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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 수료를 무사히 마치고 동부를 떠나서 서부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국과 비슷하게 대륙의 극동부에 위치했다는 것 때문인지, 똑같이 사계절이 있으며 여름에는 습하며 덥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추운 뉴욕을 떠나서 마냥 건조하고 화창하기만 한 캘리포니아에 있으니 절로 몸이 이완된다. 이곳 사람들 특유의 여유로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저기 눈에 보이는 저 녀석들만 아니면 그 여유로운 마음이 좀 더 지속될 수 있었을 텐데…. 이헌은 절로 나오는 욕을 짓씹었다.
“야, 정이헌! 이거 선 베드 어떻게 접는 거야? 이게 잘 안 돼!”
일 때문에 실내에서 랩톱을 들여다보며 연신 타이핑 중인 이헌이 유리창 때문에 안 들릴까 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수영복 입은 권영인의 저 꼬라지가 꼴 보기 싫어 죽을 지경이다.
나이도 다 처먹고 이 미친놈들이 여름휴가를 미국에서 보낼 거라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이헌의 집으로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지 오늘이 이틀째다. 과연 재계 다섯 손가락 순위권 재벌은 역시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실리콘 밸리 부촌에서도 엄청난 규모의 저택이라고 놀림 반으로 손뼉을 치더니, 고향에라도 놀러 온 사람들처럼 아주 신이 났다.
손님의 태도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 왔는지 마치 저들이 집주인인 양, 수영장에 꼴사나운 오리 튜브를 띄우고 팬트리를 털어먹고 병맥주를 온종일 들고 다니며 이 방 저 방 모두 점령하고 다니는 뻔뻔한 꼴에 화를 내는 것도 한두 번이다. 늘 그러려니 자연스럽게 이헌의 분노를 무시하며 저 좆대로 행동하는 싸가지들을 이제는 포기한 이헌이었다.
“풀이 넓어서 진짜 놀 맛 난다!”
너 이 새끼 놀라고 만들어 놓은 풀이 아닌데, 저 자식이…….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 몇 병을 양손에 끼고 거실 유리문을 열어 다시 야외로 나가면서 말하는 우경을 보며 이헌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 뒤를 상빈이 어디서 구했는지 커다란 볼에 나초와 살사 소스, 과카몰리까지 만들어서 야무지게 들고 따라가는 모습을 보며 이헌이 말없이 눈으로 욕을 했다. 혼자서 온갖 상식적인 척은 다 하더니 너는 왜 따라온 거냐.
“난 단지 우리 우정을 위해서 이때쯤에는 다 같이 여행을 한 번 가 줘야 한다는 윤우경 말에 동의했을 뿐이다.”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몸으로 유리문을 밀고 나가는 게 얄미워 죽을 지경이다.
“이사님께도 저런 친구분들이 계시는군요.”
김 실장이 패드를 들고 상반기 실적을 보고하고 있던 차였다. 오래 보아 왔지만 늘 이헌의 아버지인 정 대표 옆에서 일을 했지 아들인 이헌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 알던 것은 아니라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헌 한 사람만 떨어뜨려 놓고 보면 절대 저런 유쾌한(-이라고 쓰고 머저리 같은-이라고 읽는다.) 친구들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칼같이 잘라내고 일찌감치 절교하지 않고 그 머저리들에게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이헌의 모습도 생소했다. 이게 바로 학창시절부터 습관적으로 굳어진 관계인가? 머저리 무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이 여전히 아이 같아서 이들보다 15년은 더 산 김 실장이 보기에는 무척 재미있었다. 이헌을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 주는 게 분명 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헌이 이런 김 실장의 속마음을 안다면 대체 왜 다들 본인의 ‘인간적’인 부분에 집착하느냐고 학을 떨며 뒤집어엎었을 일이었지만, 다행히 김 실장은 정 대표의 최측근답게 일하면서 감정을 섞는 이가 아니었고 이헌은 남의 속마음을 아는 데는 전혀 재주가 없었다.
“보고 사항은 이상입니다. 나머지는 실무에 투입하시면 자연스럽게 파악 가능하실 겁니다.”
김 실장이 마무리를 하자 어떻게 알아챘는지 우경이 맥주를 마시다가 유리문을 조금 열고 빼꼼 고개를 빼며 물었다.
“김 실장님, 우리 내일 라스베이거스로 떠나서 사막 횡단도 하고 일주일은 있다가 돌아올 건데 이헌이 일정 가능하죠?”
언제 봤다고 금세 친해져서 ‘김 실장님, 김 실장님’거리고 앉아 있다. 게다가 네가 왜 내 일정을 계획하고 물어봐?
