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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탱이 사냥법 1권-미련 곰탱이 (1/18)

곰탱이 사냥법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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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곰탱이

눈앞에 이상형의 남자를 매일 구경하며 산다는 것. 그리고 그 남자가 지독한 헤테로라는 것.

이것은 스물세 살 주희설의 인생에 처음으로 닥친 난관이었고, 나 주희설은 나름대로 그 난관을 헤쳐 나가고자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사람 마음을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접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올블랙 슈트를 입은 끝내주는 보디 라인, 개가 뛰어놀아도 될 만큼 든든한 등짝, 거대한 어깨에 비해 지나치게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인이어가 잘 어울리는 목선과 각이 진 어깨 라인.

나도 모르게 멍하니 시선을 주고 있자니 저만치 앞에 걷던 사내는 나를 돌아보았다. 짙은 눈썹에 선이 굵은 이마, 짙은 쌍꺼풀과 이지적인 새카만 눈동자. 곧은 콧대와 살이 없는 광대뼈, 잘생긴 턱까지.

시선을 마주한 그가 미간을 구겼다. 인상을 쓰는 모습도 섹시하다. 잠깐 감상하느라 멍해진 내게 그가 솥뚜껑 같은 손을 휘휘 저었다.

“마, 배우님요! 퍼뜩 안 오고 뭐 하는교!”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오십 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속으로만 한숨을 푹 쉬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한쪽 손으로 인이어를 누른 채 마이크를 조작했다.

“배우님 이동합니데이.”

복도를 빠져나가자마자 와아, 하고 함성이 쏟아졌다. 막막하던 기분을 삼키곤 활짝 웃어 보였다.

“네, 지금 주희설 씨가 막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손을 흔들며 포즈를 취하고 있네요.”

“함성 소리가 이곳 레드카펫 앞을 메우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사랑을 외친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오직 나만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손짓과 눈빛 하나하나 수많은 눈빛에 노출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오직 한 사람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

나는 지독한 짝사랑을 앓고 있었다. 내게 관심이 없는 남자에게 빼앗긴 마음은 봄바람처럼 지독히도 살랑거렸다. 멋대로이고, 얄밉고, 간질간질하고, 또 달았다.

***

열 살에 키즈 모델로 데뷔한 나는 어릴 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성인이 되기 훨씬 전에 배우로 전향했고, 첫 영화가 개봉한 해에는 아역상을 휩쓸었으며 첫 조연을 맡았을 때에는 우수 조연상을 거머쥐었다.

물론 내 짧은 인생에도 굴곡이랄 게 있기는 했다. 친부가 자살하고 친모는 내가 성인이 된 직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스토커에게 시달리다가 죽을 뻔도 했다. 그러나 이 정도 사건이라면 겪는 사람도 꽤 많으므로 딱히 특별할 게 없을 터다.

나는 운이 좋아서 친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좋은 양아버지를 만났다. 양아버지는 내가 배우로 자립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주셨다. 양아버지는 한국 사람이면 다 알 법한 대기업의 회장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양아들에게 이득을 주거나 하는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발목을 잡는다면 너라도 예외는 없다. 그러니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라.’

그렇다고 아버지 노릇을 안 하시거나 한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도 으리으리하게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참석해 주었고, 일전에는 먼저 시놉시스를 보시고 내게 도움이 안 될 작품이라고 과감하게 먼저 쳐 내시기도 했다. 나를 걱정해서 그런 것임을 알았다. 단지 양아들보다는 사업이 우선이었을 뿐.

어쨌든 나는 사소한 몇 가지 굴곡을 제외하고는 늘 행복하게 자랐다. 하고 싶은 연기를 하면서, 만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스토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았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고, 찍는 영화마다 시놉시스와 다른 사람들의 연기가 좋아서 운 좋게 대박을 쳤다.

‘만인의 막냇동생’이던 나는 조금씩 나이에 맞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천만 배우’라고 불린다. 천만 관객 영화에 출연한 것도 운이 좋아서였다.

