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엿 같은 거절을 받아들이는 이헌의 태도는 큰 병에 걸려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부정 – 분노 – 타협 - 심한 우울 - 수용
*부정: 씨발, 나한테 이런 엿 같은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어. 이게 씨발 지금 무슨 경우야, 혹시 꿈인가?
이헌은 일생 동안 매우 현실적이고 외부에 무감한 성격으로 단 한 번도 이것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큰 충격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켰다.
*분노: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누가 나를 저렇게 개무시하고 거절했다는 게? 씨발, 그래 다 없던 일로 해. 다 잊어버리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변해 봤자 라영이 그렇게 싫어하던 본질인 이기적이고 오만한 알파의 모습이 바뀌지는 않았다.
*타협(희망): 아니야. 이번이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던 게 틀림없다. 좀 더 기다렸어야 했는데 성급했다. 시간이 좀 더 많이 지난 뒤에…, 나중에 다시 말을 걸어보면 그때는 정말로 괜찮을 거야.
방금 전에 다 좆 까고 잊어버릴 거라고 다짐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상황을 자기 좋을 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우울: 씨발, 내가 역시 우성 알파라……. 그렇게 우성 알파가 싫다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좆같은 우성 알파 전 남친 때문에 그렇게 몸이 아프고 고생한 사람을……. 좀 더 우성 알파 같지 않은 모습으로 더 조심스럽게 다가갔어야 했는데….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본인의 정체성마저 혐오하고 부정하고 있었다.
이헌은 부쩍 심각해지고 말수가 없어졌다.
이것은 이헌이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턱이 시퍼렇게 멍들고 다리를 절고 있는 친우 우경이 직접 옆에서 지켜보고 느끼며 기록한 내용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라영을 만나기 전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동네에서 소문난 계획 변태요, 통제광인 이헌은 처음에만 무기력하고 침울하게 눈앞에 놓인 최소한의 것들만을 습관적으로 이어 나갔고, 방학이 지나고 개강을 해서 다시 만나니 이번에는 전보다 더 지독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았고 학과 공부와 성적을 챙기면서 동시에 유학을 준비하고 심지어 아버지께 회사 업무에 대해서도 배우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심지어 걱정된 나머지 인맥 좋은 우경이 건너건너 알아봐 준 라영의 소식-“이라영이요? 걔 어학연수 떠났어요! 1년은 다녀온다고 하던데? 근데 우경 선배, 왜요? 진짜 밥 사 주시는 거예요?”– 을 전해 주자 더욱더 지독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 소식이 이헌에게 어떠한 불을 지핀 게 틀림없었다.
단순히 전과 같이 로봇이나 알파고가 아닌 진정한 지능형 기계, 인간 병기인 안드로이드로 거듭나려는 순간이었다(그리고 그 안드로이드에게는 감정형 사고를 일부러 결여해서 제작한 게 틀림없었다).
이헌에게 마지막인 이번 학기에는 단 한 개도 우경과 수업이 겹치지가 않아서 그저 말도 못 하고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점은 제일 중요한 마지막 단계인 ‘수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울과 분노만 남기고 다 사라진 것 같았다.
우경의 고민은 나날이 깊어져만 갔다.
* * *
“이헌이, 들어와라.”
“네.”
서재에서는 오래된 책이 가진 특유의 냄새가 났다. 요즘은 이름만 서재라고 칭하고 책이 많지 않은 집무실인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서재는 달랐다. 그가 어린 청년 시절부터 모아 온 책들이 가득히 양옆의 책장에 가지런히 줄을 맞추고 있었다. 냄새는 흡사 도서관에서 나는 것과 비슷했다.
오래된 월넛 목재로 만들어진 책상이 방 한가운데서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적당한 크기의 2인용 소파와 1인용 소파들, 티 테이블이 그 앞에 자리해 있었다. 모두 오래된 가구였지만 그 명성에 맞게 오래될수록 더 빛이 나는 제품들이었다. 모든 게 아버지 취향 그대로 이헌이 어릴 때부터 봤던 모습과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그나마 이 방에서 가장 최신의 것들을 찾자면 종종 즐기시는 축음기와 책상 위의 저 노트북일 것이다. 그만큼 이 방은 세월에도 무심하게 자기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는 이헌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집에서 아버지가 늘 계시는 곳이었고, 집 안의 유일한 오메가 여성인 어머니는 이헌의 페로몬 문제를 알게 된 이후 어린 이헌을 붙들고 늘 이야기했었다.
