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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첫 데이트(외전 1권) (19/27)

외전 1. 첫 데이트

얼음을 왕창 넣어 시원한 카페 라테를 한 모금 들이켜며, 지훈은 사무실의 모니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보고서의 오타와 자간 간격을 잡아내는 워드 프로세서도 아니고, 합계와 평균을 계산하는 엑셀도 아니었다. 전 세계의 가장 많은 인구가 즐긴다는 최고의 농땡이용 게임 지뢰 찾기의 최고급 단계였다.

방금 전 또 자체 최단 기록을 경신한 지훈은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카페 라테를 호로록 들이켰다. 물론 사내 매점에서 유통 기한을 잊어버린 원두와 언제 청소했는지 알 수 없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뽑아낸 커피에서는 오늘도 불알친구에게 배신당한 인생의 쓴맛이 느껴졌다.

“김 대리님! 어떻게 최고급 판을 벌써 깨셨어요?”

남의 모니터 화면을 흘끔거리다가 감탄한 양 주임의 요란에 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왕년에 피시방 좀 다녔습니다.”

좀 다닌 수준이 아니다. 한때는 피시방 알바보다 더 오래 가게를 지킨 피시방의 지박령이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모니터를 쳐다보며 하루 종일 야근하는 지구력은 그때 다 길렀다.

“그래도 김 대리 여유 있는 거 보니까 이제 좀 사람 같네. 우리 팀 떠나니까 좋지?”

오늘부로 이 시궁창 같은 팀을 영원히 떠나는 지훈과 달리 남은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유 과장이 한 마디 거들었다. 휴가 전까지 쏟아지던 일만 하느라 인간 좀비 상태였던 지훈은 이제 활기찬 20대 청년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정규직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딱 김지훈 얘기였다.

“그래도 정들었던 팀을 떠나려니 조금 아쉽습니다.”

지훈은 예의상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 조금은커녕, 개미 발톱 때만큼의 아쉬움도 없었다. 지훈은 유 과장을 향해 최대한 아쉬운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솟아오르는 진실의 광대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사실 작별 인사는 어제 송별 회식하면서 다 했으니까 딱히 오늘은 더 할 말도 없었다.

사실 어젯밤 벌어진 김 대리 정규직 입사 축하 및 송별 회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훈과 양 주임, 유 과장만큼은 모두 한마음이었다. 어떻게든 출근 날 아침 식사 같은 느낌의 점심 식사로 가볍게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최 팀장이 복병이었다. 무한 리필 삼겹살과 소주에 대한 최 팀장의 과도한 집착으로 지훈의 송별회는 결국 술을 겸한 저녁 회식으로 성사되고 말았다.

물론 다들 바보는 아니었다. 주인공이자 총대를 멘 지훈이 최 팀장의 잔에 소주를 한없이 채워 넣는 사이, 자녀가 있는 유 과장이 전화 받는 척하면서 1차로 튀었다. 이어 양 주임도 화장실이 급하다면서 가방을 챙겨 들고 사라졌다. 잔뜩 취한 최 팀장이 잠깐 담배 피우는 동안 지훈도 결국 도망치면서 회식은 흐지부지되었다. 계산은 결국 최 팀장이 했을 것이다. 정말 단합을 격렬하게 거부한다는 점에서만 단합이 뛰어난 팀이었다.

“같이 일했던 팀원이라고 예의상 해 주는 말 같지만. 그래도 김 대리는 싹싹해서 앞으로 어딜 가서도 잘할 테니까.”

지훈의 가식적인 인사에 발맞추어 유 과장도 별 영혼 없는 덕담을 거들어 주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양 주임은 처음 일을 시작한 팀에서 처음으로 팀원을 떠나보내는 일이 진심으로 아쉬운 모양이었다.

“대리님! 여기 제 송별 선물이에요!”

양 주임은 누가 봐도 자기 취향인 알록달록한 작별 인사 카드와 비타민 D 보충제를 선물했다. 지훈의 건강을 염려했다기보다는 자기가 애용하는 쇼핑몰 이벤트 딜에 낚여서 주문한 것 같았지만 지훈은 일단 고맙게 선물을 받았다.

“양 주임,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지훈은 온몸에 영양이 넘쳐서 문제였지만, 비타민 D는 음식으로 섭취가 안 된다니까 미래의 면역력 저하를 대비해서 일단 받아는 두었다. 유통 기한이 지나 버리면 하루 종일 야근하는 호준한테 넘길 생각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선물을 은근슬쩍 떠넘기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다행히 양 주임은 지훈이 자신의 선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고 여겼다.

“김 대리님 떠나시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고요. 힝!”

지훈은 내심 혀를 찼다. 양 주임은 당연히 아쉬울 것이다. 원래 사업 기획서랑 예산서 작성 따위의 행정 업무는 팀 서무인 양 주임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지훈이 대신 해 오고 있었으니까. 이제 유 과장과 마찬가지로 양 주임도 지훈의 빈자리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양 주임님도 이제 예산서랑 기획서를 잘 쓰게 될 테니까 걱정 마요. 제가 인수인계 적어 놓은 파일은 꼭 읽고요. 그리고…….”

아무래도 양 주임이 좀 걱정된 지훈이 뭐라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지훈의 키폰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발신자 번호를 보니 046으로 시작하는 게 뒤는 볼 것도 없이 호준의 전화였다. 호준은 예전과 달리 당당하게 자기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는데, 지훈이 더 이상 전화를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 대리 오늘 저쪽에서 전화 올 일 있어? 정 사무관이랑 하는 프로젝트는 다 끝나지 않았어?”

눈치 빠른 유 과장이 괜히 촉을 발동하며 물었다. 지훈은 순간적으로 최대한 잔머리를 굴려야 했다. 마음만은 전광석화였지만 실제로 뇌 세포가 굴러가는 속도는 한없이 느렸다. 적당한 핑곗거리를 구상하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다가 지훈은 간신히 대답했다.

“혹시 추가로 자료를 보충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자료 넘겼으면 그만이지, 그 사무관은 뭘 또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고 그래? 아무튼 정 사무관은 얼굴만 잘생겼지 일은 좀 요란하게 하는 거 같다니까. 김 대리가 다 끝내고 가서 정말 다행이지 뭐야. 난 그런 놈이랑 일 못 해.”

“사무관님이 일을 너무 꼼꼼하게 하셔서 제가 잘 못 따라갔던 거죠! 하하하.”

분명히 저번 주만 해도 지훈과 더불어 온 팀이 다 같이 호준을 욕했다. 그런데 이제 남이 호준을 욕하니까 지훈은 심기가 거슬렸다.

물론 촉 좋은 유 과장은 지훈의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뭐야, 김 대리. 왜 갑자기 사무관 편을 들어? 정 사무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더니. 설마 그렇게 싸워 대다가 정분난 건 아니지?”

유 과장의 쓸데없는 촉이 오늘도 빛을 발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고 했다. 오늘도 돌 맞아 죽는 개구리 신세인 지훈은 유 과장이 촉으로 물수제비라도 뜨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정 사무관님이랑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미 그 정 사무관과 물고 빨고 다 한 지훈은 강하게 반박했다.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랬으니까.

“그냥 해 본 말인데 뭘 놀라고 그래. 빨리 전화나 받아, 김 대리.”

유 과장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훈은 괜히 억울했다. 저 인간은 그냥 해 본 말이 어쩜 매번 그렇게 정확하냔 말이다. 자기가 다 맞혀 놓고 답인 줄 몰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유 과장은 분명 학창 시절에도 처음에 정답 제대로 써 놓고는 시험 끝나기 5분 전에 답 고쳐서 다 틀렸을 것이다.

지훈은 속을 가라앉히며 전화를 받았다.

“ㅇㅇ정책연구팀 김지훈 대리입니다.”

-정호준 사무관입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음의 느끼한 목소리가 울렸다. 2주 전만 해도 이 목소리가 치가 떨리게 싫었는데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웃음이 실실 나오려는 걸 보니, 지훈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네. 무슨 일이시죠, 사무관님?”

개인 폰으로 해도 되는 연락을 굳이 사무실 키폰으로 한 걸 보니 업무 관련 전화인 모양이었다.

공과 사가 확실한 호준이었다. 우루과이에서 지훈이 귀국하자마자 태종시에서 그 유난을 떨어 놓고는, 정작 다음 날엔 보고서에서 오타 난 곳을 죄다 지적해서 지훈의 피를 말렸다. 연애는 연애고 일은 일이라나. 물론 지훈도 호준의 공사 구분을 존중했다. 일부러 정식 업무 시간이 지난 6시 1분에 개인 휴대폰으로 전화해서 아가리 폭격으로 호준의 멘탈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전에 보내 준 보고서 말인데요. 지금 다시 보니까 수치가…… 너무 정확해서요.

“네?”

지훈의 손에서 갈 곳 잃은 볼펜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수치가 정확하면 안 되는 거였어? 소수점 둘째 자리 정도는 애교로 틀릴 걸 그랬나. 수시 모집에 합격한 후 일부러 수능 9등급을 받아 오는 전국 수석의 기분을 느끼며 지훈이 여유를 부렸다.

“네. 제가 다섯 번 확인하고 보내 드렸는데요. 소수점 단위가 틀렸나요?”

-아뇨. 딱 좋아요. 아주 정확해서 맘에 듭니다. 곽 과장님도 우 국장님도 단 한 톨의 흠도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계획 변태다운 대답이었다.

“그럼, 다른 문제라도 있나요?”

-네. 지훈 씨가 너무 보고 싶어요.

풉!

간신히 참고 있던 웃음이 결국 터져 나왔다.

호준은 나름대로 주변 눈치를 살피는 중인지 마지막 말은 목소리를 확 낮춰서 말했지만, 말투만큼은 업무 보고 할 때만큼 진지했다. 휴가 전에 호준이 이딴 소릴 했으면 지훈은 전화선을 끊는 정도가 아니라 기지국을 폭파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좋았다. 대낮부터 이러지 말라고 반박을 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혔다. 호준의 근본 없는 개수작에 지훈의 얼굴엔 네 번째 보조개가 완연히 피어올랐다.

사무실인지라 실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황급히 숙였다. 하지만 콧구멍이 벌름거리면서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지훈 씨 어디 아파요? 숨소리가 이상한데?

호준의 걱정에 지훈은 헛기침을 하며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 별거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무실로 전화하셨어요?”

-이제 지훈 씨 파견 오면 이 번호로 전화 못 걸잖아요. 마지막으로 이 전화로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지훈의 본사 근무는 2시간 후면 끝이 난다. 다음 주부터는 호준도 근무하는 정부 청사 파견 근무가 시작된다. 그깟 전화번호가 뭐라고, 쓸데없는 데에서 낭만적인 호준이었다. 얼핏 보면 쉴 틈 없이 바빠 보이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근히 이것저것 잘 챙기고 딴짓도 잘 했다.

지난 3일 동안 업무상 전화든 사적 연락이든, 지훈은 호준과 꽤 자주 연락했다. 호준과 딱히 멀리 있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호준은 일할 때도 수시로 작업 진행 상황을 확인하더니 연애할 때도 안부와 메시지를 꼬박꼬박 남겼다. 오히려 호준이 두 시간 이상 연락이 없으면 지훈이 이 인간이 죽었나 하고 또 걱정을 시작할 정도였다.