수많은 운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딱 하나 내가 타고나지 못한 운이 있었다. 바로 건강이었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다치기도 자주 다쳤다. 뼈가 약해서 조금만 넘어져도 골절상을 입곤 했다. 나 때문에 촬영이 지연된 적도 많았다. 액션 연기를 직접 소화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이가 들면서 그나마 건강은 노력으로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양아버지의 걱정은 여전했다. 내가 다치지 않도록 촬영장에 꼭 사람을 보내어 보살펴 주시고, 사전에 시놉도 검토했다.

몸이 약하다고 소문이 나서 조금이라도 격한 신은 무조건 대역을 써야 하는 건 좀 아쉬웠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다소 과잉보호라고 해도 좋을 아버지의 방침 덕분에 나는 연애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어디서 뭘 하는지 꼬박꼬박 보고하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딱히 연애에 욕심이 있진 않았다.

다만 나도 2차 성징을 거친 어엿한 남자이므로 성욕이라는 게 있었다. 단 한 번도 섹스나 그 비슷한 것을 해 본 적 없는 나의 성욕은 묘하게 틀어졌다.

아무리 경험이 없고 숙맥이라도 내 성적 취향이 남들과 다르단 사실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누구에게 상담을 요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곤란한 성적 취향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피학성’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피학성이 아니었다.

‘나보다 훨씬 큰 사람한테 숨도 못 쉬게 짓눌리고 싶어….’

언제부터였을까. 어마어마하게 덩치가 큰 사람에게 꽉 짓눌리는 상상을 하면 숨이 막히게 좋았다. 그래서 내 이상형은 ‘어마어마하게 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붙잡혀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당하고 싶었다.

같은 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이었다가 연습이 너무 힘들어서 때려치우고 일반 회사에 사무직으로 다니고 있는 이범산은 그나마 내 제일 친한 친구였고, 연애 상담 비슷한 것을 할 수 있는 상대였다.

“야, 연애는 무슨. 너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이랑 가깝게 지내봐. 너희 아버지 난리 나신다. 아버지만 난리가 나시겠냐? 전 국민이 난리가 나겠지.”

이범산의 말이 맞았다. 나는 연애를 할 수 없는 몸이었다. 하더라도 조용히 남들 모르게 해야겠지. 여자를 사귀어도 난리가 날 판에 덩치 커다란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결과는 안 봐도 끔찍했다.

“그러니까 괜히 여러 사람 울리지 말고 나는 수도승이다, 생각하면서 살아.”

“연애 욕심 없다니까….”

그래, 내가 욕심 있는 건 연애가 아니라 다른 것이지.

하지만 ‘나를 짓눌러 줄 덩치 큰 남자’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배우 주희설이 자기를 깔아뭉개 줄 사람을 구한다고 공고를 할 수도 없고 말이다.

내가 덩치 큰 남자에게 깔리는 것을 좋아한단 사실을 알게 된 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바로 외국인들이 나오는 프로 레슬링을 우연히 보고서였다.

프로 레슬링이 뭔지는 알지만 제대로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스케줄 사이에 공백도 있고, 다음 작품에 레슬링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서 자료 조사 겸 본 것이었다.

제대로 본 프로 레슬링은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그리고 거칠었다. 몸이 좋은 남자들끼리 살을 맞대며 싸우는 모습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끝내준다…!’

그리고 그날, 나는 외국인 프로 레슬러들에게 깔리는 꿈을 꿨다. 말 그대로 뭉개지는 꿈 말이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속옷이 축축한 걸 깨닫고 몹시 놀랐다.

‘나 이런 취향인가 봐.’

처음으로 내 취향을 알게 된 날이었다.

어쨌든 연애나 섹스 따위 포기하고 이범산의 말대로 수도승처럼 살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인 지도 좀 오래되었다. 그러니 내 성적 취향이 조금 이상하단 사실은 영영 아무도 모르리라 믿었다.

최근 들어 아버지의 걱정이 그래도 줄어들었나 싶었는데, 또 스토커 하나가 들러붙었다. 나랑 죽고 싶다는 팬레터를 보내고 촬영장을 찾아온 이번 스토커는 그래도 저번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일전의 기억 때문인지 아버지께서는 내게 ‘밀착 경호원’을 붙이셨다.

바로 그게 부공태였다.

