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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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의 파랗고 높은 아침의 하늘이 라영을 반겼다.

그런 하늘빛을 닮은 보트넥이 도톰한 티셔츠 위로 귀여운 스카프가 가느다란 목에 매달려 있다. 평소 조금씩 중성적인 아이템 사용을 즐기는 라영의 오늘의 포인트였다. 발목이 보이는 면바지 아래로 차분한 도트 무늬 양말 또한 마찬가지다.

일교차를 늘 걱정하는 라영의 팔에는 재킷과 가방이 기분이 좋은 마음을 반영하듯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린다.

출근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대한 빌딩 안으로 들어가 로비에서 사원증을 꺼내 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건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봐? 이게 월요일 아침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야? 옷에 힘준 것도 그렇고…. 대체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굿모닝. 무슨 일이 있기는.”

경현의 잔뜩 능글거리는 질문에 라영은 눈을 돌리며 모르는 척을 했다.

“어허, 사나이들끼리 비밀이 어디 있어? 무슨 일인데? 뭔데?”

“아 거참, 카드부터 좀 찍읍시다, 좀.”

혹시라도 주변에 다른 부서 사람들이 들을까 봐 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 모습을 본 경현은 더 안달이 나서 라영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8층입니다.}

띵 소리와 함께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안에 있던 침묵의 인파 중에 라영과 경현이 내렸다.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탈출하자마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든 라영은 막 도착한 메시지를 눈으로 읽었다.

[안녕하십니까, 라영 씨. 회사에는 잘 도착했나요? 출근길이 복잡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네요. 오늘 하루도 기분 좋고 즐겁게 시작하길 바라요.]

메시지 내용은 너무나 진부하고 재미없는 게 마치 광고 문자의 첫 시작과 유사하지만 이걸 보낸 사람이 바로 누구던가. 지난 주말부터 라영과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를 시작한 이헌이 아닌가.

그 생각만으로도 입가에서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와서 주체를 할 수가 없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의 연애야? 이게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참한 알파라지?

그렇게 금요일 밤을 함께 보내고 다음 날 조식까지 착실히 챙겨 먹고 나와서 근교에 드라이브까지 다녀왔다.

한번 몸을 나눈 커플이 으레 그렇듯이 쉴 새 없이 손을 잡고 운전을 하고,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숲을 걷고, 커피를 마셨으며, 눈만 마주치면 키스를 나눴다. 그 키스는 아주 가벼운 베이비 키스일 때도 있었으며 짙은 프렌치 키스일 때도 있었고 라영의 허리가 뒤로 한껏 젖혀진 할리우드 키스일 때도 있었다.

헤어지는 라영의 오피스텔 앞에서는 십대들의 첫 연애처럼 당신이 먼저 들어가라, 아니 당신이 먼저 가라, 달콤한 실랑이를 하며 한 시간이나 길에서 시간을 버렸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어떡해. 이게 바로 사랑인가 봐. 완전 사랑에 빠졌나 봐.

신나게 히죽거리며 지난 주말 일을 떠올리는 라영을 보며 경현이눈을 가늘게 뜨고 직구를 날렸다.

“야, 너 연애 시작했지?”

“뭐, 뭐, 뭐야? 어떻게 알았어?”

이 자식 은근히 예리한데…? 원래 라영을 알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만한 변화였지만 라영은 본인이 무척 칼 같고 철두철미하다는 착각을 단단히 하고 산 인생이 근 29년이었다.

“지금 네 모습을 봤다면 백 명 중 백 명이 나랑 똑같이 말할 거다. 어떻게 알기는 무슨, 온몸으로 말하고 있고만.”

그 얘기를 듣자마자 본인의 상태를 조금은 자각한 라영은 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

“어떤 사람인데? 어디서 만났어?”

“별거 아냐. 센터에서 하는 매칭 시스템에 요청해서 선으로 만났어.”

“뭐? 선? 아 참, 너 결혼해야 한다고 했지. 근데 그 얘기 들은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러게. 이게 바로 운명인가 봐. 그지같이 건조하던 내 인생에 처음으로 내려온 이상형이야.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하다니.”

절로 소녀처럼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꿈을 꾸듯이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라영을 보며 베타인 경현은 사내새끼가 징그럽다는 듯 양팔을 문지르며 물었다.

“어떤 알파길래 그래? 자세히 좀 말해 봐.”

경현은 안달 난 듯 라영을 재촉했다. 역시 남의 썸과 연애는 듣기만 해도 재밌다. 괜히 사람들이 연예인 연애 소식에 열광하며 클릭하는 게 아니다. 기계적으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데스크탑부터 부팅해 놓은 채 머그잔을 들고 탕비실로 향하는 두 남자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목욕탕 아줌마들의 가십거리 나누는 평상처럼 구수하게 변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제까지 만나 온 알파들이 대체로 우성 알파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처럼 그렇게 오만할 수가 없었거든?”

