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날의 하늘은 겨울 특유의 회색빛이 돌지 않고 다행히 파랗게 맑았다.
라영은 어제 우연히 가방을 정리하다 업무 스케줄과 아이디어를 적어 두는 다이어리를 발견하여 훑어보았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앞두고 혹시나 잊은 일들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펼친 노트였는데, 글자들 사이에서 이헌과 만나기 전에 휘갈겨 써 놓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미션: 결혼하기
두 번이나 밑줄을 긋고 별 표까지 세 개나 그려 두었다. 당시의 급박한 심정이 눈으로 보이는 것 같아서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런 말을 써 놨었지.
당시에는 정말 눈앞이 깜깜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미션이라고 야심 차게 써 놨지만 결혼이 정말 업무 프로젝트도 아니고, 과연 정말로 할 수 있을지 까마득했는데 오늘이 바로 자신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감격이 차올랐다. 급한 마음에 단순히 ‘미션’이라고 써 놨지만 역시 인생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일에는 이렇게 많은 감정과 사건과 사람들이 엮여 있다.
그렇게 복잡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와 결혼을 하고, 또 아이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행운이며 행복인지…….
라영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숨길 수 없어서 옆자리에 앉은 이헌의 손을 잡았다.
이미 함께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일어나서 함께 숍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외국 결혼식처럼 딱 결혼식장에서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처음 보며 감격하는 그런 장면을 상상해 왔지만, 한국에서의 실제 결혼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워낙 하객으로만 다녀서 몰랐지.
기사와 함께 이동하는 차 안에서 거리의 조명으로 반짝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났다. 이헌의 손가락을 저도 모르게 살살 문지르다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얼마 있으면 크리스마스예요.”
“그러네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응, 괜찮아요. 참 쉬운 임산부죠?”
라영이 당신은 참 복 받은 줄 알라며 이헌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라영은 다행히 입덧을 심하게 하지 않고 그저 아침에 조금 울렁거리는 정도의 초기와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헌은 라영이 힘들어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자신에게 더 바라는 게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라영은 그런 이헌의 생각이 그의 표정으로 보여서 몰래 웃음을 삼켰다. 알고 보면 생각이 얼굴로 참 잘 보이는 사람이다.
롤스로이스 팬텀에서 두 사람의 신랑이 나왔다. 예식 도우미들이 양옆으로 서서 인사하며 그들을 맞았다. 한강이 흐르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프라이빗 하우스 웨딩 리조트는 지어진 지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더니 과연 새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유럽의 성처럼 하얗고 고풍스러운 건물의 안으로 들어가니 높은 천장에 고전적인 천장화天障畵가 그들을 맞이해 무척 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천장의 작은 유리와 전면창에서 비추는 자연광이 그러한 분위기를 더했다.
라영의 취향대로 꽃에 돈을 아끼지 말아 달라는 당부에 어울리게 예식장에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머리 위의 꽃은 물론이고, 식장 밖의 모든 곳에도 꽃이 곳곳에 만발하여 향기로운 내음을 풍겼다. 한겨울에 이만한 꽃이라니,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었지만 라영에게 최고의 결혼식을 안겨 주고 싶다는 이헌의 바람에 꽃 하나만은 부탁을 해 두었다. 물론 단순히 꽃의 비용만 몇억이 들었다는 것은 이헌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온 세상의 아름다운 것만을 다 모아 놓은 것 같은 향기로운 대기실에 라영이 앉아서 손님들을 맞았다.
대체로 예비 부부 모두가 남자인 경우에는 홀 앞에서 인사를 함께했지만 라영이 임산부여서 조심해야 한다고 극구 주장하는 이헌의 고집에 라영은 멀뚱히 부케를 들고 대기실에 앉아서 사람들과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보리색의 턱시도를 입은 라영이 마치 동화 속의 신부같이 대기실의 아치형 꽃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림과 같이 잘 어울린다며 연신 감탄했다. 연보라색 등나무꽃과 하얗고 빛 바랜 하늘색 빛을 띠는 수국 등으로 아치를 장식하여 머리 위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내렸다.
부케도 같은 연보라색 장미와 하늘색의 수국과 회갈색 마른 나무 열매와 채도가 낮은 뿌연 유칼립투스나 덩굴줄기들로만 엮어서 길게 무릎까지 떨어져 내리는 아주 긴 꽃다발이었다. 손안에 연보라색 겨울이 있는 듯했다.