“뭐예요. 이따 볼 텐데. 설마 오늘도 야근해요?”

-아뇨, 오늘은 금방 끝나요. 6시 20분 열차 타고 온다고 했죠? 도착하면 7시 넘을 텐데 역에 데리러 갈게요.

마지막 근무라며 이번 주 내내 놀았던 지훈과 달리, 호준은 긴 휴가에 대한 보복성 업무를 받아 일에 치여 있었다. 과도한 업무에 흐느적대다 못해 해파리가 될 지경인 호준이었다. 과연 금요일이라고 제때 일을 끝낼 수 있을지 지훈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계획적인 계획 변태가 일을 끝낸다고 하니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여태 호준이 하겠다고 결심하고 못 지켰던 일들은 죄다 지훈의 단순 변심 때문에 틀어진 것들뿐이었으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기대는 할게요.”

-확실히 믿어도 돼요. 저 이만 끊을게요. 이따 봐요.

자기가 먼저 걸어 놓고는 끊는 걸 보니 또 급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지훈은 그 바쁜 와중에 자기 목소리를 듣겠다고 전화하는 호준의 정신머리가 놀라웠다.

지훈은 원래 연애할 때 잦은 연락을 귀찮아하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호준의 연락은 싫지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연애를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이번엔 남자랑 해서 다른 걸까? 지훈은 오랜만에 시작하는 연애가 아직 낯설었다.

문득 지훈은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양 주임, 유 과장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지훈을 보고 있었다.

“…….”

“…….”

“왜들 그러세요? 할 말 있어요?”

양 주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대박! 방금 정 사무관님 전화 아니었어요?”

“맞는데요.”

“근데 왜 그렇게 대리님 목소리가 다정해요? 이따 보는 건 뭐예요? 정 사무관님을 퇴근하고 만난다고요? 대체 뭘 기대해요?”

충격받아서 팔짝 뛰고 있는 양 주임도 문제였는데, 그 뒤에서 경악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는 유 과장이 더 위험했다. 유 과장의 모니터에선 메신저 알람이 사정없이 반짝거렸다. 유 과장이 멤버로 있는 사내 채팅방은 이 회사의 모든 가십이 가장 빠르게 퍼져 나가는 곳이었다. 위험했다.

이제까지는 호준에게서 전화가 올 때마다 지훈이 짜증 난다며 야단법석을 떨었고, 다들 그런 지훈을 달래 주려고 의례적으로 정 사무관의 전화에 귀를 기울여 왔었다. 오늘도 양 주임과 유 과장은 악명 높은 정 사무관이 어떻게 지훈을 괴롭히는지를 보려고 주시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정 사무관을 대하는 지훈의 나긋나긋한 태도에 다들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튼 위험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날 퇴근 두 시간을 앞두고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이 생기다니. 호준한테 화내는 척 연기하고 끊었어야 했는데, 지훈도 긴장이 풀려서 그만 할 말, 안 할 말 술술 뱉어 버린 게 문제였다.

대체 이걸 뭐라고 둘러대지,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던 지훈이 간신히 입을 털었다.

“그……. 저 다음 주부터 태종시로 파견 나가잖아요. 정 사무관님이 그동안 미안했다고 밥 사 준다고 하셔서 퇴근하고 보기로 했어요. 하하!”

말로 뱉고 나니 꽤나 그럴듯한 핑계였다. 양 주임과 유 과장은 여전히 납득 못 한 표정이었다.

“정 사무관도 웃긴 사람이네. 밥 사 줄 거면 자기가 와야지, 왜 김 대리보고 오라 마라야?”

“맞아요! 사무관님이 우리 김 대리님 얼마나 괴롭혔는데요! 사무관님이 여기까지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훈은 순간 울컥했다. 이 사람들,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호준이 팀 미팅을 잡아서 누군가가 차출되어야 할 땐 무조건 계약직인 지훈을 보내 놓고는, 이제 와서 뒤늦게 편들어 주고 있었다. 팀원들이 진작 이랬으면 지훈이 홧김에 휴가를 지구 반대편으로 가지 않았을 테다. 그럼 그 원수 같은 정호준 사무관과 물고 빨고 할 일도 없었을 거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지훈은 변명거리를 최대한 찾아내야 했다.

“사무관님이 제가 새로 집 구하는 거 도와주신다고 하셔 가지고요. 네,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제가 굳이 가는 거예요! 이것참 어쩔 수가 없네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단 다음 주에 출근할 짐까지 싸 들고 호준의 집으로 가는 건 맞으니까. 일단 새집 구할 때까지 호준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도와준다는 것도 맞았다. 지훈은 아무튼 사실만을 말했다.

“금요일 저녁에 부동산이 문을 열어?”

유 과장의 지적은 오늘도 쓸데없이 정확했다. 일할 때도 저렇게 정확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물론 유 과장은 다 알면서도 일하기 싫어서 필요에 따라 모르는 척하는 쪽에 가까웠다.

“부동산에 밤낮이 어디 있어요. 하하!”

“근데 김 대리, 정 사무관이면 전화선도 끊고 도망칠 정도였으면서 언제 둘이 그렇게 친해졌어?”

유 과장은 오늘따라 완전히 명탐정이었다.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하지만 지훈이 변명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양 주임이 불을 지폈다.

“에이, 과장님! 김 대리님은 저번에 정 사무관님이 병가 내셨을 때 한걸음에 태종시까지 달려가셨다고요! 그때 친해지신 것 맞죠?”

쓸데없는 걸 기억하는 양 주임이 힘차게 외치는 바람에 지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양 주임! 내가 언제 한걸음에 달려갔어요!”

한걸음은 아니고 한 10분쯤 고민하다가 갔는데!

“그때 엄청 걱정하셨잖아요! 괜찮아요, 대리님. 미운 정도 정이래요! 그리고 제가 읽는 소설 중에 엄청 괴롭히는 상사랑 고통받는 부하 직원이 결국 사귀게 되는 내용도 엄청 많아요! 흔한 일이니까 걱정 마세요!”

양 주임은 대체 뭘 읽는 걸까. 양 주임이 읽는 소설들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양 주임의 사실 적시로 억울해진 지훈이 뭐라 반박하려는데 유 과장이 한술 더 떴다.

“양 주임. 그건 소설이잖아요.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차라리 김 대리가 휴가 갔다가 우연히 정 사무관을 만나서 단둘이 다니느라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게 더 현실적이에요.”

유 과장이 너무했다.

지훈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 인간들한테 너희 말 다 맞는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훈은 먼 훗날 오게 될 정년 퇴임의 그날까지 호준과의 관계를 완강히 부인할 작정이었다. 둘의 부적절한 관계를 추궁하는 검찰 조사라도 들어오면 휠체어 타고 나갈 것이다.

“다들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둘 다 틀렸어요! 그냥 밥 먹는 거라고요!”

지훈은 거짓말도 뻔뻔스럽게 했다. 평소에 최 팀장을 보고 배운 거짓부렁 실력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에이, 난 또. 김 대리님 이제 정규직이 된 김에 연애도 하시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김 대리, 앞으로 사회생활 잘하겠어. 그렇게 싫어했던 사무관이랑 결국 밥도 먹고.”

사회생활을 너무 잘하는 바람에 그렇게 싫어했던 사무관과 한 이불을 덮어 버렸지 뭐람. 아무튼 이 사람들과 말을 해 봤자 현기증만 날 것 같아서 지훈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시 지뢰 찾기에 열중했다.

헤어지려니 아쉽긴 한데 역시 마지막 날까지 골 아프게 하는 팀원들이었다. 앞으로 별로 그리울 것 같진 않았다. 팀원들에게 시달리고 나니, 지훈은 오히려 며칠 못 본 호준이 더 그리워졌다.

* * *

“사무관님 진짜로 나오셨네요.”

호준은 시간 맞춰서 아담한 국민 중형차를 기차역까지 끌고 지훈을 마중 나왔다. 물론 퇴근하고 곧바로 온 차림새이긴 했지만, 또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그 전엔 그렇게 치를 떨고 싫어했으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며칠 좀 붙어 있었다고 이렇게까지 정이 들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몸을 보니 역시 없던 정도 생길 만했다.

빨리 은밀한 데로 가서 옷 속에 숨어 있는 호준의 근육한테도 안부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라는 것이 있어서 지훈은 간신히 참았다.

“그럼 안 나올 줄 알았어요?”

지훈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호준은 입구에서부터 빵긋 웃으면서 뛰었다. 암만 봐도 호준의 얼굴에 신난다고 쓰여 있었다. 주변 사람들만 없었으면 격렬하게 포옹을 할 기세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차역엔 보는 눈들이 무지하게 많았다. 대부분은 지훈과 반대로 주말을 맞아 태종시를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사무관님 일 많다고 해서 오늘도 야근할 줄 알았죠. 원래 맨날 이 시간에 전화랑 이메일 보냈잖아요!”

“걱정 마요. 연애할 땐 금요일 저녁에 일 안 해요.”

호준은 태연했다. 지훈은 멍청하게 헤벌쭉 웃고 있는 호준의 표정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 기는커녕 갑자기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울화가 치밀었다.

“그럼 여태 연애를 안 해서 사람을 금요일 저녁까지 달달 볶았어요?”

그것도 다름 아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럴 거면 그냥 아무하고나 연애하고 업무 메일을 보내지 말지 그랬냐! 울컥한 지훈이 손을 들어 올리자, 호준은 위기를 감지했다. 냉큼 지훈이 쥐고 있던 28인치 캐리어를 대신 잡아끌고 에스코트를 했다.

“지훈 씨 후임은 예약 메일로 더 괴롭힐 테니까 진정해요.”

“그런다고 내 화가 풀릴 거 같냐고요! 그런 거 대물림하지 마요!”

또 화가 받친 지훈이 등짝을 때릴 거라고 생각한 호준은 은근슬쩍 등을 피했다. 하지만 그걸 보자 더 약이 오른 지훈은, 호준이 상체 방어에 집중한 사이 그만 그의 발을 뒤꿈치로 콱 밟아 버렸다.

“아악!”

방심하다 허를 찔린 호준이 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사람은 위와 아래가 다 있는데, 한쪽만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는 어디다 댔어요?”

호준이 아파서 낑낑대는 사이 지훈은 태연하게 주차장을 가로질러 갔다. 곧바로 호준의 차를 찾더니 운전자보다 먼저 탑승해 조수석 안전벨트까지 야무지게 맸다. 발등 찍힌 호준은 얼얼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간신히 차 트렁크에 지훈의 캐리어를 밀어 넣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조수석에서 눈 깜박이고 앉아 있는, 자신의 너무나 사랑스러운 믿는 도끼 김지훈을 바라보았다.

“등이랑 딱밤만 때리는 거 아니었습니까?”

열심히 일해서 간신히 마감 치고 달려 나온 보람도 없이 지훈을 만나자마자 한 대 얻어맞았다. 호준은 다소 억울한 듯 투덜거렸다.

“어딜 때리든 내 맘이거든요?”

하긴 지훈은 어디만 때리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호준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두꺼운 양말을 신는 수밖에. 지훈이 어딜 때릴지 모르니 그냥 전신 보호복을 입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지훈이 저번에 홀딱 벗은 게 제일 멋있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도 고민이었다.

