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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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알겠습니다. 가족들과 좋은 시간 보내요. 다만 당신이 없어서 좀 쓸쓸합니다.]

이제 말은 조금씩 많이 편해졌지만 여전히 톡은 정중하고 예의가 넘쳐서 당장 부장님께 보내도 될 정도였다. 물론 내용은 부장님께 보내기 부적절하지만.

머리가 복잡해서 이제는 뻘 생각만 잔뜩 이어졌다.

연달아 터진 폭탄을 두 개 맞고 친구들과 헤어진 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이헌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 결혼식 전에 부모님 집에서 하루 자고 싶다고 둘러대고는 오피스텔로 돌아와서 멍하니 누워 있는 라영이었다. 손에는 여전히 핸드폰 화면이 깜깜한 와중에 파랗게 빛을 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잠겨서 답장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문자를 들여다보는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딱 앉혀 놓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하나? 만약 그렇게 한다면 도대체 뭐라고 물어봐야 하는 거지?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만난 적이 있어? 그때 나를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왜 아는 척을 안 했어? 우리가 만난 건 정말 우연 맞지? 나를 속인 거야? 만약 속였다면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도대체 어떤 부분을 뭘 어떻게 속인 거야?

목적도, 왜 그런 것인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몰라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묻고 풀어 나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사기와 기만극의 피해자가 된 기분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사실은 뭔가 이상한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 도대체 어떤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감이 안 잡힌다. 복잡한 머릿속을 안고 누워 있는데 잠도 오지 않아서 라영은 그저 멍하니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했다.

만약 이헌이 뭔가를 나에게 속이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과연 나는 어떡해야 할까? 속였다는 그 사실의 크기 여부에 대해서 태도를 달리해야 할까? 그냥 단순히 ‘예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고 우연히 매칭에서 만날 수 있었어.’라는 진실만 있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 낙관적인 걸까? 그 정도라면 말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괜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혹시 찔리는 게 있었던 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런 귀여운 종류의 기만이 아니면 어떡하지…?

만약 그가 숨기고 있는 부분이 내 생각보다 거대하다면 나는 과연 앞으로 이 관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뭔가 엄청난 진실이 숨겨져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엄청나게 더러운 진실을 알게 됐다고 했을 때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질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얼마 뒤에 결혼식을 바로 앞두고 있는데, 혹시 사기꾼이거나 하면 헤어져야 하나? 그런데 과연 내가 이 사람과 헤어질 수 있을까?

라영은 하얀 벽지에 음각으로만 새겨진 기하학적이고 세밀한 무늬를 눈으로 좇으며 생각의 늪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이헌과의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첫눈에 반하고 그의 태도에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된, 결코 길지 않은 시간들을 시간 순으로 되뇌어 보며 이 마음의 농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자신의 마음의 농도는 정말 가벼움이라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타르처럼 끈적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유혹하고 임신까지 했지…. 동료인 경현의 말처럼 아무리 푹 빠졌어도 늘 침착하게 마음을 누르며 사람을 더 오래 보고 결정했어야 했을까…? 이미 지나간 일까지 더듬으며 라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지만 그도 나도 그게 가능했을까? 서로 이렇게나 좋아하고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 할 때도 항상 그 사람 생각이 나고, 모든 결과는 그 사람으로 귀결되는데…. 이미 진행은 너무 빨랐고, 후회해 봤자 늦었다.

라영은 가만히 오른손으로 배를 더듬어 살살 둥글게 문질렀다.

이제는 우리 둘만의 이야기도 아니잖아. 한 사람이 더 있잖아.

그렇게 온갖 생각을 하며 누워 있는데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도대체 왜 피하고 와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지? 무척 놀라고 당황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이렇게 혼자 누워서 고민하는 건 나답지 않아. 역시 직접 얼굴을 보고 물어봐야겠다.

라영은 결심을 굳히자마자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이불을 젖히고 번쩍 일어났다. 누워 있던 자리를 정리할 새도 없이 바로 옷장을 열고 겉옷을 챙겨 입었다.

갑자기 만나서 얼굴을 보고 제대로 얘기해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 운전을 할 정신이 없어서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스스로 임산부라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홈웨어에 코트만 걸치고 나왔더니 부는 바람에 드러난 발목이 시렸다. 마음이 어수선해서 그런지 어쩐지 더 스산하다.

밤이 늦은 시간이라 한산한 도로를 달리는데 불안한 마음을 말해 주듯이 길지 않는 거리인데도 길게 느껴진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초겨울의 황량한 가로수와 도시의 외로운 불빛을 눈에 담으며 지금 집에 홀로 있을 이헌의 모습을 그려 봤다.

나의 마음을 떠나서 이 사람의 태도는 이제까지 진실이었을까? 라영은 이제는 자신이 아닌 이헌이 어땠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과 얼굴…. 서로 점점 더 알아가면서 대화에서 나오는 생각과 종종 나오는 날 것의 진심들……. 손을 잡았을 때에 전해지는 따뜻함, 마주 보는 눈에서 느껴지는 애정과 굄, 라영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한 웃음, 귀찮을 텐데도 늘 그런 기색 없이 노력해 주는 바지런한 모습들…….

