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름 2
: 슬기로운 병원 생활
평화로운 오후였다. 지훈은 며칠 전 주 과장에게 제출했다가 온갖 수정 사항이 덧붙여진 채로 돌려받은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지훈의 옆자리에서 몰래 휴대폰으로 메신저를 확인하던 공 주무관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 전까지 모든 것이 평온했다.
“헉, 세상에!”
공 주무관은 원체 자주 놀라는 사람이었다. 지훈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공 주무관님, 무슨 일이에요?”
“정 사무관님 고속 도로에서 교통사고 당하셨대요.”
“뭐라고요? 누가요?”
지훈은 공 주무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부 부처에 정씨 성을 가진 사무관이 한두 명이 아닐진대, 설마 지훈이 같이 사는 그 정 사무관은 아닐 것이다! 물론 공 주무관이 수시로 정보를 업데이트할 만큼 좋아하는 정 사무관은 바로 그 정 사무관이었지만, 만에 하나 다른 정 사무관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으니까. 일말의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지훈은 손이 벌벌 떨리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다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윤 사무관과 주 과장도 놀라며 공 주무관을 주목했다.
“정호준 사무관님이요. 차가 완전 박살 났다는데요…….”
공 주무관의 입에서 호준의 이름 세 글자를 정확하게 들은 지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공 주무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지훈은 휴대폰으로 호준의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몇 시간 전 이제 돌아가는 길이라며 덩실덩실 춤추는 펭귄 친구 이모티콘을 남긴 게 마지막이었다. 지훈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괜찮은 거냐고 메시지를 보내 봤는데, 호준은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아랫입술이 벌벌 떨리고 다리 힘이 풀렸다. 온몸이 아래로 꺼지는 듯해 지훈은 저도 모르게 사무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려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호준이 무사한지만 알고 싶었다.
* * *
지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호준은 이미 수술실에 들어가 있었다. 무슨 수술인지 원무과에 물어보려 했지만, 환자와 무슨 사이냐고 묻는 질문에 지훈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차마 애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친구라고 둘러대야 했다.
살 맞대고 산 지 몇 달이 지났는데, 둘의 관계가 대외적으로 고작 친구라고 정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지훈은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회사도, 병원도 지훈에게 호준의 소식을 공식적으로 알려 주지 않았다. 호준이 자신과 만나면 어려운 일이 많을 거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딱히 와 닿지 않았던 현실의 벽이 이제야 실감 났다.
지훈은 수술실 앞에서 호준을 기다렸다. 한 시간짜리 정형외과 수술이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지훈은 애써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다. 하지만 불안감이 증폭된 상태에서 지훈의 걱정도 극단으로 치달았다. 간단한 수술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더 큰 문제가 발견되는 바람에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오면 어쩌지?
만약 호준이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앞으로 살면서 그렇게 몸 좋고 힘 좋고 성실한 대물을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 새로운 남자를 만날 일도 걱정이었다. 지훈은 대한민국을 다 뒤져 봐도 호준만큼 건실한 대물은 거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우루과이에서 호준의 속옷을 처음 벗긴 순간 한반도의 천연기념물임을 확신했으니까. 호준 때문에 남자 보는 눈이 너무 높아져서 앞으로는 누굴 만나도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이러다가 지훈은 반강제로 수절하게 될지도 몰랐다. 졸지에 태종시 입구에 열남문을 세우게 생겼다.
정호준 씨, 죽지 마요. 나는 살면서 당신 같은 대물을 또 만날 자신이 없단 말이야. 지훈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빌었다. 호준은 반드시 오래 살아서 자신의 곁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 했다.
물론 지훈이 오로지 호준의 아랫도리 때문에 그의 생사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훈은 이제 호준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처음엔 불확실한 호감만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지훈은 호준을 정말로 좋아했다. 고작 몇 달 사이 자신의 삶 속에 호준의 존재가 완전히 스며들었다. 지훈은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자신의 곁을 내주고 의지한 적이 없었다. 호준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지훈은 이제 그 빈자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훈이 눈물을 글썽이는데, 누가 옆에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지훈은 자신이 거의 울 뻔했다는 사실에
너무 부끄러워져서 상대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하려 했다.
“괜찮아요.”
“받아. 그쪽이 김지훈 씨 맞지?”
지훈의 곁에 앉은 사람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태도의 중년 여성이었다. 지훈은 살짝 붉어진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저를 아세요?”
“얘기는 좀 들었어.”
지훈은 일단 여자가 주는 손수건을 받아 눈가에 찔끔 흐른 눈물을 황급히 닦아 냈다. 진정한 후에 여자의 얼굴을 다시 보니, 굳이 상대가 자신을 소개하지 않아도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호준과 분위기가 닮은 사람이었다. 지훈은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 호준의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혼자 있기 심심했는데 때마침 잘됐네.”
호준의 어머니는 아들이 수술 중인데도 태연했다. 가족도 저러는데 나는 뭐람. 지훈은 호준이 죽는 상황을 상상하다가 눈물까지 흘려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사무관님은 괜찮으세요?”
지훈이 조심스럽게 묻자 호준의 어머니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나. 정강이에 철심 박는 수술을 한대. 내가 오기도 전에 자기가 수술 동의서 쓰고 들어갔어.”
