아니고…. 전화 한 통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반쯤 농담인 줄 알았는데 부공태의 얼굴에서 농담의 기색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주희설 씨.”
그는 항상 나를 ‘배우님’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름으로 부르는 목소리는 낯설고도 묘하게 강압적으로 들렸다. 굳은 표정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희설 씨는 본인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좀 알 필요가 있습니더.”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물론 소중하니 어쩌니 하는 말이야 팬들에게 늘 들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렇게 팬이 아닌 개인에게서 들으니 또 기분이 달랐다.
“…알겠어요.”
솔직히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달래 주나 싶지만, 부공태의 얼굴이 워낙 진지했기에 그리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촬영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부공태는 내 옆에 내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촬영 직후에는 간단한 인터뷰가 있었다. 어떤 캐릭터를 연기 중인지, 찍고 있는 장면은 어떤 장면인지 등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면 되는 쉬운 인터뷰였다.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지만 최대한 쾌활하게 인터뷰에 응하던 중, 낯선 기척이 뒤쪽에서 다가왔다. 돌아보니 한종수였다.
“어, 종수 씨, 종수 씨도 옆에 앉으세요. 극 중에서 라이벌 역할이시죠?”
“껴도 되나요?”
안 된다고, 나는 당신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한종수가 이미 간이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은 뒤였다.
“어우, 좁아. 저리 가요.”
일부러 장난스럽게 거부하는 척하며 거리를 벌렸다. 한종수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투로 카메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진짜 저도 같이 찍어도 되는 거예요?”
지가 와서 일방적으로 앉아 놓고는 뭔 소리야.
“네, 한종수 씨는 촬영 어떠세요?”
“선배님께서 저한테 워낙 잘해 주셔서요. 다음 작업도 같이 하고 싶다고 하시고.”
“아하하, 제가 언제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오늘따라 이 사람 왜 이래.
인터뷰어는 내 불편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스타를 함께 인터뷰할 수 있단 생각에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만약 실제로 한종수 씨처럼 멋진 분과 사랑의 라이벌이 된다면, 주희설 씨는 어떨 거 같으세요?”
“포기할래요.”
바로 대답하자 인터뷰어가 깔깔 웃었다.
“아 모르시는구나. 선배님 짝사랑 중이셔서 더 몰입 잘되신다고 하셨는데.”
무심한 척 뒤이은 한종수의 말에 소름이 쭉 끼쳤다.
뭔 개소리야. 나를 마주 본 그가 씩 웃었다.
“아, 이건 비밀인가요?”
…뭐야 이 미친 새끼는.
‘침착하자.’
연예인 인생이 몇 년인데, 내가 이깟 도발에 넘어갈 주희설이 아니다. 이것보다 더 미친놈들도 많이 상대해 봤다.
“아, 진짜, 그걸 말하면 어떡해요. 그럼 나도 한종수 씨 비밀 다 말해 버린다?”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세상에서 제일 친한 척을 했지만 한종수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묘한 표정으로 카메라와 나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제 비밀요?”
“제가 윤시 누나한테 갈굼당하는 거 보고 자꾸 짝사랑이라고 놀리잖아요, 한종수 씨가.”
그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기 전에 얼른 선수를 쳤다. 다행히도 인터뷰어의 흥미를 끄는 데에는 성공했다.
“박윤시 씨요?”
“네. 윤시 누나가 워낙 장난을 많이 치시거든요. 그리고 제 장난도 잘 받아 주시니까. 그래서 그거 보고 제가 누나 짝사랑한다고 놀리는 거예요.”
“어머, 정말요?”
“네. 윤시 누나가 들으면 난리 날 걸요. 너 따위가 나를? 하면서.”
인터뷰어가 함부로 편집하지 못하도록 나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윤시 누나를 찾는 시늉을 해 보였다. 마침 저 멀리 스카프를 이것저것 바꾸어 보고 있는 윤시 누나의 옆모습이 보였다.
“윤시 누나! 한종수 씨가 저 또 괴롭히려고 해요!”
