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14/18)

<2> 

임신 16주의 직장인 라영의 하루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팀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와서 자연스러운 코스처럼 칫솔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넓은 거울을 빤히 바라보는데 본인의 모습이 만족스럽지가 않다. 도대체 배는 언제 남산만 하게 불러 오는 건지…. 생각보다 배가 빨리 불러 오지 않아서 실망스러웠다. 배 속의 아기가 너무 궁금하고 빨리 만나고 싶은데,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아직 태동도 느끼지 못해서 영 실감이 나질 않는다.

“둥둥아, 너는 언제 다 커서 나올래?”

이헌과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지은 태명으로 배 속의 아기를 불러 본다. 귀염둥둥이의 둥둥이다. 임신 초반에 젤리곰 같은 초음파 사진을 보고 너무 귀여워서 역시 다른 이름보다는 직관적인 귀염둥이가 낫겠다고 주장해서 지은 이름이다. 이헌의 의견은 단 1도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헌은 그저 라영이 좋다면 뭐든 좋다는 식이었다.

남들은 체형이 달라지고 살이 찌고 배가 부르면서 우울해진다고 하는데 별다른 변화 없이 그저 배가 주먹만큼 튀어나오기만 한 라영은 그런 변화마저 부럽기 그지없었다. 바뀐 거라고는 그저 바지들을 죄다 고무줄 바지로 바꾼 것 정도였다. 아직 임부 바지는 맞지도 않고 흘러내렸다. 쇼핑몰의 후기들을 보아하니 초산인 산부는 20주는 넘겨야 그나마 좀 맞는다는 것 같았다. 오른손으로는 연신 칫솔질을 열심히 하며 배를 어루만지던 라영은 입 안의 거품을 탁 뱉어 냈다. 입덧은 별로 안 하는데 양치질을 오래 하면 구역질이 나와서 서둘러 끝내야 했다.

지잉.

입 안을 헹구며 양치질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누구지? 광고일까? 서둘러 칫솔을 털어 정리를 하고는 손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 냈다. 분명 별거 아니겠지만 왠지 안 보이면 더 궁금한 게 사람 심리 아니겠나.

[오늘 별일 없지? 너 퇴근 시간 맞춰서 회사 앞으로 간다. 나랑 밥 좀 먹어.]

톡방 자체가 생소한 이 메시지는 대체 뭐지? 라영의 대학 친구들과는 거의 대부분 단톡방에서 대화를 해결하기 때문에 잘 쓰지 않는 개인 톡으로 보내온 지혁의 메시지가 어쩐지 이상하다. 게다가 개중 가장 상식적이고 똑 부러짐을 자랑하는 지혁이 이렇게 답정너 톡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는데…. 뭔가 굉장히 수상하며 급박한 우주의 기운을 느낀 라영은 정확한 퇴근 시간과 함께 알았다고 답변을 보내고 말았다.

수상한 기운과 함께 가십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 촉은 분명 맞을 거라고 라영의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일단 급 약속을 잡은 것을 남편에게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라영은 이헌에게 오늘 늦는다고 톡을 날렸다.

네 명 중에 한 명이 사고라도 쳤나? 결혼 축하 선물이라고 돈 모아서 신혼집에 넣어준 최고 사양의 조립식 데스크톱 뿜빠이를 어떤 놈이 안 하고 날랐나…? 라영은 가능할 법한 온갖 추리를 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요즘 희한하게 새로운 업무 분장이 안 되고, 일이 좀 한가한 것이 어디에 사는 누구의 압박이 들어간 것 같은데 물증이 없으니까 잡아낼 수가 없어서 시간이 좀 많았다. 조만간 자신을 요즘 부쩍 어려워하는 제작 3본부장님 뒤를 밟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라영은 아이디어를 뒷받침해 줄 이미지 자료를 검색했다.

저 멀리서 좀비 같은 게 걸어오고 있다. 이런, 드디어 지구에 바이러스가 터진 건가? 라영이 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움찔거리고 있는데, 좀비가 고개를 들고 손을 올리며 말을 건다.

“여어…!”

‘여어’는 무슨…. 저 좀비 같은 게 안지혁일 줄이야.

“몰골이 왜 이래? 회사 잘렸어?”

“잘리기는……!”

그런데 왜 거지꼴이냐고 묻는 라영의 질문에 좀비에게 점점 분노와 함께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밥이나 먹자. 나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다. 맛있는 곳으로 안내 좀 해. 메뉴는 상관없어.”

“넌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이 꼴로 밥도 못 먹었어…? 가자, 가! 오늘 내가 산다.”

라영은 대체 이 부랑자 같은 몰골을 한 이유를 일단 녀석의 배를 불려 놓은 뒤에 캐기로 결심하고 근처 샤부샤부 전문점으로 친구를 이끌었다. 아무래도 이런 모양새를 하고 나타난 게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이제 배 좀 찼으면 말 좀 해봐. 뭔데 그래?”