아무리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해 봐도 도대체 그 눈빛과 말과 행동은 진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람이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매 순간 그렇게 사랑을 억지로 그려낼 수 있다는 말인가. 기만으로 시작한 관계라고 해도 이 관계에 사랑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역시 집을 나서길 잘했어. 혼자 계속 고민하느니 직접 부딪쳐야 한다.

라영은 카드로 요금을 계산하고 서둘러 택시 문을 닫고 공동 현관 앞에 내렸다. 마침 들어가는 사람이 있어서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고 함께 입구를 통과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올라가는 모습이 심박수가 올라가는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띵.

끝없이 올라갈 것만 같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라영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막상 함께 지내던 곳의 문 앞에 서니 마음이 냉정해지면서 조금은 차분해졌다.

심호흡을 하고서 문고리를 잡아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집 안에는 어둠과 적막이 가득하다. 라영이 이 집에 함께 존재했을 때와는 달리 모든 조명이 다 꺼져 있고 난방도 따뜻하지가 않았다. 바깥 공기와 별다르지 않은 싸늘한 공기 안을 천천히 뚫고 들어갔다.

차가운 실내 기온을 몸으로 느끼다 보니 평소에 얼마나 이헌이 라영의 컨디션에 신경을 써 주고 있었던 건지 알 것만 같아서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지……. 모든지 자신의 기준에 맞춰 주는 사람이었다. 하나하나 사소하게 말하지 않아도 세심하게 알아서 배려해 주는 사람이었다.

익숙한 공간이 깜깜한 가운데 오로지 한 방에서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곳은 이헌이 집에서 일을 하던 책상이 있는 서재 공간이었다. 라영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한 뼘쯤 열린 방문 틈에서는 직선의 빛이 새어 나옴과 동시에 분주한 움직임, 타닥타닥 거리는 급한 키보드 소리와 누군가와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바쁘다’는 것을 귀로 들리는 것으로 표현한 모든 소리가 거기서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DRAM 사업이 아무리 사양길이라지만 아직은 아니야. 최근에 계속 거기서 클라우드 서비스 오픈한다고 소식이 들려오는데, 무조건 우리가 들어가야 해. AI 반도체로 제트라랑 한 번 성공시킨 걸로는 절대 자리 유지할 수 없어. 최근에 국내 전기차 산업에 대해 세부 시장 조사 맡긴 거는 마무리되었나?”

-네, 전무님. 당장 보고 올릴 수 있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출근하시기만 하면 김 실장님이 국내에서 주력팀으로 짜 둔 사람들과 함께 바로 프로젝트 진행하시면 됩니다. 출근은 언제부터 하실 예정이십니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아직은 방심할 수가 없어.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이야. 일단 결혼식 올리고 난 뒤에 출근하는 걸로 하지. 미안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수고 좀 해 줘.”

-미안하다는 말씀도 하시고 그분 덕에 많이 바뀌셨습니다. 근데 그분께는 대체 언제 밝히실 예정이신지….

“내 배우자가 내막에 대해서 알 필요는 없지. 불안정하고, 불필요할 뿐이야.”

이헌은 자신의 기만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라영은 자기도 모르게 쾅 하고 급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상자이며 당사자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나간 것이다.

“그렇지?! 역시 나한테 속이는 게 있지! 이헌 씨, 지금 나 기만하고 있는 거지?!”

“라영아…!”

네모난 문 앞에서 라영이 호흡을 가쁘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가슴을 들썩이고 있었다. 이 숨 가쁨이 체력적인 이유가 아니라 감정적인 이유라는 것은 그 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 모두가 알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무작정 따지는 말에 이헌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듯이 몸을 굳히고 서서 그저 라영의 이름만 읊조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멍청한 모습이 화가 난 마음에 더 불을 질렀다. 지금 현장에서 들켜 놓고 모르는 척하는 거야? 라영은 서재 안으로 발을 더 내디디며 더욱 당당하게 소리를 질렀다.

“나 지금 통화하는 거 다 들었어! 당신 대체 나한테 속이는 게 뭐야? 내가 여기서만 들은 게 아니야!”

얼음처럼 굳어서 놀랐던 것도 잠시, 이헌은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벌떡 일어나서 달려왔다.

“라영아, 그게 아닙니다. 내 말을 좀 들어….”

탁!

어깨를 잡으려던 건지 손을 잡으려던 건지 망설임 없이 뻗어 오는 손을 라영이 내리치며 거리를 조금 띄웠다. 저도 모르게 나온 약간의 방어기제였다.

“듣긴 뭘 들어!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진짜 손도 대지 마!”

“당신 지금 너무 흥분했습니다. 잠깐 흥분 좀 가라앉히고…….”

다가오지 말라는 말에 이헌이 차마 라영의 몸에 손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쩔쩔맸다. 그 모습에 라영은 더 화가 났다. 이렇게 쩔쩔맬 거면 처음부터 속이지를 말았어야지. 뻔뻔하지도 못한 새끼.

