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첫 만남
2년하고도 한참 더 전의 어느 날. 사무관 2년 차였던 호준은 문득 사는 게 지루해졌다. 업무도 익숙해졌고 요령도 생겼다. 몸은 여전히 바쁘지만 비슷한 업무가 반복되면서 마음은 숨을 쉴 틈이 생겼다. 곧바로 지루해졌다. 하루 종일 보고서의 오타나 찾아내고 여기저기 출장이나 다니고 열심히 보고서 써 봤자 위에서 조인트나 까이는 직장인의 삶을 살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었나. 잔잔한 회의감이 들었다.
물론 지금 당장 눈앞에서 진행되는 발표가 너무 지루해서 그렇기도 했다. 작년과 정확하게 똑같은 내용이었는데 오타도 똑같았다. 전혀 준비 안 된 발표 멘트와 기본 옵션보다 촌스러운 슬라이드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적어도 오타는 교정하고 수치는 업데이트해서 그래프라도 좀 새로 그려야 하는 것 아닐까. 이 팀장 일 더럽게 안 하지. 호준은 참을 인을 한 백 번 정도 새기는 중이었다.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 세 번을 면한다는데 대체 어느 쪽의 효율이 좋은 걸까, 따위나 고민 중이었다.
호준이 담당하는 사업의 평가 부분만 ㅇㅇ원 ㅇㅇ연구팀에서 담당하는데, 이 팀에서 2년째 잘 말아먹고 있었다. 실은 호준이 맡기 전에 이미 개판으로 치닫고 있는 사업이었다. 사업 내부 상황이 엉망진창인 것과 달리 실제 민간에서의 성과는 괜찮아서 올해도 예산을 받아 진행되었다. 담당자인 호준만 개고생했다. 다들 하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호준에게 떠넘긴 일이었다.
내년엔 호준도 제발 이 일에서 손 떼고 싶었다. 하지만 실무는 아무것도 모르는 위에서 마음에 들어 하니 아마 내년에도 진행될 것이다. 호준은 지루한 발표를 듣는 둥 마는 둥 인쇄물에 낙서나 해 댔다. 작년엔 열심히 들으면서 오타와 잘못된 수치들을 죄다 교정해 줬는데 올해 보니까 전혀 수정이 안 되어 있었다. 짜증 나서 올해는 오타에 손도 안 댔다.
“참여 만족도에 대해 설문한 결과는 다음과 같……. 삐이이이익!”
갑자기 이 팀장이 잡고 있던 마이크의 볼륨이 요란하게 커지면서 에코가 울렸다. 듣기 싫은 고주파 굉음이 좁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호준을 비롯한 직원들이 재빨리 귀를 막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 팀장이 당황하더니 마이크 전원을 끄고 어딘가로 손가락질을 했다.
“인턴! 이거 마이크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똑바로 하라고 했어, 안 했어?”
“총무실에서 세팅해 준 건데……. 죄송합니다, 팀장님!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팀장이 윽박지르자 회의실 앞쪽 구석에서 슬라이드를 수동으로 넘기고 있던 인턴이 굽실거렸다. 이 팀장은 자기가 열심히 침 튀기던 마이크로 인턴 머리를 칠 기세였다. 회의가 진행이 되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던 호준은 턱을 괸 채 눈알만 굴려 인턴을 잠깐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온 듯했다. 얼굴이 앳된 걸 보니 막 학교 졸업하고 취직한 것 같은데, 하필 이 팀장 밑에서 일하게 되다니. 어린 친구가 고생이 많았다. 얼굴이 말끔하고 야무지게 생겨서 일을 못할 것 같진 않은데, 아마 이 팀장이 일을 제대로 못 시키는 거겠지.
