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크고 높은 침대에 무채색의 리넨 침구가 조금 흐트러져 있고 그 위에 알파가 오메가를 뒤에서 안고 어루만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단순히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고 커다란 배를 내놓은 오메가의 피부를 양손으로 마사지하고 있다.
라영의 배는 이제 서서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부풀어서 누가 봐도 만삭의 오메가라고 느낄 만했다. 이헌은 협탁에 놓여 있던 임산부 튼살 전용 오일을 조금 더 손바닥에 덜어 내며 번들거리는 라영의 배에 발라서 더욱 정성스럽게 마사지를 하며 말을 걸었다.
“오늘 외출은 즐거웠습니까?”
“응. 무척이요.”
라영이 뒤를 돌아서 이헌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대답했다. 자연스럽게 늘 사랑을 나누고 밀고 당기는 것 없이 애정 어린 기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남편이 있어서 행복하다. 오랜만의 연차와 친구와의 만남, 귀가 후에 뜨끈한 샤워와 마사지까지. 더할 나위 없었다.
결혼한 지 반년이 넘어가니 연애할 때와 다르게 안정감이 생기고, 늘 언제 어디서나 ‘나’를 사랑해 주고 보듬어 주는 온전한 ‘내 편’이 있다는 것이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자녀로 속해 있던 가정과는 다르게 결혼의 주체가 되어 이룬 가정은 더 큰 만족감을 주었다. 이래서 아무리 혼자 사는 게 편해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결혼을 하는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아무래도 인류가 살아 있는 동안은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라영은 결혼의 만족감에 젖어서 오늘 만난 지혁의 이야기를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그쪽 또한 한창 결혼의 만족감에 젖어 있는 부부였다.
물론 지옥 같은 입덧만 아니라면 말이지.
“지혁이는 아직도 입덧이 심한가 봐. 다른 임산부들보다 오래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외출해서 사람들 만나고 같이 식사하면 좀 낫다고 하더라고요. 뭔가 험한 꼴을 보일 수 없다는 자신의 강한 의지력이 구역질이 올라오지 않게 신체를 조절하는 것 같다나?”
라영은 오늘 점심때, 이때 아니면 또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며 전투적으로 전복 삼계탕을 뜯어먹던 지혁을 떠올렸다. 극구 지혁이 주장하는 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라영을 만나서라도 그나마 잘 먹을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자신은 막달이라 한껏 늘어난 자궁 때문에 위가 밀려 올라와서 먹는 것도 힘들어하며 겨우 숨을 쉬고 있는데, 앞에서는 전투 먹방이 한창이었다. 그래, 너라도 많이 먹어라 하며 닭다리도 하나 양보했다.
우경과 지혁은 한바탕 난리를 겪고 난 뒤, 바로 일사천리로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름 이헌과 라영의 결혼식도 엄청 빠르게 진행했다고 생각했는데, 더한 놈들이 이렇게 근처에 포진해 있었다니……. 만남부터 시작해서 임신과 결혼까지 광속으로 달린 커플다웠다. 이헌은 그렇게 전투적이고 의지가 넘치는 우경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뭐든 물 흐르듯이 좋게 좋게 하하 호호 사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폭풍 같은 사랑꾼이었다.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에도 드문드문 있던 애인들에게 늘 충실한 녀석이기는 했었지.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자신이 라영을 만나서 인생이 바뀐 것처럼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짝이 있는 듯하다.
그들이 신혼집으로 라영과 이헌이 사는 삼성동의 전원주택 단지에 자리를 잡아서 두 부부는 얼떨결에 같은 동네 이웃 주민이 되었다.
그래서 끔찍한 입덧 때문에 일찍 휴직에 들어간 지혁을 위해 아직은 휴직을 하지 않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라영이 연차를 써서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주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십 년 우정과 더불어 임산부 메이트로 격한 동지애를 쌓아 가고 있었다. 주말에 시간이 날 때 부부 동반으로 만나는 건 일상이었다.
이헌은 배를 마사지하던 손을 내려 라영의 발을 끌어와서 오일이 남은 손으로 부드럽게 살살 주물렀다.
“발이 조금 부었네요. 오늘 많이 돌아다녔습니까?”
“오랜만에 외출한 김에 둥둥이 옷 좀 봤어요. 아기들 옷은 어쩜 그렇게 귀여운지 몰라요. 너무 작아서 이게 진짜 사람이 입는 게 맞는가 싶다니까요.”
라영은 활짝 웃으면서 자신이 사 온 옷을 보여 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움직이며 ‘아이고, 허리야’라는 신음은 자동이다. 확실히 막달에 들어서니 몸이 무겁고 조심스럽기는 했다.
“바로 내일이라도 출산 휴가에 들어가는 게 어때요?”
이헌이 몸을 일으키는 라영을 부축하고 잡아 주기 위해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바로 뒤에 따라붙으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당사자가 극구 반대하니 강요는 할 수 없지만 옆에서 보는 알파의 눈으로는 물가에 내어 놓은 아이마냥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목, 금요일만 지나고 바로 다음 주부터 출산 휴가 들어가는데 뭘 그래요. 아직 예정일도 2주나 남았다고요.”
자기 회사에 다른 임산부들은 베타고 오메가고 할 것 없이 다들 이렇게 한다며 설명을 이었다. 실제로 아기를 낳고 난 뒤에 최대한 많은 휴가를 쓸 수 있도록 건강한 임산부들은 대체로 그렇게 했다.
“그렇게 휴직일을 계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매번 이야기했는데…….”
이헌은 이제까지 라영이 임신한 몸으로 아슬아슬하게 직장을 열심히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번 휴직을 권했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라영은 자신은 딱히 힘든 점도 없고 건강하다는 이유로 거절을 해 왔다. 어린 둥둥이를 놓고 다시 복직을 하는 것이 그렇게 마음이 아프다면 자신이 교대해서 연달아 휴직을 하겠다고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라영의 결심은 끄떡없었다.
그렇게 이헌이 휴직을 이어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어린이집을 보내기 전에 집에서 부모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할수록 좋을 거라는 게 라영의 생각이었다. 기어 다니는 아이보다는 걸어 다니는 때에, 스스로 숟가락을 들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나이에 어린이집을 보내고 싶다는 주장이었다. 굳이 어린이집을 보내지 않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전문 베이비 시터를 들여서 집에서 유치원 입학 전까지 키울 생각이었던 이헌은 조용히 말을 삼켰다.
“아무튼 난 조금 위가 빨리 차는 거 말고는 대체로 전부 괜찮으니까 걱정 말아요. 이상하게 다른 사람처럼 숨이 찬다는 느낌은 없는데, 음식이 꽉 차는 느낌은 들더라고요. 위가 확실히 눌리고 있나 봐요.”
그 말에 이헌은 자신의 오메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연신 발을 쓰다듬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해 주고 싶다는 얼굴이다.
라영은 그런 이헌을 보며 오늘 자신이 사 온 여름용 우주복과 턱받이를 자랑했다. 하늘색을 산 것은 꼭 둥둥이가 아들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여름옷이라 시원해 보여서 그런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당신만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아기 낳고 나서는 내가 다 하겠습니다.”
