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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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엄마, 우리 왔습니다.”

“어머…! 어서 와요.”

라영이 이헌을 데리고 아치형의 현관 중문을 넘어서자 마중을 나오던 라영의 어머니가 반갑게 두 팔을 벌렸다. 늘 리액션과 스킨십이 많은 외가 가풍에서 자란 라영은 오랜만에 보는 엄마를 꼭 껴안고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이헌이라고 합니다.”

그런 라영의 뒤에 서서 이헌은 몹시 정중하게 양손에 든 선물을 내려놓고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들이 데리고 온 알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쫘악 스캔해 보던 아버지는 어머니 뒤에서 몰래 라영을 향해 살며시 엄지를 치켜올렸다. 라영의 외모지상주의는 아버지에게서 온 피였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편하게 오면 되는데. 어서 들어와요. 시장하죠?”

“아닙니다. 말씀 편하게 해 주십시오.”

“세상에, 예의 바르기도 해라. 차차 편하게 할게요. 얼른 앉아요.”

라영과 이헌을 식탁으로 안내하며 어머니가 말했다. 손을 씻고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함께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 놓은 자리에 착석했다. 라영의 어머니가 차린 게 없는데 많이 들라는 전형적인 안주인의 멘트를 얘기하자 하나둘씩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세상에, 우리 라영이가 드디어 결혼을 한다고 사람을 데려오다니.”

어머니는 연신 감격을 한다.

“내가 우리 엄마 소원 들어주려고 애 좀 썼습니다!”

라영이 늘 하던 것처럼 장난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집안의 든든한 장남이지만 엄마와 무척 친한 아들인지라 언제나처럼 농담을 주고받던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얘는 무슨, 내 소원 들어주려고 결혼하니? 서로 좋아야지. 여기 드레싱 더 필요한 사람은 추가하세요.”

결혼에서 제일 중요한 건 그거라고 강조하며 샐러드 드레싱이 담긴 소스 볼을 가운데 자리로 옮겼다.

“그래. 양친은 뭘 하시나?”

아들과 결혼할 알파 앞에서 무게를 잡는 아버지 모습에 라영은 피식 웃음이 샜다. 이헌은 차분하게 부모님을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을 이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기업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어머니께서도 기업과 연계된 아트 센터를 운영하고 계시고요. 몇몇을 제외하고는 친척들과 형제들 모두 관련 사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너무 정중하고 깍듯해서 마치 면접장에 있는 느낌을 느끼며 라영이 이헌을 돌아봤다. 하긴 이것도 일종의 면접이나 마찬가지지. 사랑하고 응원합니다, 내 애인. 괜히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익숙한 슬로건을 외쳐보는데 라영의 맞은편에서 어머니가 연달아 물었다. 면접관 2의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기업은 우리가 알 만한 회사인가요?”

“HY그룹입니다.”

“HY? 우리가 아는 그 HY?”

설마 네가 말하는 HY가 우리가 아는 그 HY는 아니겠지.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알고 계시는 HY가 맞을 겁니다. 아버지는 현재 HY 이노베이션을 맡고 계십니다. 형님도 관련 계열사인 에너지 쪽 경영에 참여하고 있고, 누님은 HY 종합화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중입니다. 그리고 저는 곧 HY 반도체 부분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부터 관련 일을 해 왔습니다.”

“네에에에?”

라영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꽥 소리치며 물었다.

“이헌 씨가 HY그룹 사람이라고요? 우리 대행사 모기업인 그 HY 말이에요?”

“네. 맞습니다, 라영 씨.”

“세상에, 너도 몰랐던 거니?”

“아니, 그래도 어떻게 니들끼리 그걸 모를 수가 있어?”

“라영 씨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제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뵙는 자리에서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황당하다는 듯이 라영을 나무라는 아버지 말에 이헌은 또다시 고개를 깊게 숙여 사과한다.

“그래도 어떻게 이런 걸 말을 안 해요. 당신 나한테 분명 그냥 가족끼리 회사 운영한다고 했잖아.”

너무 엄청난 비밀에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미안합니다, 라영 씨.”

이헌은 라영에게 가족끼리 회사를 운영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도 연신 사과를 했다.

“아니 아니. 그것보다 그쪽에서는 우리 라영이가 괜찮다고 하나요?”

“그러게 말이야. 집안이 이렇게 많이 차이가 나는 건 좋지 않은데….”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라영의 부모님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하거나 결혼에 대해 크게 관여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누님도 평범한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이헌은 사람 좋게 미소 지으며 패닉에 빠져 있는 라영과 가족들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리고 오늘 확인하고 오는 길인데….”

“아, 맞다. 엄마, 아버지. 나 임신했어요.”

“뭐?!”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가운데 라영은 이헌의 말을 자르고 더 큰 폭탄을 던졌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옛 성현들의 말을 실행한 것뿐인데 생각보다 과하게 놀라시는 모습에 아무래도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계속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너희들 그럼 속도 위반해서 결혼하겠다고 찾아온 거야, 지금?”

어머니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는 라영과 저도 모르게 죄인인 듯이 앉아 있는 이헌을 번갈아 쳐다보며 아버지가 놀라서 말했다.

“아닙니다, 아버님. 라영 씨와 저는 몇 달 전에 형질자 센터 매칭을 통해서 맞선으로 처음 만났고, 제가 첫눈에 반해서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라영 씨와 결혼 약속을 했습니다. 아이는 얼마 전에…….”

이헌은 오해로 가득 찬 두 쌍의 얼굴 앞에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쩔쩔매며 설명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맞아요, 아버지. 임신은 얼마 전에 내 건강 문제 때문에 사이클이 찾아오면서 그렇게 된 거야. 우리 둘 다 미리 생각해서 결정한 거고, 우리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 맞아요. 물론 이렇게 숨겨진 거대한 뒷배경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지만….”

사랑하는 애인이 또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기가 싫어서 서둘러서 변명을 대신 해 주고 있는데, 말하다 보니 억울하고 뭔가 속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 자연스럽게 눈을 흘기게 된다.

“아무튼, 나중에 자세히 설명드릴게요. 이 사람 밥 좀 편하게 먹게 해 주세요.”

“그래, 알겠다.”

“우리 라영이, 건강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엄마 좀 놀라게 하지 마.”

“네, 엄마. 큰 문제는 아니고 지금은 잘 해결됐어요. 큰 이상이었으면 진작에 말씀드렸지.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하니 알겠다. 음식 식겠어요. 얼른 드세요.”

심각한 이야기를 하느라 식사를 중단하게 된 것이 미안한지 라영의 어머니가 식구들을 향해 재차 권했다.