호준이 속으로 젊은 인턴을 걱정하며 혀를 끌끌 차는 사이, 불쌍한 인턴은 마이크 대신 유인물로 머리를 몇 대 맞은 후 쪼르르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저건 그냥 마이크 볼륨이랑 출력 밸런스만 조정하면 될 것 같은데. 왕년에 학생 운동 한답시고 마이크 좀 잡아 봤던 호준이었지만 이 팀장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진 않아서 짐짓 모르는 척했다.
“이 팀장님, 어차피 회의실도 작은데 그냥 마이크 없이 진행하시죠? 어차피 목소리 다 들립니다.”
“그럴까요, 사무관님?”
“네. 그냥 진행하세요.”
애초에 코딱지만 한 회의실에서 굳이 발표한답시고 마이크를 쓸 필요가 없었다. 작년엔 사업 개편 첫해라서 국장도 모시느라 큰 회의실에 발표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호준이 회의 규모를 확 줄여 버려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응용력 없는 이 팀장이 작년에 하던 그대로 진행한 것뿐이다. 이럴 거면 그냥 보고서 안의 오타나 잘 고치지. 호준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사무관님, 인턴이 피피티를 넘겨 줘야 해서 돌아올 때까지는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호준은 골이 아팠다. 마우스 포인터를 쓰거나, 본인이 직접 넘기면 될 일이었다. 그 손가락 까딱하는 일을 못 해서 인턴을 부려 먹는 저 심보에 기가 찼다. 호준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자 이 팀장이 안절부절못했다. 아까 인턴에게 유인물을 던져 대던 그 기개는 어디로 간 건지. 저렇게 위아래 구분해서 사람 가리는 인간은 호준이 개인적으로 질색했다. 내면에서 짜증이 끓어올랐지만 호준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그럼 이참에 한 10분 쉬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의를 빨리 마치고 태종시로 돌아가 봐야 했지만, 호준은 지금 이대로 진행했다간 참을 인을 새기는 걸 포기하고 이 팀장을 한 대 칠 것 같았다. 일단 쉬기로 했다. 사실 더 들을 것도 없는 발표였지만 뒷부분에는 뭘 좀 추가 했으려나 싶어서 끝까지는 들어 볼 요량이었으니까.
쉬자고 했더니 이 팀장이 은근슬쩍 내년도 예산 얘기를 꺼냈다. 호준은 화장실을 핑계로 황급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일을 그따위로 해 먹고 예산까지 늘려 받을 속셈이야? 너나 1인분을 제대로 하세요.
열 받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복도 끝 자판기까지 걸어갔지만 딱히 마시고 싶은 건 없었다. 멍하게 ‘블랙커피 500원’ ‘밀크 커피 700원’ 따위의 글자를 쳐다만 보고 있는데, 멀리서 인턴이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린 인턴은 키가 꽤나 컸다. 호준과 엇비슷해 보였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뛰어오는 모습이 유난히 더 늘씬했다. 어깨도 넓고 체격이 훤칠했다.
“저, 사무관님!”
인턴의 목적은 자판기가 아니라 호준이었나 보다. 여기저기 뛰어다녔을 인턴이 가쁜 숨을 내쉬며 호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큰 눈망울이 괜히 부담스러워서 호준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손목시계로 돌렸다.
“무슨 일이에요? 10분 쉬기로 했는데, 이 팀장한테 애기 못 들었어요?”
이 팀장은 그런 간단한 것도 말 안 해 주고 아랫사람 고생시킬 위인이라 호준은 굳이 확인차 물었다.
“방금 들었습니다. 마이크 문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려고요. 제가 다시 세팅했습니다.”
굳이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뛰어오다니, 이 팀장과 달리 심성이 바르고 착한 친구였다. 얼굴도 뽀얗고 눈빛도 또랑또랑한 게 백번 봐도 착해 보였다. 이 팀장같이 무능한 인간에게 저런 귀여운 인턴이 있다니, 사회적 낭비였다. 호준은 이 팀장 밑에서 개고생할 인턴이 조금 가여웠다. 물론 시원한 인상인 데다가 귀엽기까지 해서 호준이 그렇게 느낀 건 결코 아니다.