“근데 지훈 씨, 배고프죠? 소고기 먹을래요?”

“헉! 오늘 소고기 먹어요?”

소고기라는 말에 바로 지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방금 전까지 은근히 화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소고기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잊어버렸다.

“괜찮은데 알아 놨는데 혹시 스테이크 좋아하면…….”

“그냥 소 구워 먹으면 안 돼요? 스테이크도 좋긴 한데 이제 좀 쌈 싸 먹고 싶어서요. 사무관님은 안 그래요?”

“어제 송별회 한다고 삼겹살 회식 했다면서요.”

“최 팀장한테 술 먹이고 도망치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요. 그리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무한 리필 칠레산 냉동 삼겹살이랑 국내산 육즙 줄줄 마블링이 블링블링 신선한 소고기랑 같아요?”

일단 지훈의 취급이 너무 달랐다.

“깻잎이랑 상추 위에 쌈장 찍은 아삭한 고추 올리고, 불판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은 마늘 올리고, 양념 가득 겉절이도 한 점 올린 다음에 야들야들한 미디엄 소고기를 두 점 올리는 거죠. 한 점은 너무 아쉽고 세 점은 너무 많아요. 딱 두 점 올려서 야무지게 쌈 싸서 한입에 쏘옥 넣는 거예요. 그럼 입안에서 소고기 육즙이 주르륵 흐르는데 그게 시큼한 김치랑 매콤한 고추랑 알싸한 깻잎이랑 냠냠 어우러지는 거죠. 그때 따끈한 바지락된장찌개 한 숟가락 호로록 떠 마시면, 크. 완전 대박.”

지훈의 사실주의적 고기쌈 묘사에 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원래 호준도 한 점 한 점 숯불에 구워 먹는 고기 취향이었다. 명색이 첫 데이트이고 지훈이 어제 회식도 했다고 해서 나름대로 분위기 있는 곳을 가려고 했던 것뿐. 하지만 지훈이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호준도 마음이 흔들렸다. 분위기고 나발이고 일단 고기나 좀 구워 먹을까?

“거봐요. 사무관님도 고깃집 가고 싶죠? 돈도 그쪽이 더 굳는다고요. 스테이크 진짜 한 꼬집밖에 안 주는데 간에 기별도 안 가요. 비싸기만 하고.”

호준의 표정을 살펴보던 지훈이 살살 꼬셔 댔다.

“지훈 씨가 그렇게 원하면 한우갈빗집이나 가죠.”

호준은 신호를 받은 김에 곧바로 유턴을 했다.

지훈은 갑자기 태종시까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소고기가 좋긴 했지만 소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티격태격하다 보니, 그동안 은근히 쌓였던 불안감이 사라졌던 것이다.

혹시 그 사이에 자신의 마음이 다시 변했을까 봐, 혹은 호준의 태도가 변했을까 봐 지훈은 오만 걱정을 다 했었다. 하지만 호준이 옆에 있으니까 그냥 편해졌다. 손바닥도 술술 날아가고 말도 편하게 나왔다. 저 잘생긴 남자가 자기를 사랑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이 느낌이, 지훈은 너무 좋았다.

“완전 좋아요. 그럼 소고기 먹은 다음에 뭐 할지는 사무관님이 계획 세워 놓은 거 일단 말해 봐요.”

“내가 계획 세운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게 더 신기한데요.”

이쯤 되면 김지훈만 아는 게 아니라 전 국민이 다 알고 온 지구촌이 다 알았다.

오늘 계획만 짰으면 다행이다. 호준은 주말 계획이랑 다음 주 계획도 세워 놨을 것 같았다. 어쩌면 제대로 만나자고 말한 날 당장 집에 가서 연간 데이트 일정표랑 10년 치 연애 계획을 짜 놓았을지도 몰랐다. 아마 지훈이 호준의 비밀 일기장이라도 보면 그 계획이 10년 치가 아니라 백년지대계라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받을 터였지만.

“어차피 지훈 씨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잖아요.”

물론 머리 좋은 호준도 이제 김지훈과 엮이면 오로지 지훈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간다는 것쯤은 예상했다. 오늘도 이미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은 물 건너갔다. 물론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호준은 플랜B부터 플랜Z까지 마련해 두었지만, 지훈이라면 AA1을 하겠다며 아예 계획 밖으로 튀어 나가고도 남았다.

“그래도 일단 말해 봐요. 계획이 있어야 또 어긋나니까.”

지훈은 그런 계획 변태의 계획을 파괴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제 계획은 고기 먹고 영화 보고 야경 보러 가는 건데, 지훈 씨가 생각 바뀌면 다른 거 해도 좋고요.”

아마 저 계획도 이미 분 단위로 다 짜여 있겠지.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와 마찬가지로, 호준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면 분명 편하고 재밌을 것이다. 오늘 지훈은 퇴근 후에 태종시에 와서 호준을 다시 본다는 것에만 집중했다. 호준을 만난 후에 뭘 할지 딱히 생각을 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호준은 야근한답시고 그 바쁜 와중에도 이것저것 계획을 짜 놓았다. 역시 일만큼 연애도 열심히 하는 인간이었다.

그나저나 여행지에서는 관광이라는 핑계도 있었는데, 한국에서의 계획은 그냥 일반적인 데이트였다. 남자끼리도 똑같이 할 거 다 하는구나. 지훈은 새삼 자신이 눈앞의 상대와 연애한다는 걸 자각했다.

“좋아요. 지금 완전 데이트 같아요.”

지훈의 말에 운전 중이던 호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너무 데이트 같아서 싫어요?”

“방금 좋다고 했잖아요! 사람 말을 똑바로 들어요.”

뭐야, 진짜 좋은 거 맞아? 지훈이 하도 퉁명스럽게 말해서, 호준은 긴가민가하며 지훈의 눈치를 보았다. 그걸 본 지훈은 운전 중엔 전방 주시나 똑바로 하라며 또 투덜거렸다.

실은 호준도 무지막지하게 걱정했다. 지훈이 온다고 해 놓고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다시 생각해 보니까 연애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하면 어쩌나. 며칠 동안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 역시 여행지에서의 일시적인 감정이었던 것 같다고 하면 어쩌나. 아니면 자신이 하자는 대로 따라오면서도 불만을 미처 말로 표현을 못 하면 어쩌나.

하지만 자길 때려 놓고는 또 천연덕스럽게 웃는 지훈을 보니 별로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호준은 아까 맞은 발등에서 얼얼하게 퍼져 나가는 고통만큼, 기분 좋은 감정도 심장에서부터 서서히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지훈 씨, 진짜 보고 싶었어요. 얼굴 봐서 너무 좋아요.”

호준이 못 참고 주접을 떨었다. 지훈은 입가에 네 번째 보조개를 띠면서도 입으로는 빈정거렸다.

“아까도 사무실로 전화해서 수작 부렸잖아요.”

“다음엔 영상 통화 해도 돼요?”

“짐 싸 온 거 안 보여요? 사무관님 집에서 며칠 지내기로 했잖아요! 게다가 월요일부터 저희 아예 같은 건물로 출근하거든요? 이제 맨날 볼 건데 무슨 영상 통화예요. 주변 사람들이 잘도 모르겠네요.”

지훈은 오늘도 유달리 촉이 좋은 유 과장과 상상력이 풍부한 양 주임 때문에 불필요한 고통을 받았다. 어떻게 정규직이 되었는데, 회사에서 들키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새로 배정받는 부서에서는 호준의 이름은 입도 뻥긋 안 할 작정이었다. 이제부터 정규직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데!

파견은 2년 정도지만, 어차피 지훈의 회사와 정부 부처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한번 소문나면 이 바닥에서는 끝이었다.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려면 백만 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지훈은 괜히 게이로 소문나는 바람에 이 철밥통 직장을 포기할 생각이 결코 없었다.

“그래도 같은 층은 아니잖아요. 퇴근 전에 보고 싶으면 어떡해요.”

정작 호준은 태연하게 다른 걸 걱정하고 있었다. 설마 이 사람은 정년까지 공무원 할 생각이 없는 건가? 지훈은 살짝 의심을 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저번에 공원에서 뽀뽀하다 국장한테 걸렸을 때 호준은 지훈의 얼굴부터 재빠르게 가렸다. 그만두긴커녕 아주 그냥 공직에 뼈를 묻을 기세였다. 평생 녹봉만을 받고 살겠다는 관료적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호준이 영상 통화를 걸어올 리는 절대로 없었다. 지금 하는 말은 그냥 순전히 개수작이었다. 지훈은 눈을 흘기며 빈정거렸다.

“층이 달라서 보고 싶으면 어떡하냐니요. 행여 마주치면 불편하실까 봐 저 근무지 발령 나자마자 층수 다른 거 확인하던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죠?”

호준은 지훈의 사실 적시에 당황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호준은 하는 수 없이 최선의 방어인 공격을 했다.

“그건…… 한국 오면 다 없던 일로 하자고 우기던 사람 때문에 그런 건데요.”

창과 방패의 디나이얼 싸움이었지만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지금 설마 제 탓 하는 거예요? 사무관님이 저한테 일만 그렇게 안 시켰어도 우리 우루과이는 신혼여행으로 갔어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이미 죄 많은 사람인 호준은 지훈에게 싹싹 빌었다. 하지만 지훈의 말엔 함정이 있었다. 일만 그렇게 안 시켰으면 자신과 뭔가 잘해 볼 여지가 있었다는 뜻인가? 신혼여행은 또 뭔데? 놀란 호준이 흘금 쳐다보는데 정작 지훈은 태연했다.

“운전이나 똑바로 하세요, 정 기사. 근데 소고기 언제 먹어요? 왜 이렇게 멀어요? 나 배고픈데!”

졸지에 운전기사가 된 호준은 완벽한 코너링을 선사하며 육즙 줄줄 마블링이 블링블링한 소고기의 세계로 지훈을 인도했다.

* * *

“지금 어디 보는 거예요?”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지훈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호준은 온 진심을 담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대답을 했다.

“지훈 씨의 귀여운 얼굴이요.”

“미쳤나……. 고기 굽는데 한눈팔면 어떡해요. 그런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고기 구워요?”

“앗,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대리님.”

호준은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눈앞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꽃등심을 진심을 다해 알뜰살뜰하게 살폈다. 아주 잠깐 지훈에게 한눈팔았는데, 그 사이에 눈이 딱 마주쳐 버린 것이다. 정신을 오로지 고기에만 집중한 지훈은 호준이 고기를 제대로 굽고 있는지 시종일관 감시 중이었다.

“내가 원래 걸음마 뗀 이후로 고기만 28년을 구웠는데, 사무관님이 굳이 저한테 구워 주겠다니까 지켜보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훈은 4대째 내려오는 돼지갈빗집 출신이었다. 첫 걸음마를 시작한 건 돼지불백 옆이었고, 한글을 막 배워서 처음 읽은 글은 ‘돼지갈비 1인분 만 삼천 원’이라고 쓰인 메뉴판이라고 했다. 학창 시절엔 주말마다 가게에서 불판 갈고 고기 굽는 알바를 했다고 했다. 물론 고기 굽는 경력은 돼지갈비 한정이었지만, 소는 개인적인 취향으로 좋아한다고 했다. 집에서는 돼지만 먹어서 질린다나.