이헌은 라영의 어머니 취향을 백분 반영한 프로방스 풍의 작은 빈티지 소파에 앉아서 우아한 포크로 사과를 한 조각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크게 셔링이 잡힌 아이보리색 광목 천과 레이스가 달린 쿠션,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프랑스풍 꽃 자수에 둘러싸인 알파는 그 모습이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익숙한 풍경이 될 것이다.

이헌이 라영의 아버지가 꺼내 주신 옛 앨범을 구경하는 동안, 오늘의 사고뭉치이자 폭탄을 투하한 범인은 안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부모님 두 분을 데리고 들어가서 한창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고 나왔더니 진이 다 빠졌다.

“그럼 지금 아기는 얼마나 된 거니?”

해방된 라영에게도 포크로 사과를 찍어 건네며 어머니가 물었다.

“병원에서 6주 됐다고 하더라고. 다음번에 심장 소리 들으러 가기로 했어. 착상 잘 됐고 아이도 저도 건강하대요.”

“그래, 안 그래도 바쁜 직장인데 걱정이네…. 몸조심하고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하고.”

라영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앉혀 두고 내내 걱정을 했다.

“아무튼 말씀드린 대로 예단, 예물 이런 종류는 전부 생략하기로 라영 씨와 이야기 나눴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맞아요. 그런 부분은 전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우리 간단하게 결혼식만 하기로 했어.”

“그래도 너네 혼수 같은 거에 드는 비용은 어떡하고….”

“그런 부분은 전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라영 씨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대체 얼마나 저렇게 인사를 하는 거야. 내 알파 허리 굽겠네, 정말.

예상치도 못하게 거대 기업의 재벌 일원이 와서 아드님을 주셔서 그저 감사하다고 저자세로 말하는 모습에 라영의 부모는 감동받았다. 애초에 성인인 두 사람이 서로 좋다고 하는 결혼을 반대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 차이 나는 집안에 걱정했던 것도 잠시뿐, 정중하게 진심으로 어필하는 모습에 마음속에 뭉친 염려도 녹아 없어졌다.

“그럼 가 볼게요!”

“상견례 때 뵙겠습니다.”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운전 조심하고!”

역시 엄마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자나 깨나 불조심, 차 조심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라영은 운전하는 이헌의 어깨를 도닥이며 말했다.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많이 힘들었죠?”

“아닙니다. 충분히 각오하고 왔던 일이라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라영 씨를 얻기 위한 일이라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런 멘트는 어디서 연습하고 오는 거예요?”

“예?”

“무슨 ‘다정하고 헌신적이고 예의 바른 정답을 가르쳐 드립니다!’라고 홍보하는 학원에서 1등 찍고 온 사람 같아서요.”

“…아닙니다!”

어째 지나치게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라영은 운전 중인 사람을 그만 놀리기로 하고 진짜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그나저나 왜 HY그룹이라고 얘기 안 했어요? 아까 나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어.”

“라영 씨.”

“네.”

“라영 씨는 다시 처음에 우리가 만난 날로 돌아갔다고 가정했을 때, 만약 제가 처음부터 재벌 4세라고 말씀드렸다면… 그래도 우리 관계가 지금과 같을까요?”

그 말에 라영은 눈알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을 했다.

“아뇨. 생각해 보니 이헌 씨 말대로 안 만났을 것 같네요. 제가 재벌한테 데인 적이 몇 번 있어서.”

“그래서입니다. 저는 라영 씨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고, 받아 본 서류로 라영 씨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 편견 없이 서로만을 보고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늦게 말해서 미안합니다.”

“알면 됐어요. 지금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이고. 나도 이헌 씨를 만나고 나니 내가 가졌던 생각들이 편견이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대신 앞으로는 절대 숨기는 거 없기예요.”

라영이 이헌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이헌은 지긋이 웃으며 정면을 보고 운전을 계속할 따름이었다.

“근데 정말 나로 괜찮겠어요?”

라영의 질문이 조금 전까지 소리 없이 고요하고 적막하던 차 안을 가로질렀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희귀 형질자라 결혼 시장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긴 했어도, 솔직히 이헌 씨네 집하고 비교했을 때 비교가 되는 건 사실이잖아요. 세상에… HY라니.”

그 말에 마침 신호를 받고 정차한 이헌이 고개를 돌려 라영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라영 씨는 저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어요.”

“도대체 그 학원 어디 있는 거예요? 이거 알파들만 알 수 있는 극비 고급 정보인가?”

라영이 지나치게 진지한 말에 농담인 줄 알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헌은 드물게 눈살을 찌푸리고 진심이라며 투덜거리며 차를 움직였다.

“얼른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나 피곤해.”

임신해서 힘들다는 핑계로 라영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은근슬쩍 한 달째 같이 살고 있는 이헌은 ‘우리 집’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하주차장으로 차가 부드럽게 진입했다. 주차하고 난 뒤에 이헌이 내리지 않고 라영과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더니 글러브 박스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민트 색의 작은 상자는 누가 봐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헌이 섬세한 민트색 가죽 상자를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열며 말했다.

“사실은 프러포즈를 하려고 이미 레스토랑을 다 예약해 놨는데, 그냥 오늘 이 기분을 가지고 꼭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하얀 내부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반지는 남성용 인게이지 링으로보통 생각하는 커플의 웨딩 밴드보다 훨씬 화려했다. 3부에서 5부 정도 되는 다이아가 밴드 위로 줄지어 세팅되어 있는 화이트 골드 링이었다. 차 내부여서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라영을 향해 몸을 완전히 틀고 청혼을 하는 전형적인 포즈로 이야기를 꺼냈다.

“라영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어요. 매일 아침 당신과 눈을 뜨고, 매일 저녁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잠이 들고, 함께 우리 아이를 키우고, 당신과 함께 늙어 가고 싶습니다.”

“…….”

“기쁜 일이 생길 때는 함께 기쁨을 나누고, 힘든 일이 생길 때는 함께 서로를 위로하고, 모든 것을 당신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더 이상 당신 없이 혼자이고 싶지 않아요.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서 진실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그건 그 사랑을 받고 있는 라영만이 느낄 수 있는 진심과 사랑이었다.

눈동자를 마주하며 호소하고 청하는 말에 라영은 마음이 울컥해서 대답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이헌의 목을 껴안으며 그의 귀에 대고 대답했다.

“네. 당신과 결혼할게요.”