이헌은 오늘도 라영에게 백만 번째 사죄와 다짐을 했다. 이 사람도 자기 성격에 정말 많이 참기는 했다. 그동안 임신한 자신의 오메가를 안전한 곳에서 쉬게 하고 싶은 본능과 라영의 의견과 입장을 존중해 주려는 의지 사이에서 언제나 갈등하는 걸 뻔히 알고 있기에 이 사과와 다짐이 지겹지 않았다.
지금도 이헌은 회사의 일이 바쁜 와중에도 라영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연락을 해서 라영의 식사를 챙기고, 매일 밤 태담과 마사지를 빠지지 않고 했다. 피차 바쁘고 힘든데 이렇게 매일같이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이 알파의 고집은 쇠심줄처럼 질겨서 말을 듣지 않는다. 그저 집에서 라영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다. 초반에 내내 안고 다니려는 것을 두고 진지하게 화를 냈더니 그 이후로는 내내 눈치를 보면서도 신체의 자유를 적당히 보장해 주고 있었다.
가만 보면 이 성격에 자신의 회사 일을 그냥 놔두고 있는 게 신기하단 말이지.
물론 전에 한번 작정하고 본부장의 뒤를 밟다가 이헌의 입김을 눈치채고 한 번 뒤집어엎었기 때문에 잠잠해진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생각보다 이헌은 더 라영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며 부부간의 원만한 관계 형성을 잘 해 나가고 있었다.
라영은 대견함과 사랑을 담아서 이헌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짧게 뽀뽀처럼 끝내려고 했는데 이헌이 라영의 얼굴을 끌어안고 진득하게 몸을 붙이는 바람에 질척이는 키스로 이어졌다. 양손으로 서로를 자연스럽게 매만지며 눈을 감고 닿은 입술의 감촉에 집중했다. 입 안의 촉촉한 점막으로 서로의 입술을 물고 살짝 혀를 내밀어 핥았다. 입술 틈새로 오고 가는 새빨간 혀의 출입에 투명한 타액이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헌은 씩씩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입맞춤을 하는 라영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세상에 어디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가 똑 떨어져 나와 자신 앞에 나타난 건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자신과 사랑에 빠져서 각인하고 임신까지 한 라영이 이헌의 세상의 주인이며 전부였다. 내가 가진 많은 것 중에 가장 귀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 평생 손수 돌보고 아껴 줘야지. 자식에게나 할 법한 생각을 배우자에게 했다. 지극히 알파다운 생각이었다.
“라영아. 너는 늙어서도 이렇게 사랑스러울 거야. 나는 네가 나이 들어서 허리가 굽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도 세상에서 가장 예쁠 것 같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시작했다가 갑자기 대머리로 끝났다.
라영은 감동으로 막 차오르려는 마음이 차게 식는 것을 느끼며 베개로 이헌을 때렸다.
“어딜 감히 대머리라는 성스러운 단어를 입에 올려…? 빨리 전국의 대머리들께 사과해! 여보는 지금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어! 머리카락이 다 빠진다는 그런 무서운 말은 절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안 그래도 나이가 들수록 머리숱이 적어지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라영이 부르르 떨었다. 알파인 아버지와 다르게 자신은 오메가라 대머리가 되지는 않겠지만 혹시 몰라서 불안해하던 차에 이헌이 눈치도 없이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다. 세상에는 건드려서 될 것이 있고 안 될 것이 존재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대머리’였다. 이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로 감히 입에도 담아서는 안 되는 볼드모트와 같은 존재였다.
무력하게 베개로 얻어맞던 이헌이 웃음을 터뜨리며 라영을 껴안고 침대에 누웠다.
“미안해. 미안해. 얼른 자자. 피곤하다면서요.”
이헌은 라영을 안고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연신 숨죽여 끅끅거렸다. 그리고 어이없어하는 라영을 더 깊게 끌어안고 스위치를 눌러 방 안을 밝히고 있던 조명을 끄면서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대머리가 되면 날 버릴 건가…?”
신나게 웃다가 갑자기 큰 깨달음을 얻고 위기감을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묻는 이헌의 목소리가 진지하다.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대머리가 아무리 엄청난 일이어도 제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은 아니랍니다.
“여보는 대머리가 되어도 멋있을 거야. 그러니까 버리지 않을 거예요.”
자신의 머리카락만 온전하다면 남의 모근이야 아무 상관이 없는 라영이 이헌의 두상을 어루만지며 대답해 주었다. 아무래도 그 말이 진심이 아닌 것 같다고 심각해지는 이헌을 마주 껴안으며 이번에는 라영이 신이 나서 낄낄거렸다.
별것도 아닌 걸로 웃고 떠들다 심각해졌다 다시 웃는 부부는 바로 다음 날 닥칠 위기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마냥 즐겁게 잠을 청했다.
* * *
“컷!”
슬레이트 내려찍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감독의 컷 소리가 대형 세트장의 공중을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거대한 세트장 안에 크로마키를 배경으로 두고 오밀조밀 짜여 있는 세트와 조형물 안에서 연기하고 있던 엑스트라 배우들이 그 소리에 긴장을 풀며 몸을 스트레칭 했다.
더워진 날씨 탓에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들과 팬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소음과 차가운 공기를 내뿜고 있는데도 라영은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만삭의 임산부라 그런지 무거운 조명이나 카메라를 다루는 스태프와 다르지 않게 스튜디오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더워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자신은 위가 부대끼는 것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자신만만해했더니, 오늘 그 벌을 받는 걸까? 연신 들고 있던 종이들로 부채질을 하느라 손이 바빴다.
“제발 좀 여기 앉아 있어. 보는 내가 조마조마해 죽겠다.”
경현이 라영에게 핀잔을 주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간이 의자를 내밀었다.
“더운 거 말고는 정말 다 괜찮다니까?”
라영이 나는 이 정도에 지지 않는다는 듯이 똥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고집을 부리면서도 은근슬쩍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나는 네가 임신했다고 했을 때 혼자 상상해 보면서, 남자 오메가가 임신을 하면 여자가 임신을 한 것보다는 그래도 덜 위태로워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완전 착각이었어. 남자이건 여자이건 모든 임산부는 다 위태롭게 보여.”
아무래도 남자라 여자보다 평균적으로 체격 조건도 좋고 뼈대도 튼튼하니 괜찮아 보일 줄 알았다며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이지만 촬영이 멈췄으니 빨리 앉으라는 핀잔은 덤이다.
“다들 이렇게 바쁘게 일하는데 어떻게 혼자 가만히 앉아 있어?”
눈치가 보이든 말든 신경 안 쓰는 타입이지만 다들 열심히 일하는 장소에서 혼자 구석에 앉아 있는 건 영 성격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촬영장에 안 오고 말았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경현이 그러게 도대체 왜 촬영장까지 와서 고생이냐며 들고 있던 종이로 부채질을 더 해 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안 오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 솔직히 완성까지는 참여 못 해도 녹음한 거 나올 때까지는 일하고 싶었는데…. 그러다 남편 이마 싸매고 누울까 봐 다음 주부터 휴가 들어가는 거야.”
“너 다음 주에 휴가 안 들어갔으면 네 남편뿐만 아니라 본부장도 이마 싸매고 드러누웠어.”
그 말에 라영이 제작 3본부장을 떠올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지잉, 지잉.
지나가는 기획팀 막내를 붙잡고 음향 스튜디오랑 일정은 정확하게 조율이 되었는지 묻고 있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 사람 참 양반은 못 되네….”
라영의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슬쩍 들여다보며 경현이 중얼거렸다.