“마, 잘 부탁드립니더. 부, 공, 태라 캅니더.”

거구의 청년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단정한 정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게 웬 굴러 들어온 떡이야.’

큰 덩치에 온몸 빼곡하게 들어찬 근육, 그리고 잘 빗어 넘긴 포마드 헤어가 어울리는 끝내주는 얼굴.

“태권도, 유도, 합기도, 검도, 몬 하는 운동은 없고예, 웬만한 사람은 한 손으로 들 수도 있습니더. 이제 걱정 마시고 배우님 안전은 저한테 맡기십소.”

부공태라는 남자는 내가 늘 상상하던, 나를 깔아뭉갤 수 있는 남자였다.

“배우님, 근데예, 실제로 뵈니까 마 테레비로 보는 것보다 인물이 훨씬 더 훤하네예. 영광임더.”

나를 보고 씩 웃는 이 덩치 크고 사람 좋은 부공태라는 인간을 보자마자 나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이 남자한테 죽도록 깔리고 싶어!’

한마디로 망했다는 거다.

***

시사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차로 이동했다. 나를 호위하는 경호원의 숫자는 때에 따라 다르지만 오늘은 서른 명 정도.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지키는 이는 당연히 부공태다.

“쫌 비키 보이소, 다칩니더, 비키 보이소.”

사실 내 팬들은 부공태를 별로 안 좋아한다. 워낙 다혈질인 데다 내 근처에는 절대 오지 못하게 하니까.

“마! 절로 비키라 안 카나! 사람 말이 안 들리나! 확 마 칵!”

그래서 ‘주희설 경호원 인성 논란’, ‘주희설 경호원 욕설’ 등이 실시간 검색어를 장식한 적도 있었다.

그때 연관 검색어로 ‘주희설 경호원 조폭’도 떴었지, 아마. 부공태는 언뜻 보면 정말 조폭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조폭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경남 어느 시골에서 태어나 성실하신 부모님 아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체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나처럼 운이 좋은 케이스가 아니라 철저한 노력파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주먹부터 나갔다고 했다. 아마 욱하는 성격도 넘치는 정의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마, 내는예, 약자를 괴롭히는 새끼들은 마 두 눈 뜨고 못 보겠심더. 디지게 패 뿌고 나도 디지든가 해야지.’

나는 그의 의협심이 부럽고 또 멋있었다.

‘어쩜 몸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성격까지 멋있지?’

물론 가끔 그 불같은 성격 때문에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지만 말이다.

‘배우님요! 퍼뜩 온나 안 캅니꺼! 버리고 가삔다!’

…목소리가 커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이상형이자 유일한 이상형이었고, 거의 하루 24시간을 붙어 지낸다고 봐도 무방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짝사랑하는 상대와 매일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

내 집은 경기도 외곽의 한적한 어느 동네에 위치한 단독 주택이었다. 방이 일곱 개인데 그중 하나는 부공태의 방이었다.

입주 경호원은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하는 게 내 생각이었지만 아버지의 고집을 꺾기 힘들뿐더러 부공태 본인도 내 집에서 지내는 게 좋다고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콩만 한 옥탑방에 비하면 배우님 집은 대궐’이랬다.

그래, 이왕 같이 지내는 것이니 이렇게 된 이상 즐기자는 심정으로 나는 편하게 살기로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공태의 완벽한 몸을 매일 구경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니까. 심지어 그는 내 앞에서 헐벗고 다니기까지 했다.

“아, 공태 씨! 옷 좀 입고 다녀요….”

하루는 샤워하고 드로어즈만 입고 나온 그를 보고 식겁했다. 정작 몸을 보인 그는 외려 나를 이해 못 하겠단 표정을 했다.

“와예. 머시마들끼리 뭐 내외를 해쌌노. 덥어가 그랍니더.”

한눈에도 묵직해 보이는 하체에 눈이 가지 않도록 시선을 피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가 확실한 헤테로란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좀 슬프단 게 동거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그에게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뒤로는 나도 그냥 편하게 다녔다. 어차피 집에는 둘밖에 없고, 일을 도와주는 분들도 다 남자분이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뒤 거실에서 TV를 보는 그와 마주쳤다. 나를 본 부공태는 입으로 팝콘을 막 가져가려던 손을 뚝 멈추곤 나를 놀란 투로 훑었다.

