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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날씨는 완전히 겨울에 접어들었고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조부 때부터 있었다는 고목은 앙상한 팔을 드러내며 잎사귀들을 잃은 채 헐벗고 있었다.
이헌은 어릴 때부터 사용해 온 3층을 통째로 터놓은 자신의 방 책상에 앉아서 한창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중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어. 정이헌 군?
반갑지는 않지만 유용한 정보를 줄 목소리가 네모난 기계 안에서 들려왔다.
“군은 무슨. 집어치워.”
-왜, 우리 아버지가 너 그렇게 부르는데 나는 안 돼? 오랜만인데 까칠하다? 너 나한테 빚진 주제에 이런 태도 괜찮나?
“씹…. 뭔데. 뭐 소식 들어온 거 있어?”
얼마 전 일이었다.
자칭 연애의 고수라는 친구 놈들의 의견에는 동의했다. 지금 이런 상태로 더 다가갔다가는 역효과만 날 것 같다는 걸 이헌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고, 마주칠 때마다 안색이 좋지 않고 페로몬이 들쭉날쭉하며 아파 보이는 라영을 보면서 우연히 떠올린 인맥은 그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최선의 수단 같았다. 본인이 알려 주지 않은 정보를 캐내는 것이 조금 걸렸지만, 이미 여러 번 브레이크에 걸린 상황은 마음속에 작게 떠오른 양심을 발로 밟아 완전히 짓뭉갰다.
자신의 주치의인 최 교수의 아들 최재영은 어릴 때부터 종종 왕래를 한 인연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형질 의학과 전문의였지만 직접적인 치료보다는 연구에 관심이 많아서 병원이 아닌 국립 형질자 센터의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형질자 센터에 등록되고 관리되는 모든 우성 형질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기에 자유롭게 정보 열람이 가능했다.
능글거리며 상대의 약점을 잡는 걸 즐겨 하는 음흉한 인간이라 웬만하면 약점을 드러내면서 도움받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너 그때 나한테 연락 잘 한 거야. 당시에 검사 결과 보고 나서 내가 그 친구 다시 내원할 일 생길 거라고 했지?
“빨리 본론이나 이야기해.”
-건방진 자식. 넌 내가 이 건에 관심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 안 그랬으면 아무것도 없었어.
“…….”
조용해진 이헌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재영은 말을 이었다.
-극우성 오메가 이라영. 급작스러운 페로몬 샤워와 체내 부적합한 억제제 과다 투약으로 인한 내분비기관 이상으로 사이클 주기 오류 발생.
“뭐……?”
이헌은 깜짝 놀라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서 일어났다. 저도 모르게 방 안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서성였다.
-차트에 적힌 내용이야. 그래서 관련 담당자한테 좀 더 자세히 물어봤거든. 저번에 그 네가 건넸다는 억제제가 안 맞았다는 얘기는 했지? 오메가마다 자신한테 맞는 게 따로 있으니까. 그래도 그걸 그냥 정량대로 먹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당시 본인도 당황했는지 과용을 했지. 뭐…, 억지로 끌어 올려진 호르몬을 또 억지로 과하게 끊어 내려 했으니 히트 사이클 체계가 무너진 거야. 그럴 것 같았어. 흔히 있는 일이야.
“흔히 있는 일이라고?”
-그래. 사이클이 일어나는 호르몬에 반대되는 고용량 호르몬을 주입시키니까 사이클 주기가 달라지게 되지. 베타들이 먹는 사후피임약 원리랑 비슷해. 그것도 월경 주기가 틀어지지.
설명충 새끼. 적당히 말해도 알아들을 텐데 왜 이렇게 자세히 알려 주는 건지 수상하다.
“그럼 곧 히트 사이클이 오겠군.”
-그렇지. 근데 저번에도 내가 대충 알려 주며 경고했었지. 그 문제뿐이었으면 이렇게 연락 안 했지.
이헌은 라영이 전 남친과의 사고 이후로 부쩍 몸이 좋지 않아 보이던 것을 떠올렸다. 항상 페로몬 조절이 완벽하고 철저하던 사람이 페로몬을 다루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목격한 것도 여러 번이다. 재영은 이헌의 그런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라영의 건강 상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갑상선 수치도 엄청 안 좋네. 페로몬 체계가 엉키면서 호르몬이나 몸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준 거지. 분명 고생 좀 했을 거야. 흠….
