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오로지 순댓국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호준은 평소보다 더 맹렬하게 일했다. 사무실의 시계가 6시를 가리키자마자 곽 과장이 술 한잔 하자고 말하기도 전에 총알같이 청사 밖으로 튀어 나갔다. 푹 자고 일어났는지 얼굴이 뽀얘진 지훈이 순댓국집 앞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엔 물기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유난히 말끔해 보였다.
“어디 갔다 왔어요?”
“저 앞에 있는 찜질방이요. 황토 방에서 한숨 잤어요.”
찜질방에서 푹 쉬고 온 지훈은 말 그대로 훨씬 상태가 좋아 보였다. 물론 지훈은 충동적으로 밥 먹자고 말한 자신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어서 찜질방에서 괴로워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하필 메뉴도 순대국밥이 뭐람. 물론 순대국밥이 맛있긴 한데 데이트 메뉴로는 영 아니었으니까.
얼큰한 메뉴 때문에 호준이 순수하게 밥 먹자는 의미로만 받아들일까 봐 그것도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바꾸자니……. 여행 내내 기름진 것만 먹었더니 얼큰한 국밥을 먹고 싶었던 지훈은 그냥 순대국밥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추어탕으로 바꿀까? 아니면 설렁탕?
하지만 지훈이 생각을 하는 와중에 호준이 냉큼 순대국밥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훈은 하는 수 없이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까 그렇게 좀비 같았어요?”
“확실히 살아 있는 건 아니었죠.”
“시체한테 딱밤 맞을래요?”
능글거리는 호준을 보니 마치 우루과이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어째서 한국에 돌아왔는데도 우주의 기운은 회복되지 않는 것일까. 설마 얼레리꼴레리를 했기 때문은 아니겠지. 정호준이 그 짓을 너무 잘해서 우주의 기운까지 막아 버린 것이면 어쩌지? 한국에서도 얼레리꼴레리를 해 보면 알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호준은 아까 봤을 때보다 사람이 더 찌들어 있었다. 양심상 야근으로 시달리는 사람 붙잡고 한판 뜨자고 하기도 좀 뭣했다. 아무튼 지훈은 호준 앞에서 순댓국을 주문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전 내장 많이 주세요.”
혼란스러운 것치고 지훈의 주문은 자연스러웠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혹시 부족하면 한 그릇 더 주문해요.”
호준은 지훈이 순대국밥을 달랑 한 그릇만 주문하는 걸 보고 괜히 걱정했다. 사실 지훈은 뜨거운 불가마 속에서 내면의 기운을 정화했던 터라 약간 허기가 진 상태이긴 했다.
“수육도 주문하면 안 돼요?”
“대짜로 시킬게요.”
“그러지 말고 소짜로 주문하고 대신 모둠 순대도 추가해요.”
지훈의 야무진 주문에 식당 직원이 놀라서 단둘이서 먹는 것이 맞느냐고 재차 확인했다. 마빡이 아픈 건 호준인데 어째 비타민 F는 지훈이 더 섭취하게 생겼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우루과이에서와 별다를 것 없는 대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밥에만 정신이 팔려 둘 다 그 사실을 자각 못 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호준이 문득 다른 테이블에 앉은 남자를 향해 손을 잠깐 흔들었다. 그걸 본 지훈이 괜히 눈치를 봤다.
“아는 사람이에요?”
“동기 사무관이라서 인사했어요. 여기 청사 근처잖아요.”
“대박. 그럼 저랑 여기서 밥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호준과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괜히 불안한 지훈이었다.
“김 대리 저랑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냥 같이 일한 사이잖아요. 그리고 설사 내가 여기서 김 대리랑 뽀뽀해도 다들 의심 안 해요.”
호준은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 지훈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호준의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뒤에 이어진 말이 더 충격이라 금방 까먹어 버렸다.
“어떻게 그래요! 다들 바보예요?”
“둘 다 남자면 사귀는 거라고는 상상조차 안 하더라고요. 그냥 절친인 줄 알걸요. 누가 뭐라 그러면 술 한잔 했다고 하면 돼요.”