냉큼 소리 지르자 카메라가 윤시 누나 쪽을 향했다. 속으로 안도했다.
“누나! 누나아!”
“내가 엉덩이 들고 찬다고 해.”
귀찮아 죽겠다는 투로 윤시 누나가 말하자 인터뷰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분량 챙기려면 아마 편집 이상하게 못 하겠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윤시 누나도 옆에 쌓인 스카프를 콧수염처럼 만들어 보이고 카메라에 손가락질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장난을 쳤다.
그동안 이 미친놈은 뭘 하나, 싶어 옆을 슬쩍 보았다.
“…….”
한종수는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웃지도 않고, 빤한 눈빛으로.
‘소름 끼쳐.’
일부러 뭔가를 찾는 투로 이리저리 시선을 흘리다가, 든든한 구원병이 다가오는 걸 보고 이내 안도했다.
“배우님들, 시간 다 됐심더.”
부공태가 인터뷰 중인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 인터뷰 끝났심더. 가이소.”
손을 휘휘 내저으며 사람들을 쫓아내는 모습이 얼마나 든든한지. 카메라와 인터뷰어가 사라지자 한종수도 어쩌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더 이상 나를 빤히 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찝찝함은 계속 남았다.
‘그냥 헛소리였겠지?’
한종수는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어떻게 딱 아시고 구해 주셨어요? 안 그래도 저 인터뷰 그만하고 싶었는데.”
내 말에 부공태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배우님 얼굴에 딱 써 있던데예. 아이고, 살려 주이소, 캄서.”
“아하하, 진짜요?”
“예. 보이소, 마 이케, 이케, 우는 얼굴을 해 가꼬.”
부공태가 일부러 죽상을 해 보였다. 잔뜩 찌푸린 얼굴인데도 여전히 잘생겨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이게 콩깍지인가.
“빨리 가입시더. 오후에는 디비지게 주무신다 안 캤심꺼?”
“네, 그러려고요.”
신기한 일이었다. 그와 단 몇 마디를 하는 것만으로도 방금 전까지 불편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게 말이다.
차 쪽으로 이동하며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부공태는 다른 요원들과 신호를 주고받느라 이어피스를 누르고 뭐라고 부호 같은 것을 계속 읊었는데, 그 모습이 또 끝내주게 섹시했다.
“공태 씨.”
“예, 배우님.”
“나중에 우리 작품에 출연해 주세요. 멋진 경호원 역할로.”
날을 바짝 세우고 주변을 살피던 부공태가 언제 그랬냐는 투로 풀어진 얼굴을 하고 내 쪽을 보았다.
“출연이예? 배우님 영화에 말입니꺼?”
“네. 공태 씨 이어피스 하고 슈트 입은 모습 엄청 멋있어서, 팬도 생길지 몰라요!”
신나게 말하고 나니 이건 좀 아닌가 싶었다. 팬이 많다는 건 그만큼 내 경쟁자도 많아진다는 거니까.
좋아하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부공태는 답이 없었다. 슬쩍 얼굴을 보니 좀 굳어 있었다. 귀 끝도 붉었다.
‘또 열받았나?’
하긴, 생각해 보면 이어피스가 멋있네 어쩌네 하는 말은 부공태의 직업을 다소 가볍게 여기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경호는 멋있으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암.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공태 씨 안 그래도 바쁘고 힘드신데….”
“으. 으데예! 아입니더, 그런 거.”
그래도 얼른 손을 내젓는 걸 보니 많이 열받은 건 아닌 모양이다. 다행이네.
와중에도 부공태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부공태는 열이 받으면 귀가 빨개진다.
“그런데… 제 표정이 평소에 티가 많이 나요?”
“무, 무슨 표정예?”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되묻는 걸 보니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는 뼛속까지 헤테로인 부산 사나이이므로 절대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는 짐작도 못 할 것이다. 그러니 괜한 사람에게 의미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냥, 뭐… 제가 평소에 생각을 얼굴로 잘 드러내는 편인가 해서요.”
시선을 피하며 슬쩍 말을 돌리자 부공태도 헛기침을 하며 말이 없었다. 고맙게도 내 물음에 진지하게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아, 예….”