“그건 인턴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마이크 출력 조절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배워 두면 좋을 겁니다.”
“…….”
인턴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오히려 호준이 어리둥절해했다.
“왜요?”
“방금 인턴님이라고 불러 주셨잖아요.”
그럼 인턴을 인턴이라 부르지 뭐라고 불러? 사장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호준은 무심코 개그를 하려다 상대가 초면이라는 걸 깨닫고 자제했다.
“미안해요. 이름을 몰라서요.”
아까 소개를 했던 거 같긴 한데 대충 들어서 기억을 못 했다. 그땐 뒤에 우물쭈물 서서 회의 준비하던 인턴의 얼굴은 제대로 못 봤으니까. 이렇게 귀여운 친구인 줄 미리 알았다면 이름을 잊을 수가 없었을 텐데.
“저는 김지훈 인턴입니다!”
인턴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말했다.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에서 사회 초년생의 힘찬 기상이 느껴졌다. 그렇지, 아직 자기소개하고 열심히 다닐 때지. 호준은 인턴이 귀엽다고 또 생각했다. 눈앞의 인턴이 귀엽다는 생각을 열 번 넘게 했는데, 호준은 아직 자각 못 하고 있었다.
“저는 ㅇㅇ부 정호준 사무관이에요.”
“네…….”
김지훈 인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이 친구는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겠구나. 호준도 무심코 자기소개를 했는데 말한 지 3초 만에 돌이켜 보니 멍청한 짓이었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회의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았나…….
놀란 인턴의 표정은 생각보다 귀여웠다. 놀릴 때의 반응이 좋은 친구였다. 자꾸 더 놀리고 싶은데……. 이미 이 팀장한테 시달릴 친구일 텐데 그러면 안 될 테다.
“10분 다 지난 것 같은데 들어갑시다.”
“네, 사무관님. 이제 마이크 진짜 괜찮을 거예요.”
그놈의 마이크, 이 팀장이 얼마나 인턴을 닦달했는지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딴 마이크 없어도 된다고 말하면 열심히 마이크를 세팅해 둔 인턴이 꽤나 실망할 것 같아서 호준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래요. 김지훈 인턴님이 세팅했으니까 잘될 겁니다.”
그날 남은 발표는 마이크만 완벽했다. 온갖 문제점들을 그냥 넘어가려다가, 호준은 자신이 출장으로 허비한 시간이 너무 아까워졌다. 이 팀장의 발표를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오타와 더불어 슬라이드에 잘못 찍힌 따옴표에 대해서까지 악담을 퍼붓고 나서야 회의를 끝냈다. 다음번에는 이 팀장을 그냥 청사로 부르겠다는 결심도 했다. 오고 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형편없는 회의였다. 아예 회의를 없애 버릴까?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호준은 돌아서서 나오는 길에, 회의가 끝나자마자 팀에 악담을 퍼부은 점에 대해서는 약간 후회를 했다. 나중에 평가 보고서를 항목별로 조목조목 써서 본부장과 PM을 참조로 넣은 다음에 이메일로 보낼걸. 말로 해 봤자 들을 인간이 아닌 이 팀장의 성격상 다음번에 잘하기는커녕 오늘 기분 더럽다고 아랫사람만 조질 텐데. 호준은 열심히 회의실을 세팅해 놓고 독박을 쓸지도 모르는 김지훈 인턴이 염려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굳이 백스텝을 밟으며 회의실로 되돌아갔다.
“이 새끼야, 제정신이야? 당연히 작년 거랑 같은지 확인을 했었어야 할 거……. 앗, 사무관님 오셨습니까!”
“제가 중요한 펜을 놓고 가서요…….”
호준이 회의실 문을 슬쩍 열었는데, 역시나 이 팀장이 김지훈 인턴을 조지던 중이었다. 대머리 이 팀장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김지훈 인턴은 고개를 숙인 채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열심히 혼나고 있었다. 작년과 파일이 같았는지를 고작 몇 달 일한 계약직 인턴이 어떻게 알겠는가. 작년부터 일한 팀장이 인수인계를 제대로 했어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계약직만 굴려 대니까 해마다 이 사달이 나는 것이다.