재영은 차트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라영이 힘들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의 안 좋은 얼굴과 동시에 다시 한번 그 역겨운 구 남친 녀석의 낯짝이 생각나서 머리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몸이 그렇게 아프고 힘드니 우성 알파에 대한 경험치는 그의 머릿속에서 더 최악으로 박혔을 게 틀림없다. 이헌은 강의실에서 분노를 쏟아내던 라영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재영이 자신에게 이렇게 친절할 리가 없는데 왜 이러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대체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잘 들어봐. 이렇게 내분비기관 이상으로 사이클이 오면 약물을 안 쓰게 해. 그냥 히트를 보내게 하지. 그래야 외부에서 들어온 호르몬계 약물로 엉망이 된 몸이 다시 제대로 돌아갈 것 아니야. 호르몬에 계속 인위적인 호르몬을 더하고 더하면 몸이 어떻게 되겠어?
“씨발….”
생각보다 더 나쁜 소식이다. 대체 누구랑 히트를 보내게 될까.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이헌의 마음에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그 초조함을 뻔히 안다는 식으로 재영은 놀리듯이 말을 던졌다.
-여기서 좋은 소식이 한 가지 있어. 더 듣고 싶어?
“미친….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빨리 마저 얘기해.”
이헌의 안달 난 음성을 즐기듯이 듣고 있던 재영은 극적인 효과라도 기대했던 건지 뜸을 들이며 조건을 제시했다.
-더 듣고 싶다면 대가를 줘.
“최재영, 미쳤어? 공무원이 지금 뇌물을 요구하는 건가? 인생 끝내고 싶어서 환장했군.”
이헌은 이 인간이 언젠가 사고를 칠 줄 알았다는 듯이 어처구니없다는 어투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재영이 제시한 대가는 뇌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돈은 나도 넘칠 만큼 있어. 정이헌, 너 헌혈 좀 해. 네 혈액이랑 페로몬을 나한테 주면 돼. 너 같은 극우성 알파가 재벌로 태어나다니…, 이건 국가적 손실이야. 네가 평범한 사람이어서 진작에 센터 연구소에 처음부터 기증해 왔다면 우리나라 현대 의학은 더 발전할 수 있었….
“개소리 작작 해. 형이 미친 건 알았지만 이렇게 미치광이 과학자 같은 줄은 미처 몰랐네.”
이헌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릴 때부터 싹이 보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국가에 형질자 권리 포기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집안 변호사를 전부 동원해 완벽하게 공식화해서 막아 왔지만 최 교수에게 십 년 넘게 공유한 자신의 혈액과 페로몬 자료가 있었을 텐데. 아들에게도 공유하지 않은 걸 보니 나름 정직하다고 해야 하나. 이헌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문질렀다.
그렇지만 고민해 봤자 답은 하나다. 라영과 관련된 일에서 거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알겠어. 그럼 형한테 혈액과 페로몬 기증하는 걸로 하지. 빨리 나머지 얘기를 해.”
어차피 이 관계에서 을은 자신이다.
-환자가 히트 사이클 자연 치료를 거부했다고 하더군. 알파 페로몬에 학을 떼고 거부한다고.
“뭐라고?”
이걸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극도의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센터 병원에서는 환자의 의지대로 의학적인 치료 쪽으로 방향을 틀었나 봐. 소중한 극우성 오메가의 몸이 상할까 봐 다들 걱정이 많아.
만약 자신이 라영을 담당하는 의사였어도 그렇게 신경을 썼을 거라며, 이헌이 관심도 없는 극우성 형질자에 대해 예찬을 펼쳤다. 이헌은 듣기 싫은 그 설명을 끊어 내듯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 치료는 어떻게 하는 건데?”
-병원에 입원해서 수면제와 신경 안정제를 번갈아 쓰면서 신체 자체를 좀 무력화시킬 거야. 근데 그런다고 사이클이 끝나는 건 아니라 의학적으로 정제해 낸 고농축 알파 페로몬을 체내에 직접 주입시켜서 사이클이 끝나게 하겠지. 보통 그렇게 해.
“그건 안전한가?”