“다리만 부러진 건가요?”
“타박상도 좀 있는 것 같은데, 입원이랑 수술 서류에 자기가 서명한 거 보면 머리는 안 깨졌나 봐.”
지훈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담담한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님은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호준이 회사에서 전화를 주더라고. 긴급 연락처를 형 번호로 적어 놓은 모양인데, 경준이가 보니까 당장 죽는 건 아닌 거 같고 자기도 바쁘니까 나한테 넘긴 거지. 휴대폰이 현장에서 박살 나는 바람에 급한 데만 연락했나 봐.”
“그렇군요…….”
휴대폰이 망가졌으니 호준은 지훈의 연락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회사는 법적인 가족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을 테고. 호준에게 가장 친밀한 사람이지만 지훈은 공식적으로는 호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수술 당일은 보호자가 와야 한다고 병원에서 연락 와서 일단 왔는데, 김지훈 씨 왔으니까 수술 끝난 거만 보고 가려고.”
정작 가족들은 호준의 사고 소식에 시큰둥하다는 점이 지훈에게는 의외였다. 호준의 어머니가 보이는 태도는 마치 오늘도 아침 해가 떴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너무나도 차분했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사무관님 얼굴도 보고 얘기도 나누고 가셔요.”
“걔도 자기 생활이 있는데, 뭐. 그리고 지훈 씨가 옆에 있을 테니까 별로 걱정 안 돼.”
호준의 어머니는 호준과 지훈의 관계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들의 남자 친구에 대한 거부감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훈은 괜히 부끄러워졌다. 호준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그럭저럭 대처했을 텐데,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 어려운 사람을 느닷없이 만난 탓에 지훈은 긴장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옆에 계시면 사무관님이 좋아하지 않을까요?”
“호준이가 나 별로 안 좋아해. 아마 지훈 씨가 옆에 있는 걸 더 좋아할걸.”
“설마요. 사무관님이 어머니 되게 좋아하는데요.”
“그럴 리가. 저번에 일 있어서 전화했더니, 자기가 요즘 좋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면서 나한테 지훈 씨 자랑을 엄청나게 하던걸. 결론은 자기 집에 오지 말라는 거였지만.”
그 집에 아주 들어가 사는 지훈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다. 호준이 가족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줄 전혀 몰랐다.
“안 그래도 호준이가 지훈 씨를 하도 좋게 얘기해서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나마 봐서 반가워.”
“그런데 저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호준이 수술실 앞에서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울고 있을 사람이 애인밖에 더 있겠어?”
“…….”
지훈은 자신의 표정이 그렇게 심각한 줄 미처 몰랐다. 거의 안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울긴 울었나 보다. 할 말이 없어진 지훈은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았던 손수건만 만지작거렸다.
“이제 수술실 불 꺼졌네. 너무 걱정하지 마, 지훈 씨.”
사실 호준의 어머니에게 건넸어야 할 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지훈이 위로받고 있었다. 마침 호준의 수술도 별일 없이 끝난 듯해서 지훈은 불안을 조금 내려놓았다.
“저보다는 어머니께서 더 걱정되실 텐데요.”
“죽을병도 아닌데 뭐. 다리뼈는 철심 박으면 다시 붙겠지. 호준이가 어릴 때도 사고를 몇 번 당했었는데, 회복력이 좋아서 남들보다 빨리 나았거든. 애가 원체 튼튼하잖아.”
지훈은 어릴 때 놀이기구를 타다가 기계가 고장 나서 한 시간이나 공중에 매달렸었다는 호준의 일화를 떠올렸다. 그때도 어머니가 달래기는커녕 우는 모습이 귀엽다며 사진을 찍었다고 했었다. 지훈은 어머니 역시 호준처럼 매사 침착하고 강단이 있는 사람임을 느꼈다.
“사무관님이 어머니 닮아서 똑똑하고 잘생겼나 봐요.”
지훈은 예전에 최 팀장에게서 배운 생계형 아부를 요긴하게 써먹었다. 호준의 어머니는 지훈의 말에 깔깔거리고 웃었다.
“지훈 씨, 진짜 넉살도 좋아.”
“빈말 아니에요. 뵙자마자 사무관님 어머니이신 줄 알았어요.”
“정말? 호준인 자기 아빠 닮았는데, 신기하네. 한동안 따로 떨어져서 살았더니 사람들이 나랑 호준이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고. 지훈 씨가 눈썰미가 좋은가 봐.”
살면서 눈썰미 좋단 소린 처음 들어 본 지훈은 눈만 끔벅였다. 확실히 둘의 외모가 닮진 않아서 얼핏 보면 눈치채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훈은 두 사람의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꼈다. 아마 지훈이 호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사무관님이랑 따로 사셨어요?”
지훈의 질문에 호준의 어머니는 놀라며 되물었다.
“호준이가 말 안 했어? 내가 애 아빠랑 이혼한 후로 호준이랑 따로 살았거든. 고등학교 가는 건 아예 못 챙겨 줬지. 대학 가고서도 한참 소식이 없다가 행시 합격한 후부터 연락 오더라고.”