“이 나쁜 놈아! 사기 쳐서 사람 만나고 계속 속이니까 기분이 좋냐?! 응?”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헌이 자기를 속였고, 그 거짓 기반 속에 관계가 이렇게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눈물이 나왔다. 안 그래도 모르는 이야기들로 잔뜩 마음이 휘저어져 있는데, 해명을 듣자고 급하게 찾아온 자리에서 범인을 발견했으니 이걸 마침 잘 걸렸다고 해야 할지 운이 더럽게 나쁘다고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물리적으로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첫눈에 반해 온 마음을 다 주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라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드디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온 마음을 다 주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눈물은 나오는데 쩔쩔매고 당황하는 얼굴을 보자 짜증이 나고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본인도 모르는 새 순간적으로 몸이 가까이 가고 주먹이 나갔다.

퍽.

자기가 때리고 나서 놀랐던 것도 잠시. 한 대 때리고 나니 이제는 쉬워졌다는 듯이 손이 절로 나갔다.

“이…! 사람을 지금! 임신까지 시켜 놓고…!”

사랑에 완전히 빠졌고 이 관계에 확신이 있다고 믿어서 임신시켜 달라고 유혹했던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이헌을 밀치고 주먹으로 때리는데, 이헌은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맞고만 있다.

얼마든지 자신을 제압할 수도 있고, 충분히 방어할 수도 있고, 자리를 피할 수도 있는 사람이 오히려 자신을 때리는, 하지만 사랑하는 라영이 다치지 않게 그 몸을 살피기까지 하며.

지금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아니면 정말 할 말이 없는 죄인이라서 이런 건가?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혀서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임신한 몸이어서 그런 건지 또는 너무 흥분을 해서 그런 건지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에 몸이 휘청거리는 것 같아서 라영은 때리던 손을 내리고 뒤에 있던 작은 일인용 소파에 주저앉았다. 어지러움과 동시에 갑자기 급격하게 피곤이 몰려왔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우리가 왜 대체 이렇게 된 거지……?

사건의 내막을 더 자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임신 탓에 평소의 몇십 배나 치솟은 호르몬으로 인해 기분이 무척이나 불안정했던 라영은 격해진 감정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라영은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헌이 차마 경고 때문에 손은 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당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급격히 몰려 들어온 알 수 없는 서러움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무너진 라영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다.

이헌은 라영의 그런 모습을 보자 마음이 찢어진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살며시 앉았다.

“제발…. 제발 라영 씨. 제 말을 좀 들어 주십시오. 내가 다. 제발…….”

라영은 대답하지 않고 흐느꼈다. 서러운 감정이 몰려온 데다 기운도 빠져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캄캄한 밤하늘은 자비로운 태양처럼 시간의 흐름도 알려 주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던 걸까.

울음과 함께 적막이 조금 흐른 뒤, 라영이 시간의 힘을 빌려 마음을 조금 진정시켰다. 적막 속에서 홀로 울 만큼 울다 보니 마음의 해갈은 조금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눈물을 닦아 고개를 들려고 하는데 순간 발에 따뜻한 기운이 닿았다.

눈물진 눈을 떠 가만히 발을 바라보니,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이헌이 그 큰 몸 전부를 기울여서 라영의 발을 두 손으로 깃털처럼 조심스레 모아 잡고 발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따뜻하고 축축한 물방울이 하나둘 발등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니 그도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라영의 눈물을 이헌이 이어받은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은 마치 눈물로 발을 적셔 머리카락으로 그리스도의 발을 닦아 냈다고 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낸 성서의 어느 한 구절 같아서 한없이 경건하고 안타까웠다. 용서를 비는 말을 들어 주지 않아서 사랑하는 이에게 온몸으로 애타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마음이 한없이 약해지는 광경이었다.

그걸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서 조금 마음을 진정시킨 라영은 울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떨리는 목소리로 드디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봐요.”

해명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그 언어에는 너를 용서할지도 모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 말에 눈앞에 엎드린 알파가 조용히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라영 씨가 들어만 준다면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울지 말아요.”

막상 소리 없이 단정하면서 처연하게 울고 있던 사람이 울지 말라고 하는 말에 다시 뾰족한 마음이 삐쭉 솟았다.

“네, 그러니까 지금 들어본다잖아요.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말해요.”

또 심술이 올라올 것 같아서 이헌을 다그쳤다.

“내가 전에…. 라영 씨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 적이 있었죠? 기억합니까?”

이헌은 무릎 꿇고 엎드린 몸의 상체를 곧게 세우며 목을 가다듬고는 명확한 발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응. 기억나네요.”

“내가 당신을 처음 본 건….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입니다.”

그러면서 이헌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 *

군대에서 제대한 이헌은 쉬지 않고 바로 학교에 복학했다.

그때는 가을 학기의 시작이었어서 졸업을 1년 남긴 시점에 복학하기는 애매하다고 다들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그다음 해에 미국에서 석사를 시작하려고 계획 중이던 이헌에게는 쉬는 시간을 만들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는 최선의 플랜이었다.

