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사람을 데려다 놓는다.
이 일도 마찬가지였다.
라영은 눈앞에 가까이 보이는 남산을 멍하니 바라보다 착잡하고 긴장된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한두 번 하며 맞선의 메카로 유명한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오늘은 국가 형질자 센터에서 주관하는 선을 보는 날로, 라영의 인생 첫 맞선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영 씨. 국가 매칭 서비스는 등록된 모든 우성 형질자들을 출생부터 현재까지 관리하면서,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냥 나라에서 보증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특별한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램을 돌리고, 그중에서도 담당자가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으로 매칭하는 시스템이에요. 마음 편하게 생각해요.’
센터의 매칭 시스템을 설명하며, 라영의 오랜 오메가 센터 담당자인 지은이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 시스템을 이용할 거라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얼떨결에 자의 반 떠밀림 반으로 오게 된 선 자리지만, 보증된 자리이니만큼 최악의 만남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호텔 2층의 카페의 깨끗한 유리문을 열고 몸을 밀어 넣었다.
아니. 나라에서 해 주는 보증 중에 외모와 훌륭한 성품 따위는 없는 게 분명하다.
도대체가 이 얼굴을 좀 보라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참 자유로운 얼굴이다.
얼굴의 자유를 위해 부르주아를 외치며 프랑스 혁명에서 깃발을 힘차게 흔들었을 것 같은 눈앞의 우성 알파는 여러모로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중이었다.
분명 우성의 형질자일수록 더 좋은 우성의 자손을 낳기 위해 매력적인 외모와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는데, 역시 연구 결과는 연구 결과일 뿐이었던 걸까…. 눈앞의 우성 알파는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나쁘지 않은데 이상하게 합쳐 놓고 나니 참으로 자유로운 외모를 자랑했다.
게다가 라영은 177센티미터로 오메가치고 키도 작지 않은 편인데 상대방은 라영보다 고작 손가락 한마디 정도 커 보였다. 게다가 앉은키는 한 뼘 이상 커서 더욱더 라영을 정색하게 만들었다.
‘이 인간 닥스훈트인가…….’
속으로 귀여운 댕댕이를 눈앞의 인간과 비교한 걸 미안해하며 혼자만의 생각의 빠져 있을 때 상대방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이지 않으십니까?”
“네? 죄송한데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군대도 안 다녀왔는데 절로 군인 말투가 튀어나온다.
“이라영 씨는 결혼하면 언제부터 직장을 관둘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제 오메가가 집에 있으면서 살림하고 아이들을 전담했으면 하거든요. 그리고 저희 부모님과 합가를 해서 모시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모시고 산다는 거지 집은 1층, 2층 나눠서 사용할 거예요. 결혼하면 애들을 세 명 이상 줄줄이 낳고 싶은데, 라영 씨도 시부모님하고 함께 살면 애들도 봐주실 수 있고 얼마나 좋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네, 안 그렇습니다. 이 새끼야.
아니, 무슨 얼굴만 18세기 프랑스에서 온 게 아니라 정신은 조선시대에서 왔나? 나 몰래 타임머신이 언제 발명된 거야? 이게 무슨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손가락으로 맷돌 돌리게 생겼다.
멀쩡하게 조건 좋은 젊은 우성 알파가 아직까지 결혼을 못 하고 있는 건 역시 다 이유가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스스로를 함께 후려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쓰리지만 도저히 이것 말고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일찌감치 정신 차린 모두가 멀쩡한 물건 다 골라가고 떨거지들만 남아서 저들끼리 사랑의 짝대기를 이쪽저쪽 내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저는 오메가가 사회 생활하면서 콧대 높아서 이거저거 주장하고 말대꾸하는 거 용납할 생각 없습니다. 역시 오메가는 참하게 알파 말에 순종하는 게 자연의 섭리예요.”
자연의 섭리 좋아한다. 자연은 바로 네 얼굴에 있다. 이 인공적인 거라고는 눈에 띄지도 않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이목구비야. 얼굴만 자유로운 데다 사고방식에는 타인의 자유 따위 찾아볼 수도 없고 본인의 자유만 살아 있나 보다. 참으로 이기적인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네가 용납을 안 하면 어쩔 건데…? 대체 어디서 온 자신감이지? 18세기에서?
