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큰일 나는 사이즈 (3/18)

큰일 나는 사이즈

부공태의 제안 덕분에 나와 그는 정말로 한방에서 자기 시작했다. 나는 뛸 듯이 기뻤지만 한편으론 내 욕구를 참을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다.

‘아냐. 난 짐승 새끼가 아니야. 멀쩡한 사람은 자기한테 관심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아.’

나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니 절대 부공태를 덮치거나 하는 불상사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제 함부로 그의 몸 아래 깔리지도 말아야지. 또 기절할지도 모르니까.

대망의 합방 날이 왔을 때 나는 잔뜩 긴장해서 샤워를 다섯 번이나 했다. 벌겋게 달아오르고 퉁퉁 불은 몸에 아끼는 새 잠옷을 입고 나가자 마침 부공태가 조금 수줍은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실례합니데이.”

“편히 지내세요. 침대도 킹 사이즈라서 제가 공태 씨한테 저번처럼 깔릴 일은 없을 거예요.”

물론 그의 덩치를 생각하면 무조건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하이고, 우리 배우님하고 요래 한방에서 지낼 줄은 내 몰랐네. 영광입니데이.”

잘생긴 얼굴과 낮고 중후한 목소리에 상반되는 어투를 듣자 반사 작용처럼 심장이 뛰었다. 사투리는 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고 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이제 잘 때마다 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거지. 끝내준다.

수줍게 그가 쓸 베개와 이불을 꺼내 주는데, 갑자기 그가 훌러덩 티셔츠를 벗었다. 깜짝 놀랐지만 눈은 본능적으로 판판한 가슴과 복근을 빠르게 훑었다.

“더, 더우세요?”

에어컨도 틀었는데. 약하지만. 나는 추위를 많이 타지만 그는 더위를 많이 타고, 지금은 여름이니 그를 배려해서 틀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공태는 입고 있던 트레이닝 바지까지 훌렁 벗었다.

‘헐, 웬 떡.’

차마 대놓고 좋아하진 못하고 슬금슬금 곁눈질을 하며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구경했다. 사극 찍을 때 탔던 말의 목이 딱 저렇게 생겼는데.

“아휴, 바지까지…. 네네, 편하게 계세요. 더 많이 편하게 계셔도 되고….”

어색하게 들리질 않길 바라며 말했다. 그가 누울 베개와 이불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눈은 그의 허벅지와 다리 사이를 향했다.

‘와, 팬티 터질 것 같다.’

한눈에 보아도 그의 속옷은 수납물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자꾸 보고 있자니 내 아래쪽도 반응할 것 같아서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원래 지는 홀딱 벗고 잡니더. 뭐가 몸에 붙어 있으믄 잠이 안 와 가꼬.”

“아, 정말요?”

어쩜 잠버릇도 이렇게 섹시할까. 부공태가 벗은 옷을 착착 개고는 내 옆에 누웠다. 이 침대는 옆에 커피를 놔두고 뒹굴거려도 될 정도로 흔들림이 적은데 그의 거구가 들어오자마자 한쪽이 기우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우리 배우님 방이니까 빤쓰는 입고 있겠습니데이.”

“하하, 안 그러셔도 되는데….”

미쳤나 봐. 그럼 이 집 2층에서 맨날 팬티를 벗고 잤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속내가 튀어나왔지만 부공태는 신경 쓰지 않는 투로 자리를 잡았다. 기껏 준 이불도 필요 없는지 아예 허리 아래 깔고 누운 채로 말이다.

손을 뻗어 협탁에 있는 램프를 끄자 어둠이 들이닥쳤다. 쿵, 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옆에 있는 부공태의 거대한 존재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공태 씨, 있잖아요…. 공태 씨는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에요?”

“이상형 말입니꺼?”

으흠,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옆을 슬쩍 보니 알몸에 팬티만 입은 부공태가 제법 심각한 얼굴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어두우니까 더 잘생겨 보였다.

“이상형 긑은 그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읎는데….”

“그래도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을 거 아니에요. 끌리는 스타일.”

“잘 모르겠심더. 마, 그냥 내 좋다 카믄 내는 다 좋던데.”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물론 그건 부공태가 헤테로가 아닐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카고 보이까네 좋아하는 이상형은 읎어도 싫어하는 서타일은 있습니더.”