“와, 배우님 허벅지가 마….”

두근. 심장이 반응했다. 내내 나를 ‘머시마’로만 보던 부공태였는데, 이 눈빛은 명백하게 달랐다. 설마 이거….

“마 닭 다리 맨키로 허옇네예. 머 발랐심꺼?”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네에, 보습제… 발랐어요.”

한숨을 쉬며 그의 옆에 풀썩 앉았다. 부공태가 내민 팝콘을 조금 집어 먹었다.

“하이고, 배우 하기 빡세지예. 다리에도 머를 처발라야 되고.”

“공태 씨도 바르실래요? 매끄럽고 좋아요.”

“마 됐심더. 지는 스킨도 귀찮아가 안 바릅니더.”

얼굴에 아무것도 안 바른다는데 부공태의 피부는 끝내주게 좋았다. 매일 관리를 받는 나보다 나을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빤히 쳐다본 모양이었다. TV를 향하던 그의 시선이 다시 내 쪽을 향했다. 그리곤 눈을 휘며 씨익 웃었다.

“와예? 내가 그래 좋십니꺼?”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감추려고 일부러 과장되게 손을 휘두르며 웃었다.

“무슨….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 인간, 정말 헤테로 맞긴 맞나? 원래 다른 남자들도 이렇게 장난을 치나? 눈웃음이 가슴에 붙박인 듯이 오래 남았다. 요동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공태는 다시 TV를 보며 웃었다.

그날 나는 직감했다. 어쩌면 이 동거는 좀 많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나한테만 말이다. 팝콘 조각이 꺼슬꺼슬하게 입천장을 스쳤다.

***

새로 주연을 맡은 영화는 멜로였다. 최근 들어온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은 뒤 나름대로 고심하고 기획사와 상의하면서 고른 작품인데, 어쩌다 보니 하필 맡은 역이 짝사랑하는 남자였다.

‘왜 하필 짝사랑 남주야….’

지금이라도 다른 거 찍는다고 할까, 싶었지만 계약서 사인 직전에 파기하는 건 프로답지 못한 일이니 그냥 찍기로 했다.

‘이입은 잘되겠네….’

부공태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사 회식 자리에서 야무지게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는 운동 말고도 잔재주가 좀 많은 편이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고기 굽기였다.

“생선 꿉는 거 하고예, 고기 꿉는 거 하고예, 마 머든 간에 노릿노릿하게 꿉는 거 하나는 쬐매 잘합니더.”

그래, 그래서 내 마음이 이렇게 불판 위에 오른 듯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모양이다.

“배우님요, 이번에도 멜로 찍는담서예?”

혼자 울적하게 제로 칼로리 사이다나 마시고 있자니 그가 어느새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부공태의 덩치가 너무 커서 구석에 앉은 나는 거의 벽에 짓눌리다시피 했다.

“저 멜로 두 번째인 거 어떻게 아세요?”

약한 몸 때문에 액션 연기를 혼자 소화하기는 힘들지만 ‘페이스가 너무 곱상해서’ 멜로는 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주인공인 멜로는 거의 없었다.

아주 예전에 찍은 게 하나 있기는 한데, 흥행에 처참하게 실패하고 극장에서 금방 내려가는 바람에 내 팬들도 내 필모그래피에 그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부공태가 그걸 안다고? 거짓말이겠지.

“알지예! ‘천상에서 내려온 그대를 만나기 위해 내가 이래 맴이 아팠구마’ 내가 그 대사를 얼매나 좋아하는데.”

…진짜 봤나 보네. 내 흑역사나 다름없는 영화를 그가 봤다니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잊어 주세요….”

“대배우가 와 이래 주눅이 들어가 있노! 어깨 딱 펴고! 고기 쫌 마이 무이소. 배우님은 살 쫌 찌야 된다.”