“걔들은 집안 배경이나 본인 피지컬을 보면 그렇게 오만할 만하잖아?”

“아냐, 이건 직접 겪어 봐야 알아. 오만함을 넘어서 얼마나 이기적이고 재수 없는지. 특히 나처럼 평범한 배경의 우성 오메가는 아주 자기들 소유라고 당연시 생각하는 게 있어. 그게 특별히 그들의 재수 없는 부분이지.”

라영이 과거의 알파들을 떠올리고 치를 떨며 말하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기계적으로 캡슐을 골라 내리고 있다.

“근데 이 사람은 그런 거가 하나도 없어. 얼마나 겸손하고 다정하고 매너가 있는지 몰라. 얼굴은 완전히 내가 바로 우성 알파의 왕이다, 라고 써 붙이고 다니게 생겨가지고, 그 달달하고 차분한 저음 하며……. 그 목소리로 계속 나 살피면서 하나하나 배려해 주는데 아주 녹아내릴 지경이야.”

양손으로 커피가 가득 찬 머그잔을 잡고 허공을 바라보며 꿈을 꾸듯 말하는 모습이 거의 디즈니의 한 장면이다. 그 모습을 보며 경현이 치를 떨었다.

“아니, 그런 공주님 대접이 네가 원하던 거야?”

“그러게.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 봤는데 이게 체질인가 봐.”

“으…. 아무리 오메가라도 그렇지. 너 그냥 고추 확 떼 버려라.”

결국 친우의 연애를 눈꼴셔 하던 경현의 입에서 할아버지들이나 썼을 법한 쌍팔년도 멘트까지 나오고 말았다.

“진짜 하나하나 다 잘 맞아. 이게 바로 운명인가 봐. 빨리 이 사람하고 결혼하고 같이 살고 싶어.”

그 몽중에 몽롱한 말을 듣던 경현이 기겁을 하며 라영의 등짝을 내려쳤다. 그 스매싱에 머그잔에 담긴 갓 뽑힌 커피가 쏟아질 듯 출렁거렸다.

“야, 커피!”

“너 진짜 큰일 날 소리 하네. 그 사람 며칠 봤다고 이래? 너 어르신들이 괜히 사람은 사계절을 만나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래 봐야 그 사람 본성이 나온다고. 대체 어느 누가 막 연애 시작할 때 그렇게 안 잘 해 주냔 말이야?”

캡슐로 내려 받은 뜨거운 커피에 막 부은 차가운 크림을 머들러로 저으며 경현이 이어 말했다.

“막 연애 시작해서 신나는 건 알겠는데 마음 좀 차분히 가라 앉혀. 너무 들떴다, 너. 이러다가 가장 중요한 거, 제일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거를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는 수가 있어.”

마치 인생의 대단한 선배인 것처럼 충고를 날린 경현은 완성된 커피를 들고 유유히 자리로 돌아갔다.

탕비실에 덩그러니 남은 라영은 그 말에 찬물이 끼얹어진 양 미지근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띠리링}

톡이 오는 소리에 뒷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더니 양반은 안 되는 이헌에게서 또 메시지가 와 있다.

[오전 업무도 힘내요. 보고 싶어요.]

이모티콘 하나 없이 온점까지 정확하게 찍힌 메시지에도 보낸 이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자 차분했던 마음이 다시 들끓는다. 가슴이 말랑말랑해지고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간질간질하다.

[나도 보고싶어요(잔망스러운 고양이가 눈물을 그렁그렁하는 이모티콘)]

서로 이렇게나 좋은데 이게 뭐겠어. 사랑이지. 자고로 사랑은 ‘빠져야’ 제맛이다. 다시 풍덩, 그 간질거리는 마음속으로 뛰어들었다.

* * *

직장인들의 퇴근이 임박한 저녁 시간의 사무실은 퇴근을 준비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과 정시 퇴근은 꿈도 꿀 수 없다는 듯이 당연하게 야근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갈렸다.

라영은 메모지를 떼고 켜져 있던 창을 닫으며 데스크탑을 끌 준비를 했다.

“진희 님, 저 지금 정리합니다. MU소프트에서 다시 수정해 달라고 요청 들어온 거 없죠? 내가 마지막으로 4시에 기획팀에 확인했을 때는 없었는데 혹시 이후에 들어온 게 있나요?”

라영이 자리를 정리하며 옆자리 후배에게 물었다.

“네. 그 이후에 들어온 건 없어요. 아휴, 걔네들은 왜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은지 돈 좀 많이 줬다고 수정사항을 너무 급하게 요구하니까… 아무리 요즘 잘나간다고 해도 이거 너무 갑질 아닌가요?”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마무리돼서 더 없을 것 같긴 한데…….”