감정보다는 성과와 계산을 중시하는 냉담한 가족들 사이에서 자라 뭐든 무감하고 냉정했던 당시의 이헌은 그저 매일매일 해야 할 일들을 수행하며 기계적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성격대로 친목이나 주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교양 수업에서 라영을 처음으로 마주쳤다. 누가 봐도 매력적인 우성 오메가의 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는데, 한 번도 누군가와 깊게 관계를 가지고 연애를 해 보지 않았고, 또한 그러한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눈으로만 쫓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에 들어가서 뒤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그 하얀 얼굴 위로 쏟아지는 살짝 웨이브가 있는 까만 머리카락과 빨간 입술 그리고 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큰 눈망울 위로 까만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이며 광대 위로 그림자 지는 모습을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이라영이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을 때는 이미 라영은 만나는 사람이 있던 참이었다.

그런 마음이 생긴 것도 생소한데 누군가에게서 빼앗고 마음을 고백할 수는 없어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어느 날.

가을 학술제가 열리고 유명한 동문 졸업생의 강연에 참여하고 있던 이헌은 라영이 조금은 곤란한 모습으로 애인에게 손을 붙잡혀 화장실로 끌려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쩐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어서 둘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나쁜 예감을 적중시키듯 화장실 칸 안에서 오메가인 상대방의 성 충동을 일으키고 굴복시키려는 짙은 알파 페로몬이 퍼졌고 동시에 라영의 반항하는 듯한 소리가 나자 화장실 문을 쳐서 그 행동을 제지하려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 들어가 알파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연인 사이의 일에 혹시라도 곤란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고는 당황할까 싶어 옆 칸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데, 잔뜩 페로몬 샤워를 당한 채 몸을 비틀거리며 비어 있는 강의실로 찾아 들어가는 라영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알파에게 피해를 입은 오메가에게 알파가 다가가면 더 위협이 될 것 같았다. 친구에게 억제제를 부탁해서 라영이 엎드려 있는 근처 책상 위에 생수와 함께 살며시 올려 두었다. 혹시라도 지나가는 다른 알파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봐 문밖에서 몸을 숨기고 지켜봐 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억제제를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다음 주 수업 때 몸이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숨기려는 듯 우성 알파와 재벌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쏟아내고 있는 라영을 발견하고는 더더욱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이 이어지고, 어느 날 우연히 오메가 센터 전문 병원에 들락날락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혹시라도 무슨 큰 문제가 생겼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밤에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그때 생애 최초로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 이제까지 욕망이 거세된 채로 살아왔던 터라 무언가를 하겠다는 거센 욕망도, 어기겠다는 욕망도 없는 인생이었는데, 라영을 만나고는 넘치는 욕망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 마침 형질자 센터 연구원으로 있던 지인에게 우연히 라영의 사정에 대해 듣고 말았다.

지인은 라영이 페로몬 샤워 사고로 인해 페로몬이 치솟고, 사이클이 엉키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간단하게 설명했고, 약물과 알파의 페로몬으로 중화 치료를 할 거라는 말에 자신의 혈액과 페로몬을 뽑아서 기증했다. 제발 꼭 이걸 사용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짝사랑이었지만 마음이 이미 너무 커진 이헌은 다른 알파의 페로몬이 라영의 몸에 스며든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두 가지의 소심하고 옳지 못한 행위를 마무리 지었다.

한 번도 살갑고 다정하게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고, 머저리처럼 처음 빠진 사랑은 내내 너무 어렵기만 했다. 안 그래도 받은 상처가 클 텐데,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의 알파가 혼자서 이렇게 일방적인 마음을 키워 나가고 있는 게 얼마나 끔찍할까 싶어서 더더욱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종강이 다가왔고, 라영이 곧장 어학연수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확한 행동력에 늘 공감하지 못하고 비웃던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머리를 때렸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의역으로 유명한 이 말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멍청한 새끼. 스스로를 자조했다. 그렇게 좋아하고 그렇게 몰래 노력해 왔는데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해외로 떠나기까지 한 사람의 뒤를 쫓는다면 그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 것 같아서 마음을 접고 더 이상 소식조차 찾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이헌도 계획했던 것처럼 반년 뒤에 졸업을 하고 유학을 떠났다.

떠나서 공부를 하고 미국 지사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 매일 열심히 일을 했다.

하지만 잠깐씩 쉴 때면 라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우성 알파가 싫다고, 재벌들의 제멋대로인 행동과 오만함에 너무 크게 데었다고 말하는 라영의 모습이 떠올라서 스스로가 변하고 싶었다. 자신도 아마 누가 봐도 거만하고 오만한 재벌 알파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다시 만난다면 이번에는 너에게 자신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렇게 성과를 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우연히 그때 그 센터의 지인을 통해 라영이 매칭 서비스를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매칭 센터에 자신의 프로필을 급히 건네고 매칭 상대로 만날 수 있게 한 뒤였다.

이번에는 정말 너를 정식으로 만날 수 있기를.

이번에는 너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사랑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이번에는…. 너도 나를 사랑할 수 있기를.

.

.

.

그렇게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내려간 이헌의 이야기는 마무리를 맺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설명을 해 주려는 듯 담담하게 설명하는 이야기와는 반대로 거기에 담긴 마음은 가슴이 저리게 애절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화나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헌 씨가… 그날 나를 도와줬던 사람이라고?”