지훈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종종 호준의 행동을 보면 오랫동안 혼자 지낸 사람 같긴 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 줄은 몰랐다.
“지훈 씨한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자기가 말 안 했으면 모르는 척해 줘.”
“그럴게요. 근데 사무관님은 그냥…… 워낙 자기 얘길 안 해요. 평소에 말은 많이 하는데.”
“시시콜콜 다 말하는 것 같은데,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
“오, 맞아요! 계획은 맨날 세우는데 뭔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호준에 대해 찜찜했던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는 어머니의 말에 지훈은 반색했다. 이제까지 남자 애인에 대한 소소한 불평을 털어놓을 데가 딱히 없었던 터라 내심 반가움을 느꼈다. 하필 상대가 그 애인의 어머니라는 점은 아이러니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에 관해서 상당히 객관적인 듯했다.
“어릴 때도 내가 저녁밥을 5분 늦게 줬다고 울고불고 그랬어. 자기 계획보다 늦었다고. 밥은 내가 주는데 계획은 자기가 세운 거지.”
“보면 제 계획도 자기가 세우더라고요.”
“웃기지 않니, 정말? 한번은 방학 생활 계획표를 짜 오랬더니 10분 단위로 쪼개서 요일별로 만들어 오더라고. 난 기절하는 줄 알았어. 30년 넘게 애들 가르쳤지만, 그런 계획표 짜 오는 초딩은 걔밖에 없었거든.”
지훈과 호준의 어머니는 호준이 없는 동안, 계획 변태를 대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상호 신뢰와 유대감을 착실히 다져 갔다.
* * *
마취에서 깨어난 호준은 1인실로 옮겨졌다. 호준은 보험 적용이 되는 다인실로 옮기고 싶어 했지만, 안타깝게도 남는 병실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호화스러운 1인실 생활을 해야만 했다.
호준은 자신의 어머니와 지훈이 자신의 양옆에 나란히 서 있는 상황을 굉장히 어색해했다.
“두 분, 제법 친해지셨네요…….”
몇 시간 수다 떠는 사이에, 지훈은 호준보다 호준의 어머니와 더 친해졌다.
“너 말고 지훈이가 내 아들이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럼 이참에 호적 파죠. 지훈 씨, 괜찮아요?”
“호주제 폐지됐잖아요, 사무관님. 공무원이 그런 것도 몰라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애인과 어머니, 양쪽의 공격을 동시에 받은 호준은 그냥 다시 잠들고 싶어졌다.
“엄마, 빨리 집에 가요.”
호준이 자신의 어머니를 만난 지 5분도 안 되어서 뱉은 말이었다. 지훈은 호준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정작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익숙하다는 듯 태연히 맞섰다.
“기차 시간이 안 맞아서 가고 싶어도 못 간다. 난 여기서 지훈 씨랑 놀 거야. 너나 집에 가.”
“여기 제 병실이거든요? 분명히 엄마 말고 형한테 연락했을 텐데요?”
“네 형이 지금 프로젝트 하느라 바쁘다고 나한테 넘겼어. 나도 바쁜데 굳이 시간 내서 온 거야.”
“바쁘면 그냥 오지 말지 그러셨어요…….”
“걱정 마. 안 그래도 가려고 기차표 예약해 놨어.”
“기차 시간 남았으면 여기 있지 말고 극장 가서 영화라도 보세요.”
“싫어. 영화보다 지훈 씨랑 노는 게 더 재밌어. 나 방해하지 마.”
“엄마는 병원에 놀러 왔어요?”
엄마와의 말싸움에 지친 호준은, 엄마를 더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돌아누우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오래 따로 떨어져 살았다기엔 너무 한국적인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였다. 지훈은 입으로는 엄마가 싫다고 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잔뜩 어리광 피우는, 서른세 살 정호준의 모습이 낯설고 신기해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 이제 보니 자기 앞에선 나름대로 점잖은 척하는 거였다.
이불을 뒤집어쓴 호준의 오른쪽 팔이 유독 눈에 띄었다. 붕대에 칭칭 감겨 있었다. 호준은 왼쪽 다리는 두꺼운 깁스를 한 채 놓여 있었고, 거즈에 덮인 오른쪽 다리도 찰과상 때문에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와 있었다. 사실 한가롭게 농담 따먹기를 하기엔 호준의 몰골이 꽤 심각했다. 하지만 정작 사고 당사자인 호준은, 어머니를 똑 닮아서 그런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잘됐어요. 요즘 일하기 싫었는데 몇 주 병가 내고 푹 쉬어야겠어요. 누워 있는 동안 근 손실은 좀 걱정되지만…….”
“다리뼈가 조각나 놓고 그게 할 말이에요?”
옆에 있던 지훈이 괜히 투덜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태평한 소리를 하는 호준을 한 대 패고 싶은데, 어머니도 계시고 호준의 다리도 멀쩡하지 않으니 괜히 애먼 주먹만 쥐고 말았다.
“다리뼈는 붙이면 되죠.”
“너는 그게 지훈이 앞에서 할 소리니? 지훈이는 너 죽는 줄 알고 울었어, 얘.”
“어머니! 제가 언제 울었어요!”