“또 요구사항 들어오면 이번에는 진짜 기획실에 쳐들어가서 전창식 AE님 앞에서 울 거예요, 저. 진짜 이번 건 때문에 다시는 게임 광고 하기 싫어졌어요.”

“이러면서 나중에 들어오면 또 득달같이 달려들 거면서.”

라영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실제로 처음에 유명 게임 회사의 새 게임이 출시되어 경쟁 PT가 붙었을 때 자기가 그 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동동거리던 게 후배인 이진희였다. 자기는 걸음마 이후 인생에서 게임 없이 살아온 적이 없어서 잘할 수 있다고 눈이 반짝이던 모습은 막상 팀이 편성되고 1차 회의 이후 먼지처럼 사라지고 지금은 온통 가루가 된 모습이다.

“아무튼 팀장님도 가시고 수정 사항도 없다니까 전 오늘은 이만 퇴근합니다. 진희 님도 일 없으면 슬슬 정리해요.”

“네, 라영 님. 내일 뵙겠습니다.”

라영은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어찌나 초조한지, 30분 전에 온 톡을 다시 확인하며 발을 종종거렸다.

[라영 씨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천천히 조심히 나오세요.]

벌써 30분이나 기다렸을 님을 생각하니 애가 타 죽겠다.

급하게 로비를 지나서 회전문을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키가 큰 인영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테헤란로의 퇴근하는 바쁜 사람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100미터 밖에서 봤을 경우에도 확연히 눈에 띌 만한 외형이다. 실제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한 번씩 쳐다보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더 뿌듯함이 차올랐다. 저 사람이 제 알파입니다, 여러분! 제 거라구요!

근처에 다가가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헌이 뭔가를 느낀 것처럼 고개를 들어서 라영을 바로 찾아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냉랭했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모습을 보니 커다란 모란꽃이 개화하는 걸 본 기분이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요? 하고 있던 업무 정리하느라….”

“괜찮습니다. 라영 씨를 기다리는 시간도 제게는 기쁨인걸요.”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이 어린 왕자의 여우라도 된 듯한 모습이다. 아, 당신이라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3시가 아니라 전날 자정부터 신이 날 거야.

“차를 세울 곳이 없어서 근처에 대 놨는데 좀 걸어도 괜찮을까요?”

“아, 여기 정말 차 댈 곳이 없는데 주차하느라 애 먹으셨겠어요. 그럼 갈까요?”

“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라영 씨.”

“근데 그 전에…….”

라영은 말을 하며 살포시 이헌의 손을 잡았다. 제 알파의 손은 그 몸의 근육량을 대변하듯 따뜻하다. 근육이 많을수록 발산하는 열이 많다더니 과연 손도 몸도 항상 뜨끈하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수족냉증에 시달리는 라영에게 딱 맞는 손이다. 어쩜 이렇게 온도마저 잘 맞을까. 이쯤 되니 옷에 달린 단추 모양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아내서 천생연분 이유를 만들어 낼 지경이다.

이헌의 차는 빌딩들 사이 유료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이런 대형 세단은 주로 아저씨들이 탄다고 생각했는데 차 브랜드 자체가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회사의 차이다 보니, 생각보다 올드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부의 레트로 계통의 클래식한 디자인의 우드와 갈색 가죽의 보드도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줄곧 저를 닮은 디자인적인 소형차를 몰고 다녔던 라영이 평소에 느낄 수 없었던 스무스한 드라이빙과 안락함이 맘에 들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 라영의 귀여운 차에 이헌이 탄다면 차 안이 꽉 차고 말 테다. 라영은 혼자 상상하며 키득거렸다.

이헌은 손수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며칠 새 공주님 대접이 몸에 익어 버린 라영이 냉큼 올라탔다.

차는 조용한 엔진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렸다.

소공동에 있는 고전적인 호텔의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 개별 룸에 마주 앉아 전채로 서빙 된 냉채를 먹고 있을 때, 라영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러고 보니 이헌 씨 집은 어디예요?”

결혼 타령까지 다 해 놓고는 일찍도 물어본다. 그 질문을 들은 이헌이 젓가락질을 잠깐 멈칫하더니 내려놓고 자스민 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본가는 평창동이긴 한데… 귀국하고서는 본가에 들어가지 않고 나와서 살고 있습니다. 역삼동의 집을 임시로 구해서 잠시 머물고 있어요.”

우성 알파들이 대부분 재력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차를 보면서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본가 자택이나 은근히 대화 중에 새어 나오는 국내외 사업 이야기를 들으니 라영의 생각보다 재력이 더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서 밥을 사 주겠지.

“정말? 의외로 우리 회사 근처네. 생각보다 엄청 가까운데 있었네요.”

그 대답에 이헌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다시 냉채를 집어 들었다.

“이헌 씨는 어쩌다가 맞선에 나오게 된 거예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어요. 라영 씨는 아직 20대인데 왜 센터에서 주관하는 매칭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셨습니까?”