“싫어하는 스타일요?”

귀를 잔뜩 기울였다. 설마 키 작은 사람은 아니겠지? 몸이 약한 사람이거나…. 그래, 부공태는 운동을 좋아하니 운동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아웃일 수는 있겠다.

“이쁘장한 아들은 마, 절대 싫습니더.”

그리고 뒤이은 말에 가슴이 좀 내려앉았다. 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이 ‘공주’인 것도 떠올랐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정말로 예쁘다고 공주라고 불린단 말이다. 심지어 남자들도 나를 보고 예쁘다고 했다. 배우로서의 내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이쁜 것들은 다 지 생긴 값을 합니더. 마 부담스럽기도 하고예.”

“…너무 편견 있으신 것 아닌가….”

“으데, 아입니더. 이쁜 것들은 다 몬 씹니더. 즐때로 깊이 엮이믄 안 됩니더.”

나도 모르게 상처를 받았다. 그럼 나도 못 쓰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하는 말을 마저 들었다.

“이쁘장하게 생긴 것들은 다 지 짝이 있지 않겠십니꺼. 암만 생각해도 지 짝은 아인 거 같심더.”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뭐 예쁜 사람한테 덴 적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을 이으며 그를 향해 모로 몸을 돌렸다. 비누 냄새가 은은하게 코를 스쳤다.

“사실 이상형 긑은 거 있다 캐도 연애 생각이 없심더.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구마 먼 연앱니꺼.”

뒤이은 말에도 아주 조금 섭섭했다. 그래, 헤테로고 자시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는 공태 씨가… 아주 좋은 애인이 되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이고, 그래 말해 주이 고맙심데이.”

부공태가 사람 좋은 목소리로 받아치더니 헛기침을 했다.

“아, 카고 보이… 내도 배우님한테 궁금한 기 하나 있는데….”

“네, 뭐든 물어보세요.”

“음, 그기….”

그답지 않게 말을 고르는 걸 보니 무슨 질문인지 궁금해졌다. 부공태는 한참 더 뜸을 들이고서야 말을 꺼냈다.

“배우님은 이상형이 어떤 사람입니꺼?”

“그거 물어보시려고 그렇게 뜸 들였어요? 우리 방금 전까지 이상형 이야기하던 거 아니었어요?”

“하하. 그렇네예.”

이상하다. 왜 이렇게 그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리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는데 말이다.

의구심을 지우고 대답을 머릿속으로 골랐다.

‘나보다 훨씬 크고 튼튼해서 깔리면 숨 막히는 남자요.’

그렇게 대답하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커밍아웃이나 마찬가지니까. 다른 답안을 고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저는… 그냥 저 이해해 주는 따뜻한 사람이요.”

결국 내놓은 대답이 그거였다. 내가 아는 부공태는 따뜻한 사람이니까.

“소박하네예. 또 없십니꺼?”

“음…. 건강하면 더 좋을 거 같아요.”

구태여 묻는 말에 하나를 덧붙였다.

“키, 키도 크면… 좋아요.”

덧붙이자 욕심이 나서 또 하나 더. 입을 열고 있다간 온갖 말을 다 할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닫았다.

“그렇십니꺼. 그케도 소박하네예….”

끝말을 흐리는 걸 보니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부공태는 그대로 침묵했다. 그가 내 이상형을 묻기 전에 한참 뜸을 들이던 게 다시 기억났다.

“고, 공태 씨, 근데 제 이상형은 왜 물어보셨어요?”

부공태는 대답이 없었다. 슬쩍 옆을 보자 그는 이미 잠든 뒤였다. 휴우, 한숨을 내쉬고 똑바로 누웠다.

부공태는 옆에서 코까지 골기 시작했지만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짝사랑하는 상대를, 그것도 홀딱 벗은 상대를 옆에 두고 편히 잘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슬쩍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단단해 보이는 팔뚝을 손가락으로 꾹 찔러 보았다. 예상대로 어찌나 단단한지 돌 같았다.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다시 한번 꾸욱, 찔러 보았다. 부공태는 그래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더 만지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깰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날 밤 나는 당연하게도 한잠도 자지 못했다. 부공태는 옆에서 코를 골며 단잠을 잤지만 말이다.

