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그 알파의 사정- (17/18)

<7>

나는 지배자이며 동시에 우월한 인자로 태어났다.

그건 내가 태어나자마자 주어진 환경과 더불어 유전자의 법칙으로 이루어진 생물학적인 섭리였으며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흡수하면서 자라났다.

때 이른 2차 발현과 발작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특별한 일 없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예상치 못한 몸의 이상으로 인해 가족들의 무관심과 거리 벌리기라는 이름의 과보호가 시작되었지만 피라미드 꼭대기의 정점으로 태어난 신체는 오히려 그것을 편안해했다.

잘 닦인 길을 그대로 한 걸음씩 걸어 나가는 삶, 그리고 더욱더 정점에 서기 위해 깨끗한 계단을 오르는 삶, 그렇게 모든 것이 편안하고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를 만나게 되고 나서 완전히 뒤집혔다.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한 나의 세상은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견고한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와 같았다. 완벽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던 그 도시는 너라는 거대한 태풍에 산산조각 나고 온통 휩쓸려서 무너졌다.

하지만 나는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여도 기쁨으로 그 태풍을 맞이할 것이다.

너는 나를 부수고 고통을 주었지만 나는 그 고통을 다시 기꺼이 감내할 만큼 너를 사랑하고 원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의 세상은 완전해질 것이다.

“이 시기에 2차 발현이 이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게다가 좋은 일이 아니기도 하죠. 2차 발현은 보통 사춘기 때 2차 성징이 오면서 호르몬 내분비기관과 함께 성장해야 하는데, 이렇게 페로몬 기관만 먼저 발달을 해 버리면 여러 가지 문제가…….”

“그래서 지금 우리 애한테 어떤 문제가 있단 말인가?”

쩔쩔매며 말하는 의사의 앞에는 고압적인 기운을 숨기지 않고 내뿜는 알파가 앉아 있었다.

대학병원 교수 연구실. 그 방의 주인인 의사는 호스트임을 알려 주는 커다란 책상과 권위를 보여 주는 듯한 커다란 가죽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주한 손님용 의자에 앉아 있는 객인 알파보다 훨씬 더 손님처럼 보였다. 고압적인 분위기의 중년 알파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지 화가 났다는 페로몬을 잔뜩 풍기고 있어서, 그 압도적인 공기의 무게에 절로 몸이 찌그러진 의사는 더더욱 작아 보였다.

“저번에 한 검사와 오늘 한 검사를 종합하여 봤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은 페로몬이 산발적으로 의도치 않게 발산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페로몬 조절을 제대로 못 한다는 건가?”

“네. 보통 이 나이 때의 다른 형질자들은 아직 2차 발현을 하지 않아서 페로몬을 내보내고 억제하고 이런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그 부분이 아직 성장하지 않아서 페로몬을 내보낼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헌 군은 지금 관련 기관들이 제대로 발맞춰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페로몬 샘만 빨리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따로 있는 건가?”

객의 질문에 의사는 차트 스크롤을 내리며 의학적인 용어들이 가득 적힌 내용을 종합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고민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 케이스는 애초에 전 세계적으로 해당되는 인구가 적기 때문에 대단히 희귀한 경우였다. 이 건을 치료하기 위해서 관련 의학자들과 여러 가지의 타 과가 협업하여 검진을 정밀하게 진행했다.

확실히 몹시 드문 결과이기 때문에 의사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움과 동시에 어려운 케이스였다.

“다양한 원인이 함께 있겠지만…. 여기는 이헌 군이 지난번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진행한 종합 심리검사 결과입니다. 이 그래프를 보시면 선천적으로 모든 감각에 있어서 매우 예민한 기질로 나타납니다. 게다가 태어났을 때부터 확연히 알 수 있는 우성 알파였지요. 지금 페로몬 샘의 잠재력까지 본다면 앞으로 극우성 알파로 점차 성장할 가능성이 큽니다.”

“극우성 알파?”

좀처럼 듣기 힘든 단어에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심지어 내내 차분했던 목소리가 튀기도 했다.

“네. 90퍼센트 확실합니다. 계속 검사를 진행해 왔던 전문의 소견으로는 아이가 워낙 외부 반응이나 접촉 등 감각에 민감한 기질이라 주변의 페로몬을 예민하게 알아차렸고, 대부분의 생활을 하는 집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강한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어 왔기 때문에 굉장히 스트레스가 심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본인도 모르는 새 몸이 다른 알파 페로몬을 경쟁자로 인식해서 페로몬 샘이 비정상적으로 일찍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본인 몸에 닿는 거나 스킨십 같은 거에도 굉장히 민감했어요. 저 아닌 다른 가족은 아예 안아 주지를 못했어요.”

아이의 생활 습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곁에 앉은 오메가 여인이 부쩍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제가 알기로는 지금 대표님 댁에 우성 알파가 세 분 맞으시죠?”

“이이와 큰애, 둘째 모두 우성 알파예요.”

이제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끼어들 모양인지 여자가 냉큼 먼저 대답했다.

“함께 살고 있는 식구들만 보면 그렇네.”

함께 살고 있지 않은 가족들을 더하면 더 많은 숫자라는 이야기다. 그 대답에 의사는 한껏 더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문질렀다. 어려운 케이스이기도 하고 해결 방법도 확실하지 않다. 의학적인 부분에 있어서 건강을 우선시할 것인가, 정신과 감정적인 부분의 케어를 우선시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했다.

“아마 그래서 더더욱 일찍 발현한 듯합니다. 우성 알파가 3명이라… 아무리 페로몬을 잘 갈무리하는 형질자들이라고 해도 집에서는 보통 자연스럽게 페로몬을 풀고 편하게 지내게 마련이니까요. 특히 수면을 할 때는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한집에 사는 식구들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이가 희귀한 극우성 알파라 더더욱…….”

의사는 매우 난감하다는 듯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어린 애를 가족과 떨어져서 살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이헌이는 겨우 9살이야!”

시종일관 극지방의 냉기를 내뿜듯이 서늘해 보이는 중년의 알파라도 자식에 대한 애정이 큰 모양인지 버럭 의사에게 화를 냈다.

의사는 결심을 한 듯 대답했다.

“일단 공간이라도 분리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페로몬 제어가 미숙한 다른 형제들이 페로몬을 발산하며 접촉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고요.”

“해결 방법은 그것뿐인가요?”

그 말에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 울먹이며 떨렸다. 아이에 대한 연민과 비통함이 차올랐을 것이다.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 아직 어려서 체내형 칩도 독한 걸 쓸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해요…!”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다지 어리지는 않은 나이지만 3남매 중 막내라 여자의 마음속에 아이는 항상 아기였다.

“이건 치료입니다. 알러지의 원인을 조심한다고 생각하시면 마음이 좀 편하실 겁니다.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 계속 추적하며 관찰하는 수밖에 없군요.”

의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앞의 여인을 다독이듯 대답했다. 당장 아이가 페로몬 문제로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기게 됐으니 그거부터 해결을 봐야 한다고 마음을 굳힌 듯했다. 특히 이번 종합 검사에 많은 전문의들이 함께했지만 치프(chief)를 맡은 눈앞의 의사는 내분비계와 형질 의학 쪽의 권위자로 유명한 사람이라 그쪽 치료를 우선적으로 하려는 듯했다. 사실 어느 의사가 와도 페로몬 치료를 먼저 하려고 들 것이다. 그만큼 아이의 페로몬 샘과 호르몬 기관 문제는 심각했다.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에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질환이었다.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어른들 사이에서 이헌은 거리를 두고 뒤쪽에 자리한 소파에서 큐브 블록을 무심하게 돌리고 있었다. 마치 이 이야기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였다.

“2차 발현이 이루어진 터라 국가 기관에 극우성 알파 발현을 등록해야 합니다만….”

“아직 완전한 발현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페로몬 조절이 제대로 안 되는 극우성 알파라니. 알게 된다면 모두가 웃을 일이군. 지금처럼 우성 알파로 등록해 주게. 내 아들이 실험실 쥐가 되는 꼴은 못 보겠으니까.”

의사는 좀 더 설득하려는 듯 머뭇거렸지만 남자의 단호한 표정에 이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가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구실 문을 열고 떠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방금 의사가 말한 내용을 신경 쓰듯이 여자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남자는 서너 걸음 떨어진 채였다. 손을 붙잡고 다니기에는 조금 커다란 아이를 붙잡은 여자의 손에서는 굳센 의지를 가진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가족이 떠나간 자리에는 처음 가족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온통 색이 섞인 채 엉망이었던 알록달록한 5x5 큐브 장난감이 이제는 동일한 색의 면을 자랑하며 덩그러니 혼자 남아 있었다.

* * *

“이헌 군……. 도대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한 이유가 뭡니까…?”

이제는 머리가 온통 하얗게 센 의사는 허탈하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눈앞의 커다랗다 못해 거대한 알파는 이제 ‘군’이라는 호칭을 듣기에는 너무 크고 나이가 들었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담당의였던 나이 든 의사는 그 같은 호칭을 버리지 못했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은 아이가 어른이 되고도 남을 만한 세월이었지만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늙어 가는 어른에게는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세월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서로의 체감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연구실 또한 의사와 마찬가지로 세월의 흐름을 무심하게 지나치듯 그대로였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화분이 조금 바뀌고 의자와 컴퓨터가 좀 더 최신 것으로 바뀐 것 외에는 정말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였다. 이헌은 오랜만에 오는 곳을 조금은 감상적인 느낌으로 바라보다 이내 다시 성격대로 무감해졌다.

책상 위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요란하게 마우스 휠을 돌리고 클릭하는 의사의 모습에서 신경질이 그대로 그려졌다.

“제가 어떻게 이헌 군을 정상화시켜 놨는데 이렇게 다시 엉망을 만들어 놓다니…….”

흡사 공들여 만든 예술품을 외부에 의해 망친 예술가 같은 모습이었다.

“이헌 군이 다녀온 군대가 이렇게 알파들이 득실거리는 특수부대인 줄 알았다면 절대 반대했을 겁니다. 대체 왜 사모님은 이런 걸 말해 주시지 않고…!”

“이렇게 반대하실 줄 알고 입을 막아 뒀죠.”

제대한 군인임을 여실히 말해 주듯 짧은 머리의 시커먼 알파는 이상이 생긴 자신의 몸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느긋한 태도이다. 심지어 늙은 의사를 놀리는 듯해 보였다.

