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니까 이 일은 모두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특수형질관리국 오메가 센터의 이지은입니다. 이라영 씨, 잠시 통화 가능하실까요?
평소에 떠올릴 정도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발랄한 음성을 들으면 자연히 얼굴이 떠오르는 사람이라 반가운 마음과 불안한 마음을 동시에 느끼며 급하게 대꾸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잠시만요.”
보통 건강상의 간단한 일일 경우 공식으로 보내오는 전자문서로 오고 센터의 담당자가 직접 전화를 걸지는 않는다. 이건 분명히 통화 내용이 길어질 일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라영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일어서서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네, 자리 옮겼습니다.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라영 씨 지금 체내 생체 호르몬/페로몬 조절 칩(rod) 제거 기간 다가온 거 알고 계시죠?
아니,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몰아치는 데드라인들과 기존에 다루고 있는 광고주들에게서 최근 새로운 이슈가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근 한 달 넘게 주말 없이 지내던 참이었다.
-이번 달 내로 오메가 센터 지정 병원 내원하셔서 칩 제거하셔야 해요. 페로몬이 점점 민감하게 느껴지고 계실 거예요.
실제로 칩이 제 기능을 하고 있을 때는 스스로를 베타처럼 느낄 정도로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페로몬이 슬슬 민감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근데 이게 그냥 잦은 야근에 수면 사이클이 엉망이 되어서 그런 줄 알았지.
“최근에 확실히 느끼고 있긴 했어요. 꼭 이번 달에 방문해야 하는 거죠?”
휴게실에 놓여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며 이번 주와 다음 주의 스케줄들을 머릿속으로 훑었다. 일단 새 광고 들어오는 건 없을 것 같은데….
-네. 특히 라영 씨 이번이 연달아서 칩을 체내에 삽입한 게 세 번째예요. 이번에는 꼭 제거하고 정밀 검진을 받으셔야 해서 연락 드렸어요. 곧 국민건강보험 관리공단에서 정식 전자문서 발송될 거예요. 확인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또 어떤 걸 밀어내고 시간을 만들어야 하나…. 따로 시간을 내서 내원할 생각을 하니 답답해졌다. 라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이런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전화를 걸지 않았으리라는 걸 센터 담당자인 지은도 라영도 끈끈하게 이어져 온 십 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발랄한 지은의 목소리가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라영 씨, 제가 정말 이렇게 인류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비인간적인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죠,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사실은 이 이야기가 본론이에요.
정식 담당자로 처음 만났던 스무 살의 라영과 스물일곱 살의 지은일 때와 마찬가지로 과장된 단어를 써서 어찌나 늘 거창하게 말을 하는지,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등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도대체 뭘 말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까는 거지…?
-이제 슬슬 결혼을 해서 2세 생각을 해 주셔야 해요.
“결혼이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던 라영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결혼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이야기지? 라영은 도저히 이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네, 우리 둘 다 너무나 잘 알다시피, 라영 씨는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되는 극우성 오메가이시고,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는 2세를 한 명 이상 출산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물론 이 의무라는 것도 지금 와서는 형질자인권위에서 지속적으로 논란이 제기되고 있고, 많은 분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의무에 있어서도 자유를 많이 갖는 추세이긴 하죠.
그 얘기를 듣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자, 어린이 여러분.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배웠죠? 누군가 다가와서 몸을 만지거나 보여 달라고 할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하죠?’
형질자 센터의 어린이 오메가 교육 시간이었다. 대한민국의 오메가라면 누구나 받아야 하는 의무교육의 시간에 어린이 라영은 교사의 질문에 오른손을 번쩍 들고 친구들과 함께 합창으로 대답했다.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비단 오메가뿐만 아니라 모든 어린이가 배워서 숙지하고 있는 아주 쉬운 내용이라 아이들의 목소리는 크고 자신만만했다.
‘맞아요. 잘 했어요.’
교사는 아이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며 한참을 일상적인 위험과 더불어 오메가에 대해 설명을 해 주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모인 어린이 여러분은 제2성별로 오메가 중에서도 특히 우성 오메가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다양한 혜택이 주어지는 만큼 일생 동안 한 명 이상의 자녀를 출산할 의무가 있어요.’
