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 첫 출근 (22/27)

외전 4. 첫 출근

“세상에, 김지훈 대리님, 정 사무관님이랑 같이 산다고요오오오오?”

지훈의 첫 출근 날부터 신고식이 요란했다. 멀리서 왔다니까 지낼 곳은 찾았냐고 묻기에 순순히 사실만 말했는데 반응이 엄청났다. 지훈은 당황했다. 심지어 층이 달랐는데도 사방팔방 호준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역시 일등 신랑감의 인기는 엄청났다. 과연 저 잘생긴 사무관은 대체 언제 누구와 결혼하게 될 것인지가 초유의 관심사였다. 바로 그 일등 신랑감을 제대로 꿰차 버린 지훈은 출근 첫날부터 막중한 부담감을 느꼈다.

“그냥 남는 방 한 칸에 잠깐만 얹혀사는 거예요.”

거짓말이다. 주말 내내 호준의 침대 위에서 홀딱 벗고 뒹굴었다. 오늘 아침에도 한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 사무관님 집에 방이 많은가 봐요!”

“방 3개 있어요. 저는 비어 있던 남은 방 쓰거든요.”

주말 내내 그 방은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호준은 같이 산다고 말하고 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지훈이 다른 일반인과 함께 살 때의 얘기였다.

지훈의 옆자리에 앉은 공 주무관은 눈을 반짝이면서 지훈을 부담스럽게 쳐다보았다. 이 사람, 정호준 사무관한테 관심 엄청 많았다. 거의 연예인 보듯이 했다. 지훈은 출근 첫날부터 슈퍼스타의 숨겨 둔 애인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부러워요! 그럼 파견 나온 내내 정 사무관님이랑 지내요?”

“아뇨. 저 방 구할 때까지만 지내기로 했어요.”

이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2년 넘게 알았다지만 서로 몸과 마음을 교류한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놓고 동거하면 너무 부담스러웠다. 지훈은 이전 자취방 보증금 문제만 해결되면 새집을 빨리 찾을 생각이었다.

이 동네에서 집 구하는 거 엄청 힘들다, 세끼 밥 다 나오고 청소까지 해 주는 집이 어디 있냐, 밤에도 잘해 주겠다, 차 없이 살면 힘드니까 차 있는 자신을 부려 먹으면 편하다 등등 설명을 덧붙이긴 했지만 호준은 기본적으로 지훈의 생각을 존중했다.

“ㅇㅇ정책평가연구진흥원에서 온 김지훈 대리님이시죠? 저는 윤예은 사무관입니다.”

출근하자마자 급한 일을 후다닥 처리하느라 전체 인사도 생략했던 윤 사무관이 뒤늦게 지훈을 찾아왔다. 지훈은 파견직이라서 계속 대리 직급을 유지 중이었다.

“네, 김지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올해로 스물아홉, 맞죠? 몇 년 전에 학생 인턴으로 ㅇㅇ원에서 일했고.”

“와, 어떻게 아셨어요?”

훤칠한 체격과 시원시원한 스타일의 윤예은 사무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지훈과 악수했다. 지훈은 윤 사무관의 마른 손가락 사이로 엄청난 악력을 느끼며 호준의 경고를 떠올렸다.

‘윤예은 사무관이라고 있을 텐데, 무조건 조심해요.’

아침에 청사까지 차를 태워 주면서 호준은 신신당부를 했다. 호준은 윤 사무관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것 같았다.

‘왜요?’

‘진짜 사람을 짜증 나게 하거든요. 그 인간이 괴롭히면 언제든지 말하고요.’

‘아는 사이세요?’

‘평생 모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 아마 한 달 내로 성 바꿔야 할 겁니다.’

정말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친구인가? 친구라고 하기엔 사이가 험악해 보였다.

그래서 지훈은 내심 윤 사무관이라는 사람이 궁금했는데 직접 만나니 호준이 왜 그렇게 치를 떨었는지를 이해했다. 기가 엄청 셌다. 사람이 알고 보면 착할 것 같지만, 일단 공격적이었다. 강강약약 스타일인 호준과는 맞붙는 순간 싸울 게 뻔했다.

“일 잘한다고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정삼한테. 정삼이랑 지낼 만해요?”

윤 사무관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하필 호준의 얘기라니, 지훈은 괜히 긴장했다.

“아직 며칠 안 돼서 모르겠어요.”

“잘해 주나 보네. 정삼이랑 같이 많이 놀아 줘요. 불쌍한 놈이니까.”

윤 사무관이 엄청 빈정거렸다. 둘이 대체 무슨 사이일까. 막역한 수준이 아니라 서로 원수진 것 같은데. 지훈은 문득 궁금해졌다.

“정 사무관님은 윤 사무관님이 이제 성 바꾸셔야 한다고 하던데요?”

그 말 듣자마자 윤 사무관은 지훈을 위아래로 한 번씩 훑더니 코웃음을 쳤다.

“웃기고 자빠졌네. 성은 자기가 갈아야지. 성공하긴 했나 본데, ‘2년 안에’ 못 한 거 내가 다 안다고 전해 줘요.”

지훈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공 주무관도 모르는 일인지 윤 사무관한테 물었다.

“윤 사무관님, 정 사무관님이랑 전에 무슨 내기 하셨어요?”

“그런 게 있어요. 김지훈 대리님은 모르면 정삼한테 직접 설명해 달라고 하고.”

윤 사무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로 되돌아갔다. 어리둥절해하는 지훈을 보며 공 주무관이 옆에서 속닥였다.

“윤 사무관님은 틈만 나면 내기하고 다니시거든요. 다들 맨날 당해요. 전에 정 사무관님이랑 같이 일하셨다고 하는데 그때 무슨 내기를 하셨나 봐요.”

둘이 같이 일한 적 있구나. 마주친 경험이 있으니까 호준도 그렇게 치를 떠는 거겠지. 사실 지훈이 봤을 땐 윤 사무관뿐만 아니라 그냥 모든 사람들을 조심해야만 했다. 공 주무관도 호준에게 관심이 너무 많았다. 위험했다.

“김지훈 씨! 할 일 없지?”

파티션 끝에 있던 주 과장이 호탕한 목소리로 지훈을 불러 댔다. 지훈은 잔뜩 주눅 들어서는 주 과장의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 주 과장은 호방한 중년 서기관이었다. 목소리도 크고 풍채도 좋았다. 앞으로 지훈에게 일을 직접적으로 지시할 사람이 주 과장이었기 때문에 지훈은 일단 깍듯하게 인사했다.

최 팀장은 멍청하고 게으른 상사였기 때문에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었다. 하지만 주 과장은 긴장해야 했다. 딱 봐도 똑 부러지고 일도 잘할 것 같았다. 그런 상사라면 역시 일을 많이 시키고 틀린 것도 잘 잡아내기 마련이다. 호준은 조용히 뒤끝 있게 사람 피를 말리는 편이었지만, 주 과장은 앞에서 대놓고 호통칠 것 같았다. 무섭다는 뜻이다. 호준은 주 과장에 대해서도 말했던 것 같았다. 알고 나면 좋은 사람인데 처음엔 좀 힘들 거라고 했던가.

