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여름 1 (24/27)

2. 여름 1

: 사내 연애의 기쁨과 슬픔

“저 오늘은 구내식당에서 식사하겠습니다.”

점심시간은 12시부터 시작되지만, 그때부터 숟가락을 뜨려면 미리 식당에 도착해서 주문하고 착석해야 한다. 11시 30분쯤부터 엉덩이를 슬금슬금 들썩이며 사무실을 나서려는 동료들을 보며 지훈은 엄숙하게 구내식당행을 선언했다.

“김 대리, 진심이야? 오늘은 우리 완전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건데?”

주 과장이 김 대리를 음식으로 유혹했다. 보통 교외의 맛집에 가려면 차로 한참 이동해야 해서, 주 과장이나 윤 사무관의 차를 타고 다 같이 이동하곤 했다.

“괜찮습니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지훈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옆에 있던 윤 사무관이 그 이유를 대신 설명했다.

“과장님, 오늘 구내식당에 제육볶음이 나오거든요. 김 대리가 놓칠 리 없죠.” 

“크흠.”

작전을 완전히 들켜 버린 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김 대리님, 저번에는 소불고기 나온다고 구내식당 가셨잖아요.”

공 주무관이 옆에서 거들었다. 다들 자신의 식습관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지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주 과장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늘로 주 과장까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김 대리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식당 선택에 주 과장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안 되겠네. 지훈 씨는 그럼 영양사 선생님들이 정성 들여 조리한 식당 제육볶음을 맛있게 먹도록 해. 우리는 30년 전통 막국수 장인의 쫄깃한 면발과 시원한 육수를 맛보러 갈 테니까.”

주 과장은 일부러 30년 전통을 강조했다. 지훈은 솔깃했지만 주 과장의 유혹에 섣불리 넘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 지훈은 혼자가 아니었다.

“과장님. 오늘은 저도 일이 밀려서 구내식당에서 간단하게 먹으려고요. 누구처럼 메뉴가 제육볶음이라서 그런 건 아녜요.”

공 주무관이 지훈을 살짝 흘겨보며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덧붙였다. 졸지에 제육볶음에 환장한 놈이 된 지훈이 공 주무관을 보며 어이없어하는 사이, 주 과장은 윤 사무관과 함께 막국수를 먹기 위한 여정을 떠나 버렸다.

보기엔 서로 엿 먹이는 것 같아도, 지훈은 직급과 나이 때가 비슷한 공 주무관과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사실 출근 첫날 커피 심부름 신고식의 여파로 지훈은 아직도 주 과장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 과장이 커피를 마실 때마다 지훈을 넌지시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짓궂은 윤 사무관 역시 호시탐탐 내기를 걸어 지훈의 주머니를 털려고 했기 때문에 지훈은 그도 은근히 피하고 있었다. 결국 말동무를 할 사람은 공 주무관뿐이었다.

“김 대리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정 사무관님 관련 질문은 안 받아요.” 

공 주무관이 말을 꺼내기 전부터 내용을 예상한 지훈은 딱 잘라 거절했다. 공 주무관은 정 사무관 팬클럽 회원이라도 되는 듯, 호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단지 호준의 하우스메이트라는 사실 때문에, 공 주무관은 항상 지훈에게 질문 폭탄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 사무관님 질문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공 주무관님은 나한테 궁금한 거 없잖아요.”

“김 대리님은 맨날 옆에서 보는데 궁금할 게 뭐 있어요.”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옆자리에 앉아서 찰떡같이 수다를 떠는 김 대리와 공 주무관의 관계를 의심하곤 했지만, 사실 공 주무관과 지훈은 서로 궁금한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깔끔한 동료 관계였다. 회사에서나 넉살 좋게 수다를 떨지, 퇴근하면 서로 생사조차 모를 정도였다.

지훈은 호준과의 연애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공 주무관도 오래 만난 약혼자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만리장성보다 높은 철벽이 세워져 있어서, 둘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둘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호준도 지훈의 헬스장 트레이너를 의심할지언정 공 주무관만큼은 경계하지 않았다.

“참, 저 요즘 대리님한테도 궁금한 거 생겼어요!”

공 주무관이 궁색하게 뒷북을 쳤다. 지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구내식당 입구에서 수저와 식판을 집어 들며 되물었다.