말도 안 돼. 라영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살면서 유일하게 궁금했던 사람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나를 도와준 낯선 타인. 그리고 그 타인에게 받은 크고 따뜻한 친절. 그 우연한 친절 덕분에 자신도 그렇게 일면식도 없고 모르는 타인에게도 더더욱 친절을 베풀면서, 자신이 받은 고마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살지 않았나…?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니……?

“네. 진리관 4층 소강당. 그리고 거기 복도 중앙에 위치해 있던 남자 화장실 마지막 칸. 그리고 사과할 게 있습니다. 그때 제가 라영 씨 앞에 몰래 두었던 억제제…. 그게 라영 씨랑 맞는 게 아니어서 이후에 페로몬 장애를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헌은 자신이 정말로 그 사람이 맞다고 해명하듯이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라영은 그저 얼떨떨했다.

“칸까지 기억해요? 하…. 지금 다 지난 일을 사과 받겠다는 게 아니라요.”

“…….”

이헌은 오로지 아는 것이라고는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 없는 사람 같았다.

“아니, 사과하지 마요. 그날 그 자식한테 거기서 당했거나 억제제가 없어서 뭔 일이 터졌거나 구급차를 불러서 집에 갔으면 더 쪽팔렸을 것 같으니까.”

지금 내가 할 말은 그게 아니란 말이야. 요점을 벗어나서 더욱 비굴하게 사과까지 하다니. 라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진실은 전혀 추악하지 않았지만 그 힘이 거대해서 라영의 머리를 세게 강타한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혼란스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사과하지 말라니까…. 나를 만나기 위해서 이런 걸 다 숨겨 왔다고…. 이게 말이 되나요?”

라영이 뭔가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려 거듭 물었다. 진실을 알게 된 충격과 별개로 아무리 생각해도 느껴지는 크나큰 배신감에 대한 해명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래서 모든 걸 다 숨기고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나를 만난 게. 그게 당신이 진짜로 숨겨 왔던 거 맞아요?”

좀 더 거대하고 은밀하고 더러운 비밀이 감춰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영은 막상 이야기들의 인과관계를 다 연결 짓고 나자 조금 힘이 빠졌다.

라영은 일단 자신이 알게 된, 이헌이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라는 진실은 머리 한쪽에 제쳐 두고 그쪽 문은 닫았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자신을 속였다는 부분에 있어서, 더 엄청나고 커다란 일이 있는 줄 알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어마어마하게 지저분한 일들이 숨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듣고 난 해명과 스토리는 순정적이고 절절한 데다가 조금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이런 일에 그렇게 난장을 피웠다니……. 찌질한 순정남을 더러운 배신자로 오해해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상모까지 신나게 돌린 놀이판이었다. 아무리 임산부 호르몬 탓이라지만 무척이나 민망해졌다.

“아니,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렇게까지 해서….”

라영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말에 이헌은 자조하듯 웃고 고개를 저으며 라영의 말을 부정했다.

“당신은 몰라요. 당신이란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어떻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고 느리게 라영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다시 고개를 내리고 무릎께에 머리를 깊이 숙였다.

이제는 다가오는 감촉이 아까와 같이 예민하고 진절머리 나지 않고 따뜻했다. 마치 녹아내린 마음의 온도를 반영하는 것 같았다.

고개 숙인 참회자에게서 나지막이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을 속여서 미안합니다. 이 모든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까 봐 너무 겁이 났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평생 속이고 싶었어.”

“네…?”

“나 자신이 원래 당신이 사랑할 만한…, 그런 당당한 사람일 수 있도록. 이렇게 태어나서 이런 내가… 원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인 양 당신의 눈을 가리고 싶었어요.”

흐느끼는 목소리로 하는 고해성사가 이어졌다.

항상 당신은 나에게 바위처럼 단단한 사람이었는데…….

“일단 지금은 혼란스러워서 당신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어요.”

라영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절절한 내막과 설명을 들었지만 아직 온전하게 이해가 가지도 않았고, 깊은 생각을 할 시간도 가지지 못했기에 무릎 꿇은 이의 해명을 멈추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감정을 빼고 싶었다.

라영의 건조한 목소리에 이헌은 절망스러운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게 진실입니다. 당시에 그런 내 모습을 전부 본 내 친구들이 증언을 해 줄 겁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하며 허겁지겁 핸드폰을 찾아서 주소록을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라영은 기겁을 하며 손에 쥔 핸드폰을 낚아챘다. 누군가 이런 사적인 연인의 싸움에 끼어들고 말을 얹게 될 거라는 상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민망함이 몰려온다.

“아니, 내 말은 그런 증인이나 증거를 원하는 게 아니라요…! 알았어요! 믿을게. 믿을 테니까 그만하고. 내 말은 그런 식으로 무너진 신뢰가 바로 회복된다는 게 아니라는 거야.”

한숨을 푹 쉬고 눈앞의 애처로운 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게 거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만 해요.”

용서는 했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더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번 일만 해도 라영이 뛰어 들어오기 전까지 이 사람은 끝까지 들키지 않고 절대 숨기려던 사람이 아닌가. 들키지만 않았으면 뻔뻔스럽게 계속해서 숨겨 왔을 것이다. 그게 더 이 사랑을 단단하게 해 준다고 착각하고 있었겠지.