한종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그렇게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닌 것 같았는데 말이다.
‘만약 그냥 한 헛소리가 아니라면, 내가 부공태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면….’
그렇게 티가 났나? 아니다. 티가 났으면 윤시 누나가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다. 윤시 누나는 저 자식보다 훨씬 더 나를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그래, 분명했다. 그러니 한종수는 오늘 헛소리를 했을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사실 눈앞에 있는 저 든든한 등짝을 보고 있자면 딱히 두려움이 들지도 않았다. 뭐든 다 막아내 줄 것 같은 부공태가 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니 부공태의 말대로 오늘 오후는 ‘디비지게’ 잠이나 자기로 결심했다.
신경을 좀 많이 쓴 탓인지, 아니면 피로가 쌓인 탓인지 차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이 쏟아졌다.
조수석 창문에 머리를 박아 가며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무언가 푹신한 것이 뺨에 닿는 게 느껴졌다. 부공태가 쿠션을 받쳐 준 것이었다.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정신없이 잤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는지 부공태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게 느껴졌다.
“배우님, 일어나 보이소. 집에 왔심더.”
“으응….”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곤한지. 나는 졸음을 핑계로 부공태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보챘다. 비겁한 거 알지만 이렇게라도 그와 접촉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으니까.
“아이고, 우리 배우님 마이 피곤한갑네.”
다정하기 그지없는 그의 목소리가 좋았다. 나를 밀어 내지 않는 품이 좋았다. 잠이 반쯤 깼지만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척하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러자 부공태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커다란 덩치에 매달린 내가 좀 우스워 보일 것 같았지만, 그보다 맞닿은 체온이 더 중요했다. 혹시나 싶어 단단히 매달리자 부공태는 안심하라는 투로 한 손으로 나를 다독여 주었다.
침대에 등이 닿을 때까지 부공태는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경호원이 이렇게 다정해도 되는 걸까? 완전 반칙 아냐?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부공태에게 열심히 책임을 전가했다.
“좋은 꿈 꾸이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도 완전 반칙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를 안 좋아할 수 있겠는가.
***
눈을 떴을 때 포근한 이불 감촉이 맨몸에 닿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이불과 시트를 무조건 최고급으로 쓰는 이유다. 맨살에 닿는 부드러운 천 감촉이 얼마나 중독적인지.
“좋다….”
오늘도 맨살에 기분 좋게 닿는 이불 감촉을 느끼며 일어나는….
“음?”
왜 맨살일까. 눈을 반짝 뜨자 옆에 누운 부공태가 보였다.
“헉.”
좀 기시감이 들었다. 전에도 이런 적 있었지. 그땐 부공태가 없었고 나는 팬티까지 홀딱 벗은 상태였지만….
얼른 이불을 들춰 보았다. 다행히도 오늘은 팬티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안도하는 것도 잠시, 옆에 누운 부공태가 신경이 쓰였다. 원래 벗고 자는 걸 좋아한다면서 나를 신경 써서 예의를 차려 주는 것인지 평소에 티셔츠 정도는 입고 자던 그였다. 그래서 이렇게 맨등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저, 공태 씨….”
거대한 등짝 위에 도톰한 닭 가슴살처럼 볼록 솟은 날개뼈를 살짝 건드려 보았다. 굉장히 딱딱했다. 다른 곳도 딱딱할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공태 씨….”
아주 작게 다시 한번 불러 봤지만 부공태는 여전히 꿈쩍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깨우는 걸 포기했다. 절대, 절대로 그의 등짝이나 구경하고 싶어서 일부러 안 깨운 게 아니었다.
‘와, 진짜 근육 장난 아니다.’
부공태의 몸은 근육으로 조밀조밀하게 짜 놓은 조형물 같았다. 아주 뛰어난 손재주를 지닌 사람이 작정하고 만든 것처럼 말이다.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근육이 체질적으로 잘 안 생기는 타입이라던 트레이너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부러움보다 욕정이 더 컸다.
‘조금만 더 만져도 안 깨겠지….’
