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ㅇ 있잖아요
보동 소개팅하ㅏ면 그날 밥만 먹고 헤여지져??
취하긴 취했는지 타자가 제대로 쳐지질 않았다. 하지만 연애 경험이 부족한 나는 꼭 알아야 했다. 보통의 남녀가 소개팅을 하고 잠자리까지 가는 경우가 흔한지. 그리고 부공태가 그 흔한 축에 속하는지.
보통은 그냐 저ㅓ녁만먺 헤어지는거 맞지ㅠㅗ? 그츄?
때에 따라 다르지..
어쩐지 문자에서 매니저 형의 한숨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당장 내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먼ㄴ뜻인데
아무 메시지도 안 왔지만 매니저 형이 휴대폰 화면을 보고 욕을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화면을 노려보았다.
뭐.. 마음 맞으면 처음 만난 날에 끝까지 갈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 근데 그건 왜 묻냐?
‘끝까지’라는 단어가 눈에 꽝!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혔다. 스툴에서 넘어졌음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옆구리를 어딘가 부딪친 것 같은데 아프지도 않았다.
너 소개팅이고 나발이고 생각도 하지 마라 나 회장님한테 디진다..
“이 인간이 뭐라는 거야….”
뒤이어 온 문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부공태가 얼굴 모를 여자와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었다. 누운 채로 얼굴을 감싸고 으아아, 하는 소리를 내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와인병을 다시 들고 들이켜는데 남은 것이 없어서 더 우울해졌다. 결국 한 병을 더 꺼냈지만 마개를 따던 중 오프너 끝이 코르크 마개에 박힌 채로 부서져 버렸다.
“하….”
오프너의 부러진 나선 부분이 덩그러니 박힌 채로 반도 뽑히지 않은 코르크 마개를 보니 어쩐지 내 처지 같았다. 빼도 박도 못 하는 짝사랑 중인 주희설.
생각해 보면 언제부터 이렇게 부공태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냥 외모가 내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덩치 크고, 잘생겼고. 딱 저런 스타일의 남자에게 깔리는 게 내 로망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지금은 눈물이 나고 질투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미쳤나 봐, 주희설….”
그냥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그러니 헤테로한테 이렇게 목을 매는 거지. 제정신이면 아예 시작도 안 했을 거다.
코르크 마개에 박힌 오프너 파편을 툭툭 건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식탁 위에 엎드리자마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나는 부공태에게 고백을 했다. 부공태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소리를 질렀다.
‘내는 게이 아이다!’
다 알고 있는데 꿈속이라 그런지 더 상처를 받았다. 시무룩하게 땅을 보고 있자니 부공태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뻥이다. 실은 내도 남자 좋아한다.’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거 정말 꿈 맞지? 꿈이라서 이딴 희망 고문에 시달리는 거지?
‘진짜요? 공태 씨, 진짜예요?’
부공태는 특유의 잘생기고 굵은 눈썹을 씰룩거리더니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니 긑은 남자 말고.’
‘…아….’
‘내처럼 근육질인 남자.’
부공태는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나는 손을 뻗었지만 부공태의 절반이나 될까 싶은 내 팔목을 보고 그대로 거둬 버렸다.
‘나쁜 새끼…. 내가 운동할 거야….’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도 잠시, 문득 문밖에서 들린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뭐지…?’
누군지 확인해야 하지만 취한 몸을 일으키기도 귀찮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앞섰다. 새 스토커 놈인가? 만약 그렇다면 부공태의 탓을 하는 빌미로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딴 생각이나 하는 내가 너무 미웠다. 공태 씨는 착한데….
정말 될 대로 되어라,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뒤이어 띡, 띡, 도어 록을 해제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버지인가 보다. 술이나 먹고 있다고 혼나겠네. 그러나 들린 목소리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하이고, 이게 머꼬. 배우님예!”
부공태가 쓰러진 나를 일으켰다. 흐물흐물하게 무너지는 내 상체를 그가 단단히 받쳐 안았다.
“술을 와 이래 마이 마싰노, 혼자서.”
그의 옷자락에서 바깥 냄새가 났다. 몸은 여름 열기를 그대로 머금고 온 것처럼 뜨거웠다. 나를 옮기려는지 안아 들려는 팔뚝을 덥석 쥐었다.