-물론이지. 이럴 경우에 쓰는 일반적인 방법이야. 간에 무리는 좀 가겠지만 아직 젊은데 뭐. 하루 이틀이면 끝나.
얄밉게도 평온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모습에 이헌도 조건을 걸었다.
“대신 내 기증에 조건이 있어.”
-뭐? 너 지금 한 입으로 두말하기야?
본인이 완전한 승자라고 생각하고 전리품을 얻을 생각에 들떠 있던 재영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이헌은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대화와 관계에서 승기를 놓치지 않는 교육을 받은 이였다.
“그 사이클 치료에 알파 페로몬 쓴다고 했나? 형이 필요한 양이랑 그쪽에 필요한 양 모두 기증할 테니 그 치료에 내 페로몬을 써.”
또다시 다른 알파 페로몬을 받아들이는 라영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알파 본능의 지독한 소유욕이 또 발휘되고 있었다.
-거긴 내 담당이 아니라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진짜로 쉽게 되는 건 아닌 건지, 연구소와 병원은 분리되어 있는 걸 알긴 아는 거냐, 네가 국가 기관의 복잡하고 불필요한 절차들을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다고 씩씩대기 시작한다.
“그건 형 역량으로 알아서 할 일이지. 내 조건은 그거야. 들어준다고만 약속하면 며칠이 걸려서라도 필요한 양을 기증해 주겠어.”
그 유혹적인 조건에 재영은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잠시 조용해졌다.
-제기랄…. 좋아. 일정 정리해서 보낼 테니까 그때 와.
갑과 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과제와 시험에 시달리는 바쁜 와중에도 며칠에 걸려 약속했던 기증을 마치고 라영의 치료가 잘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쪽도 기말 기간이었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문제가 터져서 곤란했을 거다. 시험은 잘 봤는지, 마무리는 잘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문제의 교양 수업 외에는 두 사람의 접점이 전혀 없어서 더 이상의 소식을 알 길은 없었다.
이헌은 다른 기회가 더 있을 거라고 여기고 마음을 다잡고 있는 중이었다.
실제로 올해는 내년 9월 학기부터 시작할 MOT 과정을 준비하기 위해 연 계획을 아주 디테일하게 주 단위로 끊어서 세워 놓은 터라 허튼 움직임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됐다.
이헌은 지금도 프라이빗 레스토랑의 파티장 한가운데 서서 와인을 마시며 이 파티가 끝나고 난 뒤에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하고 있었다. 조부의 생신을 기념해서 이맘때쯤 항상 이런 장소를 빌려 가족과 친지들이 모두 모였는데, 매년 있는 아주 지루한 행사였다.
특히 어르신들의 이런 식상한 질문은 말할 것도 없고.
“이헌이는 유학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작은 아버지가 물었다. 늘 자신의 아버지인 형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는 이 사람은 자식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이 예민하게 굴었다. 스스로도 차남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콤플렉스였다. 자신과 형은 성격 탓인지 어릴 때부터 서로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너무나 동떨어진 개체라 비교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만.
“네. 순차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지금 네 아버지가 네가 MOT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근데 왜 MBA가 아니고 MOT지?”
견제하려고 하는 처절한 몸짓을 보는 것 같다.
“기술 경영 쪽에 좀 더 관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대답에 아버지가 끼어들어 말을 더했다.
“MBA는 장남인 이경이가 다녀왔지 않나. 그래서 내가 MOT를 더 추천한 것도 있어. 둘이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봐야지.”
마치 아우 앞에서 아들을 감싸주려는 부정父情은 보이지만, 그 본질에는 자식을 통해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성과를 이룰 수 있을지 알고 싶다는 성과주의 일 중독자의 실험적인 측면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그런 부분을 존경하고 가장 많이 닮기도 한 자신이기에 불만은 없었다.
“학위 따고 석유나 에너지 쪽으로 갈 생각이지?”
HY 반도체 대표를 맡고 있는 숙부는 에너지와 화학을 아우른 HY이노베이션 쪽 대표를 맡고 있는 아버지를 언제나 견제해 왔는데 이 질문도 그 견제의 일환이었다. 조카가 암묵적인 룰을 깨고 혹시나 자신의 정원에 발을 들일까 봐 불안해하는 것이다. 질투와 견제가 많은 사람은 소인배가 된다. 그리고 숙부는 정확히 그런 소인배였다.