“아니…, 20대긴 해도 막차라서 민망한데…. 음, 혹시 제가 우성 오메가인 거 알고 계시죠?”

라영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최대한 담백하게 설명하기 위해 머릿속을 정리했다.

“네. 알고는 있습니다만…….”

“바로 그래서예요. 특히 저는 극우성 오메가라 특별 관리 대상이기도 했고, 이제까지 나라에서 주는 혜택을 거의 다 이용해 왔거든요. 그렇다 보니 슬슬 압박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리고 그거 알고 계세요?”

“어떤 거 말인가요?”

“통계적으로 우성 오메가는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해요. 뭐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여러 가지로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하니까 빨리 각인자를 만들어 안전한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있고, 출산자에게 우대 혜택도 많은 데다가, 나라에서 워낙 권장하기도 하고요.”

“하긴 형질자는 각인을 하면 서로의 페로몬에만 흥분을 하게 되니까 그럴 법도 하네요.”

“네, 히트 사이클도 안정되고 서로의 성 페로몬에만 육체적으로 반응하니까 좀 더 일상이 안정적이죠.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칩이나 약으로 누르는 것도 인공적인 거라 아무래도 건강에 안 좋다고들 하니까요. 실제로 저처럼 문제가 생긴 케이스가 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죠.”

“확실히 그렇겠군요.”

이헌은 다음 요리를 서빙하러 온 서버에게 라영의 접시를 먼저 권하며 그 이야기에 수긍했다. 알파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생각해 보지 못한 오메가의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알파에 비해서 오메가의 힘든 점이죠. 알파의 러트 사이클은 오메가의 히트에만 반응해서 오는 게 맞죠?”

서버가 나가자마자 라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이헌 씨는 한 번도 러트를 겪은 적이 없나요?”

“네. 없습니다. 저는 한 오메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어서요.”

어머 어머 어머, 이 사람 좀 봐. 순딩한 이유가 있었구나. 과거에 연연하는 편은 아니지만 역시 과거의 잊히지 않는 기억을 남긴 오랜 구 남친, 구 여친 존재는 적을수록 좋다. 길 가다가 갑자기 구 애인이라고 미묘하게 눈빛을 나누면서 지나가거나, 다짜고짜 싸대기 맞는 일은 없겠다 싶다.

“그리고 이건 제 주변에서 겪은 건데, 확실히 우성 오메가는 주변에서 가만 놔두질 않더라고요. 다들 불같은 대시에 넘어가서 일찍들 결혼하고 말았어요.”

“우성 오메가 친구가 많으신가요?”

“다 어릴 때 센터에서 같이 교육받던 친구들이죠. 이젠 시집, 장가가서 연락도 잘 안 돼요.”

“그런 경우라면 더더욱 라영 씨가 일찍 결혼하지 않고 센터 맞선을 이용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라영 자신도 정말 의문이라는 듯이 눈알을 굴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참 주변에 사람도 없고 만남의 기회도 너무 없었다. 물론 미래에 대한 열정으로 연애에 대해 적극적으로 임한 것이 아니라할 말은 없지만.

“그러게요. 이상하게 직장 생활 시작하고부터는 인기가 없어요. 아니 주변에 알파도 잘 없었던 거 같아요. 워낙 일이 바빠서 집, 회사, 집, 회사 루틴이긴 했어도 이렇게 주변에 알파가 없을 수가 있는지. 간혹 광고주 쪽의 알파에게 대시를 받기는 했는데, 일이 바빠서 늘 그냥 썸 정도로 끝나더라고요. 연애운이 대학생 때로 끝났나 봐요…….”

“그 연애운…. 절 만나기 위해 아껴 놨다가 쓴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무룩하게 절절매는 모습에 말실수를 했나 아차 싶은 것도 잠시. 달콤한 말을 하며 안달 내는 이 남자를 더 들썩이게 만들고 싶어졌다.

“그럼 앞으로 이헌 씨가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어 주세요.”

들고 있던 꽃 빵을 접시에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살짝 턱을 괴면서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에 라영의 웃음이 터졌다.

“아니, 하하하. 정이헌 씨, 무슨 제가 직장 상사예요? 말 좀 편하게 하셔도 돼요.”

라영의 웃음을 보던 이헌이 시종일관 살포시 미소 짓고 있던 얼굴에 더 웃음을 새기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라영 씨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저는 이미 살짝 그러고 있지 않아요? 불편할 텐데…….”

“아니요.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해야지만 다정해 보인다고 하더군요.”

이헌이 그린 듯이 완벽한 미소를 만들어 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이헌 씨는 제가 만나 본 알파 중에 가장 다정한 사람인데요?”

“그래서… 그래서입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다짐을 되뇌는데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뭐 어때, 이 사람이 다정하면 나야 감사할 따름이지 뭐.