선생님의 미소를 떠올리며 짧은 회상은 끝났다. 그래…. 분명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아 왔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라영은 성인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면 결혼을 하고 각인을 하고 아이를 낳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실제로 아이를 좋아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묶이는 각인에 대한 로망도 있었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우성 형질자들의 출산의 의무란 헌법에 명시된 근로의 의무처럼 강압적인 제재 없이 자연스럽게 교육받으며 지나가는 내용이라고 생각한 데다, 당연히 출산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듣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강압과 타임 리미트가 있었는데도 정부에서 굳이 제약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 주변만 보아도 거의 대부분의 우성 오메가들은 건강과 범죄 위험 등의 여러 가지 불편함 때문에 늦어도 20대 중반에는 결혼과 각인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실제로 지금처럼 체내 삽입형 칩이 발달하기 전에는 각인의 평균 연령이 더 낮았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그 듣도 보도 못한 제재가 서른 살을 전후로 들어오는 거라고 생각하면 말이 된다. 서른을 거의 앞둔 우성 오메가가 과연 자신 말고 몇이나 더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렇죠! 아니 저도 결혼이 하고 싶기는 한데, 2세라니…. 이렇게 갑자기요? 분명 사람에게는 자유 의지가….”
지은은 이 말을 라영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먼저 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유려하고 논리적으로 설득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몇 명의 베타 테스트를 거친 듯한 그녀는 너무나 술술 의무에 관한 설명을 이었지만, 이 상황을 처음 맞이하는 라영은 더 조리 있게 말할 수 있음에도, 너무 갑자기 기습 공격을 받아서 그런지 절로 횡설수설하게 되었다.
-근데 그건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권리 포기를 처음부터 등록하신 분들에게 해당되는 일이고요. 라영 씨처럼 형질자 권리를 다 누리고 계신 분들은 의무를 이행해 주셔야 해요.
빼도 박도 못하게 마무리하는 저 멘트까지 완벽하다. 갑자기 닥친 날벼락에 라영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눌렀다.
-억제제와 칩을 포함한 모든 의료비 면제 및 최상의 의료 서비스 이용, 히트기 지원, 모든 학비 면제 및 장학금 지원, 형질자 지원 전형 최저 대출 금리까지 혜택을 다 이용하고 계셔요. 5년 전에 첫 무이자 대출 혜택 받으시고, 2년 전에는 0.3% 금리로 주택 담보 대출을 받으셨네요.
저렇게 듣고 보니 많기도 많네. 부모님은 다 아셨을까? 하기야 알았어도 보통의 환경의 우성 형질자들이 이런 혜택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을까 싶다. 특히 부모님 세대야 너무나 당연하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생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하시니 더더욱 별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당신은 국가의 귀중한 자원이며 당연히 이런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양손에 쥐여 준 것들이 사실은 이렇게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던 걸까?
지은이 조곤조곤 라영이 받은 혜택을 줄줄이 막힘없이 읊어 주신 덕분에 너무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던 대출 금리 혜택이 생각났다. 항상 통장에서 자동 이체로 자연스럽게 빠져나가서 신경도 안 쓰고 살고 있었던 그 녀석…….
아버지가 퇴직하시면서 지방에서 서울로 자리를 잡으실 때, 적당한 집을 구하려고 하시는 것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 뒀다 어디 쓰실 거냐고 큰소리치며 고급 아파트를 매매하게끔 주도했기 때문이다.
라영의 아버지는 군무원 생활을 하며 평범하게 살아오면서도 두 자녀를 위한 지원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미술을 전공하느라 늘 돈이 많이 들었던 라영은 그게 부모님께 늘 죄송했다. 퇴직금과 그동안 모아온 돈을 바리바리 합쳐도 서울 외곽에 있는 낡은 아파트 한 채 값. 그러느니 라영이 대출을 받아서라도 괜찮은 동네의 브랜드 아파트를 사면, 이제는 그저 연금만으로 생활하시는 부모님의 재산에도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처럼 서울의 미친 집값은 지금도 매년 오르고 있어서 라영은 그 선택에 후회가 없었다.
-라영 씨도 지금이라도 권리를 주장하고 싶으시면, 이제까지 받았던 혜택의 금액을 전체 반환해 주시고 권리 포기 절차를 진행하실 수 있기는 합니다만.
지은 씨……. 같은 서민들끼리 정 없게 왜 이러세요…? 왜 이런 서글픈 현실까지 꺼내시는 거냐고요…. 혹시 지은 씨 혼자만 몰래 투자하던 주식이나 코인 대박 났어요? 그래서 집에 금두꺼비 스무 마리쯤은 가볍게 키우고 계신 거 아니냐고요…? 당장 상환이 가능할 리 없잖아요……. 라영은 혜택으로 받은 파격적인 대출 금리와 상환 문제를 들먹이며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지은에게 서로 오랜 기간 알아온 만큼 사정 다 아는 처지에 냉정하게 이렇게 말할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고 현실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따져 보았다.