지훈은 일단 기가 팍 죽었다. 처음이니까, 그리고 파견 나왔으니까 일단 잘 보이자. 지훈이 일 못하면 회사 전체가 욕먹기 딱 좋았다.

“아직 업무 인수인계를 못 받았습니다.”

“그건 뭐 천천히 하고. 근데 지훈 씨는 직급이 대리라고?”

“네.”

“그 회사는 입사하자마자 대리를 달아 줘? 아무튼 더럽게 체계가 없어. 계약직도 대리인데 8년 차도 대리잖아. 거기 아직도 계약직으로 프로젝트 굴리지?”

“네. 저도 프로젝트 몇 개 하다 왔습니다…….”

지훈이 바로 산증인이었다.

“하여간 다들 정규직 안 뽑으려고 용을 써요. 비정규직 현황 분석을 비정규직이 하는데 대책이 나오겠냐고.”

주 과장이 혀를 끌끌 차면서 책상 앞에 놓인 자료를 정리해 넘겨주는 척하더니 갑자기 주먹을 꽝 내리쳤다. 그러더니 아직 옆에 서 있던 지훈에게 외쳤다.

“자, 그럼 우리 귀염둥이 남직원은 첫 업무로 저 끝에 있는 탕비실에 가서 커피 좀 타 오지? 달다구리하게!”

“네에?”

주 과장은 강력한 꼰대력을 내뿜었다. 지훈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가 점점 차갑게 굳었다. 표정 관리하면서 웃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얼굴이 도저히 펴지지가 않았다.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로만 듣던 커피 심부름이었다. 지훈은 인턴일 때도 이런 일은 자발적으로만 했었지 명령받은 적은 없었다.

옆에서 보던 공 주무관이 한 마디 했다.

“과장님. 커피는 각자 마시면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간만에 남직원 들어왔는데. 조신하게 커피 잘 타 오는지 좀 봐야지.”

주정연 과장의 완고함에 사무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윤 사무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공 주무관은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파티션 너머 옆 동네까지 조용해졌다.

지훈은 있는 힘껏 눈치를 풀 가동시켰다. 새 직장에서 첫날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는데……. 그래서 호준이 주 과장이 어렵다고 한 모양이었다. 이런 꼰대라면 호준이 완전히 싫어할 스타일인데, 좋은 사람이라고 한 건 또 무슨 말이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지훈은 알 수 없었다. 상상도 못 한 전개였다. 솔직하게 그런 일은 못 한다고 말하려니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단 눈 딱 감고 해야 하는 걸까? 지훈은 정규직 출근 첫날부터 잘리기 싫었다. 계약직이면 침 한번 뱉고 나서 때려치우기라도 하지, 힘들게 들어온 정규직이라 도망갈 수 없었다. 지훈은 파견 나온 상태라 처지가 더 애매했다. 똥통에 발 담근 기분이었다.

“그럼 제가 커피 타 오겠습니다아…….”

지훈은 고뇌 끝에 현실에 굴복했다. 주 과장은 이때다 싶었는지 냉큼 주문까지 했다.

“그렇지. 남직원이면 이렇게 사근사근한 맛이 있어야지. 난 카페 라테로 부탁해, 김 대리!”

주 과장은 어김없이 꼰대의 음료라는 라테를 주문했다. 지훈은 최대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좋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럼 저는 아메리카노로 부탁해요.”

윤 사무관이 조용히 거들었다. 하지만 그나마 믿었던 공 주무관은 한술 더 떴다.

“저는 핫 코코아요!”

지훈은 탕비실에 가는 동안 험난한 현실을 느꼈다. 일단 커피 심부름 자체가 문제였다. 요즘에도 이런 걸 시키다니, 마음의 소리함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노조에 신고하면 받아는 들여질까? 나는 파견직인데 어느 노조에 말해야 하지? 노조에서 묵살하면 어떡해? 인권 위원회에 진정을 넣어야 하나? 이도 저도 안 되면 나는 이제 커피 심부름을 매일 해야 하는 걸까?

계약직일 땐 계약을 할 때마다 업무 내용이 수시로 바뀌었다. 업무 일관성도 없었고, 범위도 불명확해서 부당하게 감내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사내 행사에서 배제되곤 했다. 소속감도 들지 않았고, 성과급도 없어서 업무에 대한 보상이 큰 것도 아니었다.

정규직이 되면 좀 달라질 줄 알았다. 적어도 평생 고용을 보장받고,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될 테니까. 이런 잡무가 아니라 좀 더 전문적인 일을 맡아서 진행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파견직으로 발령받은 건 새로운 수난의 시작이었다.

물론 지훈의 경우 일반적인 하청 고용 파견직과는 결이 달랐지만. 그래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동떨어져서 업무 관련성이 없는 일을 2년 동안 하게 생겼다. 게다가 조직에 소속감 없는 건 계약직일 때와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만약 파견직이 아니라 본사로 발령받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후.”

지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일단 커피를 타긴 탔다. 탕비실에 있던 커피 머신으로 각자가 요청한 메뉴를 뽑은 다음에 쟁반에 받쳐 가려고 하다가, 문득 그냥 이대로 가져가긴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입 사원이 첫날부터 이런 부당한 일까지 굳이 잘해야 하나?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지.

“푸합! 이게 뭐야?”

지훈이 건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주 과장은 그대로 뱉어 냈다.

“김지훈 대리, 이게 뭐야? 설탕을 통째로 넣었어?”

“달다구리하게 타 달라고 하셔서 달게 탔습니다.”

지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탕비실에 있던 설탕을 쏟아부었다. 설탕이 다 녹지를 못해서 알갱이가 씹힐 정도였으니까 말 다 했다.

“으엑!”

“아아악! 이게 뭐야!”

아메리카노와 핫 코코아를 먹던 윤 사무관과 공 주무관도 격렬한 감탄사를 뿜어내며 음료를 토해 냈다. 모두 ‘달다구리한’ 맛을 강렬하게 느꼈을 테다. 지훈은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 후 곧바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대범한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 잔뜩 졸아들어 있었다. 망했다. 첫날부터 사고 쳤다. 오늘부로 잘리면 어떡하지? 아예 채용 취소가 되어 버리면 어쩌지? 징벌로 업무 재배치받아 이상한 데로 빠지면 어쩌지? 이러다가 나 외딴 섬마을로 가 버리면 어쩌지? 그냥 남아 있어도 문제였다. 이대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면 어쩌나. 결국 자진 퇴사의 수순일까?