“…진짜 근육질 남자 좋아해요?”
“예? 하모요. 근육질 남자 안 좋아하는 남자도 있심꺼?”
“많던데….”
부공태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내 몸을 안아 들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이 내 몸에 밀착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나 지금, 부공태한테 술주정한 거지?
“하이고, 우리 배우님 이래 술을 혼자 자시고 먼 일이라도 있었는가.”
걱정 반, 장난 반을 섞어 하는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만 파묻었다. 와중에도 안겨 있는 게 기분 좋은 나는 정말 답이 없다.
“데, 데이트는 잘하셨어요?”
“하모. 잘했지예.”
시원한 대답에 흘끔 벽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되기 십 분 전이었다.
“자, 잘 못 하신 것 같은데….”
부공태는 분명히 자고 올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런데 아직 자정도 되지 않은 시간에 왔으니 아마 상대방과 틀어졌겠지.
“아인데? 잘했는데?”
내려다보며 씩 웃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그래, 내가 정신 나간 게 아니라 이 사람이 너무 잘생긴 거다. 다 부공태 때문이다.
그는 나를 침대 위에 사뿐히 내려놓고는 손목시계를 풀어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러고 있자니 어쩐지 섹스하기 전의 무드 같아서 살짝 설레었다.
“뭐, 들어 보니까 잠자리가 어쩌고… 라고 해서… 주무시고 오실… 줄 알았죠.”
말을 하다 보니 무슨 바람피우는 애인 다그치는 것 같아서 점점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아아, 그거예? 그쪽 분이 침대 판다 캐 가꼬.”
부공태는 정작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잠만 자면 되는 줄 알았더니 매트리스도 종류가 참 많더라며 혀를 내두른 그는 내 잠옷을 들고 왔다.
“와예? 내가 일찍 들어와가 섭섭하나?”
반말을 섞어 묻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그득 묻어났다. 그 특유의 묵직한 음색 때문에 꼭 나를 어르는 듯이 들렸다.
“아이믄, 기분 좋나?”
씩 올라가는 입꼬리. 그의 선 굵은 얼굴에서 소년미가 문득 보였다. 나도 모르게 네! 좋아요!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뭐, 그냥….”
괜히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얼버무리는 동안 부공태는 침대에 내 잠옷을 놔두곤 넥타이를 풀었다. 이제 보니 일할 때 입는 흑백 슈트를 그대로 입고 간 모양이었다. 멋도 없게. 넥타이는 좀 다른 색으로 하지, 싶으면서도 얼굴도 모를 여성분께 승리감이 들었다.
“아, 이거는 배우님한테만 말씀드리는 긴데…. 제가 사실언 혼전 순결 주의잡니더.”
뒤이은 부공태의 말에 술이 확 깨어 버렸다.
혼전 순결 주의자라니. 저 부공태가. 저 얼굴을 하고. 저 몸을 하고. 말도 안 된다고, 이런 억울한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빽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공태 씨, 혹시 종교 있으세요?”
“예? 아입니더. 그런 게 아이라….”
부공태는 조금 얼굴이 붉어진 채로 뒷목을 긁었다. 뭔가 깊은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곤란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아이, 머, 곤란할 거까지는 아이고예….”
몇 번 헛기침을 하던 그는 베드 벤치에 앉아 겨우 입을 열었다.
“마, 지가 열아홉 살 때였심더. 명절이라가 울 아부지하고 목욕탕에 같이 갔는데….”
열아홉 살의 부공태라니. 상상만 해도 군침, 아니, 흐뭇함이 돌았다. 부공태는 조금 더 붉어진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즈그 아부지께서 제 그시기를 딱 보디만 마 인상을 요래 팍! 쓰시는 게 아이겠심꺼?”
“거, 거시기요?”
“예.”
부공태의 시선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향했다. 하마터면 나도 그의 다리 사이를 볼 뻔했다.
“그카고 하시는 말씀이… 공태야, 니는 그시기를 즐때, 즐때로 함부로 놀리서는 안 된다, 하싰심더.”
“왜, 왜요?”
그의 소중이에 무슨 큰 문제라도 있는 걸까? 걱정이 되어서 자꾸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려는 걸 꾹 참았다.
