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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요? 마사지기요! (2/18)

이거요? 마사지기요!

내 유일한 친구 이범산에게 짝사랑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이범산은 자신의 일인 양 통탄하며 함께 슬퍼해 주었다. 다행이었다. 편견 없는 친구라서.

“야, 아무리 그래도 경호원은 진짜 위험하다.”

“왜? 오히려 가까운 사이니까… 더 안전하지 않나?”

“아니지! 그런 놈이 나중에 돌변한다고 생각해 봐라! 유단자라며?”

“돌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되묻자 이범산은 가슴을 퍽퍽 치며 갑갑해했다.

“이 순진해 빠진 친구야, 그 사람이 호모포비아인지 아닌지 알 게 뭐야?”

“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나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공태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이범산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네가 사람을 어지간히 좋게 봐야지….”

“아니거든.”

아니라고 우기기는 했지만 좀 찔리긴 했다. 연습생 때 알고 보니 여자애들을 성추행했던 형이 나는 정말 좋은 형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촬영 때 만나서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피디가 알고 보니 나중에 비리 건으로 잡혀간 적도 있었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부공태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해 봤자 이범산은 또 갑갑하다고 하겠지만.

“야, 그리고 설령 뭐, 어떻게 기적이 일어나서 너희 둘이 잘된다고 쳐. 그러다 뭐 수틀려서 헤어지거나 하게 되면. 그때도 어떻게 사람이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부공태가 돌변한다라….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숨을 삼키며 애써 웃음 지었다.

“친구야, 걱정해 줘서 고맙긴 한데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부공태가 나를 해할 것이라고 걱정하지는 않았다. 설령 녀석의 말대로 그가 나쁜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걱정하는 건 공태 씨한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야.”

이기적이지만 내가 제일 걱정하는 건 그거였다. 고백 한번 못 해 보고 그냥 이렇게 끝날까 봐.

“너 그 사람 진짜 좋아하는구나.”

녀석의 말에 놀라서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래 보인다.”

이범산이 덧붙였다. 안쓰럽다는 표정을 하고서.

“…그런가.”

나는 쓰게 웃었다. 이제 이 마음이 돌이킬 수 없는 게 된 것 같았다.

***

“택배 왔습니다.”

촬영이 없는 날이라 드문 휴일을 보내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고 했다.

“가마있어 보이소. 내가 먼저 확인 쫌 해 보께요.”

아니나 다를까 부공태가 다가와 박스를 먼저 열어 보려고 했다. 나는 황급히 그에게서 박스를 빼앗아 들었다.

“친구한테서 온 거예요! 개인적인 물건이에요.”

“에헤이, 그케도 검사는 해야 되는데….”

“개인적인 물건이라니까요. 혹시 제 친구를 의심하시는 건 아니시죠?”

내가 쏘아붙이자 부공태는 하는 수 없다는 투로 물러섰다. 나는 얼른 2층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 택배는 나의 유일한 친구 이범산이 보낸 것이었다. 그러니까, 명목은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범산이 혼자 사는 오피스텔로 내가 주문한 물건이었다. 가끔 녀석은 이렇게 나 대신 택배를 한 번 거쳐 주곤 했다. 수고비 명목으로 가끔 한우 기프티콘을 보내 주니, 녀석에게는 우편비와 상자 비용을 제하고도 한참 남는 장사일 거다.

아마 녀석은 이번에도 내가 취미로 사 모으는 천 피스 퍼즐이나 좋아하는 브랜드의 향수, 혹은 아무리 프라이빗하더라도 속옷 정도를 샀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상상할 수도 없는 물건을 지르고야 말았다.

조심스레 박스를 열어 보자 안에 한 겹 더 싸인 박스가 나왔다. 역시 의리 있는 친구 이범산은 오늘도 내 물건을 전혀 열어 보지 않고 그대로 상자 한 겹만 더 싸서 보내왔다. 다행인 일이다.

‘후, 떨린다.’

태어나서 처음 사 보는 물건이었다. 나름대로는 나의 짝사랑을 달래기 위한 방안으로 떠올린 것인데, 막상 사고 나니 약간… 현타도 왔다.

‘그래도 이왕 지른 거, 야무지게 써야지.’

나는 박스를 해체했다. 포장재 속에 든 것은 바로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바이브레이터였다.

“으으.”