“아직 그런 구체적인 문제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미 비메모리 반도체에 관심을 갖고 그쪽으로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굳이 미리 적장에게 아군의 지도를 줄 필요는 없었다.
눈치를 챈 아버지가 적당히 사업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을 때 조용히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우성 알파가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들 식구라고 은근슬쩍 과시하는 듯이 페로몬도 풀어 놓는 꼴이 가관이다.
“여…! 우리 이헌이.”
기분이 좆같아서 피하고 있는데 더 좆같은 이를 만났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헌을 가만두지 못하는 지질한 사촌의 얼굴을 보며 이헌은 자조했다. 어쩐지 안 만나고 넘어간다 싶었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저를 응시하는 이헌을 보며 사촌은 이헌의 목과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저보다 훨씬 큰 사촌 동생을 그렇게라도 눌러서 우위를 본인이 점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헌은 말없이 그 팔을 풀어 내렸다.
“여전히 까칠하긴. 형님 보고 인사도 안 하냐?”
정작 이헌의 친형은 한 번도 형님 대접을 원한 적이 없는데 고작 두 살 많은 사촌 형이 늘 지랄이다.
“너 또 페로몬 문제 때문에 최 교수한테 들락거리고 치료받았다며? 도대체가 페로몬이 극우성이면 뭘 해? 계속 문제가 생기는데.”
어릴 때부터 일반 알파인 본인의 콤플렉스를 극우성 알파로 태어난 이헌이 자극한다고 생각하는지 깔아뭉개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주 어린 유아기 시절부터 당해 온 괴롭힘은 같은 아이가 했다고 하기에는 아주 악질적이었다. 이헌의 키가 본인과 비슷해지기 시작하니 이제는 물리적인 괴롭힘이 아닌, 이러한 신경을 긁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늘 하는 멘트들도 1차원적이고 식상하기 짝이 없다. 상대방을 까 내리면 마치 자신이 우위에 선다고 착각하는, 자존감은 낮고 자신감만 넘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는데, 역시 열등감의 집약체인 숙부의 아들다웠다.
“영향력도 얼마 없는 미비한 페로몬보다는 훨씬 낫지.”
“이 새끼, 너 뭐라고 했어?”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는 말에 바로 얼굴이 벌게지며 급발진한다. 형질에 자신이 없으면 성격이라도 좋길 하든지. 저런 인간들 특징이 자신은 늘 남을 깔아 내리고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을 절대 견디질 못한다. 남들에게는 꽁꽁 숨기고 있지만 자존감도 낮고 자신도 없으니 누가 그걸 알아채는 순간 바로 광인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입만 산 콤플렉스 덩어리 새끼.
이헌이 무시하고 뒤를 돌아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그제야 본론을 꺼낸다.
“새끼야, 너 아까 뒤에서 들으니까 마치 공부하고 와서 반도체 쪽으로 가려고 하는 것 같더라? 씨발, 너 오기만 해 봐. 자리도 못 붙이게 만들어 주게.”
이 말을 하려고 그렇게 시비를 걸었나. 싸움의 상대 앞에서 몸집을 잔뜩 불리고 강한 척 소리를 지르는 작고 하찮은 동물을 보는 기분이다.
“형이 그러니까 더 그쪽으로 가고 싶네.”
“뭐…? 어? 이 미친놈이…?”
이헌은 돌리려던 발걸음을 반대로 돌려 다시 사촌의 눈 앞으로 다가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위협적으로 낮게 경고했다.
“그러니까 씨발, 사람 신경 긁을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일이나 해. 맨날 프로젝트 말아먹고 오메가 끼고 놀러 다니는 거 누가 모르는 줄 아나? 댁이나 자리 유지에 힘쓰지 그래? 내가 돌아오면 텅텅 비어 있을 그 자리 말이야.”
이헌은 패배자의 노성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지겨운 알파들의 페로몬으로부터 멀어져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파티가 진행되던 레스토랑에서부터 나와서 무작정 차를 몰았다. 식사도 마쳤고 이미 인사는 지겹게 했으니 표현은 잘 하지 않아도 막내아들을 아끼는 부모가 핑계를 만들어 주겠지. 오늘은 학교 앞 오피스텔에 가서 자야겠다고 결정하고 그쪽으로 방향을 틀며 생각에 빠졌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모든 게 계획 안에 있었다.