“아, 이그는 너무 내 자랑 긑은데… 오해는 하지 마시고 들으이소.”
“오해는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는 내 경호원이고, 거의 24시간 내내 붙어 있으니 그에게 문제가 있다면 내 문제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괜히 오버 같아서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니 그시기는… 넘한테 함부로 휘두르므는… 마, 클나는 싸이즈다…. 결혼하기 전에 어디 옇는 거는 절대 생각도 하지 말그래이…. 이래 말씸하시는 게 아입니꺼….”
입이 쩍 벌어졌다.
“…와.”
도대체 크기가 얼마나 크면 아버지가 친아들에게 저런 말을 했을까. 물론 이전에 바지를 벗었을 때와 운동할 때 얼핏 윤곽을 보기는 했지만….
“마, 그때 아부지 말씀하시는 표정이 안 잊히 가꼬…. 무슨 아들내미를 도둑넘 보듯이 보시는 깁니더…. 내한테서 우째 이런 게 나왔노…. 카는 말씀까지 하싰심더.”
부공태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긴, 너무 커도 힘들다고 하긴 하더라. 나는 보통에서 조금 큰 사이즈라서 잘 모르겠지만.
“여튼 그래가 내는 혼전 순결 주의잡니더. 아부지 말씀도 있고, 귀하게 자란 넘으 자식 다치게 하기도 싫고…. 처음에는 특히 아프다 카든데 내끄는 얼매나 아프꼬 싶고….”
어느새 시뻘게진 얼굴로 말한 부공태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이거 때문에 괜히 여자들이 마, 부담시럽어하면 우짜노 싶네예…. 내한테 맞는 짝궁이 있을란가도 몰겠심더….”
부담스럽긴요. 짝궁이 없긴요! 완전 땡큐지, 마!
소리치는 대신 나는 그의 손을 덥석 맞잡았다.
“공태 씨….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어요. 하지만 자신감 가지세요.”
그제야 부공태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난처함이 지워졌다. 나를 마주 보는 눈에 감동이 넘실거렸다.
“저는 공태 씨가 자랑스러워요.”
“배우님….”
“그러니 힘내세요. 분명히 공태 씨께 맞는 짝이 여기… 아니, 가까이 있을 거예요.”
여태 티는 내지 않았어도 어지간히 이 거시기 문제로 고민을 한 모양인지, 부공태는 내 말에 진심으로 위로를 받는 듯했다.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까지 촉촉하게 적시는 게 아닌가. 와중에도 잘생긴 얼굴에 또 넋이 나갈 뻔했다.
‘사실 크면 클수록 좋은 거 아닌가? 안 해 봐서 잘 모르지만….’
어쨌든 본인에게 그런 사연이 있다니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디 얼마나 큰지 만져 보자고 하면 변태 같겠지?’
무슨 할머니가 아기 손주 고추 보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꾸역꾸역 차오르는 욕심을 눌러 담으며 나는 다른 요구를 했다.
“…저 술기운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옷 좀 갈아입혀 주세요.”
얼굴이 붉어지는 듯했지만 술기운 탓이라고 우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모예. 해 드리야지예.”
수심에 잠겨 있던 부공태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속으로 안도하며 팔을 위로 뻗었다. 부공태는 능숙하게 내 티셔츠와 바지를 벗기고 잠옷을 입혀 주었다.
“양치하고 자입시더. 술 묵꼬 양치도 안 했지예?”
“네에….”
열한 살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애처럼 대하는 게 좀 억울했다. 그러려면 내가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아무리 어른스러워져 봤자 부공태한테는 못 미치겠지. 그러니 그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예쁨을 받고 싶었다.
‘치사한 주희설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어차피 짝사랑은 본래 출발지부터 다른 불공정 경쟁이다. 그러니 좀 치사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고, 우리 배우님 착하네.”
양치를 하러 들어가는 나를 보며 눈을 잔뜩 휘어 웃는 그를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을까.
그래, 생각해 보면 언제부터 부공태를 좋아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 테니까.
***
촬영은 여전히 진행되었다. 촬영장 분위기도 좋고, 스태프들도 모두 내게 잘 대해 줬다. 감독님은… 너무 심하게 잘 대해 줘서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윤시 누나는 나를 보자마자 꽈악 끌어안아 주었다.