미래에 대한 제약과 약속이라는 장치가 필요했다.

“대신 앞으로는 정말 이 일 말고는 숨기는 거 없는 거예요. 알았죠?”

너무 쉽게 용서하나 싶었지만, 듣고 보니 걱정했던 거보다 별일 아니었고, 속이기는 했어도 오히려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항상 궁금해했던 ‘그 사람’이라는 사실도 라영의 마음을 눅진하게 녹이는 데 한몫을 했다. 어떻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도 내가 냉정할 수 있을까.

라영의 당부에 이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다시는 당신에게 숨기는 게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약속이에요. 다시는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는 거예요. 신뢰가 깨진다면 우리 관계도 깨진다고 생각해요.”

재차 다짐시키는 그 말에 이헌은 목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금의 텀을 둔 뒤에 결심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 모든 재산 내역이나 신상에 관한 상세한 자료들에 대해서도 며칠 내로 정리해서 다 공유하도록 할게요. 내 모든 걸 당신에게 다 보여 줄 수 있어.”

어렵게 재입사한 신입사원처럼 잔뜩 결의에 찬 모습이다.

“아니, 난 당신 면접관이 아닌데…. 보여 준다면 사양하지는 않겠지만….”

“그럼 용서해 주는 겁니까?”

라영의 말 한마디에 구원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눈치를 보는 모습이 더 짠하다.

고해자의 촉촉한 눈동자에는 온도가 있어서 마음의 결빙을 녹였다. 라영은 두 팔을 낮게 뻗으며 대답했다.

“일어나서 날 안아 줘요.”

그 말 속에서 용서의 관용을 발견해 낸 이헌이 몸을 번쩍 일으켜 라영의 몸이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았다. 구원의 기쁨과 애정을 가득 몸에 실어 전달하며 사랑하는 이에게 표현했다.

“다시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사랑해, 라영아.”

애절한 목소리에 라영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잔뜩 떨고 있는 등에 손을 올려 마주 안아 주었다. 두 손에 용서를 가득 담아서.

이제 당신에게 남은 죄악은 없다는 듯이 죄를 사하는 성결한 몸짓이었다.

남들은 신에게서나 찾는 용서와 구원이 한낱 인간인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더없이 숭고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만이 아닌 앞으로의 모든 시간에 당신이 나의 신이며, 내가 당신의 영원한 종이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복종을 맹세하는 사제 같은 종의 마음에서는 조그마한 다른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용서를 담아 안아 온 라영은 마냥 오해의 해소에 대한 편안함에 빠져 있었다.

안겨 온 그 몸의 떨림이 상처 입은 짐승이 아닌, 마침내 마지막 조각을 완성해서 보물을 소유하게 된 보물 사냥꾼의 탐욕의 떨림인 줄은 차마 꿈에도 모른 채.

* * *

-라영 씨, 그때 말한 거 알아봤어요. 담당자를 추궁해 보니까 별일 아니긴 한데. 아니, 당사자에게는 별일인가? 라영 씨 결혼하는 상대 알파가 라영 씨를 어디서 알았는지 소개받고 싶어서 매칭에 급하게 자료를 넘겼다고 하더라고요. 매칭 담당자도 두 사람 데이터가 나무랄 데가 없으니까, 오히려 자기가 갖고 있던 다른 대상자들보다는 더 적합하다고 여겼는지 매칭을 바로 연결해 줬나 봐요. 어쨌든 재벌이라 누락되어 있던 거지 센터 대상자인 건 맞으니까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여겼나 봐. 뭐 편법이긴 한데 불법은 아니니까요. 둘이 오해 없게 잘 얘기해 봐요. 그럼 남은 결혼 준비 잘 하고 결혼식 때 봐요!

지은은 업무가 바쁜지 알게 된 사실을 급하게 쏟아내고, 라영은 그저 ‘네네’ 대답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 말을 듣는데 드는 생각은 다른 게 아니라 안도감이었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구나. 우리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나는 이 사람을 잃지 않아도 괜찮은 거구나.

그날은 분위기와 감정에 취해서 쉽게 용서를 해 놓고는, 아침 해와 함께 명확한 이성이 돌아오고 나자 많은 생각이 들었다. 흐릿하지만 마음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던 의심의 불씨를 발견하고 찜찜해하던 와중에 듣게 된 시원한 설명이었다.

말하는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입에서 나온 이헌의 해명의 뒷받침이 되는 설명은 라영의 마음에 남아 있던 한 줌의 의심마저 지워 주었다.

다행이다…. 모든 의심의 싹이 사라진 곳에는 편안한 안도감만이 남았다.

라영이 이번 일을 통해서 느낀 건 자신이 얼마나 이헌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전에도 이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닥쳐온 위기를 어떻게든 좋게 넘겨서라도 이 인연을 절대 끊을 수 없기를 원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나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크기가 더 거대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그의 수단이 조금 인위적이었으면 어떠한가. 파헤쳐지고 드러난 진실이 조금 어둡기는 했지만 그렇게 음침하고 비참하더라도 자신을 계속해서 사랑해 왔다는 이헌의 조금은 끈적한 마음이 라영을 몹시 흡족하게 했다.