이헌은 조급함을 갖지 않으려고 계획과 생각을 정돈하며 올림픽 대로 위를 달렸다. 대로 위의 차들에게서 나온 불빛이 강물 위로 반짝였다.
드르르륵.
핸드폰에 진동이 왔다. 눈으로 슬쩍 누구인지 확인하고 핸들의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정이헌. 통화 가능해?
블루투스로 연결된 터라 자동차 스피커를 통해 우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얘기해. 운전 중이니까 간단하게.”
-별건 아니고…. 다음 주가 그거 종강이잖아. 매스미디어의 이해.
대뜸 전화해서 함께 듣는 그 과목을 얘기하는 모습이 시험에 대해 물으려는 건 아닌 것 같다. 오지랖 넓고 가벼워 보여도 항상 자기 할 일은 잘 챙기는 놈이니까.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는지 짐작이 갔다.
-하상빈은 더 기다려 보라고 얘기했지만 내 의견은 좀 달라. 이대로 종강하고 방학을 하고 나면 접점이 아무것도 없잖아. 그사이에 또 다른 누가 생길지도 모르는 모양이고.
“그래서 요점이 뭐야?”
한 번도 누군가를 걱정해 본 적도, 걱정의 대상이 되어서 연민의 눈길을 받아 본 적도 없는 이헌에게 최근 반년 동안의 일들은 상당히 생소한 감각이었다. 아무래도 친구라는 녀석들에게 연애 고자로 단단히 못 박힌 모양인지 이쪽저쪽에서 훈수 두는 통에 정신이 없다. 거기에 휘말리는 나도 나고. 언제나 모든 것에 무감하게 살 줄 알았지 이런 코미디 같은 일들이 내 주변에 일어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과거의 나에게 돌아가서 말해 준다고 해도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너 다음 주 마지막 강의 때 옷 좀 제대로 입고 와. 그 시커먼 운동복 뒤집어쓰고 저승사자처럼 오지 말고.
“저승사자?”
-그래. 우리가 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진짜 최악이었어.
씨발, 이 자식들이 아주 건수 잡았다고 반년을 우려먹는구나. 우경이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는 거라며, 그간 얼마나 성질 더러워 보이고 할렘에서 뛰쳐나온 갱단같이 보였는지, 지옥에서 올라온 저승사자처럼 보였다는 둥 운동복을 입었다고 운동선수처럼 보였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착각이라며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지껄이기에 네가 내일 저승사자를 만나서 진짜 생을 접고 싶냐고 지껄여 줬더니 금세 조용해진다.
-아무튼 제대로 진짜 정상적인 걸로 입고 와. 내일 당장 고백은 못 해도 번호라도 따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제발 좀 닥쳐.”
-진짜?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어?
조금만 더 하면 신이 나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프로그램이라도 나가자 할 판이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친구인 우경은 한 번도 이헌의 키를 넘어선 적도 없으면서 감정이나 사람과의 관계 같은 사회적인 부분에 있어서 늘 형처럼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쪽 방면에 유독 본인이 특출나서 이헌을 바라볼 때마다 개도해야 할 어린 어떠한 대상으로 여겨진 모양이다.
어릴 때는 귀찮고 건방지다 여겼지만 대체로 우경의 말을 따랐을 때(사실 귀찮아서 그냥 하자는 대로 따라다녔을 뿐, 그렇게 순종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자세는 전혀 아니었다) 일이 수월하게 풀렸던 것도 사실이라 하자고 하는 대로 하는 편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경은 이헌이 은근히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 그런 줄 알게. 다음 주에 보자. 시험 잘 보고.
“그래. 끊는다.”
나름 패션에 일가견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인이 밝은색의 머리카락을 또 살랑살랑 흔들며 이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는, 쪼그려 앉았다, 일어섰다, 멀리 갔다, 가까이 왔다 난리도 아니었다. 이 자식은 일가견이 있다고 자랑하는 분야가 대체 몇 개야? 본인이 극구 박박 우기며 주장하는 연애 고수, 오메가 전문가 등의 실패로 미루어 봤을 때 전혀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자칭 ‘로봇 정이헌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 ‘연애 고자 정이헌 갱생 모임’의 회원 1호를 앞세우며 가르침을 주겠다고 나섰다.