“네, 본부장님.”
라영은 통화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소란스럽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피하려고 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 사이에서 멀어지면 그나마 좀 잘 들리겠지 싶어서 점점 세트장 구석으로 향했다.
-이 대리! 이 대리 지금 파주에 갔다며!
어쩐지 다급한 목소리다. 화가 나셨나?
“네, 지금 촬영장이죠. 일정 보고 올린 거 지금 보셨어요?”
-내가 주 초에 회의 끝나고 이 대리 외근 다니지 말라고 한 말은 기억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언제 어디서 말했는지까지 말해 줘야 말을 들을 거야?
아아. 한창 업무 시간에 웬 전화인가 싶었는데, 용건은 그거였나 보다.
“네. 그리고 본부장님도 제가 그래도 촬영 현장에는 나가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도 기억하시죠?”
라영은 사람 좋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난 또 뭐라고…. 너무 다급하게 말하길래 엄청나게 큰일이 터진 줄 알았는데, 겨우 자신의 외근에 대한 이야기라니. 집에서도 모자라서 회사에서까지 이런 과보호를 받아야 하다니…. 실제로 본부장이 자신에 대해 하는 염려는 라영의 안위에 대한 순수한 과보호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막상 걱정의 대상자이며 당사자인 라영이 느끼는 기분은 비슷했다.
-이 대리……. 나 여기서 오래 일하고 싶어…. 이제 나 정도 연차가 되면 회사 차려서 나가지 않는 이상 어디서 불러 주는 곳도 없는 거 알고 있지? 진짜 나 좀 살자, 응?
말하는 소리가 애원하는 투로 바뀌었다. 라영이 속한 제작 3본부의 본부장은 아트 디렉터의 감각보다는 원체 상부 비위 잘 맞추고 사람을 다루는 관리자가 천직인 사람이지만, 유독 요즘은 부하 직원인 라영에게 쩔쩔맸다. 그리고 그 이유를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라영도 모질게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부하 직원이어도 모기업 총수 가족에게는 조심스럽겠지. 근 30년 가까이 서민 마인드로 살아온 라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라면 더했을 거예요, 본부장님. 암요. 제가 그 마음을 아주 잘 알지요.
의도치 않게 재벌가 사람과 결혼을 하고, 결혼 전과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서 여러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있기는 했다. 그래 봤자 절대 그만두지는 않을 거지만. 결혼은 결혼이고 직업은 직업이죠.
이헌의 식구들도 라영의 그런 마음에 충분히 공감해 주고 있어서 원만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사자들보다는 아무래도 주변에서 눈치가 많이 보이나 보다. 이것도 다 감수해야 할 일이겠지…….
“제 남편한테 또 압박 들어온 건 아니죠? 제가 그때 분명하게 이야기했는데…….”
-아니야! 그쪽에서 연락이 온 게 아니고…. 어휴, 정말 이렇게까지 다 얘기해야 해?
본부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직접 얘기 들어온 게 아니고, 사장한테 말이 들어왔다나 봐. 뭐, 얘기 들어보니까 직접적으로 말한 건 아닌데…. 근데 그렇게 돌려 말한다고 우리가 못 알아듣겠어? 척하면 딱이지. 이노베이션 대표님이랑 행사에서 마주쳤는데, 사장한테 이 대리 얘기 꺼내면서 직원들 출산이나 육아 휴직 같은 복지에 대해서 잘 되고 있냐고 물었다나 봐.
“아…….”
그 말을 들으니 감이 왔다.
“아버님이 저한테는 그런 말씀 전혀 안 하시던데…?”
라영이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결혼 후에 한 달에 한 번씩은 이헌의 본가에 가거나 밖에서 만나 외식을 하면서 어른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크게 표현은 안 하시지만 두 분은 항상 라영을 무척 기꺼워하고 예뻐해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첫 손주를 품은 몸이어서 더욱더 관심이 쏠린 것도 있었다. 이헌의 큰 형님은 만나는 사람은 있었지만 아직 미혼이었고, 누님은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었으니까.
항상 라영의 몸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뭔가 더 먹고 싶거나 원하는 것이 없는지 신경은 써 주시지만,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절 말씀이 없으셨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쓰이시기는 했나 보다.
-이 대리 배려하느라 얘길 못 하신 거겠지! 요즘은 시부모가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며. 나 같아도 조심스러워서 말 못 하겠다.
답답해하는 목소리가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전해져 왔다. 본부장도 역시 다 큰 자녀를 둔 사람이라 그런지 라영의 입장보다는 부모님들 쪽 입장에 이입이 되는 듯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촬영은 못 빠집니다.”
-그러게 애초에 거길 왜 갔어…….
“본부장님, 제가 한 번이라도 제가 속한 프로젝트에서 촬영 빠진 거 보셨어요? 이건 저뿐만이 아니라 다들 그럴걸요? 말도 안 되죠.”
라영은 앞에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애초에 이 건을 맡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맡았다면 촬영까지는 무조건 참여해야 했다.
물론 본부장은 8개월이 넘어서부터는 새 프로젝트를 주지 않았지만, 기존에 맡았던 이 프로젝트가 이렇게 늦게 진행될지는 미처 몰랐겠지. 실제로 라영의 예상보다도 전체적인 일정이 딜레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야근은 절대 안 돼! 촬영 마무리 안 되어도 꼭 정시 퇴근해. 이건 나랑 약속해 줘야 해! 나 정말 진심이야!
어찌나 다급하신지 진심 타령까지…….
“걱정 마세요. 아직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예상보다 촬영이 빨리 진행되어서 야근할 일도 없을 것 같아요.”
라영은 연신 본부장을 안심시키며 전화를 끊었다.
밥 차 시간이 지나가고 오후에도 촬영장은 분주했다.
거대한 대형 세트장 안에서 구성된 두 번째 세트 쪽으로 이동해서 촬영 팀이 카메라와 조명을 조정하느라 번잡했고, 촬영에 들어가느라 엑스트라들의 의상과 머리를 만져 주는 스타일리스트 팀도 혼을 빼놓은 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 사이에서 대행사의 기획팀과 제작팀이 콘티를 체크하고, PD는 연신 타임라인 조정에 한창이었다.
그나마 이번 광고가 유명 배우를 주연으로 하는 촬영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다. 만약에 바로 전 광고 촬영 때처럼 국내 톱급 연예인을 데려다 놓고 하는 촬영이었다면, 여러 가지 스케줄이나 일정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라영은 촬영 현장이 그나마 빠르게 돌아가는 것을 보며 내심 안심했다.
“이 대리, 방금 촬영한 거 모니터링 좀 해 줘. 아트웍 제대로 나온 것 같아?”
기획팀 차장이 라영을 모니터 화면 앞으로 부르며 말했다. 감독과 다른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라영은 모니터 앞으로 걸어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유심히 보면서 방금 촬영된 결과물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 지나간 이 부분 있죠? 여기에서 나중에 CG 입힐 거거든요. 줌 아웃 되면서 확 들어가게…. 이게 말로 설명이……. 차장님, 제가 전에 공유했던 그 영상 갖고 있으시죠?”
아무래도 감독한테 제대로 느낌 전달이 안 된 것 같다. 예상했던 결과물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촬영 방향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아서 라영은 다급하게 기존 자료 영상을 찾았다.