퍽! 퍽! 치는 힘에 상체가 앞으로 퍽! 퍽! 흔들렸다. 아픈 티도 못 내고 그가 건네주는 고기를 열심히 씹었다. 목이 막혔지만 그는 알지도 못하는 듯 이미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나는 안중에도 없는 그를 옆에 둔 채 몰래 한숨만 내쉬었다. 술이라도 펑펑 마시고 싶은데,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술을 많이 마시면 반드시 탈이 났다. 그나마 허락된 양의 맥주를 조금씩 홀짝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야, 김 실장님 이두가 장난 아이네! 여윽시 남자는, 어? 근육이 있어야 된다카이.”

다른 사람과 운동 이야기를 하는 그의 옆에서 괜히 내 빈약한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요즘 벌크업 열심히 해서 부공태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근육 라인은 생겨서 다행이었다….

“와, 내 오늘 사옥에서 한종수 배우 봤다 아인교. 윽수로 멋있데.”

한종수는 우리 회사 소속은 아니지만, 같은 계열사 소속이었다. 그래서 가끔 우리 회사에 들를 때도 있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는 두 살 많지만 한참 까마득한 후배 배우다. 나를 보고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존대하는 게 어쩐지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속내를 잘 모르겠는 사람이라 은근히 피하고 있었다.

“우째 그래 몸이 좋노 몰라. 생긴 것도 조각맨키로 맨들맨들하이 잘생깄꼬.”

‘공태 씨가 몸도 더 좋고 얼굴도 더 맨들맨들한데요.’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꾹 참았다.

한종수는 나보다 훨씬 몸도 좋고, 얼굴선도 훨씬 더 굵어서 카리스마 있는 외모였다. 곱상하다는 말만 듣는 나와는 다른 남배우였다.

그래서 나는 부공태가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게 싫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한종수 같은 몸과 얼굴을 가지진 못할 테니. 아무리 운동을 해도 타고난 뼈대가 가늘고 덩치가 작은 편이라 풍채 좋고 힘 있는 이미지는 가지지 못했다.

“공태 씨 한종수 씨 좋아해? 의외네. 왠지 여자 배우만 좋아할 것 같은데.”

“하모요. 당연하이 여자만 좋아하지예! 그냥 같은 남자가 봐도 믓있다 카는 기지.”

그렇다고 못을 박을 필요는 없을 텐데. 사람이 원래 살다가 성 지향성이 바뀌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닌가?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그냥 꾹 참았다. 목으로 넘어가는 고기가 고무처럼 느껴졌다.

그가 다른 사람과 하는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단백질 셰이크에서 유도 낙법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태권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그가 어느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앞차기가 마 제 주특깁니더. 요래 발을 요래, 요래 해가….”

무릎을 착착 접어 가며 거대한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던 부공태가 어느 순간 다리를 쫘악! 뻗었다.

“똬이야쉬!”

희한한 효과음과 함께 구두 신은 발이 허공을 날았다가 제자리로 착지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랐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자 그는 답지 않게 수줍어하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공태 씨, 완전 멋있어요.”

진심으로 감탄하자 부공태가 무뚝뚝한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입니더. 대배우님 경호 맡을라 카믄 이 정도는 기본 중에 기본입니더.”

표정 없이 근엄하게 말하면서도 얼굴은 살짝 붉어진 게 미치게 깜찍했다.

‘진짜 곰돌이 같아.’

거대한 어깨와 가슴, 이마를 갖다 박으면 멍이 들 것 같은 팔뚝까지. 부공태는 아무리 봐도 귀여운 곰 인형 같았다. 물론 곰 인형보다는 훨씬 딱딱하겠지만….

부공태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술을 계속 마셨다. 나는 그가 술을 마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옆에 두고 다른 사람과 기분이 좋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몰래 그의 앞에 놓인 양파절임을 다 먹어 버렸지만 그는 그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회식이 끝난 뒤,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매니저 형이 나와 부공태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부공태는 가는 동안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경상도 사투리가 심해서 반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마 술이 이빠이 치해가…. 내가 이래 술이 야간 사람이 아인데….”

“괜찮아요, 그렇게 마시면 누구든지 취할 거예요.”