“정말요? 공 주무관님이 맨날 보는 저의 무엇이 궁금하실까?”

“요즘 대리님이 쓰시는 텀블러 어디서 샀어요? 엄청 예쁘던데. 파는 거 아니죠?”

공 주무관의 예리한 질문에 허를 찔린 지훈이 움찔했다.

펭귄 친구 텀블러로 소동을 피우고 난 후, 호준은 별안간 지훈에게 텀블러를 선물했다. 자기 텀블러를 지키느라 그 난리를 피웠던 게 부끄러웠던 듯했다. 비밀 책장을 알아냈다는 사실에만 들떠 있던 지훈은 호준의 깜짝 선물에 놀랐다. 

사실 포장지를 뜯기 전까지는, 혹시 망할 펭귄 새끼가 그려진 커플 텀블러일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호준은 지훈의 취향에 꼭 맞는, 무채색 조합에 말끔한 디자인의 커피 프랜차이즈 시즌 한정판 텀블러를 구해 왔다.

지훈은 호준이 마음 써서 선물해 준 것이 고맙기도 했고, 원래 커피를 자주 마시니까 환경 보호 차원에서 텀블러를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아 사무실 책상에 비치해 두고 애용하고 있었다. 공 주무관이 그걸 본 것이다.

“제 텀블러 예쁘죠? 그거 선물 받았어요. 재활용되지 못하는 미세 플라스틱 때문에 해양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부터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고요.”

지훈이 거창하게 사설을 늘어놓았지만, 안타깝게도 공 주무관이 궁금한 건 해양 생태계를 위협하는 미세 플라스틱이 아니었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기 위한 그 예쁜 텀블러는 누가 어디서 구해서 선물해 줬는데요?”

“애인이 준 건데, 어디서 구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정 사무관이 선물해 줬다고 하면 틀림없이 궁금해하며 꼬치꼬치 캐물을 테니, 지훈은 그럴듯하게 둘러대었다. 하지만 깍두기를 식판에 퍼 담던 공 주무관은 지훈의 대답에 경악했다.

“세상에! 김 대리님, 연애하세요?”

너무 놀란 공 주무관은 집어 든 깍두기를 얼떨결에 옆 사람 식판에 담아 버렸다. 옆에 서 있던 사람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공 주무관에게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주무관님, 실망이에요. 우리 사무실에서 맨날 만나는데 저 연애하는 거 몰랐어요?” 

공 주무관 만난 첫날부터 이미 연애 중이었던 지훈은, 공 주무관의 요란한 반응에 멋쩍어하면서도 자신의 식판에 제육볶음을 수북이 담았다. 지훈의 식판을 주시하는 영양사의 매서운 눈초리는 애써 무시했다.

“맙소사!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대리님한테 소개팅 해 드리려고 했잖아요!”

“소개팅이요?”

공 주무관이 한 뜻밖의 발언에 이번엔 지훈이 더 놀랐다.

“김 대리님 키도 크고 얼굴도 말끔하시잖아요. 은근히 스타일도 좋으시고요. 보니까 손도 자주 씻으시더라고요. 손 자주 씻는 남자 잘 없거든요. 제 친구가 다음 달부터 근처 연구소에서 일할 예정이라서 괜찮으시면 소개해 드리려고 했죠.”

공 주무관의 남자 보는 기준이 참으로 단순하다고 생각하며 지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 같았으면 소개팅 제안이 들어왔다고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곤란했다. 지훈은 호준과의 연애에 어지간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

“고마운데 미안해요, 주무관님. 저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리고 손 자주 씻는 건 사회인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에요.”

“그건 저도 알지만, 기본 소양이 부족한 사람들이 은근히 있으니까요. 하긴, 사회인의 기본 소양을 올바르게 갖추신 김 대리님 같은 분이 연애를 안 할 리가 없죠.”

“에이, 공 주무관님도 약혼자분 있잖아요.”

“아유, 8년 넘게 사귀어 봐요. 그냥 의리로 만나는 거죠. 걔도 손은 잘 씻으니까.”

다행히 공 주무관의 동갑내기 약혼자는 사회인의 기본 소양을 잘 갖춘 사람이었다.

“그럼 김 대리님은 연애한 지 얼마나 되었어요?”