“아…. 그거 나도 모르고 지워 버렸네. 이거 어쩐다…….”
자료가 너무 많아서 실수로 지워진 것 같다고 기획팀 차장이 들고 있던 패드를 넘기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패드에 갖고 있습니다. 잠시만요, 진희 님!”
라영은 영상을 잃어버린 차장을 대신해서 감독에게 공유하기 위해 패드를 들고 있던 부사수 진희를 찾았다. 부르자마자 발견했지만 그녀는 다른 기획자와 스태프들과 조형물 위치를 옮기며 확인하느라 바빠 보였다.
라영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개인 패드를 찾기 위해 가방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곳으로 뛰어가 자신의 가방을 들고 왔다. 뛰지 말고 천천히 오라는 주변의 말을 무시하고 서둘러서 가방 안에서 패드를 찾는데, 짐이 어찌나 많은지 미니 패드가 보이질 않는다. 가방이 무슨 도라에몽 주머니도 아니고, 무저갱도 아니고…. 어디 갔냐, 대체……. 왜 항상 급하게 찾는 것들은 찾아지지가 않는 건지.
안 그래도 더웠는데 급하고 초조하니 땀이 절로 난다. 도저히 가방 안에서 찾아지지 않는 미니 패드를 찾기 위해 결국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쭈그리고 앉았다. 가방 안에 쌓인 다른 소지품과 짐들을 꺼내고 한참을 찾은 끝에 패드를 꺼내 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륵.
영차, 하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엉덩이에서 축축함이 느껴졌다. 뭐지…? 분비물이 나왔나? 임신을 하면서 소량의 분비물이 나오는 일이 있었던지라 대수롭지 않게 패드를 내밀며 찾던 동영상을 감독에게 보여 줬다.
“여기 이 영상에서 나오는 이런 느낌을 원하거든요.”
라영은 해당 영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했다.
“감독님도 보시니까 느낌 딱 아시겠죠? 나중에 여기 CG를 입혀도 좀 속도감 있게 줌 아웃 되지 않으면 이 느낌이 안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촬영을 다시 한번 해 주시면….”
촤악.
촬영 감독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는데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라영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연신 원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 대리! 이 대리 지금……!”
다리랑 엉덩이가 왜 이렇게 축축하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라영은 손으로 더듬더듬 바지 뒷부분을 만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물은 라영에게서 나온 건지 바지가 엉덩이부터 젖어 있고, 통이 넓고 얇은 여름 소재의 바지가 그 액체를 다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를 타고 바닥에까지 쏟아진 것 같았다.
“어…? 이게 뭐지…?”
갑자기 얼떨떨해졌다. 분명 이게 나한테서 나온 것 같기는 한데. 소변을 본 건 아닌데 이게 왜 이러지…? 뭔가 어떤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패닉이 되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촤악!
엉덩이를 더듬으며 허둥지둥 움직이고 있는데 힘을 줬더니 2차로 액체가 쏟아졌다.
“꺄악!”
“어떡해! 이 대리님 양수 터졌나 봐!”
“누가 119 좀 불러!”
“여기 사람 죽어 가요!”
아니……. 왜 멀쩡한 사람을 보내 버려…. 라영의 바로 근처부터 먼 곳까지 소란이 점점 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당황스러운데 촬영장까지 뒤집어지니 절로 혼란과 어지럼증이 몰려와서 몸이 휘청거렸다.
“이 대리 쓰러지면 안 돼!”
“정신 차려!”
촬영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 * *
“으…….”
1인실 병실 침대에서 앓는 소리가 나자 보호자 의자에 앉아서 초조하게 라영의 손등을 살며시 쓰다듬고 있던 이헌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라영아…! 정신이 들어요?”
“여보야……. 지금 몇 시야…?”
라영이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혼곤한 목소리로 눈 틈새로 보이는 이헌에게 물었다. 정말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겪는 개복 수술과 수면 마취는 메스꺼움을 동반했다.
“지금 밤 9시예요…. 병실로 이동하고 나서 마취에서 너무 깨어나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이헌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며 이야기했다. 그 걱정은 실로 타당했다.
오늘 낮에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얼마나 놀랐던가.
‘여보. 나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 아직 진통이 제대로 오고 그런 건 아닌데 양수가 먼저 터진 것 같아. 병원이랑 통화했는데 아주 긴급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니까 진정해요. 일 마무리하고 병원에서 만나요.’
갑자기 양수가 터져서 병원으로 실려 가고 있다는 산부치고는 너무나 침착하고 매끄러웠다. 나중에서야 정말 초조할 때는 되레 침착함을 연기하는 것이 라영의 버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도대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서 무척 당혹스러웠다.
역시 억지로라도 휴직을 좀 더 일찍 하게 하고 집에서 쉬게 했어야 했는데…. 여러 가지 후회들이 겹쳐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라영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강제할 수는 없었겠지만, 당시에는 온통 자책과 후회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무리는커녕 하던 일도 다 집어던진 채 병원으로 달려갔다. 함께 달려온 이헌의 수행 비서는 막 실려 온 산부가 없는지 파악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심지어 그들이 얼마나 일찍 달려갔던지 아직 라영은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얼마 뒤에 이동식 침대에 실려 온 라영은 파주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중에 본격적으로 진통을 시작했는지 연신 고통스러워했다. 이헌은 라영이 그렇게 아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연신 온몸에서 땀을 쏟으며 인상을 찡그리느라 눈을 뜨지도 못하는 라영을 보며 마음이 저며졌다. 출산이 이렇게 힘든 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이를 갖지 말 것을……. 라영이 알면 이상한 생각 좀 작작 하라며 등짝 스매싱을 당할 생각에 휩싸였다.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의료진을 다그치던 중, 배 위에 기계를 붙이고 이것저것 검사를 하던 의사가 아무래도 아기의 심박수가 점점 낮아져서 바로 긴급 수술에 들어가야겠다고 통보하는 말에 기절할 뻔했다.
이제까지 라영이 늘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것처럼 남들과 비교해서 어려움이 거의 없는 수월한 임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안 좋은 것과 고생이 제일 뒤에 있었던 걸까? 라영이 늘 설파하던 인생 인과응보 이론과 고통 질량 보존의 법칙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가?
이헌은 제정신이 아닌 채로 보호자의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남편을 수술실로 들여보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걱정 말라는 의사의 말과 다르게 수술동의서에 쓰여 있는, 혹시라도 산부가 사망할 경우를 상정한 여러 가지 문구와 서명란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파하는 라영을 더 불안하게 할 수 없어서 연신 침착한 얼굴로 잘 될 거라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수술실로 들여보냈지만 마음속으로는 ‘당신이 잘못되면 나도 따라갈 거야.’라는 어린애 같은 생각만을 되뇌었다. 네가 알면 웃기지 말라고 또다시 내 등짝을 내려치며 파안대소하겠지.
수술방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애써 정신을 차리고 양가 부모님께 연락을 돌렸다.
‘이라영 산부님 보호자분! 들어오세요.’
아기가 태어났으니 소독하고 와서 탯줄을 자르라는 간호사의 말에 멍하니 있던 정신을 되찾고 부르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천사가 있었다.
고통에 잠식당하고 있던 생각의 방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똑똑. 내가 왔어요, 아빠.
너와…. 그리고 감격이었다.
이헌은 마음속으로 반가움의 첫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 아들. 만나서 반갑다.