5년 전에 받았던 최초 무이자 대출은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보증금을 빌린 비용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빠르게 갚았지만, 어릴 때부터 받아 온 온갖 혜택을 돈으로 환산하면 과연 그 비용을 갚을 수가 있을까? 대답은 ‘아니요’였다.
게다가 비혼주의자에 비출산주의자도 아닌데…?
아이고, 머리야……. 지은이 계속 말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지만 라영 씨는 이걸 명심하셔야 해요. 지금 아무리 절차를 밟으시려고 해도 나라에서 절대 라영 씨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지금 출산 가능한 연령대의 우성 오메가는 국내에 100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중에서도 라영 씨는 희귀한 극우성 오메가라는 거 잘 알고 계시잖아요.
지은은 공무원인 만큼 철저하게 절차에 입각해서 친절하게 알려 주기는 하겠지만 센터가 사랑하는 인물인 너는 아마 절대 안 될 거라고 쐐기를 박는 소리에 라영은 울컥했다.
“극우성 형질자가 다른 형질자와 비교해서 더 뛰어나다는 건 결국 근거 없는 거로 밝혀졌잖아요….”
-신체적으로나 지능적으로나 더 뛰어나다는 편견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외도 많이 존재한다’ 정도의 결과여서 아직까지 맹신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다가, 실제로 우성일수록 생식 능력 자체가 더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요.
그 말에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논리로 밀리기 시작하니 더 이상 제기할 반론도 없었다.
“제가 2세를 안 낳겠다는 게 아닌데, 이렇게 지금 바로 당장이요?”
-물론 당장은 아니죠!
떨리는 목소리가 곧바로 울 것 같다는 느낌이라도 들었는지 지은은 그렇지 않다며 안심하라고 라영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라영 씨,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의 십 년의 인연을 깔고 제가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릴게요. 라영 씨랑 제가 보통 인연인가요? 이건 진짜 오프 더 레코드니까 다른 데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지금 정권 바뀌면서 저희 센터에 특별히 더 압박이 들어오고 있어요.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에 출산율이 최저를 기록한 데다가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출산 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니 이번 정부에서 아주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더라고요.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오라고 매번 얼마나 쪼아 대는지 말도 못 해요. 이미 결혼을 하신 분들께도 2세에 대해서 한 번씩은 전화를 돌리라고 한다니까요.
상부에 대한 지은의 짜증이 전화 너머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드디어 공감이 가게 서민적인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이래야 내 담당자답지…! 이런 내밀하고 내부적인 이야기까지 와다다다 쏟아낼 정도니 지은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같은 직장인으로서 공감이 갔다. 그렇죠…. 당신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다 이건 상부의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서민의 직장생활의 애환….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출산율을 높일 수 있는 장기적인 정책을 고민해야지, 아무리 우수한 인재가 욕심이 나도 그렇지 이렇게 소수의 형질자들을 압박하다니…! 이건 부당하다 주장하고 싶은데 이제껏 받아먹은 게 많아서 말도 못 하겠다. 더러운 사회… 빌어먹을 돈.
시간에 대한 제한이 없는 줄 알고 바쁘게 현생만을 살고 있던 라영은 핸드폰을 조금 떨어뜨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대부분 우성 형질자들이 대학교 졸업 후에 결혼하고 각인 진행하는 거 알고 계시죠? 의무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인자를 가지면 페로몬을 자연스럽게 조절할 수 있어서 신체 건강에도 매우 좋기 때문이에요. 라영 씨도 이젠 좀 서둘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센터에서는 서른다섯 이전에 한 명 이상의 자녀를 낳는 걸 권장하고 있어요.
서른다섯이라……. 권장 사항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타이머가 작동해서 귀 옆에서 째깍째깍 울리는 것을 듣는 기분이었다.
-칩 꼭 제거하시면서 이번 달 안으로 빨리 정밀 검진 받아 주세요! 이번 주 안으로 센터에서 예약 내역 안 날아오면 저 다시 전화 드릴 거예요!
흥분한 지은의 말은 점점 더 빨라지고 많아졌다.
‘네, 네 알겠습니다. 지은 씨’라고 몇 번을 반복한 뒤에야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라영은 빨리 사무실로 돌아가서 하던 일 처리를 마무리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휴게실 의자에 멍하니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 * *
결혼… 결혼을 해야 한다.
이렇게 갑자기?
대체 누구와, 어디서, 언제, 어떻게?
대체 내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지?
마치 절대 거부할 수 없는 프로젝트가 눈앞에 떨어지면서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결혼하기」입니다! 나라가 원하는 우월한 2세 형질자를 많이 출산하기 위해서 빨리 결혼을 서둘러 주세요!’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 같았다.