야채와 한우는 이미 끝장났고 남은 걸쭉한 국물에 칼국수 사리를 넣으며 라영이 물었다. 이만하면 성질 급한 본인 성격에 많이도 기다려 줬다. 너는 이제 배를 불렸으니 입만 털면 된다고, 라영이 육수 안에 끓는 면을 집게로 휘저으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 종일 배고픈 줄도 몰랐는데 널 보니까 식욕이 돈다며 걸신들린 듯이 샤부샤부를 흡입하던 지혁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한 잔 전부 털어 넣은 뒤 냅킨으로 입을 닦고 라영을 진지하게 마주했다. 제대로 말을 시작하기 전에 뜸 들이는 것이 보통 오래 걸리는 게 아니었지만, 천천히 자신을 정돈하고 나니까 드디어 원래 미모가 보이는 것이 보기 좋았다. 아까는 거리의 비렁뱅이가 따로 없더니 따끈한 국물 들어갔다고 볼에 홍조와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니 역시 사람은 배가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임신했다.”

푸웁!

“아 씨, 더럽게 정말.”

지혁이 냅킨을 여러 장 뽑아 겹쳐서 얼굴과 어깨를 털어 내며 짜증을 냈다. 본의 아니게 라영산産 물로 천연 미스트를 뿜어 버린 라영은 당황하며 버벅댔다.

“나? 나 임신했다고? 맞아. 알잖아. 나 지금 16주야.”

“아니, 진짜 귓구멍이 막혔나…. 나 임신했다고, 너 말고 나!”

한 놈은 정신이 나갔고 한 놈은 짜증이 가득 찼다.

“너 임신했다고?”

“그래! 내가 임신했다고!”

누가 봐도 오메가 같은 것들끼리 테이블을 마주 두고 신나게 먹다가 언성을 높이며 임신 타령을 하는 것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라영은 주위를 살피며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장난 아니고 진짜야?”

“그래! 어제 테스트기도 하고 오늘 반차 내고 병원도 가서 확인했어. 이거 봐.”

계속 믿지 못하는 라영을 보며 지혁이 주머니에서 초음파 사진을 꺼내서 건넸다. 라영도 익히 잘 아는 그게 맞다. 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검은 바탕에 하얀 노이즈로 그려진 사진은 작은 아기집만 덩그러니 보였다.

그 사진과 지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라영은 친구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아도 평소처럼 동양적인 미인인 내 친구 지혁이가 맞는데……. 라영은 지금의 믿기지 않는 현실을 열심히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지혁의 얼굴을 계속 살폈다. 그러고 보니 저 펴지지 않는 미간 하며 짜증은 뭔가 원활한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인데…. 그런데 대체 상대는 누구지? 라영은 머리를 굴리고 한껏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심문을 시작했다.

“너 애인 없었잖아? 다른 애 아빠는 누군데? 그 사람도 알아?”

그 얘기를 듣자 지혁이 힘주어 구겨 버린 종이처럼 인상을 더 팍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나 어제 처음 알고, 오늘 너한테 처음 얘기하는 거야.”

어머? 처음이라니 좀 감동…이 아니라? 뭐라고? 라영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캐묻기 시작했다.

“뭐라고? 대체 누군데 그래? 불륜이야? 말 못 할 사람이야?”

감동의 마음을 담아 칼국수를 덜어 주던 라영이 혹시 모를 충격적인 진실이 숨겨져 있을까 덜덜 떠는 바람에 삐끗해서 담던 면이 온통 냄비 안으로 다시 쏟아졌다.

“미쳤어? 유부들하고 엮이는 건 무간지옥에 빠질 죄다!”

지혁이 눈을 부릅뜨며 거센소리로 외쳤다.

“아니, 그건 네 말이 맞지만. 그럼 대체 말 못 할 이유가 뭔데? 원나잇이야? 연락처 몰라?”

지혁은 그건 아니라고 웅얼웅얼거리며 더 말을 못 하고 칼국수를 흡입했다. 저 힘찬 면 치기라니……. 동공에는 지진이 나고 땀은 삐질삐질 흘리면서 잘도 처먹네, 내 친구. 그래, 너도 이제는 한 명이 아닌 두 사람이니 많이 먹어라. 남은 것도 너 다 먹어라, 내가 양보할게. 선배 임산부인 라영은 말도 못 하고, 짜증을 내며 열심히 먹는 친구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냄비의 불을 껐다. 열의 넘치게 칼국수도 배 속에 담은 뒤에 지혁은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이번 주에 힛싸가 시작해야 하는데, 억제제 준비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시작을 안 하는 거야. 너 알잖아. 난 열성이라 히트 간격도 길고, 와도 미약하게 지나가는 거.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몸살처럼 지나간 건가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또 아니라 이거지.”

“응응.”

라영은 혹시라도 이야기가 끊길까 봐 고개만 열심히 끄덕이며 지혁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설명할 것이 많았던지 지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진짜 머리에 확 스치는 생각이…. 말도 안 돼. 정말 이건 가능성이 없는데, 완전 웃긴다 하면서도 소름 돋고 촉이 확 오는 그런 느낌 알아?”

“알지, 그럼.”