막상 꺼내니 손이 마구 떨렸다. 벌떡 일어나서 문을 잠갔는지 확인한 다음, 포장재를 정리했다. 서비스랍시고 아주 끝내주는 몸매를 가진 백인 남성이 바니 보이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포토 카드도 동봉되어 있었다. 종이 아깝게….

일단 설명서를 읽은 후, 깨끗하게 손과 아래쪽을 씻었다. 방수 기능이 있는 바이브레이터도 박박 씻었다.

그리고 알몸으로 침대에 누운 채 함께 산 러브젤을 바이브레이터에 흥건하게 뿌렸다. 손가락에도 한 움큼 짜내서 페니스에도 발랐다. 내 성기를 젤로 바르고 있자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아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의 돌돌이가 내 짝사랑의 슬픔을 달래 줄 거야.’

반려 전기용품의 이름은 돌돌이로 하기로 했다. 켜면 돌돌돌 하는 소리가 나서였다.

나의 짝사랑은 아마 성욕이 해소되면 어느 정도 덜 힘들 것이라고 혼자 짐작했다. 나름대로는 논리적인 추론이었다. 어릴 때부터 방송에 노출되어 살았으니 제대로 된 연애나 성관계 경험이 없고, 그래서 성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늘 지내 왔다.

그러니 성적 욕구를 해결하면 나의 짝사랑도 조금 식지 않을까 하는 게 내 결론이었다.

돌돌이의 버튼을 한 번 누르자 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1단계였다. 손끝으로 강도를 가늠한 후 슬그머니 성기에 가져갔다.

“읏….”

1단계인데도 성기에 닿는 감촉이 꽤 강했다. 눈을 감은 채 옅은 진동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혼자서 자위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나는 진동하는 돌돌이로 성기를 아래위로 문질렀다. 손으로 감싸는 것보다 면적은 좁지만 자극은 더 강했다.

어느 정도 진동에 익숙해지자 슬슬 더 센 자극이 궁금했다. 돌돌이의 버튼을 한 번 더 누르자 한층 더 강해진 진동이 울렸다.

“흡!”

혹시라도 소리가 밖에 들릴까 고개를 젖혀 베갯잇을 입에 물었다. 허리가 반사적으로 들려 올라갔다. 엉덩이에 힘을 주며 하체를 슬슬 좌우로 흔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만져 주고 있는 듯이 말이다.

이래서 다들 도구를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살걸 싶어서 후회까지 될 정도였다. 최근에 한 소비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다!

나는 신음을 참으며 2단계의 돌돌이를 귀두 끝에 들이댔다. 웅웅거리는 소리마저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3단계로 진동을 올리기 전, 한 가지 호기심이 슬그머니 발기하듯 머리를 쳐들었다.

‘남자랑 할 때는 구멍으로 하잖아.’

그러니까… 이참에 미리 연습해 두어도 좋지 않을까? 그러면 공태 씨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좋고, 공태 씨도 좋고. 윈윈.

나는 젤을 짜내서 구멍에도 치덕하게 발랐다. 구멍 안쪽에도 손가락을 넣어서 적셨다. 성기가 들어올 정도로 깊이 넣지는 못했다. 대신 바이브레이터가 들어갈 정도는 바른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돌돌이를 아래쪽으로 가져갔다. 구멍은 이미 젤로 흠뻑 젖어 있지만 긴장되었다. 아래쪽에 뭘 넣어 본 적이 있어야지!

“후우, 후.”

이게 뭐라고 잔뜩 긴장이 되는 걸까. 눈을 질끈 감고 아래쪽 구멍에 돌돌이를 딱 붙였다. 동시에 진한 진동이 여린 살에 느껴졌다.

“흡!”

성기에 닿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묘하게 짜릿하고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겁이 나기도 했다.

조금 용기를 내어서 안쪽으로 돌돌이를 더 넣어 보았다. 바깥에 들이대는 것과 조금 더 안쪽에 대는 것은 감각이 천지 차이였다. 속살이 여린 만큼 더 자극적이었다.

‘이, 이상해.’

이상한 기분이 나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나는 조금 더 깊이 돌돌이를 넣어 보았다. 2단계의 진동이 웅웅거리며 내 엉덩이를 울렸다. 엉덩이가 거대한 울림통이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왜 이런 걸 좋아하지?’