“우리 둥둥이 봤어요?”
팔에 달린 링거 줄과 여러 가지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정신을 좀 차린 라영은 곧장 아기에 대해 질문했다. 몸 안에 있던 만 아홉 달 동안 어찌나 궁금했던지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그 생각부터 들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나와서 만난 모습은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라영의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당시의 회상을 하던 이헌은 라영이 안심할 수 있도록 다정하게 미소 지어 주며 적극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럼요. 직접 탯줄까지 잘랐습니다. 둥둥이는 지금 신생아실에 있어요. 내일 데리고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 보면 돼요. 사진 보여 줄게요. 많이 궁금했지?”
이헌은 라영의 이마에 입맞춤을 뿌려 주며 폰을 내밀어 탯줄을 자르는 둥둥이의 영상을 보여 주었다. 비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로 봐서는 멀리서 비서가 촬영해 준 것 같았다.
“이때는 배 속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빨갛고 부어 있지만, 아까 다시 면회 시간에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봤을 때는 좀 더 예뻤습니다. 여기 사진 봐 봐요.”
이헌이 영상 파일을 넘기며 다른 사진을 보여 주었다. 확실히 처음보다 좀 더 정돈된 얼굴이다.
라영은 감동한 표정으로 유심히 보다가 이헌과 사진을 번갈아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신 함께 감동에 젖어 있던 이헌은 라영의 반응에 멈칫했다.
“이게 뭐야…?”
“네?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기대가 와장창 깨진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내 유전자는 도대체 어디에…?”
“……응?”
아무리 보고 또 보고, 다시 보아도 사진 속의 둥둥이의 얼굴은 남편 정이헌을 복제한 것 같은 수준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사진이지만 확실하게 보이는 이목구비의 비율과 이헌과 똑같이 생긴 눈썹 모양, 양옆으로 길게 뻗은 눈매, 윗입술이 아랫입술보다 약간 더 얇은 모양까지. 그리고 심지어 귀 모양도 이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야,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아무리 부정하고 다시 수십 장의 사진을 돌려 보고 영상도 보고 했지만 아기의 모습은 변치 않고 그대로다.
말도 안 돼…!
“내가…! 내 배 속에서 키웠는데…! 맨날 내 목소리 듣고 나랑 같이 먹고 자고 했는데, 어째서 여보만 닮은 거예요?”
머리카락 색이 나처럼 유독 까만 것을 제외하면 이건 누가 봐도 정이헌 주니어, 정이헌 복제 인간이잖아….
“여보를 닮아서 기쁘기는 한데…….”
그래도 이헌과 자신을 반반씩 닮은 모습을 기대했는데…. 라영은 마취가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기의 모습에 지분이 하나도 없어 보여 조금 서운한 나머지 수술 부위의 아픔도 잊고 눈이 촉촉하게 젖어 오는 라영을 보며 이헌은 연신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건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아이가 이렇게 유독 자신만 빼닮게 태어나리라고 생각이나 했던가. 오히려 임신 기간 내내 사랑하는 라영의 모습을 닮기를 바라 왔지만 이게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라영이 원한다면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는 이헌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연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연신 라영을 진정시켰다.
“아기는 자라면서 얼굴이 계속 바뀐다고 하잖아요. 진정해, 라영아. 내일 직접 얼굴을 보면 또 다를지도 몰라…!”
아직 지금의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다, 자신도 어릴 때는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나이를 먹으니 아버지와 더 많이 닮았다고 연신 쩔쩔매며 설명했다. 라영은 이헌의 필사적인 다독임에 조금씩 이성을 되찾았다. 수술 부위가 아파서 훌쩍거리며 삐죽 나온 콧물을 풀지도 못하는 걸 보고 이헌이 티슈를 뽑아 와 살살 닦아 주었다.
“우리 아이 낳느라 수고 많았어요. 정말 고생했습니다. 내가 평생 동안 보답할게.”
“…….”
“사랑해.”
늘 입에 붙은 사랑을 속삭이는 말에 라영의 마음도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이헌의 폰을 손에 들고 눈에서 떼지 않고 계속 둥둥이의 모습을 돌려보았다. 보아도 보아도 이쁘고 사랑스럽다. 자꾸 보니까 이헌만 닮은 얼굴도 마음에 쏙 든다. 라영은 시간이 지나고 마취 기운도 사라지면서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
라영은 따뜻한 물에 적셔 온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열심히 닦아 주는 남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사랑하는 당신과 나의 아이가 태어난 날이다. 그리고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더라도 계속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단순히 사람이 하나가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 아이는 우리의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고, 그와 내가 생명의 유산을 반씩 짊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온전히 우리가 사랑해 주고 책임을 지고 정성으로 키워야지만 이 아이는 앞으로 살아나갈 기반과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나중에 어쩔 수 없는 일들로 만약 혼자가 된다고 하여도 우리의 연결은 이 아이가 있는 한 절대 끊어지지 않을 거야. 이 아이가 우리를 연결해 주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들을 하니 뿌듯함과 동시에 묵직한 책임감이 들었다.
이제는 한 사람의 생을 책임지고 있는, 진짜로 독립된 어른인 것이다.
라영이 마음속에 드는 그런 생각들을 줄줄이 이야기했더니 이헌이 흐뭇하게 웃고 라영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아 주며 말했다.
“당신은 그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돼요. 그리고 안심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라영이 너와 둥둥이를 끝까지 책임질 거야. 세상의 모든 안 좋은 것들로부터 항상 지켜 줄게요. 약속해.”
너무나도 알파다운 말에 라영도 절로 웃음이 났다. 그리고 보호자 의자의 끄트머리에 겨우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서 상체는 온통 라영이 누워 있는 침대 위로 풍덩 빠질 것 같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끌어당겨 어루만졌다.
“나도 여보와 둥둥이를 책임지게 해 줘.”
“당연하고말고. 사랑해, 라영아.”
“나도 사랑해요.”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거실에 새로이 제작해서 깔아 놓은 어린이 매트 위에 세 사람이 작을 소 자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하얀 속싸개에 싸여 있는, 태어난 지 3주가 된 조그마한 아기를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부모가 좌청룡 우백호마냥 포진해 있는 모양이었다. 라영과 이헌은 엎드린 몸으로 누워서 그들 사이에 천사처럼 잠들어 있는 아들을 한없이 바라보며 감탄에 빠져 있었다.
“여보, 우리 태겸이 정말 이쁘죠?”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라영의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왔다.
“네. 라영이 빼고 세상에서 가장 예쁩니다.”
이헌도 팔불출처럼 그 말에 적극 동조를 했다. 좀 더 낯부끄러운 표현이 앞에 끼어들기는 했지만 라영은 민망해서 모르는 척했다. 이 남자, 한결같아서 아주 좋다. 나중에 아들 준다고 남편 거 빼앗아 갈 일은 절대 없겠어.
부부의 아들 이름은 정태겸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다음 날, 이헌의 부모님이 병원으로 면회를 오셨다. 라영은 시부모님의 감성적인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어머님은 라영의 손을 쓰다듬고 연신 눈시울을 붉히며 축하한다고 반복하셨고, 아버님은 아주 작은 아기라는 존재를 품에 안고는 감격에 차서 말을 잇지 못하셨다. 장성한 자식은 세 명이나 있으나 손주는 처음인지라 감동이 남다르신 듯했다. 늘 동장군 같은 얼굴을 하고 계셔서 이런 표정은 절대 짓지 못하실 줄 알았는데, 손자를 품에 안고 그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시며 눈썹을 팔자로 기울이고 움찔하시는 통에 라영은 혹시라도 아버님이 울음이라도 터뜨리시지 않을까 내내 조마조마했다.