어디에도 있을 법한 진부할 수 있는 멘트였지만 말하는 이헌의 눈빛에서 간절함과 열망과 진실이 보였다. 정말로 당신과 결혼해서 함께 늙어 가고 싶다는. 당신과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목에 감고 있던 팔을 풀어서 살포시 입을 맞췄다. 이헌은 라영의 가벼운 입맞춤에 기분 좋게 웃음을 짓고는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끼워 주었다. 사이즈는 대체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하다. 그는 항상 모든 것이 미리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운명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반지를 낀 손으로 숨 막히게 안고 있던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서 손을 잡고 집으로 올라갔다.

이헌은 아까 라영이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말을 떠올렸다.

앞으로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라영이 있는 곳이 곧 이헌의 ‘우리 집’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만으로도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 * *

도대체 사람이 아닌 발 닦개라도 될 예정인지 임신한 제 오메가를 보살피는 알파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차에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아 주는 공주 대접은 초반에나 좋았지 이제는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고(라영은 성격이 급해서 차가 주차되자마자 바로 내리고 싶어 했다), 집 안에 가만히 있는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도 물 한 잔 뜨러 가는 꼴도 보질 못하니 솔직히 답답했다.

내가 아무리 임신을 했어도 아직 몸이 무거운 것도 아니고, 아이를 가졌지만 그래도 엄연히 신체 건강한 남자인데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니냐고 항의하면 오히려 유산의 위험성이 있는 임신 초기가 제일 위험한 거라고 설명을 시작해서 라영을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워낙 초기인 데다 입덧도 없고 아무 변화가 없어서 임신 사실을 자각도 할 수 없는데 이헌 때문에 매 순간 임산부임을 상기하고 있었다.

“하여간 오늘 의사한테 물어볼 테니까 두고 봐. 지금 너무 과하다니까요. 도대체 이러면서 매일 나 직장은 어떻게 보내나 몰라.”

“역시 잠시 휴직을 하시겠습니까?”

라영의 중얼거림에 이헌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했다. 그 얼굴이 마치 며칠 만에 주인을 맞이한 강아지 같았다.

“노! 네버! 절대 안 돼요. 그런 건 내가 결정할 거예요. 설마 당신도 내가 일 안 하고 집에서 살림만 하길 원하는 거예요?”

라영은 혹시라도 진짜로 그럴까 봐 질겁하며 두 팔을 들어 크게 엑스 자를 만들면서 말했다.

“저희가 결혼하면 살림은 당연히 프로를 고용할 예정입니다.”

아이구, 내 호구…. 이러다 정말 도어맨까지 고용할 기세다. 가정 집 현관문에 도어맨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아무튼 일은 전적으로 내가 내 상황 봐서 알아서 결정할게요. 이거에 있어서 자유는 좀 지켜 줍시다, 좀.”

지금도 몸뚱이의 자유가 너무 없는데 아무리 부부가 된다지만 일에 대한 부분의 자유는 지켜 줘야 하는 거라고 라영의 투덜거림은 계속됐다.

“저번엔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는데, 오늘 병원 가면 나 임신 확인서 떼라고 말 좀 해 줘요. 임신 때문인가 요즘 자꾸 깜빡깜빡 해.”

“직장에서 그런 서류를 요구합니까?”

마치 이런 기본적인 권리를 당연하게 지켜 주지 않는 회사를 조지러 가야 마땅하다는 듯이 이헌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진짜로 조져 버릴 능력이 있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살벌하잖아, 이 사람아. 가뜩이나 라영이 임신을 한 후에 보호 본능이 잔뜩 자극당한 알파의 모습 그대로인데. 맨날 얼굴에 미소만 달고 다니던 사람이 경계 가득하게 인상 팍팍 쓰고 그러니까 적응이 안 되는데 또 그 찌푸린 미간이 자연스럽고 섹시한 게 나도 너무 빠졌다, 정말.

“회사에서 그런 걸 요구하지는 않죠. 형질자 센터에 제출해야 해요. 이제 우리 지은 씨도 한시름 놓겠지. 이지은 씨라고 내 오랜 담당자가 있는데, 요즘 많이 힘들어 보였거든요. 그 힘들게 하는 요주의 인물인 내가 결혼하고 임신까지 한 큐에 끝냈다고 하면 춤을 출 거예요.”

창밖으로 대형 병원이 있는 거리의 익숙한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이 보인다. 겨울을 앞두고 있는 가로수의 나뭇잎들은 이미 붉은 갈색으로 바삭해져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거나 죄다 바닥에 떨어져 있다.

“오늘 일정은 이게 끝이죠? 더 없죠?”

오전부터 결혼식장 홀과 규모를 고르고 꽃 장식과 스타일링 컨셉, 청첩장까지 고르고 나와서는 테일러 샵에 가서 예복과 구두까지 맞추고 왔더니 진이 빠져 죽겠다며 라영이 앓는 소리를 했다. 누가 봐도 임산부구나 싶도록 배가 부른 채로 식장에 입장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통에 결혼식까지 일정은 촉박한데 그렇다고 일을 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모든 준비는 주말에 몰려 있었다. 이헌이 계속해서 라영을 걱정하며 팔다리와 허리를 살살 주무르고 마실 것을 대령하며 다녔지만 심리적인 피로는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다.

“네. 병원 진료 끝나고는 더 이상 없습니다. 저녁에는 이탈리안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을 예약해 놨어요. 라영 씨가 전에 루꼴라와 생 햄이 올라간 화덕 피자가 먹고 싶다고 했었죠?”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감동이야…. 근데 우리 언제까지 라영 씨, 이헌 씨라고 할 거에요? 우리 결혼식 얼마 안 남았어요.”

“그래, 라영아.”

“누구세요…?”

바로 말을 놓는 모습에 라영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이헌이 웃었다. 내 예비 신랑 어디 갔지?

“말은 차차 놓겠습니다. 당신이 이걸 좋아하잖아, 라영아.”

“내가?”

“내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확실히 이제 얼마 후면 부부니까 말을 좀 편하게 하긴 해야죠. 도장 찍으면 완전히 말을 놓겠습니다.”

“무슨 도장이요?”

“우리 혼인신고서 말이에요.”

법적으로 완전히 묶여서 진정한 부부가 되어야 편하게 행동하겠다는 얘기인가? 사람이 은근히 고지식한 면이 있네. 하긴 처음부터 그런 예의 차리는 면이 마음에 들었던 거지만.

“여기 신발 벗고 올라가서 몸무게 재 주시고, 이쪽에서는 혈압 재 주세요. 둘 다 재서 여기 종이에 적어서 주시면 돼요. 다 재고 기다리고 계시면 진료 호명해 드릴게요.”