호준은 말을 한 마디 얹으려다가 남의 일에 너무 참견하는 것 같아 보여서 참았다. 일단 펜을 핑계로 들어오긴 했으니 자신이 앉았던 의자 주변에서 펜을 하나 주운 척했다. 방금 주머니에서 꺼낸 싸구려 볼펜을 다시 주머니에 쓰윽 넣었다. 호준이 움직이는 동안 이 팀장은 차마 김지훈 인턴에게 화를 못 내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아참, 김지훈 인턴님. 오늘 회의 준비 고마워요. 수고 많았어요.”
호준은 일부러 이 팀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놀란 인턴이 경악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사이에 호준은 후다닥 회의실을 나갔다. 귀여운 인턴이 이 팀장에게 깨지는 걸 호준이 막을 수는 없다. 그래도 수고 많았다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었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엄청 귀여웠으니까.
“진짜 귀엽네.”
처음엔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할수록 정말 귀여웠다. 김지훈 인턴이라니. 자기소개도 또박또박 잘했다. 잠깐 봤는데 아무튼 귀여웠다. 결국 호준은 태종시로 돌아가는 길에 김지훈 인턴이 귀엽다는 생각만 오백 번을 넘게 했다.
* * *
“김지훈……. 인턴이라 사원 정보가 안 뜨네.”
산하 기관의 조직도를 뒤지며 호준이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보고서를 수정하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까 남의 회사 인트라넷을 뒤지고 있었다. 산하 기관이라 인트라넷이 연결되어 있었다.
일하다가 말고 모니터 보면서 멍하니 있기를 며칠째였다. 그 인턴이 너무 귀여웠다.
“남의 회사 조직도는 왜 뒤져? 출장 갔다가 잘생긴 남자라도 찾아냈어?”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호준이 놀라며 화면을 닫았다. 회의에서 돌아온 윤 사무관이 한심한 표정으로 호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호준은 짜증이 확 솟았다. 호준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앙숙인 인간 윤예은 사무관과 하필 같은 과에 배정받아 버린 건 정말이지 신의 저주였다.
“남의 모니터는 좀 작작 보세요.”
“업무를 안 하고 딴짓을 하시니까 그렇죠, 정 사무관님?”
“두 사람 그만 싸워, 제발!”
두 사람 너머에 책상이 있었던 주 과장이 호통을 치자 윤 사무관은 순순히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곧바로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뭔 일 있었지? 정삼, 빨리 말해 봐. 누나는 못 속인다.]
[뭘 속입니까. 아무 일 없었어요. 그리고 윤삼 누나 아니잖아요.]
심지어 윤 사무관이 호준보다 한 살 어렸다. 기수만 높았다.
[내가 선배니까 누나지. 누나의 게이더가 지금 삐용삐용 한다고.]
윤 사무관과 제대로 알게 된 건 지금 일하는 부서로 배치받은 이후였지만, 이미 그 전에 안면이 있었다. 문제는 그 장소가 같은 학교의 소수자 인권 동아리와 학생회였다는 점. 한참 학생회 활동하다가 둘이서 몇 번 대판 싸웠는데, 호준이 군 입대를 하면서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각자의 나름의 이유로 몇 년 잠적했는데 그게 행정 고시 준비였을 줄은 서로가 몰랐다. 같은 부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고시 준비하는 동안 같은 학교 내에서 스터디를 구하다 보면 서로 마주치기 마련인데, 어쩜 몇 년간 동선이 한 번도 겹치지 않았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아무튼 서로가 그렇게까지 체제 순응적이었냐고 놀릴 틈도 없이 지옥 같은 앙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게이더 고장 난 것 같은데, 이제 은퇴하세요.]