양가의 첫 손주라 그런지 라영의 집에서도 이헌의 집에서도 모두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이헌의 집안에서는 부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집안 항렬인 이름자를 보여 주셨고, 라영의 부모님도 거기에 맞춰 여러 가지 뜻이 좋은 한자를 가지고 오셨다. 특별히 생각해 둔 다른 이름이 없었던 라영과 이헌은 부모님들이 가지고 온 한자들을 열심히 조합해서 아기의 이름을 지었다.
클 태太, 겸할 겸兼
크고 포용하고 아우르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아이가 그 어떤 사람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 주고 사랑받는, 그러한 마음이 큰 사람이 되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마음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태겸아…….”
라영은 가만히 작은 입을 꼭 다물고 잠들어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름을 불러 주었다. 우리 둥둥이가 이제 태겸이가 되었구나…. 내가 사람을 낳다니……. 아기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보면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낳을 수가 있지?’라며 게슈탈트 붕괴 현상처럼 이상하게 신기하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 이게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판단이 안 되는 이상한 국면에 이르렀다. 그만큼 보면 볼수록 태어난 새 생명체가 신기하다.
이헌의 설득과는 다르게 태겸이는 하루하루 얼굴이 좀 더 정돈되어 갈수록 이헌의 얼굴만을 더더욱 닮아 갔다. 첫 아이는 알파를 많이 닮는다더니 정말로 그 속설의 산증인이 본인이었다. 그래도 태어난 첫날과는 다르게 이제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고, 그저 아기가 예쁠 뿐이었다.
초반의 이헌은 아기를 예뻐하면서도 차마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그 큰 손을 버둥거리며 불안해하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육아 마스터를 목표로 하는 사람처럼 여러 가지 다양한 육아 필독서를 틈틈이 독파하며 아기를 능숙하게 돌보았다. 결혼 전부터 하던 약속을 맹렬히 지키는 이헌 덕분에 라영은 몸조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애한테 나 자신을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엄마? 아빠? 다른 집들은 어떻게 한대요?”
라영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아기가 깨지 않게 소곤소곤 묻는 질문에 이헌이 작은 목소리로 명쾌하게 답을 주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하면 됩니다.”
고개를 좀 더 세워 팔로 턱을 괴고 라영을 바라보며 어제 읽은 책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형질자 부부 중에 모체가 남성 오메가인 경우에는 가족이나 부부가 상의해서 호칭을 결정한다고 하더군요. 성별이 남자이긴 하지만 아기를 낳는 모체임은 틀림없으니 ‘엄마’라고 호칭해도 되고, 그냥 간단하게 성별로 ‘아빠’라고 호칭해도 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해요. 그냥 라영이가 좋은 대로 하면 돼.”
“아하…….”
라영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헌처럼 턱을 괴고는 고민에 빠졌다. 한참 눈알을 굴리면서 생각하다 명료하게 답을 냈다.
“그럼 그냥 ‘엄마’라고 할래요. 아기한테는 둘 다 아빠면 아이가 호칭하기 헷갈리기도 하고, 엄마라는 어감이 좋아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생각보다 간단하게 결론이 났다. 아이가 장성하면 다시 호칭을 ‘아빠’라고 바꿔 주어도 될 것이다. 라영은 다시 아기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태겸아. 엄마야. 내가 네 엄마야.”
* * *
여름의 쨍한 햇살을 뚫고 라영은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습한 여름의 공기가 가득해서 마치 습식 사우나에서 숨을 쉬는 기분이다. 어쩐지 작년 여름보다 더 정수리가 뜨거운 게, 매년 지구가 더 더워지는 느낌이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더니 이제는 도저히 에어컨이 없는 곳에서는 버틸 수가 없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는데, 임신과 출산 후에 무언가 몸의 체질이 바뀐 것 같았다. 늘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아 차갑던 손발도 조금은 따뜻해졌다. 물론 몸의 다른 부분도 열이 더 도는 건지 더위에 더더욱 취약한 몸이 되어 버렸지만.
아들을 낳고 어느 정도 키우다가 이헌과 육아 휴직을 교대하고 복직한 지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굳어 버린 머리로 다시 현장에 잘 복귀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니 탄력이 붙어서 즐겁게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광고주의 회사에 방문해서 미팅을 갖고 난 뒤에 프로젝트 팀원들과 헤어져 직퇴를 하는 길이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복직을 한 지혁이 반차를 내고 볼일을 마친 후에 근처에 있다길래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아이를 데리고는 자주 만났지만 아이 없이 단둘이 만나는 맛이 있지. 이게 얼마 만에 단둘이서 만나는 날이던가…! 몸은 더워서 쪄 죽어 가기 직전이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아이들이 있으면 온통 아이에게 신경이 집중되어서 이야기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진지하게 하던 이야기들도 아이들의 돌발행동으로 끊기기 일쑤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서로 싸우거나 울지 않고 사이좋게 잘 지내는 편이라 어느 정도 수월한 편이기는 했다.
라영과 이헌의 아들인 태겸은 태어나자마자 시행한 1차 형질자 검사에서 극우성 알파로 결과가 나왔고, 지혁과 우경의 아들인 희언은 우성 오메가로 판명이 되어서 더더욱 그런 것 같았다.
형질자들은 서로 반대의 형질을 좋아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본능이었는데, 아직 페로몬을 발산하지 못하는 아기들이라고 해도 서로에게서 다른 형질의 기운을 느꼈는지 다감하고 사이좋게 잘 지내는 편이었다. 물론 아직 너무 어려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재로서는 평화롭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힘껏 밀고 들어간 무거운 유리문 사이로 에어컨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새어 나와 얼굴로 내려앉았다. 하…. 드디어 살 것 같다. 분명 먼저 와서 앉아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 지혁을 찾으며 라영은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렸다.
팩토리 스타일의 카페라 철근 기둥이 많아서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카운터를 돌아 뒤편까지 와서야 가죽 소파에 기대서 꿈틀거리는 익숙한 좀비 한 명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이 좀비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녀석인데…. 어쩐지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같은 쌍팔년도 작업 멘트를 날려 줘야 할 것 같은 이미지에 데자뷔를 느끼며 조용히 걸어서 다가갔다. 가까이 가니 코 고는 소리도 들리고 아주 가관이다.
낮은 테이블에 놓여 있는 밀크티의 얼음이 다 녹고 유리잔 표면에 잔뜩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게 한참을 이러고 있었나 보다.
“안지혁!”
라영이 낮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치면서 지혁의 귀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우왁!”
지혁이 화들짝 놀라며 깨면서 무릎으로 테이블을 가격하고, 흔들리는 음료 잡으려 라영이 달려들며 소란스럽게 난리가 났다.
“제발 좀 평범하게 깨워…….”
지혁이 끙끙거리며 무릎을 부여잡고 말했다.
“어젯밤에 뭘 했길래 사람이 맥을 못 추고 이래?”
주문한 음료를 카운터에서 받아 와서 앉으며 라영이 묻는 말에 지혁이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황당한 얼굴이다. 프로끼리 이러기냐?