“아이구, 내 새끼 왔어?”
“자꾸 새끼라고 부르지 마세요….”
“새끼를 새끼라고 그러지, 어른이라고 해?”
누나가 내 목에 팔을 감으며 장난스럽게 몸을 당겼다. 스턴트 없이 대부분의 액션 연기를 소화할 정도로 강한 몸에 꽉 안긴 채로 버둥거리자 누군가 내 뒷덜미를 뒤에서 잡아챘다. 누나와 나 사이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몸이 누나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나갔다.
켁, 하고 숨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자 부공태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이 조폭은.”
“뭡니꺼, 이 무식하구로 힘만 쎈 사람은.”
당장 싸움이라도 터질 기세라 얼른 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공태 씨, 박윤시 배우님 몰라요? 이번에 제 상대역 맡으신 선배님이세요. 가수로도 유명하신데.”
아무리 짝사랑 상대가 멋있더라도 쪽팔린 건 쪽팔린 거다. 윤시 누나는 거구의 부공태 앞에서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제 경호원이에요, 누나. 앞으로 촬영할 동안 계속 제 옆에 있을 거예요.”
“경호원이라고?”
윤시 누나가 부공태를 감정하듯 훑어보았다. 괜히 긴장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꼭 친누나한테 애인을 품평당하는 기분이랄까….
“그래, 경호는 잘하게 생겼네. 우리 희설이 가리고 서면 머리털도 안 보이겠다.”
“그쵸? 완전 든든해요! 거기다 싸움도 엄청 잘하시고요, 벽돌로 머리 맞아도 멀쩡하세요.”
한마디 칭찬에 나도 모르게 묻지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부공태를 칭찬했다. 그러나 부공태는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우리 배우님은 몸이 약하시기 때문에 그래 함부로 대하믄 안 됩니더. 앞으로 조심해 주이소.”
윤시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부공태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눈짓으로 설명했다. 아니에요, 그냥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나한테 사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참 좋으련만….
반면 그가 내게 쓴 호칭이 너무 좋아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우리 배우님이래…!’
부공태의 진지한 얼굴에 대고 다시 우리 배우님이라고 불러 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누나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우, 우린 어서 입 맞춰 보러 가요.”
대본 리딩 때 말곤 맞춰 본 적이 없으니 촬영 전에 미리 합을 보는 게 좋았다. 누나를 데리고 가려는데 부공태가 바짝 뒤따라왔다.
“입을 맞춘다꼬예?”
“아우, 깜짝 놀랐네. 목소리가 왜 이렇게 커요?”
윤시 누나가 부공태에게 눈총을 줬다. 나도 귀가 쩌렁쩌렁할 지경이어서 이번에는 차마 그의 편을 들 수가 없었다. 부공태는 윤시 누나에게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솔직히 좀 놀랐다. 누나가 저렇게 노려보면 보통은 쫄아서 깨갱하는데.
“네, 대본 맞춰 보는 걸 입 맞춰 본다고 해요. 누나, 저 궁금한 부분 있는데 좀 봐 주세요.”
윤시 누나를 데리고 스태프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가는데 부공태의 시선이 느껴졌다. 누나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야, 무섭다. 나 자꾸 쳐다보는데?”
“걱정 마세요. 생긴 게 조금 우락부락하셔서 그렇지 착한 분이세요.”
“흐음.”
눈을 가느다랗게 뜬 윤시 누나가 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희설아, 누나가 말했지? 누나는 이 판에 구르면서 진짜 별꼴을 다 봤다고. 그러면서 내 몸에 똥 안 묻히려고 눈치는 겁나 늘어났다고.”
윤시 누나는 나보다 실력도 좋고 기획사도 좋은 곳만 거쳐 왔지만 고생을 많이 했다. 그리고 이 판은 눈치 없이 살아남기 힘든 판이 맞다.
“내 눈치가 말하는데 말이야, 저놈 은근히 위험하다. 조심해라.”
“네에? 에이, 누나, 왜 그래요.”
공태 씨처럼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심지어 그곳이 커서 상대방이 아플까 봐 걱정하는 천사라고요.
쏟아 내고 싶은 말을 꾹 참고 그를 변호하려는데, 이번에는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빤히 보고 서 있었다. 이번 작품에서 내 연적이자 주연을 맡은 한종수였다.