“4개월 정도 됐어요.”

지훈은 추후에라도 있을 소개팅을 막기 위해 최대한 솔직하게 대답하면서, 공 주무관과 함께 구내식당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 한창 좋을 때네요! 여기 파견 올 때부터 만났구나! 혹시 우리 부처 사람?”

“그 전부터 알던 사람이에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지훈은 두루뭉술하게 말을 돌렸다. 파견 나오기 전부터 호준을 알았으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훈이 막 기대감 넘치는 마음으로 제육볶음을 향해 젓가락을 뻗으려는 찰나에, 공 주무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정 사무관님 오늘 식당에서 식사하시나 봐요! 나 정 사무관님 구경해야지.”

내 애인인데 왜 주무관님이 구경하세요? 공 주무관의 말에 속으로 울컥한 지훈이 식당 입구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호준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키도 크고 풍채도 좋고 인물도 훤한 터라, 정장 입은 오징어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지훈은 ㅇㅇ부 일등 신랑감이라는 호준의 명성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모르던 사람이라도 이대로 반할 것 같은데, 저 사람이 이미 내 남자라니. 지훈은 내심 좋아 죽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앞에 앉아 있는 공 주무관을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실은 정 사무관이 그 한정판 텀블러를 사 준 애인이라고.

한 명에게만 알리는 걸로는 부족했다. 지금 당장 식당 입구에서 마이크를 붙잡고 선언하고 싶었다. ‘여러분, 정호준 사무관은 제 남친이니까 다들 저한테 허락받고 쳐다보세요!’ 그런 후에 아예 사내 인트라넷 팝업 공지로 띄워 버리고 싶었다. ‘정호준 사무관은 김지훈 대리의 소유이니 모두 소중히 대할 것!’ 이쯤 되면 장관과 국무총리도 호준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어디다 공표하기는커녕, 하늘과 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사이였다. 원래 사내 연애라는 것이 알려져 봤자 좋을 게 없다지만, 대단한 세기의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보안에 철저해야 한다는 사실이 지훈에게는 약간 답답하게 느껴졌다.남들 다 하는 연애를 하는 것뿐인데 감당해야 할 불이익이 일반적인 관계보다 더 크다는 사실은, 날이 갈수록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당사자가 되니 크게 와 닿는 일상 속의 차별과 편견이었다.

“정 사무관님 애인분은 정말 좋겠어요. 저렇게 잘생긴 남자의 사랑을 받다니.”

일등 신랑감인 정호준 사무관이 연애 중이라는 건, 우 국장의 입을 통해 온 부처에 일파만파 퍼졌다. 우 국장이 공원에서 호준과 키스하던 상대의 얼굴은 미처 못 봤었기 때문에, 다행히 일등 신랑감의 애인은 키가 크다는 사실만 알려졌다. 지훈은 혹시 몰라서 그 소문을 들은 날부터 까치발을 들지 않았다.

“그 애인은 정 사무관님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정말 기분이 좋겠죠.”

지훈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호준보다 먼저 잠에서 깨어나는 날이면, 지훈은 자는 모습마저 잘생긴 남자를 소유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정도였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시각적인 만족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김 대리님은 혹시 정 사무관님의 애인분 만난 적 있으세요?”

젓가락으로 제육볶음을 한껏 집어 들다 말고, 지훈은 멈칫했다. 공 주무관과 꽤 친하다지만, 자신이 그 애인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충 돌려 말하는 건 괜찮겠지. 장난기가 발동한 지훈은 씨익 웃으며 공 주무관에게 말했다.

“네. 저도 봤는데 엄청난 미인이더라고요. 정 사무관님 말로는 웃는 모습이 제일 예쁘대요.”

자칭 엄청난 미인이 된 지훈은 태연하게 제육볶음을 집어 먹었다. 호준이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해 준 건 사실이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오늘따라 유달리 밥이 맛있었다.

“김 대리님이 보기에도 미인이세요?”

“말도 마세요, 괜히 정 사무관님 애인이 아니더라고요!”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 지훈은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정 사무관의 애인이 예쁘다고 바람을 잔뜩 잡을수록, 자신은 그 용의 선상에서 더 멀어질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자신의 말에 공 주무관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면서, 지훈은 이 소문이 언제쯤 호준의 귀에 들어갈지 궁금해졌다.