이건 다 연기를 위해서다. 연기자라면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뭐든 많이 경험해 보고 만져 봐야 하니까.
‘진짜 딱딱해…. 사람 몸이 어떻게 이렇게 딱딱하지?’
어느새 내 손길은 점점 더 과감해져서 그의 팔뚝과 등을 마구 쓸어 대었다. 그래도 부공태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굉장히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그의 몸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매력적이었다. 어차피 벗고 자는 게 편하다면서, 매일 이렇게 벗고 자면 안 되나? 그냥 편하게 벗고 주무시라고 다시 말해 볼까?
몸을 이리저리 더듬던 손이 어느새 옆구리를 파고들 때였다. 순간 부공태의 몸이 흠칫,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손을 떼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깨, 깨셨어요?”
“…….”
조용한 걸 보니 다행히 깨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럼 방금 움찔한 건 뭐지?
‘잘못 봤나?’
아니면 자다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린 건가. 어쨌든 깨진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옆구리를 슬그머니 쓸어 보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부공태의 몸이 불끈거리며 비틀렸다. 마치 거대한 산이 눈앞에서 융기하는 듯했다.
“으, 으흠! 으허허어엄! 아이고, 잘 잤다!”
부공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좋다 말았네. 입맛을 다시며 슬그머니 손을 이불 속으로 감추었다.
“일어나셨어요?”
“예, 잘 주무셨십니꺼.”
“네.”
어느새 앉은 그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히히 나왔다. 꼭 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너무 앞서가는 거겠지.
“어제 제가 차에서 정신없이 잤나 봐요. 저 때문에 고생하셨죠?”
“으데예. 아입니더.”
어째 부공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듯했다. 자다 깨서 그런가.
“감사해요. 저 무거울 텐데 침실까지 데려다주시고, 옷까지 벗겨 주시고….”
뭔가 고마움의 포인트가 이상하지만 어쨌든 상관없겠지. 부공태는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깝깝시럽어가 우째 옷을 입고 그래 잘 잡니꺼? 내는 그래 몬 자겠든데.”
“그러게요. 저도 앞으로 홀딱 벗고 잘까요?”
한 침대에서 서로 벗고 자다 보면 사나이들끼리 없던 정도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 물어보자 부공태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내가 실수했나. 평소의 부공태라면 하이고 마 할딱 벗고 주무시이소, 할 것 같은데.
“…배우님 편한 대로 하이소.”
한 박자 늦은 대답에 어쩐지 좀 민망해졌다. 시선을 피하곤 슬그머니 옷을 찾아 입었다.
“그래도 공태 씨가 저 챙겨 주시니까 기분 진짜 좋네요. 공태 씨랑 자는 것도 좋고요.”
“내랑 자는 게 좋십니꺼?”
“네. 완전요.”
부공태의 물음에 얼른 대답했다. 그는 자기 전에 벗어 놓은 것인지 바닥에 널린 목욕 가운을 정리하고 있느라 분주했다.
“그, 그러니까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고…. 공태 씨는 친절하시잖아요. 저한테 잘 대해 주시고. 자기 전에 옷도 벗겨 주시고….”
아, 마지막은 잘못 말한 것 같은데. 모르겠다. 그러게 누가 남의 옷 벗겨 주래…. 친절하게스리.
“씻으러 가겠심더. 배우님도 준비하이소.”
부공태는 평소와 달리 장난스러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좀 이상했다. 그가 평소와 달랐다. 불길한 예감이 맨몸을 스치고 지나쳐 살짝 소름을 끼치게 했다.
‘혹시… 내가 불편하거나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아니겠지.
‘짝사랑해 보신 적 있으세요?’
한종수가 이전에 내게 물었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딱히 크게 신경 안 썼다. 우리가 찍는 이번 드라마가 짝사랑, 삼각관계 내용이니까 물었겠지 했는데.
‘한종수가 부공태한테 이상한 이야기 한 거 아냐?’
그래서 갑자기 부공태의 태도가 바뀌었다거나….
