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8/18)

<1>

눈을 감고 있던 라영이 눈꺼풀 위로 눈 부신 빛이 내리쬐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다 결국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흐릿한 주변을 살폈다. 계속 긴장한 상태여서 잘 알지 못했지만 결혼식과 오랜 비행으로 몸이 무척 피로했던 건지, 전용기와 배를 갈아타고 태평양의 이름 모를 섬의 아름다운 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이헌이 스푼 채로 입에 넣어주는 음식 조금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던 라영이었다.

햇빛은 침실 유리창에서 들어오고 있었고, 정신없이 잠에 빠지느라 우드 블라인드를 닫지 않고 잤던 것이 그대로 자연 기상을 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라영은 뻑뻑한 눈을 비벼대며 방 안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짙은 색의 나무 가구와 원색적인 다양한 색을 다채롭고도 조화롭게 배치한,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인테리어였다. 열대 지방에서만 자라는 분홍색과 빨간색의 커다란 꽃들이 화병을 장식하고 있는 것도 모두 좋았다. 한국에서는 웬만하면 볼 수 없는 인테리어라 정말로 외국에 와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허리를 세워 앉아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비강으로 들어오는 향기 또한 이국적이다. 우리가 정말 허니문에 와 있구나. 라영은 아직도 건조한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허공과 방 안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영은 고개를 돌려 옆에 엎드려 누운 길고 커다란 자신의 알파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항상 잠이 많은 것은 자신이어서 이헌의 잠든 모습은 쉽게 볼 수 없었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폭력적인 햇빛에도 깨지 못하고 푹 잠들어 있다니. 새삼스레 결혼식과 임산부인 라영을 챙기느라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애를 많이 썼구나 싶은 생각에 짠한 마음이 들어서 일으킨 몸으로 그의 얼굴에 닿는 햇빛을 가려 주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결혼식이 시작하기 전에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며 진실이라는 이름의 폭탄을 안겨 주고 떠난 이의 광기는 몹시 불쾌하고 화가 나기는 했으나, 자신의 사랑에 대한 그 어떤 균열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이제까지 약간은 허술하다고 생각했던, 이헌이 말한 진실에 대한 나머지 퍼즐 조각들이 군데군데 맞춰져서 온전하게 완성된 진실을 맨눈으로 본 기분이었다.

아아……. 그래서….

짙은 깨달음이었다.

이제까지 자신의 기분과 기호를 맞추기 위해 지나치게 신경 쓰던 모습, 순간적으로 달라졌던 말투들……. 이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듯이 짧은 찰나의 순간마다 약간은 불안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들, 자신과 가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거나 얘기하지 않고 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던 일련의 사건들……. 그런 것들에 대한 자그마한 수상함이나 약간은 매끄럽지 못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드디어 오후의 태양 아래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안타까운 사람…. 그동안 불안해했을 이헌을 생각하며 라영은 잠이 든 남편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빗어 넘겨 주었다. 잠에서 깨우고 싶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이를 만지고 쓰다듬고 싶은 마음을 겨우 머리카락을 빗어 넘겨 주는 것으로 채운다.

머릿속에서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 불쾌한 손님은 이헌의 기만과 음모에 대해서 음침하고 더러운 것인 무언가처럼 자신에게 알렸지만, 라영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나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랬을까.

라영이 그 이야기를 듣고 퍼즐을 맞추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었다.

그의 기만과 음모는 화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청자인 라영에게는 그저 귀여운 짓이었다. 줄곧 지켜보면서 주변에서 알파 좀 치운 것 정도야…. 라영은 그 생각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이헌이 그동안 여러 차례 힌트를 준 편이었다. 라영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그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해명할 때 들었던 마음과 진짜 진실이라는 사실을 들었던 어제와 자신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라영은 이헌의 매끄러운 이마와 그 아래 있는 짙은 눈썹의 결을 따라서 손을 내려 어루만졌다. 머리카락보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눈썹의 기분 좋은 감촉이 마음에 든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어루만지다 솟구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내려 그 미간에 입을 맞추었다. 아니 맞추려고 했다.

“어어…!”

큰 팔을 뻗어 와 자신의 목을 감아 내려 라영의 입술과 얼굴에 키스하는 이헌에 의해 저지당한 것이다.

얼굴과 머리와 턱 밑과 목에까지 쉴 새 없이 베이비 키스를 퍼붓는 탓에 간지러워서 목을 움츠리며 침대를 떼굴떼굴 굴렀다. 어느새 자세는 역전되어 위에서 내려다보던 라영이 밑에 눕고, 누워 있던 이헌이 위에서 라영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뭐야….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

라영이 아직 간지러움이 가시지 않아서 키득거리며 물었다.

“당신이 내 머리카락을 만질 때부터.”

어쩐지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이렇게 아무것도 못 느끼며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사람이 아닌데, 전혀 미동이 없다 했다.

이헌은 라영의 배와 몸이 눌리지 않게 팔에 힘을 주고 적당히 몸을 띄워서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라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배가 고프지는 않나요?”

전날 식사를 대충 하고 잔 라영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이번에는 그가 누워 있는 남편의 짙고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아….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배고파요.”

의식하자 허기가 지는 느낌에 라영이 손바닥으로 배를 둥글게 문질렀다.

“빨리 룸서비스를 주문할게요.”

이헌이 라영의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는 수화기를 들어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언뜻 듣기로도 꽤 많은 양의 음식을 주문하는 것 같았지만 허기진 배를 움켜잡은 라영은 기쁘게 그 주문 내역을 들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라영이 누운 옆에 앉은 이헌이 물었다.

“식사를 하고 해변에 나가 볼까요?”

손으로는 창밖을 가리킨 채다. 닫히지 않은 우드 블라인드 사이로 그제야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에메랄드빛의 물과 거품처럼 잘게 부서지는 하얀 거품이 이는 백사장. 라영이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붉은색의 아름다운 산호가 가득한 얕은 바다와 백사장의 모래를 밟으면서 걸으면, 깨지지 않고 모양이 완전하면서 투명하고 하얀 조개껍데기를 분명히 발견할 것만 같은….

“좋아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까요?”