듣고 있자니 만성 고질병인 편두통이 도지는 느낌이다. 도대체 나의 문제는 뭐였다는 말인가, 아니 거만한 알파들이 눈꼴시고 재수 없어서 눈에 띄게 피해 다닌 것도 맞기는 한데, 그게 이 정도 시련을 당할 일이었다는 말인가요……? 스스로가 가련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저희 집안은 규모가 있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거, 라영 씨도 자료 받아 보셔서 알고 계시죠?”
분명 받아 본 사전 자료에서는 중소기업이었는데 이 녀석 말하는 꼬라지가 마치 범세계적 기업을 운영하는 듯한 태도다.
“사실 라영 씨 집안이나 배경이 눈에 안 차기는 한데, 라영 씨 자체가 워낙 미인에 우성 오메가라고 하니까 혹하더라구요. 나이가 좀 걸리긴 했지만…….”
“아니요! 아무래도 저는 박형진 씨께서 원하시는 오메가 상에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
또라이 같은 말을 상식적인 듯이 지껄이고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생각보다 더 미친 또라이가 틀림없으니 기분 나쁘지 않게 빨리 거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라영이 상대의 말을 뚝 잘랐다.
하지만 상대는 눈치까지 없는지 거절을 자연스럽게 다시 거절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가? 아주 자연스럽게 돌려 막고 어떻게 저렇게 저 할 말만 열심히 할 수 있는 건지…? 이거는 회사원으로서 배워야 하는 스킬이 아닌가…? 혼란스럽다 못해 이제는 머릿속에서도 뻘 생각, 개소리가 왈왈댔다.
“아니, 이라영 씨는 이렇게 외모가 뛰어나고 아름다우시니 2세도 아주 예쁠 것 같고 저는 제 짝으로 딱 맞다고 생각해요. 원하시면 집에서 취미 삼아 일하시고 제 눈에 거슬리지 않게만 살림만 잘 해 주시면 됩니다.”
이제는 남의 숭고한 직업을 취미로 격하시켜 후려치기까지?
한 번도 본인의 직업을 숭고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무척 애정을 가지고 이 일을 해 온 나머지, 또라이 앞에서는 순식간에 거룩하고 숭고한 일이 된 라영의 직업이었다.
게다가 거슬리지 말라니…? 나는 네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데 어떡하지?
살짝 짓고 있던 미소에 파지직 금이 갔지만 끝까지 이성적으로 대처하자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가진 사람이야. 암, 그렇고말고.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걸 보니 자기 암시에 효과가 있는 게 분명하다. 금이 간 미소를 다시 이어 붙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제 직업에 무척 만족하고 있고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어서요. 그리고 살림에는 전혀 취미가 없습니다.”
틈만 나면 가슴 속의 품고 다니는 사직서를(실제로 품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친구처럼 늘 함께 동행하고 있는 사직서였다) 꺼내 말어 맨날 지껄이는 주제에 직업에 대한 숭고한 의지와 정신이 있다고 주장하며 거절의 말을 한 번 더 내뱉었다.
근데 그 순간 묘하게 불쾌하며 끈적거리는 알파 페로몬이 테이블을 슬금슬금 넘어왔다.
“제 페로몬은 어떤가요? 역시 알파, 오메가끼리는 이게 잘 맞아야죠. 라영 씨 페로몬도 한 번 느끼고 싶은데, 위에 가서 한번 맞춰 볼까요?”
거절을 몇 번이나 했는데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끈덕지게 달라붙더니…. 느끼하게 말하면서 천장을 가리키는 저 꼴 같지 않은 검지는 분명 카페 위에 즐비하게 올라가 있는 호텔 룸을 말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그 꼴을 보아하니 더 이상 참고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저희는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잘했다. 이라영. 네 뭣 같은 성질 머리에 물 안 뿌리고 커피 싸대기 안 날리고 잘 참았다.
이게 바로 사회생활 짬 5년 차로 다져진 인내와 스킬이다.
라영은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오만하고 말 안 통하고 이기적인 우성 알파 자식…! 아주 절로 이가 갈린다. 어째 우성 알파라는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지……. 이 우주에 우성 알파의 재수 없음을 보존하는 법칙이라도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몰래 몰래 같은 스킬을 나라에서 극비로 가르치고 있는 건지 조사가 시급하다.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부는데 홀가분하면서도 눈물이 찔끔 나온다.
‘나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냐…….’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가득 안고 라영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