나쁜 생각이 더 들기 전에 고개를 파뜩 가로저었다.
‘공태 씨는 그런 사람 아니야.’
얼른 나갈 준비나 해야지 싶어서 나도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려 몸을 일으켰다. 그때, 협탁에 놓아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매니저 형이었다.
- 희설아, 얼른 TV 켜 봐! 빨리!
“왜요?”
매니저 형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도로 앉아 침실 TV를 켰다. 막 시작한 뉴스에 익숙한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내 양아버지였다.
- 검찰은 주영호 회장의 비리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JH그룹 주영호 회장은 아직까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뭐예요?”
- 너희 아버지가 이번에 뭔 비리 사건에 연루된 모양이야. 어떡하냐?
자료 화면으로 쓴 아버지의 모습은 하필이면 나와 함께 있는 영상이었다. 이전에 내 영화에 투자자로서 참석해 있던 때라서 웃는 내가 옆에 같이 찍혀 있었다.
- 저 기레기 새끼들, 일부러 너 나온 영상 튼 거야. 아오.
화가 잔뜩 난 매니저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리모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빼길 반복했다.
“…저 일단 아버지한테 가 볼게요. 오늘 오전 스케줄 좀 미뤄 주세요.”
- 저, 그게….
매니저 형이 쩔쩔매며 대답을 미뤘다. 담도 크고 평소에 큰 건을 앞두고도 잘 떨지 않던 형이 이러는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배우 주희설의 네임 밸류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 …그게… 기획사 측에서 분량 조정 이야기가 나왔어.
“…….”
올 게 왔구나. 그러니까 지금 촬영 중인 영화에서 내 분량을 조정하겠다는 거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논란에 휩싸인 배우니까.
그래도 JH그룹 장남이라 혹시 해라도 입을까 온전히 쳐 내지는 못하고 분량만 줄이겠다는 건데, 그게 더 비참했다.
“상황이 많이 심각한가보네요.”
- 너도 알겠지만 이 판이 워낙 몸을 많이 사리잖냐.
“분량 많이 줄어드나요?”
매니저 형의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형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회의 좀 해 보고.’라고 말했다. 분량이 많이 줄어든다면 차라리 자진하차를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도 작품에 피해를 주고 싶진 않으니까.
통화를 종료하고 TV 화면을 노려보는 동안, 부공태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렇게 창피한 적이 없었다.
***
아버지네 회사로 가는 길에 나는 상세한 사항들을 보고받았다. 매니저 형이 벌써 이번 사태에 대해서 정리를 해 온 모양이었다.
“사실 아버님 네 JH그룹은 상관이 없고, 계열사 쪽이 문제인가 봐. 근데 이번에 보통 크게 터진 게 아니라서…. 좀 영향도 있을 것 같고.”
형도 심란한지 한숨을 푹푹 내쉬어 댔다. 나는 형이 메일로 보내 준 자료들을 태블릿PC로 하나하나 살폈다.
비리 사건이라고 해서 단순히 횡령이나 뇌물 수수 같은 걸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사건이 심각하고 끔찍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었다고요?”
읽고도 믿기지 않아 묻자 매니저 형이 대답 대신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공태도 내 말에 놀랐는지 시선을 한 번 주었다.
아버지네 회사인 JH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K전자의 공장에서 인명 사고가 있었다. 안전 미비 때문이라고 했다.
문제는 사람이 죽었는데 신고도 없었고, 원인이 되는 안전 관련 사항도 시정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렇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사람이 채워지고, 또 죽고, 채워지고… 그렇게 반복하다가 이번에 처음 밝혀진 거라고 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왜… 비리 사건이라고 한 거예요?”
“그걸 덮는 데에 엄청 돈을 많이 썼거든. 시설 체크해야 하는 관공서, 위험한 기계 납품한 곳, 그거 검수한 곳… 뭐 한두 군데 문제가 아닌데 사람 죽은 거 덮으려고 천문학적인 돈을 쓴 거지.”
“허 참.”
듣고 있던 부공태가 기가 찬단 듯이 혀를 찼다.