“아니겠지,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이미 다리는 편의점으로 달리고 있더라고. 검색해 보니까 요즘은 편의점에서도 임신 테스트기 팔더라? 가서 오메가용 임테기 종류별로 세 개 사 들고 집에 와서 해 보는데…….”

그다음 이야기는 말을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빨간 두 줄 쫙쫙 떴겠지. 아주 빼도 박도 못하게 하나도 아닌 임신 테스트기 세 개 전부. 예쁜 눈이 주변부터 시뻘게지다 코끝도 빨개지면서 눈 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라영은 점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대체 어떤 개새끼가 우리 지혁이 눈에 눈물이 나게…! 얘가 평소에 얼마나 감정 없고 강철 같은 앤데…! 평소에는 서로를 까느라 정신이 없지만 위기만 닥쳤다 하면 똘똘 뭉치는 인민들의 피가 솟구쳤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저도 모르게 친구를 은근슬쩍 냉혈인간 취급한 것도 몰랐다.

“대체 정자 제공자가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너 그래서 나한테 온 거지?”

아까 지혁이 열심히 설명하던 그 촉이 라영에게도 왔다. 이건 백 퍼센트다.

“너네 집들이하는 날…. 윤우경 선배…….”

“뭐? 이런 미친!? 어딜 처음 만난 오메가를 홀라당…!”

처음 만난 알파를 유혹해서 홀라당 잡아먹은 선구자 격 과거가 있는 라영이 본인 몸에 묻은 똥은 생각 못 하고 겨 묻은 알파를 씹어 먹을 듯이 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씩씩거렸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당장 전화를…! 아니 이런 미친!”

당황에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말을 하며 발을 구르고 핸드폰에서 주소록을 뒤졌다. 지혁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라영에게 우경의 연락처는 없었다. 남편 친구 번호를 갖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쉬운 일이 생길 줄이야.

“그만하고 제발 앉아라. 나 창피해. 아니, 아예 계산하고 나가자. 내가 따뜻한 거라도 살게.”

잔뜩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며 창피해서 고개를 숙인 지혁이 라영을 잡아끌었다. 이곳에서는 더는 이야기를 이어 가기 어렵다고 느꼈는지 나가자며 외투를 얹어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라영은 흥분한 채로 얼떨결에 계산까지 마쳤다.

바로 근처의 자그마한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은 둘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날 너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고…….”

그러니까 이야기는 이랬다.

라영이 집들이를 마치고 일찍 쉬러 올라간 뒤, 남은 이들은 각자 대리 기사를 불러 귀가를 서두르는 도중, 택시가 잡히지 않는 지혁을 보고 동네에서 친절하기로 소문난 윤우경 씨가 제안한 것이다.

‘집이 삼각지라고요? 마침 방향도 같은데 같이 타고 가실래요?’

마침 술이 조금씩 올라 잔뜩 텐션이 올라 있는 주변인들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합승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친절이 과연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 알았을까…? 이야기를 듣다가 떠오른 소소한 의문에 라영은 몰래 이 거대한 나비 효과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지혁의 이야기는 이제 노곤한 몸으로 함께 차 뒷좌석에 오른 둘이 술기운에 졸다가 의도치 않게 서로의 페로몬을 맡게 되는 부분까지 흐르고 있었다.

그 뒤는 자세하게 듣지 않아도 알겠다.

다 큰 성인 알파, 오메가가 술도 마셨겠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 페로몬도 맡았겠다, 바로 부둥켜안고 침대로 점프했을 게 뻔하고 뻔했다.

개인적이고 민망한 부분이 오자 웅얼거리며 두루뭉술하게 설명하는 지혁의 얼굴을 보며 라영은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두통이 절로 오는구나…. 갑자기 몰려온 두통을 떨쳐내기 위해, 그리고 절친의 뜨거운 밤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서 라영은 머리를 거세게 도리질 쳤다.

지혁은 우경의 집에 들어가서 콘돔도 없이 급하게 관계를 가진 것을 에둘러서 말하고 있었고, 잘못한 걸 자신도 잘 알고 있는지 마주 보고 있던 눈동자가 점점 다른 쪽으로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라영은 혀를 찼다. 왜 계속 오른쪽만 보면서 얘기하는 거냐? 거기 꿀단지라도 있냐? 차마 이야기를 끊을 수가 없어서 복장 터지는 라영이 얼굴을 씰룩씰룩 구기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묵언 수행은 노팅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와장창 깨져 버렸다.

“미쳤냐? 노팅까지 했는데 다음 날 병원을 안 갔다고? 사후피임약을 처방 받았어야지!”

라영이 조그마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넘어와서 지혁의 목을 짤짤 흔들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따뜻한 자몽 티와 페퍼민트 티가 넘칠 듯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얘기를 대충 듣고 나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갑자기 둘이 정분이 날 수도 있고, 그건 개개인의 성인이니 알아서 할 일이지만 피임약을 안 먹었다니. 이게 정말 미쳤나…….