“음…. 이 정도면 괜찮아.”
“그래? 내가 보기엔 완벽한데? 이헌이 원래 군대 가기 전에도 이렇게 입고 다녔잖아. 좀 더 스포티하긴 했어도.”
오늘의 이헌은 검은 코트에 두툼한 겨울 소재의 흰 셔츠와 카멜색의 캐시미어 목도리를 길게 걸친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무난하고 점잖으면서 적당히 신경 쓴 듯한 모습이다.
“아니 조금 장식적인 요소나 스타일리시함이 떨어지는 게 아쉬운데….”
“너처럼 요란하게 만들 일 있냐? 넌 너무 과해!”
우경이 그 말에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너네가 패션을 모르는 거야!”
“놔둬. 쟤 경영대 앞에서 유일하게 스트릿 패션 잡지에 두 번이나 사진 실렸다고 저러는 거야. 근자감이 지나쳐서 제정신 아니니까 상대하지 마.”
상빈이 우경을 보고 상대하지 말라며 영인의 반대편으로 돌려세웠다. 오늘도 이성적으로 돌려 까는 모습이 훌륭하다. 그렇지만 그들의 눈 앞에 멀뚱멀뚱 서 있는 이헌의 정신 상태는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야, 씨. 사람을 지금 길에다 세워 놓고 진짜 작작들 좀….”
이헌이 캠퍼스 한복판에서 이런 꼴을 당한다는 게 수치스럽다는 듯이 어금니를 악물고 짓씹듯이 하는 말에 우경이 말을 막고 나섰다.
“어허! 정이헌이. 오늘은 예쁜 말, 좋은 말, 착한 말만 허용한다.”
“진짜 누굴 애새끼로 알고….”
“워워워!”
이번에는 셋이서 합심해서 그런 얼굴로 욕을 하면 아무리 사제나 신부님처럼 입혀 놔도 다시 악마가 강림한 줄 알 거라며 다들 진지하고 다급하게 말리고 나섰다.
더 이상 이런 수치스러운 꼴을 당할 수 없어서 이헌은 얼른 걸음을 서둘러 멀티미디어 강의동에 도착했다. 종강이자 시험을 보는 날이라 자리가 지정되어 있었다. 경직된 얼굴, 피곤한 얼굴을 한 사람들을 지나쳐서 앞에 고지되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조용히 앉아서 시험 시작을 기다리는데 라영이 들어와서 앉는 모습이 보였다. 이헌과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지만 카메라 줌을 당긴 것처럼 선명히 보였다. 짙은 회색 코트 안에 목 위까지 도톰하게 올라오는 검은 니트를 입고 있었고 그 목선을 따라 시선을 들어 얼굴을 보니 코끝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겨울의 바깥 날씨가 추웠는지, 하얀 얼굴이라 유독 분홍색으로 볼과 코에 홍조를 띠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따뜻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아서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게 해서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입을 벌리고 혀를……. 제길. 나도 갈 데까지 갔구나.
마침 조교가 들어와서 자리를 정리하고 시험지를 배분하는 통에 이헌의 자조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험은 그동안 강의한 이론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뒷받침하는 내용을 서술하는 쪽이어서 어렵지 않게 마무리를 하고 강의실을 먼저 나왔다.
이헌을 첫 번째로 상빈과 우경과 영인도 곧 나왔고, 옆에서 도와주겠다는 녀석들을 발로 차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꺼지라고 윽박지른 뒤 수치스러운 응원을 받으며 강의실 문 앞에서 기다렸다. 시험이라 한쪽 문만 개방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헌은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서서 시계를 들여다봤다.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억겁의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살면서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헌에게 라영이라는 존재는 높은 꼭대기에서 태어나 고고한 지배자로 살던 그의 인생을 뒤집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지킨 채 잘 닦인 길을 걸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사고가 라영을 만나서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자신이 오메가에게 빠져서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초조한 상황이 올 거라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 적이 있었나. 사람은 누구나 갑의 존재에서 을, 병, 정의 존재가 될 수 있고,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대비해야 한다는 우경의 말이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을이 되었다는 생각지도 못한 경험도 라영 때문이라면 순수하게 즐길 수 있었다. 이제 이런 혼자만의 기다림과 초조함도 끝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것도, 누군가와 연애를 생각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이헌은 자신이 있었다. 이제까지 이렇게 자신을 자극하고 심장이 뛰게 하는 존재는 없었으니 가져야만 마땅했다.