“이 정도의 이상이라면 분명 의가사 제대도 가능했어요! 맙소사 정말….”

“그건 안 돼요.”

“대체 왜…?”

단호한 대답에 얼떨떨한 물음이 절로 나왔다.

“계획에 어긋나거든요.”

뻔뻔한 알파는 아주 간단한 문제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아… 또 그놈의 계획. 자꾸 이렇게 계획에 대해 강박적으로 굴면 다시 소견서를 써서 김 선생에게 강제로 보낼 겁니다!”

아직도 이헌이 꼬마 아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다. 오히려 이 변치 않는 태도가 이헌은 즐거웠다. 게다가 이헌의 또 다른 오랜 주치의였던 정신건강의학과 김 교수까지 들먹이다니.

“포기하세요, 최 교수님. 이미 십 대 시절에 김 교수님은 플랜과 실행에 집착하는 제 강박증에 대해 정상 소견을 내렸습니다. 오히려 목적 지향적이라며 알파답다고 좋아하셨어요.”

“이렇게 건강을 해칠 정도인데도 말입니까?”

그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체내 칩을 제거하고 다른 걸로 다시 삽입해야 합니다. 진료실에서 나가시면 간호사가 안내해 줄 거예요.”

그 말에 이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진료와 치료를 낭비라고 생각하다니 지극히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답다.

“그리고! 처방이 더 있습니다.”

나이도 드신 분이 마치 회심의 일격을 남겨 놨다는 말투다.

“간호사가 주는 소견서를 가지고 거기 적힌 재활 센터에 가서 매일 일과 시작하기 전에 두 시간씩 운동으로 페로몬 발산하고 끝난 직후에 바로 혈액 검사 실시할 거예요. 약으로 다 해결 보지 말고 이번에는 신체 강건한 성인답게 건강하게 운동으로 치료해 봅시다.”

소견서를 마무리하는 듯 연신 타이핑을 치며 빠르게 설명했다.

“매일 피를 뽑는다고?”

이헌이 귀찮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드물게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던 의사는 눈앞의 남자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도 꼭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을 때 저런 표정을 지었지. 역시 가족은 가족인 모양이었다.

“채혈이 아니라 의료용 바늘로 찔러서 키트로 검사하는 겁니다.”

혈당 검사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그런 거라면 뭐. 그렇지만 이제 학기를 시작하는데 매일 새벽에 운동을 해야 한다는 점은 조금 귀찮게 됐는걸….

“치료 목적의 운동 재활 기관이니까 페로몬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내일 거기 가면 담당자가 자세히 설명해 줄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바쁘신 몸은 그만 가 보시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헌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피식 웃으며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왔다. 조금 오차가 생긴 계획을 수정할 시간이다.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 * *

“너 왜 맨날 운동복이야?”

정말 이건 누가 봐도 운동복이다. 시커멓고 음침해 보이게 4X 라지 사이즈의 멜란지 그레이색의 후드티와 검은색 저지 소재의 반바지를 걸치고 캡 모자까지 쓴 머리 위에 후드까지 이중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게다가 스포츠 백까지. 그저 멋으로 스포티하게 입은 패션과는 다르게 누가 봐도 실용을 위한 옷이었다.

“너 체대로 전과했냐?”

“신경 꺼.”

“제대하더니 더 까칠해졌네?”

신경질적인 대답처럼 들리지만 남자는 늘 그렇듯 무심한 상태였다. 늘 모든 일에 늘 관심이 없고 사교적이지도 않고 무심하고 차가운 모습이 익숙한 듯이 오랜 친구들은 대답에 눈치도 보지 않고 다시 농담으로 되받아쳤다.

“의사가 하라고 했대. 몸뚱이는 아주 호랑이도 맨손으로 잡게 생긴 놈이 맨날 병원 들락날락.”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같은 재단의 학교를 다니고, 집안까지 교류가 있기에 사정을 좀 더 아는 우경이 나머지들에게 설명했다. 심지어 대학까지 같은 학교 같은 과로 와서 이제는 지겨워 죽겠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이헌은 인상을 쓰며 쳐다봤다. 예나 지금이나 말 많은 녀석이었다. 녀석의 말에 무리가 경박스럽게 웃음 내뱉었다.

누가 봐도 우성 알파라고 보일 커다란 남자 네 명이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은 강의실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지만, 함께 모여 있어서 더욱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누구도 대놓고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이헌이 앉아 있던 강의실 책상에 걸터앉아서 가장 경박스럽게 웃고 있던 영인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무리에게 속삭이던 터라 밝게 염색한 애쉬 그레이 머리카락이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흐트러졌다.

“야, 저기 좀 봐. 저기 저기.”

“뭔데 또 그래?”

우경이 귀찮아하면서도 영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미대 오메가 신이다.”

“뭐야, 그 촌스러운 별명은?”

이헌의 바로 옆에 앉아서 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상빈이 비웃으며 말했다.

“우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우경이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쟤 맨날 에타에 목격담 올라오는 걔지?”

“넌 4학년이라는 새끼가 아직도 에타에 그런 거나 찾으면서 기웃거리냐?”

상빈의 경멸하는 말을 뒤로 넘기며 이헌도 그들이 보고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상빈도 이헌의 눈이 간 곳으로 시선을 줬다.

제법 큰 계단식 강의실 앞쪽에 하얀 인형 같은 사람이 조용히 친구들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 그쪽으로 창문에서 빛이 내려오고 있어서 마치 스포트라이트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처럼 보인 그는 눈 아래까지 흘러내린 웨이브 진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 중간중간에 보이는 손은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더더욱 하얗게 빛이 났다.

“쟤는 무슨 혼자 반사판을 들고 다니나 봐.”

우경이 연신 감탄했다. 

“사람들이 댓글에 미대 백설공주라고 하더라. 나는 그거 보고 남자가 무슨 공주야 했는데 저건 반박할 수가 없다.”

“저건 백 퍼 우성 오메가다. 저렇게 생긴 남자가 우성 오메가가 아닐 수가 없어. 나의 이 알파의 촉이 말하고 있어.”

“지랄하네.”

연신 낄낄거리는 와중에 이헌은 그저 가만히 화제의 남자를 응시했다. 확실히 어디에서도 눈에 띄는 외관에 드문 아름다움이기는 했다.

웅성거림이 잦아드는 소리에 남자에게서 눈을 떼고 앞을 보니 교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시끄러워. 앞에나 봐.”

이헌에게 라영의 첫인상은 그런 거였다. 그저 남들보다 좀 더 눈에 띄는 오메가.

처음에는 그저 그런 줄만 알았다.

주로 O.T인 첫 강의는 수강 정정 기간답게 어수선하게 일찍 끝났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교수가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기도 전에 이헌이 속한 알파 무리는 빠르게 강의실을 벗어났다. 이 나이 먹고 한심하게 몰려다녀야 하냐고 툴툴대던 상빈은 겨우 교양 강의 하나 맞추고 말이 많다며 우정을 중요시하는 우경의 손에 등짝을 맞았다.

“어떻게 전공이 하나도 안 맞냐? 넷이 한꺼번에 겹치는 게 하나도 없어!”

“아니,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몰려다녔으면서 만족이 안 돼? 너 이 새끼 설마….”

순결에 위협을 느낀다며 영인이 두 손으로 몸을 감싸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우경을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그렇게 보면 숨겨 왔던 너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는 듯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멀티미디어 강의동 앞의 흡연 구역은 나름 오픈 된 공간에 뻔히 자리하고 있어서 눈앞에 강의에서 빠져나온 학생들이 나오는 모습이 하나하나 다 보이는 장소였다. 9월의 하늘은 가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높지만 아직은 더운 낮의 날씨와 너무도 푸르게 흔들리고 있는 나뭇잎들이 가을의 얼굴을 민망하게 했다.

“여기는 그래도 그늘져서 좀 시원하네.”

우경이 재떨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여 있는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이헌은 아무 말도 없이 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네모의 작은 상자 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얀 담배 연기가 매끈한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가 조금은 투명한 연기로 변화하여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윤우경, 넌 졸업하고 뭐하냐?”

전자담배를 피우던 상빈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다들 1~2년 안에 졸업을 앞두고 있는 시기라 앞날에 대해 관심을 가질 만한 때였다.

“나야 우리 회사 들어가서 한자리 맡겠지. 아니면 유학 가거나. 우리 중에 그거 아닌 사람도 있나?”

우경이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차례로 한 명 한 명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니들이나 나나 재단 엘리베이터 학교 그대로 밟고 올라와서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서 경영 배워서, 학연도 잡고 공부도 배우고, 다 집안 사업 도우라고 이렇게 키워진 거 맞잖아? 아니면 뭐 스타트업 생각하고 있는 놈이라도 있어? 투자해 달라고 말 꺼내는 거야?”

그 말에 영인이 낄낄대며 웃었다.

“뭐 사업 아이디어라도 있어야 스타트업을 하지. 모지리 자식들이 무슨.”

“정이헌. 너는 미국 간다고 했지?”

부쩍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는지 상빈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담배만 피우고 있던 이헌에게 물었다.

“미국에 가고, 공부하고, 지사 투입되고. 그거 말고 뭐 더 있나.”

“학업이랑 병행하래?”

“제대로 성과를 내야 국내에 한자리 주겠다나.”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이 무심하게 내뱉은 그 말에 다들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업은 자식이라도 이렇게 성과 중심으로 빡세게 굴리는구나. 우리 집이었으면 나는 걷어차고 그냥 주식으로 등 따시게 살았어. 너네 아버지도 어지간하다. 그래야 얘네 아버지도 총수 달 거 아니야. 할아버지 아직 건재하신데.

저들끼리 소란스레 시끄럽다. 하지만 다 맞는 이야기라 별다르게 대꾸하지 않고 벤치 등받이에 팔을 걸쳐서 몸을 좀 더 이완시켰다. 확실히 오전에 페로몬을 발산하고 운동을 하고 나오니 감각도 날뛰지 않고 편안하다.

순간 의미 없이 쳐다보고 있던 건물에서 살짝 눈에 익은 인물이 걸어 나왔다. 얼마나 봤다고 그새 눈에 익다고 생각했는지 웃기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자조했다.