내가 본 것만 해도 소주 일곱 병은 넘게 마셨다. 옆으로 오기 전에도 벌컥벌컥 마시는 걸 봤으니 아마 실제로는 훨씬 더 마셨겠지.

“아, 배우님예…. 미안합니더…. 머리가 자꾸 으지릅네….”

평소에는 놀라운 무게 중심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오늘은 정말 단단히 취했는지 차가 흔들릴 때마다 이리저리 치댔다. 족히 백 킬로그램은 넘어갈 것 같은 부공태의 몸뚱이가 그때마다 나를 마구 짓눌렀다.

“공태 씨, 우리 희설이 다 찌그러지겠다.”

“괜찮아요, 형.”

매니저 형이 진심으로 걱정된단 투로 말했지만 나는 그에게 짓눌리는 게 좋았다. 그가 다른 사람과 즐거워하는 걸 봤을 땐 기분이 나빴는데, 취한 채로 내게 몸을 기대니 불쾌감이 다 날아갔다. 그의 단단한 팔뚝이 나를 으깨 버릴 듯이 마구 밀쳐 댈 때에는 희열마저 느꼈다.

“내가 2층까지 올려다 줄까?”

“괜찮아요. 제가 부축해서 데려가면 돼요.”

“안 될 것 같은데….”

부공태의 방은 2층에 있었지만 나는 사실 그를 2층까지 끌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매니저 형이 도와준다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거대한 덩치를 열심히 끌고 거실로 들어가다 보니 부공태의 몸무게가 진심으로 궁금해질 정도였다. 동시에 가슴이 뛰기도 했다. 침대에서 이렇게 무거운 몸뚱이에 짓눌리는 기분은 대체 어떨까….

“아아, 배우님예…. 배우님 와 이래 쪼만하노….”

“공태 씨가 큰 거거든요…. 잠깐, 신발 좀 벗기고…!”

신발을 벗기자마자 얼른 발 사이즈를 확인했다. 발바닥에 적힌 숫자는 무려 305mm였다.

‘완전 섹시해…!’

나는 250 신는데. 현관에 늘어진 부공태의 발에 내 발을 슬쩍 대 보았다. 크기 차이가 실감 났다.

“어어, 배우님예….”

“네, 네.”

자꾸 부르는 게 부공태의 술버릇인 모양이었다. 그의 나머지 신발도 벗기고 거대한 몸뚱이를 내 방까지 끌고 갈 방법을 고안했다. 뭐 수레 같은 거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취한 사람을 상대로 파렴치한 짓을 벌일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냥 침대에서 그의 거대한 몸뚱이를 안고 자기만 할 생각이었다. 취해서 기억도 못 할 테니까. 설령 기억한다고 해도 내가 너무 힘들어서 2층까지 데려다주지 못했다고 하면 된다.

“자, 공태 씨, 조금만 일어날까요?”

“예!”

내 말과 동시에 그가 늘어져 있던 몸을 갑자기 벌떡 일으켰다. 휘청거리며 부엌 쪽으로 걸어가려 하기에 얼른 달려가서 부축했다.

“잠시만요, 공태 씨. 어, 어… 으악!”

그의 옆구리에 몸을 끼우는데 체중이 고스란히 실려 왔다. 그리고 현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실 입구에 그와 함께 쓰러졌다.

“윽….”

숨이 어마어마하게 막혔다. 등으로 부공태의 뜨끈뜨끈한 체온과 몸무게가 고스란히 실려 왔다.

‘엄청 무거워!’

몸은 괴로운데 머릿속은 희열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

“흐억, 헉….”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나는 헐떡거리며 웃었다. 부공태가 코를 골기 시작하는 소리도 평화롭게 들렸다.

‘기분 끝내주게 좋다!’

부공태의 체취와 묵직한 몸무게가 미치게 좋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내게 가해지는 압박감을 온몸으로 즐겼다.

하지만 그도 잠시, 슬슬 숨이 ‘진짜로’ 막혀 오기 시작했다.

‘자, 잠깐, 좀 많이 무거운데….’

가슴이 짓눌려서 들숨 한번 쉬기도 힘들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좋긴 한데, 진짜 좋긴 한데, 한 번만 제대로 숨 쉬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온몸이 산소 부족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내 몸을 압축기처럼 짓누른 부공태에게 비키라는 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말로 호흡 곤란이 오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흐헉…!”