“다음 날 완전히 뻗었다고! 주말 근무도 하고 나서 너네 집 가서 술도 마시고 녹초가 되게 떡을 쳤는데 다음 날 몸이 정상이었겠냐…!”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후, 뽀득뽀득 씻고 나와서 해장 겸 근처에 나가 함께 쌀국수를 먹고 우경이 실어다 주는 차에 곱게 실려서 곱게 집에 보내졌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침대로 다시 직행해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나니 월요일이었고, 불행하게도 출근할 시간이었다. 정말 잠에 미친 사람처럼 온종일 잠으로 보냈다. 지혁도 일어나서 어찌나 황당하던지, 하루를 통째로 타임 워프한 기분을 어떻게 라영에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 멍청이가…! 그게 말이 돼?”

“그리고 난 너처럼 우성이 아니라서 절대 임신 안 될 줄 알았단 말이야. 히트도 아니고 애초에 임신이 쉬운 몸이 아닌데…!”

지혁이 너무 억울하다는 듯이 해명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후피임약이 효과를 볼 수 있는 48시간이 지난 뒤였다고.

억울함을 담아 꽝꽝 내려치는 주먹에 애꿎은 테이블만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억울함이 반, 허술하기로는 본인과 비교할 수도 없이 한 가닥 이름을 날리던 이라영 따위에게 처신을 잘 못 했다는 문제로 혼이 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음이 반이었다.

그 모습을 본 라영은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이미 다 지난 일은 됐고, 의사는 뭐래?”

그 질문에 지혁도 한숨을 푹 쉬며 머그잔을 들어 허브티를 한 모금 마시며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안 그래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어서 의사한테 자세히 물어봤거든.”

‘지금으로 봐서는 모든 게 전부 추측일 뿐이지만…. 그래도 말씀을 드리자면, 아무래도 히트 사이클을 앞둔 몸이 우성 알파의 성 페로몬에 감응을 일으켜서 히트가 억지로 앞당겨진 것 같습니다.’

‘저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선생님?’

술과 피로와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정확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혁은 일단 가능성을 물었다.

의사는 차트를 넘기며 과거 이력을 살피며 대답했다.

‘안지혁 씨는 평소에도 히트 사이클을 워낙 가볍게 앓고 지나가는 편이어서 발정기가 왔다고 확실하게 못 느끼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상대가 우성 알파라면 페로몬 때문에라도 정신이 많이 혼란스러웠을 테고…. 아마 지금 와서 추측하기에는 이쪽이 가장 신빙성 있는 추론이네요.’

‘……말도 안 돼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젓는 지혁을 보며 의사는 설명을 더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결혼은 아직이시고…. 의도치 않게 생긴 아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상대방이 우성 알파라는 점이 운이 나빴네요. 전에 들으셨다는 임신 가능성 20퍼센트는 일반 알파와 사이클을 보낼 경우의 수를 들으신 것 같아요. 상대방이 우성 알파일 경우 수정과 착상의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집니다. 괜히 우성이 아니에요. 그만큼 생식에 있어서 뛰어난 형질이라는 의미니까요. 차후에라도 2세를 생각하고 계신다면 의도치 않은 아기여도 안지혁 씨에게는 운이 좋은 케이스입니다.’

운이 좋은 케이스라니……. 지혁은 조금 전에 초음파 모니터를 통해 본 검은 아기집을 떠올리며 손바닥으로 배를 문질렀다.

‘워낙 임신이 힘든 몸인 건 맞으니 상대 알파와 다시 한번 잘 이야기해 보시고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지혁은 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라영에게 그대로 전해 주었다. 역시 기억력이 발군인 녀석이다. 라영이라면 대충 알아듣기만 했지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을 거였다.

“그 자식 당장 여기 불러와! 내가 말을 좀 해야겠어! 나는 너네를 만나게 한 책임이 있어, 말리지 마!”

라영이 잔뜩 흥분해서 씩씩거렸다. 남은 인생 한평생 만나지도 않을 사람 둘이 자기를 매개로 붙었다고 생각하니 책임감도 느끼고 화도 났다.

이야기가 보통 심각한 이야기여야 어떻게 단출하게 해결할 방법을 찾아볼 텐데,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라 둘이서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라영은 제3자일뿐 당사자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지 마. 뭐라고 말하려고 그래?”

“알파가 말이야! 어? 노팅을 했으면! 어? 책임을 져야지!”

또 어디서 술 취한 아저씨 같은 모습이 튀어나온다. 화가 나고 흥분만 하면 몸속에 얌전히 계시던 그분이 해방되는 듯하다. 지혁은 진절머리를 치며 라영을 진정시켰다. 딱 봐도 친구가 창피해 죽겠다는 모습이다.

“그 사람이 진짜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니야. 내가 사람 보면 모르겠어? 딱 봐도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그 착한 사람이…….”

제 코가 석 자인 주제에 열심히 우경을 감싸는 모습에 라영은 어이가 없었다. 이 녀석도 정신이 온전치 않구나. 그러니까 네가 이런 대형 사고를 쳤지. 평소에 온 세상 똑똑이는 다 모아 놓은 듯이 똑 부러지던 녀석이 이렇게 물렁해지는 꼴을 보니 역시 사람은 사랑과 연애와 치정이 끼면 제정신이 아니다.