***

순정 짝사랑 연하남. 내가 영화에서 맡은 포지션이다. 내 이미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기획사 사장님도, 매니저 형도 이번 작품 정말 잘 골랐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첫 촬영 장소는 여의도의 증권가였다. 여자 주인공이 잘나가는 펀드 매니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잘나가는 누나를 짝사랑하는 연하남이고.

상대역과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한 십 년 전에 같은 드라마에서 아역을 맡은 뒤로 계속 연락하고 지내던 누나였다.

내 신을 찍은 뒤 누나에게 실컷 헤드록을 당하고 컨테이너 앞에서 헤어를 다시 손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한종수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목소리는 공손한데 허리와 목은 빳빳한 인사였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데뷔는 내가 한참 먼저 했지만.

헤어를 받으며 대본을 보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한종수가 내 앞에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스타일리스트까지 흠칫거릴 정도였다.

‘사람을 왜 이렇게 빤히 쳐다봐.’

다시 대본을 들여다봤다. 무시하면 가겠거니 했는데 한종수는 아예 의자를 가져와 내 옆에 앉았다.

“아까 연기 좋던데요.”

“아, 고맙습니다.”

그는 모델 출신이고 연기 경력은 나보다 짧아도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훨씬 이득을 많이 보는 케이스였다. 질투할 필요는 없었다. 나와는 아예 스펙트럼이 다른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일은 기꺼울 뿐이다.

“짝사랑해 보신 적 있으세요?”

나도 한종수를 칭찬하려는데, 뒤이은 물음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없다고 대답할까 하다가 이미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살면서 짝사랑 한번 안 해 본 사람이야 많겠지.

“…네, 뭐.”

“그런 것 같았어요.”

한종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그런 연기는 진짜 짝사랑해 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이상하게 말이 마음에 박힌다.

뭘 안다고 이런 말을 하나, 싶기도 한데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심상찮아서 반박도 못 했다. 한종수는 그대로 일어나서 떠나 버렸고, 괜히 찝찝한 마음에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대본을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어쩐지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와중에 감독이 찾아와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아, 감독님.”

“어이구, 앉아 있어요. 이야아, 우리 대배우님, 이렇게 쉬는 시간에도 대본을 다 보시고. 역시!”

대본 리딩 때부터 나를 자꾸 대배우라고 부르면서 추켜세우더니 오늘도 또 이런다. 부담스러워서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우리가 다 배우님만 보고 있는 거 알죠? 진짜 잘 부탁해요.”

“네, 네에….”

한종수도, 여자 주인공 맡은 박윤시 누나도 좋은 배우인데 걸어 오는 기대감이 이렇게 다르다. 유명세가 다르니까. 남들 들으면 복 터진 소리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이 기대감이 많이 부담스러웠다.

영화든 드라마든 뭘 찍을 때마다 이랬다.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은 나 혼자 딴 게 아닌데, 사람들은 나만 넣으면 흥행이 보장되는 것처럼 굴고 있으니.

“최선을 다해 볼게요….”

“뭘 최선을 다해. 하던 대로 해요. 화이팅!”

사라지는 감독을 따라 파이팅 포즈를 취해 보였다. 가뜩이나 첫 촬영이라고 기자들도 몰려들어 있어서 더더욱 부담감이 컸다.

‘연습 좀 더 하고 올 걸 그랬나.’

사람들이 내가 연기 천재인 줄 알아서 말한 적 없지만, 사실 촬영 전에 집에서 거울을 보며 죽어라 연습한다. 수백 가지 버전으로 같은 장면을 연기해 보아도 직접 촬영을 할 때는 또 다르다. 상대 배우와의 합도 맞아야 하고, 그 외의 모든 조건을 예상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연습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람들의 기대치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아직도 믿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 다시 대본을 읽는 데에 집중했다.

“여 화장실이 깨끗하이 좋네.”

덥다고 세수를 하고 온 부공태가 다시 나타나서 무겁던 기분은 금세 풀려 버렸다. 그는 점심으로 사 왔다는 자기 얼굴 크기만 한 햄버거를 복스럽게 먹기 시작했고, 나는 매니저 형이 건네는 셀러리를 우적우적 씹었다.