오늘도 지훈이 직접 굽겠다는 걸 호준은 점수 좀 따 보려고 자신이 굽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훈은 고기 앞에서 진심이었다. 졸지에 소고기 굽기 오디션 대회에 출전한 연습생 호준은 국민 고기 감별사님인 지훈 앞에서 평생 갈고닦은 실력을 검증받게 생겼다.

“고기 굽는데 왜 이렇게 긴장을 해요?”

“진지하게 임하라면서요.”

“손을 벌벌 떨라는 말은 아니었는데요.”

“안 떨어요.”

호준이 잡은 집게가 파르르 떨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면 수전증이 있냐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 호준이 답답한 듯 지훈이 한 소리 했다.

“그냥 내가 굽는다고 했잖아요. 나 소고기도 잘 구워요.”

“알아요. 근데 제가 지훈 씨한테 구워 주고 싶어요.”

물론 호준은 소고기를 구워서 지훈의 접시에 덜어 주는 행위로 섹스어필을 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지금 호준은 그냥 사랑하는 사람한테 맛있는 고기를 잘 먹이고 싶었다.

“왜요? 제가 설마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기를 구워 주는 사무관님의 단단한 팔뚝에 반하기라도 할까 봐요?”

정작 고기를 안 볼 때엔 호준의 팔뚝만 보고 있던 지훈이 한마디 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던 호준이 새삼 놀라서 지훈을 쳐다보았다.

“그런 건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아, 안 봤어요! 저 고기만 봤어요!”

지훈이 부정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호준의 팔뚝에 있었다. 우루과이에서도 팔뚝 한번 만져 봐도 되냐며 한참을 조몰락거렸던 지훈을 생각하니 호준은 이해가 되었다. 자기를 싫어하던 지훈이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꿨는지 호준은 은근히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이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고기가 아니라 몸을 어필해야 하나? 일단 소매는 계속 걷어붙이고 있기로 했다.

“제가 고기를 잘 구우면 저한테 반할 건가요?”

“그럼 고기 맛에 반하겠죠.”

지훈이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식으로 투덜거렸다. 고객 선호도가 고기한테 밀린 호준은 약간 시무룩해졌다.

다행히 금요일 저녁이라 식당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몇 안 되는 다른 손님들은 멀찍이 떨어진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둘은 주변 눈치도 안 보고 계속 떠들어 댔다.

호준은 고기가 익어 가길 기다리는 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커플들이면 한 번씩 해 본다는 그 질문을 던져 보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지훈 씨. 만약에 저랑 소고기가 물에 빠지면…….”

“소고기.”

“저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요.”

지훈의 단호함에 호준이 황당해했다.

“전 소고기 구할 거예요. 사무관님은 저보다 수영 잘하시잖아요.”

지훈이 광장에서 중립국 외치듯 오로지 소고기만 구하겠다고 하자, 수영을 잘하는 호준은 갑자기 억울해졌다. 자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다 죽은 고기한테 졌다.

“전 지훈 씨 구했는데요.”

뒷북왕 호준이 구차하게 지난 얘길 꺼냈다. 사람 구해 준 게 생색낼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은근하게 그 사실을 어필하고 싶었다.

“그건 감사하긴 한데 그때는 저 혼자 있었잖아요. 만약 우 국장님하고 제가 물에 빠지면 사무관님은 누구부터 구할 건데요?”

호준은 지훈의 비교 대상에 화가 났다. 우 국장이 물에 빠지든 말든 대체 뭔 상관이란 말인가.

“왜 밥맛 떨어지게 국장님 얘길 해요. 당연히 지훈 씨부터 구해야죠.”

실제로 호준은 물에 빠진 지훈을 구한 적이 있으니 대답에 진정성이 있었다. 호준의 대답에 지훈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소고기를 구할 테니까 사무관님은 저를 구해 주면 되겠네요. 그럼 모두가 살잖아요. 해피엔딩!”

지혜로운 지훈의 솔로몬 판결에 호준은 허탈해졌다. 새삼스럽게 눈앞의 소고기에게 깊은 패배감을 느끼며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럼 지훈 씨는 제가 소고기보다 더 맛있어지면 그땐 저를 구할 건가요?”

“그건 더 먹어 봐야 알겠는데……. 엇! 지금 고기 뒤집어요!”

호준은 지훈이 시키는 대로 재빨리 고기를 뒤집었다. 지훈의 말대로 때마침 뒤집을 타이밍이었다. 소고기는 타이밍 맞춰서 딱 한번 뒤집어야 촉촉한 육즙을 간직한 채 겉만 살짝 익은 미디엄레어로 먹을 수 있으니까.

불판 위에서 소고기들이 육즙을 뿜어내며 지글지글 익어 갔다. 핏물을 머금느라 붉었던 살코기가 먹기 좋게 갈색으로 변했다. 살결 사이사이로 육즙과 숯불 향이 배어 들어갔다. 그걸 본 지훈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소고기를 향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맛있겠다!”

“뭐가 맛있겠는데요? 저요, 소고기요?”

아까 지훈이 은근슬쩍 말을 돌렸지만 딱히 봐줄 생각이 없었던 호준이 말꼬리를 붙잡았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 지금 소고기 먹고 있잖아요.”

“아까 뭘 더 먹어 봐야 알겠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지훈은 소고기에 집중하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호준은 그런 지훈이 귀여워 죽을 거 같았다. 고기를 향해 고정되어 있는 커다란 눈동자하며, 입맛을 다시느라 촉촉해진 입술, 그리고 고기 냄새에 끊임없이 벌름거리는 자그마한 콧구멍까지.

“정호준 씨.”

“네?”

“정신 차리고 양파나 더 올려 주세요. 고기랑 같이 먹으려면 지금 올려야 한다고요!”

지훈은 오로지 소고기에만 진심이었다. 지훈에게 더 맛있는 존재가 되려면 호준은 좀 더 분발해야만 했다.

식욕이 왕성한 지훈이 고기를 거의 다 먹을 뻔했지만 막판에 너무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며 한 근 정도는 남겼다. 호준도 덕분에 꽃등심 맛은 볼 수 있었다. 원래 고기가 맛있는 걸로 유명한 식당이긴 했지만, 호준은 오늘만큼은 자신이 역대급으로 맛있게 잘 구웠다고 생각했다.

“거기 진짜 맛있었어요. 사무관님이 멀리까지 나간 이유를 알겠다. 다음에 또 가요!”

또 가자는 걸 보니 지훈의 고객 만족도는 최상인 것 같았다. 지훈을 배불리 잘 먹인 것 같아서 호준도 흡족했다.

둘은 호준의 계획대로 다음 데이트 코스인 영화관으로 이동했다. 사실 지훈은 실컷 고기를 먹고 나니 배도 부르고 나른해져서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알콩달콩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하는 호준의 의사를 존중하고자 했다.

금요일 저녁이었지만 행정혁신도시의 영화관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가족 단위의 관객들이 있었지만 커플끼리 온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물론 호준과 지훈이 있었지만 아무도 둘을 커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이성애 만능주의가 오늘도 둘을 지켜 주었다.

“지훈 씨, 이 영화 어때요? 좋아해요?”

호준이 고른 영화는 시끌벅적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였다. 지훈은 딱히 가리는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관님은 예술 영화 좋아하실 거 같은데 의외네요.”

“다들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저도 그냥 남들 보는 거 좋아하는데.”

“그건 사무관님이 너무 진지하게 생겨서 그래요. 책도 역사책만 보게 생겼다고요.”

잘생긴 건 둘째 치고 인상이 너무 반듯하게 생긴 터라, 면접 볼 때야 이득을 봤지만 지훈한테 점수 따는 데엔 한참 걸렸다.

“제가 그렇게 재미없게 생겼어요?”

호준이 약간 시무룩한 투로 묻자 호준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지적 지훈 시점에서 보면 너무 잘생긴 얼굴이었다. 눈도 크고 눈매도 또렷한데, 그 눈은 지훈만 보면 반짝거렸다. 눈썹 모양도 좋고 코도 높고 입도 야무진데 입술도 촉촉하고, 저 입으로 키스도 잘한다. 음……. 지훈은 그대로 호준에게 얼굴을 들이대려는 걸 겨우 참았다. 자꾸 쳐다보니 곤란했다.

“잘생기면 그만이죠. 사무관님 혹시 팝콘 먹어요?”

지훈은 뜬금없이 팝콘과 콜라를 사 오겠다며 벌떡 일어섰다. 훤칠한 지훈의 뒷모습을 보면서 호준은 쑥스럽게 웃었다. 방금 전 지훈이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는 동안 호준 역시 그런 지훈을 한참 쳐다보았다.

지훈의 얼굴이야말로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었다. 보고 있으면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속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없이 있을 때도 그 또랑또랑한 눈이 흐릿해졌다가 혹은 초롱초롱해지기도 하고, 광대는 씰룩거리다가 축 처지기도 했다.

자신이 종종 입술을 샐쭉거리거나 콧구멍이 벌름거리기도 한다는 걸 지훈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방금도 호준은 지훈의 볼때기를 붙잡고 주물러 보고 싶은 걸 겨우 참아야 했다. 그런 귀여운 얼굴이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볼 때마다 호준은 가슴이 설렜다.

“팝콘은 큰 사이즈랑 작은 사이즈 가격 차이가 얼마 안 나서 그냥 큰 거 사 온 거예요.”

“네, 잘했어요.”

대용량 팝콘과 대용량 콜라까지만 봤다면 호준도 그 말을 믿을 뻔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나초와 핫도그와 오징어도 있었다.

“제가 많이 먹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엄청 큰 팝콘을 사 온 지훈이 좀 민망한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습관대로 대용량을 사 왔는데 호준이 눈을 잠깐 동그랗게 떴던 것이다. 호준이 자신의 왕성한 식욕을 행여 눈치챌까 봐 지훈은 좀 걱정되었다. 아까 그래서 배부른 척하면서 마지막 꽃등심은 남겨 뒀는데…….

사실 우루과이에서 돌아다닐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호준의 통장을 거덜 낼 작정으로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었다. 하지만 오늘은 데이트라고 생각하니까 꽤나 신경 쓰였다. 호준은 이미 지훈의 왕성한 식욕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좋으니까.

지훈에게 등짝이랑 딱밤을 그렇게 맞고도 지훈이 좋다고 하는 걸 보면 호준은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았다. 하지만 위장이 너무 큰 건 딱밤과는 다른 문제였다. 잘 먹는 건 이제 와서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많이 먹는 모습을 보면 호준이 놀랄지도 몰랐다. 지훈은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다.

“사무관님. 저 그렇게 많이 먹진 않아요.”

와작. 때마침 팝콘을 집어 먹으면서 할 소린 아니었다.

“네. 그래요”

호준은 지훈에게 콜라까지 내밀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정작 호준은 팝콘의 양을 보면서 아까 지훈에게 먹인 소고기의 양이 적었는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설마 일부러 적게 먹은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나중에 야식을 먹이면 되려나? 지훈의 우려와 달리 호준은 이제 지훈이 남들만큼 먹으면 놀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 정도면 진짜 정상 범주로 먹는 거라고요.”