“너 아까부터 듣자 하니 윤우경 씨한테 뭔가 환상이라도 있는 거 같은데…. 너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어! 그 사람이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니까…? 맨날 나한테 콩깍지 타령 하더니 네 콩깍지가 더 엄청나다. 세월 지나면서 더 단단해졌나 봐. 무슨 지층이야 뭐야, 세월이 지나면서 왜 자꾸 두텁게 쌓여?”

라영은 제정신이 아닌 지혁의 머리통을 붙잡고 정신 차리라며 수선스럽게 설득을 했다. 게다가 딱 봐도 사랑에 빠진 모습 같은데 더 잘 해 볼 생각도 없는 것같이 군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손톱 끝을 쥐어뜯고 있는 모습에 라영은 답답함에 한숨만 나왔다.

“일단 그 사람한테 얘기를 해야지. 너 애는 어떻게 할 건데?”

그 말을 듣자 지혁의 눈빛에 결의가 가득 찼다.

“낳아서 키울 거야. 나 혼자.”

푸붑.

2차 미스트 발사를 성공적으로 막아 낸 지혁이 더럽다고 중얼거리며 가드를 올렸던 팔에 묻은 자몽 알갱이들을 냅킨으로 털어 냈다. 주둥이 근육 단속 좀 제대로 하라는 핀잔은 덤이다.

“혼자?”

망연함을 담아 묻는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안지혁이 혼자서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살더니 드디어 미쳤나 보다. 고생길을 자처하고 있다. 라영은 입 주변에 묻은 자몽 알갱이를 닦아 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지혁은 그런 라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가족 중에 형질자가 아무도 없잖아. 그래서 늘 외로웠어. 항상 토끼 마을에 사는 거북이 같은 느낌이었어.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임신할 수 없을지도 몰라.”

“…….”

“이 아이가 나의 유일한 형질자 혈육이 되어 줄 거야. 나는 내가 경험한 것과 다르게 아이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부모가 되고 싶어. 네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니까 좋아 보이고…, 그래서 더 확신이 생겼어.”

갑작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한 건지 결의에 찬 말들이 줄줄 나왔다. 이미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렇지만 무서웠겠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라영에게 와서 위로를 받고 확신을 더 얻고 싶었을 거다. 라영은 오래 보아 온 지혁의 머릿속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특히 가족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 짠했다. 한 번도 형질의 우성이니 열성이니 그런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비교한 적은 없었지만 아무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근데 왜 그 사람한테 말을 안 한다는 건데? 아무리 실수였어도 윤우경 책임도 있어!”

“너무 쪽팔려…….”

지혁이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뭐?”

“안 그래도 콘돔 없다고 안 하려고 하는 사람한테 안전한 날이라고 우겨서 밀어붙인 게 나란 말이야. 무슨 재벌 우성 알파의 아이를 임신해서 한탕 뜯어내려고 일부러 접근한 오메가 같잖아…! 내가 평소에 질색하던 처지가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 내가 봐도 그런 모양새인데 남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꽃뱀같이 보이겠어? 도저히 그게 용납이 안 돼.”

그래서 사람은 평소에 험담을 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지구에는 어떤 인과의 흐름이 있어서 신나게 욕하던 상황을 자신이 그대로 당하는 엿 같은 경우가 이렇게 생긴다며, 역시 타인을 함부로 욕해서는 안 된다는 우주의 흐름까지 끌어와서 이야기를 설파하고 있다. 지금 그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닐 텐데……. 역시 라영이 보기에는 지혁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아무리 쪽팔려도 이건 상대방이 알아야 하는 문제야. 법적으로도 그래. 그래서 내가 아까 여기로 이동할 때 이미 연락했다.”

“뭐라고?”

아이고, 무서워라! 이미 연락했다는 말에 눈을 뒤집고 달려드는 지혁을 막으며 라영이 소리쳤다. 같은 임산부끼리 애 떨어질 일은 하지 말자고,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상도가 없다며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장사의 룰을 들먹인다.

“뭐라고 연락했어? 너 진짜 믿었는데 이럴 거야? 아니지, 아니야. 이렇게 흥분할 일이 아니지. 어차피 그 사람 연락도 안 되는데.”

흥분한 미친 사람이 갑자기 말을 하면서 그라데이션으로 침착해지며 자조한다. 이건 무슨 또 개소리야.

“연락이 안 돼?”

“응. 저번 주부터 연락이 안 되더라. 일부러 피하는 건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게 뭐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팔짱을 끼며 새침한 표정으로 ‘흥!’ 하고 거세게 콧방귀를 끼는 통에 라영은 저도 모르게 자몽티에 이물질이 들어갈까 봐 잽싸게 손으로 가렸다.

혼자서 키운다는 결의와 자존심에 난 상처와 자조는 혼자서 발생해서 쑥쑥 자라난 게 아니었다. 이미 연락을 할 만큼 해 보았으나 상대방은 잠수를 타 버렸고, 버림받은 느낌에 한창 젖어 있을 때, 임신이라는 폭탄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평소의 콤플렉스는 이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아이를 잘 키워 보겠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만들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이제는 지혁과 반대로 라영에게 그라데이션 분노가 올라왔다.