‘뭐야, 왜 저렇게 빤히 쳐다봐?’
전에도 생각했지만 은근히 불편한 사람이다. 개의치 않고 간이 의자에 윤시 누나랑 마주 앉아 대본을 펼쳤다.
누나와 함께 표현이 애매한 부분을 정신없이 협의하고 있을 때였다. 일전에 받은 감독님의 지시 안에서 맞춰야 하니 좀 머리가 아팠다.
그때 한종수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뭐예요?”
윤시 누나가 그를 올려다보며 다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누나는 한종수를 예전부터 싫어했다. 일전에 이유를 물어보자 누나는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대답했다.
‘그냥, 재수 없게 번지르르하잖아.’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괜히 불똥이 튈까 봐 입 다물고 있었던 게 아직 조금 찔리긴 하지만, 누나한테 맞는 것보단 나았을 거라고 믿고 있다. 윤시 누나는 손이 정말 맵다. 어릴 때 멋모르고 까불다가 누나한테 맞아서 피멍이 든 적도 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묘한 미소를 띠고 다가온 한종수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시 누나는 아예 무시하고 대본을 보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럼 이건 네가 나를 쳐다보면서 하는 걸로 하자. 여기서 여기까지.”
그래도 사람 면전에 대고 무시하는 건 좀 그래서 한종수를 흘끔흘끔 바라봤다. 한종수는 한결같이 애매한 미소로 나를 보다가 돌아서 버렸다.
“왜 이렇게 사람을 쳐다볼까. 희한하게.”
윤시 누나가 뒤늦게 한종수의 작아진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입맛을 다시며 그가 사라진 쪽을 보다가 윤시 누나가 대본을 가리키며 뭐라 했기에 생각을 지워야 했다.
방금 시선을 돌리다 스치듯이 본 부공태의 뒷모습이 한종수 쪽을 향한 듯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이어진 열띤 토론에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촬영은 오늘도 무사히 진행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뒤 감독님과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잔뜩 지친 채로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부공태가 음료수를 건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온 음료였다.
“배우님, 오늘도 수고하셨심데이.”
사투리로 무뚝뚝하게 내뱉는 말인데 그가 말하면 왜 이렇게 다정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가.
“고마워요. 공태 씨도 수고 많으셨어요.”
“지가 뭐 한 게 있심꺼. 가마이 서가 넘들 노리보는 게 단데.”
한 게 있냐는 말과 달리 그는 오늘따라 조금 지쳐 보였다. 내가 못 본 새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집에 가입시더.”
“오늘은 데이트 안 해요? 소개팅하신 분이랑.”
“안 합니더.”
딱 잘라서 바로 안 한다는 말이 나오니까 기쁘긴 한데 조금 걱정이 되었다.
“왜 안 해요? 잠깐 다녀오시는 건 괜찮잖아요.”
부공태는 24시간 내내 나를 지켜 주는 입주 경호원이지만 사실 내가 집에 있을 땐 위험할 일이 그리 많지 않으니 잠깐 데이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물론 이전처럼 스토커가 집에 들어오려고 한 경우도 드물게 있긴 하지만 그 스토커도 그때 잡혔고 말이다.
“뭐, 소개팅 함 해따꼬 맨날 봐야 됩니꺼? 솔직히 내 생활도 있꼬….”
부공태가 조금 멋쩍다는 투로 목을 긁으며 말했다.
“만나신 지 이제 며칠 되지 않았어요? 애프터 신청 하셨을 거 아니에요.”
내 말에 부공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기 뭡니꺼?”
기가 찼다. 아니, 그런 것도 모르면서 소개팅을 했단 말이야?
“두 분 소개팅 끝나고 연락 따로 안 하셨어요?”
“하기는 했는데….”
“다시 만나자고 약속 잡았을 거 아니에요.”
당연히 잘되고 있다고 믿었는데, 부공태의 표정을 보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딱히 그른 말은… 없었던 거 긑은데….”
아이고, 차였네.
“여자분께서 언제 다시 만나냐고 공태 씨한테 안 물어보셨어요?”
“물어봤지예.”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는데요?”
“때 되면 함 보입시더 했지예.”
아이고, 아니네. 부공태가 찼네!