“처음에 저에게 맞선에 나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물으셨죠?”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이헌이 라영에게 되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못 들었네요. 궁금해요.”

“당신을.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라영도 지금 자신의 텐션이 지나치게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애가 처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보증되고 건강한 연애가 처음이라 안심이 되기도 하고, 딱딱한 선 자리이기는 했어도 서로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이 마치 동화 같은 운명이라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십대 시절을 마지막으로 작별했던 메르헨적인 사고가 뇌내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실제로 매일매일 가슴속 나비의 날갯짓이 마치 팅커벨이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하니 당장 디즈니 영화에라도 뛰어들어야 될 판이다.

내가 이렇게 결혼을 고파 했었나 싶었지만, 이제까지 일에 치여 건조하게 살 때는 몰랐는데, 늘 신경 써 주고 다정하게 챙겨 주는 사람이 막상 옆에 있어 보니까 절대 다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진부한 고백의 멘트를 운명이라고 치부하고, 빨리 결혼해서 함께 잠들고 함께 눈 뜨고 싶다는 생각을 만난 지 일주일 만에 하고 있는 게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실제로 한두 달 만나고 결혼하는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청첩장을 받으며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막상 결혼식에 가 보면 ‘어라? 신부가 내가 7년 전부터 알던 그 사람이 아닌데?’라는 얘기를 숨어서 했을 때 ‘헤어지고 세 달 만난 사람과 결혼하는 거래.’라는 대답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이처럼 모든 사람이 오래 만난 사람과 행복한 결혼에 골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주변에서 충분히 보아 왔다. 게다가 보통 맞선은 5번의 만남 안에 결혼을 결정하는 게 정석이라고들 하지 않나. 심지어 일본에서는 세 번이라는데? 만난 횟수를 날로 따지면 벌써 다섯 번은 만났다. 결혼을 목적으로 한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결혼에 골인하는 거지. 실제로 50년 전만 해도 이게 일반적이었다고 생각하며 힘껏 뇌내 긍정 회로를 돌렸다.

나는 절대 급한 게 아니야. 절대 급하지 않아.

거의 자기 세뇌나 다름없었다.

* * *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회의 공지가 떴다. 하긴 이 업계에 퇴근 시간이 의미가 있나.

오늘은 회의가 저녁에 잡혀서 야근하고 퇴근한다고 이헌에게 톡을 보내 놓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번 건은 누가 가져온 거야? 기획 4팀 본부장님이 가져온 건가?”

“아니 4팀의 고 차장님이 가져온 거래.”

“아아…. 전에도 제약회사 일 많이 했지.”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묻는 라영의 물음에 평소 기획 4팀의 고석진 AE와 합을 종종 맞춰 오던 경현이 귀에다 대고 조용히 대답했다. 이번 광고도 경현과 함께 들어간다. 고 차장이 직접 따 온 거라면 경쟁 PT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테니 다행이다. 안 그래도 몸 상태를 지켜보면서 휴가 일정을 고민하고 있던 라영은 일의 기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방이 간유리로 둘러싸인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획팀은 이미 먼저 회의를 하고 있었고, 제작팀인 카피라이터 경현과 아트 디렉터 라영과 라영의 부사수 진희가 함께 들어가 앉았다. 대규모 광고는 아니겠군. 모인 인원의 규모를 보며 라영은 다시 안심을 했다.

자리에 착석한 제작팀을 보며 고 차장은 미리 프린트한 A4 용지를 나눠 주고 말을 시작했다.

“정동제약 베타 여성용 경구피임약 광고입니다. KPI[2]는 경구피임약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너튜브 조회 수 1000만입니다. 규모와 예산은 보시는 대로 지면에 나와 있고, 광고주는 이제까지 경구피임약이 주는 여러 가지 이점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편견과 아주 작은 부분의 부작용으로 인식이 좋지 않은 점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회의실에 앉은 모두가 종이를 넘기고 패드에서 공유된 이미지를 번갈아 보며 그 말에 집중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경구피임약의 이미지가 좀 쉬쉬하는 분위기이고, 마치 이걸 먹는 사람이 난잡한 사생활을 가졌을 것이라고 수상한 시선으로 보아 오는 것을 근절시키고 싶어 해요. 즉,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약을 챙겨 먹는 현대 여성의 이미지를 긍정적이고 세련되게 뽑아내자고 저희 기획팀에서 킥오프 미팅 이후에 기획안을 좁혔고요. 제작팀에서는 최대한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하게 아트웍을 뽑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먹는 나 자신은 현대적이고 현명한 멋진 여성이다’라는 메시지를 뽑아내면 되는 거 맞나요?”