“내가 남편한테 이 개자식을 목에 줄을 채워서라도 끌고 오라고 했으니 곧 올 거야. 넌 딱 기다려.”

라영은 사찰 금강문에 새겨진 눈을 부라리는 무시무시한 조각상 같은 표정을 지으며 연신 씩씩댔다.

미쳤냐고, 난 자존심도 없는 줄 아느냐, 쪽팔려 죽겠으니 당장 취소하라는 지혁의 멱살잡이에도 라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세상에 모든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던가. 우리가 여자는 아니지만 몸에 아이를 가졌으니 어머니는 맞지. 너도 강하지만 나도 강하다! 라영이 마음속으로 전투력을 다지고 있을 때 작은 카페 입구 문에서 종소리가 영롱하게 울리며 반가운 사람과 죽일 놈이 들어왔다.

잔뜩 굳은 얼굴의 이헌에게 뒷덜미를 잡혀서 당황한 얼굴로 질질 끌려오는 우경의 모습이 절경이다. 잘한다, 내 남편!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지혁이 라영의 귀에 속삭이며 물었다.

“야! 뭐라고 보냈길래 사람을 연행해서 와?”

“윤우경, 이 도둑놈이 내 친구 지혁이를 좆되게 했으니 당장 잡아 오라고 했지.”

“뭐라고?”

당황하던 지혁은 막상 우경이 자신의 눈앞에 서자 애써 냉정한 모습을 연기하려는 듯이 얼굴을 차갑게 하고 허리를 펴면서 자세를 똑바로 했다. 녀석, 자존심은…….

우경은 코트 뒷덜미를 잡힌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라영과 지혁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평소처럼 인사했다. 꼴을 보아하니 이헌이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고 일단 잡아 온 것 같았다.

“지혁아, 라영 씨. 반가워요. 근데 지금 우리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지혁과 라영의 분노의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지혁은 그 멍청한 얼굴을 보면서 갑자기 차오른 분기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머그잔을 받치고 있던 쟁반을 양손으로 쳐들었다.

“이이…!”

대가리로 송판을 깨는 태권도 사범님처럼 기합을 다지며 내려치려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는지 일시 정지 상태로 몇 초간 멈춰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동 모두 얼이 빠져 멈춰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지혁은 씩씩대며 쟁반을 들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내가 진짜…! 씨발, 빌어먹을 돈만 아니면…!”

신나게 내려치려던 사람이 이를 악물고 더러운 세상, 빌어먹을 돈이라고 잇새로 중얼거리는 게 매타작 후가 두려워졌나 보다. 그 짠한 모습을 보고 서민의 돈 걱정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라영이 바통 터치를 하는 것처럼 분노를 이어받았다.

“그렇다면 합의금 걱정 없는 내가 팬다!”

라영은 순식간에 지혁의 손에서 쟁반을 낚아채서 복날에 개 잡듯이 우경을 향해 내려쳤다.

“으악! 라영 씨! 악! 갑자기 왜…! 악!”

“라영아! 라영아! 진정해요. 내가 팰게! 당신 배 속에 아기…!”

찰지게 억 소리 내며 맞는 놈, 이를 악물고 미친 사람처럼 어절씨구 패는 놈, 진정하라고 쩔쩔매며 말리는 놈, 말리는 척하면서 은근히 손바닥으로 저절씨구 더 때리는 놈. 우스꽝스러운 옹헤야 타작 타령이 좁은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네 남자가 좁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경찰을 부르겠다며 제발 진정하시라는, 심약해 보이는 여리여리한 카페 사장님의 울먹임이 그들의 타령을 잠재웠다.

이헌은 어울리지 않게 연신 눈치를 보며 사랑하는 라영의 옆에 앉고 싶어 했지만, 라영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미팅도 아닌데 알파 대 오메가로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 이건 전쟁이다. 시빌 워 이후에 가장 중요한…! 자유와 인권을 찾기 위한 캡틴 아메리카의 투쟁…! 이 아닌 오메가의 투쟁!

“이제 왜 잠수를 타셨는지 말씀해 주시죠.”

잠수를 타는 놈들은 다 고추를 잘라 버려야 하는데 봐주는 거라며 서슬이 퍼렇게 묻은 모습에 괜히 앞에 앉은 알파들은 다리를 오므린다.

“근데 잠수라니요…? 저는 사실 제가 오늘 왜 여기 와서 맞았는지도….”

“우경 씨가 저번 주부터 지혁이 연락 피했다면서요!”

“네? 제가요? 아니, 제가 일부러 피한 게 아니라…. 저 지금 막 귀국하는 길입니다. 스페인에 도착해서 개인 폰이 박살나는 바람에…!”