남의 불행을 이렇게 기뻐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억지로 볼 안쪽 살을 씹었다. 어느새 우리는 차 쪽으로 걷고 있었다.
“와예? 그카믄 안 되는 깁니꺼?”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카믄예?”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괜히 욕심이 생겼다. 고민했지만 잠깐이었다. 나는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솔직히 짝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나처럼 했을 거다.
“여자분께서… 공태 씨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시나 봐요.”
말하면서 양심에 콕콕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공태 같은 사람을 놓친 게 잘못이지!
“그러고 나서 연락 딱히 안 온 거죠? 그 여자분한테서?”
“예.”
부공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봐, 내 말이 맞는다니까? 진짜 관심이 있었으면 한 번 더 연락을 해서 어떻게든 약속을 잡았을 거다. 그러니 절대 내가 양심에 찔릴 이유도 없는 거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부공태 쪽을 흘끔 보았다. 아쉬워할 줄 알았는데, 그의 얼굴에는 딱히 안타까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봐, 부공태도 딱히 관심이 없었던 거다. 잘 된 일이지.
그가 차 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조수석에 탔다. 부공태는 항상 이렇게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곤 했다. 괜찮다고, 차 문쯤은 내가 열어도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이렇게 그가 문을 열어 줄 때마다 내가 굉장히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뭐, 솔직하이 말씀 드리믄 저도 그래 완벽하이 마음에 차는 건 아니랐심더.”
“그, 그래요?”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꾹꾹 누르며 물었다. 부공태는 운전석에 타서 시동을 걸었다. 감독과 일정 조절을 하느라 조금 늦은 매니저 형이 달려오고 있었다.
“예, 저는 머라 캐야 되노… 그… 삘이 와야 내 사람이다, 생각이 딱, 드는데 그분은 좋은 분이기는 한데 삘은 없었심더.”
“아하, 삘.”
솔직히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여자가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는 거지. 다행이다 생각하며 속으로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좋아하는 게 얼굴로 드러나면 안 되는데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안전벨트의 버클을 찾는 척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줘 보이소.”
그때 부공태의 두툼한 팔뚝이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내가 어영부영하며 쥐고 있던 벨트를 당겨 단번에 채워 주었다.
팔뚝의 단단한 근육이 가슴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그의 샴푸 냄새도 코를 스쳤다. 향수를 뿌리지 않기 때문인지 부공태에게서는 부담스럽지 않게 좋은 향기가 났다. 그의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향이기도 했다.
“아직 안전벨트도 제대로 못 매 가꼬 우짜노, 우리 얼라 배우님.”
“얼라요?”
“예, 얼라. 애기, 애기.”
부공태가 씩 웃으며 자신의 안전벨트를 매었다.
“얼라가 뭔 뜻인지는 저도 알거든요?”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부공태가 히히, 하고 웃었다. 그는 어떻게 웃는 것도 곰돌이 같은지 모를 일이다.
“아이고, 힘들다, 힘들어.”
뒷좌석 문이 열리며 앓는 소리가 들리더니 매니저 형이 올라탔다. 덕분에 나는 부공태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지 않다는 변명을 할 기회를 놓쳐 버렸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다.
***
집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부공태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며 피자 두 판을 시켰다. 나도 먹고 싶었지만 촬영 중이니 체중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다이어트 콜라와 피클만 조금 먹었다.
“우리 얼라 배우님 배고파가 우짭니꺼?”
“아까 샐러드 먹었는데요, 뭐. 하나도 안 고파요.”
“하이고, 그게 밥입니꺼? 풀떼기지. 참 연예인은 암만 생각해도 내는 몬 하겠심더.”
그리 말한 부공태는 맛이 다른 피자 두 조각을 척 겹치더니 그대로 입에 넣었다. 남들은 한참 나눠 먹을 양을 단번에 밀어 넣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피자 두 쪽이 사람 입에 다 들어가는구나.
“그렇게 먹어서 맛이 느껴져요?”
“하오애, 어우오 아이으어.”
‘하모예, 억수로 맛있슴더’ 하는 말인 듯했다. 어쨌거나 볼이 빵빵하도록 먹는 게 귀여워서 그저 웃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기다리 보이소, 피클 하나 더 뜯으깨예. 이거라도 드시소.”