뭔가 묘한 기분이 들긴 하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잘못 넣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넣어 볼까 싶었지만 그러다가 못 빼는 상황이 올까 봐 겁이 났다. 대신 돌돌이를 좌우로 살살 움직여 보았다.

웅웅, 웅웅웅, 진동이 안쪽 여린 살을 무참하게 자극했다. 나는 허리를 살살 비틀어 보았다. 꼭 섹스하듯이 말이다. 그러자 기분이 조금 좋은 듯도 했다. 당장 부공태에게 박히는 건 아니지만 꼭 박히는 듯이 움직이는 내가 괜히 섹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감질나….’

아파도 좋고 찢어져도 좋으니 부공태의 그 두툼한 것을 한 번만 넣어 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절대 울지도 않고 의연하고 섹시하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돌돌이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돌돌이가 오히려 나의 성욕을 더 키운 것 같았다. 어설픈 진동이 몸에 느껴질수록 부공태가 생각났다. 한 번도 그와 몸을 섞어 본 적은 없지만, 틀림없이 기분이 좋을 것이다. 돌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말이다.

‘공태 씨….’

부공태가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는 걸 상상하자 걷잡을 수 없이 흥분이 커졌다.

“읏!”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설상가상으로 돌돌이를 실수로 한 번 더 눌러서 진동이 3단계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엉덩이가 아니라 내 몸 전체가 울림통이 된 것 같은 강한 진동이 구멍을 울려 댔다.

“아흑!”

묘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크게 신음했다. 혹시라도 부공태가 들었을까 덜컥 겁이 나서 입을 틀어막았다. 문을 잠가 두었으니 별일은 없겠지. …하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배우님요! 뭔 소린교?”

지나치게 성실한 내 경호원 부공태는 놀랍도록 좋은 청력을 갖고 있었고, 내 신음이 들리자마자 곧바로 방문을 두드렸다. 이건 아닌데. 큰일 났다.

무슨 일이냐고 태연자약하게 대답해야 하는데 달아오른 몸은 제때 목소리를 뱉어 내지 못했다. 돌돌이부터 끄려고 했는데, 뭘 잘못 눌렀는지 진동이 더 강해지기만 했다. 그제야 기억해냈다. 사용 설명서에 적혀 있던 ‘총 5단계 – 몸을 녹여 버리는 슈퍼 진동을 누려라!’라는 문구를.

“으읍, 읏…!”

“배우님요? 괘안십니꺼? 대답 좀 해 보이소.”

부공태는 방문을 다급히 두들겨 댔다. 더 미적거렸다간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다.

“괘, 괜찮, 아요! 흑!”

돌돌이를 겨우 끄며 말했다. 황급히 팬티와 티셔츠를 껴입었다.

“들어갑니데이!”

“아, 안 돼요!”

애타게 외쳤지만 쾅! 하는 소음에 묻혀 버렸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파열음과 함께 문이 크게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문고리가 있는 부분이 쩌억 갈라지더니 그대로 부서졌다. 부공태가 밖에서 문고리를 부순 것이었다.

“배우님요옥!”

그리고 문고리가 부서지는 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부공태가 외치며 침실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입니꺼! 마, 배우님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 가꼬!”

진짜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사람이 너무 성실해도 안 좋구나. 이건 부공태가 너무 완벽한 탓이다.

“저 괜찮아요, 진짜요.”

덤벼드는 그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몸을 급히 이불로 가렸지만 벗은 상체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 강새이 맨키로 낑낑 앓는 소리가 들리던데….”

부공태의 시선이 침대 한쪽을 향했다. 아뿔싸. 머리를 이불 속에 처박고 싶어졌다. 그의 시선 끝에 닿은 것은 바로 미처 치우지 못한 내 돌돌이였다. 끈 줄 알았는데, 켜져 있는 돌돌이.

돌돌이에서 떨어진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

웅, 웅, 웅.

침묵 속에 진동 소리만이 울렸다. 땀에 젖은, 헐벗은 몸과 돌아가고 있는 바이브레이터. 그가 내 모습을 오해하기 전에 뭐라도 변명해야 했다. 평소엔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다행히도 팽팽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 마사지! 하고 있었어요! 이거 마사지기!”

돌돌이를 집어 들고 목에 가져대 다었다. 부공태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투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었다.

“마사지기도 요새는 깜찍하이 나오네예.”