출근 첫날부터 때려치울 결심을 하게 되다니. 암담했다. 새로 이력서를 넣으면 자신은 신입일까, 경력직일까? 계약직으로만 일해서 경력이 애매했다. 결국 신입의 연봉에 경력직의 경력을 갖춘 가성비 높은 중고 신입이 될 것이다.

지훈이 모니터 바탕 화면만 보면서 덜덜 떨고 있는데 등 뒤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과장님! 이거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윤삼 만 원 가져가!”

“휘유. 대신에 제가 커피 쏩니다! 안 달다구리한 걸로!”

주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윤 사무관 자리에 가서 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윤 사무관이 야무지게 돈을 챙기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내기?

아까 공 주무관한테 들은 얘기가 있던 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윤 사무관이 지훈의 책상 위에 대뜸 앉더니 만 원 지폐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내가 오늘 김지훈 대리님의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 덕분에 만원 벌었어요. 무슨 커피 좋아해? 내가 쏜다.”

“무…… 슨 말이에요?”

“미안해요. 대리님. 이거 신고식이었어요. 저희 과는 남자 직원 새로 오면 꼭 한 번씩 해요.”

공 주무관이 설탕 덩어리 코코아를 버리면서 말하는 순간 지훈을 제외한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웃기 시작했다. 윤 사무관은 거의 쓰러져서 웃었다. 모두들 재밌는 모양이었다.

“…….”

지훈은 이 모든 상황이 조금도 재미없었다. 방금 전까지 이력서를 새로 쓸 걱정까지 했으니까. 신고식이라면 원래 하는 건 아니고 이례적으로 지훈을 엿 먹이기 위해 일회성으로 했다는 거겠지? 지훈을 제외한 모두의 즐거움을 위해서? 지훈은 겉보기엔 극도로 차분했지만 내면에서는 분노 게이지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어떡해! 화나셨나 봐요! 미안해요!”

“미안해, 김 대리.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내가 장난이 과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주 과장이 지훈의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지만 지훈의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애초에 없었으면 더 좋았을 일이었다. 지훈은 잠자코 있긴 했지만 표정은 심각했다. 호준이 지훈의 표정을 봤다면 지훈의 분노 폭발을 막으려고 황급히 소고기를 투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지훈의 성깔을 모르는 주 과장과 윤 사무관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과장한테 직접 사과를 받아서 아주 손톱만큼 분이 풀릴 뻔했지만 턱도 없었다. 상대가 최 팀장이었으면 벌써 멱살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는 없었다. 아까 어쩔 수 없이 커피를 타야 했던 것과 같은 수많은 이유에서였다.

누가 봐도 지훈 주변의 공기는 냉동 창고 수준이었다. 주 과장은 자기 책임도 있고 하니 지훈을 좀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커피 제대로 안 타 온 걸로는 지훈이 두 번째로 기록 세웠으니까,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져.”

“무슨 자부심이요?”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무조건 따르지 않는 소신이 있다는 거?”

“애초에 부당한 지시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처음 만난 상사한테 할 반박은 아니었는데, 지훈은 이미 너무 화가 나서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아가리라도 털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주 과장은 지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빵 터져서 웃었다.

“그렇지. 애초에 부당한 지시가 없어야지. 그런데 이 바닥에서는 언젠가 생기기 마련이거든.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라면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 설탕 파티를 벌인 김 대리처럼 무조건 따를 필요도 없겠지. 특히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기면 탕비실 말고 복도 밖으로 나가서 신고하는 거 잊지 말고. 그리고 오늘의 더러웠던 기분은 꼭 오래오래 기억해서 앞으로 남한테도 시키지 말도록!”

이건 뭐지?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약은 아닌데, 건강 보조제 정도? 호준이 주 과장에 대해서 처음엔 힘든데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단 처음에 힘든 정도가 엄청났다.

“김 대리 좋겠네. 첫날부터 주 과장님한테 점수 따고. 주 과장님이 원래 남자 직원 별로 안 좋아하는데!”

윤 사무관의 호들갑에 지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커피에 설탕 부어서 점수 땄다는 거야? 가만 보니까 여기 좀 이상한 곳이었다. 공무원 조직 분위기가 이래도 돼?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잘못된 곳에 발을 들였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지훈이 불안하게 서 있는데 주 과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친구 보니까 옛날에 누구 생각난다, 그치?”

“안 그래도 정삼이랑 아는 사이래요. 어쩜 저렇게 둘이 만난 건지…….”

윤 사무관이 혀를 끌끌 차는데 주 과장이 어떻게 둘이 아는 사이일 수가 있냐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뭐야, 왜 또 정 사무관 얘기가 나와?

“정 사무관님이 왜요? 전에 무슨 일 있었어요?”

호준에 대해 관심만 많은 공 주무관도 사정을 모르는지, 지훈 대신 질문을 던졌다. 주 과장과 오래 일해 온 윤 사무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전에 정삼이랑 일할 때, 똑같은 신고식 했었거든. 정삼은 그때 찬물 떠 왔어. 과장님 냉수 먹고 속 차리라고. 와, 그때 정삼 완전 잘리는 줄 알았는데.”

윤 사무관이 목이 잘리는 제스처까지 취했다. 은근히 호준이 잘리길 바랐다는 수준이었다.

“정삼 참 아깝지. 곽 과장한테 뺏기지만 않았어도 내가 조신하게 잘 키우는 건데.”

“자기가 뛰쳐나간 걸 어떡해요!”

꼰대 같은 주 과장과 얄미운 윤 사무관이 농담 따먹는 와중에 지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호준도 당했다는 말인즉, 그 인간도 이 뭐 같은 신고식을 알고 있었다는 거 아냐? 그럼 미리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여기로 배정받는 거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갑자기 또 열 받은 지훈이 씩씩거리는데 윤 사무관이 슬그머니 정곡을 찔렀다.

“김 대리, 정삼이 이런 건 말 안 해 줬어?”

“안 해 줬는데요.”

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호준, 너 이 새끼 오늘 죽었다. 오늘부로 등짝 작살날 줄 알아라.

“자, 그럼 이제 우리 김 대리도 환영했으니 윤 사무관이 만 원어치 커피 사 오면 주간 업무 보고 시작해 볼까? 김 대리는 일단 듣고 업무 파악부터 해.”

주 과장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지훈만 빼고 모두가 활기찬 월요일 아침이었다.

지훈은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첫 출근부터 이 모양이면 앞으로의 직장 생활이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정호준에게 시달렸던 지난 2년보다 앞으로가 더 괴로울지도 모르겠다며 지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훈의 새로운 수난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행히 출근 첫날은 야근이 없었다. 저녁 회식은 1년에 한 번만 있다면서 지훈의 진짜 환영회는 점심 회식으로 대체되었다. 메뉴는 심지어 정통 이탈리안 파스타였다. 꽤 맛있어서 솔직히 지훈은 화가 조금 풀렸다. 주 과장은 지훈보고 업무 파악이라 하라며 하루 종일 일도 안 줬다. 미안할 짓을 해 버리고는 사과는 너무 제대로 하는 게 지훈이 잘 아는 정 모 씨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첫날이라 지훈은 새로운 조직과 업무를 익히는 데에만 시간을 보냈다. 6시에 칼퇴근한 후, 저녁도 같이 먹을 겸 호준과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5시 21분 35초쯤 되었을 때 지훈의 키폰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지훈은 화들짝 놀랐다. 내선전화였다.