그래. 조금 순수하지 않으면 어때. 그만큼 나를 깊게 사랑한다는 건데.

이 세상 어느 사랑이 마냥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만 있겠어. 그건 부모 자식 간이나 친구 사이에서나 있는 일이다.

페로몬의 본능으로 깊게 엮인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은 베타의 사랑보다 더 점도가 높기 마련이었다.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며 마음에 안도감을 다졌다.

그리고 이헌이 그 옛날 자신을 도와주었던 그 사람이라는 것도 결정적이었다. 유일하게 기억하고 종종 떠올렸던 사람…….

우연적이고 동화 같은 연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사실에서 운명을 느꼈다.

“이헌 씨, 준비 다 됐어?”

“네. 늦어서 미안합니다. 타이만 매면 돼요.”

이헌이 어깨에 타이를 걸친 채 시계를 손목에 차며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

전에는 텅텅 빈 채 이헌의 옷 몇 가지만 걸려 있던 곳이 이제는 라영의 옷과 자연스러운 페로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관계의 진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연신 사과를 하는 애인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회의 시간이 그때 잡힌 걸 어떡하겠어. 해외에서 걸린 영상 통화라면서. 타이 이리 줘 봐요.”

라영이 자연스럽게 이헌의 타이를 받아 들고 고개 숙인 남자의 목에 걸어 능숙하게 매 주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 어릴 때 엄마가 보는 패션 잡지를 같이 보는데요, 거기 나온 슈트 입은 남자들이 너무 멋있는 거야. 특히 타이를 정갈하게 매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좋았어요. 그래서 넥타이를 맬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얼마나 연습했나 몰라요. 교복 타이도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어. 다들 교문 지나고는 불편하다고 홀랑 빼고 다녔는데.”

아직도 자신은 타이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과거의 이야기를 재잘거리며 라영은 매듭을 예쁘게 잡아서 마무리했다. 양쪽의 균형을 맞추고 길이를 조절하며 조심스럽게 오늘 일정에 대해 숙지해야 할 것이 있는지 물었다. 늦어도 너무 늦은 정보 수집이었지만, 얼마 전까지 도저히 제정신이었어야 말이지.

“오늘 내가 뭐 주의해야 할 거 있어요?”

오늘은 라영과 이헌의 늦은 상견례였다. 이미 모든 게 다 결정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서로의 가족들과의 만나는 형식적인 자리였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막상 시간이 다가오자 이헌의 가족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긴장이 되던 터였다.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어요.”

그런 마음을 안다는 듯이 알파가 긴장을 풀 수 있게 기분 좋은 페로몬으로 감싸며 오메가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내 가족들 모두 골치 아픈 막내를 데려가 주는 당신께 감사할 거예요.”

라영은 자조적인 말을 유머랍시고 내뱉는 이헌을 짠하게 바라보며 구부리고 있느라 낮아진 얼굴에 쪽 입을 맞춰 주었다. 이 불쌍한 사람을 정말 어쩌면 좋아. 내가 꼭 끼고 데리고 사는 수밖에.

“차를 스스로 운전하고 다니니?”

미리 도착해 있던 이헌의 누나가 그 말을 한 걸 제외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고 생각보다 평화로운 상견례였다. 물론 예상했듯이 무뚝뚝해 보이는 이헌의 가족 성격상 편안하거나 살가운 말들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서로 예의를 차린 격식 있는 자리였다.

고급스럽고 프라이빗한 한정식에서는 시간에 맞춰 정갈하게 음식이 나왔고, 이헌은 라영이 먹는 것에 살뜰히 신경을 썼다. 혹시 탈이 날지 모를 날 것 종류의 음식을 치워 주고 연신 바쁘게 먹기 쉬운 음식들을 주변에 배치해 줬다.

그 모습을 보던 라영의 부모는 신랑이 참 다정하다며 이헌을 칭찬했다.

“저희 애를 얼마나 신경 써 주는지 몰라요. 이렇게 정 많게 잘 키운 아들이 저희 식구가 된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라영의 아버지가 건넨 말에 이헌의 식구들은 과묵하게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오로지 그의 어머니만 뒤늦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식사와 후식을 마무리하고 서로가 떠나는 자리에서 라영의 부모님과 동생이 제일 먼저 떠나고 이헌의 부모님 차가 나왔다.

이헌의 어머니는 차에 타기 직전에 라영의 등을 친근하게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지금 아이가 몇 주 됐다고 했죠?”

“어머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기는 9주 좀 넘었습니다.”

이헌의 어머니답게 살가운 말에 라영도 살갑게 대꾸했다.

“그래. 우리 이제 식구가 됐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편하게 말하렴. 무슨 일이든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전화해도 좋단다. 날도 추운데 항상 따뜻하게 입고.”

연신 미소를 지은 채 밤바람이 들어간다며 라영의 코트 자락을 더 단단히 여며 주었다. 이헌 씨가 다정한 건 어머니한테 배웠나 봐. 어머니는 라영이 그들의 식구가 되어서 기쁘고, 태어날 아기도 몹시 기대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을 조곤조곤 건네며 라영의 주머니에 자신의 명함을 찔러 넣어주었다.