데스크의 간호사는 눈도 거의 마주치지 않고 기계적으로 얘기했다. 아마 저 사람은 하루에도 똑같은 말을 백 번은 반복하겠지. 라영은 같은 직장인으로서 간호사에게 연민을 느꼈다. 요즘 별것도 아닌 것에 마음이 울컥울컥 하는 걸 보면 역시 임신을 하기는 한 모양이다.

라영이 몸무게를 재고 혈압을 재는 동안 종이를 들고 따라다니며 받아 적는 이헌의 모습이 아주 일 잘 하는 수행비서를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요즘 하나하나 수발 들며 따라다니는 모습이 딱 그렇기는 했지. 나 아니고 누가 저 커다랗고 대단한 알파를 그렇게 부리겠냐마는.

“이라영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라영은 이헌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가서 초음파 기계 옆 의자에 누워서 시키는 대로 배가 보이게 옷을 들어 올렸다.

“조금 차갑습니다.”

의사는 초음파를 하기 위해 젤 같은 액체를 배에 뿌려 주며 말했다. 그리고 맨질맨질한 기계를 배에 문질렀다.

“여기 보이시는 둥그런 게 아기집이에요. 8주 차에 맞게 잘 자리 잡고 있고요. 그리고 여기 보이시나요? 이 작은 게 아기입니다. 그럼 오늘은 심장 소리를 한 번 들어볼까요?”

배를 이리저리 문지르고 기계를 딸깍거리며 크기를 재고 저장하던 의사가 차근차근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엄청 빠른데요?”

이건 내가 알던 그런 심장 소리가 아닌데?

“지극히 정상입니다. 많이들 놀라시죠.”

하긴 작은 동물일수록 심박이 빨리 뛰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보호자 이헌이 의사에게 물었다.

“네. 아기는 정상적으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입덧은 없으신가요? 이 시기에 대부분 산모들이 입덧을 시작하는데….”

“아침에 속이 좀 울렁거리긴 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요. 평소처럼 잘 먹고 있습니다.”

“입덧 없이 넘어가는 분들도 있어요. 아주 복 받으신 겁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시작할 수 있으니 항상 체크 잘 해 주시고요.”

초음파가 다 끝났는지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배에 묻어 있는 젤을 닦아 준다.

“오늘 채혈 있습니다. 필수 산전 검사고 다음에 내원하셨을 때 결과 확인하실 수 있어요.”

“아이 형질은 언제 확인할 수 있을까요?”

라영이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었다.

“아이 성별과 1차 발현 형질은 16주가 지나야 알 수 있습니다. 두 분 우성 형질자시죠? 제가 본 차트에 그렇게 적혀 있던 것 같은데…. 맞네요. 이렇게 부모 둘 다 우성일 경우 아이는 우성 형질자일 가능성이 90% 이상입니다. 특히 산모님은 극우성이라 이건 거의 99%에 가깝겠네요.”

의사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특별히 조심해야 할 건 없습니까?”

이헌이 또 알파의 보호 본능을 발휘하며 집요하게 물었다. 여러 가지 주의사항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던 의사는 풀어지지 않는 이헌의 표정을 보며 너무나 많이 겪은 상황이라는 듯이 알파를 안심시켰다.

“임신과 출산은 온 인류가 이제까지 이어 온 겁니다. 너무 과격한 일만 삼가 주시고 잘 먹고 잘 주무시고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시면 됩니다. 산모님은 젊고 건강해서 특별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게다가 우성 오메가들은 임신에 대해 안정성이 다른 오메가보다 높거든요. 웬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무리하지 않는 이상 별다른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몸을 살피고 이상한 점이 있다면 바로 내원해 달라는 말로 알파를 안심시켰다.

의사는 진료를 마치면서 미소 지으며 임신 중 주의할 것에 대해서 잘 나와 있다는 여러 가지 책을 추천했다.

과연 이 분야의 프로다운 말씀이었다. 이제 제발 좀 작작하라고 말할 수 있겠네.

“그럼 다음 진료 때 뵙겠습니다. 혹시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내원하시면 됩니다.”

“진짜 보통의 매너와 딱 내가 원하는 거만 해 주면 된다니까요. 무슨 환자 부축하고 다니듯이 옴짝달싹 못 하게 하지 말고…….”

라영의 잔소리에 이헌은 적당히 미소로 응하며 레스토랑 문을 열었다.

“예약자분 성함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정이헌입니다.”

“네, 정이헌 님 외 한 분. 총 두 분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

홀 매니저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서 큰 소리가 났다. 누구야 대체 이런 조용한 곳에서. 여기 사장이라도 되나? 본인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정확하게 이름까지 호명을 한다.

“이게 누구야? 이야, 정이헌이.”

누가 남의 애인 이름을 이렇게 반가워하며 부르나. 궁금해진 라영은 뒤를 돌아봤다. 이미 뒤돌아서 그 사람과 마주하고 있던 이헌이 라영을 자연스럽게 가리며 떨떠름하게 대꾸한다.

“윤우경. 여긴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긴. 여기 우리 회사에서 운영하는 파인 다이닝인 거 몰랐어?”

“그래서 주말에도 할 일 없이 사찰을 다니시나?”

뭐야, 정말 사장이었어? 어째 이헌 씨 말투가 평소 같지 않게 싸늘하고 무서운데, 이 사람 누구야? 도대체 누가 내 애인을 흑화하게 만들고 있는 거냐.

“사찰은 무슨. 여기 셰프랑 친해져서 종종 오는 거지. 같이 온 일행분은….”

이헌과 함께 온 사람이 궁금하다는 듯이 몸을 조금 움직이고 고개를 빼며 뒤의 라영의 얼굴을 확인한 우경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다.

“어? 어…? 어어…?”

아이고, 저 사람 눈알 튀어나오겠네. 침도 나오겠어. 아는 사람인가? 고개를 빼꼼히 빼내며 우경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하는데 이헌이 은근슬쩍 앞을 가렸다. 그런 이헌의 얼굴과 라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어버버거리던 사람이 둘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어색하게 살며시 접으며 느리게 라영에게 악수를 건넸다. 설마 지금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손동작 바꾼 거야?

“너… 너무 미인이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 저… 저는 이헌이 친구 윤우경이라고 합니다.”

말을 더듬는 모양새가 몹시 수상하고 당황해 보였지만 인사는 받아야겠지.

“네. 이헌 씨 약혼자 이라영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 손도 참 고우시네요. 네? 약혼이요? 너 약혼했어?”