막상 자조를 하면서도 눈은 그 인영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남자의 움직임은 전체적으로 길며 가느다랗고 낭창하면서도 동시에 힘이 있어서 무용수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마른 몸의 무용수가 아무것도 없는 무대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걸어가던 남자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그와 함께 있던 친구들은 익숙한 상황인지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상황을 관조하고, 이헌과 그 무리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합심한 듯 그 상황을 함께 관람했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어서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알 법한 상황이었다.

“오… 용기 있네. 공개 고백.”

“공개된 장소에서 하면 다 공개 고백이야?”

“그런 거 아냐?”

이헌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그들을 응시했다. 어째서 그렇게 집중하게 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남자는 하얀 손을 들어서 손을 내젓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친구들에게 가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고백을 하던 남자가 등을 보이고 돌아서던 남자의 손을 거칠게 낚아채고 잡아당겼다. 당사자는 간절한 마음에 한 행동 같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이헌도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고백한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거절을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곤란해하는 남자의 손을 잡아당겼고, 그는 그 손을 빼내려고 인상을 찡그리며 힘을 주며 손목을 연신 비틀었다.

그 순간 이헌은 공기 중에 퍼진 불쾌함을 담은 공격적인 오메가 페로몬을 아주 약하게 느꼈다. 부정적인 감정 페로몬이었지만 그 베이스가 되는, 사람 자체의 오메가 페로몬이 무척 매혹적이라는 걸 알 수 있듯이 달콤한 잔향이 살짝 스쳤다. 이헌은 깜짝 놀라서 주변의 친구들을 돌아보았으나 그들 모두 그저 상황을 긴박하게 구경하고 있을 뿐 아무도 이 페로몬을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이건 오직 매우 민감한 페로몬 수용체를 가진 이헌만이 알 수 있는 듯했다.

더 이상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으면 안 되겠다고 느낀 건지 그의 친구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보호하듯이 남자를 둘러싸고 서둘러서 자리를 떴다. 마치 이런 상황이 자주 있었다는 듯이 익숙하게 대형을 맞춰서 움직이는 모습이 초식과 동물들이 떼를 지어 무리의 일원을 지키려는 듯한 모습이라 이헌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샜다.

“쟤들은 다 오메가야?”

비슷한 걸 느꼈는지 우경이 물었다. 그들의 모습은 실제로 오메가들이 서로를 꽁꽁 감싸 지켜 주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까 가까이 지나갔는데 두 명은 그냥 베타인 듯.”

너는 또 언제 근처까지 가서 그걸 파악했어? 넌 정말 플러팅의 귀재라는 별명이 아깝지가 않다, 권영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우경이 곧장 대답한 영인을 비웃었다.

“베타여도 분위기가 뭔가 다르긴 하네. 딱 비슷한 것들끼리 몰려다니는 듯.”

상빈이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말했다.

“너 설마 우리 소개한 거야?”

그 말에 영인이 자신을 포함해 검지를 들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히죽거리며 물었다. 그 말처럼 여기가 바로 비슷한 것들끼리 몰려다니는 것의 대표 주자였다. 심지어 거의 십 년째다.

“미대 남자애들은 저런 분위기 애들이 종종 있더라. 마르고 예쁘고 잘 꾸미는 애들.”

“쟤 이름이 뭐라고?”

수다스러운 대화를 끊어내듯 이헌이 물었다.

“뭐야, 정이헌이. 설마 너도 관심 생겼어?”

“정이헌 사전에 연애라는 건 없는 줄 알았는데?”

“시끄럽고 쟤 이름이 뭐냐고.”

이헌이 호들갑이 지겹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잘라내고 재차 물었다.

“이라영.”

영인이 대수롭지 않게 답을 줬다.

“이름이 좀 여자 같은데?”

상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에 우경이 사라지는 그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잘 어울린다. 그 이름 들으니까 다른 이름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이라영…….’

이헌은 그 짧은 대답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그렇게 하면 좀 더 깊게 박힐 거라는 듯이.

* * *

“아… 아… 흐응…”

눈앞에 보이는 남자 오메가가 알파의 단단한 가슴팍에 손을 짚고 들썩거리며 신음을 내질렀다.

허리의 선이 조금은 닮았나? 아니, 이런 느낌은 아니었지. 이렇게 부러질 듯이 가늘지는 않고 좀 더 힘 있는 느낌이었다. 움직이는 모습을 그저 양팔을 베고 가만히 누워서 감상하던 이헌이 생각했다.

“흐응… 좋아?”

좋은가? 그저 자극에 의해 반응하고 움직여서 흥분감을 고조시키고 평소처럼 배출하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잡생각이 많이 드는지 모르겠다.

워낙 민감한 체질이라 페로몬 자체가 좀 피곤하게 느껴져서 이제까지 열성 오메가나 베타 여자 정도만 만나오던 이헌이다. 귀찮게 스테디한 관계를 가질 마음은 없어서 그때그때 접근해 오는 사람들 중 내키는 대로 골라서 관계를 가져왔다. 모든 것에 무감하고 감정적인 거에 휩쓸린 적이 없어서 그 정도면 늘 충분했다. 그저 종종 느껴지는 성적인 충동을 이렇게 풀면 그만이고, 이게 이제까지 이헌이 사람들과 하던 섹스였다.

오늘은 처음으로 애교를 떨며 유혹하는 남자 오메가를 따라갔다.

누구를 떠올리고 그랬는지 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살면서 불필요하다고 느낀 감정적인 부분을 자각하는 게 늘 계획한 대로 흘러가던 평탄한 일상을 흔드는 기분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슬슬 인정해야 할 때였다. 이 느낌이 아니었다. 이런 게 아니었어.

“야, 너 페로몬 좀 더 풀어 봐.”

상대가 페로몬을 원활하게 풀 수 있게 이헌도 자신의 유혹하는 성적 페로몬을 끌어 올렸다. 억지로 끌어 올리는 기분이라 살짝 불쾌하다. 하지만 상대는 그 불쾌감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의 페로몬을 내뿜으며 우성 알파의 성적 페로몬에 맥을 못 추었다.

“아…! 너무 좋아! 좀 더…!”

코와 피부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던 그는 연신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엎드려 이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런 느낌의 페로몬이 전혀 아니었는데.

위에 올라타 있는 이의 페로몬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몸은 자극에 반응하는데 그 끌어안은 손길과 페로몬이 더없이 불쾌했다.

이걸 가만히 참고 지속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야, 너 비켜.”

오메가의 팔을 풀어 몸을 밀쳐내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장 이 불쾌한 것들을 씻어 내야겠군. 내팽개쳐진 오메가를 그대로 무시하며 생각에 빠져서 욕실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화가 가득 찬 목소리가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제대로 대꾸해 주지 않으면 더 지랄을 할 기세다.

“꺼져.”

심지어 제대로 된 대꾸도 아닌 축객령이었다.

“뭐…? 뭐라고?!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황당해하는 오메가를 두고 혼자서 말을 마치고는 다시 등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뒤에서는 욕설이 뒤섞인 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쓸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대답 없는 벽과 같은 무시에 나가 버렸는지 쿵 하는 문소리와 함께 방이 조용해졌다.

샤워부스에 들어서서 레버를 돌려 위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의 얼굴과 어렴풋한 페로몬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단지 처음 느낀 호기심에 대한 충격인지 일시적인 감정인지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헌의 인생 계획에 절대 없었던 것이다. 계획이 틀어지는 것과 시간 낭비를 병적으로 싫어했는데, 방금까지의 다른 남자 오메가와의 실험을 거치고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오류가 아주 마음에 안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관심과 호기심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니 약간의 흥분이 일며 그로 인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게 기분이 살짝 좋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좀 더 지켜봐야겠어.

싸구려 향기가 나는 거품에 남은 혼란스러운 생각의 잔류와 질척이는 타인의 페로몬을 모두 물로 흘려보냈다. 쓸데없는 것들은 모두 하수구로 들어가야 마땅했다.

이헌 본인도 모르는 새에 그다지 신경 쓰고 살지 않았던 알파의 본능이 깨어났다.

이헌은 먼저 적극적으로 만나자고 하거나 붙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오랜 시간 가족처럼 함께 있던 녀석들이다 보니 늘 그들이 하자는 대로 어울리는 편이었다.

오늘도 공강인데 잠도 깰 겸 커피나 마시고 가자고 하는 상빈의 손에 이끌려 학교 안의 새로 오픈한 카페에 들어섰을 때였다.

“벌써 애인이 생겼네?”

늘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잘 살피는 영인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하는 모습에 그들은 전부 손가락이 향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가 거기 있었다. 이름 모를 알파와 함께.

“그러게. 개강한 지 이제 3주 됐나?”

“내가 우리 동아리 후배한테 들었는데, 좀 괜찮은 알파가 대시하면 받아 준다더라.”

“어? 그럼 내가 하면 바로 받아 주겠네?”

“어디서 그 상판대기를 들이밀어, 들이밀긴.”

학창 시절 때처럼 시끌시끌 아무 소리나 지껄여 대는 모습을 보며 이헌이 나직하면서도 명료하게 뇌까렸다.

“어디 한번 해 봐.”

늘 무료하다는 듯이 감정 없이 굴던 이헌이 나지막하면서도 명료한 발음으로 얘기하니 시끄러운 녀석들이 일시 정지처럼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멈춘 듯이 입을 떡 벌리고 얼어 있던 그들이 일제히 해동되며 요란을 떨었다.

“와 나 소름 돋았어!”

“정이헌, 진심이야?”

“나 얘 이러는 거 처음 보는데?”

다들 농담처럼 나누고 있던 대화가 순간 급변해서 놀라움으로 들썩였다.

이헌은 그들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주문한 음료를 기다렸다. 귀찮은 녀석들……. 자신이 평소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건수 잡았다는 듯이 일제히 요란을 떠는 게 영 성가시다. 커피가 나오는 스탠딩 바에 한 팔을 걸쳐 기대고 있던 이헌은 갓 나온 커피에 빨대를 꽂고 음료를 빨아들이며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창가 쪽의 테이블을 응시했다.