* * *

지훈은 사무실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주 과장이 시킨 보고서를 작업하고 있었다. 주 과장은 본인이 부지런한 사람이라 아랫사람에게도 일을 많이 시켰다. 물론 최 팀장보다는 지시가 명확했고, 호준보다는 덜 꼼꼼했지만, 둘에 비해 성격이 매우 급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일을 시켜 놓고는 얼마나 했냐고 한 시간에 한 번씩 물어보며 지훈의 피를 말렸다.

악덕 상사 정호준만 벗어나면 뭐든 괜찮을 줄 알았건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정규직이니까 전보다 버틸 만한 것뿐이었다.

지훈이 오후의 나른함을 쫓기 위해 인생의 쓴맛이 가득한 커피를 홀짝이며 워드프로세서 화면을 노려보는데, 문득 사내 메신저 창이 깜박이며 불이 들어왔다. 메시지 발송인은 정호준 사무관이었다. 개인적인 연락은 휴대폰으로 하는 터라, 지훈은 호준의 메시지에 살짝 긴장했다.

[김지훈 대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많이 바쁘신가요?]

매일 보는 호준이 점잖게 서두를 꺼내자 지훈은 약간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혹시라도 진짜 업무와 관련된 연락일까 봐 마찬가지로 점잖게 답했다.

[지금 괜찮습니다. 정호준 사무관님. 무슨 일이세요?]

잠깐 뜸을 들이더니 호준이 어마어마한 내용을 보내왔다.

[제 애인이 엄청난 미인이고, 웃는 모습이 아주 예쁘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호준이 보낸 메시지를 본 지훈은 눈을 비벼 가며 다시 내용을 확인했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 공 주무관에게 했던 얘기가 벌써 호준의 귀에도 들어간 듯했다. 지훈의 예상보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나저나 정호준, 이 자식은 고작 이딴 얘기 하려고 사내 메신저까지 보냈어?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정 사무관님의 하우스메이트인 제가 직접 봤다고 증언했어요.]

[저는 누가 제 애인을 몰래 훔쳐본 줄 알았어요.] 

호준의 애인을 매일 아침 거울로 엿보고 있는 지훈은 뜨끔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미인이라고 소문나기엔 무리가 있는 얼굴이었지만, 아무도 그게 자신인 줄 모르는데 뭐 어떤가. 지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애인분이 미인이라는 게 사실이 아니라면 해명하셔야겠어요.]

[엄청난 미인인 건 사실이라서 해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호준, 아주 웃기는 놈이었다. 사랑의 콩깍지가 심각했다. 지훈은 호준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

[평소엔 엄청 귀엽다는 말이 누락되었어요. 웃을 때 보조개가 예쁘다는 점도요. 참조로 달아 주세요.]

호준의 요구 사항이 너무 하찮고 쓸데없어서 지훈은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메시지상으로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정 사무관님.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일이나 하세요.]

[연애 사업도 일입니다.]

근무 중에 장난을 치는 걸 보니 호준이 간만에 한가한 모양이었다. 호준의 헛소리에 반박하려고 지훈이 키보드를 두드리려는 찰나, 뒤에서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지훈 대리.”

지훈은 황급히 메신저 창부터 끄고 뒤를 돌아보았다. 주 과장이 지훈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주 과장은 대체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걸까? 설마 호준과 농담 따먹던 메신저 창을 전부 다 본 건 아니겠지? 지훈은 식은땀을 흘렸다.

“네, 과장님.”

“아까 요청한 수치 평균 좀 알려 줘.”

주 과장은 지훈의 당황한 표정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는 듯, 자기 볼일에만 집중했다. 매사가 그렇지만 주 과장은 오늘도 급해 보였다. 지훈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재빨리 주 과장이 요청한 자료를 확인했다.

“ㅇ북도청에서 아직 자료를 보내 주지 않아서 전국 평균은 산출이 안 되었습니다. 오후 4시는 넘어야 확인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럼 ㅇ북도 제외한 평균은 얼만데? 지금 회의 들어가서 대면 보고할 거니까 대충 알려 줘.”