부끄러운 사실이 밝혀진 지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눈물 찔끔도 운 걸로 치는 거지.”
“엄마, 지훈 씨 괴롭히지 말고 빨리 집에 가시라고요.”
물론 이제까지 지훈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괴롭혀 왔던 호준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내가 들어 보니까 지훈이는 네가 제일 많이 괴롭혔던데? 금요일 오후에 일을 시켜서 월요일 오전까지 달라고 했다며? 미친 거 아니니? 지훈이가 너 때문에 회사를 두 번이나 옮겼대. 넌 지훈이한테 평생 맞아도 싸.”
지훈이 시시콜콜 다 말해 버리는 바람에, 호준은 모친에게 영혼까지 달달 털렸다.
“지훈 씨, 너무해요. 그걸 엄마한테 죄다 말해 버리다니.”
“안 그럼 어디다 일러요.”
냉정한 지훈의 말에 호준은 억울한 듯 이불을 뒤집어쓰며 세상에 자기편은 하나도 없다고 중얼거렸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평소와 달리 잔뜩 어리광 피우는 호준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 * *
호준의 어머니가 떠난 후, 병실엔 호준과 지훈 단둘이 남게 되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지훈은 문득 호준의 배 위에 쓰러져 얼굴을 기댔다. 호준은 그런 지훈의 머리를 다치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지훈은 호준의 다친 손을 그러잡으며 말했다.
“나 어머니한테 잘 보였나 봐요. 사무관님 오래 만나래요.”
호준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지훈이 대신 호준의 어머니를 배웅하며 들은 말이었다. 지훈은 호준의 어머니에게나마 자신과 호준과의 관계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회사도 병원도 지훈과 호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호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제대로 관계를 인정받은 것이다.
“엄마가 나보다 지훈 씨를 더 좋아하던걸요. 아들 삼고 싶다는 말 진심 같던데.”
호준이 기분 좋게 웃으며 지훈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다가 한 올 한 올 매만졌다. 호준의 익숙하고 따스한 손길을 느끼자 지훈은 갑자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어머니를 만나느라 잠깐 미뤄 뒀던 생각과 감정이 다시 물밀듯이 차올랐다.
“지훈 씨,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는데, 지훈 자신도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호준에게 머리를 기댄 채로, 지훈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호준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 주긴 싫었다.
호준은 곧 지훈의 눈물이 자신의 옷을 적시는 걸 느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계속 지훈의 뒤통수를 찬찬히 쓰다듬어 주었다. 몸을 기대고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며, 두 사람은 서로를 침묵으로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크응.”
흐느낌 없이 눈물만 적시던 지훈은 한참 후에야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마지막으로 코를 훌쩍이던 지훈은 남은 눈물을 호준의 환자복에 대놓고 닦았다.
“아까 너무 무서웠어요. 사무관님하고 연락은 안 되는데, 사고당해서 수술 중이라고만 하고. 자세히 알려 주는 사람은 없고……. 나는 진짜 사무관님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지훈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호준은 지훈이 수술실 앞에서 울고 있었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고 당사자는 호준이지만, 걱정 많은 지훈이 크게 놀랐던 듯했다.
“미안해요. 사고 처리하고 바로 병원 오느라 연락을 못 했어요.”
“알아요. 아는데…….”
머리론 알지만 마음은 계속 서운했던지, 지훈이 그만 호준의 다치지 않은 쪽 허벅지를 꼬집어 버렸다.
“아악! 이제 꼬집기까지 해요?”
“환자를 때릴 수는 없잖아요.”
지훈의 대꾸에 호준은 할 말을 잃었다. 환자를 때릴 수는 없어도 꼬집을 수는 있는 건가? 둘 다 아픈 건 매한가지 아닌가? 호준은 무척 궁금했지만, 지훈에게 물어봤다간 또 꼬집힐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입원은 일주일만 하면 되는데, 왜 2주나 쉬어요?”
“놀고 싶어서요. 퇴원하고 남은 기간은 연차 쓸 겁니다. 마침 개인적으로 볼일도 있고요.”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지만, 실은 펭귄 친구처럼 노는 걸 제일 좋아하는 호준이었다. 합법적으로 월급 받으면서 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호준이 놓칠 리가 없었다. 다만 지훈은 호준의 말 사이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무슨 개인적인 볼일인데요?”
“잘되면 알려 줄게요.”
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퇴원은 빨라도 한 달은 넘게 목발 짚고 다녀야 할 텐데, 호준이 또 무슨 속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요. 너무 걱정되니까.”
지훈의 표정이 다시 안 좋아졌다. 저러다가 지훈이 또 울겠다 싶어서 호준은 대뜸 지훈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매사에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지훈이, 자기 때문에 작은 머리통이 터져 나가라 걱정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고 고마운데,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점이 너무 사랑스럽기도 했다. 호준은 지훈을 달래려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사고 났을 때, 까딱 잘못하면 이대로 죽겠다 싶었어요. 진짜 무섭더라고요. 그때 지훈 씨 다시는 못 볼까 봐 너무 슬펐어요.”
“그런 얘길 이렇게 태연하게 해요?”
“지금은 지훈 씨랑 있으니까 괜찮잖아요.”