건물 자체의 층고가 높은 데다가 한쪽 면이 전면 유리창인 오픈 카페는 블라인드가 없어서 오후의 자연광이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창 옆으로 테이블이 즐비했는데 드문드문 비어 있는 테이블들 중간에 라영과 그의 남자친구처럼 보이는 알파가 있었다. 그들은 마주 앉지 않고 나란히 앉아 있었고 라영은 태블릿 PC를 손에 들고 펜슬로 열심히 뭔가를 쓰고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알파는 자신이 허리를 안고 있는 오메가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른다는 듯이 쓰다듬고 목덜미에 코를 박고 부산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이헌은 얼음이 들어 있는 커피를 마셨는데도 전혀 시원해지지 않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헌의 시선이 어디를 향했는지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은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며 한마디씩 말을 얹었다.

“아주 염병이다, 쟤들.”

“원래 처음 사귈 때 다들 저렇지 뭐.”

“정이헌, 너는 마음에 들면 빨리 낚아챘어야지. 병신같이 이게 뭐야.”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까 닥쳐.”

코웃음을 치며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소리 없이 걸어가서 바로 커플의 뒤편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렇게 보폭을 크게 하고 조용히 걸어가는 것도 능력이라며 우경이 상빈의 귀에다 대고 쑥덕였다.

“밖에서 담배 피울 줄 알았는데…….”

영인이 얼떨떨해하며 말하는 모습에 우경이 넌 눈치도 없냐고 핀잔을 주며 이헌이 앉은 자리로 이끌었다.

세 사람은 이헌의 눈치를 보며 소리 없이 살며시 앉았다. 아무도 그렇게 하자고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신경이 뒤의 커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커플과 바로 등을 대고 마주한 이헌의 모든 세포는 그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만 좀 해. 나 이거 빨리 아이디어 짜야 해. 오늘 6시에 공유하기로 했다고.”

애인의 부산스러운 스킨십이 방해되는지 라영이 짜증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으로 제대로 듣는 목소리가 귓가에 와서 박혔다. 생각보다 가늘지도 높지도 않았다. 약간 나른한 듯하면서도 명료한 목소리는 전혀 오메가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보통의 남자 목소리였다. 나야말로 편견에 가득 차 있군.

“그런 거 다 그만두고 나한테 시집와.”

“시집은 무슨. 선배 그거 오메가 차별 발언이야. 단어 사용 잘해.”

“라영이 너는 그렇게 까칠한 게 매력이야. 그래서 나랑 결혼한다고? 내가 집에서 돈 펑펑 쓰면서 놀게 해 줄게.”

그 말에 라영은 화가 났다는 듯이 패드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옆에서 지분거리는 손을 쳐서 떨어뜨리며 얘기했다.

“나 그런 말 하는 거 정말 싫어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정말.”

논쟁을 해 봤자 입만 아프다는 듯이 그는 다시 패드를 들고 스케치하던 아이디어에 집중했다.

연신 커피만 홀짝이며 아무 말도 없이 뒷자리 커플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이들은 한마디씩 엿들은 대화에 대해 감상평을 쏟아냈다.

“생각보다 알파 새끼가 쓰레긴데?”

“저런 애들이 대부분 아니야?”

엿들었다는 자각은 있는지 손바닥까지 입 옆에 펼쳐 가며 절로 소곤소곤 대화를 하게 된다. 이헌은 친구들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뒤에 앉은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면 나 페로몬 한 번만 풀어 줘. 그럼 진짜로 방해 안 할게.”

쓰레기라 칭해진 알파의 황당한 말이 시작되었다.

“뭐? 여기서?”

“성 페로몬 아니어도 좋아. 그냥 기분 페로몬.”

“진심이야?”

라영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지분거리는 알파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뭐 어때. 캠퍼스에서 다들 그러고 다니는걸. 심지어 대놓고 유혹 페로몬 뿌리고 다니는 애들도 얼마나 많은데. 저번에 체대 알파들 발정 나는 거 봤어? 진짜 웃겼는데.”

그는 그런 행동들이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마치 천박함과 멍청함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그런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이 라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그럼 한 번만이야. 나 진짜 이거 빨리 다 끝내야 해.”

“응. 진짜 약속해.”

약속의 손가락까지 내미는 알파의 꼬드김에 속아 넘어간 어린 오메가는 귀찮음을 털어낸다는 듯이 옜다 하고 페로몬을 살짝 방출했다.

공기 중에 기분 좋은 오메가 페로몬이 퍼졌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알파 네 명은 숨을 들이마시다가 서로 짠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냉각되는 것처럼 티가 나게 경직되었다.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고 오직 눈알만 굴려 서로의 표정을 확인했다.

충격적인 페로몬이었다. 바닐라처럼 달큼하면서도 향수에 많이 쓰이는 은방울꽃 향인지 아이리스 향인지 아주 매혹적인 꽃향기가 섞인 듯한 그 페로몬 향은 그의 목소리처럼 사람을 나른하게 이완시키면서 동시에 혈관을 찌릿하게 하며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심지어 이게 유혹하는 성 페로몬이 아닌 기분을 말해 주는 감정 페로몬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이런 친밀한 관계에서의 일상적인 페로몬만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들 수가 있다면 대체 성적 페로몬은 얼마만큼 사람을 돌게 만들지……. 그 생각만으로도 척주에 전율이 흐르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야말로 후각과 피부로 밀려 들어오는 페로몬이 몸속으로 들어와 심장에 불을 지피고 깊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단순히 매혹적인 페로몬에 반했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페로몬에 의해 자극받은 육체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불명확한 감정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그에게 확실하게 끌리고 있다. 그리고 저 사람을 갖고 싶다.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이헌이 나중에 이 순간을 회고했을 때 느낀 감상은, 흙으로 만든 인형이어서 한 번도 뛴 적 없던 가슴이 창조주가 코끝에 숨을 불어넣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듯이, 이제까지의 인생과는 다르게 이 사건으로 인해 진짜 감정이 있는 사람의 삶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피그말리온의 염원에 의해 상아 조각상에서 뜨거운 심장이 뛰는 사람으로 변한 갈라테이아와 같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황홀감에 젖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마주 앉은 얼굴들을 둘러보니 다들 그 페로몬으로 인해 유사한 기분을 느꼈는지 얼빠진 얼굴들이었다. 이헌은 테이블을 발로 차서 쾅 소리로 멍청하게 앉아 있는 그들의 이성을 환기를 시키고 나서 이를 악물며 읊조렸다.

“다 숨 참아, 씨발.”

그러고는 앉아 있던 가장 안쪽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려 하는 바람에 모두가 얼떨결에 같이 일어나서 카페를 나왔다. 나오면서 주변 테이블을 바라보았을 때, 모두가 아무 동요가 없는 걸 보니 죄다 베타이거나 아니면 자리가 떨어져서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카페의 유리문을 거칠게 밀고 나오니 맑은 공기가 비강을 통해 들어왔다.

“야, 야! 정이헌! 같이 가!”

저도 모르게 거의 달리듯이 걷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듣고는 우뚝 멈춰 섰다. 서둘러 따라잡은 친구들이 드디어 말문이 터졌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감상을 지껄였다.

“미쳤다, 씨발. 달달해서 녹아 버리는 줄.”

“우성 오메가 페로몬은 다 저런가?”

“아니야. 내가 경험해 봤는데 저 정도는 아니었어. 극우성 아니야?”

“와, 난 저거 맡고 설 뻔했어.”

그 말에 이헌이 어금니를 씹으며 영인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악! 야! 차도 하필 제일 아픈 데를 차?”

“그럼 혀를 뽑아 줄까, 아니면 그 좆같은 좆을 뜯어 줄까?”

“존나 험악하네. 안 건드려. 절대 안 건드린다, 허 참!”

“벌써 저기 저 알파 새끼가 건드린 거 아니야?”

잊고 있던 핵심을 말하는 상빈의 얼굴에 주먹을 박고 싶었다. 한 번도 그 누구의 과거를 신경 쓴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이런 기분이 들 거라고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저 매혹적인 오메가 옆에 앉아 있는 알파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익숙하지 않은 격한 분노가 몸을 휘감았다.

“야, 야! 일단 다 걸어. 신선한 공기라도 마시면서 정신 차려 다들!”

우경이 가만히 서서 분노로 온몸이 뻘겋게 달아오른 이헌과 아파서 종종 뛰며 빨갛게 달아오른 영인의 등을 양손으로 밀며 빨간 사람 둘의 걸음을 재촉했고, 상빈은 조용히 그들을 따라갔다.

아무 말 없이 흡연 장소까지 그들을 끌고 간 우경은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벤치에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모습에 거울효과[1]를 보여 주듯 모두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들었다. 이건 신선한 공기가 아니잖아, 투덜거린 영인은 덤이었다.

“정이헌, 너 진심인가 보다?”

“무슨 말이야?”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던 상빈이 진지하게 묻는 말에 이헌은 절로 신경질이 났다.

“진심으로 좋아하냐고, 이 연애 고자야.”

그 질문에 절로 고민스러워졌다. 인상을 쓰며 한참을 가만히 있던 이헌이 입을 열었다.

“대체 좋아한다는 게 뭐지?”

질문을 질문으로 되묻는 연애 고자의 모습에 다들 안무처럼 동시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 저었다. 불쌍하고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담뱃재를 털던 우경이 오랜 우정으로 특별히 맞춤 과외를 해 준다며 입을 열었다.

“혼자 있어도 걔가 생각나고, 너만 바라봤으면 좋겠고,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 싶고, 같이 어디 놀러 가고 싶고, 뭐 그런 생각이 드냐고.”

그런 간지러운 상상을 한 적이 있던가? 우경의 설명을 들으며 피식 비웃던 이헌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야 좋아하는 건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리고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길게 마시더니 다시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

“그냥 그 페로몬을 오직 나만 독점하고 혼자 맡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 걜 쳐다보는 다른 알파들 눈알을 다 뽑고 싶다든지, 내 침실에 가두고 싶다든지.”

어둡고 질척이는 내용과는 다르게 무감하고 건조하게 말하는 이헌을 보며 세 친구는 경악에 차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 너무 위험해!”

“와, 나 소름 돋은 거 보여? 이거 보여?”

“정이헌 이거 무서운 놈인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심각한데.”