경현이 고 차장을 향해 질문하는 모습을 보며 라영은 자신이 왜 여기 앉아 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최근 제작팀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아트웍을 잘 뽑기로 소문난 디텍터이기 때문이다. 라영도 펜슬로 미간을 긁적이다 고 차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체적으로 비주얼라이징이 젊은 여성층에서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거여야 하겠네요. 너튜브 천만이라……. 이건 단순히 이미지 가지고만은 안 되겠는데요? 유머나 이슈가 될 만한 요소를 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그쪽으로 아이디어를 짜고 있습니다.”

기획팀에서 하는 말에 라영은 촬영 쪽으로 방향을 틀며 말했다.

“아직 생각해 놓은 PD는 없으시죠? 이번에는 이쪽은 제가 전담해도 되겠습니까?”

“누구 생각해 놓은 사람이라도 있어?”

고 차장은 제작팀에서 결과물만 잘 만들어 준다면 융통성 있게 자율성을 주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도 있는 사람이었다. 라영은 그걸 잘 알기에 편안하게 대꾸했다.

“아직 마음속에서 픽스는 아닌데…. 요즘 영상 잘 뽑기로 유명한 젊은 PD 하우스 한두 군데 딱 떠오르네요. 아직 업계에서 유명하지는 않은데 결과물이 좋아요. 최근에 눈여겨보고 있었거든요.”

“아, 어디 말하는지 알 것 같아. 그쪽이라면 저도 찬성입니다. 어쨌든 광고주가 원하는 게 기존 제약 광고의 틀에서 좀 벗어나길 원하는 거 같으니까. 감독도 그쪽 계통으로 가겠네?”

“네. 좀 젊은 감독들 중에서 같이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PD 추천도 좀 받고.”

회의실에 한껏 열기가 올랐고 어느새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을 때 유리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 이라영 님 계십니까?”

처음 보는 남자가 양손에 무겁게 짐을 들고 라영을 찾는다.

“네. 제가 이라영입니다.”

라영이 어리둥절하면서 수상한 이에게 대답했다. 자신이 아무리 안면 인식 장애 수준으로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지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회사를 오가며 본 얼굴이 아니다.

“여기가 맞군요. 저녁 식사 배달 왔습니다.”

남자의 지시에 뒤에 있던 두 명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서며 테이블에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 일회용기를 차례차례 내려놓는다.

“이 대리 저녁 주문했어?”

꼭 직함을 붙여서 사람을 부르는 고지식한 고 차장이 묻는다.

“제가 주문한 게 아닌데요…. 이상하다.”

그 말을 듣던 남자가 라영에게 웃으면서 명함을 건넸다.

“정이헌 이사님 비서입니다. 이사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정중하게 배달을 왔던 사람은 아주 깔끔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 버렸다. 바람같이 떠난 이들을 저도 모르게 배웅한 라영이 어리둥절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보니, 출출할 텐데 밥 먹으면서 일하라는 이헌의 응원 메시지가 와 있다.

그나저나 내 애인이 이사님인 줄은 처음 알았네. 대체 어디 이사지? 라영이 생각에 빠져서 멍하니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은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 펼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기 청담동의 ‘쿠라타야’ 아니야? 여기가 배달이 되는 줄은 처음 알았네?”

“우와…. 안에도 어마어마한데요? 라영 님,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이거 마치고 퇴근하면서 배달 음식이나 시키려고 했는데 횡재했네. 이 대리 고마워!”

“공짜로 받아먹자니 미안하네. 다음에 내가 요 앞에서 커피 쏠게.”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회의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까 보는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라영도 웃음이 나왔다.

“아니에요. 다들 맛있게 드십시오.”

라영도 젓가락을 까며 그들에게 대답했다. 오늘도 이헌은 차곡차곡 라영의 마음속에 다정함 포인트를 적립하고 있다. 이걸 다 모으면 상으로 뭘 줘야 하나? 종이에 인쇄된 포도송이 그림에 칭찬 스티커를 하나씩 붙이듯 다정함을 적립하는 이헌을 생각하자 라영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헌 씨는 운명이라는 말 믿어 본 적 있어요?”

시원한 날씨를 음미하며 조금은 번잡한 주말의 공원을 산책 삼아 손을 맞잡고 천천히 길을 걸어가던 중에 갑자기 뜬금없이 라영이 이헌에게 물었다. 그 말에 이헌이 빙그레 웃으며 라영을 돌아보았다. 그 돌아보는 얼굴이 마치 카메라 셔터에 손을 떼지 않고 연사를 누른 것처럼 아주 느리게, 각도를 아주 작게 쪼개듯이 라영의 눈 안에 장면 장면 스며들었다.

“운명… 말입니까?”

“네. 운명이요.”

라영이 다시 한번 단어를 강조했다. 실제로 요즘 라영은 이헌을 만나고 난 뒤 부쩍 감성적이어져서 운명이라는 말을 믿고 있던 참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손을 잡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더듬으며 난감하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운명을 믿는다는 낭만론자 같은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해 드리고 싶은데…. 사실은 저는 운명을 전혀 믿지 않는 주의였습니다.”