호준은 편안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지만, 내용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정호준 씨, 진짜 죽으면 안 돼요.”
지훈이 다시 울먹이며 호준의 손을 꽉 붙잡았다. 호준도 그 손을 맞잡으며 더없이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절대 안 죽어요. 나 죽으면 지훈 씨가 다른 놈이랑 섹스할 텐데, 그 꼴 어떻게 봅니까.”
“뭐라고요?”
살짝 나오려던 눈물이 그만 쏙 들어가 버렸다. 지훈은 어이가 없어서 호준을 밀치면서 품에서 떨어졌다. 물론 호준의 생사와 함께 대물을 걱정하던 지훈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직접 입 밖으로 내뱉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지훈 씨, 나 죽어도 딴 놈이랑 섹스하면 안 돼요.”
한술 더 뜬 호준이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지훈의 얼굴이 빨개졌다.
“미쳤나 봐, 진짜.”
지훈이 또 허벅지를 꼬집으려고 하자 호준이 담요를 끌어당겨 냉큼 다리를 덮어 버렸다. 지훈은 대신 호준의 팔뚝을 붙잡으려 했는데, 호준이 가까스로 그 손에 깍지를 끼며 막았다.
“혹시 나보다 큰 놈 있으면 봐줄게요.”
“사람 강제 수절시킬 일 있어요?”
호준보다 더 큰 놈을 못 찾을 것 같아서 수절할 각오도 했었지만, 그런 비장한 결심까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지훈은 괜히 투덜거렸다.
“지훈 씨가 딴 놈하고 붙어먹으면 열 받아서 저승 가던 길에 돌아올 거 같다고요.”
호준이 진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해서 지훈은 더 어이가 없었다. 다리가 저 모양인데도 호준은 지훈을 상대로 개수작 부릴 정신머리가 있었다.
“그런 말 할 거면 책임감 있게 아파트나 넘겨요.”
물론 지훈도 만만치 않았다. 호준의 죽음을 걱정하는 와중에도 야무지게 실속을 챙겼다.
약이 잔뜩 오른 지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 더 울 거 같진 않았지만, 호준은 지훈의 기분을 마저 풀어 주려고 일부러 계속 농담을 던졌다.
“지훈 씨 같은 남자 잡아 두려면 그 정도 준비는 해 둬야죠. 사망 보험금이랑 적금이랑 주식이랑 펭귄 친구 아이템도 다 가져가요. 필요하면 유언장 공증도 받아 둘 테니까.”
호준이 정말로 자신의 재산을 다 넘길 기세로 입방정을 떨었다. 농담으로 던지는 말이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지훈도 반쯤은 진지하게 새겨듣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오늘 일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펭귄 놈은 됐고요, 사무관님 주식도 있어요?”
“……그건 수익률이 좀 괜찮아지면 가져가요.”
주식 얘기가 나오자 호준이 갑자기 겸손해졌다. 지훈은 호준의 표정을 보며 호준의 자산 현황을 냉철하게 판단했다.
“그건 됐어요.”
“혹시 몰라요. 나중에 대박이 날 수도 있어요. 대박주라고 했으니까.”
“원래 그런 이름 붙은 게 쪽박인데…….”
꼬르륵.
문득 지훈의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렸다. 호준에게도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지훈 씨, 배고파요? 설마 아무것도 안 먹은 건 아니죠? 우리 지훈씨 한 끼라도 굶으면 큰일 나는데. 그러다 쓰러지면 어떡해요. 어지럽진 않아요? 나 대신 포도당 맞을래요."
건강한 20대 청년이 고작 끼니를 한 번 걸렀다고 쓰러질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훈의 먹성을 아는 호준이 호들갑을 떨자 지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아까는 그냥 배가 안 고팠어요.”
정신없이 병원에 달려와서 호준의 어머니까지 만나느라 끼니를 거른 줄도 몰랐다. 평소의 김지훈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허기가 몰려왔다.
“지금이라도 맛있는 거 먹고 와요. 아까 응급실에서 들었는데 병원 앞 식당이 돼지국밥으로 유명하대요.”
호준이 입수한 맛집 정보에 지훈은 솔깃했지만, 엉덩이만 들썩일 뿐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배는 고픈데, 호준을 두고 가려니 아무래도 불안했다.
“사무관님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만 있어요. 휴대폰 망가져서 전화도 못 하잖아요.”
안절부절못하는 지훈의 어깨를 호준이 가만히 토닥였다.
“나 지금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니까 걱정 마요. 꼼짝 않고 있을게요.”
다리뼈가 조각났으니 호준은 어딜 가려 해도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괜히 마음이 불안했던 지훈은 호준에게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받고 나서야 겨우 자리를 뜰 수 있었다.
* * *
입원한 호준은 저녁마다 지훈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가끔은 이렇게 아픈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애를 시작한 이래로 지훈이 가장 덜 때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호준이 퇴원하면 몰아서 때리려고 손바닥에 우주의 기운을 비축하는 낌새는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았던 건 지훈이 평소 안 하던 요리를 해서는 손수 싸 준 도시락이었다. 호준은 지훈이 요리를 굉장히 잘한다는 걸, 만난 지 몇 달 만에야 알게 되었다.