업무에 시달리는 지극히 직장인적인 느낌이었지만 이것만큼 딱 맞는 표현이 없는 것 같았다. 라영은 돌연 닥쳐온 미션을 떠올리며 고뇌에 빠졌다.
마성의 오메가로 날리던 것도 20대 초반에나 있었던 일이었다.
어학연수와 교환학생을 이어 다녀오고 졸업반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목표로 했던 top 3 광고대행사에 취직을 하고, 그리고 일에 빠져 정신없이 살아오느라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했다.
진득하게 연애를 하려고 하면 매번 일이 바빠지고 루틴이 어그러지면서 흐지부지 된 것도 여러 번이다. 이러니 애매한 썸만 반복되고 최근에 와서는 그것도 없이 아주 클린한 연애 라이프를 본의 아니게 즐기고 있다. 이렇게 깨끗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말이지. 아주 제대로 청정 구역이 따로 없다. 1급수여서 도롱뇽도 살겠어, 그냥.
게다가 현대 의학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해서 요즘 나오는 체내 삽입형 칩들은 얼마나 사람을 페로몬에 둔감하게 만들어 주는지 억제제 없이 히트도 넘길 수 있는 건 물론이요, 타인의 페로몬도 본인의 페로몬도 없는 것처럼 둔감하게 만들어 줘서 아주 평화로운 사회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영향을 주지도 않고 영향을 받지도 않으니 이 얼마나 편한가.
하아. 이제까지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직장 생활하고 얼마나 좋았는데 이제는 그 생활도 끝이라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다.
당장 페로몬 문제도 문제지만 결혼을 나 혼자서 하나….
대체 다들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고 살고 있는 거지?
기혼자분들…. 제발 노하우를 알려 주세요…….
결혼에 대한 갑작스러운 폭탄으로 모니터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라영을 보며 지나가던 동기가 파티션 너머로 말을 걸었다.
“이라영 님, 무슨 일 있으세요?”
“뭐야 그 호칭은… 오글거려.”
라영은 같은 제작팀의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동기 김경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호칭 평준화 지침에 따라 바뀐 지 몇 년 되었지만 친한 동기들 사이에서는 무색한 지침이다.
“너무 심각해 보여서 말이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지. 갑자기 공단에서 전화 와서 빨리 결혼을 하고 2세를 낳아 달라고 하잖아. 세상에 이게 말이 돼?”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절로 나오는 하소연에 경현이 놀라서 되물었다.
“너 우성 오메가였어?”
“왜? 우성 오메가라니까 놀랍냐?”
“아니, 사실 누가 봐도 우성 오메가처럼 생겼어. 근데 나는 베타라 잘 모르지만 그런 거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실례라며. 그래서 그냥 별 생각 안하고 살았지.”
은근히 상식적인 말이라 감동받았다. 너 이 녀석 좋은 녀석이구나. 세상에 무례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대부분의 인구를 베타가 차지하다 보니 형질자들을 배려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우성 오메가도 그냥 똑같아. 생식 능력이 더 좋고, 조금 더 페로몬 양이 많고 농도가 짙어서 영향력이 좀 더 세고, 조절을 좀 더 칼같이 잘 할 수 있고… 뭐 그런 거지.”
그 말을 들은 경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이처럼 고개를 도리질 치며 대꾸했다.
“아니, 아니, 아니, 전혀 똑같지 않은데? 뭔가 엄청나게 들리는데?”
“그런가?”
라영이 의자에 등을 푹 기대며 되물었다. 워낙 체내형 칩을 오래 이식하고 살아서 그런지 페로몬 영향을 체감하지 않으며 몇 년간 살아오기도 했고.
“응. 그럼 그거 말고는 다 똑같아? 내가 어디서 듣기에는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는 다른 형질자의 페로몬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고 했던가, 잘 견딜 수 있다고 했던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걸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 말이야.”
경현이 이 기회에 궁금했던 걸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한 모양이다. 우성들의 그러한 특징은 알파와 오메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였다.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고…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라영은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예시로 들 만한 비유를 떠올렸다.
“아주 아주 역겨운 음식을 누가 억지로 먹인다고 해 보자. 보통의 사람들은 구토를 하거나 배탈이 나는 등 신체적인 반응이 바로 온다고 한다면, 우성은 그걸 내색하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거? 아프지도 않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음식이 맛있고 좋은 건 아니란 말이지. 역겨운 음식이지만 아프지 않고 견딜 수 있다는…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겠네.”
그 말을 들은 경현은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
“페로몬이라는 게 역겨운 거야?”