그 말을 듣자 이헌이 눈썹을 살짝 위로 들어 올리면서 웃고는 허리를 숙여 라영의 왼쪽 눈 밑에 있는 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프라이빗 비치입니다. 게다가 허니문 기간 동안 리조트를 통째로 빌렸어요. 우리가 여길 사용하는 동안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워……. 역시 재벌 클라쓰. 이럴 때마다 평범하게 살아온 라영은 이헌과 자신의 환경적인 차이를 느낀다. 하지만 뭐 이제는 이 사람 자체가 나의 것인데. 원래 자존감이 높은 데다 이헌이 주는 사랑을 온전히 확신하고 있는 라영은 어린아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 배를 내밀며 자신만만하게 코를 치켜든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생각했다.

라영은 혼자 한 상상에 다시 키득키득 웃으며 두 팔을 뻗어 품으로 자신의 알파를 불러들였다. 그가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주 두 팔을 뻗어 라영을 안고 감아올렸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둥기둥기 서로를 안고 두 손으로 쓰다듬다가 얼굴을 보기 위해서 몸을 살짝 뒤로 물러 이헌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라영은 가슴에, 심장이 꽉 묶이며 조이는 듯한 통증과 모든 감각이 눈앞의 알파에게로 쏠리면서 서로에게 예속되는 감각을 뇌 속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느꼈다.

자연 각인이었다.

쌍방 자연 각인. 각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자연 각인과 인위적인 각인이 있었다. 자연 각인은 감정적인 것을 우선으로 상대방에게 예속되는 것으로, 세부적으로는 일방 각인과 쌍방 각인이 있었다.

흔히들 자연적인 쌍방 각인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중국 설화인 붉은 실을 많이들 말했다. 인연은 서로의 손가락에 묶인 붉은 실이라는 부분에서 ‘실’이라는 소재는 정말 공감한다며, 자연적으로 쌍방 각인을 했을 때는 서로의 심장이 하나의 붉은 실에 묶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라고 표현했다.

라영은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그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며 넘어갔었지만, 사람들의 표현은 예상보다 정확했다. 정말로 서로의 심장을 옥죄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모든 감각과 시선을 서로에게 고정할 수 있게 튼튼한 쇠줄로 잡아당긴 것만 같았다.

그전까지 라영은 자신의 남편인 이헌을 생각하며, ‘이 정도의 사랑인데 왜 자연 각인이 되지 않을까?’ 하고 혼자서 의문을 품었었는데, 결혼식에 온 불쾌한 손님이 터뜨린 진실이 마음에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하나의 빗장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알려 준 진실로 인해 드디어 라영의 마음은 활짝 열렸고, 자연스럽게 각인을 이끌어 낸 것 같았다.

“방금……. 방금 느꼈어요?”

“네. 느꼈습니다. 쌍방 각인은 이런 기분이군요.”

쌍방 각인은 이런 기분이라니…. 뭔가 또 남아 있는 느낌이다. 라영이 이헌의 대답을 듣고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니 이헌이 미소 지으며 다시 설명을 이었다.

“사랑하는 라영아. 내가 당신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내가 모든 비각인자들처럼 스스로만의 온전한 상태인 줄 알았나요?”

아…….

그가 다정하게 돌려서 얘기한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 라영은 탄식의 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줄곧 일방 각인 상태였던 것이다.

“언제부터……?”

설마 그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인 옛날 옛적 대학생 때부터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라영은 큰 죄책감이 들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자연적인 일방 각인은 시작을 알아채기 어려운 것도 있고….”

라영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는지 이헌은 또 자신의 이야기를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기만보다는 불안함에 의한 것임을 라영은 확실히 알고 있다.

자연 각인은 감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감정이 식으면 자연스럽게 깨지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상대 형질자의 페로몬에 둔감해진다는 것 외에 그다지 불편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따로 의학적인 조치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자연적으로 소멸할 수 있게 놔두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신과 온전히 하나가 된 느낌이어서 기분이 무척 좋네요.”

이제는 정말 서로의 페로몬에만 흥분하게 되고 타인들의 페로몬은 오로지 감정 페로몬만 느낄 수 있게 되며 상대 형질자의 성 페로몬은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기분이 좋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이헌은 쌍방 각인으로 인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정말로 라영이 자신의 아이를 갖고 각인까지 마친 온전한 자신만의 오메가인 것이다.

내 사람이다.

오랜 기다림과 결실의 완성이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헌은 뇌 끝까지 희열에 차서 다시 라영의 몸을 꼭 껴안았다.

결혼과 각인보다 임신을 먼저 한 터라 페로몬 수치가 많이 낮아진 상태여서 각인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쌍방 각인은 두 사람의 감정과 페로몬이 동시에 엮여서 발생하는, 아주 신비하면서 조금은 비과학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라영과 이헌은 출산 후에 노팅과 동시에 목의 페로몬 샘 부근을 깨물어 페로몬을 주입하는 식의 인위적인 각인으로 쌍방 각인을 완성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임신 중에 자연 각인이 된 것이다.

라영이 이헌을 사랑한다는 것을 온전하게 체감한 것 같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사랑해요, 라영아. 내 심장은 오래전부터 네 것이야.”

라영은 감격에 차서 몸이 떨리는 자신의 알파의 등을 감싸 안고 두드리며 그 사랑에 답해 주었다.

“나도 사랑해요.”

둘의 허니문은 평생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다.

* * *

허니문에서 돌아온 그들은 일상을 회복하자마자 임산부 정기 검진을 위해 병원에 내원했다.

차가운 젤이 발린 기계가 귀여운 곡선을 그린 피부 위를 살짝 누르며 미끄러진다.

딸깍, 딸깍.

“아이 목 투명대는 정상 범위예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검은 화면에 하얀 노이즈 같은 영상을 보며 이리저리 길이를 측정하던 의사는 젊은 부부를 향해 이야기했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배우자의 말에 안심한 척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던 산부는 내심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혹시나’라는 걱정을 갖고 있던 게 사르르 녹아서 마음속에 봄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분명 남들이 다 하는 검사인데도 혹시 모를 어떤 안 좋은 일이 있을까 싶어 검사 전에는 늘 걱정이 된다.