‘아버지 서재 쪽으로는 되도록 가지 마. 형이랑 누나 방도 마찬가지야. 다들 네 옆에서 평소에 조심하려고 노력할 텐데, 아무래도 늘 지내는 곳에서는 페로몬이 나오니까. 엄마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아홉 살의 이헌은 어려움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선천적으로 무심하고 살갑지 않은 기질이라 그전에도 그렇게 가족들의 방을 찾아다니는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그래서 아버지의 서재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페로몬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는 타성적으로도 의지로도 굳이 찾을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와는 늘 필요한 말 이상의 것을 나눈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집안이었다.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그런 아버지가 태어났고, 자신과 형도 그런 성향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누나도 조금 더 사교적인 사람일 뿐 기본적인 기질은 다르지 않았다. 피의 내림은 강했다.
“앉아라.”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이헌은 오랜만에 들어오는 서재를 무심히 살피며 아버지가 권하는 소파에 앉았다.
“한 잔 줄까?”
오랜만에 보는 막내아들이 마치 손님인 양 자연스럽게 진열장 앞으로 가서 술을 권한다.
“네. 아버지 드시는 걸로 주십시오.”
그 말에 아버지는 여러 개를 둘러보다가 브랜디를 한 잔씩 따라서 자리로 가져왔다.
“얼음 준비하라는 얘기를 못 했다. 그냥 스트레이트 괜찮지?”
사람을 시키지 않고 앉아 있으라 말하며 손수 술을 골라 따라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버지의 애정임을 알고 있었다. 자식을 능력주의로 타이트하고 엄하게 길러낼지언정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저 본인도 그렇게 자라 왔고 자식들도 그렇게 키웠을 뿐이었다.
“출국 준비는? 올해 들어서는 내내 학교 앞으로 나가 살아서 얼굴도 자주 못 봤구나.”
“네. 준비는 다 돼서 이제 몸만 떠나면 됩니다.”
“김 실장한테 지시해 놨다. 앞으로 김 실장이 실리콘 밸리에 있는 미국 지사로 발령 받아 거기서 일하면서 미리 자리 닦고 있을 거야. 너 있는 뉴욕에도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일도 봐주고 할 테니 그런 줄 알아라. 프로젝트 팀으로 만들어 놨으니까 공부하면서 계속 지속적으로 참여해서 현지 일 익숙하게 배워 놓고. 학위 마치면 바로 너도 그쪽으로 넘어가면 돼.”
아버지는 그가 어떤 길을 계획하고 있는지 뻔하다는 듯이 미리 더 넓은 길로 안배를 해 놨다.
“김 실장이 떠나면 아버지가 불편해지시겠습니다.”
“사람은 많고 인재는 또 키우면 돼. 김 실장이 적격이야. 너희 숙부한테도 밉보이지 않을 사람이고, 일 처리는 말할 것도 없으니까. 열심히 배워.”
아버지는 아들이 건방진 소리를 한다는 듯이 술을 한 모금 넘기며 이야기했다.
“작은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까?”
설령 무슨 말이 나왔고 난리를 쳤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이헌이지만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물었다. 이헌이 갈 곳은 미국에 있는 HY 반도체 지사였고, 숙부는 HY 반도체 대표였다.
“말 나올 것도 없었다. 지금 십 년간 반도체가 미국 지사에서 성과 낸 게 뭐가 있어? 건물이나 겨우 지키고 있는 수준이지. 네가 당장 자기 자리를 위협한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어려운 곳에 가겠다고 하는 건데 말이 나오면 건방진 거지. 자기 자리 위해서 회사의 이익은 생각도 못 하는 사람은 아니야.”
실제로 아주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아버지는 드물게 발끈하면서 말이 길어진다. 그의 아우의 무능한 자식들을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잘 해 봐. 국내 벗어나서 세계 시장에서 어떤 가치가 주목받는지 동태 파악 잘 하고 신대로를 만들어 보란 말이야. 난 네가 잘할 거라 믿는다.”