어째 너무 정신없어 보인다. 이거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데 결혼을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하나? 어리바리한 게 영 믿음이 안 가는데. 믿음이 안 간다고 생각하자마자 똑 부러지는 냉담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갈랐다.

“다음 달에 결혼한다. 조만간 청첩장 갈 거야. 근데 너 바쁘지 않아?”

자꾸 라영의 앞으로 가서 시야를 가리는 이헌 때문에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뭔가 목소리가 지나치게 뚝뚝 끊어진다.

“어? 어어. 가야지. 응, 나 나가야지. 결혼 축하한다, 인마.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라영을 향해서도 인사하며 우경이라는 사람은 빠르게 바람처럼 사라졌다.

“저 사람 어디 아파요?”

“글쎄, 그건 저도 모르겠군요. 어디 한 군데 아파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긴 합니다만.”

“땀을 엄청 흘리시던데….”

“하등 신경 쓸 필요 없는 인간입니다.”

“그래요? 흐응. 많이 안 친한가?”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이 혼잣말로 묻던 라영은 앞서가는 매니저와 이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뭔가 의문이 들었지만 하루 종일 고생한 몸은 얼른 음식을 향해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나중에 다 먹고 물어봐야지.

물론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는 모든 걸 까맣게 잊고 평소와 같이 해맑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 * *

“너 그거 아무래도 이상해. 어째 요즘 계속 머리가 꽃밭 아니야?”

경현은 점심 식사 내내 라영의 이상한 기분에 대해서 듣고는 함께 커피를 사 들고 산책을 하며 말했다.

“그래? 이상한가? 그냥 그런 거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결혼 전에 친구들은 당연히 체크해야지! 아직까지 뭐하고 있는 거야, 이 인간아….”

“너도 알다시피 결혼식이 너무 급하게 잡혔잖아. 주말마다 결혼식이랑 집 준비하러 다니느라 바쁜데 사람 만날 시간이 없어.”

“어째 기분이 쎄한 게 나는 영 불안하다…….”

“아니야. 이게 네가 그냥 나한테 말을 전해 듣기만 해서 그래! 이헌 씨 진짜 믿음직한 사람이라니까! 나는 이게 막 어? 가슴으로 어? 사랑으로 다 느껴진다고!”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빛에 괜히 가슴을 쫙 펴고 어떻게든 덩치가 커 보이려고 노력하는 동네 싸움꾼 아저씨처럼 우기게 된다.

“그리고 나라에서 데이터 다 검수하고 제일 상성 맞을 것 같은 매칭을 해 주는 거라고. 이게 바로 나라에서 보장한 사람이란 말이야.”

고릴라도 아닌데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면서 우기는 말에 경현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나라에서 재산이랑 형질이나 자라온 객관적인 데이터 이런 거 말고 그 사람 성품이나 도덕성을 보장해 준다냐? 넌 이게 문제야, 이 헛똑똑이야.”

“내가?”

“그래, 멍충아. 일할 때나 빠릿하지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이상하게 어디 한 군데 허술하다니까. 너 그러다 크게 뒤통수 맞는다. 그때 가서 울어도 난 몰라.”

“야, 김경현이. 너 임산부한테 저주하는 것 좀 봐라?”

“저주는 무슨…. 다 이게 형님의 애정 어린 걱정이다. 지금도 걱정해서 임산부 데리고 산책시켜 주는 거 몰라?”

그 말에 라영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

“내가 널 데리고 산책을 시켜 주는 거겠지. 이게 무슨…. 친구라는 게 진짜…….”

이게 좋은 말은 못 해 줄망정…. 라영은 쯧쯧거리며 눈을 흘겼다.

“너 내가 사준 커피 내놔. 얄미워서 안 되겠다.”

“어허! 어디 임산부의 소중한 커피를! 이거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말이야! 하루에 한 잔만 마시라고 의사가 그랬다고.”

“그렇다면 인정이다. 이제 들어가자, 춥다.”

건강을 위한 최소한의 산책을 마무리하고 양손에 따뜻한 커피를 감싸쥐고 일터로 돌아가는 라영의 마음에 있는 아주 작은 균열에 바람이 불었다.

진짜 이거 뭐 있는 거 아니야?

결혼식이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 * *

“오늘 같이 못 가서 미안합니다. 일을 시작할 날이 얼마 안 남아서 꼭 참석해야만 하는 행사라고 하네요…….”

결혼을 하고 새로 들어갈 집의 가구 몇 가지를 보고 오는 길에 이헌이 정말 정말 아쉬워서 미칠 것 같다는 듯이 양해를 구했다.

“괜찮아요. 내가 애도 아니고. 나도 혼자서 잘 다닐 수 있으니 걱정 마.”

실제로 라영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라영 혼자서 봐야할 일들도 있었으니까.

“센터 갔다가 친구들 만나러 가는 거죠? 이런 자리는 함께 참석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더 미안합니다.”

라영은 센터 담당자 이지은에게 서류도 제출하고 겸사겸사 저녁에는 친구들도 만나서 청첩장도 돌릴 예정이었다. 이헌은 그게 정말 미안했는지 연신 쩔쩔매며 사과를 한다.

“대학 동기들이라, 찐친들이기는 한데 다들 사회 생활하느라 바빠서 다 같이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보나? 진짜 괜찮아요. 나도 이헌 씨 친구들 하나도 못 만났는데 뭐. 나중에 결혼하고 집들이를 하거나 따로 만나요, 양쪽 다.”

“알겠습니다. 코트 단추 잘 채우고 다녀요. 감기 들면 큰일 나요.”

“응. 여기서 세워 주세요.”

이헌의 차가 커다란 형질자 센터 건물 앞에 정차시켰다. 걱정스러워하는 애인의 뺨에 작별의 뽀뽀를 남겨주고 라영은 염려를 빙자한 잔소리가 더 이어지기 전에 냉큼 내렸다.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 차를 두고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라고 이헌의 차를 떠나보내고는 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 오메가 센터가 어느 쪽이더라.”

워낙 오랜만에 온 데다가 건물도 많이 리모델링되고 바뀌어서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깨끗한 로비를 걸어 제일 처음 보이는 안내 데스크의 도움으로 담당자와의 약속을 잡고, 로비 대기실의 의자에 앉아 한참을 기다려서야 지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나마 일찍 온 게 다행이네. 연신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안내받은 지은의 사무실 번호가 적힌 쪽지를 바라보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내려서 사무실 문에 노크를 했다. 정중한 노크 소리에 문 안쪽에서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지은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마중 나왔다.

“이라영 씨! 얼굴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얼른 앉아요. 뭐 따뜻한 차 좀 줄까요?”