한참을 경악에 겨워하더니, 이렇게 불쌍하고 바보 같은 친구를 구해 줘야 한다며 머리를 맞대고 솔루션을 서로 고민하며 말하는 모습이 마치 저희들이 사랑의 큐피드라도 된 모양새다. 군대도 다 다녀온 지나치게 듬직한 알파 예비역들이 징그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헌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 저들끼리는 열의에 차서 연애 고자에 감정 없는 로봇 같은 친우의 첫사랑을 대체 어떻게 정상적인 방향으로 궤도를 틀어 줘야 할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고민에 빠져 있다.

특히 늘 위압적이고 무신경하고 무뚝뚝하며 자기 할 일만 잘하는 알파고 같은 무서운 녀석을 아래 두고 가르치고 개도할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녀석들이었다. 우리 우정 인생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모두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일단 너 그런 소리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마.”

“맞아. 너무 위험해. 아무리 진심으로 좋아해서 알파 소유욕 특성이 발현되는 걸 감안해도 요즘 그렇게 말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 미쳐 버린 알파 범죄자들이 하는 소리라고, 그거.”

진짜 위험하다며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애를 다루듯 어르고 다독이는 모습에 이헌의 이마에 힘줄이 삐죽 솟았다. 이 자식들이 누굴 병신으로 알고.

“근데 일단 이라영이 솔로가 되어야 뭐라도 할 거 아니야?”

한참을 가르침을 준다는 둥 작전을 짜다가 영인이 의외로 좋은 질문을 해서 판을 뒤집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금방 수긍하던 그들은 맞댄 머리를 돌려 일제히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있던 이헌을 쳐다보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맹수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하며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너… 너…! 절대 범죄는 안 돼. 아무도 건드리면 안 돼.”

이 녀석들 머리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 정확히 알겠다. 겨우 진정시킨 머리에 다시 분노의 열이 오른다.

“사람을 뭘로 보고 진짜 이 새끼들이. 누굴 범법 행위랑 도덕도 구분 못 하는 병신으로 알아?”

이헌이 주먹을 꽉 쥐며 누구 하나 잡을 듯한 모습에 다들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일단 자연스럽게 깨지길 기다려. 이건 진짜야. 절대로 인위적인 게 들어가서는 안 돼.”

무리 중에 가장 상식적이고 학구열이 높은 상빈이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 새끼는 지가 무슨 코난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저 안경 부숴 버려야 내가 저 꼴을 안 보지. 안경으로 똑똑한 척하는 게 눈꼴시다며 영인이 중얼거렸다.

“근데 왜? 보아하니까 조금만 균열 만들면 깨지겠는데? 알파 새끼가 완전 병신이던데.”

“너넨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도 모르냐? 원래 주변에서 떨어뜨리려고 하면 더 불이 붙는 게 만국 공통의 진리야. 그냥 놔둬. 보니까 오래 안 갈 것 같아.”

우경의 질문에 상빈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며 단정 지었다.

그 단정에 아까 카페에서의 모습을 상기하던 그들은 모두 동의했다. 페로몬에는 쩔쩔매면서 자신의 오메가를 은근슬쩍 무시하고, 또 그걸 진절머리 내는 라영의 모습을 보니 조만간 헤어질 것 같았다.

“그럼 그동안 이헌이는 가만히 있으라고?”

마침 이헌이 묻고 싶었던 것을 우경이 질문했다.

“아니면 뭐 방법이라도 있어?”

상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원래 노련한 사냥꾼은 수풀 속에서 죽은 듯이 기다리다가 기회가 왔을 때 달려들어서 사냥감을 낚아채는 거라며 설파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이게 도대체 뭔 꼴이야, 씨발. 혼자서 읊조리는 말을 들었는지 영인이 짝사랑은 원래 다 그렇게 구차하고 초라한 거라며 이헌의 팔을 토닥이며 위로를 했다.

이 새끼는 위로를 가장해서 놀리는 게 틀림없다.

짝사랑이라는 단어에 코웃음을 쳤지만 그렇다고 딱히 뭐라고 반박해야 할 줄도 알지 못한 이헌은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떠들썩한 녀석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피곤할 따름이었다.

* * *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세 시간짜리 교필 과목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온 신경이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담은 오메가를 찾았다.

사실은 친구들에게 관심이 간다는 식으로 얘기하면서도 ‘설마….’, ‘혹시나….’ 하는 오만함이 숨어 있었다.

고작 페로몬 따위에 휘둘려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소유욕을 느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달린 페로몬 이상 질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독한 훈련과 노력을 거듭했기에 지금은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매혹적인 향기에 정신을 못 차린 것도 저 혼자뿐만이 아니지 않았나. 다른 알파들도 분명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저 자신은 그 페로몬에 홀려 저도 모르는 극우성 알파의 소유 본능이 발현된 것이리라.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서 혼자 생각했을 때는 코웃음을 치며 홀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이제까지 여러 가지 페로몬 문제로 지쳐서 쉬고 있던 본능이 발휘된 것뿐이다.

하지만 그 오만은 연약하게도 바로 그다음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설탕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아주 쉽게.

하지만 부서진 자신감은 파괴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달콤했다.

그는 어찌나 페로몬 관리를 잘하는지 지나가는 옷자락에서도 머리카락에서도 한 줌의 페로몬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늘 확신을 가지고 믿고 있던 자신의 이성과 더불어 두 번째로 자신하고 있는 페로몬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신체 기관에도 이제는 의심이 생겼다.

이 아름다운 오메가는 의도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금강석의 조각처럼 우뚝 서 있던 이헌의 자신감을 산산이 부숴 버린 것이다. 스스로는 금강석이라 믿었지만 그 기반은 진흙으로 되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자신의 연약함을 비웃어 줘야 할지 저 오메가의 타이탄보다도 크고 강한 영향력에 박수를 보내 줘야 할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페로몬 따위는 한순간도 느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걸음걸이, 교수를 바라보며 집중하는 눈빛, 필기를 하는 손가락, 종종 턱을 괴고 피곤한 듯 감는 눈의 날개 같은 속눈썹,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웃을 때 휘어지는 눈과 그 밑에 도드라지는 눈물점, 하얀 손에서 미약하게 분홍색을 띠고 있는 손바닥과 손끝…. 그의 모든 시각적인 요소와 그 움직임들이 마치 이헌 한 사람만을 위한 무대에서 일인극을 펼치고 있는 배우처럼 인상적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페로몬이 없더라도 그의 모든 것이 자극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짧은 머리 탓에 모자를 쓰고 다녔다면, 이제는 뒤에서 마음 놓고 관찰하기 위해 모자를 쓸 지경이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찌나 관음증 환자 같고 변태 같은지…. 그만두려고 노력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 시선은 그쪽에 가 있었다. 마치 S극을 찾아서 붙는 N극을 가진 강한 자석의 자기력처럼.

오늘도 이른 시간에 강의실에 도착해 학생증을 찍고 제일 뒷자리 의자에 앉았다.

누구 덕분에 절로 성실한 학생이 되어 가는 중이다. 실제로 강의의 내용은 반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출석만큼은 완벽했다. 어차피 재학생 전부를 대상으로 하는 교양 과목이라 심도 깊은 내용은 하나도 없었고, 강의 계획서만 봐도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뻔히 보였다. 적당히 매스미디어의 발전 역사와 현대에 이르러서 그게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상호작용을 하느냐, 그런 식의 겉핥기가 틀림없었다. 실제로 그런 내용의 강의를 진행 중이었고.

하나둘 학생들이 들어오고, 이제는 너무너무 보다 못해 지겨운 얼굴들까지 옆자리에 자리했는데 기다리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강의 시작 5분 전. 조교가 들어와서 노트북을 연결하고 교수도 들어오는데, 거의 동시에 숨을 잔뜩 몰아쉰 라영이 헐레벌떡 함께 뛰어 들어왔다.

긴 팔의 오버핏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고 회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검은 슬랙스 차림에 맵시 있는 로퍼를 신은 모습이 이헌의 눈에 빠르게 들어왔다. 눈치를 보며 출석을 찍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그의 친구들도 늦게 와서 붙은 자리를 못 찾았는지 띄엄띄엄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앉기를 포기했는지 비어 있는 뒷자리 쪽으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우연히도 그 자리는 이헌이 앉은 바로 앞줄의 대각선 자리였다.

이렇게 가까이 앉은 건 처음이었다.

이헌은 상대를 의식한 듯 저도 모르게 허리를 조금 세워 앉았다.

라영은 뛰어와서 그런지 어깨를 조금 들썩이며 숨을 쉬었다. 그리고 열이 나는 몸에 연신 손부채질을 하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목에 매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내렸다.

강의 자료를 들여다보느라 살짝 숙인 고개와 등 뒤에 목과 척추가 연결된 등뼈가 살짝 도드라지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선이 마치 매끄럽고 곡선이 아름다운 백자에 장인이 자기를 빚어 넣으며 부러 만들어 넣은 작은 손잡이 코 같다. 반질반질한 표면에 인위적으로 도드라진 부분을 손으로 더듬고 싶게 만들었다. 게다가 오버사이즈 티셔츠가 앉으며 밑이 깔린 모양인지 원래의 모양보다 더 넥 라인이 넓게 벌어진 채라 목과 등의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스카프 때문에 목에 땀이 났는지 끄트머리가 조금 젖은 머리카락을 젖히며 살짝 손으로 쓸어 올리는 그 모습에 이헌의 목구멍에 작은 사막이 생겼다. 살짝 작은 열기가 올라왔을 뿐인데, 붉은 모래 위로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양 머리는 시들어 어지럽고 입 안의 점막은 가물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 사막화의 원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강렬한 충동이 치밀었다.

저 사슴같이 가느다란 하얀 목을 물어뜯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저 목덜미를 핥고 잘근잘근 씹어서 붉은 흔적을 잔뜩 남기고 나를 아로새기고 싶다.

푸르름이 펼쳐진 꽃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꽃사슴 같은 저 사람의 모가지를 끊어서라도 배 속으로 욱여넣고 싶다. 내 것이 아닐 거라면 차라리…….

끝없이 뻗어 나가는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잔인한 충동이 치미는 걸 눌러야 한다.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그 후로 강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서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 * *

잔인한 충동이 치미는 것을 누르려고 의식적으로 좀 더 거리를 두었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온 신경이 남자를 향해 쏠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견뎌낼 뿐이었다.