“아이도 14주 차에 맞게 잘 자라고 있고요. 혹시 궁금한 점 따로 있으신가요?”

태아의 손가락, 발가락 개수까지 세어 주고 이것저것 따로 사이즈를 기록하던 의사가 부부에게 물었다.

“혹시 부부관계는 언제부터 가능합니까?”

“이헌 씨!”

보호자용 스툴에 얌전히 앉아서 말 한마디 없이 심각하게 모니터를 보며 의사의 말을 경청하던 이헌이 던진 민망한 말에 라영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연애할 때나 부르던 이름을 불러 버렸다. 결혼한 지 아직 2주째라 ‘여보’라는 호칭이 입에 익지 않은 게 여실히 보였다. 당황하는 오메가와 뻔뻔한 알파를 한두 번 접한 게 아닌지 역시 프로페셔널한 의사는 그저 의연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산모님은 우성 오메가라 12주만 넘어도 안정적이에요. 확률상 유산의 위험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수정이 잘 되고 태아가 매우 안정적이라는 게 우성 오메가들의 가장 큰 강점이지요. 너무 무리하지만 않으신다면 적정선에서 얼마든지 부부관계를 하셔도 됩니다.”

“무리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라영이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배에 묻은 젤을 닦아 내고 옷을 정리하는 동안 이헌이 의사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물었다. 의사는 데스크로 자리를 옮기며 물음에 답을 해 주었다.

“과격하거나 장시간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산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요. 아, 특히 가슴을 자극하는 건 좋지 않아요. 유두 자극은 자궁 수축을 불러일으킵니다. 산모님은 그 정도의 자궁 수축으로 유산할 위험은 없으시겠지만, 그래도 뭐든 백퍼센트의 확률은 아니니 조심하는 게 좋겠네요.”

평소의 라영의 핑크빛 가슴을 상당히 애정 하던 이헌에게는 몹시도 가슴이 아픈 이야기였지만, 그보다 더 사랑하는 남편과 아기의 안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임신 기간 중에는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뜨겁게 탕 목욕을 못 한다는 건 좀 충격이야, 그쵸?”

라영이 병원 문을 나서면서 문을 열어서 잡아 주고 있던 이헌에게 이야기했다.

“아이를 낳고 나면 온천 여행이라도 떠나도록 해요.”

아쉬워하는 라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드러난 맑은 이마에 참지 못하고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온천 여행이 무언가, 사랑하는 오메가가 원한다면 집에 온천수라도 끌어올 판이다.

“약속이야.”

입술을 떨어뜨리는 이헌을 올려다보며 라영이 씩 웃었다. 웃음 사이로 찬 바람이 휙 불어와서 두 사람 사이를 시기하듯 통과했다. 갑자기 들어온 겨울의 찬 바람에 라영이 눈을 찡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로 저번 주만 해도 따뜻한 남쪽 나라의 공기에 몸을 적시며 신혼여행을 만끽했던 몸이 차가운 겨울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이헌은 눈앞의 사랑하는 이의 목도리를 좀 더 단단히 여며 주며 말했다.

“번잡해도 지하주차장에 주차하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 미안해요.”

주말의 오메가 전문 산부인과의 주차장은 가히 서울 한복판의 백화점 못지않게 아수라장이라 직접 차를 몰고 오지 않고 기사를 대동했던 참이다. 근처에 차로 대기하고 있던 기사는 그들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열심히 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건물 앞에 정차가 안 되는 터라 미리 대기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저기 오고 계시네요. 괜찮아요, 정말.”

계획대로 모든 순서가 원활하게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심기가 조금씩 불편해지는 이헌의 미간을 펴 주며 라영이 달래듯이 말을 했다. 결혼식 준비와 허니문을 거치며 이헌의 계획에 집착하는 면모를 충분히 겪은 라영이었다. 비슷한 성격인지라 전혀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임신한 자신의 오메가에 대한 보호본능으로 좀 더 험악해지려는 모습을 보이려고 할 때면 라영이 그런 이헌에게 살짝살짝 브레이크를 걸어 주었다. 아기 아빠. 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요. 태교해야죠, 우리.

게다가 이 번잡한 병원을 선택한 사람이 라영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이헌은 라영의 임신 소식을 알았을 때, 혹시 모를 큰일을 대비해서 대학병원이나 큰 규모의 종합병원 같은 3차 병원을 선택하고 싶어 했지만, 라영은 자신의 오랜 담당이었던 오메가 센터 병원 의사의 추천에 따라 서울에서 가장 큰 오메가 전문 산부인과를 택했다. 산부인과 전문이라 대학병원처럼 전공의나 수련의들이 부산스럽게 다녀갈 일도 없을 것이고 좀 더 산모 위주로 편안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이야기에 바로 선택을 굳힌 것이다.

극우성 오메가인 자신의 임신과 출산이 교육받는 의사들 사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될 게 뻔한데, 스스로 알아서 실험 쥐의 모양새로 그곳에 걸어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출산율은 그렇게 낮고 형질자들은 적다는데, 이 많은 오메가 산모와 짝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건지 매 주말 산부인과는 미어터지기 직전이다. 전에 라영이 예약 시간의 의미도 없이 대기 시간이 이렇게 길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이헌은 아무래도 형질자 인구가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게 수도인 데다 이 병원이 가장 크고 유명한 곳이라 그런 것 같다고 추측하며 얘기해 주었다. 그러면서 혹시 권력 개입을 원하냐고도 물어왔다.

라영은 소심한 서민의 마인드로 깜짝 놀라며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던지라 군말 없이 대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 요즘 재벌 갑질 무서운 줄 모르고 또 이러네. 모든 기다림이 본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 이헌이 험악해질 때마다 좀 더 신경 써서 자신의 알파를 진정시키는 라영이었다.

“라영아, 조심해요.”

어째 결혼을 해도 이름은 그냥 부르면서 존댓말은 지속된다. 차 문을 열어 주며 거의 안아서 뒷자리에 태우려고 하는 과보호 남편을 보며 라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남자는 그냥 이대로 계속 극존칭을 하려나 봐. 요즘은 꼭 자리도 가장 안전하다는 회장님 자리에 태우는 모양새가 마치 상전을 모시는 듯하다.