[웃기고 있어. 김지훈이 누군지 빨리 말해 봐.]
호준이 빈정거렸는데 씨알도 안 먹혔다. 사실 호준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관계였다.
[몰라요.]
[뭐야, 누군지도 몰라? 번호도 안 땄어? 진짜 재미없다.]
흥미가 떨어진 윤 사무관은 메신저를 끄더니 앉은 자리에서 구시렁거렸다. 호준은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머리를 싸매었다. 쟤 진짜 짜증 난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는지. 저런 성질머리로도 여자가 끊이지를 않는다는 소문이 있는 걸 보면 남자들은 알지 못하는 나름의 매력이라도 있는 듯했다.
호준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고 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서울 출장이라서 서류 업무는 오늘 다 해 놔야 했다. 하지만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이 팀장이 보낸 보고서가 또 개판이었다. 고쳐 달라고 요청한 건 반만 고쳐 놨고 심지어 시키는 대로 고치지도 않았다. 웬일로 편집만 쓸데없이 깔끔했다.
이쯤 되면 그냥 호준이 데이터를 받아서 보고서를 직접 쓰는 게 나았다. 물론 아무리 급해도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이메일을 보내려다가 시간이 좀 빠듯해서 호준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따라 신호가 한참 걸리더니 이 팀장이 아닌 낯선 목소리가 씩씩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당겨 받았습니다. ㅇㅇ연구팀 김지훈입니다. 이 팀장님께 메모 남겨 드리겠습니다.
실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호준은 당황했다. 당겨 받았다고 말하면서 좀 더듬거리는 걸 보니 당겨 받는 것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마저 귀여웠다. 이럴 때가 아니지. 호준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용건을 말했다.
“저 전에 봤던 정호준 사무관인데요. 이 팀장 지금 자리에 없습니까?”
-팀장님 퇴근하셨습니다.
호준은 자신이 시간을 잘못 알고 있나 싶어서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오후 세 시예요.”
-갑자기 집안에 급한 일 생겼다고 하시면서 방금 전에 조퇴하셨습니다.
귀여운 인턴이 청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지만 내용은 환장할 것 같았다.
“그럼 옆에 조 대리는 없어요?”
-조 대리님은 회의 들어가셨는데요. 4시 반까지 못 들어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낭패였다. 하긴 이 팀장이 공석이면 조 대리가 당겨 받을 텐데. 인턴이 받았다는 건 팀에 지금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4시 반까지 기다렸다가 조 대리한테 연락할까 고민하던 호준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사실 관계를 더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 팀장 혹시 내일은 출근 가능하답니까?”
-그, 글쎄요……. 되게 급한 일 같아 보이셨거든요…….
전화기 너머의 인턴이 말을 아꼈다. 호준도 이 팀장의 차마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집안 사정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이 팀장이 출근을 하리라는 기대는 버렸다. 가족 간호 휴가를 내야 할 사람이 중책을 맡아 버렸으니 사달이 났다. 호준은 그냥 조 대리를 기다리려다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이 팀장에게 시키려던 일은 간단한 문서 편집이었다. 그 정도면 인턴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지훈 인턴님. 혹시 문서 편집 할 줄 알아요?”
-저 워드 자격증은 있습니다!
약삭빠른 사람이었다면 자격증 같은 건 있어도 없다고 말했을 텐데, 너무 솔직한 인턴이었다. 별게 다 귀여웠다. 호준은 승천하려는 광대를 겨우 붙잡으며 메모지를 열었다.
“그럼 혹시 문서 스타일은 잡아 본 적 있어요?”
-한 번…… 해 봤는데요. 아까 이 팀장님이 시켜서 한 번 해 봤어요.
“이 팀장이 뭘 시켰는데요?”
-아침에 무슨 보고서를 편집하라고 하셨거든요. 제목이 ‘ㅇㅇ 지원 사업 중간 평가’였는데…….