“네.”
저 믿음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아버지로서의 애정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아버지는 너무나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다. 하지만 그 신뢰를 배신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이헌은 그저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최 교수 아들하고 재미있는 짓을 벌였더구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치다. 아버지의 눈과 귀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당시에 마음이 너무 급해서 방심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이헌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페로몬까지 기부해 가면서….”
혀를 차면서 말하는 모습이 아들이 미련했다는 눈치다.
“아버지 손을 빌릴 정도는 아니었어요. 별일 아니었고, 지금은 더더욱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눈빛이 매서워지며 조금은 감정이 섞인 듯한 아들의 단호한 대답에 그저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아버지는 턱을 조금 매만지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과만 확실하게 내고 돌아와. 그렇게 된다면 아무도 너에게 뭐라고 말할 사람도 없을 거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다.”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무언가 아는 눈치이다.
“가서도 연락 자주 하고. 무슨 일 있을 때만 연락하라는 게 아니야. 무슨 일이 없을 때도 부모한테 전화해서 안부를 전해. 그게 네 의무야. 내가 다른 사람 통해서 듣는 거랑 네가 직접 연락하는 건 완전히 달라. 특히 너희 엄마는 네가 귀찮아할까 봐 말을 안 하는 거지, 늘 연락 기다리고 있어. 너 군대 갔을 때도 얼마나 기다렸나 몰라. 알겠어?”
막내는 영원히 아기고 막내라더니, 이제는 자신보다 더 크고 장성하다 못해 나이 들어가는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는 드물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네, 아버지.”
“쯧, 대답은 잘한다. 너도 자식 낳아 봐야 이걸 알지.”
대답이 못 미덥다는 듯이 부모라면 누구나 하는 한탄형의 말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공적인 부분에서는 항상 신뢰를 보내는 아버지는 사적인 부분은 전혀 아들을 믿지 않았다.
나가서 네 어머니랑 시간을 더 보내라며 등을 떠미는 손길에 이헌은 서재를 나왔다.
* * *
작년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이헌은 줄곧 일과 계획에만 매달려 왔다.
할 일들을 더 바쁘게 잔뜩 순서대로 세워 놓고 기계적으로 그것들을 수행해 나가면 다른 잡생각이 드는 것을 잊을 수가 있었다. 거절을 당한 수치도, 사라지지 않고 남은 미련도, 뭔가 좀 더 잘 했었으면 하는 후회도 전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거대한 감정의 해일을 그저 상자에 담아서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것이다. 이걸 정면으로 받아들일 자신도 지혜도 없었고, 또한 그것을 체념하고 수긍할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렇게 꼭꼭 숨겨 두면 마치 없었던 일이 된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떠날 날이 온 것이다.
어학연수를 떠났다고 우경이 전해 주는 소식에 더는 다른 소식을 알아보지 않았다. 지금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그럴 때도 아니라는 게 이헌의 생각이었다.
그저 잠시 깊은 곳에 감춰 두고 시간이 지나서 열어 보면 그때야말로 알 수 있겠지. 상자를 열어 봤을 때 시간이 너무 흘러서 풍화되어 가루가 된 감정의 조각들을 발견한들, 아니면 주변에서 감정의 이물질들을 끌어모아 반짝이는 진주를 만들어 내는 조개와 같이 그 어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든지. 둘 중에 무엇이 되었든. 아니면 아예 그 어떤 것이든 아무것도 되지 않든.
지금은 이 모든 것을 한구석에 밀어 놓고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의 잔재에 균열을 발견한 이는 이헌 자신도 아닌 우경이었다.
“이거 받아.”
배웅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극구 이야기했건만 굳이 나와서 선물이라고 크라프트지에 싸인 네모난 것을 건넨다. 크기와 부피로 보아하니 두껍지 않은 책 같았다.
“이게 뭔데?”
“출국 선물. 별 건 아니야.”
게이트 앞까지 따라와서 집요하게 선물이랍시고 책을 안기는 모습에 이헌은 의심의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이거 혹시 뭐 이상한 거……?”
미간을 찌푸리며 보이지 않는 안쪽을 투시해서 보려는 듯이 이헌이 선물을 빛에 비춰 앞뒤로 돌려 보며 이야기했다.