그러자 순간 라영은 허를 찔린 듯 당황하며 말을 흐렸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페로몬이라는 거에 대한 너의 생각이 확 느껴지네.”
당황하는 라영을 보며 경현은 들고 있던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씩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어쩐지 속내가 조금 까발려 진 것 같아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 * *
“이라영 씨,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당장 시간을 내서 검사하지 않으면 빚쟁이처럼 독촉 전화를 하겠다는 지은의 협박에 라영은 부랴부랴 센터 병원에 예약을 잡았다.
예약된 날짜에 무사히 검사를 받기 위해서 벌려져 있던 눈앞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놓느라 정신없이 며칠을 보내고 나서 여러 가지 다양한 검사들을 받고 난 후.
오늘은 지난주에 받았던 그 검사에 대한 결과를 듣는 자리였다.
이 날을 위해 또 얼마나 노력을 해야 했던가. 유연 근무제이면 뭘 하나, 일이 이렇게 한꺼번에 몰아쳐 올 때면 집에서도 쉴 수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 바빴던 일들이 하나씩 정리가 되어 가는 시점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 얼굴을 보아 온 형질자센터[1] 병원의 의사는 나이가 지긋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라영을 맞았다.
“이라영 씨, 오랜만이네요.”
그 말에 왠지 뼈가 느껴져서 라영은 살짝 움츠러들며 의사 앞에 앉았다.
“네. 오랜만입니다”
라영은 멋쩍게 웃었다.
“혼내는 거 아니에요. 라영 씨 예쁜 얼굴을 자주 못 봐서 아쉬웠거든요.”
의사는 조용하게 웃으면서 어머니 같은 푸근한 말투로 라영을 다독이며 모니터와 차트를 동시에 훑었다.
“일단 지난주에 칩을 제거했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아… 처음에는 칩을 제거한 게 오랜만이라 페로몬을 신경 써서 조절해야 한다는 거에 며칠 긴장했는데, 익숙해지니까 괜찮더라고요.”
“그랬군요. 라영 씨는 워낙 우성 오메가들 중에서도 페로몬 조절을 잘 하는 편이라 그래요. 남들은 아무리 우성이라도 다시 훈련하기 위해 한 달 정도는 고생하거든요.”
형질자들이 인구의 15%밖에 되지 않는 세상인지라 평소에는 다른 형질자들과 비교해서 차이점을 체감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이를 먹었어도 쑥스러웠다.
“회사에서는 대학 다닐 때보다 형질자들이 많지 않기도 하고, 유난스럽지 않다고 해야 하나, 이제는 다들 성숙해져서 그런지 주변에서 페로몬을 느낄 일도 잘 없고 그래요.”
자연스럽게 편한 대화를 나누며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의사는 역시 노련했다. 복잡하고 긴 차트를 마우스 스크롤로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녀는 본론을 이야기했다.
“당분간은 체내형 칩과 억제제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여기 MRI랑 CT 촬영한 걸 보시면 호르몬을 분비하는 뇌하수체 부분이 많이 무리가 간 게 보이네요. 페로몬하고 호르몬하고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거 아시죠? 같은 내분비기관을 공유하거든요.”
복잡한 이야기를 최대한 쉽게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인다.
“라영 씨는 흔히 말하는 극우성 오메가죠.”
극우성이라는 말은 사실 의학적으로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흔히 페로몬 양이 우성의 수치를 넘어섬과 동시에 그 이상의 페로몬의 매혹도 같은 다양한 부분의 측정화하기 어려운 수치들을 가진 형질자를 그렇게 칭하고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성과 극우성을 확실하게 구분하지만 어떻게 보면 설명하기에 상당히 모호할 수도 있는 부분이라 라영은 절대 자신의 입으로는 스스로가 극우성 오메가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워낙 희귀하다 보니 국가에서 분류하는 형질자 코드에서도 우성 오메가로 분류되고 극우성은 따로 추가로 표기할 뿐이었다.
“보통의 형질자보다는 물론이고 다른 우성의 형질자보다도 페로몬 양이 선천적으로 많아요. 그렇다 보니 그 많은 양을 억제하고 누르기 위해서 이제까지 남들보다 독한 약을 써 왔는데 이제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어요. 이걸 지속한다면 반드시 몸에 이상이 생길 거예요.”
의사는 뇌분비기관의 이상은 물론이고 다양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심각한 이야기에 한쪽 다리를 절로 덜덜 떨게 된다. 라영은 초조하게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떡하죠? 좀 신경 쓰면서 칩은 없이 산다고 쳐도, 히트를 억제제 없이요?”