지훈이 궁색하게 변명했지만 호준은 계속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럼요. 사실 정상 범주라는 건 규정하기 나름이지만요.”

“뭐라고요?”

“정상의 기준은 뭘까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요? 주관적인 문제예요.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조금 다른 소수를 타자화하려고 정상의 기준을 만들기도 해요. 많은 사람들이 이성애를 한다고 해서 지훈 씨를 좋아하는 제가 정상 범주 바깥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냥 사랑하고 연애한다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저도 정상일 텐데요. 누가 저보고 비정상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정상’에 대한 범주가 너무 협소한 거겠죠.”

“그…… 그렇죠?”

지훈은 점점 호준의 잔소리에 말려들어 갔다. 호준이 심오한 말을 하려는 것 같아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는데…….

“사람이 밥을 먹는 양에도 사실 정상이란 건 없어요. 많이 먹어도 건강하면 정상이에요. 편의상 공깃밥 한 그릇의 양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두 그릇을 먹는다고 비정상은 아닌 거죠.”

결국 그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일장 연설을 한 거였다! 지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제가 언제 사무관님 앞에서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어요!”

“저희 일주일이나 같이 여행 다녔잖아요.”

호준이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정작 지훈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많이 먹는 걸 다 알고 있었다니! 모를 수가 없긴 한데, 그래도 확인 사살을 당하니 너무 부끄러웠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루과이에서 작작 먹었어야 했는데……. 소고기에 눈이 멀어 버렸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지훈이 쪽팔려서 괜히 마른세수를 하는데, 호준이 옆에서 태연하게 어깨를 토닥였다.

“전 잘 먹는 지훈 씨가 좋아요. 남들보다 좀 많이 먹으면 어때요. 맛있게 잘 먹으면 좋죠. 잘 먹는 거 보기 좋아서 자꾸 맛있는 거 더 사 주고 싶어요.”

“그…… 그래요?”

“이따 출출하면 또 야식 먹어요.”

호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훈은 호준이 진심으로 자신을 배불리 먹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소고기부터 시작해서 자꾸 자기한테 뭔가를 먹이려 들었다. 호준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먹이고 싶어 한다면, 그냥 주는 대로 잘 먹는 게 예의 아닐까? 동방예의지국에서 나고 자란 지훈은 예를 갖추어 답했다.

“그렇다면…… 사무관님 생각해서 잘 먹을게요.”

천연덕스러운 지훈의 대답에 호준이 빵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좋아서, 지훈도 따라 웃어 버렸다.

* * *

금요일 저녁 영화관엔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젊은 남녀와 중년 부부가 듬성듬성 앉아 있을 뿐. 지훈은 좌석을 확인하다가, 눈치 없이 정가운데 좌석에 표를 끊은 호준을 잠깐 노려보았다. 영화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이긴 했다. 이 눈치 없는 새끼, 잘생기면 다냐? 오늘 정말로 영화만 볼 셈인가? 먼저 자리에 앉은 호준은 스크린이 잘 보인다고 자리 잘 골랐다며 만족하고 있었다. 지훈은 호준의 해골에 꿀밤을 먹이려다가, 나중에 제대로 때리려고 일단 참았다.

호준은 쓸데없는 데에서 굉장히 건전했다. 보고 싶다는 둥, 더 먹이고 싶다는 둥 오만 요란을 다 떨어 놓고는 정작 영화관 좌석은 정가운데로 잡았다. 살면서 불건전 데이트만 해 왔던 지훈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우루과이에서 돌아다닐 때야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여행만 하고 다녔다 쳐도 이젠 아니었다. 심지어 호준의 좌석 바로 앞줄에 점잖은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다. 젊은 커플은 진작 맨 뒷좌석에 자리 잡았다. 영화 시작 전 광고 타임 중에 주변을 둘러보던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은 왼쪽으로 나가면 있어요.”

호준은 지훈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 하는 걸로 오해했다. 이 인간을 어쩌면 좋지? 호준의 반응에 지훈은 골이 아팠다. 나중에 몰래 뽀뽀라도 하려면 어떻게든 사각지대로 이동해야 했다. 흑심으로 가득 찬 지훈은 무작정 팝콘을 들고 호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디 가요?”

“자리 옮겨요.”

“왜요. 우리 좌석 여기인데.”

지훈은 마음 같아서는 손에 들고 있는 팝콘을 호준의 머리 위로 쏟아부어 버리고 싶었다. 나초를 영화 시작 전에 다 먹어 버린 게 아쉬울 정도였다.

“어차피 좌석 다 비었는데 아무 데나 앉을래요.”

지훈은 그대로 호준을 끌고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관이 커서 다른 커플과는 아주 멀찍이 떨어지게 되었다. 지훈은 어리둥절해하는 호준을 황급히 옆자리에 앉혔다. 하필 두 좌석씩 붙어 있는 커플석이었다. 커플이니까 커플석 앉아야지. 지훈은 편할 대로 생각했다.

지훈이 자리에 앉자마자 영화가 시작되었다.

“뭐 해요. 빨리 앉아요.”

“이 자리는 너무 뒤라서 잘 보이지도 않잖아요.”

“그냥 닥치고 앉아요.”

지훈이 호준의 무릎 뒤를 걷어차서는 자리에 강제로 앉혔다. 타의로 털썩 주저앉아 버린 호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그대로 콜라의 빨대를 호준의 입에 쑤셔 넣었다. 시키는 대로 콜라를 마시던 호준은 곧 순진할 정도로 영화에 집중했다. 대충 아무거나 고른 척하더니 실은 보고 싶은 영화였나 보다. 계획 자체를 호준이 짰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훈은 호준을 옆에 두고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거의 일주일을 못 했다. 섹스를. 지구 반대편에서 그렇게 내일은 없는 사람처럼 하루 종일 섹스만 하고 헤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지훈이 귀국한 날 출장 핑계로 만나긴 했지만, 그날은 호준은 야근을 해야 했고 지훈도 너무 피곤해서 공원에서 뽀뽀만 한 게 전부였다. 그러고 나서 만난 게 오늘이었다. 그 며칠 동안 지훈은 밤만 되면 잠을 못 잤다. 눈만 감으면 우루과이에서 호준과 얼레리꼴레리 했던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솔직히 호준과 하는 섹스가 너무 좋았고, 앞으로 더 많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만나면 바로 끌어안고 키스하고 또 몸을 섞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째 호준은 세월아 네월아 했다.

그래도 어두운 영화관에서 둘이 몸 붙이고 앉아 있으니까 설레긴 했다. 대학생들처럼 수줍은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훈은 스물아홉의 닳고 닳은 어른이었고, 그런 풋풋한 기분은 10분이면 충분했다.

생각해 보면 오늘 차로 이동하느라 뽀뽀할 기회도 틈틈이 많았다. 하지만 호준은 뽀뽀는커녕 손도 한번 잡지 않았다. 며칠 전에 공원에서 자신에게 다짜고짜 입술 들이대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지훈은 괜히 약이 올랐다. 멍청한 표정으로 영화만 보고 있는 호준을 좀 괴롭히고 싶어졌다.

지훈은 팝콘을 집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손을 내려 호준의 손을 잡아 쥐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호준이 지훈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지훈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호준의 긴장이 맞잡고 있는 따듯한 손으로 전해져 왔다.

손을 떼진 않는 거 보니 싫진 않은 것 같은데, 당연히 싫지 않아야 했다. 사귀기 전에 이미 섹스까지 질펀하게 했는데, 손잡는 걸로 긴장하면 심히 곤란했다. 혹시 또 쓸데없는 고집으로 공공장소에서는 아무 짓도 안 한다는 원칙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호준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긴 했다.

지훈은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 호준을 흘끔거렸다. 호준의 시선은 여전히 스크린에 있었지만 딱 봐도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지훈은 일부러 몸을 좀 더 호준 쪽으로 붙였다. 맞잡은 손을 조금씩 쓰다듬었다. 지훈의 긴 손가락이 호준의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를 쓸었다. 그러다가 호준과 눈이 마주쳤다.

‘왜요?’

지훈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하지만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호준이 그대로 몸을 기울여서 지훈의 시야를 가렸다. 지훈의 입술이 곧 덮였다. 호준의 반응은 지훈의 예상보다 빨랐다. 호준의 입술은 이미 뜨거웠다. 아까 강제로 먹였던 콜라 때문에 입안은 또 차가웠다.

지훈은 자신의 입술을 벌리고 다가오는 호준을 받아들였다. 호준의 차가운 혀가 지훈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뜨거운 지훈의 입안을 조심스럽게 훑었다. 치열 바깥쪽부터 시작해서 지훈의 혀와 얽혀 들어가더니 입 안쪽 깊숙한 곳까지 거침없이 살폈다. 지훈은 눈을 감고 호준의 서늘한 움직임에 온전히 집중했다. 서로 맞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호준의 질척한 키스는 아직 신선했다.

아까부터 이렇게 끌어안고 싶었다. 이렇게 키스하고, 뜨거운 숨도 느끼고 몸을 바짝 붙여야만 맡을 수 있는 달짝지근한 살 냄새도 느끼고 싶었다. 호준과 혀를 섞고 입안의 민감한 곳까지 질척하게 안부를 전하는 동안 지훈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가볍게 생각했던 키스는 점점 더 진득해졌다. 그래도 공공장소인 만큼 귀는 주변에 집중했다. 두 사람은 최대한 숨을 죽이고 민망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종종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몇 안 되는 관객들은 영화에만 집중했고, 영화는 내용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쿵!

영화 속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울렸다. 소리가 꽤나 커서 지훈은 깜짝 놀라느라 눈을 떴다. 그 틈에 호준은 입술을 살짝 떼어 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미 입술은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온몸은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호준은 스크린이 아닌 지훈을 빤히 쳐다보면서 바로 코앞에서 작게 속삭였다.

‘이런 거, 하고 싶었어요?’

지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호준이 피식 웃었다. 그 바람에 호준의 콧김이 지훈의 볼까지 닿았다. 지훈은 그제야 눈치챘다. 애초부터 흑심 품고 노린 건 지훈이 아니라 호준이었다는 걸. 낚였다. 이 인간,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사람 똥줄 태운 거야…….

영화 속 액션이 무르익으면서 서라운드 사운드가 사방에서 요란하게 총소리를 울려 댔다. 이것저것 펑펑 터지느라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스크린을 잠깐 보던 지훈은 호준이 일부러 사운드가 요란한 액션 영화를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

‘일부러 이런 영화 골랐죠?’

‘예술 영화는 야하긴 한데 너무 조용해서 곤란하거든요.’

지훈이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호준이 실실 웃었다.

‘애초에 작정하고!’

‘지훈 씨 옆에 있는데 어떻게 참아요.’

작정하고 참으면 누구보다 잘 참으면서 잘도 성급한 척이었다. 정말로 참을성이 없던 지훈은 어두운 극장 조명을 핑계로 대뜸 호준의 아랫도리를 만졌다. 물론 장난 반이었지만 진심도 반쯤 있었다. 입술을 그렇게 질척하게 문댔는데 혼자만 아랫도리가 멀쩡한지를 확인해야 했다.

‘여긴 참을성이 대단해 보이는데요.’