“걱정이네요. 이번 영화도 잘되어야 할 텐데.”

별생각 없이 샐러리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이번 영화도 아버지 회사에서 제법 큰돈을 투자했다고 들었다. 대박은 아니더라도 손익 분기점은 넘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리고 저번 영화 성적이 사실 간신히 손익 분기점만 넘긴 정도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도 좀 부담스러웠다. 명색이 천만 배우인데, 내 연기 때문에 작품을 망치면 어떡하나 겁나기도 하고.

“와. 겁납니꺼?”

부공태가 감자튀김을 봉투째로 입에 단번에 털어 넣으며 물었다.

“겁나죠. 나 때문에 영화 망하면 어떡하나, 내가 괜히 이 역할 맡았다고 하면 어쩌나, 싶고. 하하.”

농담조로 말했는데 부공태의 잘생긴 얼굴이 순간 굳었다.

“와 그래 생각합니꺼.”

“…네?”

속이 갑갑하다는 투로 콜라를 벌컥, 한 모금 마신 부공태가 미간을 구겼다.

“성공 몬 하믄 어떻십니꺼.”

“못 하면 안 되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는 건데.”

“근데 와 배우님 탓을 하는교. 다 같이 하는데.”

잠깐 할 말을 잊었다. 다들 나한테 기대하니까, 망해도 내 탓이라고 자책한 적이 꽤 있었는데.

실제로도 연기가 기대에 못 미쳤다며 악평에 시달린 적이 몇 번 있었다. 아직도 영화 잡지에 실린 칼럼 타이틀이 기억난다. ‘주희설의 한계가 드러나’, ‘구색만 좋았던 천재 배우’, ‘주희설은 얼굴로 승부해야 했다’(그 영화는 내가 지저분한 분장을 많이 했다) 등.

이번 영화에서도 망하면 또 그런 칼럼이 뜨겠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산다는 일이 그렇다. 못한 것은 몇 배로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마, 사람이 좀 망할 수도 있는 기지! 뭐 그래 걱정을 해 쌌노!”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어마어마한 목소리로 부공태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퍽, 쳤다. 아파서 숨이 턱 막히는데 부공태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쥐고 마구 흔들었다.

“아이고, 우리 배우님 아직도 얼라네 얼라.”

“무슨…. 제 나이가 몇 살인데, 사람들이 들으면 웃어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겨우 반박했다. 하긴, 그가 나보다 나이가 열한 살이나 많으니 애처럼 느껴질 만도 할 것이다.

부공태는 호탕하게 껄껄 웃고는 햄버거 봉투를 들고 일어섰다. 환하게 웃던 얼굴은 무전기를 켜는 순간 순식간에 식었다.

“예, 건물 내부 꼼꼼하이 확인 부탁합니더.”

날이 선 얼굴이 멋있어서 나도 모르게 한참을 바라봤다.

어쩐지 오늘 연기는 잘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

“나는 포기 안 해요.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어요. 알아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대사를 내뱉는 내 모습은 내가 모니터로 봐도 대단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남자가 화면 속에 있었다.

“내 감정, 내 기분, 누나는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으니까….”

“크으! 뭐, 내가 디렉팅할 게 없어, 없다고. 내 월급 반납해야겠다, 야.”

감독이 또 오버를 한다. 부끄러워서 일부러 휴대폰을 보느라 못 들은 척을 했다. 외모에 대한 칭찬은 익숙한데 연기에 대한 칭찬은 왜 이리 익숙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 오늘 첫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어쨌거나 첫 촬영은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부공태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나를 주시하는 게 그의 직업임을 알면서도 시선이 자극적인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보고 있어서 더 감정 이입이 잘되었다.

“배우님 십분 뒤에 이동 예정. 동선 미리 체크 부탁드립니데이.”

부공태가 한쪽 손을 인이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주변을 살피는 눈빛은 완전히 날이 서서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오늘 내 연기가 어땠냐고 부공태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그에게는 묻기가 부끄러웠다. 아니, 부끄럽다기보다는 무섭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까.

그가 보기에 오늘 내 연기가 별로였으면 어쩌지 싶어서. 아니, 혹시라도 ‘딱 짝사랑하는 남자 같십니더.’ 하는 말을 들을까 봐. 그래서 내 감정이 순식간에 들킬까 봐 말이다.