“네. 몸을 쉬어 줘야 합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이번 돌아오는 히트 사이클 때는 억제제 같은 전문 의약품 없이 견뎌야 할 것 같네요. 몸이 더 이상의 의약품 없이 쉬며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피해야 합니다. 파트너와 함께 자연스럽게 보내는 걸 가장 추천 드리는데 그게 정 안 된다면 입원해서 수면제를 쓰는 방법도 있어요. 이미 예전에 경험해 보신 적 있죠? 예전에 제가 그렇게 처방을 내렸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의사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라영 개인 차트를 뒤적였다.
“네, 대학생 때였던 것 같습니다.”
라영은 의사가 더 오래된 차트를 뒤지느라 고생하지 않도록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그 처방도 의약품으로 계속 몸을 혹사 시키는 거라 아주 최악의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번에는 파트너와 보내는 방법을 제일 추천드립니다.”
길고 긴 청천벽력이 끝났다.
* * *
새 학년 새 학기라면 모두가 설레는 게 정상이라지만 역시 가장 설레는 것은 스무 살의 새 학기가 아닐까 싶다. 한국대학교 20XX년도 3월 2일 개강 첫날이 바로 그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날이었다. 캠퍼스는 부쩍 활기가 넘치고 젊은이들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설렘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북적이고 있었고, 스무 살의 라영도 OT에서 만나서 친해진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폰으로 시간표를 들여다보며 활기차게 캠퍼스를 지나고 있었다.
“인문학 글쓰기……. 대체 교필 이름이 왜 이 모양이야…?”
대학에 와서 전공이나 신나게 배울 줄 알았더니 영어나 글쓰기 같은 거나 배워야 한다며 투덜거리는 친구 유민의 목소리에 방금 전까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라영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오늘은 수강 정정 기간이라 빨리 끝난다고 했으니까 기운 내자.”
수업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시무룩해서 굽어진 친구의 등을 라영이 탁 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마지막 강의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 일찍 끝나면 무엇을 할지 떠들면서 강의실에 들어섰다. 분명 강의 시간도 아직 20분 넘게 남았고 라영이 문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뒷문이 아닌 앞문을 열어서 그런가…? 라영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시선이 몰린 상황에 당황하며 뻘쭘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페로몬 갈무리를 저도 모르게 잘 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페로몬 샘이 있는 손목 안쪽을 코 가까이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역시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페로몬이 샌 것이 느껴졌다.
스무 살이 되고 난 이후에 형질자 센터에서 청소년을 위한 필수 억제 칩을 제거해서 아직은 아무 제어 칩도 없는 자연의 상태였다. 익숙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갑자기 시선이 몰리는 상황에는 혹시 모를 페로몬 발산이 있었는지 늘 불안했는데, 아주 소량이었지만 페로몬이 배출이 되었고 그걸로 인해 시선이 몰린 듯했다. 함께 다니는 친구들은 두 명은 베타였고 한 명은 열성 오메가였기 때문에 라영의 의도치 않은 페로몬 배출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편인 것 같았다.
멈칫거리며 걸음이 느려진 라영을 친구들이 밀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안…. 나 페로몬이 조금 샜나 봐.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라영은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힐끔 쳐다보면서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으면서 소리 죽여 말했다.
“아, 지금 쳐다보는 사람들이 다 네 페로몬 때문에 그런 거야? 난 내가 잘생겨서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미쳤나, 진짜.”
“아니 꼭 그렇게 욕을 할 것까지는 없잖아?”
“네가 네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 말을 해 봐. 욕이 나오나, 안 나오나.”
투닥투닥이 이어졌다.
“근데 그럼 이 많은 사람들 중에 형질자가 얼마나 많다는 얘기야? 방금 우리 들어올 때 반 정도는 돌아보지 않았어?”
“뭐 페로몬 맡고 돌아본 사람도 있을 거고 그 사람들이 돌아보니까 같이 본 사람들도 있겠지 뭐.”
늘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지혁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루의 짧은 해프닝이 지나가는가 싶었지만 마치 진짜 최종 보스는 마지막에 나온다고 하는 말처럼 정말 큰 해프닝은 수업이 끝난 다음 일어났다.
“안녕? 신입생이야? 무슨 과야?”
“나도 신입생이야. 반가워. 나는 정치외교학부 1학년이야.”
“혹시 번호 좀 알려 줄 수 있을까?”
“야, 신입생! 할 말 다 했으면 꺼져. 이라영이라고 했지? 혹시 동아리 들었어?”
처음에는 한두 명이 와서 말을 거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 한두 명에 용기를 얻었는지 나머지들이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르게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라영과 친구들이 앉아 있던 책상을 둘러싸는 걸로 모자라 이제는 서로 밀치고 난리가 났다.