사실 호준의 주니어는 이미 딴딴하긴 했다. 지훈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면서 주물럭거렸다. 호준이 당황해서 그런 지훈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다.

‘지, 진정해요. 지훈 씨.’

급소를 붙잡힌 호준이 진심으로 놀랐다. 지훈은 악력이 센 편이었다. 작정하고 성기를 꽉 쥐자 눈앞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영화관 안에서 비명을 지를 수 없었던 터라 호준은 입술을 꽉 깨물며 부들부들 떨었다.

‘제발 놔주세요. 지훈 씨.’

‘싫……. 읍!’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호준은 지훈의 양 볼을 붙잡고 키스를 일단 퍼부었다. 역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었다. 호준이 다른 쪽으로 피하거나 막을 줄 알았던 지훈은 기습적인 키스에 당황해 버렸다. 호준의 아랫도리를 주물럭대던 손에 힘이 풀렸다.

지훈의 입안을 혀로 거칠게 헤집으면서, 호준은 지훈의 팔을 좌석에서 걷어 내고 그대로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복부의 맨살을 매만지면서 호준의 손은 거침없이 지훈의 가슴과 유두를 향해 갔다. 호준의 굵은 손가락이 지훈의 딱딱해진 유두 끝을 꾸욱 눌렀다. 짜릿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면 큰일이었다. 놀란 지훈이 하마터면 신음을 뱉을 뻔한 걸 호준이 입으로 겨우 막았다. 지훈은 안 떨어지려는 호준의 입술을 간신히 떼어 냈다.

‘미쳤어요? 여기 영화관이거든요?’

먼저 고추 만진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호준은 억울해졌다.

‘그러게 왜 먼저 자극했어요.’

호준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가락으로 계속 옷 안에서 지훈의 가슴과 유두를 주물럭거렸다. 지훈은 어이가 없었다. 자긴 바지 위로 만졌지만 호준은 아예 맨살을 더듬거리는데! 스크린이 밝아질 때마다 누가 볼까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호준은 손을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또 내 탓 하는 거예요?’

‘아니요. 참을성이 너무 없는 제 탓입니다.’

언제는 대단한 인내심이라더니 진짜 이게 무슨 난리람. 섹스 판타지고 나발이고 공공장소에서 옷 벗을 생각은 전혀 없었던 지훈은 호준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으헉!’

호준이 고꾸라진 사이에 지훈은 호준의 팔을 옷 안에서 빼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아파서 정강이뼈를 쓰다듬고 있는 호준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며 남은 팝콘을 챙겨 일어났다.

‘걸을 수는 있죠? 밖에 먼저 나가 있을게요. 더 있다간 진짜 사고 칠 것 같으니까.’

바깥에서 간신히 열기를 식힌 지훈은 영화관 주차장에서 호준을 기다렸다. 멀리서 나타난 호준이 차 문을 열어 주자 냉큼 조수석에 탔다. 몇 번 탔다고 아주 그냥 자기 차였다. 호준은 별다른 말 없이 뒤따라 타서 시동을 걸었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지훈이 바로 펀치를 날렸다. 호준은 때마침 차 안에 있던 펭귄 친구 쿠션으로 얼른 지훈의 공격을 막아 냈다.

“지금 나를 감히 막았어요?”

“자, 잠깐만요. 이번엔 왜 때려요?”

지훈은 호준 대신 펭귄 친구의 면상을 주먹으로 때렸다.

“누가 사람들 다 있는 데에서 옷 벗기고 가슴 만져요? 미쳤어요? 진짜 깜짝 놀랐네!”

먼저 뒷좌석으로 자리 옮겨 놓고 고추까지 만진 사람이 할 소린 아니었다. 호준의 입장에서는 정당 방어였는데 김지훈 판사의 판결에 따르면 과잉 방어였다. 지훈은 옷이 벗겨진 건 충격이었는지 진짜 정색하고 치를 떨었다.

“미안해요. 대신에 지훈 씨도 약속해요. 밖에서 아래는 만지지 말아 줘요.”

“그건…….”

무심코 그러겠다고 말하려다 말고 지훈은 말문이 막혔다. 별로 약속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아까도 만질 때 좀 재밌었으니까. 다음에도 인적이 드문 곳에서 슬쩍 만져 보고 싶은데 약속을 해 버리면 곤란했다.

“밖이면 기준이 어딘데요. 침대 밖이요?”

지훈의 질문에 호준도 아차 싶었다. 기준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즐거운 성 생활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한번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편이라 처음부터 신중해야 했다. 이것저것 고민해 보던 호준이 간신히 대답했다.

“집이랑…… 차요.”

“그럼 차 안에서는 되겠네요?”

지훈의 밝은 표정에 호준은 외려 머리가 복잡해졌다. 차 안에서 얼마나 만질 셈이지? 지금 차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하기엔 너무 작은데, 차종을 바꿔야 할까? 안 할 생각은 없었는지 호준은 차를 바꿀 고민을 했다.

차가 잠깐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호준은 핸들에서 손을 떼어 지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집까지 한 20분 걸리는데 잠깐 자요.”

“왜요? 운전하는데 방해되니까 잠이나 자라고요?”

물론 그런 목적이긴 했는데, 그렇다고 대놓고 말했다간 정말 지훈에게 맞아 죽을 것 같았다. 호준은 되는대로 변명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오늘 밤에 못 잘 테니까 미리 자 두라고요.”

그 말에 지훈은 화들짝 놀랐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세기말에나 쓰이던 개수작 아니야?

“대박. 저 너무 떨려서 오던 잠도 깼어요.”

정작 지훈은 그 개수작에 홀랑 넘어가 버렸다. 다른 놈들이 밤새 안 재울 거라고 말하면 허풍일 게 분명해 기대가 전혀 안 되었겠지만, 정호준이 그렇게 말한다면 사정이 달랐다. 그건 진짜 그럴 계획이 있고 실천 가능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호준의 성격상 최선을 다해서 사람을 잠 못 자게 만들 게 틀림없었다. 지훈은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콘돔 몇 개 사 놨는데요?”

우루과이에서도 콘돔 없다고 잡아떼더니, 지훈이 출장 왔던 날에도 호준은 미처 준비가 안 되었다며 그냥 지훈을 돌려보냈다. 호준의 그런 전적을 생각하면 지훈이 콘돔 개수부터 확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호준이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

“걱정 마요. 엄청 많이 샀어요.”

보통 호준은 정확한 수치를 말하는 편이었다. 그런 호준이 두루뭉술하게 둘러대니 지훈은 약간 어리둥절해했다.

“엄청 많이는 몇 갠데요?”

“아직 몰라요. 몇 박스 주문했더니 이상한 사은품도 이것저것 들어 있더라고요. 아직 다 안 세어 봤어요…….”

사은품 얘기는 좀 민망했는지 호준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사은품 증정 여부까지 순순히 실토한다는 점은 정호준다웠다. 지훈은 호준이 대체 어디서 뭘 어떻게 주문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진짜 콘돔만 주문한 거 맞아? 궁금은 했지만 지훈은 더 추궁하진 않았다.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나중에 알고 싶었다.

혹시 호준이 알고 보니 진짜 변태 같은 섹스 취향을 가졌으면 어쩌지? 원래 평소에 점잖은 사람이 더 변태 같던데? 이상한 데에 매달리거나 몸이 묶이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어쩌지? 그래도 호준의 평소 성격이면 묶기 전에 물어보긴 하겠지? 완전 싫다고 해야지. 반대로 호준이 묶이고 내가 때리면 안 되나? 평소에도 내가 때리잖아?

지훈이 이상한 눈빛으로 자꾸 쳐다보자 호준은 일부러 시선을 외면했다.

“이상한 거 안 샀어요.”

“암말도 안 했는데요.”

“약간 그런 눈빛이었다고요.”

“그냥 얼마나 많은지 궁금해서 생각해 본 거라고요.”

지훈은 궁색한 변명을 했다.

“뭐, 쓰면서 세어 보면 알겠죠.”

호준도 궁색하게 대답했다.

“몇 박스를 사 놓고 영화는 왜 보러 가자고 한 거예요?”

“그냥요. 지훈 씨랑 손만 잡는 데이트도 해 보고 싶어서요.”

지훈은 그것마저 고지식한 정호준답다고 생각했다. 호준은 생각보다 낭만적인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지훈이 싫다고 못을 박아 놔서 그렇지, 이벤트 같은 것도 은근히 좋아할 것 같다.

너무 허리 아래의 욕망이 들끓는 바람에, 그냥 평범하게 데이트하고 싶었던 호준에게 조급하게 들이댄 건 아니었을까. 지훈은 아주 약간 후회가 되었다.

“나 때문에 영화 끝까지 못 봤네요. 야경도 못 보고. 계획대로 안 됐잖아요.”

“아뇨, 생각보다 계획대로 잘됐는데요. 지훈 씨랑 맛있는 거 먹고 데이트도 했잖아요.”

호준은 이제 계획을 지키기 위해 아예 허술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훈과 다니면 어차피 못 지키니까. 초 단위로 계획을 세우던 사람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어쩌긴, 도대체 뭔 생각인지 모를 지훈에게 홀랑 낚여 버린 정호준 본인 탓이다.

호준의 아파트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지훈의 캐리어를 질질 끌고 와서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행히 밤늦은 시간이라 엘리베이터 안은 계속 단둘뿐이었다. 지훈은 CCTV를 힐끔 보다가 옆에 서 있던 호준의 손을 대뜸 잡았다. 지훈의 길쭉한 손가락이 호준의 굵고 단단한 손을 감쌌다.

호준이 놀라서 쳐다보자 지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손잡고 싶다면서요. CCTV에 잘 안 보이지 않을까요?”

“보여도 상관없어요.”

호준이 손을 잡은 채로 몸을 틀어, 다른 손으로 지훈의 어깨를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맞잡은 손도 꽉 쥐었다. 입술이 벌어지고 다시 혀가 얽혔다. 이번엔 지훈의 혀가 먼저 호준의 입안을 과감하게 헤집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바닥에 땀이 찼다.

한참 키스에 집중하려는데 눈치 없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얼른 몸을 떼어 냈다. 다행히 복도엔 사람이 없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호준은 신도 벗기 전에 지훈을 꽈악 끌어안았다. 꾹 참았다 터지는 열망이 가득 느껴졌다.

“그냥 집에 빨리 올 걸 그랬죠? 미안해요. 눈치 없어서.”

호준이 지훈의 귀에 속삭였다. 지훈도 호준의 어깨에 팔을 감으면서 폭 안겼다.

“손만 잡는 그런 데이트는 제대로 못 해서 미안해요. 솔직히 아까부터 존나 하고 싶단 생각밖에 안 했거든요.”

“언제부터 그랬는데요? 소고기 먹고 나서?”

호준이 지훈의 양 볼에 입을 쪽쪽 맞추면서 속삭이듯 물었다. 호준의 손은 이미 지훈의 윗옷과 셔츠를 벗겨 대고 있었다. 지훈도 마주 보고 서 있는 호준의 셔츠를 벗기면서 대답했다.

“무슨 소리예요. 기차역에서 홀딱 벗기고 싶은 거 참았다고요.”