전문적인 의전용 차량을 태우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일까…? 라영을 안전하게 태우고 난 뒤에 자신은 차 뒤를 돌아 반대쪽 문을 열어 옆자리에 올라타자마자 임산부의 신발은 벗기고 발을 주무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 거의 노예의 모습인데, 대체 크샤트리아로 태어난 사람이 수드라가 왜 이렇게 몸에 익어 있는 거야? 라영은 절로 상상되는 카스트 제도를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살살 주물러 주는 그 손길이 좋아서 라영은 구운 떡처럼 회장님 의전석에 점점 녹아내리고 있었다.

“피곤하면 오늘 저녁은 취소할까요?”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노예의 발언에 구운 떡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돼!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나 이헌 씨 친구들이랑 진짜 친해지고 싶었단 말이에요.”

“대체 그런 머저리들을 왜…….”

이헌은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내 친구들도 오는데! 취소 못 해요. 민란이 일어날 거라구요. 얘네가 얼마나 무서운데! 당신이 분노한 인민들의 난을 겪어봤냐고…!”

청첩장을 돌리던 날의 진실을 알아야겠다고 라영을 내내 들볶던 친구들의 민원과 난리법석을 떠올리며 라영이 고개를 연신 내저었다. 절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그날들 이후 불만 콜센터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게 됐다고…!

오늘은 임신한 라영의 몸에 무리가 된다며 집들이를 양쪽을 모아서 하루로 잡았기 때문에 부부의 절친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었다. 직장에 매인 현대인들답게 죄다 일이 바빠 자연스럽게 주말에 날짜가 잡혀서 임산부 필수 검진에 집들이까지 일정이 빠듯했다. 실상 음식은 모두 도우미분들이 준비해 주시는 터라 힘들 것도 없는데, 또 이 몹쓸 걱정병이 아주 난리다.

“암튼 취소는 절대 안 돼요. 우리 집도 자랑하고 싶단 말이야.”

벽지 재질부터 우드 장식 소재와 커튼과 가구 색까지 섬세하게 톤 앤 무드를 맞춘 아트 디렉터의 집을 자랑할 날이 바로 오늘이라고 라영이 손바닥을 비비며 음흉한 얼굴을 했다.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어째 이날을 취소하지 못한 게 아쉬운 표정이지만 라영은 간단하게 무시했다. 정말 기다리던 날이라고요.

* * *

“어서 오세요!”

얼굴 없는 쾌활한 목소리들이 마치 집주인인 양 라영의 친구들을 먼저 목소리로 맞았다. 라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알파들의 음성을 배경 삼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며 친구들을 맞이했다.

6시인 약속 시간보다 미리 온 이들과 늦게 들어오는 이들의 차이는 역시 오너와 일반 직장인들의 차이일까…? 이헌의 친구들이 미리 와서 식전주인 샴페인을 마시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 모두들 재벌가 일원들이었고 본인 집안에서 한자리씩들 맡고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라영은 토요일에도 회사나 일에 잔뜩 시달려 파김치가 된 얼굴로 들어오는 자신의 친구들을 연민의 눈으로 맞아 주었다.

“무슨 그 회사는 주말에도 사람을 불러내고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매 주말에 불려 다니던 사람이 할 말이냐며, 라영의 친구인 인민들의 얼굴이 곧 또 폭동을 일으킬 것처럼 험상궂다.

“마치 너는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한다?”

“이 바닥이 다 그렇지 뭐.”

라영의 친구들이 어디를 가나 디자이너들은 3D 업종이라며 학을 뗐다.

“남규형이는 어디 갔어? 같이 안 왔어?”

지겨운 사극 말투가 들리지 않자 라영이 물었다.

“규형이 회사에 다시 끌려갔다. 오늘 못 와서 너무 미안하다고 이거 보냈어.”

지혁이 규형이 자기에게 들려 보냈다며 손에 든 아기 모빌 선물 세트를 보여 줬다. 라영이 받으려고 하자 임산부는 들지 말라며 말리는 모습이 역시 넷 중에서 어른스러움과 철두철미함을 담당하고 있는 안지혁답다.

“그 회사는 연봉을 많이 주면 뭐 하냐고, 맨날 일 터져서 사람을 밤낮으로 불러내고 말이야. 역시 프리랜서가 최고라니까? 난 빨리 작업물 보내 놓고 와 버렸지. 오늘은 이제 거래처 전화 안 받을 거야.”

저들 말고 다른 사람도 있다고 간만에 초딩 말투를 벗어 던지고 멀쩡한 어른의 가죽을 뒤집어쓴 유민이 뻐기며 말했다. 오늘만 운이 좋았지, 본인이야말로 이슈가 터지면 떠넘길 사람도 없이 스스로를 갈아 넣을 수밖에 없는 프리랜서 처지라는 걸 잊은 듯한 해맑은 모습이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대문에서 현관문까지 걸어오는 길이 한세월이야?”

“확실히 부지가 엄청 넓다…. 서울 강남 땅 한복판에서 이만한 부지에…, 정원 사이즈는 무슨 식물원 수준이고…….”

지혁이 어두컴컴한 와중에도 정원 곳곳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확실히 다른 주택의 몇 배나 되는 규모였다.

“너 여기 청소 어떻게 해?”

“멍충아, 고용인을 써서 관리하겠지. 무슨 너는 뼛속까지 서민 마인드야? 이 큰 집을 관리하려면 몇 명이 같이 살겠어?”

“너 진짜 같은 서민끼리 이렇게 무시하기 있냐?”

머리가 아득해지는 투닥투닥 만담의 시작이다, 또. 라영은 벌써부터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정원 관리해 주시는 분이 계시기는 하는데 상주하시는 건 아니야……. 제발 너희들 그만….”

그들은 라영의 말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현관에 들어서서 하얀 복도를 지나 모던하면서도 감각적인 외관을 훑었다. 본격적으로 집 안으로 들어서서 매의 눈으로 인테리어를 캐치하며, 역시 컨셉 변태의 하우스답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하는 그들을 라영이 영혼 없는 몸으로 서둘러 다이닝 룸으로 밀어 넣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 불가능이다. 더 강력한 상대가 필요해…!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라영이 남편 정이헌입니다.”