“와 이래 배가 고프노…. 햄버거를 세 개뿌이 안 무가 그런가….”

부공태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를 문지르며 혼잣말을 했다.

“들어가면서 야식 사서 갈까요?”

묻자 손사래를 친다.

“으은지예. 됐심더. 배우님 다이어트 하신다꼬 맨날 풀떼기만 뜯어 묵고 있는데 야식은예.”

“하루 정도는 괜찮아요. 같이 맛있는 거 먹어요.”

“그래도 되겠십니꺼?”

곧바로 환하게 바뀌는 표정이 끝내주게 귀여웠다. 살짝 올라간 광대를 손으로 찔러 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공태 씨 드시고 싶은 걸로 먹어요.”

“예에, 일단 정리 좀 하고 오겠심데이.”

그가 다른 경호원들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매니저 형과 짐을 정리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마음이 영 싱숭생숭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리는 다 끝났는데 어쩐지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호원과 이야기 중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스태프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워낙 넉살도 좋고 성격도 시원시원하다 보니 촬영장에도 이미 친구가 많은 그였다. 그런데 어쩐지 부공태의 얼굴이 좀 달아올라 있었다. 홍조를 띤 채 주고받는 말이 뭔지 궁금해졌다.

‘무슨 이야기 중이지….’

한참 지나서야 그는 목뒤를 벅벅 긁으며 다가왔다.

“마이 기다리셨지예? 가입시더.”

오늘은 매니저 형이 아니라 부공태가 직접 운전해서 가는 날이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주변을 세세히 살피며 제 몫을 다했다.

“엄청 중요한 이야기 중이신 거 같던데.”

차에 오르며 슬쩍 운을 떼었다. 운전석에 앉은 부공태는 헛기침을 했다.

“마, 자꾸 소개팅을 하라 안 캅니꺼….”

뒤이은 말에 마음이 쿵 무너졌다.

“…소개팅이요.”

“내사 마 바빠 가꼬 시간이 없다 캐도 막무가내시라서….”

부공태의 말은 이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예쁜 여자와 마주 보고 앉은 부공태를 떠올리고 있었다. 울적한 기분이 얼굴로 드러날까 싶어 괜히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하셨어요?”

“한 번만 만나 보라 카이 우짭니꺼. 만난다 캐야지.”

이미 무너진 마음이 거기서 또 무너진다. 발끝으로 뭔가가 쌓이는 것 같았다. 운동화 속 발가락을 움찔거리며 그에게 안 들릴 정도로 작게 헛기침을 했다.

“와, 잘됐네요. 그럼 드디어 솔로 탈출?”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차창을 향했다.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아이고, 아입니더. 뭐, 만나 봐야 알지예. 일단 배우님 스케줄 없으신 날로 해가 함 나가 보기는 할라꼬예.”

…안 만나겠다고는 절대 안 하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부공태가 밉고 속상했다. 정신 차리자, 나한테는 간섭할 권한이 없잖아, 스스로 꾸짖어도 미운 마음은 사그라들 생각을 않았다.

“잘됐으면 좋겠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놓고 금세 후회했다. 운전석에 앉은 부공태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차창에 비친 그의 옆모습을 볼 자신도 없어서 야경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연기 연습을 한단 핑계로 혼자 다른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야식으로 사 온 피자는 부공태가 접시에 담아 주었지만 당연히 한 입도 못 먹었다.

집중도 못 하면서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그렇게 한참 지나자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배우님요, 내는 밖에 있으께예.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얼른 오이소.”

대답하기 싫어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자니 부공태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을 푹 내쉬곤 대본을 덮고 책상에 엎드렸다. 그제야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나는 포기 안 할 거라던 내 배역의 대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래, 벌써 포기하기는 일러. 혼자 다치려는 마음을 꾹꾹 다독이며 벌떡 일어났다. 양손에 주먹을 꽉 쥐니 없던 용기도 좀 생기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지금 그랑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나잖아? 이름도 모를 소개팅 상대보단 나은 위치인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침실로 돌아갔다.

부공태는 내 심정도 모르고 침대 한쪽을 차지한 채 쿨쿨 자고 있었다. 내 자리에 모로 누워 잠든 얼굴을 구경했다.