설마 정호준인가? 하지만 낮에 분위기 파악 못 한 호준이 장난친답시고 걸어온 번호와는 완전히 달랐다. 물론 또 호준일 수도 있었다. 아침부터 대형 낚시에 낚여 버린 가련한 물고기 지훈은 이제 뭐든 의심하고 봤다.

“ㅇㅇ정책연, 아니, ㅇㅇ복지과 김지훈입니다.”

전 회사에서 전화 받던 멘트가 입에 배어 버려서 하마터면 그대로 읊을 뻔했다. 황급히 새로운 부서를 말하긴 했지만 지훈은 내심 쪽팔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더 쪽팔릴 틈도 없었다.

-ㅇㅇ정책실 박승용 실장님께서 김지훈 대리님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지금 잠깐 와 주실 수 있습니까?

실장이면 높은 사람 아닌가? 지훈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지훈이 배정받은 곳과도 완전히 다른 부서였다. 그런데 대체 왜? 지훈은 당황해서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주무관님. 박승용 실장님이라는 분 아세요? 몇 층에 계신지 아시나요?”

전화를 끊고 나서 지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옆자리의 공 주무관한테 질문했다.

“왜요?”

공 주무관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갑자기 저보고 오라고 하시는데요?”

“이상하다. 박 실장님 저희 과장님이랑 사이 엄청 안 좋거든요. 혹시 아는 사이예요?”

“아뇨. 전 이름도 처음 들어 봐요.”

관료 조직엔 누구 라인이니 하는 조직적 갈등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훈의 원래 회사에도 내부 파벌이 갈려 있었고, 지훈은 계약직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치 않게 보고 들은 일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새로 파견된 조직의 내부 사정까지는 속속들이 알 수 없는 법이니까. 지훈은 뭐가 잘못되려나 싶어서 괜히 긴장했다.

박 실장의 사무실은 다른 층에 있었고, 그래서 실장실 앞에 도착하니 5시 40분이 넘어 있었다. 시발. 퇴근 늦어지잖아. 지훈은 짜증이 났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방 안엔 고약한 인상의 대머리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눈썹은 엄청 많은데 머리털은 하나도 없었다. 털이 이렇게 불균형하게 분배될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ㅇㅇ복지과 김지훈 대리입니다.”

“자네가 ㅇㅇ정책평가연구진흥원에서 왔다고?”

“그렇습니다.”

지훈은 초조해졌다. 일단 문 옆에 서 있긴 했는데, 박 실장이라는 놈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알아서 앉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앉으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이런 상황에서는 눈치껏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 지훈을 괴롭게 했다. 지훈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동안 박 실장이 말했다.

“이번에 정규직 채용되어서 우리 쪽으로 파견되었다고?”

“네. 원래 전환형 계약직이었고, 이번에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대답하려고는 했는데, 역시 너무 구구절절 설명한 것은 아닌지 또 걱정되었다. 설명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도 눈치껏 판단해야 한다니, 죽을 맛이었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말이야. 요즘 너도 나도 공무원이다 공공 기관이다 뭐다 하면서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바로 자네가 정규직으로 뽑혔단 말이지. 그런 대단한 인재가 우리 부처에 파견까지 왔으니 영광일세.”

“감사합니다.”

지훈은 이번에도 치열한 눈치 게임 끝에 가장 무난한 대답을 뱉었다. 저 대머리 털 인간,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서두가 장황한 사람치고 말 똑바로 하는 사람 없다던데. 게다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죄다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커피 심부름을 한 번 더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ㅇㅇ과의 정호준 사무관이랑 일을 오래 했다고?”

지훈은 또 깜짝 놀랐다. 왜 또 정호준 얘기지? 오늘 만나는 사람마다 지훈에게 정호준 사무관에 대해서 물었다. 두유 노 김치, 두유 노 불고기 뒤에 두유 노 정 사무관이 따라와야 할 지경이었다. 여기서 일하려면 무조건 정호준을 알아야만 하는 건가?

“제가 일했던 사업의 담당 사무관이셨습니다.”

“지금 같이 지낸다면서. 원래 알던 사이는 아닌가?”

소문이 왜 이렇게 빨라? 지훈이 호준과 같이 지내는 걸 청사 1층 경비실부터 옥상 풀때기까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러다 장관이랑 국무총리까지 알 기세였다.

그나저나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것일까. 혹시 저번에 그 우 국장이라는 사람한테 들킨 것 때문에 소문이 야금야금 나서 이 박 실장이라는 사람도 알게 된 걸까? 지훈은 또 덜컥 겁이 났다.

“일을 오래 같이 해서 친분이 생겼습니다. 집은 제가 갑자기 태종시로 파견되는 바람에 잠깐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일을 하다 생긴 친분은 아니었지만, 지훈은 건조하게 사실만을 말했다.

“그럼 자네 정규직 채용에 정호준이 관여했다고 볼 수 있겠군?”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지훈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지훈은 장규원 실장에게서 호준이 자신을 많이 추천해 줬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호준이 자신한테 흑심이 있었으니, 영향이 있긴 있었을 테다. 솔직히 지훈도 찜찜하던 차였다.

하지만 지훈은 자신이 아는 걸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특히 이 기분 나쁜 대머리 털 인간 앞에서는.

“정 사무관님은 공사 구분을 잘하는 분입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일을 그렇게 시켜 대는 인간은 정호준밖에 없을 테니까. 지훈은 이건 정말 자신할 수 있었다.

“제가 일을 잘했으면 저와 같이 일한 정 사무관님이 저를 추천했을 테고, 제가 일을 못했다면 추천하지 않으셨겠죠. 솔직히 정 사무관님이 제 채용에 부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해관계도 없는 저 때문에 자신의 평판에 문제가 될 행동을 하실 것 같지도 않고요. 저도 따로 부탁했던 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회사가 저를 뽑을 때 그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했을 겁니다. 제 채용의 정당성에 의문이 있으시면 회사 측을 조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방금 굉장히 공손하면서도 아니꼽게 말했다는 걸 지훈도 알았다. 말해 놓고 나서야 이게 잘한 짓인가 싶어서 가슴이 엄청 벌렁거렸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까 주 과장한테도 이렇게까지 대들진 않았는데, 왜 더 높은 사람한테 이 모양인 걸까. 되도록 강약약강으로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던 지훈은 골이 아팠다. 조용히 살고 싶은데, 세상이 자꾸 성질을 건드린다.