“하하, 그렇죠? 요즘은 이렇게 작은 게 유행이더라고요. 원하는 부위에 딱 맞춰서 할 수도 있고! 휴대도 편하고!”

“그렇겠네예.”

부공태는 신기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끝이 났으리라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근데 와 그래 땀을 흘리는교?”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붙여 왔다. 밀어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모든 의지가 상실되는 기분이다. 결국 나는 그가 내 이마에 손을 짚도록 허락하고 말았다.

“열이 있는 거 긑은데.”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설렌다. 방금 전까지 그를 생각하면서 몸을 만졌다고 고백하면 분명히 이 짝사랑은 온전히 망하겠지. 하지만 고백하고 싶었다. 그렇게 쳐다보고 나를 함부로 만지면 설렌다고.

“열 없어요. 그냥 혼자 운동해서….”

“아이고, 혼자 운동하믄 안 됩니더. 안 케도 몸에 근육이 음쓰 가꼬 다친다카이.”

와중에도 그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게 좋다니, 나는 정말 답이 없구나.

“이제 공태 씨가 만들어 주면 되죠, 근육.”

나름대로 이두와 삼두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부공태의 옆에 있으면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의 손을 끌어다 내 팔을 만지게까지 했다. 그러자 다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부공태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아, 오버했구나. 후회하고 있는데 부공태가 어색한 얼굴을 풀고 웃어 보였다.

“하모요. 걱정 마이소. 내랑 있으믄 다 된다카이.”

씩 웃어 보이며 하는 그의 말에 설레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잘못이 없다. 부공태의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주 웃었다.

그가 방을 나가고서야 돌돌이를 도로 상자에 넣었다. 상자 옆에 놓인 서양 남자들의 반누드 포토 카드가 눈에 띄어 깜짝 놀랐다.

‘고, 공태 씨가 봤으면 티 났겠지?’

그래, 못 보고 지나갔을 거다. 그렇게 믿으며 돌돌이를 포토 카드와 함께 꽁꽁 싸서 서랍 깊은 곳에 넣어 두었다.

***

부공태는 나를 호위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장을 입었다. 덕분에 하루 종일 나는 그 단단한 등짝이 정장 재킷에 갇힌 것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부공태는 정장 대신 몸매가 드러나는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 레깅스를 입고 나타났다. 집 안에서도 헐렁한 옷만 입어서 벗지 않는 이상 그의 몸매를 대놓고 구경할 수 있는 때는 별로 없는데, 오늘은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와, 공태 씨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아요….”

“예, 실제로 바지 몇 번 터자 묵었심더.”

“역시…. 대단하세요.”

그리고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반바지 레깅스를 입은 부공태의 허벅지는 한쪽 둘레가 족히 내 허리둘레 정도는 되어 보였다. 사람 허벅지가 어쩜 저렇지?

“내 몸 고마 훔치보고 바로 시작하입시더.”

농담임을 알면서도 괜히 움찔했다.

내 예상대로 부공태는 아주 무자비하고 엄한 선생이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도 꼭 한 세트를 더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도 요령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 트레이너들은 대부분 내가 힘들어하면 마음이 약해져서 횟수를 줄이곤 했다.

팔 운동을 하던 중이었다. 어깨가 감자처럼 으깨지는 것을 느끼며 있는 대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흣, 아파요….”

야릇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 불쌍한 연기에 감탄하곤 했다.

전쟁에서 진 어린 군주 역할을 했을 때 ‘진짜 세상 잃은 표정 너무 잘 지음’, ‘애기야 울지 마 내가 나라 사 주고 싶다’, ‘내가 장수였음 애기 눈물 한 방울마다 적장의 목 하나씩 따다 바침’ 등의 반응이 나왔던 게 아직도 기억났다.

“고, 공태 씨, 진짜 너무 아파요…. 하윽, 하….”

실제로도 어마어마하게 아팠기에 연기를 많이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부공태는 눈도 깜빡 않았다.

“아픈 게 당연합니더. 이쪽, 여가 아프지예?”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쉬운 대로 내 욕구나 실컷 채워야지 싶었다.

“으응, 거기 말고… 좀 더 안쪽이요…. 허벅지 안쪽….”

“여가 아프다꼬? 여는 아플 리가 읎는데….”