“네. 가능합니다.”
김 실장이 미소 지으며 그 정도는 가능하다는 듯이 친절하게 대답하는 말에 이헌이 배신자를 본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고 김 실장을 올려다봤다.
“이사님도 휴가를 좀 보내셔야죠. 미국에 와서 하루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요, 저 통제광이 단기간에 학위 따고 온 것 좀 보세요. 분명 우리는 뉴욕으로 여행을 갈 줄 알았다니까요? 물론 놀기엔 캘리포니아가 훨씬 좋아서 다행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얼굴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 같다. 이헌은 자신이 이렇게 쉬운 인간이었나 자조하느라 우경이 은근슬쩍 돌려 까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정 대표님께서 전해 달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라영 씨가 HY 그룹 자회사인 HY 기획에 공채로 입사했다고….”
“이라영이?!”
“뭐라고? 이라영이라고?”
“이라영?”
김 실장은 말을 채 맺지도 못했는데 대답은 이헌이 아닌, 언제 들어왔는지 비치 타월을 걸치고 있던 세 친구에게서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친구분들도 다 아시는 분인가 봅니다? 아무튼 그렇게 전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수면 아래 깊은 심해의 바닥에 묻혀 있던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아버지는 뭘 어떻게 얼마나 알고 있는 건지.
“네. 알겠습니다.”
이헌은 오랜 기간 동안 돌처럼 멈춘 채로 있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는 것을 감춘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던 우경이 대뜸 끼어들었다.
“정이헌, 너는 무조건 존댓말을 해야겠다. 넌 앞으로 무조건 존댓말이야.”
“무슨 개소리야, 또.”
이헌이 뜬금없는 소리에 랩톱을 닫으면서 신경질을 냈다.
“존댓말 하니까 친절해 보여. 정상인 같아.”
이제 바로 ‘정이헌의 첫사랑 되찾기 프로젝트’에 돌입할 때라며 영인과 우경이 수선을 떨고 있는데, 이헌의 험악한 분위기를 알아챈 상빈이 그들의 발을 밟아서 침묵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데 이헌이 마음도 모르고 또 설레발이냐?”
“아냐, 난 눈빛만 봐도 알아. 정이헌, 그 이름은 맹수. 절대 목표물을 놓치지 않지.”
영인이 내레이션을 읊듯이 진지하게 말을 한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친구분들과 즐거운 휴가 보내십시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김 실장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데 뒤에서 시끄러운 녀석들이 실장님 다음에 또 뵙자며 저보다 더 살갑게 인사를 하고 난리가 났다.
그러고는 당장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재수 없는 우성 알파답지 않은 정이헌’, ‘다정한 정이헌 만들기’ 장기 프로젝트를 새롭게 기획하자, 이때를 위해 우리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라고 수선을 떨며 ‘정이헌 탈 안드로이드’ 계획 따위를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녀석들은 뒤에서 맹수가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르고 잔뜩 몰입하고 있었다.
실리콘 밸리의 고급 저택에서는 보라색과 붉은색으로 붓질한 아름다운 노을과 더불어 우렁찬 남자들의 비명 소리와 공중에 날리는 나초 조각이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에 커다란 오프로드 차에는 멀쩡한 사람 한 명과 절뚝거리는 사람 세 명이 사막을 가로질러 관광의 도시로 떠났다는 소식이 김 실장에게 보고되었다.
* * *
서부의 붉은 대지와 대비되듯이 물감처럼 파랗고 넓은 하늘.
그 하늘을 가로질러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지겨운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김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 일로 직접 나오셨습니까?”
5년이 넘는 샌프란시스코 생활 동안 김 실장이 직접 마중을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인자하게 미소를 짓고는 차로 안내했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은 늘 그랬듯이 길이 막혔다. 김 실장은 그 자투리 시간을 이용할 생각이었는지 이헌이 한국에 다녀오기 전에 지시했던 사항을 정리해서 보고했다. 이헌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진행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좀 더 쐐기를 박았다.
“이번에 꼭 우리가 제트라의 자율주행 시스템에 들어가야 합니다. 로넌 웨버는 성공할 수밖에 없어요. 이제 반도체는 또 다른 인공지능 이슈가 터지기 전까지 클라우드 서비스와 자율 주행 자동차에 주력해야 합니다. 이번에 개발된 AI 반도체로 아예 운영체제의 판도를 바꾸어야 하고요. 다음에 있을 그쪽과의 미팅에는 제가 직접 들어가죠.”