지훈은 작업하던 보고서를 확인했다. 작업 표시줄 하단에서 사내 메신저가 요란하게 깜박거렸지만, 지훈은 눈을 질끈 감으며 눈치 없는 애인을 무시했다.

“전국 평균은 ㅇㅇ북도를 제외하면 78.4%이고, 서울•경기 지역 제외하면 69.7%입니다. 제주와 ㅇㅇ시는 각각 80%가 넘습니다.”

주 과장은 열심히 보고하던 지훈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누가 그렇게 보고하래?”

“회의 들어가신다고 하셔서요. 혹시 다른 자료도 필요하신가요? 프린트로 뽑아 드릴까요?” 

지훈은 혹시 실수한 점이 있는지를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주 과장의 눈치를 살폈다. 주 과장이 등 뒤에 서 있던 시점에서 이미 프린트를 해야 했나? 밋밋한 워드프로세서 도표가 아니라 현란한 엑셀 3차원 그래프를 그렸어야 했나? ㅇ북도청 담당 주무관에게 자료를 더 빨리 달라고 독촉 전화를 걸었어야 했나?

지훈이 오만 고민을 하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사이 주 과장이 답했다.

“프린트는 됐어. 보고서 완성되면 나한테 메일로 보내고, 오늘은 정시 퇴근해.”

“네, 과장…… 님…….”

지훈이 대답을 다 마치기도 전에 주 과장은 홀연히 떠나 버렸다.

주 과장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 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메신저 창을 켰다.

[김 대리님 대답 좀…….]

[김지훈 대리님 화났어요?]

[예쁘고 귀엽고 엄청난 미인이신 김 대리님?]

[김 대리님 잘못했어요.]

그사이에 눈치 없는 애인은 메신저로 요란을 떨고 있었다.

[방금 주 과장님이 제 등 뒤에 계셨었어요.]

[저런.]

사태를 파악한 호준의 말이 급격하게 짧아졌다. 메신저 너머로 호준이 긴장한 게 느껴졌다. 지훈은 휴대폰을 들어 호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들키면 님 책임.]

지훈의 싸늘한 말에 호준이 펑펑 우는 펭귄 이모티콘을 보냈다. 호준의 반듯한 인상만 보면 이렇게 귀여운 이모티콘을 남발할 유치한 인간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물론 호준은 다른 사람에게는 매정할 정도로 딱딱한 어투로 할 말만 했다. 순전히 지훈에게만 이모티콘을 보내는 거였다.

지훈이 한숨 쉬면서 혹시 주 과장이 눈치챘을까 걱정하는데, 호준이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또 보내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주 과장은 알게 되어도 별말 안 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요.] 

지훈의 생각에도 주 과장은 그럴 사람이긴 했지만, 지훈은 그와 관계없이 상사에게 호준과의 관계를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 회사에서 쓸데없는 일로 메신저 보내지 마요. 일 방해됨.] 

지훈의 냉정한 메시지에 호준이 또 펑펑 우는 펭귄 친구 이모티콘을 연달아 보냈다. 예전에 사람 달달 볶아 가면서 일 시키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귀여움이었다. 이런 주접이 귀여워 보이는 자신도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지훈은 습관적으로 텀블러를 집어 들었다. 인생의 쓴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다 말고, 커피가 담긴 이 텀블러도 호준이 선물해 줬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실은 호준과 이렇게 몰래 연락하며 지내는 일상이 꽤 재밌었다. 이 맛에 사내 연애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그사이 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호준이 또 무슨 메시지를 보냈나 싶어서 실실 웃으며 휴대폰을 확인하던 지훈은,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박 실장의 호출이었다.

* * *

밤 10시가 넘은 시각, 빈 사무실에는 지훈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지훈은 졸린 눈을 비비며 텀블러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 시간에 진한 커피를 마신다는 건 그냥 밤을 꼴딱 새우겠다는 뜻.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일에 집중하다가, 커피로도 해소되지 않는 피로감을 느낀 지훈은 의자 뒤로 기지개를 켰다.

“으악!”

머리 위로 쭉 뻗은 손을 누가 휙 잡아 버리자, 지훈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예요.”

지훈은 호준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준은 그런 지훈을 안심시키려 지훈의 어깨를 붙잡고 토닥였다. 그러고는 잔뜩 뭉친 지훈의 어깨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지훈은 호준이 어깨의 뭉친 근육을 꾹꾹 누를 때마다 앓는 소리를 냈다.