이헌도 같은 꽃들로 엮은 부토니아를 달고 있었다. 색에 민감한 라영이 팬톤 컬러칩까지 찾아 주며 웨딩 플래너에게 특별히 부탁한 그들의 결혼식 메인 컬러였다.
부모님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대기실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그들이 들이닥쳤다.
“안녕하세요, 이라영 씨! 드디어 직접 인사를 드리네요! 이헌이 친구 권영인입니다!”
“하상빈입니다.”
“전에 한 번 얼굴 뵈었었죠? 윤우경입니다!”
시끄러운 우성 알파, 차분한 우성 알파, 넉살 좋은 우성 알파.
우성 알파 트리오가 인사를 해 왔다.
친구들이 말해 주던, 넷이서 몰려다녔다는 이헌 씨가 속한 무리인가…? 그럼 트리오가 아니라 콰르텟[5]인가……. 자신도 모르게 눈앞의 사람들을 그 어떤 생물의 무리로 칭하고 있었다. 어쩐지 말할 때 라임이나 동작의 합도 짝짝 맞는 것이 누가 봐도 ‘우리들은 우성 알파! 우리끼리 정답게 모여 다니지요!’라고 외치는 듯한 인물들이었다. 저 인물들의 한 축을 내 남편이 담당했단 말이지…. 알고 보면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너무너무 인사를 드리고 싶었답니다! 제가 예전에 정이헌한테 제수씨 어느 학과인지도 알아봐 주고 그랬어요!”
너구나, 프락치가.
“이헌이가 오랜 사랑을 이뤄서 친구로서 기쁩니다. 두 사람 결혼 축하드립니다.”
점잖아서 마음에 든다. 당신은 ‘라영&이헌 하우스’ 집들이 입장권을 획득하셨습니다.
“두 사람 정말 축하합니다. 이헌이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암요, 행복하게 해 주고 말고요.’라고 대답을 해 주려는 찰나.
쾅!
어디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오른쪽 구두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 같은 이헌이 대기실 양 문 앞에 서서 미간에 핏줄을 세운 채 웃는 입 틈새로 복화술을 하듯 말을 꺼냈다.
“잠깐 눈 뗀 사이에 어디를 갔나 했더니…….”
그 소리에 트리오가 재빨리 라영이 앉은 소파 뒤쪽으로 몸을 숨기고 라영을 가리키며 이헌에게 다급히 외쳤다.
“여…여기! 여기 라…라영 씨 있다! 정신 차려!”
“표정 무너졌어!”
“진정해, 제발!”
이헌이 라영을 향해 미소 짓고 눈을 더럽혀서 미안하다며 트리오를 끌고 나가는 모습에 라영은 웃음이 터졌다. 그들은 끌려 나가면서도 연신 활발함을 잃지 않으며 친해지고 싶다, 다음에 꼭 다시 보자, 다음에는 꼭 깊은 이야기 나누자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헌은 그들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지만 차마 손이 두 개라 입을 막지 못해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저 사람도 저런 모습이 있구나. 예전에도 주변을 잘 살폈으면 좋았으련만. 아니, 그때는 오히려 혐오감이 한창이던 때라 싫어했으려나? 그때 이헌과 친구들을 알았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했다. 여러 가지로 아쉬운 생각이 들지만, 지금의 때에 만났기에 결혼까지 수월하게 온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아쉬움을 접었다.
친척들의 축하가 끝나고 회사 동료들이 떠들썩하게 재벌가와 결혼을 하는 거면 미리 말을 해 주지 그랬냐고 호들갑을 떠는 통에 영혼까지 탈탈 털려 사진을 찍고 배웅을 하고 나니 제일 호들갑스러운 녀석들이 도착했다. 마치 최종 보스와 본좌는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듯이 늦기도 제일 늦었다.
“누가 아트 디렉터 아니랄까 봐 변태같이 재질이랑 컬러 톤 앤 무드 맞춘 것 좀 봐…. 너 이거 직업병이야.”
“내가 방금 예식장 안에도 확인했는데 네임 카드랑 메뉴 적힌 종이까지 다 맞춤 컬러였어. 종이 재질도 네가 골랐지?”
이미 온 구석구석 다 돌아다니고 구경을 마치고 온 듯한 지혁과 유민은 역시 천둥벌거숭이 시절 진짜 친구들답게 주둥이가 시공간을 초월해 매섭기 그지없다. 필터 따위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당연하지. 그걸 고까워한다면 너희들은 아티스트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 필터를 역시 가지고 있지 않은 라영이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당당하고 뻔뻔하게 소리치고 있는데, 다른 한 명인 규형이 뛰어 들어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야! 나 지금 HY 회장님 얼굴 보고 왔다. 와… 뉴스에서나 보는 얼굴을 내가 직접…! 네임드를 영접하다니…!”