라영의 친구들이 다이닝 룸으로 들어오자 이헌이 가장 먼저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네, 결혼식 때 뵙고는 처음이네요. 이라영 친구 안지혁입니다.”

“신유민입니다아.”

라영의 친구들이 직장인의 짬바를 뽐내며 같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우성 알파 트리오도 일어나서 한 명 한 명 인사를 했다. 한 공간에 남자 7명이라…. 이게 잘한 짓일까? 라영은 도망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그들을 자리에 앉혔다.

혹시 몰라서 12인용 식탁을 사기를 잘했다. 거실보다는 부엌과 다이닝 룸 디자인에 로망이 많아서 신경을 쓰다 보니 식탁 사이즈가 거대해진 라영의 집이었다. 이 크기의 룸에는 이 정도 사이즈가 비율적으로 딱이라는 말에 이헌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전적으로 라영에게 맡겼기에 나온 인테리어였다. 평소에 부부는 아일랜드 테이블에서 둘이 오붓하게 식사를 했기에 오늘이 거대 식탁의 첫 개시일이다.

몸이 무거운 라영을 회장님처럼 제일 상석에 앉혀 둔 이헌이 퇴근한 도우미 이모님을 대신해 직접 음식을 서빙하고 상빈이 도왔다. 그리고 사교성 넘치는 우경과 영인이 대화를 주도해서 라영은 걱정할 것 없이 즐겁게 자리를 즐길 수 있었다.

“전 사실 선배님들 다 기억해요. 네 분 다 경영학과 맞으시죠? 라영이 남편분을 제외하고는 세 분 모두 그때랑 외모도 거의 비슷하시네요.”

“저도 대강 기억합니다!”

그 말에 이헌의 친구들이 능글맞게 웃으며 키득대기 시작했다.

“그 말은 그때 이헌이 모습도 기억한다는 말이겠네요?”

우경이 집주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네. 처음에는 같은 사람이 아닌 줄 알았어요. 외형이 너무 다르셔서.”

지혁의 솔직한 말에 이헌이 움찔한다. 그 모습을 보며 우경이 웃기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듯이 곧장 변명을 내놨다.

“원래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당시에 아침마다 운동한다고 내내 그런 차림이었어요.”

“난 제수씨가 우리를 전혀 모르길래 다들 모르는 줄 알았더니?”

영인의 의문에 인민들이 재빠르게 대답을 했다.

“라영이는 기억력에 문제가 좀 있는 아이라…….”

“맞아요. 이라영은 시야가 진짜 완전 좁아서…….”

유민이 또 그 시야의 좁음을 몸으로 표현하겠다며 양 손바닥을 쫙 마주 펴고서 좁은 틈새를 보여 준다. 여기도 팔은 안으로 굽기는 하는데 그 굽은 게 어째 좀 불쾌하고 이상하다?

“네 분 모두 경영학과 우성 알파 그룹으로 유명했어요.”

지혁의 그룹이라는 표현에 그들은 무슨 아이돌도 아닌데 그룹이냐며 웃음을 빵 터뜨리고, 이헌 혼자만 그러게 작작 좀 몰려 다니지 그랬냐며 붉으락푸르락한다. 라영은 이헌이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보여 주는 그런 소년 같은 느낌이 좋았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는 소년 시절, 친구들과 있을 때 그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날 것의 이헌이었다. 라영이 보지 못한 그의 학창 시절을 엿보는 것 같아서 몹시 흡족했다.

“윤우경 선배님, 미래 그룹 맞으시죠? 제가 지금 미래 디자인 연구소에 디자이너로 재직 중입니다.”

지혁이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다시 정중하게 인사한다. 역시 뼛속까지 직장인의 마인드답다. 오너 일가에게 잘 보일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결의가 가득한 표정이다. 그 인사에 우경이 놀라며 반갑게 다시 악수를 청했다.

“지혁 씨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었군요! 사실 저는 요식업 쪽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쪽 계열하고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반갑네요.”

음식과 와인을 즐기던 사람들은 공통점을 꺼내며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시간이 점점 더 흐르며 메인 요리들은 모두 동이 나고 간단한 핑거 푸드와 술만 남으니 대화가 한층 더 농익어졌다. 그 분위기를 틈타 트리오가 짓궂게 ‘정이헌이 대체 어디가 좋으냐’고 물었다. 그리고 라영이 진지하게 한 대답에 모두가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표정도 다 눈에 보이고 숨기지 못하는 게 은근히 귀엽지 않아요? 여기서 킬링 포인트는 본인은 완벽하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에요.”

그 대답을 듣자마자 잠시 급속 냉각된 것처럼 멈춰 있던 모두는 영인의 비명과 함께 해동된 듯이 지르는 소리와 절규로 테이블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헌은 붉게 올라온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당황하며 연신 마시지도 않는 와인잔을 들었다 놨다 하고, 세상에 귀여운 게 다 얼어 죽었냐며 경악에 차서 낄낄거리는 트리오와 네가 정말 대학 시절을 하나도 기억 못 하는 게 틀림없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라영의 절친인 인민들까지…. 아파트였으면 진작에 층간 소음으로 민원이 몇 번이고 들어왔을 왁자지껄함이었다.

“정이헌이 귀엽다는 말을 듣다니!”

“제가 근래 들어본 중 가장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제수씨.”

“이헌이랑 둘이 진짜 천생연분인 것 같아요…!”

이헌이 라영의 앞이라 본인들에게 본연의 모습 그대로 화를 낼 수 없다고 여기고 평소보다 한층 더 신이 나서 까부는 중이었다. 트리오의 경악과 놀림에 이헌이 이제는 당황을 넘어서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 ……친 자식들이 진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욕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라영의 앞이라 연신 자제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이헌의 과거 모습을 아는 라영의 친구들도 조금씩 키득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라영이 테이블 위로 양손을 깍지 껴 그 위로 턱을 얹으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이 집을 건축할 당시 요구한 조건이 있어요.”

“그게 뭔데?”

해맑은 유민이 궁금하다는 듯이 바로 물어왔다.

“뒤에 거실 쪽으로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집에 창문을 굉장히 크게 설계하고, 또 많이 냈어요. 제가 창문을 참 좋아하거든요.”