기절인지 잠인지 모를 것이 까무룩하게 머릿속을 뒤덮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침대 위에 있었고 몸에는 시트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기분 좋게 뒤척거리던 나는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반짝, 눈을 떴다.

‘적나라하게…?’

이불을 화닥닥 들어 보았다. 허연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언제 벗었는지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뭐야! 뭐야! 왜 알몸인데, 나!’

주변을 잽싸게 둘러보았지만 속옷도, 옷도 보이지 않았다. 내 방은 맞는데 옷을 벗은 기억이 나질 않아 울고 싶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나는 심장이 약한 편이라서 크게 놀라면 안 된다. 똑바로 앉아 심호흡을 하다 보니 조금씩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부공태가 술을 많이 마셨고, 매니저 형이 우리 둘을 데려다줬고, 그리고 나는 취한 부공태를 내 방으로 끌고 가려다가….

‘기절했어?!’

숨이 심하게 막혔던 건 기억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기절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럼 부공태는 어디 갔지? 그리고 옷은 왜….

침대에서 조심조심 일어나 옷장에서 속옷을 꺼냈다. 다리 하나를 꿰는데 벌컥 문이 열려 기껏 심호흡해 놓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배우님요옥!”

“아아악!”

귀청도 떨어질 뻔했다. 문을 연 부공태가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속옷으로 얼른 하체를 가렸다.

“아, 진짜 놀라서 심장 멎는 줄 알았잖아요!”

“이제 좀 괜찮십니꺼?”

묻는 목소리도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머리가 울릴 정도였다. 진정하라는 투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혹시 나도 모르게 부공태를 덮치거나 하는 불상사가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런 중대한 일이 있었는데 기억 못 한다면 정말로 슬플 것이다.

“새벽에 눈 떠 보이까네 배우님이 내 밑에 깔리 가꼬 기절해 있었다 아인교. 와, 내 식겁했다카이. 김 슨새임 부르고 마, 난리도 아이랐다.”

김 선생님은 내 주치의였다. 부공태가 저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흔들고 깨웠을 텐데 그래도 깨지 않았다니. 제대로 기절했나 보네. 사람이 숨을 조금 못 쉬었다고 그렇게 막 기절해도 되는 건가.

와중에도 그의 무게를 즐길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고생하셨어요…. 저, 팬티 좀 입게 나가 주실래요?”

나름대로 운동은 했지만 부공태보다 훨씬 빈약한 가슴은 가리지도 못한 채, 그의 시야에 내 엉덩이가 보이지 않도록 슬금슬금 물러나며 어색하게 웃었다. 부공태는 당연하게도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괘안타! 머 사내 자썩덜끼리 내외를 해쌌노! 그냥 입으소!”

그래, 그래…. 사내자식들끼리 내외할 필요 없지…. 나는 눈물을 삼키며 짝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팬티를 꿰입었다. 티셔츠도 찾아 걸쳤다. 그동안 부공태는 안절부절못하며 내가 또 쓰러지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그런데 제 옷은… 혹시….”

설마. 불안감을 누르며 그를 보는데 부공태가 헛기침을 했다. 내외하지 말라더니 옷을 벗긴 게 부끄럽긴 부끄럽나 보네. 귀여워라. 곰돌이 같아.

“그기…. 눈 떠 보이까네 내가 잠결에 토를 해뿌 가꼬…. 배우님 얼굴하고 마 다 엉망인기라. 그래가 씻긴다꼬….”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내 알몸을 본 일 따위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내 몸에 토한 것을 미안해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미안합니더. 내가 술이 그래 약안 편이 아인데 어제는 와 그랬으꼬….”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다른 사람이면 괜찮다는 말이 빈말이었을 테지만 내 얼굴에 묻은 토사물을 허겁지겁 닦는 그를 떠올리자 나는 진심으로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나를 홀랑 벗겨서 그… 아랫도리까지 봤다는 사실은 좀 창피했다. 이런 식으로 알몸을 오픈하게 되다니.