숨을 죽이고 기회가 오길 바라는 맹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헌은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10월이 한창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은 빠르게 다가왔다. 중요한 시험 기간에 온통 정신을 빼앗는 문제의 강의는 과제로 대체되고 수업을 하지 않아서 이헌은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내년 가을 학기에 미국에 MOT[2] 과정을 위해 입학하기 위해서는 학사 성적 관리를 잘해야 했고, 사실 한눈을 팔 시간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탁월한 지능이 있다고 해도,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이 모였다는 국내 최고의 대학교에서는 노력이라는 걸 안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그런 방만한 태도를 감싸며 돈으로 일을 해결해 주는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도태된 패배자를 바라보는 듯이 모두가 능력주의, 성과주의였다.

이제까지 계획한 대로 어느 곳에도 마음 두지 않고 차근히 플랜을 실행해 가며 잘 살아왔는데, 세상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 요즘이다. 그건 사회의 우위 계층으로 살아온 이헌이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얼굴을 보지 않으니 집중은 더 잘 돼서 생각보다 차분하게 중간고사를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가을 학술제가 열렸다.

“너 이거 무조건 가야 해!”

언제나 사교의 만렙을 자랑하는 우경이 이헌의 후드 티의 모자 부분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꼴에 알파라고 힘은 좋은데 심지어 날씨에 맞게 두터워진 저지 소재의 후드 티셔츠라 끌려가는 목 부분의 압박이 상당하다.

“미친…. 이거 안 놔?”

“너 학연, 지연, 혈연 중에 학연이 왜 제일 처음에 오는 줄 알아?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런 거야. 물론 나중에 사회 나가면 충분히 다시 볼 기회가 있는 얼굴들이지만, 학교 다닐 때 학생으로 열의를 보여 주면서 얼굴 비추는 건 또 다른 일이라고. 무조건 가야 해.”

남자들, 특히 알파 남자들 무리에서는 동등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암묵적인 서열이 있는지라 우경은 대체로 이헌에게 맞춰 주는 편이었지만,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에 한해서는 이렇게 끝까지 주장을 안 굽히는 편이었다. 이헌은 그런 부분을 잘 알고 있기에 손목을 내리쳐서 쥐여 있던 옷자락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아프다고 구시렁거리는 우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진리관 앞에 촌스러운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최근 가장 활약하고 있는 젊은 스타트업 사업가 대표. 20대가 선망하는 최고의 기업가.

이런 식상한 문구라니. 이헌은 현수막을 비웃으며 전통 있는 건물이라고들 얘기하지만, 자신의 눈에는 그저 낡고 오래된 건물로 보이는 진리관으로 들어섰다. 진리관 건물은 내부를 일부분만 리모델링하면서 유지해 온 터라 옛날 양식과 현대적인 디자인이 조화롭지 못했다. 이헌은 층계를 오르며 그것들이 우스운 꼬락서니라고 생각하며 소강당으로 들어가는데 우경의 입이 닫히지를 않는다.

“다 이런 관계들이 피와 살이 되는 거야. 사람이 아무리 너처럼 기반이 좋아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는 거고.”

마치 세상을 50년 이상은 살아온 듯한 말이다. 이헌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너 또 나중에 동문 선배들 모인 장소에서 인상 찌푸리고 구석에 서 있다가 나가 버리지 말고 좀 잘 해!”

“…….”

“Work hard, be kind. and amazing things will happen[3].”

또 어디서 이상한 명언을 주워들었는지 우경이 넌 좀 친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입술이 비틀린 이헌의 눈앞에 검지를 까딱거리며 충고한다. 코웃음을 칠 만큼 간단하며 이헌이 살아온 세상에는 전혀 맞지 않는 조언이었지만, 그 ‘친절하라’는 말이 은근히 마음에 남는다.

자연스럽게 모든 생각의 끝이 마음속의 그에게로 이어졌다. 확실히 그는 친절한 사람을 좋아할 것이다. 그 자신이 친절한 사람이니까. 두 달 동안 강의 시간 내내, 그리고 끝나고 난 이후에도 종종 그를 관찰하며 발견한 라영의 성격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무표정한 모습일 때는 새침해 보였지만 누가 말을 걸거나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늘 미소를 띠고 살갑게 이야기했다. 친구들과 있으면서도 항상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자신과는 참 다르게 잘 모르는 타인에게도 소소한 친절을 베푸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 늘 그렇게 친절한 모습이 자신의 기본 베이스이니 남도 그러한 태도와 예의를 보여 주기를 바랄 것이다. 설령 성인군자와 같은 성격을 가져서 남에게는 그런 모습을 바라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분 좋게 느끼겠지.

제일 뒤편의 구석진 자리가 이헌이 양보할 수 있는 한계였다. 앞자리에 앉아 웃으면서 박수 치며 식상한 특강 내용이 누구보다 재미있는 사람처럼 리액션이나 해야 하는 꼴은 도저히 안 되겠다. 그런 이헌의 옆자리에 앉으며 우경은 연신 투덜거렸다.

확실히 유명한 선배의 강연이라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고, 이헌은 그 인파 중에서 마음에 박혀 있는 사람의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쟤들 아직도 안 헤어졌나 보네.”

우경이 이헌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그들을 흘깃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의 허리를 당당하게 감고 느끼한 얼굴을 자랑하며 웃고, 주변의 인사에 응해 주며 자리에 앉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절로 부아가 치민다. 저 기름 낀 샌님 같은 멀끔한 낯짝을 한 대 쳐 주면 정말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씨발….”

그런 이헌에게 진정하라는 듯이 우경이 무심하게 무릎을 툭툭 쳤다.

“어…! 시작한다.”

무대를 제외하고 조명이 좀 어두워지며 스크린이 밝아지고, 강연자를 소개하는 인트로 영상이 나온 뒤에 오늘의 강연자가 박수를 받으며 등장했다.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처럼 내내 화면을 넘기며 강연을 진행하는 강연자 덕분에 객석은 계속 어두워서 마음 놓고 방만하게 굴 수 있었다.

강연이 반쯤 진행되어 모두가 살짝 루즈해졌을 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두 인영이 보였다. 쉬는 시간 없는 강연인지라 급한 사람들이 한두 명씩 나가곤 했기에 그런 사람들일 거라 생각하던 찰나, 익숙한 얼굴이 그림자 속에서 살짝 보였다.

그다. 그가 애인의 손에 붙들려 곤란해하며 강당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헌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뒤따랐다. 

“야, 너 어디 가?”

우경이 황당해하며 묻는 속삭임도 채 듣지 못했다.

소강당의 문을 열고 나가 복도에서 두리번거리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대체 갑자기 끌고 나와서 어디로 가는데?”

잔뜩 신경질을 내는 목소리를 따라 조용히 코너를 도니 그들이 화장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의 말처럼 그가 끌려가고 있었다. 이헌은 발걸음을 서둘러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뒤를 따랐다.

덜컥, 덜컹.

급하게 칸막이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오래되고 빈약한 칸막이 벽에 사람의 등이 부딪히는 소리들이 이어진다. 심지어 아래가 뚫린 문이라 그들의 발까지도 다 보였다.

“하아…. 너 때문에 흥분돼서 도저히 못 참겠어.”

입을 맞추고 핥는지 연신 물기 어린 점막의 소리가 말소리 가운데 섞였다. 역겨운 새끼.

“아니, 무슨 강연 도중에…! 나 저거 듣고 감상문 써서 제출해야 돼!”

“야, 넌 지금 내가 이렇게 됐는데 그 생각이 들어?”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은데…!”

“닥치고 바지나 좀 내려 봐!”

마치 지금 세우고 있는 역겨운 좆과 자신의 기분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듯이 이를 악물고 윽박지르는 소리가 넘어왔다. 저 미친 새끼가……. 젠장, 어떻게 하지? 이걸 당당하게 막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연인들의 애정 행위를 방해하는 진상 같은 놈이 될 걸 감수하고…. 화가 치미는 와중에 고민에 빠졌다.

“선배…! 윽, 그만. 그만 좀 해…!”

저건 분명 강제다. 반항하는 목소리에 섞여 상대 오메가를 히트 사이클이 올 만큼 성적으로 유혹하고 무너뜨리기 위한 우성 알파의 짙은 성 페로몬이 쏟아져 나왔다.

페로몬 샤워다. 저 씨발 새끼가.

이헌은 더 이상 도저히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그들이 있는 화장실 칸막이 문을 쾅 쳤다.

온 힘을 다해 쳐서 문을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안에 있는 라영이 다칠까 염려된 나머지, 밖에 누군가 있다는 경고성의 행동밖에 하지 못했다. 잠시 칸 안에서 침묵이 흐르는 새 옆 칸으로 몸을 숨겼다. 분명 누군가에게 이런 꼴을 보이기 수치스럽겠지.

“억!” 소리와 함께 잠금 장치를 딸깍거리며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가는 소리를 확인하고 이헌은 문제의 칸의 문을 발로 힘껏 찼다.

“아악! 뭐야!”

쓰레기 같은 알파가 문에 치인 충격에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발로 찼다. 스스로도 모르게 아주 밀도 높은 극우성 알파의 분노를 담은 감정 페로몬이 쏟아져 나와서 상대를 압박했다.

“씨발. 너 같은. 쓰레기. 새끼가.”

음절의 사이마다 힘을 주어 짓밟았다.

처음에는 반항을 하려는 듯이 움직이며 맞던 알파는 물리적인 구타와 폭력적인 페로몬의 위압감에 몸을 펴지도 못한 채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웅크리고 찌그러졌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맞으면서 변기 같은 단단한 부분에 부딪혔는지 관자놀이 근처에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꺼져, 이 좆같은 새끼야. 다시 접근하는 거 눈에 띄어 봐,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차 주고 그 쓰레기를 버려 두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못 찾을까 봐 걱정했는데 더러운 알파 페로몬의 흐름이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 있어서 이헌은 예민한 감각으로 쉽게 라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흔적은 한 층 위에 작은 강의실인지 회의실인지 모를 장소까지 이어져 있었고, 복도 쪽으로 뚫려 있는 창문을 살짝 들여다보니 라영이 책상에 엎드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온 것 같지는 않았지만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이헌은 우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어디 갔어?

아직 강연이 끝나지 않았는지 속삭이며 전화를 받는 목소리에 용건만 빨리 이야기했다.

“오메가 히트 억제제. 그거 구해서 위층으로 바로 좀 와. 지금 당장.”

-뭐라고?

“빨리. 좀 도와줘.”