‘…잘생겼다.’

와중에도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그의 외모 찬양이라니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죄가 아니라고 했다. 그가 소개팅을 나가더라도, 그리고 설령 거기서 만난 상대와 잘되더라도 나는 부공태를 계속 좋아하겠지. 처음엔 그의 덩치와 외모에 반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이렇게 빠지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그에게 반하게 된 계기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내내 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일전 그가 대본 연습 상대를 해 줄 때였다. 사투리가 심하긴 해도 그는 꽤 성실한 연습 상대였다.

‘하, 하, 이제 니 놈으 계획은 망가져쓰. 사… 살고 싶으믄, 그 총, 이리 던져.’

…물론 연기는 아주 심하게 못하지만,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대사 직후 지문에는 내가 그를 때린다고 적혀 있었지만 대충 주먹만 휘둘렀다. 그러자 부공태가 혀를 찼다.

‘에헤이, 그래 해가 되나.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린다.’ 이래 써 있는데.’

‘뭐 어때요. 대사만 하면 되지.’

‘그카믄 안 되지. 제대로 때리 보이소.’

가뜩이나 큰 가슴을 당당하게 내밀어 보이는 그는 사실 내 주먹 몇 대에 아파할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내가 그를 때리나.

‘괜찮다니까요.’

‘할라믄 제대로 해야지. 뚜들기 패도 되이까네 함 때리 보이소.’

‘아이 참….’

부공태는 은근히 고집이 있는 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제법 큰 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에 주먹이 꽂혔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라 깜짝 놀라서 그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하모, 괘안치예.’

‘어디 봐요!’

이참에 가슴이라도 만져 볼 참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대로 손목이 붙들렸다. 어찌나 손이 커다란지 내 손을 모두 감싸고도 남은 데다 뜨거울 정도로 따뜻했다.

‘와, 놀랬나, 배우님?’

약간 장난기를 섞어 묻는 낮은 목소리. 심장이 떨려서 그대로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내는 괘안타 안 캅니꺼.’

나를 마주한 채로 씨익 웃는 얼굴을 보니 이번에는 올라온 심장이 도로 떨어질 것 같았다.

‘배우님요, 내는 배우님이 암만 뚜들기 패도 멀쩡한 사람이다. 알겠심꺼?’

그 말이 왜 그렇게 설렜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그의 미소가 든든해서일 수도 있었고 맞잡은 손이 뜨거워서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가 계속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그리고… 얼마 전에는 스토커한테 짱돌까지 머리에 맞아 가며 나를 지켜 주었지 않은가. 아무리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결과적으로 머리가 멀쩡하기는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다.

“하아….”

또 나 혼자 설레고 있네 싶어 한숨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컸는지 부공태가 뒤척였다.

“배우님예…?”

와중에도 꽉 잠긴 목소리가 미치게 섹시했다.

“와예, 잠이 안 옵니꺼?”

“아, 네…. 저 때문에 깨셨어요?”

“괘안심더. 일로 와 보이소.”

뭐라 반발하기도 전에 몸이 훅 딸려 갔다. 그리고 부공태의 묵직한 손이 내 어깨 위에 툭 얹혔다. 동시에 숨을 참았다.

“자장, 자장, 우리, 배우님….”

반쯤 잠에 빠진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 주는 그가 어이없기도 하고, 와중에 설레는 내가 이해 가질 않아서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모로 누운 그의 흉곽이 또렷하게 보여서 더 미칠 것 같았다.

게이도 아니면서, 나한테 마음 줄 것도 아니면서 자장가를 불러 주는 남자의 품을 코앞에 두고 나는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공태는 다시 잠들어 버렸고, 나는 그의 손을 떨쳐 내지 않은 채 자꾸 밀려드는 착각을 꾹꾹 밀어 내었다.

그는 연기하는 배우 주희설을 보는 것도 아니고, 사람 주희설을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고객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온기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나는 스케줄이 하나도 없고, 부공태는 소개팅을 하러 가는 날.

처음에는 드라마라도 정주행하려 했다. 그러나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짝사랑하는 상대가 밖에 나가서 소개팅 중인데 맘 편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에 있는 와인병을 꺼냈다. 일전에 선물로 들어온 것인데 체중 관리 때문에 먹지 않았다가 이제야 여는 것이었다.