“아니야! 전혀 이상하고 그런 거 아냐.”
우경은 손까지 내저으며 격렬한 부정을 하다가 어깨를 티 나게 내리고 한숨을 푹 쉰다.
“난 그냥…. 내가 이런 얘기 꺼내는 거 전혀 달갑지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
“너는 쪽팔리고 괴로운 경험이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옆에서 네가 그렇게 바뀌는 모습이 좋았어. 더 인간적이고 사람다워지는 게…. 너처럼 감정에 무감한 사람도 꼭 행복을 찾을 것처럼 보였단 말이야. 아무튼 내 말은…!”
본인도 무슨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둥 머리를 긁으며 횡설수설하다 곧 마음을 정했다는 듯이 의지를 가진 목소리로 힘있게 이야기를 이었다.
“한 번 실패했다고 그런 감정을 영원히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그런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데. 인간이 왜 사회적 동물이고, 어째서 외로우면 죽어 가는 건지. 왜 죽어 가는 가운데서도 다들 그렇게 사랑을 찾고 사랑을 노래하는지. 이런 것들이 얼마나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지.”
“…….”
“그런 것들을 네가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대로 말을 한 건지 잘 모르겠다며 한숨을 푹 쉬며 이야기를 마치고는 손을 내밀었다.
이헌은 그 손을 보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악수해, 인마.”
우경이 웃으면서 이헌의 손을 덥석 잡아 흔든다. 그 모습을 보자 이헌은 오랜만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윤우경 많이 컸네. 건방진 자식….”
“내가 원래 생일도 더 빨라!”
원래부터 자신이 더 형님이었다는 둥, 키만 크면 다냐고 씩씩대는 게 어릴 때와 하등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 늘 이렇게 정 넘치고 따뜻한 녀석이었지. 실제로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이라는 게 어떤 느낌이고 어떤 감각인지를 알게 된 이헌은 우경의 마음이 고마웠다. 개미 눈곱만큼 아주 조금. 나머지는 건방지기 짝이 없다.
“고맙다. 버리진 않을 게.”
“어휴, 이게 진짜…. 됐다. 조심히 가고. 절대 단톡방 나가지 말고! 한 번 더 나가면 진짜 뉴욕까지 쫓아갈 거야! 시간 날 때 놀러 갈게.”
“그래. 너도 조심히 가고.”
우스운 작별 인사를 마치고 게이트로 빨려 들어갔다. 공항 라운지에 잠깐 들렀다가 비행기에 탑승해서 일등석에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큰 짐은 한 달 전에 사람을 통해 미리 보내 놓고 부칠 짐도 없이 겨우 가방 하나 가지고 탄 이헌은 그 가방에서 우경의 선물을 꺼내 들었다.
크라프트지는 아주 쉽게 찢어져서 안의 내용물을 빠르게 드러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짙푸른 하드 커버 위로 금박의 제목이 소담하게 박혀 있었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책을 접했지만, 수능 이후로 한 번도 시를 의도해서 접하지 않은 이헌은 황당함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감성적인 녀석다운 선물이다. 이걸 읽고 좀 사람다워지라 이건가.
평소라면 시간 낭비라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순문학이지만 마지막에 너무나도 간절하게 말하던 그 모습이 생각이 나서 책을 펼쳐 시를 읽어 내렸다.
몇 자 되지도 않는 시를 그저 기계적으로 읽어 나가던 이헌은 하나의 시에서 문뜩 장을 넘기던 손길이 멈추었다.
‘느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시 한 편…….
눈꼬리가 휘어서 초승달이 서럽고, 몸집이 작은 청사과가 안쓰럽다는 시인의 말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시를 끝맺음하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좋다.’
문학에 대해서는 그저 기계적으로 외웠을 뿐, 순수하게 감상하는 방법은 전혀 모른다.
이 시도 그저 초승달과 청사과와 저녁 바람을 사랑스러워하는 것인지 그 덧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연민인지….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마지막 말만이 따로 떨어져 가슴에 사무쳤다.
그래도 네가 좋다.
그래도 네가 좋다.
창밖을 보았다. 땅이 멀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