“아뇨, 좀 전에 마시고 왔어요.”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발랄하고 생기가 넘치는 지은이다. 라영은 지은의 데스크 맞은편의 손님용 의자에 앉아 얼른 가방을 열어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지은 씨의 소중한 시간을 위해 용건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역시 뭘 좀 아시는군요. 그렇지만 우리 라영 씨는 오랜만이라 충분히 시간 낼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어머 어머, 이게 뭐야?”

너스레 떠는 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받은 서류를 눈으로 대충 훑어보던 지은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예상대로 호들갑이 상당하다. 지은은 라영에게 건네받은 임신 확인서를 눈앞에 가까이 두고 정독하며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9월에 통화하고 나서 공단 담당자 통해 건강 검사 결과는 받아 보고, 칩도 제거했다고 얘기도 듣긴 했지만요. 물론 결혼 서둘러 달라고 말한 것도 맞는데, 이렇게 빨리? 라영 씨는 천사인가요? 천사인데 스피드까지?”

순식간에 하늘을 존나 빨리 날아다니는 레이싱 천사가 됐다. 지은이 호들갑을 떨며 부산스럽게 책상 위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변치 않는 그녀의 장황한 표현과 빠른 말버릇에 라영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것까지 단숨에 해치워야겠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 청첩장이요. 저 다음 달에 결혼해요.”

“어머 어머. 오늘 저 놀라게 하려고 작정하고 온 거 맞죠? 결혼식 꼭 갈게요. 이럴 수가…! 결혼과 임신을 한 큐에 끝내 버리다니. 라영 씨, 당신의 끝은 어디까지인가요? 다른 우성 오메가들도 이렇게만 해 준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지은의 과장된 주접에 라영은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이것 참 쑥스럽네. 정말 자신이 관리하는 우성 오메가들이 당신처럼 이렇게만 해 준다면 자신은 지금 빠지고 있는 머리카락이 반은 줄어들 거라면서, 조금은 비어 보이는 정수리를 보여 주는 모습에 라영은 마음속에 애잔함이 가득 찼다. 이 세상에 탈모만큼 슬픈 일이 있던가……. 그녀의 머리가 더 빠지지 않게 지켜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결혼하는 상대는 어떤 사람인가요?”

“아, 그 사람 여기 센터 매칭 통해서 만났어요. 진짜 운이 좋았죠.”

지은의 질문에 라영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제까지 받아 본 형질자 센터의 다양한 서비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며 지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이 가득이었다. 꼭 매칭 담당자의 현명함을 칭찬해 줘야지.

“우리 형질자 센터 매칭 서비스 말인가요? 이상하다…. 그쪽 부서에서 말 들은 거 없는데. 알다시피 라영 씨는 우리 센터의 유명인이라 담당자인 나한테 소식이 조금씩 들어오는데 말이죠.”

“그래요? 매칭 통해서 두 번째로 소개받은 사람이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첫 번째는 진짜 최악이었어요. 그 사람 블랙리스트로 올려야 해요!”

맞선 본 날 호텔로 올라가자며 페로몬 풀고 껄떡댔던 걸 생각하니 분노가 또 다시 차오른다. 물론 그렇게 헤어지고 두 번째로 이헌과 맞선을 본 날 본인이 먼저 같이 자자고 껄떡댔던 과거는 이미 까맣게 잊고 없다. 아주 오래오래 살 것 같은 편안한 뇌 구조가 아닐 수 없다.

“우성 알파를 제가 여기 아니면 어디를 통해서 만나겠어요? 학교 다닐 때도 아니고. 이름은 정이헌. 우성 알파예요. 나이 33살, 키 192cm, 혈액형 B형…….”

말하면서 핸드폰을 켜 맞선 당시에 받았던 파일을 열어서 기계적으로 읽으며 지은에게도 보여 줬다. 지은은 라영의 폰을 슬쩍 바라보고 열심히 청첩장을 뜯어 펼쳤다.

“그렇군요. 음… 여기서 결혼하는구나. 라영 씨 알파가 재력이 좀 되나 보네요. 국내에서 제일 비싼 홀 아니에요? 하루에 딱 한 팀만 받아서 전체를 대여하는 거라던데. 밥 때문이라도 꼭 빠지면 안 되겠다. 여기 식장 식사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까 기대되네요. 응? 혼주 정준익? 우리가 아는 그 정준익? HY 대표?”

지은은 주절주절 말하다가 깜짝 놀라며 라영과 청첩장을 번갈아 봤다. 라영은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

“네. 그렇게 됐네요.”

“라영 씨, 결혼하는 상대 알파가 HY 대표 아들이에요? 이거 확실해요?”

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이마까지 들어 올리면서 물었다. 시선도 라영의 얼굴과 청첩장을 번갈아 보느라 산만하기 그지없다. 그런 반응에 라영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네, 확실해요.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요…?”

갑자기 불안해졌다. 뭐야, 이거. 혹시 이헌 씨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나? 최근 느끼던 기분 나쁜 기시감이 이거였나? 혹시 자신이 모르는 엄청난 블랙리스트라거나…, 혹시 최악의 경우는 유부남이라거나…. 라영의 머릿속이 갑자기 터질 듯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아니, 이상한 건 아니고요. 아니다. 이걸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뭔데 그래요? 빨리 좀 말해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이마가 짚어지는 멘트가 절로 나온다.

“이런 재벌들은 센터 매칭 대상이 아니거든요. 아니, 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진짜 99%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센터에 등록은 되지만 권리 포기 절차를 진행해요. 그러니까 통계를 위한 데이터는 올라가 있지만 나라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거죠. 돈도 많으니 권리도 포기하고 의무도 알아서 하겠다, 이러는 게 보통인데. 이상하다….”

지은이 머리를 긁적이며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신상 자료 좀 다시 보여 주세요.”

라영은 얼떨떨하게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고 좀 전에 띄워 놨던 파일을 다시 보여 주었다.

“제가 이쪽 담당자는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이것도 좀 이상하네요. 어째 문서 형식이 좀 다른 거 같은데….”

연신 미간을 찌푸리며 미심쩍다고 얘기하는 지은의 말에 라영은 이제 최악의 상상을 하고 있었다.

“뭐예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혹시 저 속은 거예요?”

자신이 사기 결혼의 피해자가 된 거냐며 불안해하는 라영을 보며 지은이 피식 웃으며 안심시켰다.

“아니에요, 라영 씨. 여기 밑에 직인 보이죠? 오히려 이게 정식 문서라는 의미예요. 문제는 매칭 때 나누는 서류는 이렇게 디테일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간단한 양식으로 수정해서 보내 주거든요. 안 그러면 여기 주민번호까지 신상이 너무 오픈 되니까.”