호준이 이 팀장한테서 방금 받은 그 보고서였다. 어쩐지 편집만 깔끔하더라니. 역시 남이 한 거였다. 해 놓은 걸 보니까 팀장과 달리 인턴은 일 머리가 좋아 보였다. 다른 일도 가르쳐만 두면 곧잘 하겠지 싶었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아까 작성한 그 문서에 표 몇 개 추가해 주면 되거든요. 미안해요. 원래는 이러면 안 되는데 급한 일이라서요.”
-네! 괜찮습니다. 제가 해 볼게요!
일 시키는데 왜 이렇게 명랑해? 의욕이 넘치는 타입인가? 김지훈 인턴의 반응에 호준이 오히려 당황했다. 사실 절차상으로는 이 팀장을 거쳐서 일을 시켜야 했다. 일부 사무관들은 바로 산하 기관 직원에게 시키는 종류의 일이기도 했다. 호준은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러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싶었다. 호준은 딱 한 번만 나쁜 놈이 되기로 했다.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몇 년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럼 전년도 문서 양식 샘플도 같이 보내 줄 테니까, 그쪽 만족도 평가 데이터 참고해서 수치 변경하고 표 몇 개만 추가해 주세요. 표 번호 맞춰서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일단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전달할게요. 그……. 지훈 인턴님 메일 주소 좀 알려 줄래요?”
-넵! 제이, 아이, 에이치, 어쩌고저쩌고 골뱅이 이메일닷컴입니다!
김지훈 인턴이 또박또박 알려 준 이메일 주소를 한 글자씩 적어 가던 호준은 당황했다.
“개인 이메일 말고 회사 이메일로 알려 주세요.”
-제가 학생 인턴이라서 회사 메일이 없습니다. 사무관님…….
“학생 인턴……. 학생이요?”
-네, 사무관님! 20xx년도 하반기 학생 인턴입니다.
학생 인턴 김지훈이 명랑하게 대답했지만 호준의 얼굴은 당혹으로 물들어 갔다. 그래서 조직도에 없었구나. 일부러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호준의 전화를 엿듣던 윤 사무관은 이미 고개를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회사 이메일도 안 나올 정도면 몇 달 동안 그냥 커피 타고 서류 복사하고 회의실에 생수 갖다 놓는 일을 하는 자리였다. 물론 그런 인턴에게도 전자 메일 계정 하나 정도는 줘야 하겠지만 그건 회사 내부의 문제였다. 그런 학생 인턴한테 이런 일을 시켜도 되는 걸까? 아니, 일단 귀여워해도 되긴 하는 걸까? 아무래도 전화번호는 딸 수 없을 것 같았다. 호준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미안해요. 학생 인턴이면 이런 일까지 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냥 조 대리한테…….”
-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사무관님! 저도 일해 보고 싶어요…….
인턴의 마지막 말에 여운이 남았다. 취업난 속에서 어떻게든 경력을 한 줄이라도 채워서 공공 기관 정규직이 되고야 말겠다는 김지훈 인턴의 의지가 느껴졌다.
하긴, 몇 달 동안 복사기랑 팩스 버튼만 외운 인턴이라면 일 같은 일을 해 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문서 편집은 정말 별일 아니긴 하지만……. 호준은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일을 시작하면 이 핑계로 연락할 수 있을 거라는 알량한 계산도 조금은 있었다. 미안하니까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추천을 열심히 해 주자. 열정적인 인턴이었다고. 아주 귀엽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지만 호준은 학생 인턴의 미래를 위해서 겨우 참았다.
호준은 어깨로 수화기를 고정시킨 다음 키보드를 두드리며 곧바로 이메일을 보냈다.
“그럼 지금 이메일 보낼게요. 내일까지 부탁해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지훈 인턴의 대답은 마지막까지 명랑했다. 호준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먼저 전화를 끊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행여 남에게 표정이라도 들키면 큰일이었으니까. 특히 뒷자리의 윤 사무관에게는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었다. 너무…… 너무 귀여웠다! 얼굴도 귀여운데, 하는 짓도 귀여워서 큰일이었다. 이러다간 심장 마비가 올 것 같았다. 이건 산재 아닐까? 인턴이 일을 엉망진창으로 해 와도 잘했다고 칭찬해 줄 것 같았다.