“아으으……. 깜짝 놀랐잖아요. 왜 말도 안 하고 와요.”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요.”

“지나가다 들른 사람이 치킨을 사 와요?”

지훈은 사무실 의자를 휙 돌려 호준의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치킨을 낚아챘다. 누가 봐도 지훈을 먹이려고 일부러 멀리 나가서 사 온 것이다. 

회사에 있을 때 말 걸지 말랬더니, 아예 사무실로 찾아온 호준이었다. 물론 꼼꼼한 인간이니 사무실에 사람이 없는 걸 미리 확인하고 왔을 것이다. 지훈은 자신의 자리까지 찾아온 호준이 반가우면서도, 행여 누가 둘을 볼까 봐 불안했다.

“탕비실 가서 같이 치킨 먹어요, 사무관님.”

“지훈 씨, 퇴근은 안 해요? 나 지금 지훈 씨 데리러 온 건데.”

호준이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보통 호준이 늦게까지 야근하곤 했지만, 간만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호준은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 정작 지훈의 야근으로 같이 놀지 못하는 게 불만이었다.

“나도 하고 싶은데, 12시 전엔 못 할 거 같아요.”

“누가 지훈 씨한테 이렇게 일을 많이 시켜요?”

“다름 아닌 정호준 사무관님이 저한테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호준이 퇴근을 안 하냐며 재촉하는 상황이 지훈은 굉장히 낯설었다. 예전엔 누구 때문에 퇴근을 못 했더라?

“그래도 난 밤새울 정도는 안 시켰던 것 같은데…….”

“참나, 시키는 입장에서는 모르거든요?”

“미안합니다…….”

지훈이 과거를 언급하자 호준은 또 황급히 반성하며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시키는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도, 일하는 입장에서는 숙련도와 일의 성격에 따라 그 양을 다르게 느낀다. 사실 호준이 일을 쪼잔하고 치밀하게 나눠 시켜서 사람 피를 말렸을지언정 불가능하거나 관련 없는 업무를 무턱대고 시키진 않았다. 지훈이 그나마 호준과 일하면서 2년을 넘게 버텼던 이유였다.

“근데 이번 일은 일부러 그렇게 시킨 것 같아요. 절대로 하루 만에 할 수 없는 분량인데 내일까지 해 오라네요. 심지어 대면 보고를 하라고…….”

“이상하네요. 주 과장이 그럴 사람은 아닐 텐데요?”

“맞아,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별안간 주 과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훈과 호준은 파티션 너머를 쳐다보았다. 퇴근한 줄 알았던 주 과장이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정장이 아닌 편안한 옷차림인 걸 보니 퇴근을 했다가 잠깐 들른 듯했다. 주 과장은 직급이 높아 야근 수당이 안 나온다는 이유로 매일 6시면 칼같이 퇴근했지만, 대신 집에서 업무를 보곤 했다.

호준은 지훈의 어깨에 걸쳐 뒀던 손을 얼른 떼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성격 급한 주 과장은 호준을 그대로 지나치더니 지훈을 향해 물었다.

“김 대리, 내가 정시에 퇴근하라고 했는데 왜 남아서 일하고 있어? 보고서는 아까 보냈잖아.”

“그게…….”

“누가 맘대로 초과 근무 하래?” 

일을 많이 해서 혼이 난 지훈은 억울했다. 호준도 의아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 모두 지훈의 전직, 현직 상사로서 지훈의 정체 모를 초과 근무를 추궁하고 있었다. 지훈의 심장이 아주 쪼그라들 것 같았다.

지훈은 주 과장과 호준의 눈치를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결국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 실장님이요.”

호준이 표정을 차갑게 굳히더니 날카롭게 날이 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박 실장이 지훈 씨한테 일을 시켜요?”

“박 실장? 어느 박 실장이야? 설마 박승용이?”

“네…….”

이번엔 주 과장의 얼굴이 굳었다. 지훈은 주 과장과 박 실장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박승용이 왜 김 대리한테 일을 시켜?”

“오후에 갑자기 부르더니 내일까지 보고서를 써 오라고 하시는데…….”