그 말에 이헌을 제외한 모두가 다이닝 룸 너머로 보이는 높고 넓은 창을 올려다봤다. 커다란 거실의 벽면을 모두 차지한 창문은 격자의 블랙 프레임으로 기하학적으로 디자인되어 있어 감탄이 나오는 모습이다. 게다가 거실 천장이 2층까지 트여 있어서 거대하기까지 하다.

“제가 처음에 건축가한테 창을 많이 내달라고 요구했더니 건축가가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사계절이 있는 한국의 가정집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디자인이라고 말이에요. 에너지 효율이 좋지 않다나?”

라영이 더 긴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듯이 탄산수로 목을 한번 축이고 말을 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지구를 사랑하고 북극곰을 사랑하는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아무리 남편이 재벌이라지만 에너지는 단순히 돈으로 산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많이 소모되는 에너지를 돈으로 지불할 수는 있겠지만, 녹아내리는 지구의 빙하를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딜레마를 고민하던 저는 제가 어릴 때부터 꿈꿔 왔던 친환경적인 방법을 적용하기로 했어요.”

“너 설마…!”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유민의 얼굴에 경악이 차올랐고, 라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공개했다.

“맞아. 가내 자가 발전 시스템. 좀비가 와도 재난이 와도 우리 집에는 전기가 끊기지 않을 수 있지.”

“그놈의 좀비 타령은 진짜….”

라영의 좀비 재난 걱정은 한두 해 일이 아니었다는 듯이 오랜 친구들은 모두 진절머리를 냈다. 단지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트리오만이 흥미진진하게 경청하고 있다. 

“여기서 질문. 저희 집 자가 발전은 어떤 원리일까요?”

라영의 말에 간단한 질문이라는 듯이 상빈이 가볍게 손을 올리고 바로 칼 대답을 했다.

“태양열. 가정에서 가장 흔히 이용하는 시스템이지.”

틀림없다는 듯이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그 표정을 보며 이헌의 얼굴에 한쪽 입꼬리만 올려 어딘지 음침하지만 자연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본인의 남편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비웃음이다.

“물론 태양열이 가장 기본 베이스에요. 근데 그게 전부가 아니죠.”

“대체 뭔데 그래?”

성질 급한 영인이 얼른 정답을 가르쳐 달라고 성화이다.

“우리 집 지하에 짐이 있는데, 거기에 사이클이 있지.”

몸을 등받이에 기댄 채 팔짱을 끼며 느긋하게 말하는 이헌의 답에 라영이 정답은 친환경 자전거 발전기라고 해맑게 이야기하며 박수를 짝짝 쳤다.

“근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낸 거죠…?”

우경이 뭔가 불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 번 더 물었다. 그러자 라영이 아름다운 얼굴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자꾸 내 남편 비웃는 사람은 거기에 묶어 놓고 5000V 생성해 낼 때까지 안 풀어줄 거야. 다들 피카츄 한 번 돼 봐요. 오늘.”

내 알파를 놀리는 당신들은 백만 볼트 생산의 고통을 직접 체험해 봐야 한다며, 그린 것처럼 접대용 미소로 웃는 라영의 모습에 트리오와 인민들의 소름이 온몸으로 비명을 질렀다. 얼굴만 멀쩡하고 살벌한 게 아주 둘이 천생연분이 분명하다, 짚신도 제짝이 있다는 게 정말이라며 희망을 놓지 말라는 서로를 위로하는 개소리가 오고 갔다. 더불어 많이 마셨으니 이만 집에 가야겠다고 귀가를 서두르는 목소리들이 다이닝 룸을 가로질렀다.

이헌이 손님들을 끝까지 배웅하고 집 안 곳곳의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라영은 이미 맑게 씻은 얼굴로 잠옷을 입고 침대 누워 몸을 동그랗게 말고 살짝 잠에 취해 있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쳤는지 하얀 얼굴에 분홍색 홍조가 올라온 채다. 눈이 감겨서 이불을 꼭 쥔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남편을 보며 이헌은 옆에 걸터앉아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고 얼굴에 피어난 분홍의 꽃잎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입술을 기분 좋게 즐기며 라영이 살짝 눈을 떠서 물었다.

“다들 잘 돌아갔어요?”

“네. 당신이 말한 대로 택시랑 대리 불러서 안전하게 귀가시켰습니다.”

“지혁이랑 유민이는 잘 갔나 모르겠네……. 내가 같이 배웅했어야 했는데….”

“걱정 말아요. 유민 씨는 택시 잘 탔고, 지혁 씨는 우경이가 같은 방향이라고 태워 갔습니다. 당신 오늘 하루 종일 너무 무리했어요. 바로 올라오길 잘했어.”

이헌이 라영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몸을 이완시켜 주었다. 입덧도 별로 없는 임산부지만 유독 잠이 많이 늘어서 힘들어하는 걸 알았기에 얼른 씻고 누우라며 일찍 올려 보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자신의 영혼을 온통 앗아간 오메가가 좀 더 자신에게 매달리고 의지해 주기를 바랐지만,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라영은 마음의 기반이 단단한 사람이라 좀처럼 마음에 족할 만큼 기대질 않는다. 그러니 자신이 알아서 더 신경 써 주는 수밖에.

한 군데도 불편한 곳이 없도록 베개를 구김 없이 잘 펴 주고 구스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서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여며 주었다. 그 다정한 챙김을 입에 호선을 그리며 즐기던 라영은 졸음에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입만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보다 육아를 훨씬 잘할 것 같아.”

“잘 모르지만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 나 돌봐 주는 것만 봐도 좋은 아빠의 싹이 보여요. 나 지금은 안 힘들게 하지만 아기 낳고 나면 여보한테 다 맡길 거니까. 지금 적립해 놓은 거 그때 가서 쓰는 거라고 생각해. 아무래도 나는 좀 불안해…….”

“라영이도 좋은 아빠가 될 거예요. 그때도 내가 당신과 아이까지 다 돌볼 테니 부담 갖지 말고 마음만 편하게 가져요.”

“네…….”

“피곤할 테니 얼른 자요. 난 씻고 오겠습니다.”

“네…. 먼저 잘게요….”