우경은 거짓말이 아니라며, 뭔지 모르겠지만 서슬이 퍼런 오메가들의 시선에 압도되어 필사적으로 자기 해명을 시작했다. 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방패로 삼을 요량이었는지 꼭 안고 있던 서류 가방에서 허겁지겁 부서진 핸드폰의 잔해가 들어 있는 지퍼백을 주섬주섬 꺼냈다. 바로 버리지 않고 저렇게 소중하게 담아서 가져온 게 뭐 중요한 거라도 들어 있는 모양이지? 라영은 입을 삐죽거리며 고깝게 바라봤다. 행동 하나하나가 미워 보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귀국 후에 집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잡아 온 것은 사실입니다. 윤우경 비서와 연락해서 찾은 거거든요.”

이헌이 그런 라영을 어르며 추가 설명을 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어서 중립 기어 넣고 시작하지만, 내 오메가가 속상해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투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경은 변명 아닌 변명을 이어 나갔다.

“지혁이 번호는 그 폰에만 들어 있는데, 남은 5일 일정 안에 무조건 일을 성사시켜서 귀국해야 해서 시간은 너무 없고, 그렇다고 SNS로 찾아서 연락하기에는 정이헌도 제수씨도 SNS 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비서한테 사적으로 부탁해서 찾아 달라고 하기에는 다들 너무 바쁘고…. 정말 일부러 연락을 안 받은 게 아니에요! 연락 온지도 몰랐어. 게다가 지지난 주랑 출국하기 전에 지혁이 너 너무 답장도 드문드문 오고 전화 못 받을 때도 많고 바빠 보이길래 그냥 귀국해서 연락해도 될 줄 알았지, 나는…….”

죄인의 변명과 해명의 시간이 끝났다. 멍청하게 영문도 모르고 잡혀 와서는 잡도리를 당하고, 어벙하게 앉아서 잠수가 의도한 잠수가 아니었던 이유를 설파하던 우경은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아저씨, 컴퓨터로 메신저 켤 생각은 왜 못하셨어요? 라영이 한심하게 바라보는데 지혁의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지지난 주에는 나도 프로젝트 마감 막바지라 미친 듯이 바빴단 말이야. 밥도 못 먹고 일했어!”

얘네는 언제 말까지 텄대……. 눈앞에 부부도 안 튼 걸 벌써 트고, 만나자마자 임신부터 한 걸 보니 빠르기가 아웃사이더 수준이다. 라영은 심각한 와중에 저도 모르게 귓가에서 들려오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난 남들과는 다르게’라는 가사를 속으로 같이 흥얼거렸다.

“그래. 바쁜 거 들었지. 그래서 나도 귀국해서 연락하면 될 줄 알았어. 미안해. 무슨 일 있었어?”

우경은 계속 미안해하면서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하고 화를 풀라는 듯이 손을 뻗어 지혁의 어깨를 연신 쓸어내렸다.

지혁은 그 쓰다듬을 받으며 폭탄을 던지기가 곤란했는지 힐끔힐끔 라영의 눈치를 봤다. 그 모습에 라영은 눈에서 불꽃을 쏘며, 이렇게 중요한 문제는 당사자가 말해야 마땅하다는 듯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천왕 같은 눈알을 보아하니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얄짤 없다는 뜻이다.

지혁은 라영의 표정에 잔뜩 주눅 든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임신했어.”

“응?”

우경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아직 멍청하게 미소 띤 얼굴이다.

“알아. 이건 분명히 내 실수고 우경 씨는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 이라영이 하도 이건 상대 알파도 알아야 할 문제라고 해서 보고하는 거고, 부담 줄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내가 확실하지도 않은데 우겨서 이런 일이 발생한 거야. 미안해. 너 성격으로 봐서는 이렇게 혼외자를 가질 마음은 절대 없었겠지만, 나는 우연히 생긴 아기라도 절대 포기 못 하겠어서…. 그래서 낳으려고. 어쨌든 아이를 낳고 안 낳고의 결정은 오메가가 하는 게 맞으니까 우경 씨는 기분 나빠하지 말고 내 의견에 따라 줬으면 좋겠….”

“잠깐, 잠깐, 잠깐, 잠깐만…!”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경악에 차오르던 알파 두 명 중 당사자 한 명이 양손을 크게 휘둘러서 이어지는 폭탄 발언을 진정시켰다. 지금 가장 진정해야 할 사람은 진정시키는 당사자인 것 같았지만 일단 그는 그렇게 이 혼란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니까 그날 일로 임신을 했고, 혼자서 키우겠다는 말을 하는 거야, 지금?”

“응.”

“대체 그 이상한 결론은 어디서 나온 거야? 왜 나랑 같이 키운다는 선택지는 없어?”

선량한 우경의 표정이 드물게 찌푸려지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당사자들은 심각해 죽겠는데 옆에 붙어 앉은 라영과 이헌은 흥미진진하게 관전을 하는 중이었다. 라영은 ‘의외로 이야기가 올바르게 잘 풀리는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고, 이헌은 자신의 남편을 혼란스럽게 한 이 녀석이 어디 한번 제대로 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전투력으로 뇌가 가득 차 있었다.