파견직인 지훈은 이 폐쇄적인 조직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박 실장이 시키는 일은 대충 해 주고 입 닫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고생을 해 봤자 2년이니까. 호준과 주 과장이 알면 이런 반응일 걸 알아서 어떻게든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실토하게 되었다.

입맛이 써진 지훈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려 했지만, 그마저도 생각대로 되진 않았다.

“근데 왜 우리 사무실에서 맛있는 치킨 냄새가 나지?”

주 과장의 콧구멍이 치킨의 존재를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 * *

청사 근처의 한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지훈에게 먹이려고 사 온 치킨이 주 과장의 입에 들어가는 걸 보며 호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지훈은 긴장한 탓에 평소처럼 치킨을 야무지게 뜯지 못했다.

“출근 첫날부터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보고를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지훈은 박 실장을 만났던 일을 주 과장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 과장은 치킨의 살코기를 뜯는 와중에도 박 실장이 일을 듣더니 화를 냈다. 

“그래, 나한테 죄송해해야지. 김 대리, 여기서 김 대리 일 잘못되면 편들어 줄 사람 아무도 없어. 지금 김 대리한테 일 지시하는 사람은 나고, 책임져 줄 사람도 나야.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일 벌이다 사고 치면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야. 그땐 나도 책임 못 져. 알겠어?”

“네. 과장님…….”

주 과장이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자 지훈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기껏 일하다가 잔뜩 혼이 나니까 무섭긴 한데, 한편으로는 책임져 준다는 말이 내심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 몰래 사고 쳤다가 지금 개고생 하는 사람 여기 있잖아.”

“…….”

주 과장이 맥주 캔으로 호준을 가리킨 후 벌컥벌컥 마셨다. 정작 당사자인 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박승용이 시킨 일은 할 필요 없고, 내일 전화 오거나 메일 오면 나한테 포워딩해. 앞으로도 누가 김 대리한테 따로 일 시키면 나한테 다 보고하고. 알겠어?”

“네, 과장님.”

지은 죄가 있는 터라 지훈이 얌전히 대답만 하는 동안, 주 과장은 두 번째 맥주 캔을 따면서 중얼거렸다.

“근데 박승용이 이거 웃기는 자식 아냐. 왜 남의 애한테 멋대로 일을 시켜?”

주 과장의 말에 지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내가 자기 애라는 말인가? 주 과장의 친아들은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에서 입시에 매진 중이었다. 지훈이 주 과장의 가족 관계를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가만히 있던 호준에게 불똥이 튀었다.

“정삼. 넌 왜 알면서 말 안 했어?”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

주 과장이 혀를 끌끌 차더니 지훈과 호준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박 실장이 왜 뜬금없이 김 대리한테 시비를 거나 했더니, 보니까 정삼 때문이네, 김 대리, 뭐 좋다고 지 앞가림도 못 하는 놈을 만나? 이런 놈을 만나니까 김 대리도 휘말리는 거 아냐!”

풉!

주 과장의 말에 호준과 지훈은 동시에 마시던 음료를 뿜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둘의 관계가 언급되는 바람에 둘 다 당황했다. 

“정 사무관이 별명만 일등 신랑감이지, 허우대만 멀쩡하고 실속이 없거든. 단물만 빨아먹고 얼른 헤어져. 옆에 있으면 김 대리 인생도 같이 말려.”

실속이 없다고 하기엔 너무 대물 아닌가? 게다가 지금 호준의 아파트에도 빌붙고 있는데? 이미 실속을 매일 챙기고 있는 지훈이 눈을 굴리며 호준과 주 과장을 쳐다보았다.

사실 주 과장이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챌 여지는 차고 넘쳤다. 지훈과 호준의 메신저를 들여다본 것은 물론이고, 이 시간에 호준이 지훈에게 치킨을 사 들고 와서는 시시덕거리고 있었으니, 편견만 없애고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이왕이면 좋은 얘기를 좀 해 주세요.”

지훈이 주 과장의 눈치를 보는 사이, 호준은 뻔뻔하게 한술 더 떴다.

“뭘 잘했다고 좋은 얘기를 해? 잘한 게 있어야지. 너는 왜 아직도 회사야?”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어요. 지금은 과장님 때문에 집에 못 가고 있잖아요.”

“왜 나 때문이야? 곽 과장 때문이잖아.”