“아, 괜찮은데….”
피클만 먹으면 너무 신데. 그래도 부공태가 나를 위해 부산스레 구는 게 좋아서 그저 앉아 있었다.
문득 휴대폰 소리가 들려 확인해 보니 전화가 오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지만 부공태가 바로 옆에 있어 든든한 마음 때문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전화가 끊기지 않은 것을 화면으로 확인한 뒤, 다시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또 장난 전화인가. 어쩌다가 팬이 내 번호를 알아내서 이렇게 장난 전화를 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긴 했다.
그대로 끊으려는 순간, 방금 전까지의 적막과는 구분도 가지 않는 끔찍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꼭 쇠를 긁는 듯도 하고 뭔가를 부수는 듯도 한 소리였다. 크지도 않은데 그 소리가 몹시 불쾌해서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황급히 귀에서 휴대폰을 떼었다.
“이, 이게 뭐야….”
손에 힘이 빠져 휴대폰을 놓쳐 버렸다. 내가 덜덜 떨고 있음은 부공태가 다가와 내 어깨를 붙들고서야 깨달았다.
“배우님예, 뭔 일입니꺼? 괜찮심꺼?”
부공태가 걱정스레 묻는 동안 식탁 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전화는 끊겨 있었다. 그러나 끔찍한 소리의 잔상은 귀에 여전히 묻어 있었다.
***
전화를 끊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부공태는 몹시 걱정했다. 응급차까지 부르려고 들기에 그제야 괜찮다고 말했다.
“그냥 장난 전화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안 캤심꺼?”
“그냥 혼선된 걸 수도 있죠.”
“요새 시대에 혼선이 어데 있노!”
그는 내 휴대폰을 이리저리 살폈다. 나는 걱정스레 그의 옆에서 내 휴대폰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메시지 하나가 왔다. 역시나 발신인 불명으로.
도착한 메시지에는 아무런 글자가 없이 이미지 파일 하나만 있었다. 바로 부공태와 내가 마주 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옷을 보니 어제 촬영장에서 찍은 것 같았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지었던가?’
아무리 봐도 이건 좋아하는 사람 보고 얼빠진 채로 웃는 사진인데. 부공태도 따뜻하게 웃고 있긴 했지만, 헤벌린 입으로 웃고 있는 내가 더 문제였다.
“이걸 왜… 보냈을까요.”
촬영장이 야외여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촬영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구경꾼이 사진을 찍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파일을 삭제하게 했었다. 물론 그래도 백 퍼센트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찍힌 거면….
“이거 암만 봐도 스태프가 찍은 거 긑은데예.”
부공태가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그렇죠? 그런데 이걸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내가 부공태를 짝사랑하는 건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부공태는 일반인이다. 스캔들을 낼 거면 윤시 누나나 다른 친한 여자 배우들이랑 있는 사진을 노렸을 텐데.
그리고 다음 순간, 또 한 장의 사진이 왔다.
이번에는 부공태와 나 둘 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내가 휴대폰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 순간을 찍은 사진이었으니까.
“이 씨벌 놈이…!”
부공태가 창문 쪽으로 튀어 나갔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게 뭐야….”
보안업체가 지키고 있고, 부공태도 바로 옆에 있다. 아마 담장 위에서 카메라로 줌을 당겨 찍은 사진일 터다.
“알파, 알파 구역, 담장 확인해 주이소. 지금 빨리!”
경비업체와 무전을 주고받은 부공태는 창밖을 한참 확인했다. 그러다 내가 혼자 있는 게 더 신경 쓰이는지 결국 곁으로 돌아왔다.
“하, 씨바, 돌아 뿌겠네.”
…와중에도 경상도 사투리로 욕을 하는 그가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한심했다.
“근처에… 있는 거죠?”
“도망갔을 낍니더.”
그리 말하는 부공태의 얼굴에 분한 기색이 이글거렸다.
“우째 코앞까지 왔는데 내가 모를 수가 있노.”
“그게 공태 씨 잘못인가요, 뭐.”
그의 자책이 아프게 들렸다. 나는 어차피 이렇게 사는 사람인데, 그의 탓이 아닌데.
일단 보안업체 쪽에다 말을 해서 나한테 사진을 보내온 놈이 누군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근처의 경비도 더 늘렸다.