“괜히 정규직 채용된 건 아닌가 보군. 대답이 아주 똑 부러져. 자네 말대로 회사를 조사해 볼 테니 이만 들어가 봐.”

박 실장은 기분 나쁜 눈빛으로 지훈을 한참 쳐다보더니, 자기 용건이 끝난 건지 갑자기 지훈을 돌려보냈다. 회사를 조사한다는 말은 겁이 났지만 일단 나가라고 했으니 나가야겠지. 지훈이 방문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박 실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앞으로 자네를 좀 지켜보겠네.”

* * *

“와! 씨! 진짜 개쫄았잖아요. 나 뭐 잘못했어요?”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지훈은 입안을 얼얼하게 쑤실 정도로 매운 떡볶이를 먹으며 방금 전 박 실장과 있었던 일을 토해 냈다.

“지훈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 쫄 필요도 없어요. 그 인간이 잘못한 겁니다.”

호준이 그런 지훈을 달랬다. 지훈은 6시가 한참 넘어서야 청사 건물에서 쫄래쫄래 나오더니 대뜸 자긴 엄청나게 매운 떡볶이를 지금 당장 먹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청사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호준이 지훈을 데려 온 곳은 아파트 근처에서 즉석 떡볶이를 파는 허름한 분식집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떡볶이가 엄청나게 맛있었다. 게다가 호준이 주문한 10단계 최고 매운 맛은 캡사이신을 쏟아부은 듯했다. 한 입만 넣어도 입안이 얼얼해졌다. 눈가에 눈물이 글썽일 정도였다. 지훈이 당장 원하던 바로 그 맛이었다.

무엇보다도 누굴 욕하든 주변에 뭐가 없어서 보안이 최적으로 유지되었다. 슈트 입은 건장한 두 남자가 동네 분식집에서 화끈한 떡볶이를 먹으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대체 왜 지켜보겠다는 거예요? 사무관님 얘긴 왜 하고요?”

아까 호준이 장난삼아 내선 전화를 걸었을 때, 지훈은 퇴근만 하면 자신을 가만 안 두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었다. 첫 출근 날 지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던 호준은 잠자코 한 대 맞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예정보다 늦게 퇴근한 지훈은 영혼이 다 빨려 나간 상태였다. 갑자기 왜 그런가 했더니, 지훈의 입에서 나온 박 실장 이야기는 호준에게도 충격적이었다.

“박 실장이 저를 굉장히 싫어하는데……. 지훈 씨한테 불똥 튀어서 미안해요.”

“왜요, 왜 싫어하는데요?”

박 실장만 생각하면 호준도 열이 뻗쳤다. 팔팔 끓는 탕 속의 떡볶이를 어묵과 함께 집어 먹었다. 입안에 매운 맛이 퍼졌다. 입안을 진정시키려고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지훈 씨한테는 나중에 말하려 했는데, 그냥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요. 지훈 씨가 채용될 자리에 원래 내정자가 있었어요. 저도 건너 들었는데, 아마 박 실장이 줄타기하려는 높으신 분의 조카일 겁니다.”

“말도 안 돼! 저 정규직 전환형 계약직이었잖아요!”

정규직 전환만 믿고 여태 악랄한 사무관이 시킨 갖은 개고생을 참고 견뎠는데! 굴러 들어온 돌 때문에 하마터면 잘릴 뻔했다니! 지훈은 억울했다.

“사실 정규직 전환 심사할 때 지훈 씨의 성과가 부족하거나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그냥 탈락하는 거니까요. 조작의 여지가 좀 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지훈 씨는 탈락하고 높으신 분의 조카분이 그 자리에 갔을 겁니다.”

“말도 안 돼!”

분기탱천한 지훈이 떡볶이를 또 집어 먹었다. 삶은 계란도 야무지게 으깨서 국물하고 비벼 먹었다. 지훈은 아마 화가 나는데 분풀이를 못 하는 상황이면 매운 음식으로 화를 푸는 듯했다. 지훈을 빤히 보며 호준은 말을 이었다.

“지훈 씨한테는 다행이었던 게, 얼마 전에 유명 정치인 자제의 공기업 채용 비리 사건이 터졌거든요. 그런 일이 터지면 일단 기관들은 몸 사리기 마련이니까요. 지훈 씨네 회사도 그래서 그냥 자체적으로 청탁을……. 거절하진 않았을 것 같고 그냥 미뤘겠죠. 이번엔 보는 눈이 많으니 그냥 실력대로 뽑은 거고요. 지훈 씨는 아무 문제 없이 절차대로 뽑힌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요. 이건 제 생각인데, 회사에서는 다음 채용을 위해서 지훈 씨를 일부러 파견직으로 보냈을 수도 있어요. 빈자리를 만들어야 하니까. 아니면 말이 나올 것 같으니까 원래 높으신 분 조카를 뽑아서 박 실장 밑으로 보낼 작정이었거나.”

너무 충격적인 채용 비하인드였다. 심지어 파견직이 된 게, 멀리 보내 달라는 요청 때문이 아니었다니! 장 실장은 그럼 그때 어디 가고 싶으냐고 왜 물어본 건데? 그냥 한번 떠본 거였나?

조직이 썩을 대로 썩었다느니, 비밀이 많다느니 하는 얘기는 계약직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많이 들었다. 솔직히 모르는 척하고 조용히 살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올 뻔했다는 걸 알게 되자 지훈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냥 정규직이 되었다고 신나서 여행이나 다녔는데, 뒤에서는 그 자리 하나를 두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그걸 호준이 다 알고 있었다는 점도 충격이었다.

“알면서 왜 저한테 얘기 안 했어요?”

“아무튼 채용은 결정된 거니까 지훈 씨가 알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좋은 얘긴 아니니까 늦게 말해 주고 싶었어요. 지훈 씨가 떨어졌으면 먼저 말했겠죠.”

호준의 심정이 이해는 갔지만, 지훈은 첫 출근 날부터 하루 종일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괜히 짜증이 났다.

“하마터면 제가 박 실장인가 하는 사람 앞에서 헛소리를 할 뻔했다고요!”

“제 추천에 관한 거라면 지훈 씨가 제대로 말했어요. 말한 대로 저는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고요. 레퍼런스 체크 요청이 왔을 때는 그냥 실력대로 평가해서 항목별로 점수 매겨서 보냈어요. 같이 일한 상급자가 직원을 추천하는 일은 흔한 일이고요. 제가 봤을 때 지훈 씨가 실수한 것 없어요. 당황했을 텐데 잘 대답했어요.”

이미 예전부터 호준은 기회가 오면 지훈을 어디든 추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훈이 일을 성실하게 잘해 왔기 때문이었다. 호준의 사심을 배제하고서라도, 결국 지훈이 공정하게 얻은 기회였다.