“이헌 씨, 어머니, 아버님께 작별 인사 드려야죠.”

라영은 남의 집 아들처럼 한 걸음 뒤에 있던 이헌을 팔을 매만지며 말을 건넸다.

남의 집의 성격에 지나친 참견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냉랭하고 무뚝뚝한 이 집안에 따뜻한 햇살을 비치게 하고 싶었다. 이제 앞으로 이 집의 식구가 될 테니 그렇게 건방진 생각은 아니겠지?

이헌은 라영의 말을 듣더니 오히려 반걸음 더 물러나서 자신의 부모님께 하기에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이 무슨 청개구리도 아니고……. 앞으로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두 분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상사를 대하는 부하 직원 같은 모습이 또 튀어나온다. 재벌가는 다 이런가? 아니면 이 집이 유독 서로 살갑지 못한 걸까?

그렇게 딱딱하게 이헌의 부모님과 형님을 떠나보내고 나니 누나 한 명만 남았다. 부모님과 예비부부가 작별 인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주차 도우미와 함께 간 남편이 자신의 차를 준비해 올 때까지 기다리며 라영의 곁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마침 이헌도 기사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차를 준비시키겠다며 매형을 따라간 차였다.

“우리 집 식구들은 절대 이헌이랑 일정 거리 이상 붙지 않아요.”

“네?”

둘만 남은 자리에서 뜬금없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 누님에게 준비되지 않은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그녀는 차들이 올 거라고 예상되는 곳의 허공을 바라보며 라영이 뭐라고 대답하든 상관없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뭐 지금은 상관없긴 할 텐데, 옛날부터 그렇게 습관이 되어 있어서. 어머니 정도가 예외랄까?”

“도대체 왜 그런 거죠?”

“서로 힘들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다 보니 어렵기도 하고.”

차가운 밤바람이 자갈이 깔린 야외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통에 추운 몸이 여상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더 차갑게 식었다.

에둘러서 말하는 통에 도대체가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지만 그 안에 내포된 거리감만은 뚜렷하게 읽혔다. 서로 함께 있는 게 힘든 식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가장 어린 막내에게 할 소리인가 싶었다.

“직장은 잘 나가고 있죠?”

내가 잠시 졸았나? 저도 모르는 새 급하게 전환되는 화제에 도대체가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지만, 결혼할 사람의 누나라 성의를 다해 답하기로 했다.

“네. 잘 다니고 있습니다. 몸이 아주 힘들어지기 전까지는 다닐 생각입니다.”

“그래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야지. 혹시 일하는 데 무슨 문제 있으면 얘기해요.”

우리 회사 주주인가? 라영이 뜻밖의 부분이 친절한 멘트에 의아해하는데 기다리던 차가 도착했다. 아이고, 대화의 흐름도 못 따라가겠고 춥기까지 했는데 다행이다. 다가오는 이헌의 차가 평소보다 몹시 더 반가운 순간이었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가 볼게요. 몸조리 잘하고 결혼식장에서 봐요.”

그녀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잔뜩 하고 난 뒤 산뜻하게 떠나 버렸다. 참 알 수 없는 가족이야. 친해지려면 한참 걸리겠어. 늘 사이가 좋으며 애정이 넘치고 스킨십 많은 라영의 집안과는 정반대다. 그래, 시월드는 멀고 어려울수록 좋다고 했으니까. 라영은 오늘도 빠른 자기합리화와 마음의 안정감 찾기에 대장이다. 자고로 모든 평안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법.

“라영 씨, 타십시오.”

직접 차를 몰고 나온 이헌이 차를 세우고 앞으로 돌아와서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차에 오르며 살짝 핀잔의 말을 던졌다.

“나 버릇 나빠져요. 이래서 혼자 걸어도 못 다니게 되면 어떡하려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럼 자기가 매일 꼭 안고 다닐 거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 말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분이 좋아서 라영도 같이 웃었다.

오늘 가족들과 함께 있는 이헌의 모습을 보니 줄곧 의구심을 품어 왔던 부분에 대한 근거를 찾았다. 어째서 이 사람이 보통에서 벗어나고 건강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과 함께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와 형은 언뜻 설명하는 업무적인 부분에서나, 이헌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지나치게 성과 중심적인 모습이었고 어머니와 누나도 조금 나을 뿐이지 가족으로서 거리가 있었다.

늘 그런 가정에서 혼자였겠지. 그리고 모든 감정적인 것을 나누지 못하고 혼자서 해결해 왔겠지. 대화에서 그런 모습의 일면을 본 것 같아서 라영은 씁쓸해졌다. 몸은 실내에 들어와서 따뜻해졌지만 마음의 바람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기분이다.

나는 아마 이 사람 손을 절대 놓지 못할 거야.

앞선 일과 오늘의 일을 겪으며 알게 된 결론은 그거 하나였다.

라영은 혼자 마음속으로 서로에게 꼭 다정한 가족이 되어 주겠다고 한 그 약속을, 그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렇게 우리는 이 춥고 쓸쓸한 겨울에 하나가 되어서 당신은 다시는 외롭지 않겠지.

라영은 이헌의 손을 꼭 잡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따뜻하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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