손가락까지 짚어 가며 자세히 설명해 주던 지은은 라영을 적당히 다독이며 핸드폰을 다시 돌려줬다.

“오히려 공식 문서예요. 담당자가 너무 바빠서 정리를 못 하고 그대로 보내 줬을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나중에 좀 알아봐 줄게요. 재벌이라도 매칭 받을 수 있죠, 뭐.”

소중한 극우성 오메가 임산부를 안심시키려고 지은은 애를 썼다.

그 이후의 말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좀 더 알게 되면 연락해 달라고 지은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시키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 여기 청첩장. 늦게 나와서 돌리는 게 좀 늦었다. 이해해라.”

불판에 구워지는 소고기를 보면서 라영이 청첩장을 꺼내 돌렸다.

그래, 지금 와서 머리 터지게 고민해야 뭐 하겠어? 이미 배 속에 그 사람하고 내 아이도 있고. 뭔가 오해가 있었겠지, 별 문제 아니라잖아?

라영의 정신 승리는 성공하고 있었다. 실은 고민하고 말고 남은 일정이 너무 빠듯해서 지금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모인 대학 동기들은 늘 친하게 몰려다닌 같은 과 네 명이었는데, 신입생 때부터 우연히 뭉치게 돼서 4년 내내 줄기차게 붙어 다닌 질긴 인연이다.

우연히 붙은 이들답지 않게 서로 좋아하는 스타일도 비슷했고 가정환경 또한 비슷해서 트러블이 전혀 없었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서로 간의 인연이 계속 지속되는 이유에는 분명히 그런 비슷한 주변 환경이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이라영이 장가를 가다니…. 우리를 버리고 먼저 유부남이 되다니…. 이건 배신이야!”

“얜 또 뭘 오버하고 그래. 난 라영이 우성 오메가라서 일찍 결혼할 줄 알았어.”

“그래, 이라영의 화려했던 캠퍼스 라이프를 회상해 봐.”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라영이 요즘 스님처럼 정갈하게 산 지가 몇 년인데!”

아주 라영이, 라영이, 라영이, 라영이…. 아무리 오늘의 주인공이 나라지만 얘들이 아주 작정을 했구나. 게다가 평생 절이라고는 문화 유적 탐방할 때밖에 안 가 본 사람을 이렇게 순식간에 스님으로 매도하기 있냐?

만나자마자 이미 시끌시끌한 분위기 덕분에 정신이 혼미하던 라영이 갑작스러운 과거 이야기에 분노로 멘탈을 다잡았다.

“아니, 그럼 예전에는 정갈하지 못하고 더러웠다는 거야, 뭐야?”

세 명을 동시에 멱살 잡을 수가 없어서 바로 옆에 앉은 녀석이 희생양이 되었다.

“솔직히 정갈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 이거 놓아라!”

“그렇소!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하는 법! 그게 바로 군자의 도리!”

“어후 야, 사극 말투 뭐임.”

“너야말로 그 말투 뭐임? 초딩이세여?”

“너 이 자식, 너 회사에서 결재 올릴 때도 음슴체 쓰지? 이 급식이 자식!”

“아니거든여? 나는 프리랜서라 결재 올릴 일이 없거든여?”

이쪽저쪽에서 정신없이 투닥거리고 대화에 공백이라고는 전혀 없는 게 내가 지금 오후 두 시 라디오를 듣고 있나. 저녁인데 텐션이 왜 이렇게 높은 거야? 나이가 거의 서른이 다 됐는데 아직도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이 녀석들이 이상한 거야, 아니면 같이 만나기만 하면 정신이 옛날로 자동 타임 워프해서 그런 거야? 잠깐,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얼마 전에 생각한 것 같은데 이 자식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 탓인가? 나도 똑같은 놈인 건가…?

“오, 라영이. 엄청 좋은 데서 결혼하네?”

그래도 사회생활 좀 했다고 다들 예의 차리며 청첩장 봉투를 열어 내용을 읽기 시작한다.

“와, 대박. 이거 축의금 엄청 내야겠는걸? 오만 원 냈다가는 식대도 안 나오겠다.”

“야, 무슨 식대 타령이야. 돈 모아서 이라영 냉장고 정도는 해 줘야지!”

“아니, 야야. 우리 축의금이랑 화환 없는 결혼식이야. 그냥 와서 축하만 해 주면 돼.”

“뭐? 축의금이 없어?”

“뭬야? 너 결혼하는 사람 재벌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농담에 개구리가 맞…는 게 아니라 핵심을 짚었다. 이 녀석 신기가 있나? 사극 말투 따라 한다고 무시할 게 아니었네.

“어. 좀 그렇게 됐다.”

말할 때마다 머쓱해져서 절로 뒤통수에 손이 간다. 역시 어색할 때는 셀프 그루밍이 최고.

“뭐라고?”

“진심? 진짜로?”

“대박. 내 친구가 재벌이랑 결혼하다니.”

마주 본 이들의 눈이 튀어나오고 입이 떡 벌어지며, 오늘 두 번째로 제2차 재벌 타령이 시작됐다.

“솔직히 난 이라영이 재벌이나 재벌급하고 결혼할 줄 알았어. 학부 때도 사귀던 사람들도 무슨 재벌, 어디 은행장 아들, 로펌 대표 아들, 막 이랬었잖아.”

그 와중에 개중 제일 냉정하게 판단하는 녀석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정확히 짚어 가며 본인의 예상에 대한 타당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긴…. 그때도 비슷하긴 했지.”

“야, 니들 지금 라영 스님 무시하는 거야? 몇 년간 개과천선해서 거미줄 친 거 못 봤냐고.”

“아후, 섹드립 꺼지세요.”

온갖 드립이 난무하는 대화의 장을 정리하고 영혼 털린 모습으로 빨리 먹으라고 부추기는 건 라영뿐이었다. 외롭다, 정말. 원래 스포트라이트는 외로운 법이라는 걸 이렇게 결혼 발표로 체험하다니.

고기에 정신이 팔린 친구들은 쌈을 싸고 파채를 섞으며 한참 배를 불린 후에야 본격적으로 심문에 들어갔다.

“자, 이제 배도 채웠으니 제대로 추궁을 해 보실까? 그래, 춘부장님 함자는 어떻게 되시고?”

참으로 한결 같은 컨셉이로다.

“빙구야. 청첩장 펼쳐 보면 안 보이냐? 으이구,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을 해요.”