“지훈 씨, 이런 요리는 대체 어디서 배웠어요?”
지훈이 만들어 온 꿔바로우와 어향가지를 실컷 먹어 치운 호준이 물었다. 분명 지훈이 직접 만들어 온 건데, 태종시의 유명 중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지훈이 만들어 온 꿔바로우와 어향가지를 실컷 먹어 치운 호준이 물었다. 분명 지훈이 직접 만들어 온 건데, 태종시의 유명 중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그거 별로 안 어려워요. 그냥 레시피 따라 하면 돼요.”
마치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다는 소리 같았다. 호준은 지훈이 요리 천재라고 생각했다.
“지훈 씨, 요리를 이렇게 잘하면서 왜 여태 안 했어요?”
“원래 남이 해 준 게 제일 맛있거든요.”
맞는 말이긴 한데, 호준은 조금 억울했다. 이제까지 호준만 요리했다. 물론 지훈은 호준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잘 먹었지만, 호준이 요리를 몇 번 망칠 때도 괜찮다는 말만 하고 손 하나 까딱 안 했다. 이렇게까지 요리를 잘하는 줄 알았으면 종종 막힐 때마다 물어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호준이 계속 궁금해하며 쳐다보자, 지훈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실은 아빠가 어릴 때부터 신랑 수업을 시켰어요. 나중에 장가가면 부인한테 사랑받아야 한다고요. 요리 종류별로 특훈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요리하는 거 싫어해요. 누나는 내가 요리할 동안 영어 과외 받고 조기 유학 갔단 말이에요.”
가모장제 집안에서 아들이라서 차별받고 자란 지훈은 집안 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서러워했다. 취직했으니 집안이랑 연 끊을 거라는 말까지 하는 걸 보면 억울한 일이 쌓인 듯했다. 호준은 얼른 지훈을 달랬다.
“지훈 씨, 이제 남자랑 만나니까 신랑 수업 받은 건 다 잊어버려요. 앞으로 요리하지 말고요. 내가 다 해 줄게요.”
호준이 지훈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호준의 말에 기분이 살짝 풀린 지훈은 대답 대신 호준의 입에 수박 조각을 물렸다. 지훈이 후식으로 싸 온 수박도 정갈하게 모양이 나 있었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괜히 이런 걸 칭찬하면 지훈의 기분이 상할 것 같아서 호준은 말을 돌렸다.
“수박이 엄청 달아요, 지훈 씨.”
“그거 맛있죠? 너무 맛있어서 나도 썰다가 반이나 먹었어요.”
반이나 먹은 게 아니라 호준의 몫을 챙기느라 반밖에 못 먹은 듯했다. 호준은 자신의 몫인 수박 한 조각을 지훈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근데 지훈 씨, 요리 싫다면서 왜 맨날 도시락 만들어 와요?”
“집에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더라고요. 밤에 기분도 안 좋고 적적해서…….”
지훈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호준은 지훈이 밤마다 ‘적적해서’ 원래 싫어하던 요리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 데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둘은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거의 매일같이 관계를 해 왔다. 못 하는 날이 있어도 하루 이틀 정도였다. 고작 호준이 입원한 일주일이지만, 장기간의 불가피한 금욕 생활은 둘이 연애를 시작한 이래로 처음이었다.
“지훈 씨, 미안한데 이틀만 더 참아요. 퇴원하고 많이 해 줄게요.”
하지만 지훈은 한숨을 푹 쉬더니, 자신이 욕구 불만이라고 생각하는 호준의 오해가 더 커지기 전에 순순히 실토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요……. 사실 사무관님 팔베개가 없으니까 못 자겠어요.”
그 말과 동시에 안 그래도 빨갛던 지훈의 얼굴이 폭삭 익어 버렸다. 옆에 있던 호준에게까지 더운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이 스물아홉에 남자 친구 팔베개가 없어서 못 잔다는 소릴 자기 입으로 하게 될 줄 몰랐던 지훈은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잘 때 만지작거릴 호준의 가슴이 없으니 너무 허전해서 호준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호준의 체향까지 맡다가 잔다는 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고작 일주일일 뿐인데도 호준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지훈은 자신에게 충격받을 정도였다. 차라리 욕구 불만이었으면 그냥 몸이 건강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감정적으로 호준의 빈자리에 타격을 받을 줄은 자신도 몰랐다.
“지훈 씨, 잠깐 옆에 누워요. 지금 팔베개 해 줄게요.”
반면 호준은 입이 귀에 걸렸다. 자신의 팔베개가 없어서 못 잔다는 지훈이 너무 귀여웠다. 팔이 저리는 고통을 감내하고 지훈에게 밤마다 팔베개 해 준 보람이 있었다. 당장에라도 지훈을 품에 넣고 어화둥둥 해 주고 싶은 걸, 병실 밖에 보는 눈이 많아서 겨우 참았다.
“됐어요. 나중에 퇴원하고 해 줘요.”
“그럼 지훈 씨, 잠깐만 가까이 와 봐요.”
“왜요?”
“지훈 씨 귀여워서 못 참겠어요. 잠깐 뽀뽀만 하게 해 줘요.”