가물가물하며 점점 수면 밑으로 빠져가는 라영을 보며 이헌이 굿나잇 키스를 해 주고는 아직 습한 공기가 남아 있는 샤워 부스로 몸을 옮겼다.

겨울의 해는 게으름뱅이라 아직 환하게 몸을 밝히며 출근하지 않은 시각이지만 생체의 리듬은 정확했다. 이헌은 늘 그래 왔듯이 습관적으로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간단히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지하로 내려가서 트레드밀을 달리고 사이클로 전력 생산도 해 주며 유산소 운동을 끝냈다. 정해진 대로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몇 가지 마치고 올라오니 7시가 지나 있었다. 이른 아침 출근해서 어제의 남은 잔해를 치우고 있던 도우미 이모님이 여러 가지 몸에 좋은 재료들을 갈아 넣은 주스를 건네며 인사를 했다.

“전무님, 안녕히 주무셨나요?”

“네. 남편은 아직 자고 있으니 조용히만 치워 주시고 아침 식사만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이헌은 결혼 전에는 고용인들과 거의 대화 없이 지냈고 그게 몸에 익어 편안했다. 하지만 고용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라영이 어머니뻘의 도우미 이모님을 어려워하면서도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흉내 내다 보니 이헌도 어느새 고용인들에게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수준이 된 것이다. 집 안에서의 평소 모습을 익히 잘 아는 자신의 가족들이 보았으면 다른 사람인 줄 알고 기겁을 할 일이었다.

밑층에서 간단하게 땀을 씻어 내고 침실 문을 조용히 열었더니 굳게 닫힌 커튼 사이로 빛이 아주 연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다. 그 틈새에서 라영은 아직 곤하게 자고 있었다. 침실을 열자마자 사랑하는 남편의 달콤한 오메가 페로몬이 느껴진다. 이제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성적인 페로몬도 살짝 섞여 있다. 야한 꿈이라도 꾼 걸까.

“흐음….”

라영이 살짝 다리 사이를 이불에 비비며 신음을 내는 잠꼬대에 이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유혹하는 성 페로몬이 점점 더 진하게 방 안에 퍼져 나갔다.

저도 모르게 침대에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헌은 라영이 작게 자신의 이름을 속삭이는 잠꼬대에 고삐가 탁 풀리고 말았다. 머리에다 엑스터시를 맞은 것처럼, 페로몬이 가장 진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다리 사이에 코를 가까이 대고 잠옷 바지의 고무줄을 살포시 내렸다. 얼마나 깊게 잠이 든 건지 라영은 속옷까지 내려가 복숭아 같은 엉덩이가 완전히 드러나 벗겨졌을 때도 잠에서 깨지 못했다. 벗긴 바지와 속옷을 바닥에 살짝 던지고 따뜻한 손으로 탐스러운 살 두덩을 살짝 벌렸다. 그 안에 발그레한 주름이 자리하고 그 사이에서 애액이 조금 흘러나와 번들거리며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헌이 저도 모르게 그곳에 혀를 가져다 댔다. 각인한 오메가의 애액은 비릿하면서도 동시에 달다. 페로몬과 애액이 섞여 야한 향기로 알파라는 꿀벌을 살살 유혹했다.

처음에는 혀끝을 세워 주름 사이사이를 핥다가 점점 더 구멍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갔다. 허니문 때는 타지에서 혹시나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직접 삽입은 하지 않고 페팅과 오럴 섹스로만 사랑을 표현했었는데, 의사에게 확답까지 받고 온 지금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좀 더 그 밀지에 얼굴을 깊숙이 묻고 입술과 혀를 이용해 사랑스러운 곳을 빨고 파내었다.

“으아앙…….”

잠에서 점점 깨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이헌 씨….”

연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라영이 손을 내렸다. 저도 모르게 잔뜩 발기해서 프리컴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는 성기에 손을 가져다 대 만지기 시작했다. 몇 번 위아래로 쓸어 올리더니 라영이 살짝 부은 눈을 떠서 고개를 뒤를 돌려 이헌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벗고 이리로 와.”

당신이 명령한다면 나는 따를 수밖에. 이헌이 중얼거리며 몸에 걸친 옷들을 모두 벗어 던진 채 라영의 앞으로 와서 입을 맞춘 후에 벌떡 기립해서 허공을 향해 흔들리는 자지를 내밀었다.

라영은 그 육중한 움직임을 지긋이 지켜보며 시각적으로 즐겼다. 보기만 해도 자극적인, 세상에서 가장 야한 살덩이가 묵직하게 흔들리고, 이헌의 의도에 따라 꿈틀거리는 모양에 집중하고 있다 보면 흥분이 고조되어 밀지에서 애액과 페로몬이 절로 흘렀다. 한창 눈으로 즐기다 손을 뻗어 알파의 터럭을 살살 쓸어내렸다. 자신에게는 없는 거칠거칠한 감촉인데 그게 또 그렇게 나쁜 촉감은 아니다.

피부와 살을 살살 쓸어내리기만 하고 막상 눈앞에 안달 나서 흔들리고 있는 거대한 해면체는 만져 주지 않으니 이헌은 더욱 몸이 달았다. 심장이 더 거세게 펌프질을 하며 음경으로 피가 잔뜩 몰려 터지기 직전이다.

이헌의 그 안달 난 표정을 즐기던 라영이 이제 그만 봐주겠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드디어 성기에 손을 댔다. 검지를 세워 밑에 고환에서부터 손가락 하나로만 살살 쓸어 올리고 절대 귀두에 손을 대지 않는다.

“라영아…….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난 이미 너한테 미쳐 있어.”

평소와 달리 존댓말 할 여유가 완전히 사라진 이헌을 보며 라영을 키득거렸다.

“놀리려는 게 아니고 여보가 안달 내는 게 재밌어서.”

그 말을 끝으로 이제는 그만하겠다고 선언하듯 입을 벌려 귀두를 빨아들였다. 혀끝으로 구멍을 벌리고 윗부분의 판판한 살을 혀로 원을 그리듯 움직이며 입술로는 적당히 힘을 주며 빨아댔다.

“음…. 아……!”