“아이고, 내가 대배우님 귀한 얼굴에다가 몹쓸 짓을 해뿌 가꼬…. 진짜로 미안합니데이.”

“정말 괜찮다니까요.”

토사물 말고 다른 것을 뿌려도 괜찮은데 말이다…. 생각이 더 엄한 곳으로 튀기 전에 얼른 접어야 했다.

“뭐… 그리고 별일은 없었죠?”

“배우님이 기절해 뿐 게 별일이 아이고 머꼬!”

또 버럭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아, 진짜… 공태 씨 목소리 때문에 또 기절하겠어요….”

“배우님, 안 되겠심더. 앞으로 내랑 체력 키우기 특별 훈련 하입시더.”

“네? 갑자기요?”

“자꾸 이래 픽픽 쓰러지가 우째 사노. 체력 좀 키웁시더.”

운동은 내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다. 아무리 빠듯하게 해도 남들만큼 결과가 안 나와서다. 담당 트레이너들도 혀를 내두르며 안타까워하기 일쑤였다. 부공태라고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부공태에게 어설픈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비록 기절한 상태로 알몸까지 보였다지만, 그는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을 테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설령 그가 나에게 연애 감정 비슷한 것도 영영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싫어요. 지금 받는 트레이닝만 해도 벅차요.”

“하이고, 거 러닝 머신 쬐매 뛰고 스트레칭 겉은 거 요래 하는 기 머 트레이닝이라꼬. 내랑 제대로 운동 함 해 보입시더.”

스트레칭이라니…. 내가 죽어라 하는 스쿼트, 케틀벨, 덤벨 등이 그에게는 스트레칭 수준인가 보다.

“싫어요…. 지금 스트레칭이라고 하시는 그것도 저는 버겁단 말이에요. 더 힘들기 싫어요.”

“지가 만다꼬 우리 배우님을 힘들게 하겠십니꺼?”

뒤이어 내뱉은 말의 어조는 무뚝뚝했으나 나는 어쩐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함부로 두근거리지 말아야지, 내 멋대로 그에게서 다정함을 찾지 말아야지 늘 다짐하지만 오늘도 실패다. 짝사랑이란 그런가 보다. 어차피 하루에도 몇 번씩 실패할 거 알면서도 자꾸 다짐하는 거 말이다.

“…진짜요?”

“하모요. 마 지가 밀착 코칭 해 드리겠심더.”

‘밀착’이란 말에 어쩔 수 없이 또 가슴이 뛰었다. 내가 아는 그 ‘밀착’이 맞겠지?

“저 운동 진짜 소질 없어서 공태 씨 갑갑해하실 거 같은데….”

“지랑 하믄 없던 소질도 생길 겁니더.”

생각해 보면 그와 매일 살을 맞대고, 땀 찬 그의 가슴에 기대어서 투정을 부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어설픈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욕심보다 육욕이 슬그머니 앞서기 시작했다.

“공태 씨가 직접 몸, 아니, 포즈도 잡아 주시고, 하시는 거죠? 두 손으로 ‘직접’요.”

“하모예.”

“…그럼 해 볼까요….”

눈치를 보면서 운을 떼자 부공태는 뻑! 하고 소리 나게 박수를 치고는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여윽시 배우님. 내일부터 바로 하입시데이.”

나가는 부공태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어쩌다 저런 사람을 좋아하게 됐나 몰라….”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나를 위해서 온몸으로 인파를 막아주었을 때였을까. 혹은 나를 보고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 주었을 때였을까. 아니면 넘어질 뻔한 나를 붙들어준 때였을까.

아니다, 어쩌면 처음 보는 순간부터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시기가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단단히 반했다는 사실이지.

그래. 저 몸에 저 얼굴이면 누가 안 좋아하겠어. 다들 좋아하겠지. 여자든 남자든 말이다. 곧 다시 생각해 보면 부공태의 솔로 탈출은 시간문제라는 뜻이다. 누가 낚아채 가든 저런 남자는 금방 임자가 생길 것이다.

또 한숨이 났지만 그래도 내일부터 그의 몸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금세 다시 기뻤다. 기뻐야만 했다. 짝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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