부공태의 손이 내 허벅지 안쪽을 꾹꾹 누르듯이 더듬었다. 기분이 좋았지만 괴로운 척 얼굴을 더 구겼다.

“응, 거기요….”

“희한하네. 배우님은 몸이 쫌 이상합니더.”

“이, 이상해요?”

“이거 놓고 일로 와 보이소. 근육부터 좀 풀고 하입시더.”

부공태가 나를 매트 위로 데리고 갔다. 나는 신이 나는 마음을 감춘 채 쭈뼛거리는 척하며 따라갔다.

‘신난다! 스트레칭 해 줄 건가 봐!’

스트레칭을 한다는 말은 곧 몸이 밀착한다는 뜻이고, 그의 손이 내 몸 곳곳을 더듬는다는 뜻이렷다.

“여 엎드려 보이소.”

“네에.”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가 시키는 대로 매트 위에 얌전히 엎드렸다. 이내 그의 손이 내 어깨와 등을 쓸어내렸다. 솥뚜껑처럼 단단한 손이 근육 곳곳을 눌렀다.

“아이고, 근육이 마이 뭉칬네. 이칼 줄 알았다.”

“그쵸? 저 살살 풀어 주… 으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부공태는 경고도 하지 않고 내 굳은 근육을 폼롤러로 꽉꽉 누르기 시작했다.

“그, 그만! 잠깐! 잠깐만요! 악! 아악!”

“이래 뭉치가 우째 사노…. 마 걸어댕기기는 합니꺼?”

부공태의 아래 깔려 허우적거리길 바랐지만 이런 식으로 허우적거리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에게 깔려 소리를 지르는 소원도 이루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이 봐라. 돌띠다 돌띠.”

“으아아악! 아악!”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 댔지만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내가 듣기에도 끔찍한 비명은 아랑곳없이 내 뭉친 근육을 착실하게 풀기만 했다.

고통으로 눈앞에 별이 번뜩였지만 그의 앞에서 또 기절할 수는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번개 같은 통증이 온몸을 훑어서 감전이라도 되는 듯이 움찔움찔 떨었다.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데 이제는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왔다.

내 트레이닝을 위해 마련된 이 스튜디오는 별채처럼 증축을 해서 건물 밖에 따로 공간을 만든 것이었다. 나가면 실내가 아니라 바로 실외란 뜻이었다. 그래도 회사 내부 트레이닝 센터라면 누가 내 비명을 듣고 달려오기라도 했을 텐데, 집은 워낙 외딴곳에 있어서 소리를 질러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지나가던 파파라치가 내 비명을 듣고 녹음기를 켠다면 모를까.

“아흑, 아! 아아!”

“어허, 가마있어 보소. 손 차렷!”

정말로 아파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그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천만 관객의 마음을 흔든 내 눈물도 - 심지어 이건 연기도 아니잖아 -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무, 너무, 흑, 아파요….”

“예, 알겠심더. 손 차렷하고. 옳지.”

부공태가 내 양다리를 각각 자신의 무릎 아래에 끼웠다.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매트를 손끝으로 긁었지만 허우적거려 봤자 부공태의 몸에 짓눌린 채로는 다리 한 짝도 빼낼 수 없었다. 와중에도 그의 몸무게와 나를 붙든 근력은 설레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5분이 넘도록 고문당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케틀벨을 들고 오는 그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제 시작임을.

사랑은 고통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나는 고문당한 다리를 삐걱거렸다.

“아, 너무 힘들어요…. 현기증….”

“엄살 피우지 말고 빨리 일어나소.”

“손 좀 잡아 주세요….”

그가 나를 붙잡아 주기에 얼른 쓰러지는 척하며 가슴에 손을 짚었다. 말캉한 가슴살이 손바닥에 차고 넘쳤다. 대놓고 주무르면 티가 날 것 같아서 짚는 척만 하며 슬그머니 스쳤다. 다른 손으로는 복근을 짚으려 했지만 그의 손이 내 손목을 가둬 버렸다.

“에헤이, 퍼뜩 일나라카이.”

아쉽지만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니 괜찮았다. 내일은 꼭 저 단단한 복근을 만지는 데에 성공해야지.

본격적으로 다가올 고통이 두렵기는 하지만 착 달라붙은 민소매 셔츠 안으로 비치는 부공태의 복근 라인을 보니 어떤 고난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씩씩하게 몸을 일으키는데, 문득 부공태의 옆모습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본래도 무뚝뚝한 이미지인 얼굴에 순식간에 날이 서며 적대감이 드러났다.