이헌이 도와 달라는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터라 우경은 당황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제는 인맥 많고 수단 좋은 우경이 어떻게든 약을 구해 줄 거라고 믿으며 저 가련한 오메가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헌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피면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매혹적인 페로몬이 문밖으로 조금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에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안쓰러움이 동시에 울컥 치밀어 올랐다. 좆같은 놈이 꼴에 우성 알파라고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평소에 얼마나 갈무리를 잘 하는 사람인데. 역시 그 새끼를 죽여 버렸어야 했다. 어금니를 짓씹으며 분노에 차 있는데 서둘러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15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정이헌!”

이헌은 달려오는 우경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읍…….”

이헌의 근처로 가까이 오자 같은 우성 알파인데도 불구하고, 이헌의 짙디짙은 분노의 페로몬이 힘들고 거북한지 우경은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단순히 냄새가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효과는 없을 테지만, 극우성 알파의 거센 페로몬에 저항하는 나름의 본능이었다.

이헌은 그런 친구의 반응에 페로몬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하며 급하게 용건을 꺼냈다.

“부탁한 거는?”

“여기. 마침 우리 후배 오메가 중에 갖고 있는 애가 있어서 빨리 구했다. 여기 물도 가져왔어.”

눈치 빠르고 센스 있는 우경이 뭔가 이헌이 짝사랑하는 오메가에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빠르게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이헌은 우경이 건네준 오메가용 억제제를 손에 꼭 쥐었다.

“저 안에 있는 거야?”

우경도 새어 나오는 페로몬을 알아챈 건지 라영이 있는 곳의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왜 안 들어가고? 얼른 들어가서 전해 줘!”

억제제를 쥐고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이헌에게 우경은 물병도 안겨 주며 어울리지 않게 발을 동동거렸다.

왜 당장 들어가서 얼굴을 밝히고 도움을 줘서 호감이나 연결을 만들지 않느냐며 안달이 난 모습이, 마치 인어공주가 왕자를 구하고도 몸을 숨기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세바스찬 같은 심정인 게 틀림없다.

“방금 우성 알파한테 강제로 페로몬 샤워를 당한 사람이라….”

이헌이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또 우성 알파가 다가가면…. 분명 겁먹을 거야. 불쾌해하거나.”

너같이 자기밖에 모르고 타인에게 관심 없는 무감하고 냉정한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듯이 우경에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너 이 자식 진심이구나. 그럼 어떻게 하지. 세바스찬 우경은 긁적이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야기했다.

“내가 몰래 들어가서 책상에 놓고 올게. 지금 보니까 계속 엎드려 있는데.”

창문을 흘끗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지금 잔뜩 흥분해서 분노의 페로몬이 넘실거리고 있는 본인보다는 침착하게 페로몬이 새지 않고 있는 우경이 더 나을 것이다.

우경은 짙은 페로몬을 완전히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 이헌의 손에서 다시 억제제와 물병을 받아 조심스럽게 강의실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동태를 살피며 뒷문을 살짝 열어서 까치발로 살금살금 소리 없이 걸어가 바로 옆 책상에 라영이 앉은 쪽에 가깝게 물과 약을 올려 두었다.

라영은 엎드려 앓으면서 페로몬을 누르느라 정신이 없는지, 누가 오가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경은 다시 까치발로 조용히 나오면서 몸이 완전히 보이게 되지 않게 됐을 때, 문을 의도적으로 큰 소리를 내며 닫았다. 약을 주러 누군가 왔다 갔다는 것을 알게 해 주려고 하는 세심한 배려에 이헌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저게 바로 녀석이 말하던 배려와 친절이군.

쾅.

문소리에 토끼같이 화들짝 놀란 라영이 고개를 벌떡 드는 모습이 보인다. 문에서 누가 들어오는지 앞뒤 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약과 생수병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그것들을 쥔 손을 잠시 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아까는 없었던 것이라 자기를 위해 준비된 물건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이 오메가용 억제제를 까서 물과 함께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30분 안으로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할 것이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이헌을 보며 우경이 물었다.

“내가 같이 있어 줘?”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며 이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마웠다. 나중에 갚을게. 얼른 들어가 봐. 선배와의 만남, 그거 참석한다며.”

“갚기는 무슨…. 알겠어. 그럼 나 가 볼 테니까 혹시라도 곤란한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정말 괜찮으니까.”

“그래. 고맙다.”

정이헌이 부탁을 하고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는 모습을 보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클래식하고 고루하지만 이거만큼 알맞은 표현이 없다고 생각하며 우경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떴다.

우경이 떠난 뒤 이헌은 페로몬을 완전히 없애려고 애를 쓰며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잠시 뒤, 완벽하게 새어 나오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주변을 살피며 혹시라도 그가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근처에서 보초를 섰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약효가 도는지 라영이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조금 땀에 젖고 표정이 힘들어 보였지만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가려는지 계단을 내려가는 라영이 눈치채지 못하게 멀리서 뒤를 따라갔다. 안전하게. 안전하게 돌아가는 모습만 확인하자. 아직 정상이 아니어 보이니까.

그렇게 다짐을 한 이헌은 라영이 힘없이 차가 다니는 곳까지 걸어 나가 택시에 오르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하고 있던 몸이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간 것처럼 새어 나가고 기운이 빠졌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있다는 일은 이토록 지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힘듦이 하나도 고달프지 않고 달콤한 게, 이래서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모양이지.

아프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우성 알파의 본능적인 독점욕 때문에 격해지고 코너로 몰렸던 소유욕과 폭력적인 마음이 모닥불에 찬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푸시시 소리 내며 볼품없이 꺼져 버렸다. 그래,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저 사람의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아니요, 그 맑은 영혼이 가득 채워져 있던 눈동자가 빛을 잃고 탁해지는 것도 아니었어. 나는 그가 안전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이헌은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기분 더럽고 불쾌한 일 가운데서 찾은 단 하나의 좋은 일이었다. 희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그마해서 자조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 * *

“이제 운동하는 날을 좀 줄여도 될 것 같은데요? 약은 이미 줄이셨죠?”

이헌의 담당 재활치료사가 혈액검사 결과를 확인하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했다.

“요즘은 갑자기 페로몬 날뛰고 그런 거 잘 못 느끼시죠?”

확실히 갑작스럽게 날뛰는 페로몬은 줄었지만 감정적인 이유로 날뛰는 페로몬은 잔존했다. 이헌은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며 무감하게 여러 가지 운동 기구들을 응시하다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줄이지 않고 계속 그대로 진행하죠.”

“그래요? 뭐 하긴 아침 운동이 건강에 참 좋긴 합니다. 환자분께서 원하시면 프로그램은 줄이지 않고 계속 진행할게요. 검사만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으로 점차 줄여 나가면 될 것 같네요.”

치료사는 VIP 환자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샤워를 마치고 입고 나온 트랙슈트 밖으로도 신나게 펌핑 된 근육들이 도드라졌다.

“너는 어째…. 갈수록 이렇게 거대해지냐?”

위로도 큰데 옆으로도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며 영인이 이헌의 이두박근을 주물렀다. 실제로 같은 우성 알파 네 명이 모여 있는데 유독 한 명이 더 위협적인 비주얼이다. 당장 이종격투기에 나가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어 댄다.

“치워, 좀.”

징그럽다는 듯이 손을 쳐냈다. 스킨십이나 접촉에 예민한 체질은 성장하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불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특히 같은 알파인 남자 새끼에게는 더더욱.

“진짜 까칠해서는. 윤우경이 너 성격 좋아졌다고 하는 걸 믿은 게 잘못이다.”

영인이 치사하다는 듯이 입을 삐쭉거리며 괜히 가만히 있는 우경을 팔꿈치로 찍으며 화풀이했다.

그들이 앉은 자리 옆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라영이 친구들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자식을 가만히 뒀어?”

친구들이 잔뜩 흥분해서인지 높은 언성이 꽤나 규모가 있는 강의실을 쩌렁쩌렁 울리게 했다.

“일단 쪼인트 까고 도망치긴 했는데, 진짜 다시 마주치면 개박살 낼 거야…. 두고 봐.”

라영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확연하게 보였다.

“아서라. 그러다 또 같은 꼴 당하면 어떡해?”

“차라리 에타에 올려 버리자.”

“야, 그러다가 이라영도 같이 신상 다 까발려져. 그리고 그 새끼네 재벌이라며. 명예훼손이라고 고소하면 어떡해?”

“제기랄. 이 더러운 세상. 돈 있는 놈이라 신고도 못 하고…!”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피해. 절대 인문대 근처로 고개도 돌리지 마.”

“맞아, 그게 낫겠다. 괜히 또 라영이만 당할까 봐 걱정이야.”

“근데 내가 오전에 그 선배랑 같은 교양이잖아? 교양 스키, 그거. 그 자식 오늘 안 나왔던데?”

“그래? 어디 가서 차에 치인 거면 좋겠다. 아니면 뒤로 엎어져서 코가 깨졌거나.”

“아님 누구한테 죽도록 맞은 거였으면 좋겠네. 그 씨부럴놈.”

뭘 알고 얘기하는 게 아닐 텐데 은근히 예리한 사람이 있네.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도 부산스럽게 분노에 차서 얘기하는 그들을 보며 우경이 이헌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 다시는! 재수 없는 우성 알파 새끼들 안 만날 거야. 오만하고 더러운 개자식…!”

듣는 우성 알파 서운하게 저렇게 싸잡아 후려치는 말을…. 라영이 이를 갈며 중얼중얼 우성 알파에게 분노하는 말에 영인이 눈치 없이 속닥이며 얘기한다. 야, 닥쳐.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뭔데? 뭐야? 아, 조용히 해. 뭐야, 나 말고 다 알고 있는 거야?

“시끄러워. 진짜 좀 닥쳐.”

이헌은 급격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시끄럽게 속닥거리는 친구들을 향해 뇌까렸다.

“얜 또 왜 같이 저기압이야?”

영인이 계속 눈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꼴에 분노가 두 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정확한 원인인 라영의 구 남친에게로 향했다.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 같은 새끼. 헤어지고 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거대한 똥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헌은 난생처음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에 목 뒤로 피가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워, 워…! 진정해! 일단 수업 끝나고 얘기하자! 캄 다운!”