탕비실 의자에 앉아서 혼자 숨을 고르고 있는데 윤 사무관이 슬그머니 따라 들어왔다. 호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깔깔거리며 웃었다.
“학생 인턴이라며? 정삼 그런 취향인 줄 몰랐네.”
호준은 그대로 무시하려 했다. 저 인간은 어차피 트집 잡아서 놀려 먹을 작정일 게 뻔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 때문에 윤 사무관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애기는 아니더라고. 스물일곱이래.”
호준이 불쾌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개인 신상을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됩니까?”
“그 회사 인사실에 친구가 있어서 잠깐 물어봤어. 신상 정보 뒤진 거 아니고 그 친구가 인턴 교육 담당하느라 개인적인 친분으로 알고 있었던 거래. 이 정도면 괜찮지?”
“안 괜찮아요.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세요.”
호준의 고지식한 성격을 아는 윤 사무관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인간은 도와줘도 이 모양이다.
“2년 안에 네가 그 친구랑 손이라도 잡으면 내가 성을 간다. 하지만 그 전에 네가 차이겠지. 쯧쯧.”
호준은 이미 반듯한 외모와 곧은 성격으로 여자 직원들과 일부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있었지만,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윤 사무관에게는 호준 역시 한심한 돌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윤 사무관도 호준이 고지식의 끝판왕이라 앞으로 2년 동안 고백조차 못 해서 차이지도 못할 거라는 건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본인 사업이나 잘하시죠?”
“누구와 달리 난 너무 잘하고 있다고!”
계속 있다간 윤 사무관이 끊임없이 놀려 댈 것 같았기 때문에 호준은 냉큼 자리를 피했다.
옥상에서 커피를 마시며 호준은 귀여운 인턴과 했던 전화 통화를 계속 곱씹었다. 엄청 어려 보였는데 그래도 스물일곱이라니. 네 살 차이라는 사실이 양심의 가책을 좀 누그러뜨렸다. 학생 인턴이면 몇 달 일하다가 그만둘 텐데, 앞으로 취직 준비하느라 많이 힘들 테니까 그냥 그동안에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방금 일을 시켜 놓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호준은 커피가 다 식도록 김지훈 인턴의 명랑했던 목소리만 계속 떠올렸다.
워드프로세스 자격증이 있다던 김지훈 인턴이 보내온 결과물은 객관적으로 봐도 괜찮았다. 호준은 여러 가지 의미로 그 결과물에 매우 만족했다. 안타깝게도 이 팀장은 피치 못할 집안 사정으로 한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조 대리와 본부 PM만 데리고 일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던 호준은 결국 김지훈 인턴에게도 일을 자꾸 요구하게 되었다. 전화기 너머 김지훈 인턴의 대답에서는 점차 활기가 사라져 갔다. 열정 넘치던 학생 인턴은 곧 졸업 전에 삶의 무게를 알아 버린 직장인이 되었다. 물론 호준의 죄가 아주 컸다.
자신이 김지훈 인턴을 꽤 좋아한다는 사실을 호준이 받아들일 즈음, 김지훈 인턴은 도망치듯 일을 그만두고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지훈은 다른 회사에 계약직으로 나타났다가 또 사라졌다. 하지만 몇 달 전쯤, 김지훈 대리라는 이름의 또 다른 계약직 직원으로 호준의 앞에 등장했다. 호준이 좌천되어 과가 바뀌어 김지훈을 세 번째로 만나게 되었을 때, 호준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지훈에게 어필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 과정은 호준의 치밀한 계획하에서도 쉽지 않았다. 결국 호준의 계획보다는 지훈의 추진력으로 모든 일이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