이헌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본인이 직접 발로 뛰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에 들어가서 볼일을 처리하고 난 뒤, 멀찍이 떨어져서 라영의 얼굴을 보고 오는 길이다. 라영이 공채에 합격했다고 한 다음부터 일 년에 한 번씩은 들어가서 멀리서 얼굴을 보고 왔다. 이제 계획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간다고 생각하니까 절로 마음이 급해진다. 공학박사들을 직접 영입해 인공지능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도 몇 년이 걸렸던가.
이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김 실장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얼굴을 마주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분과 같은 팀에 알파는 배제하고, 연계되는 팀들도 다 베타나 오메가로 구성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쪽 본부장한테서 말이 계속 나옵니다. 게다가 거래처에서 알파라도 만나는 것 같으면 바로 그쪽 팀에 일 투입해서 바쁘게 만드는 작전도 제작 본부장이 왜 꼭 그 제작팀을 딱 꼬집어서 일을 주느냐고 캐묻는데, 그 팀이 이런 광고에 특화되어 있지 않으냐고 둘러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솔직히 아주 곤혹스럽습니다. 저번 광고는 결국 기획팀에 의해서 다른 팀으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쪽 기획자가 다른 팀을 지정했다고 바꿀 수 없다고 하더군요.”
김 실장이 쌓인 게 많은 모양인지 주절주절 라영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본인의 곤혹스러움을 토로했다.
“바로 그래서입니다.”
“네?”
운전하며 전방을 주시하던 얼굴을 살짝 돌려 이헌을 쳐다본다.
“지금 들어가 봤자 제대로 접점을 잘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직 제가 제대로 기반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가 봤자 이렇게 김 실장님이나 아버지 라인을 통해야겠죠.”
이헌은 떠나기 전 아버지가 본인을 서재에 불러 놓고 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성과만 확실하게 내고 돌아와. 그렇게 된다면 아무도 너에게 뭐라고 말할 사람도 없을 거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다. 이헌은 그 말을 기억했다. 아버지가 당시에 라영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지 그룹이나 회사에서의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그저 조금 살려 놓았을 뿐, 확실하게 이헌의 이름이 박힐 거대한 성과가 아니면 소용이 없었다. 그룹에서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재계에 큰 이슈를 터뜨려야만 했다.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서.
“그래서 이번 제트라 사업을 무조건 성공시켜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전기차, 스마트카의 이름에서 우리 반도체가 떠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국내도 계속 이쪽 산업을 시작하고 발전할 텐데 미리 기술을 닦아서 선점을 해야죠. 최근 여러 가지 재해 문제로 환경에 대한 관심도 급증하고 있고 제트라가 가진 세련된 이미지가 사람들을 더더욱 전기차에 열광하게 할 겁니다. 이번에 꼭 잡아야만 해요.”
이헌이 결의를 다지며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전략팀에게 그쪽에서 혹할 만한 디테일한 안을 구성할 수 있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이제 들어가서 쉬시지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다 보니 막힌다고 생각했던 도로를 지나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김 실장님의 노고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성공하고 한국으로 같이 들어갈 때 실장님께서도 한두 달은 휴가를 꼭 가지십시오. 국내에도 자주 못 들어가시고 고생 많으십니다.”
이헌이 고생하는 김 실장의 노고를 치하하며 차에서 내렸다. 성공만 한다면 함께 승진할 것이다. 국내에서 더 커다란 위치를 잡게 되겠지.
“말투도 연습하신 것처럼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김 실장이 이헌이 보이는 쪽의 창문을 내려 그의 다감하고 예의 바른 말투를 칭찬하며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보며 이헌은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이제 멀리서만 보는 것은 마지막이다.
이번에는 다시는 실패하지 않도록 완벽한 계획을 짜도록 하자. 비정상적이지 않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만남을 계획하는 거다. 운명적인 만남이라면 더 좋겠지.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겸허하고 다정한 남자로 다가가자. 외모도 그의 취향이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거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를 생각했을 때 자연스럽게 심장이 떨리도록. 나에 대해서 연민을 가진다면 좀 더 확실하겠지. 그는 오만한 것들은 가차 없이 버려도 불쌍한 것들은 절대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기회가 온다면 이번에는 두 손에서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꽉 쥐고 놔주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운명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제트라와의 계약을 성공시키고 서로서로를 축하하며 바쁘게 디테일한 계약안을 수정하고 진행시키던 어느 날, 한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라영이 형질자 센터 매칭 서비스에 등록했다는 최재영의 전화였다. 빨리 와야 하지 않겠어? 그 한마디에 이헌은 바로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몇 년간 머릿속으로만 되새겼던 만남에 대한 계획이 구체적으로 ‘결혼하기’로 진화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