호준에게서 설명을 듣고 나서도 지훈은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근데 사무관님, 저희 회사 감사실장님하고 친하다면서요.”

“아, 장 실장님이랑 친하죠. 근데 그분은 인사위원회에 영향력이 없잖아요. 지훈 씨를 뽑은 건 인사위원회와 정책 본부겠죠. 장 실장님이 고작 저 때문에 인사실에 지훈 씨를 뽑으라고 압박 줄 사람도 아니고요. 솔직히 저나 지훈 씨가 그렇게 대단한 인재는 아니잖아요.”

지훈이 보기에 호준은 종종 지나칠 정도로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호준의 말이 지훈을 오히려 안심시켰다. 지훈은 한숨을 내쉬면서 떡볶이를 또 한 입 집어 먹었다

“박 실장은 제가 친분을 이용해 지훈 씨의 채용에 영향을 줬다는 식으로 시비를 걸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자기 청탁이 물 먹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지훈 씨에다 저까지 엮어서 보내 버릴 판을 짜려고 했나 본데요. 이런 개쓰레기 같은…….”

호준은 순간적으로 더 심한 욕을 하려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학생들 때문에 참았다.

하지만 지훈은 입이 쩍 벌어졌다. 자신이 사내 정치 태풍의 눈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호준과 함께.

“근데 저는 사무관님이랑 친분이 있잖아요. 지금 이렇게 떡볶이도 같이 먹는데. 저희 어떡해요? 같이 잘려요?”

지훈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이대로 호준과 나란히 회사에서 잘린 다음, 골방에서 알바로 생계를 유지하다 서로의 가난에 지쳐 헤어지는 리얼리즘 결말까지 생각한 지훈은 속이 상했다. 사랑의 대가가 너무 크다. 지금이라도 헤어질까?

호준이 얼른 지훈을 안심시켰다.

“지훈 씨의 아버지나 삼촌이 10년 안에 유명 정치인이 되지 않는 이상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설마 청탁을 넣은 쪽이 이걸 공론화할까요? 어차피 그쪽이 더 털려요. 결정적으로 지훈 씨의 채용 과정은 정당했으니까요. 솔직히 지훈 씨와 저의 접점이라곤 그냥 같이 일했다는 것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이걸 베갯머리송사라고 오해할 만큼 오픈 마인드도 아니고요. 박 실장 놈도 여기까진 생각 못 해요.”

이성애 공화국의 견고한 편견이 이번에도 두 사람을 보호했다.

“근데 전에 국장님한테 공원에서 걸렸잖아요. 그래서 저는 우리 소문 다 난 줄 알았어요.”

지훈의 귀여운 걱정에 호준이 피식 웃었다.

“그건 걱정 마요. 국장님한테는 멀리서 사는 애인이 찾아 왔었다고 말해 뒀어요. 오히려 그 소문 때문에 저랑 지훈 씨를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없을걸요.”

“제가 되게 멀리서 사는군요? 몇 미터나 떨어진 방에서 사니까 멀긴 하겠네요.”

지훈이 빈정거리며 호준을 놀렸다. 호준도 자기가 생각해도 변명이 궁색했던지 한참을 웃었다.

“근데 그 박 실장은 왜 그렇게 사무관님을 싫어해요?”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작년에 제가 그 새끼 크게 물 먹인 게 결정적이었겠죠.”

알면 알수록 호준의 회사 생활도 흥미진진했다. 남들에게 들은 얘기를 종합해 보면 호준이 유명한 이유가 단지 잘생긴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인간이 회식 자리에서 여자 사무관을 성희롱했는데, 제가 그걸 목격해서 신고했거든요.”

“사무관님이 신고를 했다고요?”

호준이 꽤나 덤덤하게 말한 것에 비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건 흥미진진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 그 사무관하고는 미리 얘기를 했습니다. 자긴 그 인간하고 혼자 싸울 자신 없다기에 제가 총대 멘 거고요.”

“그럼 사무관님이 독박 쓴 거 아니에요?”

“제일 힘든 건 피해자잖아요. 다행히 일이 잘 풀려서 박 실장이 징계를 받았죠. 열 받았는지 저를 곽 과장 밑으로 보내긴 했지만요.”

호준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듣고 있던 지훈의 눈은 놀라서 동그래졌다. 지훈과 예전 팀이 참여했던 사업의 담당 사무관은 원래 호준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변경되었다. 그 일로 호준을 또 만나 버린 지훈만 경악했던 게 아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인사라 지훈의 회사에서도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지훈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했어요?”

“봤는데 어떡합니까. 모르는 척할 수는 없잖아요.”

호준은 정석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녹봉을 받겠다는 의지도 대단했지만 뭐든 절차대로 해야 한다는 의지가 더 대단했다.

이제 보니 사람들이 지훈이 호준과 한집에서 지낸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는 이유가 있었다. 호준이 일등 신랑감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뜻이었다. 어떻게 감당하긴, 호준이 자길 엄청 봐주는 거였다.

지훈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호준에게 미움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움을 샀으면 정규직이 못 된 건 둘째 치고 인생까지 말아먹을 뻔했다. 여태 등짝을 몇 번이나 때렸는데……. 그렇게 깝죽거렸는데도 자신을 살려 둬서 감사할 정도였다. 먹고 있던 떡볶이가 매워서 지훈은 갑자기 눈물이 찔끔 났다.

“사무관님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열 받은 애인한테 떡볶이 사 주는 사람이요.”

호준이 마침 생각난 듯 마지막 마무리인 볶음밥을 주문했다. 지훈의 젓가락질 속도를 보니 아직 더 먹여야 했다.

“그 일 때문에 박 실장이 다른 기관장으로 못 갔어요. 이제 그 인간한테 남은 건 명예퇴직뿐이거든요. 그래서 줄타기를 해 보려 했던 모양인데, 이렇게 된 이상 뜻대로 안 될 겁니다.”

감히 박 실장 같은 새끼가 자신의 귀여운 지훈을 건드렸다는 사실에 호준은 대단히 열 받았다. 박 실장이 이렇게 나오면 호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오늘 지훈이 받은 모욕은 되갚아 줘야 했다. 호준은 냄비에 바짝 눌어붙은 볶음밥을 싹싹 긁어 먹으며 간만에 머리를 굴렸다.

* * *

엄청나게 매운 걸 먹었으니 지훈은 이제 차가운 걸 먹어 속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다 큰 성인 두 남자가 슈트에 코트까지 입은 채로 편의점 50% 할인 아이스크림을 손에 하나씩 쥐게 되었다. 3월 초라 저녁 공기는 아직 쌀쌀했지만 다행히 미세 먼지는 없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 댔다.