영문을 모르는 상빈과 영인 사이에서 우경이 맹수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런 거면 화가 식길 자연스럽게 기다려야지…!”

우경이 라영의 면이 상하지 않게 대충 에둘러 한 설명에 자칭 연애 전문가 영인이 그렇게 말하고 나섰다. 맥주병이 무슨 와인인 양 휘휘 돌리며 하는 말에 더 재수가 없다.

“해결 방법이라고 말하는 게 고작 그거야? 씨발, 저것도 친구라고…!”

이헌이 맥주병을 들고 아까부터 쌓여 온 분노를 담아 한 대 치려고 씩씩거리는 모습에 자신 있게 깐죽대던 놈이 움찔한다. 너희들 중에 자기가 가장 오메가들 마음을 잘 안다며, 말해 보라고 가슴을 탕탕 치던 이 머저리 새끼를 믿은 내 잘못이지. “악! 여기 맹수가 사람 친다!” 영인이 팔로 가드를 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정이헌, 좀 진정해. 내가 듣기에도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여. 네가 뭐 가까이 가서 사정 다 안다는 듯이 ‘나는 그런 놈들하고 달라’ 이러고 설득이라도 할 거야? 아니, 설령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걸 믿어 줄까?”

상빈이 진정하라는 듯이 말하면서 이헌의 시커먼 모습을 아래위로 훑었다. 오늘도 트랙슈트에 검은 후드 집업까지 걸치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한층 더 슬럼 출신처럼 보인다.

“그건 그렇지. 누가 봐도 아까 말한 그 ‘재수 없는 우성 알파’의 표본인 정이헌이 말한다고 먹힐 설득이 아니지.”

상빈이 하는 말에 우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받고, 더블!’ 외모랑 차림새를 까는 말을 받고 더블로 성격까지 후려친 것이다. 이 새끼들이 진짜 여기가 포커 판도 아니고 이런 것들을 친구라고…. 빡이 치고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맞는 말이라 이헌은 씩씩거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무슨 대단한 해결책을 내주겠다며 오랜만에 학교 앞에서 간단하게 마시자는 말에 넘어간 게 죄다.

“그래서 또 이번에도 마냥 기다리라는 거냐?”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자 다시 되물었다.

“상처랑 화가 가라앉기 기다리면서…. 계속 틈을 노려보는 수밖에.”

자칭 현자 상빈이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의 대안은 없다는 듯이 술이나 더 먹자며 맥주를 추가 주문한다.

허탈하다. 살면서 이렇게 초라한 적이 있었나…. 25살이나 먹고 10대 때도 겪지 않았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느낌이라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없다. 요즘 아주 인간다워져서 좋다는 그들의 말이 전혀 좋지 않았다.

눈앞에 김빠진 맥주마냥 기대에 찼던 마음의 거품이 푸시시 가라앉았다.

* * *

겨울을 코앞에 두고 늦가을이 되어 버린 캠퍼스에 생기를 잃은 나뭇잎들이 낙엽으로 바닥을 굴러다니고 학생들의 발에 밟혀 조각나고 부서져서 가루가 되었다. 한쪽 가장자리에서는 그런 낙엽을 쓸고 모아서 비닐에 담는 사람들……, 떨어져서 으깨진 은행나무 열매의 지릿한 냄새, 차가운 바람이 목깃을 스쳐 지나가는 그 냉기. 그 냉기를 이기지 못해서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어딘가 부산스러운 듯하지만 무언가 쓸쓸했다. 단순히 매해 가을이 쓸쓸했던 것인지, 허한 마음이 똑같은 가을 풍경을 쓸쓸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제는 구분하기도 지친 마음이었다.

오늘도 아침 운동을 하고 덜 말리고 나온 머리 때문일까, 이헌은 추위를 잘 느끼지 않는 체질에도 불구하고 귀가 차갑다는 생각을 하며 입고 있던 옷의 지퍼를 올리면서 중앙 도서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핸드폰 메모장을 들여다보며 과제를 위해 빌려야 할 책 목록을 훑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그다. 그의 목소리였다.

바람 소리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시끄러운 소음들 사이에서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반가운 이라영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니 어느 조그마한 여자가 바닥과 자신의 손에 짐을 잔뜩 들고 있는 것을 라영이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여기에다가 수레를 가져왔는데……, 수레가 없어졌어요. 수레를 가지고 오면서 혼자서도 괜찮겠지, 생각하고 혼자 왔거든요….”

여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척 곤란해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도와줄 친구분들이 아무도 없나요?”

바닥에 쏟아진, 똑같이 스프링 제본된 책들을 그녀와 함께 주워 주며 라영이 물었다.

“다들 수업에 들어갔어요…….”

이틀 전에 온 비가 완전히 마르지 않아서, 젖은 낙엽과 젖은 흙으로 엉망이 되어 땅을 구르고 있는 책들을 자신의 낡은 옷으로 탈탈 털며 여자는 울상을 지었다.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고 촉촉해지는 것이 곧 있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뒤로는 중앙도서관 옆에 딸린 학생들의 복사, 인쇄, 제본을 해 주는 사무실이 있었다. 각각 과마다 있기도 했지만 늘 순서가 빠듯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하는 다양한 이유로 규모가 큰 중도 복사집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여자도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인 것 같았다. 게다가 스프링 제본 같은 경우는 확실히 중도 복사집이 잘하기는 하지……. 이헌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들을 살폈다. 확실히 혼자서 들 수 없는 양이었다. 그들의 대화와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며 상황을 파악한 이헌은 우뚝 서서 팔짱을 끼고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국 여자가 소리 없이 더러워진 소매를 들어 눈물을 훔쳤다.

“어어……. 울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 말에 여자는 닦던 소매를 내려 라영을 올려다보며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바쁘시지 않으세요…? 저 때문에 손도 다 더러워지시고….”

같이 책에 묻은 것을 털어 주느라 더러워진 라영의 손을 보며 여자는 허둥지둥 백 팩을 열어 지하철역 앞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것 같은 물티슈를 꺼내어 건네었다.

“괜찮아요. 도와드릴 테니 울지 말고 눈물 닦으세요. 어디까지 가세요? 물티슈는 잘 쓸게요.”

라영은 미소를 짓고는 여자가 건넨 물티슈를 한 장 뽑아 쓰고 돌려주며 말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이헌은 살짝 기가 찼다. 라영의 안색은 평소보다 안 좋아 보였고, 생판 모르는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기에는 그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서울 내에서 가장 큰 캠퍼스를 가진 한국대학교는 부지가 상당히 넓어서 캠퍼스 내부에 지선버스가 여러 대 다니고, 차가 없이 걸어서만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는 건물들도 많이 있었다.

도대체 저 여자가 어디까지 갈 줄 알고 저런 안색을 하고는 도와준다고 선뜻 이야기하는 건지…. 엉겨 붙는 알파들을 거절할 때 보면 그다지 유하고 끌려다니는 성격도 아닌 것 같은데, 저렇게 생면부지의 남을 보며 손수 팔을 걷어붙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법학관까지 가요…….”

여자는 움츠러들며 말했다.

하! 이헌은 멀리서 그 말을 듣고는 기가 차서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가 충분히 움츠리며 말할 만했다. 왜냐하면, 중도에서 법학관은 아주 최악으로 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건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법학관이라니, 거절해야 마땅했다. 평소의 라영답지 않게 뭔가 페로몬이 어지럽게 들쭉날쭉한 것을 보니 분명 그는 몸이 좋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라영은 거절하지 않았다.

“이게 다죠? 법학관까지 같이 들어드릴게요.”

라영은 걸음을 옮기며 부지런히 손에 든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했고, 여자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를 남발하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이 배 아래 놓인 손에서 턱 끝까지 쌓인 책들을 들고 법학관까지 걸어가다니. 마음이 약해도 너무 약하다.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전형적인 착한 사람이란 말인가…. 이헌은 어이없는 마음을 감추며 그들을 살피다가 결국 성큼성큼 걸어서 그들의 앞에 섰다.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이헌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여자가 든 짐은 쳐다보지도 않고 라영의 손에 가득 들린 짐들만 빼앗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여자를 재촉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자와 라영은 갑자기 시커멓게 큰 사람이 다가와 도와준다는 말만 하고 빼앗아 가는 짐을 보며 어버버거렸다. 그러다 여자는 앞서가는 이헌을 어찌할 수 없어, 당황한 얼굴로 감사했다는 말을 라영에게 남기며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종종거리며 짐을 들고 따라붙었다.

이헌은 고개를 살짝 돌려 뒤에 남은 라영을 흘낏 쳐다보았다.

허둥지둥하다가 그녀의 인사를 받고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그.

얼른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저렇게 서서 뭘 하는 건지……. 얼른 자신들이 빨리 사라져 주어야 자리를 뜰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법학관 안에 본인의 학회실로 인도한 여자를 따라 이헌은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들고 온 짐을 텅, 소리 나게 올려 두고 그대로 뒤를 돌아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뒤를 돌아보지도, 대답을 하지도 않고 다시 원래의 목적지였던 중도를 향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평생 한 번도 하지 않은 짓을 했다.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서 나의 시간과 힘을 들여서 도와주는 일.

남을 돕기 위해서 매년 그룹과 연계된 복지 재단에 돈을 보내는 일은 있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과와 계획을 변경해 가며 충동적으로 시간을 써서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은 자신의 일생에 절대 없는 일이었는데……. 아파 보이는 몸을 하고도 곤란에 처한 사람을 보며 내내 웃음을 머금고 친절하게 손까지 더럽혀 가며 돕는 라영을 본 순간 자신의 강박증 같은 건 생각나지도 않았다.

설마 아픈 몸으로 그 자리에 아직까지 남아 있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돌아간 중앙도서관 앞은 예상처럼 바쁘게 지나가는 이름 모를 사람 몇과 쓸쓸하게 흩날리는 낙엽 따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걸까…? 캠퍼스가 넓은 만큼 타 과인 라영과는 일주일에 한 번 교양 수업에서 보는 일 외에는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짧은 마주침이었지만 반가움과 아쉬움이 동시에 남았다.

저도 모르게 아쉬워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비웃으며 이헌은 빠르게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mirroring effect: 미러링 효과, 동조효과. 상대방의 행동을 은연중에 따라 하는 행위

* management of technology: 기술 경영

* 열심히 일하고, 친절하라. 그러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 코난 오브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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