“미쳤어요? 병실 문 열렸다고요. 병원 사람들 다 봐요!”
“그럼 커튼만 빨리 쳐 봐요. 진료 보는 척하면 되지.”
이럴 때만 유독 빨리 굴러가는 호준의 잔머리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지훈은 황급히 병실 침대 주변에 커튼을 쳤다. 사실 지훈도 마음이 급했던 터라 커튼을 펼치던 손이 미끄러질 정도였다.
호준은 그런 지훈을 바로 잡아끌었다. 호준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곧바로 지훈의 입에 닿았다. 방금 먹은 수박 향이 물씬 풍겨 왔다. 촉촉하고 달콤했다.
호준의 혀가 지훈의 달콤한 입술을 부드럽게 핥으면서 서서히 벌렸다. 지훈은 일부러 힘을 빼고 호준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호준의 말캉한 혀가 지훈의 입술 뒤쪽을 훑고 입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치열을 훑으며 입을 더 벌렸다.
“으응…….”
오랜만에, 그것도 집 밖에서 몰래 하니까 평소보다 더 설렜다. 지훈은 호준의 얇은 환자복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호준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자신의 심장처럼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며, 지훈은 기분 좋게 콧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반응한 호준이 손을 뻗어 지훈의 목덜미를 붙잡고는 그대로 끌어당겼다. 호준의 열기가 확 느껴졌다. 뽀뽀만 하겠다며 잘 참고 있던 호준이 결국 못 참고 혀를 거칠게 쑤셔 넣었다. 그동안 참았던 욕구를 폭발시키듯 지훈의 입안을 온통 헤집었다. 부드러운 입안 피부를 눌러 가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지훈은 양 볼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호준과 혀를 섞었다.
“저기요, 커튼 뒤에 사람 있어요.”
커튼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지훈이 얼른 입술을 뗐다. 입가에 묻은 타액을 황급히 닦으며 지훈이 겨우 일어서서 커튼을 걷었다.
“윤 사무관님?”
지훈과 호준 모두 커튼 밖의 인물을 보고 경악했다. 윤 사무관이 팔짱을 끼고 서서는, 지훈과 호준을 한 번씩 흘겨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네요.”
하지만 표정은 조금도 미안하지 않아 보였다. 민망해진 지훈이 돌아서서 헛기침을 하는 사이 호준이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왜 왔어요?”
“너는 기껏 병문안 온 사람한테 ‘왜 왔냐’가 인사야?”
호준의 냉랭한 반응에 마음 상한 윤 사무관이 투덜거렸다.
“어제도 왔잖아요.”
“나라고 오고 싶어서 또 온 줄 알아?”
어제저녁 윤 사무관은 주 과장을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호준의 병문안을 왔었다. 굳이 다음 날 혼자 다시 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호준이 세모눈을 뜨고 윤 사무관을 노려보았다.
윤 사무관은 호준의 사나운 눈초리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대뜸 지훈의 건너편에 있는 간병인 의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오늘 방문의 목적인 듯한 거대한 쇼핑백을 지훈에게 내밀었다. 지훈은 쇼핑백 안에서 무지개 빛깔로 포장된 화려한 상자를 꺼냈다. 지훈이 호기심에 묻지도 않고 대뜸 상자를 열어 보려는데, 윤 사무관이 실실 웃으며 말렸다.
“내가 충고 하나 해 주자면, 병원에서는 열어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게 뭔데요?”
“내가 산 건 아니고. 우리 정삼의 옛 동아리 친구들이 입원 위로도 하고 오랜만의 연애도 축하할 겸 십시일반 모아서 선물을 했거든.”
그 말을 들은 호준은 무지개 상자를 쇼핑백 안에 도로 넣어 버렸다.
“지훈 씨, 이거 그대로 집에 갖다 놔요. 절대 열어 보지 말고.”
“왜요, 뭔데요?”
“나도 모르겠지만, 모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안색이 질린 채로 호준이 말하자, 옆에서 윤 사무관이 맞장구를 쳤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해. 나도 굳이 열어 보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는 건 아닌 듯해서.”
“왜 다들 열어 보지도 않고 알고 있는 건데요?”
지훈은 호준과 윤 사무관을 번갈아 가면서 흘겨보았다. 그런 지훈을 본 윤 사무관이 혀를 끌끌 찼다.
“정삼, 실망이다. 김 대리한테 우리 얘기 안 했어?”
“그 얘기를 왜 합니까.”
누가 들으면 둘이 애라도 있는 사이인 줄 알 것 같았다. 호준이 여자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는 걸 아는 지훈은 그래서 더 어리둥절했다.
“저 두 분이 친한 건 알아요. 친구 사이 아니에요?”
친하다는 지훈의 말에 호준과 윤 사무관 둘 다 정색하며 관계를 격렬히 거부했다.
“나 얘랑 안 친해요.”
“나도 이 사람하고 안 친합니다.”
“둘이 뭐 해요, 진짜.”