고개를 좀 더 들어 성기의 반이 입 안으로 들어가도록 깊이 빨아 주고 밑동은 손으로 함께 흔들어 주었다. 반만 해도 이미 목구멍 안을 찌르는데 끝까지 삼키는 건 도저히 무리다. 엉덩이 근육에 터질 듯이 힘을 주며 거칠게 움직이고 싶은 것을 참던 이헌에게 라영이 드디어 허락을 내렸다.

“이제 들어와.”

몸을 편안하게 똑바로 누이고 다리를 열고 손으로 탐스러운 엉덩이 살을 벌려서 구멍을 훤히 내보였다. 임신 14주를 맞아 귀엽게 살짝 올라온 배에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듯이 당당하다. 그 모습에 이헌은 눈이 돌았다.

“아…. 라영아.”

허겁지겁 자신의 오메가를 끌어안고 입술로 키스 세례를 퍼부으며 성기를 구멍에 맞춰 집어넣었다. 급하지만 부드럽게 꽉 닫힌 살을 열어 나갔다.

“아…. 좋아. 이헌 씨 좀 더, 좀 더 끝까지 들어와 줘.”

오랜만의 삽입이 반가운지 라영도 연신 허리를 들썩이며 안달을 냈다. 이헌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끝까지 밀어 넣어 허리를 흔들어 댔다.

“라영아. 라영아. 내 사랑….”

그 말이 만족스러웠던 라영이 이헌의 목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쪽쪽 빨아 당기며 구멍을 움찔거렸다.

“라영아, 너 배 속에 우리 아기까지 담고 이렇게 야하면 어떡해…? 응? 내가 마음껏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이렇게 야하면….”

이헌은 연신 감탄과 걱정을 내뱉으며 라영의 귀를 입술로 물고 빨며 허리를 들썩였다. 전신이 탄탄한 근육으로 갈라져 탄력 있는 몸이 하얀 몸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연신 짓찧었다. 그 허리와 둔부의 움직임이 퉁퉁 튕기는 모양새가 외설적이기 그지없었다. 그저 발정이 나서 안달 난 수컷의 이성을 잃은 몸부림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연신 아래와 윗입술을 번갈아 빨고 혀로 핥아 대고 입 안을 휘저으며 타액과 페로몬을 교환했다. 손으로는 지치지 않고 상대의 피부를 더듬으며 온몸의 오감으로 서로를 느꼈다.

촉촉하게 배어 나온 땀이 피부를 매끄럽게 만들어 서로의 살갗에 닿는 감촉을 더 말초적으로 자극했다. 알파의 페로몬을 깊게 들이마시며 오메가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으응…! 더…! 나 앞에 만져 줘.”

그 말에 이헌이 상체만 일으켜 라영의 성기를 오른손으로 살며시 잡아 쓸어 올렸다. 허리는 계속해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채다.

분홍색 귀두를 부드럽게 엄지로 비벼 주면서 큰 손으로 섬세하게 왕복하며 라영의 성감을 조절했다.

“아…! 나 갈 것 같아, 여보.”

그 말에 이헌이 더욱 거세게 허리 짓을 이어 갔다. 자신의 성기로 라영이 자지러지는 부분인 내벽의 깊은 곳을 연신 문지르고 찧어 주며 손으로는 속도를 더했다. 그 몸짓에 라영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우유 같은 사정액을 내뿜었다.

“응…! 아…!”

온몸을 덜덜 떨고 황홀감에 허리를 휘며 사정하는 라영을 보며 이헌은 오르가슴이 오래 지속되도록 연신 몸을 느릿하면서도 깊게 움직여 주었다.

허리를 튕기고 뒤틀며 남은 정액까지 모두 분출한 라영이 침대에 늘어져서 입을 열었다.

“흐앙…. 기운 빠져…….”

절정을 느낀 몸이 탈력감에 힘이 쭉 빠진 것이다. 이헌은 그 모습을 보며 티슈로 살짝 라영의 정액을 닦아 내며 그 몸을 옆으로 뉘었다. 임신 후기까지 가장 좋은 체위라고 의사가 설명하던, 스푼처럼 같은 방향을 보고 포개어 누운 후측위다.

뒤에 살며시 자리 잡고 다시 제자리인 양 구멍을 찾아든 성기를 살살 움직이며 양팔로 라영을 꼭 껴안았다. 한 손으로는 배를 쓸며 다른 팔로는 목과 어깨까지 함께 둘러 안았다.

“힘들지…? 나도 얼른 끝낼게요.”

임신한 몸이 지치지 않게 서두르며 이헌은 라영의 목 뒤와 귀에 연신 입맞춤을 하며 피스톤질을 이어 갔다. 목 뒤는 그 옛날의 욕망과 인상이 남아 있어서 이헌이 특별히 좋아하는 라영의 신체 부위였다. 귀 뒤의 맥박 뛰는 곳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을 코와 혀로 흡입하며 성기를 연신 구멍 안에서 움직였다. 그러다 몸을 굳히고 온몸으로 라영을 꽉 껴안고 사정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미지근한 액체로 몸 안이 적셔지는 게 느껴졌다.

“흣….”

“아아….”

힘 빠진 몸으로도 자동적으로 쾌감에 절어 조여지는 구멍을 느끼며 라영도 신음을 내질렀다.

“하아… 하아…….”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도 흥분감에 가슴을 들썩이고 숨을 몰아쉬는 라영을 보며 고개를 돌려 깊게 입을 맞춘 이헌이 또다시 사랑을 내뱉었다. 기침처럼 숨길 수도 없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이었다.

“사랑해.”

라영은 그 백만 번째 고백에 매번 백만 번씩 웃으면서 좋아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키스하며 말한다.

“나도 사랑해.”

서로 거리낌 없이 사랑을 주고받고 말할 수 있어서 감사한 오늘이다. ‘굿 모닝’ 하고 늦은 아침 인사를 하며 이번 주말은 이렇게 침대에서 뒹굴어야겠다는 나태한 생각을 알파의 귀에 속삭이며 연신 키득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헌도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고 행복해서 웃음이 절로 난다.

커튼 뒤의 해는 이제 완전히 출근을 마치고, 주말 맞이 파업을 선언한 신혼부부를 향해 겨울 아침을 밝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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