나 역시 듣기만 해도 막막했다. 이렇게 끔찍한 사건이 아버지네 회사랑 연관이 되어 있다니.
“아버님 회사에서 그쪽에 하청을 맡겼으니 사실 잘못이… 없다고 볼 수는 없는데, 그래도 JH 본사에서는 전혀 몰랐나 봐.”
그래,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양아버지는 가끔 좀 무섭긴 해도 도를 넘어서는 분은 아니시니까.
JH본사 건물로 가는 동안 이범산에게서 전화가 왔다. 녀석도 뉴스를 보고 내 걱정이 되어서 급히 전화한 모양이었다.
- 너 진짜 괜찮냐?
“응, 나야 괜찮지.”
사람들이 안 괜찮아서 문제지…. 한숨을 삼키며 녀석을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회사에 있을 녀석을 붙들고 길게 통화할 기분은 아니었다.
부공태는 운전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내 걱정을 하는 모양이었다.
“공태 씨, 걱정하지 마세요. 솔직히 아버지 회사가 망하진 않을 거예요. 전 사실 걱정 하나도 안 해요.”
운전석에 앉은 부공태가 내 말을 듣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불만스러운 듯 살짝 찌푸린 미간과 꿀렁거리는 목울대가 지나치게 섹시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간 심각한 사건이 터졌는데도 짝남을 보고 이렇게 좋아하는 내가 좀 한심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그기 아이고….”
“네?”
“아입니더.”
부공태는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휘휘 저어 버렸다.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좀 궁금했지만 말할 거면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싶어 그냥 묻지 않았다.
본사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광경에 부공태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있어서였다.
“저기 다 뭡니꺼…?”
“기자들이죠, 뭐.”
매니저 형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 하지만, 천만 배우의 양아버지이자 대기업의 회장인 아버지가 사건에 연관되었으니 기자들이 이 가십거리를 놓칠 리가 없었다.
“혹시라도 여기서 희설이 모습 발견하면 완전 대박이니까, 그래서 더 죽치고 있을걸요.”
매니저 형이 나 대신 말을 이어 주었다. 그래, 저들이 원하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주희설’의 아버지였다.
“제가 아는 길 있어요. 그쪽으로 가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기자들과 마주치지 않을 통로를 외우고 있었다. 부공태는 내가 알려 준 곳으로 조심스레 차를 몰고 갔다. 다행히도 그곳까지 기자들이 있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그와 매니저 형을 차에 두고 혼자 건물로 올라갔다. 예상했던 대로 본사의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이런 건 빨리 언론 대응 팀에 넘기란 말이야!”
“지금 사내 전화도 불통이에요!”
“그럼 뛰어가! 계단으로 올라가서 전달해!”
아버지가 있는 층에 도착하자 복도에서 싸우던 직원들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비서가 다가오는 내 모습을 확인하곤 회장실 안으로 스피커폰을 했다,
“회장님, 주희설 씨 도착하셨습니다. …네.”
아드님이 아니라 주희설 씨라고 해 준 게 조금 고마웠다. 비서가 들어가라는 투로 손짓을 했고, 나는 그에게도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곤 회장실 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전면 창을 보며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짐작이 갔다.
“스케줄은?”
“미뤄 달라고 하고 왔어요.”
“참 한가하구나.”
걱정이 되어서 왔는데 좋은 말을 듣지 못하니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수세에 몰려 있는지 알아서 서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얼굴 한번 비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냐.”
“그냥… 걱정되어서 왔어요. 뉴스 보고요.”
아버지가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몇 주 만에 보는 얼굴도 많이 핼쑥해지셨다.
“그렇게 걱정되면 일 하나 해라.”
“네?”
아버지가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뭉치 하나를 내게 건네었다. 회사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표지를 넘기자 내 사진이 나왔다.
‘무슨… 촬영 계획 같은 거네?’
내용은 나를 대상으로 한 CF 기획안 같은 것이었는데, 언뜻 봐도 기업 이미지 쇄신을 목표로 하는 게 적나라하게 티가 나서 읽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아버지, 이건….”