지훈의 시선이 셔츠 밖으로 드러난 호준의 맨가슴에 고정되었다. 탄탄하면서도 볼륨감 있는 가슴 근육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호준은 그런 지훈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저보다 소고기가 맛있다면서요.”

“그건…… 사무관님을 더 먹어 봐야 아는 거고요.”

아까는 대충 얼버무리더니, 결국 호준을 더 먹어 봐야겠단 뜻이었던 모양이다. 지훈은 정말 호준을 먹어 볼 작정인지 고개를 숙여 호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쇄골을 혀로 핥으며 빨아 대기 시작했다. 손은 이미 호준의 가슴에 가 있었다. 이번엔 다분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가슴을 주물럭대면서 유두까지 만지작거렸다.

호준은 고개를 기울여 지훈의 귓불에 입을 맞추고 귓바퀴를 질척하게 핥아 댔다. 호준이 혀를 움직일 때마다 야한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지훈의 고막까지 흘러 들어갔다. 기분이 야릇해질 때마다 지훈이 몸을 떨면서 움찔거렸다. 호준은 셔츠 아래 숨은 지훈의 맨허리를 잡고는 다른 손으로 지훈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아아…… 읍! 아아…….”

지훈이 얕은 신음을 뱉었다. 지훈의 바지가 흘러 내려가고 호준의 손이 거침없이 지훈의 속옷 위를 쓸었다. 아까 덥석 잡아 대기나 했던 지훈의 거친 손놀림과는 달랐다. 호준의 손은 부드럽게 주변을 쓰다듬으면서 점점 달아오르는 성기를 자극했다. 지훈이 신음을 뱉으면서 허리를 움찔거렸다. 성기가 뜨거워지면서 단단해졌다.

호준은 그런 지훈의 허리를 자신의 쪽으로 확 잡아끌었다. 이미 바지 위로 단단해져서 존재감을 드러낸 호준의 성기와 맞닿았다.

“어때요. 먹어 보니까. 저 맛있어요?”

“아직 겉만 먹어 봐서 모르겠는데요.”

사실 벌써 맛있었다. 아직 씻지 않은 호준에게서는 체향이 물씬 풍겼다. 약간 시큼한 땀 냄새도 살짝 풍겼는데 지훈은 그 은근한 냄새에 환장할 것 같았다. 강렬한 후각적 자극에 우루과이에서의 화끈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아랫도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걸 느낀 호준은 지훈을 벽 쪽으로 더 밀어붙이고 품에 꽉 차게 끌어안았다.

“진짜 좋아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사실 아까부터 그냥 덮치고 싶었어…….”

호준이 지훈의 온 얼굴에 키스했다. 이마부터 시작해서 콧등까지 내려오더니 양 볼에도 쪽쪽 입을 맞추었다. 입술 주변과 턱에도 뽀뽀하더니 마지막으로 입술에 쪽 하고 도장을 찍었다. 거의 뽀뽀를 퍼부었다. 지훈은 눈 감고 웃으면서 다 받아 주었다. 유치한 것치고 기분 좋았다. 호준의 진심이 감당 안 될 정도였다.

“그냥 덮치지 그랬어요…….”

뽀뽀 세례에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지훈은 손을 뻗어 호준의 바지를 빠르게 벗겼다. 속옷도 그냥 훌렁 벗겼다. 호준의 굵직한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기는 이미 반쯤 일어서서 지훈을 향해 있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면서 호준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진짜 못 참겠다, 지훈아…….”

호준은 그만 정신 줄을 놓아 버렸다. 호준은 대충 걸치고 있었던 걸 허겁지겁 벗더니 지훈의 반쯤 흘러내린 바지도 마저 벗겨 버렸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붙잡고 안아 올렸다. 지훈은 그대로 호준의 목을 끌어안고 다리를 허리에 감아 호준에게 매달렸다. 안기는 건 이제 익숙할 정도였다.

호준은 거뜬하게 지훈을 안은 채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지훈이 드러누워 자려다 말았던 바로 그 침대였다. 호준은 지훈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지훈의 늘씬한 나신을 감상하듯이 훑어보았다.

“아, 뭐 해요! 고추만 잔뜩 세워 놓고!”

벗겨 놨으면 예뻐해 주든지 빨아 주든지,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답답해진 지훈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호준은 그대로 지훈의 위에 올라탔다. 그러곤 지훈의 몸을 완전히 가두었다. 가슴팍부터 발끝까지 온 맨몸이 서로 맞닿았다. 살갗은 이미 뜨거웠다. 지훈이 맨다리로 호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호준은 그런 지훈에게 다시 깊은 키스를 했다.

한쪽 손을 붙잡은 채로 몸을 맞대고 둘은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가슴팍을 딱 붙이고 있어서 서로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서로를 향해 빠르게 뛰는 심장이 두 사람을 흥분시켰다.

이미 단단해진 성기는 서로의 배를 찔렀다. 둘은 허리를 비틀어 대면서 서로의 배에 단단해진 성기를 문질렀다. 쿠퍼액이 질질 흘러나와 이미 뜨거워진 살갗을 더럽혔다. 지훈의 손이 호준의 넓은 등판을 쓰다듬다가 다시 가슴께로 옮겨 왔다. 호준의 가슴을 조몰락거리며 유두를 살살 매만졌다.

“가슴 만지고 싶었어?”

호준이 입술을 떼며 묻자 지훈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반말이 슬슬 나오는 거 보니 호준이 또 이성을 슬슬 잃었구나 싶었다. 빨리 이 인간이 완전히 야생의 맹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훈은 호준을 좀 더 자극했다.

처음에야 무서웠지, 이제 호준과 하는 섹스의 즐거움을 아는 지훈은 안달이 나 있었다. 자기 말마따나 인내심이 대단한지라 이성을 완전히 놓아 버린 호준의 모습은 섹스에 완전히 몰입할 때가 아니면 도무지 볼 수가 없었으니까. 지훈은 바로 그 순간이 좋았다. 욕망에 뒤덮여 눈이 살짝 돌아간 호준의 모습은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여기도…….”

지훈은 다른 손으로 호준의 성기를 다시 붙잡았다. 지훈이 예의 그 큰 손으로 호준의 성기도 감싸 쥐었다. 손을 아래위로 쓸어 대자 호준은 지훈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며 지훈의 체향을 맡아 댔다. 짐승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며 헐떡였다.

“그거 다 네 거야…….”

호준의 헛소리에 지훈은 잠깐 어리둥절해했다. 성기 말하는 건가? 당연히 지훈의 것이다. 지훈은 소유욕을 과시하기 위해 호준의 성기를 한 손 가득히 꽉 쥐었다. 한 손에 들어차지도 않을 정도로 굵고 길었다. 지훈은 마음 같아서는 완전히 다 감싸 쥐고 싶었다.

“그럼 이게 내 거지, 남 주려고 했어요?”

“아니, 너만 줄 거야. 지훈아.”

‘지훈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는 그 목소리에 지훈도 퓨즈가 나갔다. 지훈 씨라고 불러 줄 때보다 더 설렜다. 호준의 잔뜩 화난 성기를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대고 비벼 댔다. 호준이 허리를 움찔거리더니 안 되겠는지 벌떡 일어났다. 침대 옆에서 부스럭거리더니 콘돔이랑 젤을 가져왔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는지 젤을 짜서 지훈의 사타구니에 바르는데 그마저도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걸 보던 지훈이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좋아서요. 빨리 안아 줘요.”

호준만큼 마음이 급했던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호준이 가져온 콘돔 포장을 찢었다. 호준이 콘돔을 가져가려는 걸 지훈이 팔을 뻗어 피했다.

“그거 내 거라면서요. 내가 해 줄게요.”

살면서 남한테 콘돔을 씌워 주는 섹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지훈은 지금 상황이 좀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다. 돌돌 말려 있는 콘돔을 펴면서 지훈은 그 틈에 호준의 성기를 한 번 더 쓰다듬는 걸 잊지 않았다. 호준은 미안했는지 지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귀 쪽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지훈은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호준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앉았다. 호준은 지훈의 허리를 붙잡고는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지훈은 허리를 들썩이면서 자신의 성기를 호준의 배에 문질렀다. 이미 콘돔을 씌운 호준의 딱딱한 성기와도 맞닿았다. 지훈은 호준을 꼭 끌어안은 채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빨리 넣어 줘요.”

호준은 미칠 것 같았다. 지훈이 침대에서 이렇게 적극적인 줄 몰랐다. 우루과이에서도 미처 몰랐는데, 그땐 정말 남자랑 하는 건 처음이라서 그랬나 보다. 자기 딴엔 좀 적응됐는지 오늘은 장난 아니었다.

호준은 이미 젤로 질척해진 지훈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조금 더 마사지했다. 지훈의 내벽을 파고드는 호준의 손가락이 하나에서 두 개로 늘어났다. 긴장해서 잔뜩 힘을 준 지훈의 입구를 살살 달래 가면서 부드럽게 풀었다.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내벽을 살피면서 전립선 근처도 살짝 눌러 주었다.

“흐읏…….”

자극이 왔는지 지훈이 신음을 뱉으며 호준의 목에 팔을 감고는 허리를 숙였다. 이미 온몸이 델 듯 뜨거웠다. 자극을 못 견디고 살짝 찡그린 지훈의 얼굴이 너무 야했다.

호준은 다른 손으로 지훈의 턱을 붙잡고 뜨거운 볼과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흐응……. 지훈이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를 뒤틀었다.

호준은 지훈을 다시 시트 위에 눕혔다. 지훈의 무릎에 입을 살짝 맞춘 후에 자신의 어깨에 지훈의 두 다리를 걸쳤다. 성기에 젤을 한 번 더 바르고는 지훈의 입구에 밀어 넣었다.

“아으으!”

아래가 벌어지는 고통에 지훈이 신음을 뱉었다. 호준이 풀어 놓긴 했지만 잔뜩 발기한 성기를 받아들이기는 역시 쉽지 않았다. 귀두 부분만 들어왔는데도 내부가 꽉 차는 압박감에 지훈은 숨이 턱 막혔다. 나중엔 쾌감이 더 크다는 걸 알지만 시작할 때의 고통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처음에 뭣도 모르고 할 때보다 오늘이 더 아팠다. 이미 아플 걸 알고 있어서 그랬던 걸까? 지훈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다 한 방울이 그만 또르르 흘러 버렸다. 지훈은 쪽팔려서 고개를 휙 돌려서 침대 시트에 눈물을 닦으려 했다. 물론 호준은 그걸 놔둘 생각이 없었다. 팔을 뻗어 지훈의 눈가를 엄지로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미안해.”

말하는 목소리나 닦아 주는 손길은 너무 다정했는데 그렇다고 아래에 넣은 거대한 걸 빼거나 하진 않았다.

“빨리……. 그냥 빨리 해요.”

호준은 미안하긴 했는지 고개를 숙여 지훈의 입에 진득하게 키스하고 나서야 남은 성기를 마저 지훈의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이 단단하게 꽉 들어찬 느낌에 지훈이 호흡을 거칠게 내쉬었다. 호준은 이를 악물더니 못 참겠는지 거친 신음과 함께 허리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아앗!”