지훈이 둘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보니까 서로 엄청 절친했다. 똥 씹은 표정의 호준 대신 윤 사무관이 지훈에게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사려 깊은 정삼이 내 아웃팅을 염려해서 아직 말을 안 한 모양인데, 우리는 교내 성 소수자 동아리에서 만났거든. 이 선물을 보낸 건 당시 같이 활동했던 게이 놈들이고, 그러니 게이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가 그 상자에 담겨 있을 거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는 거지.”
윤 사무관의 설명을 들은 지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윤 사무관이 말하는 모든 단어가 충격이었다. 무지개 선물 상자와 호준과 윤 사무관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던 지훈은, 윤 사무관이 성 소수자이며, 자신과 호준의 관계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 사무관님, 그럼 알고 계셨어요? 저랑 정 사무관님이…….”
“알다마다. 예전에 김지훈 주임님이 밥 한 끼를 안 먹어 줘서 저 인간이 혼자 삽질하는 거 내가 다 봤지. 김지훈 대리 집안에 제사가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면서 내 앞에서 소주 마셨다고. 근데 김 대리 진짜 종갓집 장손이야? 우리랑 일한 후로는 제사 안 가던데?”
호준과 사이가 좋지 않던 시절, 정 사무관 측에서 팀 회식을 제안할 때마다 지훈은 집안에 제사가 있다는 핑계를 대며 빠졌다. 그랬더니 종갓집 장손이냐는 소리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종갓집이긴 했는데, 엄격한 가모장제라 외외증외고조할머니(外外曾外高祖母, 외할머니의 외할머니)와 외외증조할머니(外外曾祖母, 외할머니의 어머니)의 제사상에는 절도 못 하는 지훈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할 말 다 했으면 빨리 가요.”
윤 사무관이 더 머물러 있다간 부끄러운 짝사랑 사연을 다 털릴 것만 같아 불안해진 호준이 투덜거렸다.
“정삼, 그래도 결국 김지훈 대리 꼬시는 데 성공했잖아. 기한은 좀 초과했지만. 뭘로 꼬셨어? 얼굴이나 돈은 아닐 테고. 정삼에게 내가 모르는 은밀한 매력이라도 있는 건가?”
옆에서 듣고 있던 지훈은 윤 사무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기한을 초과했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아, 그거. 내가 2년 안에 못 꼬시면 그냥 성 갈라고 했거든. 근데 2년은 지나서 성공한 것 같더라고. 김 대리 파견 오기 전까지 둘이 안 사귄 거 맞지? 점호준 씨. 개명은 언제 할 거야?”
“내가 성을 왜 바꿉니까. 윤 사무관이나 이름 바꿔요.”
“무슨 소리야, 2년 안에 못 꼬셨잖아.”
“어쨌든 성공했잖아요!”
둘의 대화를 듣던 지훈은 예전에 윤 사무관이 언급했던, 성을 가네 마네 했던 둘 사이의 내기라는 걸 눈치챘다. 지훈이 아무리 때리고 간지럽혀도 호준이 죽어라 입을 다무는 터라 캐내는 걸 포기하고는 잠시 잊고 살았다. 그런데 그 내기의 내용이 다름 아닌 ‘정호준의 김지훈 꼬시기’였다니. 예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분명 내기를 좋아하는 윤 사무관이 먼저 시작했을 것 같지만, 호준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는 점에서
지훈은 진한 배신감을 느꼈다. 가슴에서 시작된 분노의 불길이 정수리까지 올라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둘이서 나 꼬시는 걸로 내기했다는 거예요? 언제부터요? 그래 놓고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했다고요?”
어느새 지훈이 자리에서 벌떡 선 채로 물었다. 지훈의 표정을 본 호준은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훈을 말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병실에서 응급실로 실려 가는 수가 있었다.
“지훈 씨, 내가 나중에 설명할게요. 일단 진정하고…….”
“나중에? 지금 당장 설명해요. 정호준 씨.”
지훈이 호준의 이름 석 자를 조용히 읊었다. 팔을 걷어붙이며 손가락에 기운을 슬슬 불어넣고 있었다. 과거의 끔찍한 딱밤을 떠올리며 호준이 재빨리 이마를 가렸지만 열 받은 지훈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방금 전의 사랑 넘치던 분위기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호준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윤 사무관을 노려보았다. 저 인간만 없었어도!
“흠흠. 난 볼일을 마쳤으니 이만 가 볼게. 둘이서 남은 회포를 잘 풀도록 하고.”
김지훈 대리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본 윤 사무관은 아무도 못 들을 목소리로 작게 말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김지훈 대리. 평소에도 은근히 성깔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윤 사무관이 보아하니 정 사무관이 꼼짝없이 잡혀 사는 형국이었다.
불쌍한 정호준, 그렇게 힘들게 꼬시더니 이렇게 맞고 사는구나. 호준의 무지개 친구들은 한때 자신들의 이상형이었던 마성의 게이 정호준이 애인에게 맞고 다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하긴, 네 살 연하 애인을 옆구리에 끼고 살려면 저 정도는 감수해야 할 테다.
남의 집에 불을 낸 것도 모자라 기름 붓고 부채질까지 하던 윤 사무관은, 불길이 자신에게까지 번지기 전에 얄밉게 자리를 피해 버렸다.
“아아악!”
병원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윤 사무관은 한참 떨어진 호준의 병실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을 듣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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