지훈은 문득 손에 쥔 아이스크림에도 불구하고 긴 코트를 입은 호준이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키도 크고 덩치도 있는 사람이 긴 코트를 두르고 있으니 굉장히 남자다워 보였다. 실은 방금 전 호준에 대해 알게 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일화가 다 정호준다웠다. 전부터 사람이 좀 답답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으니까. 사회 초년생으로서 보는 호준의 모습은 또 달랐다.

지훈이 한창 감상에 젖어 있는데 호준이 대뜸 입을 열었다.

“아참, 신고식 잘 했어요? 안 그래도 아까는 그 일로 화난 것 같던데.”

호준의 말에 잠깐 잊고 있었던 아침의 일이 모조리 떠올라 버렸다. 다시 화가 난 지훈은 대뜸 호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호준이 알고 보면 무서운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튼 맞을 짓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악!”

호준이 비명을 지르며 맞은 다리를 감싸 쥐었다. 하필 정강이 한가운데를 제대로 맞아서 진짜 아팠다. 놀라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도 그만 바닥에 떨어졌다. 지훈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미련 없이 주워다 버렸다. 한 입밖에 못 먹었는데……. 오늘도 기껏 화난 애인한테 떡볶이 사 주고 달래 주느라 야근까지 내뺐는데 결국 정강이를 얻어맞은 데다가 아이스크림도 못 먹었다. 호준의 입장에서는 되게 보람 없는 하루였다.

“그런 거 알았으면 미리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신고식으로 화가 많이 쌓인 지훈이 호준을 흘겨봤다.

“말했잖아요. 그 사람들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듣느냐고요!”

“다 말하면 재미없잖아요.”

“진짜 짜증 난다. 사무관님까지 나 속이고…….”

지훈이 열불을 내며 혼자서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 먹었다. 박 실장과 대면한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화나고 서러웠다. 호준이 지훈의 표정이 안 좋아진 걸 눈치채고 얼른 달랬다.

“미안해요.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게 재밌느냐고요! 난 진짜 첫날부터 회사 그만둬야 하는 줄 알았는데!”

“주 과장이 이번에도 커피 타 오라고 했어요?”

“네. 달다구리하게 타 오라기에 설탕 쏟았어요.”

지훈의 말을 듣던 호준이 피식 웃었다. 지훈다운 대처라고 생각했다. 지훈의 성격상 순순히 당하진 않았을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차였다. 지훈이 호준의 성격 때문에 놀랐다고는 하지만 사실 지훈 역시 그런 호준이 고르고 고른 남자였다. 고분고분할 리가 없었다.

지훈은 말로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 적어도 호준이 2년 넘게 봐 온 바에 따르면 그랬다. 나중엔 호준이 지훈을 말려야 할지도 모른다.

“웃음이 나와요?”

지훈은 웃고 있는 호준을 째려보았다.

“미안해요. 주 과장 당한 거 상상하니까 너무 웃겨서. 근데 주 과장이 지훈 씨 꽤 좋아하겠어요.”

“윤 사무관님도 그러던데, 왜 그런 거예요? 일부러 이상한 거 시켜 놓고 말 안 듣는 사람 뽑는 거예요?”

“맞아요. 주 과장이 좀 반골 기질을 좋아해요.”

“무슨 공무원들이 이래요? 판타지예요?”

“일반적이진 않죠. 주 과장 별명이 주 다르크거든요. 그러느라 만년 과장이지만.”

호준이 주 과장을 칭찬하는 건지 욕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과장님이 사무관님도 엄청 좋아했겠네요. 속 차리라고 냉수 줬다면서요. 다 들었어요.”

“저도……. 예전엔 신입이었어요. 흠흠.”

지훈이 빈정거리자 조직 개혁의 씨앗 호준이 궁색하게 변명했다. 마치 지금은 안 그런 척하는데, 지훈이 보기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윤 사무관님이 그때 사무관님 진짜 잘리는 줄 알았대요.”

“그 인간은 아직도 제가 잘리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자기가 먼저 잘리면 저한테 퇴직금 반 떼어 준다고 했거든요.”

윤 사무관은 정말 내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 말인즉 호준이 그만두면 호준이 윤 사무관한테 퇴직금을 뱉어야 한다는 뜻. 둘 다 정년까지 어떻게든 버틸 것 같았다.

“아참, 윤 사무관님이 자긴 성 안 바꿔도 된다고 사무관님이 성 바꾸라고 했는데 무슨 말이에요?”

“무슨 소리예요. 내가 이겼는데.”

호준이 정색했다.

“뭐라더라, ‘2년 안에’ 못 한 걸 자기가 안다고 하던데요?”

“비열하고 치사하고 악독한 자식……. 가까이하지 마세요.”

갑자기 호준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욕을 했다.

“두 분 무슨 내기 했어요?”

“비밀입니다.”

“뭔데요? 윤 사무관님이 사무관님한테 물어보라고 했단 말이에요.”

“나중에 말해 줄게요. 결과적으론 윤 사무관이 진 게 맞아요.”

“뭔데요! 이겼다면서! 말해 줘요!”

호준은 그 일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촉을 느낀 건지, 과한 호기심을 느낀 지훈이 계속 칭얼거리며 등짝까지 때리려 들었다. 언젠간 등짝이 너무 아파서 실토하게 될 것 같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대신 마음에 걸렸던 다른 일을 사과했다.

“아까, 국장님한테 적당히 둘러대면서 멀리 사는 애인 있다고 말한 거, 미안해요.”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던 지훈이 의아해했다.

“그게 왜 미안해요?”

“결과적으론 지훈 씨를 숨기려고 한 거니까요.“

“제발 숨겨요. 어디 가서 티 내지 말고.”

정작 지훈이 한술 더 떴다.

“사무관님도 커밍아웃 안 하셨잖아요. 앞으로도 안 하실 거고요. 저도 계속 말했지만 앞으로 사무관님을 만난다는 이유로 어디 가서 손해 보기 싫어요.”

오늘 정말 출근 첫날부터 들킬 뻔한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지훈은 유달리 몸을 사렸다. 호준과 만나는 일로 지훈의 일상이 딱히 변하진 않았지만, 그 관계가 알려지는 순간 지훈은 삶 자체를 바꿔야만 한다. 지훈은 아직 그럴 각오까진 없었다. 일단 호준을 얼마나 오래 만날지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을 오래 만나려면 최대한 숨겨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호준은 그런 지훈의 두려움을 이해했다. 미안함이 더 앞섰다.

“제 욕심에 그냥 지훈 씨 붙잡긴 했는데, 솔직히 남자랑 만나는 거 쉽지 않아요. 언젠가 힘든 일이 분명 생길 거예요.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고, 사실대로 말 못 할 일도 생기고요.”

호준의 말은 진지했다. 아마 본인 경험을 말하는 것 같았다. 지훈은 자신을 만나기 전 호준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가늠해 봤다. 겉보기엔 명문대 나온 엘리트 사무관으로 편하게만 살았을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성 지향성도 그렇고 성격도 저 모양이니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을 테다.