“아, 저는…”
“디자인과예요.”
당황하는 라영을 대신해서 친구들이 대답을 해 주자 더더욱 질문이 빗발쳤다. 이 인간들이 이 열정을 가지고 수업 시간에 질문은 안 하고 여기서 무슨 제2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양…….
“어쩐지. 스타일이 예사롭지 않더라.”
“누나는 음대라 바로 옆 건물이야. 친하게 지내자.”
“폰 좀 줄래?”
“나갈까? 형이 커피라도 살게.”
“정신없는 거 같으니까 여기 번호 두고 갈게. 나중에 꼭 연락 줘.”
말도 안 되는 공통점을 찾아서 갖다 붙이는 사람, 다짜고짜 남의 사유 재산을 달라고 하는 녀석, 먹을 걸로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녀석, 그리고 치밀하게 후일을 노리며 매너 좋은 척 쪽지를 놓고 가는 녀석 등등 아주 난리가 났다.
아름다운 외모와 우수한 성적으로 늘 눈에 띄는 편이었지만 항상 베타가 더 많은 공간에서 지내고 성장해 왔던 라영은 이렇게 알파들에게 한꺼번에 엄청난 관심을 받는 것이 처음이었다. 미성년자와 성인은 이런 게 다른 걸까? 중, 고등학생 때까지는 학교에 소문이 나거나 놀림의 대상이 될까 봐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다고 이런 식으로 대놓고 표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터라 더더욱 생소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알파 페로몬을 조금씩 뽐내며 암컷의 간택을 바라는 짝짓기 시기의 수컷들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 인간들이 다 시한부인가…? 오늘만 사나? 라영은 경쟁적으로 내뿜는 숨 막히는 알파의 구애의 페로몬을 코밑에서 없애려고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얼굴 앞에서 휘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극우성 오메가라 그냥저냥 불쾌한 정도로 참고 있지만 보통의 오메가 같았으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거였다.
그때까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가만히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친구들은 당사자가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굴자 아주 자연스럽게 바쁘다고 말하며 라영을 데리고 그들 무리를 뚫고 나왔다. 그제야 라영은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아서 숨을 몰아쉬었다.
“와…….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지독한 인간들. 나는 베타라 페로몬 못 맡는데도 뭔가 공기가 계속 무거워지는 게 느껴지더라.”
“저 페로몬 옷에 다 달라붙은 것 같아.”
열성 오메가인 지혁은 겉옷을 털고 난리가 났다. 그걸 같이 털어 준다고 이때다 싶어 신명 나게 때리는 놈도 옆에 있고…….
“이라영 인기 장난 아니네…….”
“이게 우리가 모르는 형질자들의 세계인가 봐.”
“야, 같은 형질자여도 저 세계에 안 있는 사람도 있어, 왜 이래?”
“앞으로 계속 저러려나…?”
라영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스럽게 내뱉은 말에 덤덤한 위로가 이어졌다.
“처음이라 그렇겠지 뭐. 점점 나아질 거야.”
“그래, 기운 내!”
“설마 내내 이러겠어? 인간은 어떤 것이든지 익숙해지는 동물이라고.”
물론 지혁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익숙해지는 동물이 맞기는 맞았다.
그러나 알파라는 존재가 우월한 오메가를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끊임없이 달려드는 열정적인 개체들이라는 것을 그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만 그런 거겠지 싶었던 라영의 인기는 입소문과 에타를 통해 점점 퍼져서 이제는 광범위하게 타과는 물론 학부생이 아닌 대학원생과 다른 학교 교환 학생, 은근히 눈길을 한 번 더 주는 시간 강사와 외국인 유학생 등등 더더욱 다양해져 갔다.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순진하고 파릇파릇한 스무 살의 라영도 상황과 환경에 점점 익숙해졌다. 누군가 또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진화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라는 노랫말처럼 두어 달이 지나자 이제는 다가오는 사람들 중에 누가 괜찮은가 골라볼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과 시각도 생겼고, 자신을 향한 관심을 어느 정도 즐기고 끊어낼 수 있는 요령도 생기면서 라영은 점점 성장해 갔다.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했던 천진난만하던 때였다.
그러니까 결혼도 이번 히트 사이클을 함께할 파트너도 결국은 매한가지 이야기다.
알파. 지금 당장 알파를 구하라는 이야기인데.
대체 하늘에서 알파들이 비처럼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어떻게 참한 알파를 구한다는 말인 건지 라영은 머리가 아팠다.