“저 자식은 게임 좀 작작 하라 그래….”
친구들은 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층 편안한 얼굴이었다. 청첩장을 나눠 준 이후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는 보았느냐, 내막을 빨리 알려 달라고 닦달하는 통에 생전 처음 그룹 통화를 하느라 귀가 터지는 줄 알았다. 제발 한 놈씩 말을 해라….
“그럼 이 결혼은 기나긴 짝사랑의 대승리로 봐야 하나?”
“집요함의 완성이라고 해 줘.”
“차라리 집착의 완성 어때?”
라영은 오늘 결혼하는 신랑의 미소를 잃지 않게 노력하며, 눈은 웃되 이는 악물고 대답했다.
“내가 행복하다니까 제발 닥쳐….”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는 작가들이 눈치 있게 잠시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아무튼 축하한다며, 행복하게 잘 살고 결혼 직전의 감상을 말해 보라며 정신없이 폰을 들어 영상을 찍고 있는 녀석들 사이로 헬퍼의 목소리가 직선으로 꽂혔다.
“신랑님! 이제 입장 10분 전입니다!”
라영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헬퍼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친구들을 배웅하며 입장을 위해 대기실을 나섰다.
예식장 중앙 입구 앞에 서 있는 이헌이 라영의 기척을 느꼈는지 환하게 웃으며 돌아보았다.
“라영아, 내 신랑.”
무슨 조화로 얼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지…. 오늘따라 자체 발광 미모를 자랑하는 이헌이 정말 행복하다는 듯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소유욕을 담은 말로 라영을 맞았다. 그래, 저 얼굴과 저 몸만으로도 100년은 배부르겠다. 옛날에는 뭐 때문에 저 미모를 거절하고 지나쳤나 몰라. 그 옛날 이헌의 험악한 모습을 전혀, 한 톨도 기억 못 하는 라영이 만족감에 젖어서 생각했다. 이헌에게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둘은 동시 입장을 위해 버진로드 앞에 손을 잡고 섰다.
“이헌 씨, 행복해요?”
“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은요?”
“나도 행복해요.”
미소로 서로의 얼굴을 비추며 손을 꼭 잡고 열린 문에서 나오는 박수 소리와 화려한 불빛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갔다.
* * *
허니문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라영은 뒤척이며 선잠에서 깨어났다. 충분히 잔 건 아니지만 임신의 영향인지 잠이 깊게 들지 못하고 자꾸 깨게 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 만큼 잤지. 라영은 뒤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이헌의 팔을 살살 쓰다듬으며 자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제 귀국한 후에 두 사람 모두 여독으로 일찍 잠들었는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갑자기 라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허니문을 보내면서 한참 동안 한식을 못 먹은 게 영향이 있었는지, 곤히 잠든 이헌을 깨워 지금 당장 양재동에 ‘50년 전통 할머니 족발’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족발과 칡으로 면을 뽑은 비빔국수를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엉엉 울어서, 놀란 이헌이 헐레벌떡 직접 사 가지고 왔다.
새벽까지 하는 곳이라 다행이지. 어스름이 밝아 오도록 족발을 뜯는 라영의 수발을 열심히 들다가 창밖의 명도가 조금씩 환해질 때쯤 잠이 든 이헌이었다. 고개를 돌려 수고한 배우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제발 층간 소음에 시달리면서 살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는 라영의 의견을 십분 반영해서 3층짜리 주택에 신혼살림을 차린 부부였다. 밤사이 마른 목을 축이고 아직은 생소한 집 안을 살며시 걸어 다니며, ‘이제 이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둘이서 살아가겠지.’라고 라영은 마음속으로 기분 좋게 생각했다.
고생한 남편을 좀 더 재우고 싶었던 라영은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둘의 서재로 들어갔다. 결혼식 때 받고 아직 읽어 보지 못한 부모님의 편지와 친구들의 카드 등 다양한 축하를 담은 지인들의 메시지를 열어보고 싶었다.
이헌의 비서가 결혼식장에서 모아서 정리해 넣어준 상자를 열어 하나하나 이름을 확인하는데 카드들 사이에서 한 장의 명함이 톡 떨어졌다. 이 명함이 도대체 뭐였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씨를 읽어 내렸다.
국립 형질자 센터 연구소
연구원
최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