그 말에 라영은 조금 실망을 했다. 이 마음이 분명 같은 온도라고 믿고 있었는데.

“적어도 20대 중반까지는 그랬었죠.”

“그럼 그 이후에는 믿게 되었나요?”

“그 이후에도 그렇게 확신할 정도로 운명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이 나를 위해 움직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죠.”

“…….”

“분명 운명 같은 어떠한 실체는 존재하는 것 같은데, 이게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으니 오기가 생겼달까요.”

천천히 읊조리던 이헌은 걸음을 멈추고 아예 라영 쪽으로 몸을 돌려 두 손을 맞잡았다. 혼자 있던 반대쪽 손도 잡히니 온도 차이가 더 극명하게 재차 느껴졌다. 따뜻한 남자의 손의 온기가 기분 좋게 옮겨 왔다. 그의 마음이 손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아서 라영은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 붉어진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이헌은 라영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처럼 천천히 숭배하듯이 내린 입맞춤에 정결함과 숭고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감은 눈을 떴을 때 막상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눈동자에는 정염이나 욕구 같은 어떤 결의가 숨겨져 있었다. 다정함과 정결함을 몸으로 표현하면서도 눈에는 정열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 그 괴리감에 라영은 숨이 막혔다.

정열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운명이라는 어떠한 이길 수 없는 인력 같은 것이 확실히 존재하지만, 그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건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어떤 우연 같은 일 속에서도 가능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가 미래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그런가요?”

“네.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딘지 모호하면서도 확신을 가진 철학적인 말에 라영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헌 씨는 내가 당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질문을 듣자 이헌은 입꼬리를 한층 올리며 라영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질문에는 확실하게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

“네. 당신이 나의 운명입니다.”

거리의 사람들을 의식할 새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부여잡고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이헌 씨, 정말 잘 먹었어요.”

“저도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오늘도 평소처럼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고급스러운 고재로 섬세하게 조각된 문을 열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라영은 자신이 친히 알아보고 예약을 해서 품 안의 오메가를 열심히 먹여 놓고는 감사를 전하는 말에 도리어 당신 덕분이라고 말하는 알파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이헌은 어떻게 알았는지 라영이 좋아하는 메뉴와 종목을 선택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안 그래도 별다른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라영은 부쩍 자신의 알파의 섬세한 배려에 요사이 이헌과 함께하는 매 식사 시간을 즐겁게 즐기며 지내던 참이었다. 미각의 만족은 더 없는 삶의 만족까지 함께 불러왔다.

배가 부르니 더 사랑스럽게 보이는 이헌을 보며 주차장까지 손을 잡고 가려고 은근히 손을 뻗는데 뒤에서 돼지가 멱을 따는 듯한 듣기 싫은 큰 소리가 났다.

“야! 정이헌!”

뭐지? 다짜고짜 남의 애인을 ‘야’라고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퍽 소리가 나며 이헌이 휘청거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내 알파가 맞은 거야? 누가 내 애인을 때렸어?

“이봐요!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순간적으로 자기보다 큰 알파를 뒤로 보내며 감싼 라영은 이헌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거로 보이는 상대방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치안이 좋고 어디나 CCTV가 있을 정도로 발달한 대한민국에서 퍽치기라니?

라영과 이헌의 반대쪽 복도에 있었던 듯한 남자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잔뜩 씩씩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이쪽이 맞은 사람인 줄 알겠다.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한 라영은 갑자기 피해자가 된 자신의 알파를 더 뒤로 보내며 한두 걸음 더 물러났다. 아무래도 미친개를 만난 것 같다.

“이 비열한 자식! 너 잘 만났다!”

남자는 한 대 더 칠 듯이 몸집을 부풀리며 두 사람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 너 때문에…! 다 너 때문에…!”

그런데 남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지, 이 신박한 또라이는…? 라영은 지금 가해자가 피해자 타령을 하는 황당한 꼴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이보세요. 갑자기 와서 사람을 때리다니 제정신입니까?”

라영이 흥분한 남자를 향해 같이 소리를 지르는데 뒤쪽에서 이헌이 라영을 감싸 안으며 잡아당겼다.

“라영 씨, 괜찮아요. 진정해요.”

“아니, 난데없이 나타나서 사람을 패는데 이게 어떻게 괜찮아요? 이봐요! 당장 사과하세요!”

“넌 뭐야? 외부인은 빠져!”

큰 소리가 오가고 있는데 뒤쪽에서 또 다른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나서 흥분한 남자를 껴안으며 진정시켰다.

“이사님, 진정하세요. 여기 공공장소입니다…!”

“정 이사님, 제발. 저쪽에 거래처 분들이 계십니다.”

쩔쩔매며 작은 소리로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어지간히 사고 치고 다니는 인간인가 보다.