“뭐겠어. 희언이가 밤새 울어서 그렇지.”
지혁이 다 녹은 밀크티를 마시고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지혁의 아들인 어여쁜 희언이는 이제 9개월이었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잠이 예민해 수면 교육도 먹히지가 않아서 부부가 매일 고생을 하고 있었다. 라영도 아들인 태겸이 돌이 지나고서야 겨우 통잠을 자기 시작했기에 그 고통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지…. 늘 동지애와 더불어 연민은 덤이다. 이미 그 시기를 조금 지난 자의 여유로움이었다. 나도 다 그 시기를 지나왔노라, 이 중생아.
“얘가 희한하게 낮에는 우경 씨만 찾으면서 밤에는 내가 아니면 안 달래져. 정말 일관성을 좀 부탁하고 싶다…….”
짠한 녀석…. 차라리 낮에도 밤에도 베이비시터를 고용해서 쓰라고 조언을 했으면 좋았을까…? 반차를 내서 볼일을 처리하고 나면 집에 가서 쉬는 게 편할 텐데, 굳이 만나자고 나와서는 졸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혼자서 차 한 잔 마시고 싶었으면 저럴까….’ 싶어서 라영은 더 말하지 않았다.
첫 아이라서 그런지 직접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양쪽 부부 모두 하루 종일 봐주는 입주 베이비시터는 아예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낮에만 시터를 고용하고 있었기에 시간도 빠듯했다.
라영과 지혁은 오랜만에 생긴 둘만의 자유시간을 즐기기 위해 빠르게 근황을 보고했다. 이번에 새로 맡게 된 일부터 직장인의 끊이지 않는 고민인 사내 인간관계, 복직해서 굳이 바득바득 일하는 걸 보는 사람들의 시선…. 복직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대단한 남편을 가졌는데, 굳이 일할 필요 없지 않아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둘은 그 주제를 가지고 신나게 분노를 발산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5시가 가까워졌다.
“이제 우리 들어갈까?”
라영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래. 나도 얼른 들어가서 희언이 얼굴이나 좀 더 봐야겠다. 오늘 아침에도 나랑 우경 씨 출근하는데 너무 울어서 마음이 미어졌어.”
마음이 미어졌다는 사람치고는 방금 전까지 너무 신나게 놀지 않았니, 친구야. 네가 입을 털며 나온 침이 지금 테이블에 흥건한데……. 라영은 혼자서 속으로 키득거렸다.
지금 돌아가면 7시에 퇴근하는 베이비시터 아주머니와 함께 이헌과 태겸이 있을 시간이었다.
만난 장소가 이미 그들이 사는 동네였기에 걸어서 집까지 올라가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집에 들어가니 부엌에서 통통통 하며 경쾌하게 도마 위를 지나가는 칼 소리가 거실을 지나 현관까지 작게 울려 퍼졌다. 도우미 이모님이 저녁을 한창 차리고 있는 듯했다. 저녁의 생활 소음이 기분 좋게 들려오는 집 안으로 깊이 들어서며 부엌이 보이는 코너를 지나니 무를 썰고 있는 이모님이 보인다.
“저 왔습니다. 태겸이랑 남편은 위에 있나요?”
“어머나, 일찍 오셨네요. 전무님하고 도련님은 2층 서재에 있어요.”
“시터님은 잠깐 자리 비우셨나 봐요?”
함께 서재에 있다는 말에 라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퇴근하시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갑자기 시터님 어머니가 계단에서 구르셨다고 연락이 와서 아까 4시쯤에 급하게 퇴근하셨어요. 그 얘기 듣더니 전무님이 얼른 가라고 하시던데, 연락은 못 받으셨나 봐요?”
그 얘기를 들으니 아아 하고 수긍이 갔다. 라영과 지혁이 오후에 만나는 걸 알고 있던 이헌이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전달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중요한 사업을 이끌고 있던 터라 육아 휴직 중이어도 일을 완전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던 이헌은 집 서재에서 일을 하고 종종 화상 회의도 하며 아이를 돌보았다.
“조금 전에 전무님이 태겸이 간식도 먹이셨어요. 한 번 올라가 보셔요.”
라영은 손을 씻고는 2층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열려 있는 서재 문 사이로 짤랑거리는 장난감 소리와 어린이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태겸이 사운드 북을 열심히 누르고 있나 보다. 단조로운 음악 위로 업무 통화를 하는 듯한 사무적인 투의 이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근데 어째 목소리가 살벌하다.
라영이 방해되지 않게 살포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헌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제까지 자료 모아 오던 거, 그거 다 풀어. 특히 작년에 오메가들 불러 놓고 마약 파티하던 거랑 얼마 전에 브로커 끼고 떨 대량 매입한 거 증거도 다 넘겨 버려. 그 새끼가 정신이 나갔나? 아니면 정말 대가리에 총을 맞았나? 내가 뻔히 자기 치부 갖고 있다고 친절하게 힌트까지 줬는데 이따위로 나오면 보내 드려야지.”
누구 얘기를 하는 거지…? 라영은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니야. 그놈이 멍청하기까지 해서 자기 무덤 파려고 덤비는데 당연히 상대를 해 줘야지. 이제까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이 참았어? 정말 괜찮으니까 다 풀어. 작은아버지 쪽도 증거가 이렇게 명백한데 할 말이 없겠지. 회장님도 모르시는 게 아니니까 걱정 말고. 그래. 그리고 기사 나왔을 때 그 개새끼 얼굴 좀 사진 찍어서 보내라고 해. 스스로 판 무덤에 좆되는 꼴 좀 봐야겠으니까.”
이헌은 드물게도 짜증이 난 것처럼 연신 펜 뚜껑을 열었다 닫으며 부산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HY 기획 제작팀에 신입 배치된다고 들었는데. 내 남편 부서에 알파 놈들 없게 해. 이제는 네가 그쪽까지 신경 써. 김 실장님이 임원으로 승진하면서 그쪽 일에 손 뗐으니까. 그쪽 동향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라영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얼떨떨하게 경직되어 있다가 열다 만 문고리를 좀 더 밀어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 아빠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헌의 다리 밑에 앉아서 열심히 사운드 북을 넘기고 누르고 있던 태겸이 문틈에 서 있는 라영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반가움을 내질렀다.
“음마!”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기저귀를 찬 빵빵하고 귀여운 궁둥이를 들썩이며 두 팔을 뻗었다. 당장 이리로 달려와서 자신을 안아 올리라는 포즈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이헌이 전화를 끊고 전광석화처럼 뒤를 돌았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태겸을 제외하고 대치한 알파와 오메가는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굳었다.
들킨 자.
그리고 발견한 자.
놀란 사람.
그리고 더 놀란 사람.
라영은 이헌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경악에 차오르더니, 이마에 흐르는 한줄기 땀을 닦지도 못한 채 동공을 사정없이 흔들며 어버버거리는 다이내믹한 모습을 얼음처럼 굳어서 쳐다봤다. 사람의 얼굴색이 저렇게 표나게 변하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 사람이 이렇게 놀라기도 하는구나…….