하도 쥐어뜯다 못해 이제는 탈모가 올 것 같았다.
라영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오피스텔 침대에 정자세로 바르게 누웠다. 배에 양손을 깍지 껴서 얹고 아무 무늬도 없는 천장의 하얀색 벽지를 바라보며 조금 전까지 떠올리던 신입생 때의 기억을 이어 갔다.
스무 살, 갓 신입생으로 한국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라영은 난생 처음으로 캠퍼스에 형질자들이 잔뜩 있는 것에 깜짝 놀랐었다.
유독 명문대학교에서 그러한 현상이 심했는데, 형질자들이 신체적으로나 지능적으로 비형질자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부분을 보고 인간이 혹독한 환경에서 더 많은 번식을 하고 더 우수하게 살아남기 위해서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았다.
물론 뛰어나다고 해서 모든 분야의 우위 계층을 전부 형질자들이 점령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성공이라는 건 단순 지능과 신체와 다른 영역이 아닌가. 그렇지만 많은 형질자들이 사회 각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형질자의 비율이 많아지기를 원했다. 특히 형질자라는 돌연변이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게 된 19세기부터 세계 각 국가들은 우성의 형질자들을 더더욱 원해 왔고 우성의 형질자들을 늘리기 위한 목적을 가진 다양한 제도도 정착되어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형질자가 인구의 15퍼센트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15퍼센트는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어서 사회 어느 부분에서나 베타가 더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크게 수능 시험으로 대입을 판가름하던 대학이라는 문 안에서는 명문대일수록 형질자들의 비율이 높았다.
그렇게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고 칩을 제거한 온갖 형질자들.
그 형질자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캠퍼스를 활보하던 그때, 라영도 처음에만 주춤거렸지 시간이 지나면서 한껏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형질자들은 나라에서 출생 신고 때부터, 그리고 2차 발현의 시기까지 철저하게 조사하고 페로몬으로 인한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끔 미성년자들을 강력한 체내형 칩과 여러 가지 의학적인 조치로 관리를 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하게 통제당하고 묶여 있던 그들의 페로몬이 드디어 자유를 맛보았으니 다들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알파는 알파대로 오메가는 오메가대로 서로를 향한 다양한 페로몬을 배출해 보고, 성적인 페로몬이 주는 자극과 날 것의 쾌락 그대로의 사이클을 보내고 싶어서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 모이는 지식인들이라고 스스로를 칭해도 결국 본질은 짐승의 것을 버리지 못하는 애송이들에 불과했다.
물론 그 애송이의 한 축을 라영이 담당하고 있었다.
미대 오메가 신.
남자 백설공주.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흑단같이 까만 머리에 크게 쌍꺼풀져서 까맣고 고양이 같은 눈과 새빨간 입술. 그리고 왼쪽 눈 밑에 눈물점까지.
듣기만 해도 오글거리는 그 별명들을 당시의 라영은 당연하게 즐기며 캠퍼스를 활보했다.
우성이라 남들 페로몬에 맥을 못 출 일도 없으니 안심하고 페로몬이라는 것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점점 더 수많은 알파들의 구애의 페로몬을 즐기고, 가끔 내뿜는 라영의 달콤하고 유혹적인 페로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따라다니는 알파들과 연애를 하고 썸을 신나게 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저학년 때뿐.
여러 가지 아수라장을 겪으며 곧 질리고 염증을 느껴 2학년 때는 한두 명과 연애를 끝내고 그 이후에는 알파들에게 철벽을 고수하며 살았다.
그렇게 연애에 있어서는 어영부영 혼자서 흐르듯이 지나가다 보니 대체 참한 알파는 어디서 찾아야하는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취향도 아닌데 아무나 붙잡고 히트 사이클을 보내자며 들이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히트 하나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누린 것이 있으니 이제 의무를 다해서 애국심을 제발 뽐내어 달라는 나라의 요구에 서둘러 응해야 할 판이다.
당장 눈앞에 이상형의 알파를 내려 달라고 새벽 기도라도 정성껏 쌓아야 하는 건지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나라에서 결혼하라고 하는데 나라에서 소개를 받아야지.
국가에서 보증하는 결혼 적령기의 형질자들이 모인 곳이 있지 않은가.
이제까지 한 번도 관심 가져 보지 않은 형질자 혜택인 형질자 센터가 주관하는 선을 보는 것, 방법은 이거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첫 맞선은 망하다 못해 아주 후루룩 짭짭 말아 먹었다.
* 특수형질관리국의 알파/오메가 센터를 대부분 간단하게 형질자 센터라고 칭한다. 세부적으로는 오메가 센터, 알파 센터로 칭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