그리고 뒷장을 넘겼을 때는 깜짝 놀랐다. 내게 익숙한 얼굴의 사진이 하나 더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몸이 조금 굳었다.
“이… 사람은….”
“한종수랑 찍어라. 그쪽 담당자랑도 이야기 다 끝났으니.”
아버지는 다시 창을 보고 뒷짐을 진 채 서 있었고, 나는 종이를 들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왜 하필 한종수예요?”
“…그쪽에서 제안하는 대로 찍는 거다.”
약간의 침묵 뒤에 나온 아버지의 말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읽어 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적잖게 충격받았다.
“아버지, 이번 사건 전혀 모르셨던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운영하는 JH그룹은 그저 연루만 되었을 뿐이고, 실제 비리는 계열사가 저지른 것으로 들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버지. 아셨으면 분명히 무슨 조치를 취하셨을 거잖아요. 그쵸? 사람이 죽었다는데….”
하지만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앞으로도 절대 대답하지 않을 듯이 창문을 바라보고 서 있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있자니 허망하게도 알 것 같았다.
“…다 알고 계셨어요?”
알고도 놔둔 것이다. 아니, 같이 덮었던 것이다. 내가 알던 아버지 같지 않아서 뒷걸음질을 쳤다.
“저 이거 못 찍어요.”
나는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을 두고 기업 이미지나 쇄신하는 CF를 찍으란 말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종이를 넘겨 보았다. ‘삶을 먼저 생각하는’, ‘진짜 가족이 되고 싶은’ 따위의 가소로운 멘트들이 내 입으로 나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저는 못 해요.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힘이 들어간 손바닥 아래 프린트된 내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을 것이다.
“아버지,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세요. 제가 아버지 회사 CF 찍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이건….”
짜악.
소리가 들리고 시야가 비틀렸다. 뺨을 맞았음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이게 어디서…! 정신 차려! 지금 회사 뒤집어진 거 안 보여?”
노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 울렸다. 한쪽 귀만 울리는 걸 보니 아마 다른 쪽 귀는 맛이 간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입양한 뒤로 손찌검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조금 강압적일 때도 있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마음대로 밖에 다니지 못하고 작품 선택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거야 그러려니 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양아버지의 투자가 큰 몫을 했으니까.
아무리 내게 강압적으로 대해도, 나를 어린애처럼 취급해도, 절대 때린 적은 없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맞았다는 사실보다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뭐가 중요한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 아니다.”
“어떻게 다 아시면서… 그러실 수 있어요.”
적어도 내가 아는 자상한 양아버지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을 텐데. 여태 오해를 하고 있던 걸까. 아버지에게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다 알면서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너도 이제 어린애 아니니 알 거 아니냐!”
끔찍했다. 사람이 죽어 나간 일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네 매니저한테 지금쯤 연락 갔을 거다. 저쪽 소속사랑 합의해서 당장 내일부터 촬영 들어가. 지금 찍는 건 미루고. 이게 제일 급한 일이다.”
완고하게 돌아선 뒷모습을 보니 말이 통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구겨진 종이를 아무렇게나 든 채 돌아서서 회장실을 나왔다.
‘급한 일’이라는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그래, 급한 일이겠지. 그래서 한종수의 기획사까지 동원해 이런 광고를 기획했겠지.
한종수의 기획사는 우리 회사보다 조금 더 컸다. 이미지 쇄신용 광고를 제대로 찍으려면 아마 나 혼자로 안 될 테니 그쪽과 연계한 모양이었다. 그 기획사는 아버지한테서 돈을 얼마나 받았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예전이라면 안 그랬을 텐데.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차 안에서 전화를 받는 매니저 형과 차에 기대어 선 채로 팔짱을 끼고 있는 부공태가 보였다.
“배우님예.”
부공태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깜짝 놀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 맞다, 나 뺨 맞았지….
“괜찮아요. 계단 내려오다가 부딪쳤어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웃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덤덤하게 조수석에 타려는데 부공태가 내 팔뚝을 붙들었다.
“좀 보입시더.”
“괜찮다니까요.”