“업무 외 시간에 부하 직원 붙잡아 놓고 잔소리하는 것도 갑질입니다, 과장님.”

“말 한번 잘했다. 예전에 네가 김 대리한테 일을 엄청나게 시켰다며. 얼마나 달달 볶은 거야? 얘가 너 신입 때보다 잘 써 와.”

“제가 잘 가르쳐서 김 대리가 잘하면 과장님한테 좋은 거죠.”

“난 너 그렇게는 안 가르쳤어.”

“그래서 그때 저만 고생했잖아요.”

둘이 티격태격하긴 해도 호준이 주 과장을 편하게 대하는 걸 보니 서로 격의 없는 사이인 듯했다. 그사이에 점차 입맛이 돌아 조용히 치킨 뼈를 쌓아 가던 지훈은, 왜 호준이 주 과장을 은근히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까지 지훈이 만난 상사들은 지훈에게 다른 팀의 일까지 일을 두 배로 시키거나,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자신이 책임질 테니까 자기 일만 하라는 상사는 처음이었다. 세상에 상사는 다 최 팀장같이 못 믿을 놈인 줄로만 알았더니, 주 과장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지훈은 처음 알았다.

물론 지난 몇 년간 지훈을 달달 볶았었던 호준은 일 처리가 깔끔했지만, 지훈과 같은 회사의 직속 상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같이 비교하긴 어려웠다.

“김 대리. 너는 커피도 엉망진창으로 타 오면서 박 실장 일은 왜 그렇게 열심히 해?”

주 과장의 불똥이 다시 지훈에게 튀었다. 치킨을 먹다 말고 억울해진 지훈이 항변했다.

“……열심히 안 했는데요.”

“뭐?”

“예전 보고서 대충 짜깁기해서 오늘 중으로 넘기려 했습니다.”

지훈의 말에 주 과장이 허탈해하며 웃더니 남은 맥주를 원샷했다. 옆에 있던 호준도 어이없어하며 지훈을 쳐다보았다.

“하긴 우리 김 대리도 보통은 아니지. 그럼 찬물이랑 설탕 커피 둘이서 오붓하게 치킨 마저 먹어. 난 간다.”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과장님.”

주 과장에게 찬물을 대령한 전적이 있던 호준이 냉큼 일어나서 주 과장을 붙잡았지만, 주 과장은 손사래를 쳤다.

“됐어. 그 차 10년 넘지 않았어? 엔진은 안 터지니? 난 오래 살 거라서 그 똥차 안 탄다! 김 대리도 조심해!”

주 과장은 마지막까지 호준에게 악담을 퍼붓더니, 때마침 지나가던 택시에 올라탔다.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다가 사라진 주 과장 때문에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지훈 씨랑 치킨 먹으려고 했는데…….” 

주 과장이 남기고 간 맥주 캔을 대신 버리면서 호준이 중얼거렸다. 늦은 퇴근 후 지훈과 짧게 데이트하려던 계획이 예상치 못한 주 과장의 등장으로 완전히 엉망이 되었으니 투덜거릴 만도 했다.

하지만 지훈은 다른 일이 걱정이었다.

“주 과장님이 아셔도 별문제 없겠죠?”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 사이는 별문제 없을 텐데, 박 실장의 일은 좀 골치 아파질 겁니다.”

주 과장이 엔진은 무사하냐며 악담을 퍼부은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면서 호준이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며칠 지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래도 앞으로 지훈 씨한테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야만 하고.”

정작 그렇게 말하는 호준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서, 지훈은 오히려 호준이 더 걱정되었다.

* * *

며칠 기다릴 것도 없이, 지훈은 바로 다음 날 호준이 말한 바를 알게 되었다. 지훈 대신 주 과장이 직접 박 실장을 대면했다. 지훈은 그 광경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대단한 싸움이 있었다는 소문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안 그래도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날 이후로 아무도 두 사람을 엮이게 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이후 박 실장이 지훈을 불러내서 별도의 업무를 지시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걸 보며 지훈은 앞으로 주 과장이 아무리 일을 급하게 시켜도 군말 없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호준은 한동안 이상할 정도로 굉장히 분주하게 지냈는데, 업무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호준이 꽤 진지해 보여서, 지훈은 차마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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