“어디 보자. 정준익, 정준익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야, 검색해 봐.”

“이미 검색하고 있거든여? 뭐? HY? 진심? 여기 너네 회사 모기업 아니야?”

“그치…. 우리 회사가 여기 계열사지….”

이제는 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심문에 임했다. 독립운동가 위인들 정말 존경합니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압력에 바로 굴복해서 창씨개명하고 친일파가 되는 거 아니야? 군부정권 때 학생 운동 했어도 고문 조금만 할라치면 바로 술술 불었겠어. 언제 태어나도 정신 고문 하나면 바로 매국노 확정이다. 나약한 나 새끼….

“우와, 라영이 HY가(家) 사람 되는 거야, 이제?”

“재벌 식구 되어도 우리 만나 주나여?”

“잠깐, 이보게들! 신랑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어디, 어디?”

“여기 보시게들! 신랑 정이헌!”

“아! 이 사람 그 사람 맞지? 우리 교양 때.”

“그러네. 그러고 보니 이분 그때도 HY 대표 아들이라고 유명했었잖아.”

“뭐? 너네 내 애인 알아?”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들끼리 신난 번잡한 대화 속에서 무념무상의 마음으로 멍하니 앉아 있던 라영은 희한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흐름에 화들짝 놀라서 친구들을 추궁했다. 그 질문에 세 명 다 눈을 흘기고 절로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이 라영을 바라보았다.

“저 저…. 쯧쯧. 저거 또 시작했다.”

“뇌에 구멍난 거 여전하네, 우리 라영이. 아주 한결같아.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해.”

“님, 기억 안 나세여? 우리 이분이랑 같이 교양 들었잖아여. 2학년 때.”

“맞아. 그때 과목 뭐였지? 교수 얼굴만 떠오르고 남은 게 하나도 없어.”

“또 시작이네, 이 빙구가. 매스미디어의 이해! 교필! 2학년 2학기!”

“와, 너 똑똑하다? 그게 기억이 난다고?”

그 얘기를 듣자마자 다행히 뇌세포가 남아 있던 라영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급하게 물었다.

“아니, 잠깐. 다들 진정해 봐. 그러니까 우리 2학년 2학기 때…. 교필. 매스미디어의 이해. 거기 수업을 같이 들었다고? 내 예비 신랑이랑?”

경멸의 눈초리 2차전이 시작됐다.

“님. 님부터 진정을 좀 하세요.”

“이라영. 진짜 기억 안 나? 너 좀! 네가 기억하고 싶은 거만 기억하는 것 좀 고쳐라.”

“아닐세, 자네. 이라영은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거기에 관심이 없었던 걸세. 옛날부터 그랬잖아. 자기 좋아하는 거만 집중하고 주변에 뭐 있는지 하나도 모르고.”

“그치. 라영이가 시야가 엄청 좁지. 엄청.”

얼마나 좁은지 온몸으로 표현을 하려고 두 손바닥을 쫙 펴서 마주 대고 동전 하나 들어갈 만큼 겨우 벌리고는 이라영 시야는 이만큼이라며 강조한다. 졸지에 시야가 더럽게 좁고 기억력도 붕어 수준에 진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됐다.

“이건 말도 안 돼….”

“난 네가 이걸 모르고 결혼한다는 게 더 신기하다. 이분도 그 얘기 안 해?”

“안 해…! 안 했어, 그런 얘기 한 번도…!”

정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에 없다.

“하긴. 둘 다 비슷한 사람이라 서로 기억 못 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 원래 부부는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하는 거라며. 아닌가? 부부는 닮는 건가? 암튼 그거.”

“서로 기억 못 하기는, 지랄. 나 이 사람이 라영이 엄청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거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데.”

“근데 그때는 왜 말 안 해 줬어?”

“그때 너를 그렇게 집요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한둘이었어? 알파, 베타 다 말할 것도 없었지.”

“야, 너는 진짜 발군의 기억력이다. 미쳤다. 메모리 몇 기가야? 1테라인가?”

개드립으로 인한 경멸의 눈초리는 이제 라영만의 것이 아닌 서로에게도 전염됐다.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하면서도 오랜만에 화제가 된 과거의 이야기가 한창 물이 올랐는지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졌다.

“이분. 그때도 좀 눈에 띄었잖아. 키랑 덩치가 워낙 크기도 해서 그렇지만. 맨날 맨 뒷자리에 앉아서 팔짱 끼고.”

“그러네. 맞네. 맨날 검은색 후드나 모자 같은 거 푹 눌러쓰고 다니셨지. 진짜 무서웠었는데. 재벌이라는데 행색은 무슨 브루클린 뒷골목 갱 같았다고.”

“맞다. 어둠의 자식인 줄 알았네, 그려.”

당장 품에서 총이랑 마약을 꺼낼 비주얼이었다고, 멕시코 카르텔도 울고 갔을 거라며 열변을 토하면서 당시의 이헌을 회상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기가 막혔다.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이해가 안 갔으니까. 내 애인은 후드나 모자 같은 거 전혀 안 쓰는데? 그리고 어둠의 자식은커녕 이렇게 웃음이 다정한 내 귀여운 호구인데…….

“너네 착각한 거 아니야? 그런 사람 아닌데….”

“답답하다, 증말. 라영이 뇌세포! 일 좀 하세요!”

“너 사진 없어? 좀 보여 줘 봐. 우리가 진실을 밝혀 주지.”

그 말에 라영이 폰을 꺼내 들고 같이 찍은 사진들 몇 개를 보여 주었다. 친구들은 바로 폰을 넘겨받아 사진을 이리 저리 넘겨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이 사람 맞아, 확실해. 어딜 내 기억력을!”

“그래, 어딜 지혁이 기억력을! 며칠 전에도 뭔 얘기하다가 학교 다닐 때 빌려간 오만 원 타령을 하면서 날 병신 취급 하길래 내가 냉큼 갚았다, 진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분 맞아. 확실해.”

“나도 딱 보니 알겠소이다. 근데 분위기랑 스타일이 완전히 바뀌긴 했네.”

“그치. 이분 맨날 인상 쓴 채로 한마디도 안 하고 딱 자기 같은 친구 몇 명하고만 다녔어.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이 사람은 웃으면 이런 표정이구나.”

소란스럽게 떠드는 말들이 더 이상 라영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낮부터 저녁까지 폭탄이 연달아 터지듯이 밝혀진 사실들에 더블 콤보를 맞고 K.O 돼서 링 위에 자빠진 느낌이다. 혼란의 도가니탕, 혼돈의 카오스가 아닐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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