“계단 내리오다가 다친 게 아인 거 긑은데.”
얼른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활짝 웃으면서 내가 제일 잘하는 표정 연기를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부공태의 시선을 받자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그의 눈에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서, 그리고 주체 못 할 분노가 같이 드러나서였다.
“하, 씨바….”
치솟는 감정을 쏟아 내듯 한숨과 욕을 거칠게 뱉은 부공태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잘 빗어 놓은 포마드 헤어가 흐트러졌다. 그의 표정이 이렇게 험악한 것은 처음 봤다.
“아들을 우째 이래….”
아버지가 그런 거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저 어금니를 깨문 채 시선을 떨궜다.
그의 눈을 더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감정을 참기가 힘들어서였다.
부공태의 손이 조심스레 내 얼굴로 다가왔다. 상처를 살피려는 손길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꼭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만지듯이 내 얼굴을 두툼한 손끝으로 조심조심 더듬던 부공태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이 아프지예.”
그 말이 왜 그렇게 아프게 들렸을까. 아버지한테 맞고 나서 내내 참아 왔던 감정이 무너진 둑을 타고 범람하듯 가슴을 꽉 채웠다.
결국 눈가가 젖어들어 갔다. 흐윽, 하고 참던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부공태가 내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괘않심더. 우리 배우님, 괘않심더….”
투박하고 묵직한 어투로 해 주는 위로가 달아서 종내 펑펑 울고 말았다. 부공태는 옷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안아 주었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내 어깨와 등을 두드렸다.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나는 연기에 대실패한 형편없는 배우가 된 채 울고 또 울기만 했다.
***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집으로 갔다. 매니저 형은 아버지가 맡긴 일 때문에 미팅을 하러 갔다.
부공태는 내 다친 얼굴을 정성스레 치료해 주었다. 혹시라도 내가 아플까 봐 솥뚜껑 같은 손으로 아주 조심조심 약을 바르는데, 그 동작이 하도 간지러워서 마음이 많이 풀렸다.
“마이 아프지예?”
“괜찮아요.”
“괘않기는! 눈티가 밤티가 됐구마!”
눈티 밤티라니, 대체 어느 시절 말이야…. 와중에도 부공태가 나보다 열한 살 많음을 또 한 번 실감했다. 그래도 그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게 좋아서 아버지 일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괘않타 카지 마이소.”
그의 어투가 한층 무거워졌다.
“여태 안 괘않은데 괘않다 카면서 살았다 아인교. 나이도 아직 얼라구만.”
“…얼라 아닌데요.”
“스물세 살이믄 얼라 맞지!”
버럭 지르는 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하여튼 목청은 좋아.
“안 그케도 됩니더. 아직 마이 힘들고 썽질또 나고 할 나이 아입니꺼. 넘들은 그 나이에 다 그캅니더.”
부공태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우면서도 다정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부공태는 나를 모른다. 배우 주희설을 모른다. 아역 배우로서 살아온 스타의 삶을 알지 못한다.
“난 안 돼요.”
그래서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이번에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사람들은 나한테 그런 거 기대 안 해요.”
나는 안다. 사람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나한테 뭘 기대하는지.
“내가 보통 사람들처럼 화내고 주저앉으면 사람들은 실망하고, 금방 나를 잊어버려요. 그 사람들이 바라는 건 보통 사람이 아니라 배우 주희설이니까요.”
남들에게 당연한 것들이 제게는 당연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제게는 자연스러운 사실이었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상품이에요.”
좀 냉혹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게 사실이었다. 상품. 남들에게 얼굴과 웃음을 파는 것이 직업인 사람. 철도 들기 전부터 내게 정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명예와 이름을 얻었다. 그러니 서러워해서는 안 된다. 대가를 얻었으니까. 그러니 부담이 되더라도 아버지가 시킨 CF는 찍을 테고, 카메라 앞에서는 앞으로도 절대 힘든 내색을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듣던 부공태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스케줄 다 미랐다 캤지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공태가 내 손을 덥석 쥐고 일어섰다.
“카믄 내랑 어디 좀 가입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