“공태 씨?”

“잠시만예.”

벽 쪽으로 다가간 부공태가 창문을 열더니 거대한 몸을 휙, 밖으로 내던졌다. 기겁해서 달려가 보자 그가 담벼락 아래서 무언가를 붙잡고 있었다. 요즘 나를 괴롭히던 스토커였다.

“이 씨벌 새끼가…. 니 머꼬?”

내게 들려주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낮게 깔린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얼굴 역시 표정이 없었다.

한쪽 손으로는 침입자를 붙든 그가 다른 손으로 허리춤에 있던 무전기를 꺼냈다.

“침입자 확인. 즉각 지원 부탁합니더.”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가 프로페셔널했다. 운동 중이라 무전기는 당연히 안 챙겨 왔을 줄 알았는데.

“배우님, 창문 잠그고 안에 계시소.”

“괜찮으시겠어요…?”

이 스토커는 그래도 전보다 덜 악질 같기는 하지만 아주 끈질긴 놈이었다. 집 주소까지 찾아내서 아득바득 찾아온 걸 봐도 말이다.

“빨리 창문 잠그이소.”

묵직한 목소리로 하는 명령에 하는 수 없이 창문을 닫고 들어왔다. 어차피 경비업체와 계약되어 있어서 담을 넘어왔을 때 이미 경보가 울렸을 테니 지금쯤 벌써 사람들이 오고 있겠지.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새끼, 니 전에도 여 왔다가 내한테 걸맀제?”

부공태의 목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렸다. 전에도 왔었다고? 촬영장만 찾아온 줄 알았는데. 소름이 좀 끼쳤다.

“억!”

그때였다. 밖에서 부공태의 것인지 스토커의 것인지 모를 비명이 들려왔다.

“공태 씨, 괜찮으세요? 지원 오고 있대요?”

불안함에 덜덜 떨면서 휴대폰을 찾았다. 매니저 형을 불러야 할지 경찰을 불러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일단 휴대폰을 쥐는데, 밖에서 다시 “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태 씨!”

더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 도로 창가로 뛰어갔다.

“창문 열지 마이소!”

어떻게 알았는지 버럭 지르는 소리에 뻗었던 손을 멈췄다. 어쩌지. 일단 휴대폰으로 매니저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찰에 알렸다가 기자 놈들이 괜히 쓸데없는 기사를 낼 수도 있고, 경비업체에서 지금 지원을 보냈을 테니 경찰 신고는 매니저 형의 판단에 맡기는 게 맞을 터다.

‘왜 전화를 안 받아.’

평소에는 재깍재깍 받으면서 말이야.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시 창가 쪽으로 가는데 이번에는 낯선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으아아악! 이거 놔!”

뒤이어 쿠당탕탕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이번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부공태의 말을 도저히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부공태가 스토커를 붙들고 있었고, 스토커는 손목이 붙들린 채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악! 내 손! 손 부러지… 으악!”

보아하니 그의 어마어마한 악력에 손목이 붙들려 괴로워하는 듯한데, 당연하게도 부공태는 손을 놔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공태 씨, 괜찮으세요?”

부공태의 옆얼굴은 내가 봐도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저러다 사람 잡겠다 싶어 창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창틀이 워낙 높아서 힘들었다. 부공태는 대체 여기를 어떻게 단숨에 넘어갔담.

“안에 있으라 안 캅니꺼!”

겨우 창을 넘어가려는데 부공태가 내 쪽을 보며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끙끙거리며 창틀을 넘어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스토커 놈이 몸을 뒤트는가 싶더니 바닥에서 돌을 주워 치켜들었다.

“공태 씨, 조심…!”

내 외침과 거의 동시에 스토커 놈이 짱돌을 그의 머리에 찍었다. 퍽! 하는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으아아악! 공태 씨!”

나는 죽어라 비명을 질렀지만 놀랍게도 부공태는 머리칼 한 올 움직이지 않았다. 꼭 모기라도 앉았다가 날아간 것처럼 미동도 않은 그는 그저 더 무서운 얼굴로 스토커를 노려볼 뿐이었다.

“히, 히익….”