지훈이 밀려 들어오는 고통에 시트를 감싸 쥐었다. 호준의 허리 짓에 몸이 자꾸 뒤로 밀렸다. 호준은 그런 지훈의 손을 꽉 붙잡았다. 지훈은 다른 손으로 호준의 등을 붙잡았다. 아플 때마다 때리려 했지만 정작 너무 아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아…… 하윽!”

호준이 허리를 점차 빠르게 움직이자 지훈도 점점 흥분했다. 지훈의 내벽은 호준의 성기에 눌리고 쓸리며 예민한 부분이 반복적으로 자극되었다. 점차 차오르는 쾌감에 지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몸 안쪽에서 시작된 쾌감은 허리를 타고 올라 머리끝까지 닿았다. 몸이 뜨거웠다. 호준의 성기가 민감한 지점을 쑤셔 댈 때마다 지훈은 강한 자극에 헐떡이면서 거친 신음을 뱉었다.

호준의 움직임도 가팔라졌다. 정신없이 허리를 쳐올리느라 숨을 헐떡였다. 간간이 짐승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움직임에 맞춰서 지훈의 몸도 흔들렸다. 자극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접합부에서 나는 질척이는 소리와 살이 철벅이며 맞부딪치는 소리가 두 남자의 거친 신음과 뒤섞여 방 안을 채워 갔다. 오로지 욕망에 휩싸여 몸을 가쁘게 움직였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가빴다.

거친 움직임에 두 사람의 몸이 달아올랐다. 잔뜩 힘이 들어간 호준의 등과 몸통에서 땀이 타고 흘러 지훈의 더워진 살갗에도 한두 방울 떨어졌다.

몸이 속절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지훈이 팔을 뻗어 호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호준이 허리를 쳐올리면서도 몸을 숙여 그런 지훈에게 응해 주었다.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고르면서 호준은 자세를 바꿔 지훈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호준의 다리 위에 걸터앉은 채로 지훈은 호준을 마주 보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호준의 얼굴을 향해 지훈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더니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호준의 체향을 잔뜩 코로 들이켰다. 호준은 지훈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허리 움직여 봐.”

“흐응…….”

지훈이 피식 웃으면서, 여전히 호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조금씩 허리를 들어 올렸다. 조금 들어 올렸다가 하강하자 호준의 굵고 긴 성기가 더 깊숙이 지훈의 안쪽까지 들어왔다. 입구가 쓸리는 자극에 지훈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발가벗은 몸이 너무 더웠다. 지훈은 허리를 조금씩 더 움직였다. 호준이 한 손으로는 지훈의 허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훈의 성기를 붙잡았다.

“아흑…….”

지훈이 못 참겠다는 듯 허리를 비틀면서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더 깊숙이 수직으로 들어오는 호준의 성기는 더 깊은 곳까지 자극했다. 앞쪽에서는 호준의 손에 문질러지는 성기가 말간 체액을 흘려 댔다. 호준의 손이 질척하게 젖어 버릴 정도였다. 지훈의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호준도 성기가 조여지는 압박감을 못 참고 헐떡였다.

허리를 계속 움직이면서 고개를 들어 호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새빨갛게 욕망으로 달아오른 얼굴은 오로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지훈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단순한 오르가슴을 향하는 게 아닌, 쾌감을 함께 공유하는 섹스라는 행위가 이렇게까지 황홀하다는 건 호준이 처음 알려 주었다.

“아……. 너무 좋아.”

지훈이 호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지금 하는 섹스가 좋다는 건지 호준이 좋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준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눈이 반쯤 풀려서 헐떡이는 지훈이 너무 예뻤다. 호준은 지훈의 입술을 물어뜯을 것처럼 살짝 씹어 댔다. 그러고는 자세를 조금 바꿔 아래에서 허리를 퍽퍽 쳐올리기 시작했다. 살이 닿는 소리가 질퍽하게 방 안에 퍼졌다.

호준이 너무 퍽퍽 쳐올려서 곧 지훈은 허리를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훈은 마주 보고 허리를 세운 채로 호준의 몸에 매달렸다. 호준의 성기는 아래에서 위로 지훈의 내벽을 퍽퍽 쑤셨다. 지훈은 성기를 호준의 배에 문지르며 헐떡였다.

“아! 아아! 아!”

지훈이 더는 못 참겠는지 숨넘어가는 신음을 내지르더니 허리를 비틀었다. 호준은 재빠르게 지훈의 성기를 훑었다. 잔뜩 자극받은 성기는 곧바로 진한 정액을 벌컥벌컥 토해 냈다. 차오르는 쾌감에 지훈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내벽이 확 조이면서 호준을 자극했다. 절정으로 치닫느라 홍조를 띤 채로 일그러뜨린 지훈의 얼굴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호준도 마지막 스퍼트를 내다가 거친 신음과 함께 절정을 맞았다.

“헉…… 헉…….”

쾌감의 여운 때문에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호준은 지훈을 눕히고 자신도 그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어느새 침대 밑으로 떨어져 버린 이불을 끌어 올려 지훈에게 덮어 주었다.

잠깐 숨을 고르던 지훈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몸을 벌떡 일으켜서는 이불과 침대 시트, 베개 커버까지 죄다 확인했다.

“아니구나. 다행이다.”

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하도 크게 내쉬어서 호준이 의아해했다.

“뭐가요?”

“혹시 펭귄 친구 이불일까 봐 걱정했거든요.”

이불과 시트는 그냥 흰색이었다. 하지만 호준은 지훈의 반응에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누운 지훈은 그런 호준을 흘겨보았다.

“펭귄 친구 이불도 있긴 있는 거죠?”

“지훈 씨는 못 찾을 거예요.”

호준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지훈은 마빡을 쳤다. 이 인간, 그 망할 펭귄 새끼 이불을 안 덮을 리가 없지! 어젯밤에 전화로 지훈은 행여 펭귄 팬티랑 펭귄 잠옷이 집에 있으면 다 불태워 버릴 거라고 예고했었다. 그 말 듣고 호준이 이불도 치운 게 분명했다.

“왜요, 내가 이불도 불태워 버릴까 봐?”

“그러지 마요.”

호준이 사뭇 진지했다.

“나 있는 동안엔 덮을 생각 하지도 마요. 진짜.”

“그 친구 왕년에 어린이들의 대통령이었는데 너무 탄압하는 거 아닌가요…….”

호준은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훈은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이 서른셋에 펭귄 친구 캐릭터에 저렇게까지 진심이라니. 사실 펭귄 친구의 캐릭터 상품은 팬티와 잠옷만 아니면 별 상관 없었는데, 그냥 지훈은 호준을 놀리는 게 재밌었다.

“전 대통령은 원래 감옥 가잖아요.”

“어린이 대통령은 예외라고요. 동심을 지켜 줘요.”

솔직히 방금 전까지 어른들의 놀이를 실컷 해 놓고 할 소린 아니었다.

“아니, 사무관님은 어린이도 아니면서 만화 캐릭터가 그렇게 좋으냐고요.”

“지훈 씨가 더 좋아요.”

“그럼 나 다음으로 그 펭귄 새끼가 좋은 거예요?”

“그만 물어봐요.”

지훈과 옥신각신하면서도 호준은 지훈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돈해 주었다. 실은 그냥 그 핑계로 얼굴을 계속 쳐다보는 거였지만. 지훈도 그 느낌이 좋아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한참 그렇게 숨을 고르다가, 문득 호준이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좀 걱정했어요.”

“뭘요? 내가 펭귄 놈 이불 발견할까 봐요?”

“그것도 그런데……. 지훈 씨가 갑자기 저 싫다고 할까 봐요.”

지훈도 호준의 걱정을 이해했다. 지금의 감정이 여행에서 받은 일시적인 느낌의 연장선상일 수도 있었으니까. 빠르게 찾아온 마음은 또 빠르게 식어 가는 법. 오랫동안 지훈을 좋아해 온 호준의 입장에서는 걱정할 일이기도 했다. 물론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지훈이 적극적이었지만.

“싫었으면 아까 그렇게 쌌겠냐고요.”

지훈이 투덜거렸다. 도대체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절정에 이르던 지훈의 표정을 기억해 내다가 호준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한동안 기억에 오래 남을 정도로 자극적인 표정이었다. 호준의 손에 흘러내리던 지훈의 진득한 정액도 자극적이었다.

“미안해요. 이제 아닌 거 알아요. 그냥 오늘 만나기 전까지 좀 걱정했어요.”

“내가 며칠 지났다고 맘 바뀌었다고 할까 봐요? 해 보니까 좀 아니었다고 할까 봐?”

“…….”

정곡을 찔린 호준이 순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골이 아파진 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지훈도 그런 고민을 했던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솔직히 저도 긴가민가했는데, 아까 기차역에서 사무관님 얼굴 보니까 그냥 되게 반갑고 좋았어요. 솔직히 보자마자 덮치고 싶기도 했지만, 데이트하자는 얘기도 좋아서 그냥 있었지만요. 사무관님이랑 같이 데이트하는 것도 좋았고 섹스도 여전히 좋았어요. 진짜 지구의 자기장이 고장 났나 봐요. 근데……. 계속 고장 나 있지 않을까요?”

“그것참, 계속 고장 나서 다행이에요.”

호준이 실실 웃으면서 지훈의 볼에 입을 맞췄다. 호준이 가볍게 입 맞추고 입술을 떼려는 걸, 지훈이 호준의 턱을 붙잡아 한 번 더 키스했다. 말랑말랑한 입술은 여전히 달았다.

잠깐만 하려던 키스는 하다 보니까 다시 깊어졌다. 서로의 입안이 너무 달았다. 계속 맛보고 탐하고 싶었다.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몸이 더워진 지훈은 누워 있던 호준의 허리 위를 타고 올라가서 키스를 이어 갔다.

지훈의 손이 무심코 호준의 탄탄한 가슴팍에 닿았다. 그대로 한참을 머무르며 탄력 있는 가슴을 주물러 댔다. 두 사람의 몸은 다시 더워졌다. 지훈은 자신의 허벅지에 닿는 호준의 단단한 성기를 다시 느꼈다. 호준도 아마 배에 닿는 지훈의 성기를 느낄 것이다. 두 사람 다 방금 전의 정사가 무색할 정도였다.

지훈이 못 참겠는지 입술을 떼어 냈다.

“저, 사무관님. 진짜 한 번만 빨아 보면 안돼요?”

“뭘요?”

“가슴이요…….”

지훈이 괜히 호준의 눈치를 보면서 손으로 가슴과 유두를 한 번씩 훑었다. 딱딱해진 유두 끝을 굳이 손가락으로 붙잡고 있었다. 호준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켜 자신을 타고 앉아 있는 지훈의 허리춤을 잡았다.

“나야 좋긴 한데……. 일단은 좀 씻고 할까요?”

“나 또 섰는데요? 한 번 더 하고 씻으면 되잖아요.”

호준이 지훈의 탱탱한 엉덩이를 톡톡 치면서 속삭였다.

“씻으면서 하는 방법도 있거든요.”

같이 씻는다는 말에 지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화장실에 콘돔 들고 가요?”

“말했잖아요. 엄청 많이 사 뒀다고.”

호준이 쑥스러워하면서도 알몸인 지훈을 그대로 안아 올려서는 욕실로 데려갔다. 지훈이 보조개를 네 개 다 빛내면서 호준에게 매달려 얼굴에 뽀뽀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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