한두 잔을 마시니 금세 알딸딸해졌다. 달아서 몰랐는데, 병 라벨을 보니 제법 도수가 있는 술이었다.

“하, 내 신세야….”

우울해져서 노래까지 틀었다. 짝사랑과 관련된 노래들을 듣고 있자니 더 우울해졌지만 감정에 취한 나는 노래를 끌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대르으을… 사랑합니다아….”

심지어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

“아무리! 아파도오오! 아무리! 괴로워도오오!”

단독 주택이라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내 노래가 옆집 아랫집 할 것 없이 쩌렁쩌렁 울렸겠지. ‘나 주희설 옆집 사는데 찐음치임ㅋ’ 하는 게시글도 인터넷에 막 올라오고 말이다.

“나느으은… 이 사랑을 멈출 수가아 없네….”

부공태가 얼굴 모를 여성과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얼굴은 예쁠까? 예뻤으면 좋겠다. 부공태는 예쁜 사람 싫다고 했으니까.

보통 소개팅처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까? 그는 나의 경호원이니까 내 이야기도 하려나? 아니야, 나 같은 유명인의 경호를 맡는다고 하면 상대방이 싫어할 테니까….

‘마, 그냥 개인 경호 일 쬐매 하고 있심더.’

‘멋있어요! 누구 경호 맡고 계신 거예요?’

‘음란해 빠지 가꼬 맨날 내 젖만 만질라 카는 얼라 하나 있심더.’

혼자 얼굴 모를 여성과 부공태의 대화를 상상하다 나도 모르게 화가 울컥 치밀었다.

“한 번도 제대로 안 만지게 해 줬으면서!”

적어도 10분 이상 양손으로 제대로 만져 봤으면 내가 억울하지도 않아! 서러움에 다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울기만 하고 있어서는 사랑을 쟁취할 수 없다는 생각. 쉽게 말해 취해서 맛이 가 버렸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부공태의 번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항상 매니저 형과 함께 통화 목록 맨 위에 떠 있으니까. 익숙해서 외울 수도 있을 듯한 번호를 빤히 노려보던 나는 한참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냐.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야.’

뻔히 소개팅하러 간 거 알면서 전화하는 건 비매너다. 얼른 전화를 도로 끊으려는데 한발 늦었다. 통화가 연결된 것이었다.

- 배우님, 뭔 일 있십니꺼?

부공태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아, 아뇨, 죄송해요, 공태 씨. 제가 잘못 걸어서….”

바보같이 말을 웅얼거렸다. 만약 대사를 이렇게 읊었으면 당장 감독에게 혼이 났을 터다.

- 배우님? 잘 안 들립니더. 괘않십니꺼?

벌써 술집으로 이동했는지 주변이 굉장히 시끄럽게 들렸다. 하긴, 시간이 늦었으니까…. 마음을 꾹꾹 다잡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는지는 잘 들리지 않지만 굉장히 즐거운 듯했다.

“저, 공태 씨, 죄송해요. 잘못 누른 거예요. 소개팅 중이실 텐데 재미있게 시간 보내시고 오세요.”

- 아, 예, 배우님, 일 생기믄 바로 연락하이소.

나는 전화를 차마 끊지 못했고, 부공태는 그냥 전화기를 내려놓기만 했는지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잠깐 들렸다.

- 저는 아무 데서나 잘 자서 괘않심더.

수화구 너머로 들리는 부공태의 한마디에 마음이 쿵, 무너지는 듯했다.

‘…잔다고? 아무 데서나… 잔다고?’

다 큰 남정네가 아무 데서나 자다니. 그럴 일은 하나밖에 없지 않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뭘 어디서 잔다는 건지 더 듣고 싶은데 전화는 끊어졌다.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 부공태도 남자고 마음이 맞는 여자가 있으면 잘 수도 있지. 설령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야….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범산에게 전화를 했지만 녀석은 받지 않았고 야근 중이라는 문자만 날아왔다. 하여튼 제일 필요할 땐 도움이 안 되는 놈.

남은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고 이번에는 매니저 형의 번호를 찾았다. 조금 고민하다 메시지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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