짱돌을 머리에 맞고도 꿈쩍 않는 부공태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스토커는 꼼짝도 하지 못했고, 이제는 손목의 고통마저 잊은 듯이 멍하니 그를 보기만 했다. 그동안 부공태는 끈 같은 것을 꺼내 놈의 손목을 외벽 가스관에다 단단히 묶었다. 저건 또 왜 갖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지만 능숙하게 나쁜 놈을 묶어 버리는 그가 멋있었다.

“공태 씨, 괜찮으세요? 머리….”

가까이 다가가자 무시무시하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그가 스토커를 단단히 재차 묶는 동안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머리를 살폈다.

“어떡해, 어떡해….”

“안에 계시라카이 와 나옵니꺼.”

“그래도 공태 씨가 짱돌로 머리를 맞는 걸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잘 빗어 넘긴 머리칼 사이를 열심히 살폈지만 핏기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어디가 돌에 맞았는지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부공태는 무전기로 다시 경비업체와 연락을 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왔다. 아버지가 한 번 업체를 바꾸면서 엄청 뭐라고 했다던데, 그래서인지 경비업체 직원들은 나를 보고 쩔쩔맸다. 경찰도 함께 왔다. 스토커는 일단 무단 주거 침입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을 거라 했다.

경찰과 이야기를 몇 마디 하고 트레이닝 룸으로 돌아와 보니 부공태가 혼자 정리를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스토커와 사투를 벌인 사람치고는 너무 태연해 보였다.

“공태 씨, 어서 병원 가요.”

“괘않심더.”

“뭐가 괜찮아요! 짱돌에 머리가 깨졌는데!”

“안 깨짔는데예.”

부공태는 아무렇지 않게 맞은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나는 다시 그의 머리를 살펴보려 했지만 그가 내 손목을 턱, 붙잡았다. 손목이 붙잡힌 것만 해도 심장이 떨리는데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이고, 지금 배우님 내 걱정해 주는 깁니꺼?”

아이를 보고 걱정하는 어른의 눈으로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이 심장이 요동쳤다. 사실 내가 그보다 훨씬 어린 건 사실이다. 거의 띠동갑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니 엄청 많이 나는 거 맞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돌로 머리를 맞으셨잖아요. 얼른 병원 가요!”

“아이고, 알았심더. 진정하이소.”

“그리고 다른 다친 곳은 없는지 어디 봐요!”

부공태를 마구 몰아붙이며 그의 몸 곳곳을 더듬었다. 복근에 착 달라붙은 민소매 셔츠도 멋대로 잡아당겼다.

“얼른 옷 벗어 봐요! 또 다친 곳 없나 보게!”

“에헤이, 와 이카노, 와 넘에 옷을 뺏낄라 카노.”

안타깝게도 부공태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보일락 말락 드러났다 만 복근을 보고 괜히 입맛만 버렸다 싶었다.

“그럼 병원이라도 같이 가요.”

“에헤이, 참 내….”

부공태는 정말로 멀쩡하다고 우겨 댔지만 커다란 돌에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맞았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이다.

“무슨 벽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단 말이에요. 검사받아 봐요. 네?”

“알았심더, 같이 가입시더. 하이고….”

다행히도 그는 병원에 가기로 했다. 내가 떼를 써서 아이를 달래는 듯이 어쩔 수 없이 가 주는 듯하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내가 부산을 떤 덕에 부공태는 CT도 찍고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그가 믹스 커피를 뽑아 주었다. 관리 때문에 믹스 커피는 마시지 않지만 그가 준 것이니 감사히 마셨다.

“가마 보고 있으믄 배우님은 참 다정하신 거 같심더.”

“…제가요?”

“마, 남자 성격은 얼굴 따라간다 카던데 배우님 보고 있으믄 딱 그 말이 생각난다 아입니꺼. 요래 곱게 생기 가꼬 맴도 고운갑다 싶고.”

보통 남자들은 나를 질투하거나 우습게 보거나 했다. 하지만 부공태는 절대 그런 적이 없었다. 따지자면 그가 나보다 훨씬 더 몸도 좋고 전형적으로 잘생긴 얼굴인데…. 역시 다 가진 사람은 질투도 할 필요 없단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당신이 나보다 몇 배는 더 멋있잖아요, 하는 말은 삼키고 그냥 쓰게 웃었다. 나한테 다정한 말 좀 하지 마세요, 그 말도 함께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부공태에게 놀랐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가벼운 뇌진탕 증상도 없고요. 약한 타박상 정도만 있는데 뭐 시간 지나면 낫는 거고요.”