덕분에 밤이 깊어 가는데도 집 주변은 새로 온 경비업체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혹시 모르니 집 근처에 수상한 장치 같은 건 없는지 살피는 중이라나.
“전에 그 스토커 새끼 아입니꺼?”
“그 스토커는 잡은 거 아니었어요?”
“잡기는 했는데…. 카믄 따른 놈인가. 아, 마, 돌아 뿌겠네.”
부공태가 갑갑하다는 투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잘 정돈된 머리칼이 흐트러지는 걸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전 진짜 괜찮아요. 이런 장난 전화 한두 번도 아닌데요, 뭐.”
오히려 빨리 잠이나 잤으면 싶었다. 내일은 스케줄이 좀 널널하긴 하지만.
그리고 배가 고파 죽겠다던 부공태가 어서 남은 피자를 먹길 바랐다. 두 판이나 시켜서 반도 먹지 못한 피자가 식어 가고 있었다.
“…한두 번이 아이라꼬예.”
한숨 쉬며 묻는 부공태의 말에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네! 전에는 아버지 보는 앞에서 죽인다는 사람도 있었고요, 다짜고짜 신음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 또… 내가 죽어야 마땅한 이유를 계속 메시지로 보내던 사람도 있었어요.”
부공태의 표정이 안 좋아지기에 얼른 더 덧붙였다.
“팬인 척하면서 음료수에다가 약 타서 주려던 놈도 있었고요! 그리고 아버지한테 제 악플 모음집 보낸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공태가 갑자기 큰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부공태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동정하는 눈빛도 아니고, 위로하는 눈빛도 아니다. 그런데 지극히 다정했다.
이 덩치에 이런 눈빛은 반칙이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가 나를 자꾸, 자꾸 더 쳐다봐 주었으면 싶었다.
“…그래가 우예 삽니꺼.”
뒤이은 말에는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짝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걱정해 주는데, 당연히 기분이 찢어지지.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은 찌르르할까.
“저 잘살고 있는데요, 뭐.”
이 정도 나이에 이 정도 커리어를 가진 사람은 다른 업종에서도 찾기 힘들 거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나는 아주 잘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공태 씨가 지켜 주실 거잖아요.”
그래서 솔직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좀 두려울 법도 했겠지만, 이렇게 든든한 보디가드가 내 옆에 붙어 있는 지금은 다르지.
그런데 어째 부공태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어서는 귀가 붉어져 있었다.
‘열받았나?’
물러서라고 이야기해도 자꾸 들러붙는 기자들을 부공태가 노려볼 때 이 표정이랑 비슷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귀는 안 붉었지만 말이다.
내가 너무 부담 주는 말을 했나 보다. 그래서 화가 났나 보다.
“아니 그냥… 제가 조심할게요.”
“그기 조심한다고 됩니꺼어!”
“으악 놀래라!”
목청이 어찌나 큰지 머리까지 왕왕 울렸다. 고막 터지지 않았을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얼얼한 귀를 손바닥으로 쓸며 말하는데 돌연 부공태가 몸을 홱 돌리더니 현관 쪽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 가요?”
“망할 노무 경비업체 담당자하고 이야기하러 갑니더.”
괜히 불똥이 튀겠구나, 싶어 담당자에게 미안했다. 큰 보폭으로 순식간에 현관 가까이 다가간 부공태가 뭔갈 잊었다는 투로 돌아섰다. 여전히 귀 끝이 좀 붉었다.
“먼저 주무시이소. 휴대폰 손에 꼭 쥐고.”
“침대에서 폰 보면 안 좋은데….”
웅얼거려 봤지만 부공태에게는 들리지 않는지 이미 나간 뒤였다.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쥐고 2층으로 올라갔다. 넓은 침대에 웅크렸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자꾸 부공태의 붉어진 귀가 떠올랐다. 많이 화났으려나. 사과해야지, 생각하며 그가 오길 기다렸지만 결국 졸음이 밀려올 때까지 나는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
그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래서는 안 되지만, 메시지 하나가 더 온 것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네 비밀을 알고 있어.
내게는 비밀이 없다.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이 공개된 채 산 내게 비밀이라는 단어는 살면서 가장 거리가 먼 단어 중 하나였다. 그러니 구태여 부공태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