“우경 씨도 알다시피 우리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말만 안 했지, 나는 거의 사귀기 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썸의 마지막 단계는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거야?”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우경 씨가 갑자기 연락이 안 되고……. 그 전에 연락이 잘 안 되던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너는 아예 연결조차 되질 않으니까 나는……. 아, 모르겠다. 이제는….”

혼란스러워하며 스스로의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리는 지혁을 보더니 우경이 벌떡 일어나서 지혁을 감싸 안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혼자서 힘들었지? 지혁아…. 내가 정말 미안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안겨 있던 지혁이 그 말을 듣더니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당사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데, 그들만의 감성 넘치는 모습을 보며 라영은 짠하기도 하면서 냉기가 철철 흐르던 과거의 지혁이 떠올라서 소름이 돋았다. 저 냉정하던 녀석도 어쩔 수 없이 임신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가는구나…. 대자연의 노예라니, 동지애가 절로 샘솟았다.

우경은 연신 다감하게 품 안의 오메가를 다독이며 말했다.

“울지 마, 지혁아. 사랑해. 나랑 결혼하자. 결혼해서 우리 아기도 같이 키우고 행복하게 살자. 응? 내일 당장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갈까? 울지 마….”

그 말에 지혁이 고개를 번쩍 들어서 양손으로 2차 매타작을 시작했다.

“으악! 왜 그래, 갑자기? 아야…!”

다 크다 못해 저 덩치의 알파가 ‘아야’라니…. 팝콘 든 마음으로 관람하던 라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왜! 다 같이 있을 때 하는 거야!? 창피해 죽겠다, 정말!”

음절 마디 사이 사이에 주먹을 꽂는 스냅이 어째 많이 해 본 솜씨다. 왕년에 거지발싸개 같은 알파들 족치던 실력이 나온다.

별일 아닌 거로 맞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우경이 곧바로 양팔로 지혁을 감싸 안아서 무력화시켰다. 큰 힘 안 들이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을 보니 아까는 그냥 맞아 준 것 같다.

“흥분하면 안 좋아. 홑몸이 아니라면서. 진정해….”

우경은 포근하게 안고 쓰다듬으며 지혁 맹수를 진정시켰다. 맹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소동물 느낌이지만. 여우나 오소리 정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라영은 윤우경 사육사가 오소리를 길들이는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를 중단시키며 이헌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제 당사자들이 오해를 풀었으니 제3자는 빠질 타이밍이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윤우경 씨, 아까 다짜고짜 때려서 죄송합니다. 당신이 임신한 지혁이 버리고 잠수 탔다가 내 남편한테 잡혀 온 줄 알았어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라영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렇게 사과해야 마음이 누그러져서 합의금을 좀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많이 아픈 곳이 있으면 남편한테 청구서 보내 주세요. 위로금도 줄 거예요. 그치?”

라영이 이헌을 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 말에 이헌이 라영을 보며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닙니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이헌, 잘 가라.”

“그래. 간다.”

연신 사람 좋은 얼굴을 빛내며 괜찮다고 말하는 우경에게 이헌이 한마디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지혁을 토닥이며 눈빛으로 간다고 인사하는 라영의 어깨를 감싸 안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 세워 둔 차까지 걸어갈 모양이다.

“이야기가 잘 풀려서 다행이야. 그렇죠?”

“윤우경이 알아서 잘 할 거예요. 이젠 걱정하지 말고 우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저딴 새끼는 이제 그만 신경 쓰고 빨리 홈 스윗 홈으로 돌아가자는 투다. 라영은 조금은 뿔이 난 듯한 이헌을 보며 한 팔로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우경 씨가 너무 아파서 진짜로 합의금 청구하진 않겠지? 치료비 엄청 나오는 거 아냐?”

호들갑을 떨며 걱정스러워하는 라영의 말에 이헌이 피식 웃었다.

가끔 라영이 이렇게 자기도 남자라면서 이헌 앞에서 힘 자랑을 하거나 과시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헌은 햄스터가 장난감 아령을 들어 올리거나, 상대방에게 커 보이려고 잔뜩 털과 몸을 부풀린 귀여운 고양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상대가 베타 남자라면 글쎄, 그들과는 비벼 볼 수 있을지 몰라도 눈앞의 이헌은 알파 중에서도 우성 알파였다. 선천적으로 체격이 크고 조금만 운동해도 말 근육이 절로 붙고, 잘 지치지도 않으며 그 외의 모든 신체 조건이 월등하고 우수한 우성 알파 말이다. 가끔 라영은 그걸 잊었다는 듯이 본인의 힘에 대해 과신하는 모습이 이헌의 눈에는 너무나 귀여웠기에 앞으로도 절대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걸 평생 혼자서 구경해야겠다고 이헌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치료비를 청구한다면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라영이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듬직하게 말하는 이헌이 사랑스러워서 눈을 올려 뜨고 바라보니, 그런 라영을 더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이헌이 입술을 내려 이마에 입을 맞췄다.

꼭 껴안고 걸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따뜻하다. 이 따뜻함이 우리뿐만 아니라 놓고 온 자리의 저들에게 더욱더 충만하길.

라영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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