의사는 나를 의심하는 투로 쳐다봤고, 부공태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거 보이소, 내가 괘안타 안 캤십니꺼.”

“아니, 진짜 돌에 맞았다니까요? 엄청 큰 소리까지 났는데?”

“네, 그러신 것치고는 전혀 상처가 없으시네요. 처방전 없으니 바로 집에 가셔도 됩니다.”

어안이 벙벙해 있자 부공태는 자랑스럽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 움츠려 보였다.

“지 대꿀빡이 쬐매 딴딴합니더.”

“예에…. 좋으시겠어요….”

안도의 의미인지 뭔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

스토커는 경찰에 송치되었지만 아버지에게 그 사실이 안 알려질 리 없었다. 결국 집까지 출두하셨다.

“혼자 사는 티가 나는구나, 집이.”

오자마자 한참 둘러보고 하신 첫 말씀이 그거였다. 나는 부공태와 나란히 얼어붙은 채 서서 아버지가 말씀을 이으시길 기다렸다.

“둘이 사는데 왜 혼자 사는 티가 날까.”

옆에서 부공태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로서는 아버지가 고용주이니 긴장될 만도 할 것이다. 하지만 스토커가 경비 시스템까지 뚫고 담을 넘어온 게 그의 잘못은 아니니.

거실을 쭉 둘러보던 아버지의 시선이 나와 부공태에게 차례대로 머물렀다.

“본가로 들어와라.”

뒤이은 말에 움찔했다. 본가에서 지내면 나도 편하고 좋긴 하다. 하지만 그만큼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버지 집에는 사람이 많았다. 가사 도우미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상주 경호원들까지.

그리고… 그 말은 곧 부공태를 해고할 수도 있다는 뜻도 되었다.

“스토커가 뭐 경호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달려드나요? 원래 눈 뒤집힌 놈들인데요. 제가 좀 더 주의할 테니….”

나를 빤히 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말을 뚝 멈췄다. 나는 아버지에게 대든 적이 없었다. 좀 엄하셔도 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잘 대해 주시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맡은 액션물에서 아버지의 명령으로 역할을 바꿔 맡게 되었을 때도, 아버지의 걱정으로 인해 해외에서 작품 활동을 할 기회를 놓쳤을 때도 원망하지 않았다. 다 나를 위해서, 나를 걱정해서 하는 일임을 알았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반박하지 못했다. 부공태와 둘이 지내는 지금이 좋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스토커 때문에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아시면 얼마나 속상해하시겠니.’

아버지는 항상 내게 엄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엄마 자식인 나를 잘 키워야 한다는 부채감, 압박감도 갖고 계시리라.

‘엄마가 보신다고 생각해 보렴. 엄마가 너를 얼마나 아꼈는데.’

오갈 곳 없던 나를 지금까지 키워 준 것도 내 양아버지고, 이렇게 유명한 배우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버지 덕분이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아버지를 거스른단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믄 안 되겠습니꺼?”

장인어른 만난 사위처럼 옆에서 바짝 긴장해 있던 부공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와 아버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제가 배우님을 좀 더 밀착해서 보호하믄 어떻겠십니꺼. 잠도 한방에서 자고예.”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제가 이 집에서 생활하믄서 가마 지켜보이까네, 스토커가 작정하고 들어온다 치믄 제일 위험한 때가 밤인 거 같습니더. 제가 배우님 방에서 같이 자믄 안전성이 훨씬 올라갈 낍니더.”

아버지의 시선이 부공태를 빤히 읽었다. 부공태는 잔뜩 긴장한 눈치였으나 나는 알고 있었다. 저건 허락의 시선이다.

“저 이제 새 촬영도 들어가요, 아버지.”

조심스레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 돌아섰다.

“밥 먹으러 한 번씩 와라.”

됐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며 부공태에게 찡긋, 한쪽 눈을 감았다 떠 보였다.

“와 눈을 그캅니꺼…?”

속삭이는 부공태의 배를 손등으로 툭 쳤다.

“아! 배는 와 때리는교….”

몇십 미터 밖에서 들리는 스토커 기척은 금세 알아차리면서 은근히 눈치 없는 것도 그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며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아버지는 부공태를 꽤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단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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