그 모습은 한창 신명 나게 집 안을 털던 도둑이 집주인인 경찰이 총을 들고 나타난 걸 마주한 사람 같기도 했고, 임금 뒷담화를 하다 임금한테 대놓고 걸린 충성스러운 내시 같기도 했고, 골목 뒤에서 노상방뇨를 하고 걸걸하게 침을 뱉으며 쌍욕을 하는 모습을 특종 전문 기자에게 동영상이 찍힌, 깨끗하고 순한 이미지로 사랑받는 국민 아이돌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얼굴에 그냥 이렇게 쓰여 있었다.
좆 됐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라영을 바라보며 버벅대던 이헌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발밑에서 영문도 모르고 신이 난 아들을 발견하고는 번개 같은 속도로 아들을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아들 옆구리를 양손으로 잡아 방패처럼 라영을 향해 쭉 내밀며 외쳤다.
“우…우리에겐 아들이 있어…! 우리는 같이 낳은 애…애도 있는 사이야…!”
무슨 일인 줄 모르고 아빠가 비행기를 태워주는 줄 알고 까르륵거리며 웃는 태겸의 뒤로 이헌은 그 큰 몸을 구겨 숨기면서 큰 소리로 주장했다. 우리는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 사이라며 절대 못 무른다고 필사적으로 웅얼거린다.
그저 당황해서 굳어 있을 뿐이었던 라영은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빵 터졌다.
“으학! 하하하! 으히히… 아이고…!”
파안대소를 하다가 낄낄대다가 결국은 배가 아픈 나머지 배를 부여잡고 웃다가 주저앉는 라영을 당황한 채 바라보며, 이헌은 태겸을 안정적으로 안고 슬며시 다가왔다.
“괜찮아요…?”
지은 죄가 많아 슬픈 죄인처럼 자신 없는 목소리로 쪼그려 앉아서 라영의 안위를 묻는다.
라영은 어린이 안전 매트 위에 엎드려서 한창 바닥을 치며 웃다가 겨우 눈물 맺힌 눈을 들어 이헌의 팔뚝을 잡고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어요?”
라영의 말에도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듯, 이헌은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로 드물게 바보 같은 표정이다.
이 사람이 정말로 자기가 모든 걸 다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나 봐.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어서 웃음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여보, 이헌 씨. 이리 와요.”
라영이 웃느라 지친 심신을 일으켜서 태겸을 안고 있는 멍청한 얼굴의 이헌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따스한 팔 안에 큰 사람과 아주 작은 사람 모두가 품 안으로 겨우 들어왔다. 내 사랑들…….
“당신 원래 모습 다 알고 있었어. 이제까지 그거 들킬까 봐 그렇게 신경 쓰면서 살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거칠게 굴고 욕하는 거 보면 내가 결혼 무르자고 할 줄 알았어요? 사기 결혼이라고 할까 봐?”
“아니 나는…….”
힘을 줘서 두 사람을 더 꽉 안았다.
“괜찮아요.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 모습 전부 그대로니까.”
라영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이헌의 얼굴을 마주 보고 확신에 찬 어조로 사랑을 말했다. 진심을 얘기해서 이 불쌍한 영혼을 안심시켜 줄 차례였다.
“나는 이헌 씨, 당신이 냉정하고 거친 사람인 모습조차도 사랑해요. 그리고 그런 성격이면서도 내 앞에서는 최대한 다정하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은 더 사랑하고요. 나를 사랑해서 항상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 그렇죠?”
그 다정한 물음에 이헌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영원히 나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할 걸 알고 있고요, 언제나 나에게 최선을 다해 줄 것도 알고 있어요.”
라영은 굳은 볼에 입을 맞추고 경직된 등을 다독였다. 이헌이 그 말을 천천히 이해하고 흡수하고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는 겁니까…?”
여전히 자신 없는 목소리에 라영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온 힘을 다해 꽉 안아 준 다음에 대답했다. 예전에 처음으로 속인 것을 들켰을 때, 다시는 우리 사이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관계를 두고 약속했던 것을 내내 마음에 품고 있었나 보다. 기특하기도 하지.
“당연하지! 여보랑 나랑 태겸이랑 천년만년 함께 살아야지! 그럼 당신은 내가 못생겨진다거나, 성격이 이상하게 변한다거나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아프고 병들면 버릴 거예요?”
그 질문을 듣자 이헌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 그럴 리가! 라영아, 나는 네가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아프더라도 절대 너를 놓지 않을 거야.”
“하하하.”
라영은 기분 좋게 웃었다.
“네가 나이 들어서 벽에 똥을 칠해도 나는 매일매일 웃으면서 치워 줄 수 있어요.”
“아, 진짜…. 감동적인데 갑자기 똥은 뭐야, 더럽게.”
감동의 대잔치에 눈치 없이 똥을 던지는 이헌을 바라보며 라영이 차디찬 눈으로 정색했다. 가끔씩 분위기를 이렇게 못 맞추니…. 이 인간이 왜 이렇게 불안해했는지 좀 알겠다. 쯧쯧.
근데 제발 이제 정체도 다 까발려진 김에 존댓말이건 반말이건 하나로 통일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이렇게 짬뽕 같은 말투가 버릇이 되어 버렸다며, 그만 포기하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얼굴은 세상 다정하고 안쓰럽다는 표정이다. 제발 스탠스나 표정도 하나로 통일해 주었으면…. 그런 표정을 할 거면 단호하지나 말든지, 거참.
라영이 손바닥을 마주쳐서 짝, 소리 내며 분위기를 환기하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 그렇지만 여보가 잘못한 게 있어요. 태겸이 앞에서 그런 나쁜 표현이나 안 좋은 말을 하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지금 한창 말 배우느라 이거저거 다 따라 하는데.”
“…….”
이헌이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여전히 거듭되는 사촌의 시비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애 앞인 것도 잊고 통화 내용이 너무 거칠었음을 반성했다.
“다음부터 애 앞에서는 말 좀 조심해요. 애 아빠가 이젠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언행을 조심해야지.”
“명심하겠습니다….”
이제는 당신도 나도 억지로 노력해서라도 험한 말은 버릴 때가 왔다며, 엄한 얼굴로 선생님처럼 설교를 늘어놓는다.
라영이 이헌의 품에서 연신 그에게 안기려고 버둥거리며 ‘음마, 엄마.’를 외치는 태겸을 안아 들고 서재를 나섰다.
“얼른 정신 차리고 일어나요. 일은 다 마무리됐어요? 아주머니가 오늘 저녁은 연포탕이래.”
걸음을 옮기며 사랑하는 아들의 귀여운 고사리손을 가져와서 입술로 우부부부 바람을 불어 주며 ‘우리 태겸이 아빠랑 재밌게 잘 놀았어?’라고 말을 건넨다.
이헌은 가만히 멈춰 서서 두 사람의 그런 사랑스럽고 다정한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꿈같은 광경이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돌아가서 이것을 말해 준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긴 시간을 기다려 어렵게 이룬 운명의 결과였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들이 바로 눈앞에 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변하여도 절대 변하지 않을 진실이었다.
오늘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치 있는 저 두 존재를 위해서 살아갈 것이다.
매일.
그리고 평생.
“안 와요?”
“지금 갑니다.”
사랑하는 존재들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이헌은 가까이 다가가 라영의 손을 잡았다.
가족이 걸어가는 뒷모습에 창밖에서 기울어지는 붉은색의 저녁의 태양이 그대로 내려왔다.
그리고 세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단 하나의 그림자로 남았다.
<결혼이 급한 건 극우성 오메가 끝>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