두 명의 필사적인 만류가 효과가 있었던지 흥분한 남자는 점차 호흡을 되찾으며 마지막으로 “너 이 새끼, 나중에 두고 보자.”라는 악당 같은 대사를 날리며 뒤를 돌아서 나머지들과 함께 돌아갔다.

“무슨 저런 미친 사람이…….”

세상에, 저런 유치한 말을 만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니. 워낙 폭풍같이 와서 지랄을 하다가 황당한 대사를 날리고 썰물처럼 사라져서 라영은 어버버거리며 경찰을 부르자, 사과해라, 라는 말도 못 남기고 그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넋 놓고 봐야만 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세상에… 얼굴 좀 봐요.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대체 저 미친놈은 누구예요? 누군데 갑자기 와서 남의 애인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급하게 돌아온 정신답게 급하게 말을 쏟아내며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는 소파에 이헌을 데려다 앉히고 두 손으로 이헌의 얼굴을 살펴보고 쓰다듬었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아까운 얼굴에 손을 대다니…! 어디에 사는 어떤 미친놈인지 당장 알아내야겠다.

“다행히 멍이 들 것 같지는 않아요. 저 자식 생긴 것도 찐따 같더니 주먹질도 찐따였나 봐. 빨리 저 찐따가 누군지 털어놔요, 당장.”

걱정스러워하며 잔뜩 손으로 더듬으며 쓰다듬다가 이제는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목을 짤짤 흔들며 추궁하는 말에 드디어 이헌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 찐따는…, 아니 저 사람은 제 사촌 형님입니다.”

“네에? 사촌 형이 다짜고짜 저렇게 주먹질을 해요?”

이 국보급 미남의 얼굴에 흠을 낸(물론 그 흠은 찐따의 물 주먹 덕에 단순히 시도에 그쳤다) 사람이 심지어 가족이란 말이야? 더욱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 제가 하는 일을 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는데…. 한동안 얼굴 볼 일이 없다가 이렇게 오랜만에 마주치니 그런 것 같습니다.”

“뭐? 완전 성격 파탄자 아니에요?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때려요?”

“괜찮아요, 라영 씨. 부끄럽지만…. 이런 취급에 익숙합니다.”

이헌이 쓸쓸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을 맺었다. 늘 멋지고 강인한 자신의 알파가 이렇게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라영은 속이 상했다. 그 찐따의 체격을 보아하니 이기지 못할 상대도 아니었는데, 사촌 형님이라는 이유로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세상에나……. 어쩐지 사람이 이렇게 훌륭하고 남부럽지 않은 조건을 가지고도 그렇게 겸손하면서 남의 눈치를 보더라니. 이런 취급에 익숙해질 정도로 얼마나 사람을 어릴 때부터 홀대해 왔으면 이럴까. 도대체 어릴 때부터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이 착하고 어리숙한 사람을 어떡하면 좋지…? 라영은 안쓰러운 마음이 솟구쳤다.

“사실은…. 대부분의 가족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뒤이어 나온 말은 이미 잔뜩 안쓰러워하고 있던 라영의 마음에 크리티컬 콤보를 날렸다. 심지어 가족들이! 모두! 모두 이 불쌍한 알파를 핍박해 왔던 것이다.

좋아하지 않았다고 표현했지만, 이 쓸쓸한 얼굴을 보아하니 얼마나 가족들이 사랑을 주지 않고 키워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온통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다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존감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유년기 시절에 가족들의 태도가 사람의 인격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기여를 하는데…. 지금 라영은 가정폭력의 희생자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관심도 하나의 폭력이다.

계속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이헌이 두 눈을 들어 라영을 쓸쓸히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질문했다.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사람이라…. 라영 씨도 실망하셨겠죠……?”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 이제 저에게 정이 떨어졌는지, 그만 만나고 싶은지 잔뜩 겁을 내며 물어보는 말에 라영은 순간 너무 울컥해서 눈앞의 머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주 힘 있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풀이 죽은 이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헌 씨.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랬더니 이헌도 머뭇거리는 것처럼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려 라영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두 사람의 체온이 포옹으로 온전히 맞닿았다.

“제가. 제가 당신을 사랑해 줄게요. 제가 당신의 진정한 가족이 되어 줄게요.”

라영은 사랑하는 이를 온 힘을 다해 껴안으며 그의 마음에 자신의 다짐과 위로가 온전히 닿기를 소원했다.

깊은 상처를 위로하듯이 한껏 껴안은 두 사람 뒤로 서울의 야경이 화려하게 비쳤다.

저 아름답고 쓸쓸한 도시의 불빛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이, 서로의 위안이 되어 주기를 약속했다. 앞으로는 절대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하며 쓸쓸해하지 않기를. 라영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 핵심성과지표. 광고에서는 주로 광고주의 목적을 말할 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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