“평범하게 살아왔을 지훈 씨한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것 같아서 계속 미안했어요. 나중에라도 너무 힘들면 그냥 포기해도 돼요.”

지훈은 한 입 남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었다. 호준의 말에 서운함이 몰려왔다.

“뭘 포기해요? 그거랑은 다른 문제잖아요. 계속 만나려고 안 들키려는 건데. 사무관님이 먼저 저 좋다고는 했지만 결국 제대로 당긴 건 나거든요? 나도 좋아서 그런 거예요. 남들이 뭐라 한다고 내가 그만둘 거 같아요? 저 남의 말은 잘 안 들어요. 내가 싫어질 때 그만둘 거예요. 보니깐 사무관님도 그럴 것 같은데요.”

호준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물론 지금의 지훈이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든 일이 분명 생길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훈의 생각은 바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는 지훈이 고마웠다. 호준은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각을 해 봤는데, 어쩌면 저 바이일지도 몰라요. 전에 여자를 만나긴 했지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되고나서 돌이켜 보니까 좀…….”

지훈은 할까말까 망설이던 말을 결국 했다.

“잘생긴 얼굴 좋아하나 봐요. 사실 저 사무관님 처음 봤을 때부터 진짜 잘생겼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잘생겨서 계속 쳐다봤어요.”

호준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지훈은 인턴 시절 회의실에 들어오는 정호준 사무관을 넋 놓고 쳐다본 적이 있었다.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봐서 깜짝 놀랐다. 그때만 해도 호준은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다. 괜히 잘 보이고 싶어서 처음엔 일부러 찾아가서 인사도 하고, 열심히 하는 척하고, 일도 더 달라고 했었다. 나중에 정말로 일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후회하게 되었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요? 전엔 그런 말 안 했잖아요.”

“사무관님이 일 너무 많이 시켜서 좋은 말 해 주기 싫었어요.”

“…….”

호준은 도대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무관님을 잘못 만나서 갑자기 게이가 된 건 아니에요. 물론 계기는 된 것 같지만…….”

아무래도 밖이라서 지훈을 차마 끌어안을 수는 없었던 호준은 대신 지훈의 손을 꼭 잡았다.

“사무관님은 저 오래 좋아했다지만 저는 이제 막 시작하거든요. 감정의 깊이에서 차이가 나겠죠. 근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내가 가볍게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의외로 이것저것 생각하는 지훈이었다. 더 이상 우주의 기운 타령도 안 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생각 정리가 됐다는 뜻일 테다.

“오늘 하루 지내면서 제가 사무관님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들 사무관님에 대해서 알고 저한테도 사무관님에 대해서 물어보는데 사실 전 아는 게 너무 없더라고요.”

“지훈 씨가 나에 대해서 제일 많이 알고 있을 텐데요? 어제도 내 허벅지에 있는 점 셌잖아요. 그거 우리 엄마도 몰라요.”

“완전 재미없어요.”

지훈이 호준의 왼쪽 허벅지를 쳐다보면서 귀를 후비적거렸다. 호준이 헛기침을 하며 싸늘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저도 지훈 씨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더라고요. 이렇게 잘 먹는 줄도 몰랐고, 거침없는 줄도 몰랐고, 이렇게 쾌활한 줄 몰랐어요. 알면 알수록 좋아져서, 앞으로 더 많이 알아 가고 싶어요.”

그 말에 지훈은 주변 눈치도 안 보고 대뜸 호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훈도 키가 컸지만, 호준이 더 큰 데다 덩치도 좋아서 지훈이 폭 안겼다.

아직 초봄이라 밤공기가 꽤 쌀쌀했지만 호준의 품 안은 따뜻했다. 이런저런 냄새가 뒤섞이긴 했지만 호준의 품 안에선 호준의 냄새가 났다. 지훈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지훈의 숨결이 호준의 가슴팍에 닿았다. 서로의 감정이 충분히 느껴졌다. 방금 네가 한 말이 정말 좋았다, 는 말은 굳이 필요 없었다.

“정호준에 대해서는 이제 내가 제일 많이 알 거예요. 일단 왼쪽 허벅지에는 점 세 개 있고요, 오른쪽은…… 아직 모르겠는데.”

어제 점 세어 본다는 핑계로 지훈이 허벅지에 열심히 키스하다가 못 참고 그대로 펠라티오로 넘어가 버렸다. 오른쪽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지훈의 펠라티오는 끝내주게 좋았다. 키스할 때도 혀가 남다르다고는 생각했는데, 작정하고 빨아 대니까 장난 아니었다. 평소에도 뭐든 잘 먹어서 그런 걸까? 호준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오른쪽은 오늘 확인해 보고 알려 줘요.”

호준이 자신의 품에 있는 지훈의 어깨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오른쪽 핑계 대면서 어제 했던 걸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약간의 흑심도 있었다.

“오늘 야근하러 들어간다면서요.”

“급한 일 아니에요. 그냥 내일 할래요.”

호준은 즉흥적으로 계획을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계획을 바꿀 만한 불가피한 이유가 있는 거다. 지훈은 호준의 허벅지에 대뜸 손을 갖다 대더니 놀라서 물었다.

“뭐 했다고 벌써 섰어요? 우리 그냥 얘기밖에 안 했는데?”

“그러면 안 돼요?”

신체의 본능적인 반응에 추궁을 당한 호준이 억울해했다.

“궁금하잖아요. 무슨 포인트에 흥분하는지 알아야 다음에 꼬시죠.”

“그냥…… 어제 지훈 씨가 해 준 거 생각났어요.”

호준이 눈을 내리깔며 수줍게 말했다. 지훈은 그 의도를 눈치채고는 피식 웃었다. 돌연 호준의 품에서 떨어지더니 코트 단추를 잠가 주며 가슴팍을 툭툭 쳤다.

“어차피 오늘은 안 해 줄 거니까 그냥 밤새도록 야근하세요, 사무관님.”

“왜요?”

호준이 진심으로 서운해했다.

“사무관님 나한테 신고식 말 안 해 줬잖아요! 공평하게 나도 안 해 줄래요.”

“주 과장이 잘못한 건데 왜 내가…….”

“주 과장님 핑계 대지 말라고요. 사무관님이 지금 나한테 잘못한 게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이렇게 업보를 야무지게 쌓기도 어렵겠다, 정말.”

호준이 아무리 남들 앞에서는 칼을 갈아도 지훈의 앞에서는 한없이 하찮아졌다. 지훈은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한참을 더 호준을 괴롭혔다. 물론 호준도 기꺼운 마음으로 당해 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훈이 갑이고 호준이 을이었다. 한때 둘 사이의 갑을 관계가 완전히 반대였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지훈의 다이내믹했던 정규직 첫 출근이 수난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앞으로 일터에서 벌어질 수많은 수난과 고통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훈은 호준과 함께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