그와 함께한다면 앞으로의 계획을 살짝 수정해야겠지만 그런 차선의 플랜을 머릿속에서 계획하는 것도 즐거웠다. 이헌은 오늘부로 라영과 자신이 서로만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고 미래를 함께하려면 어떻게 계획을 수정할지를 당연하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이미 고백이 성공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지극히 우월한 개체와 지배자로 살아온 우성 알파의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이헌은 자신의 그런 모습조차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이가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매우 바쁜지 피곤한 얼굴로 주변 사람에 관심조차 갖지 않고, 팔에는 알 수 없는 책들을 가득 안고 이헌을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이봐…!”
너무 빠르게 지나가려고 해서 이헌은 저도 모르게 라영의 손목을 잡으며 의도치 않은 말로 라영을 불렀다.
라영은 매우 불쾌한 얼굴로 잡힌 손목을 가장 먼저 바라보고, 그 이후에는 이헌의 얼굴과 손목을 다시 번갈아 쳐다보며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망했다…. 이헌은 속으로 탄식하며 자기도 모르게 잡은 손을 놓았다.
“미안. 이러려던 게 아니라….”
“다짜고짜 반말인가요?”
라영은 이헌의 말을 듣더니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제야 아차 했다. 자신은 라영의 이름과 나이와 학과까지 전부 알고 있지만 앞에 선 이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다짜고짜 손목부터 잡고 반말로 말을 거니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신의 실책이다.
“미안합니다. 나는 방금 같은 수업을 들었던 경영학과 4학….”
“됐어요. 관심 없어요.”
댕강.
라영은 이헌의 말을 무처럼 뚝 잘라 버리고 지겹다는 듯한 표정을 하면서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려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잠깐 내 말 좀 들….”
댕강.
“이보세요. 당신 우성 알파 맞죠?”
두 번째로 무가 잘려 나가고, 라영이 이번에는 고개가 아니라 몸 전체를 돌려 그를 똑바로 보고 서서 손가락으로 이헌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기민한 기운으로 우성 알파임을 자연스럽게 알아챘는지 눈빛에 경멸이 서렸다. 그러더니 이헌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성 알파한테는 더!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가세요. 다시는 말 걸지도 말고. 안녕히 가세요.”
눈을 똑바로 보며 단호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다시 걸음을 돌려 사라졌다. 심지어 다시 마주칠까 걱정하는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도 않고 계단을 통해서 빠르게 사라졌다.
그가 가 버렸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헌은 라영의 앞에서 단 네 마디밖에 말하지 못했다.
아니, 그 말도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씨발, 이 무슨 좆같은 경우가…….
어처구니도 없고 화도 나고 당황스럽기도 한데, 머리가 망치를 맞은 듯 비어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지금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더니, 저 멀리 벽의 코너 뒤에 숨어서 온통 당황한 얼굴로 입에 주먹을 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커먼 알파 새끼 세 명……. 저 씨발 새끼들은 엿보지 말고 어디 안 보이는 데 꺼져 있으라고 했더니…. 좆같은 새끼들. 누구 맘대로 엿보고 지랄이야. 씨발, 오늘 다 죽었어.
이헌의 분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세 친구를 향했고 멀티미디어 강의동에서는 난데없는 추격전이 벌어졌는데, 그걸 목격한 사람들의 에타 게시물에 의하면 ‘학교에서 GTA[4]를 볼 줄은 몰랐어요.’, ‘진짜 살인 나는 줄 알고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고민했다.’, ‘도망치는 사람들 얼굴에서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듯한 표정을 보았다.’, ‘대체 누가 학교에 맹수를 풀어 놓았는지 학교는 등록금만 받아 처먹고 대체 뭘 하고 있냐.’ 등 다양했다.
* 록스타 게임사의 메가 히트 게임 시리즈. 폭력 게임의 대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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