하긴 저번에 본부 전체 회식할 때 최 팀장도 술 먹고 옆 테이블까지 달려가서 절친한 담배 친구인 박 팀장한테 뽀뽀한 적이 있었는데 다들 그거 보고 더럽다고 욕만 하고 말았다. 지훈은 새삼 이성애 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저력을 실감했다. 자기도 얼마 전까지는 그중 하나였지만.
잠깐, 설마 최 팀장하고 박 팀장, 비밀 연애 중 아냐? 둘 다 가정이 있는데? 설마 불륜? 어쩐지 맨날 붙어 다니던데? 둘 다 남자라서 아무도 의심 안 하지만 어쩌면 그렇고 그런 사이일지도 모른다! 사실 누가 봐도 그냥 절친한 아저씨들 같지만……. 남자 상사랑 얼레리꼴레리까지 한 지훈은 이제 순수한 마음으로는 그 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두 팀장님 담배 피우러 나간다면서 설마 담배 안 피우는 거 아냐? 눈뜬장님은 설마 지훈 본인이었을까?
“저 방금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는데요. 아니, 말 안 할게요.”
“네. 말하지 말아요. 서로 보고도 모르는 척해 줘야죠. 불륜이 아닌 이상.”
게이 경력 20년이 다 되어 가는 호준이 따끈한 수육을 집어 먹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혹시 불륜 같으면요?”
지훈이 야무지게 무절이에 수육을 싸 먹으며 말했다. 지훈은 꽤나 배가 고팠는지 우루과이에서 소고기 먹을 때처럼 맹렬하게 먹었다. 호준은 일부러 천천히 먹었다.
지훈은 어쩌면 고기를 보면 이성을 잃는 타입일지도 모른다.
호준은 무심코 지훈에게 오늘처럼 고기를 사 먹이려면 자기가 월 얼마를 더 벌어야 하는지 계산해 보았다. 수당은 얼마나 더 받아야 하고 야근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걸까. 말은 안 했지만 이미 우루과이에서 지훈의 식대로 긁은 카드값과 우루과이 왕복 비행깃값 할부가 엄청났다. 호준의 공무원 생활 중 최대의 경제 위기였다.
지훈이 청사로 파견 온다고 하니 못해도 가끔 얼굴은 볼 것 같은데, 그때마다 고깃값은 어쩌나 싶다. 물론 지훈은 아주 귀엽고 잘 먹으니까 많이 사 주고 싶긴 한데, 솔직히 먹는 양이 장난이 아니니까. 물론 호준은 자신이 지훈의 앞에서 또 지갑을 열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큰일이네요…….”
“그렇죠. 둘 다 결혼을 했는데……. 불륜이면 큰일이죠.”
호준의 혼잣말을 오해한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호준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 불륜이요. 그런 사람들 꽤 있습니다. 결혼은 해 놓고 연애는 계속 남자랑 하는.”
“이상하네. 그럴 거면 결혼 안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데 많이들 그럽니다. 대를 잇는다나 어쩐다나. 저는 그럴 거면 이혼하라는 주의이긴 한데요.”
호준은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지훈은 팔을 괴며 그런 호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무관님도 혹시 대를 이어야 하는 처지인가요? 불가피하게 결혼을 해야 한다거나?”
“아닙니다. 어머니도 제 성 지향을 알고 계세요. 대는 뭐 형이 잇겠죠.”
그럼 아버지는 모른다는 건데? 호준의 말을 듣던 지훈은 작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얘길 굳이 안 하는 데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남의 가정사를 캐고 싶진 않아서 지훈은 더 묻지는 않았다. 아무튼 호준이 대를 이을 필요는 없다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걸 왜 자기가 다행스러워하는지 지훈은 자각 못 하고 있었지만.
“그럼 어머니가 좀 아쉬워하지 않으세요?”
지훈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물었다.
“제가 어머니 성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라서 어머니는 아쉬울 게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여자랑 결혼을 해 봤자 어머니의 대를 잇는 게 아니잖아요.”
지훈은 호준의 어머니가 다른 의미로 범상치 않은 사람일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대신 사무관님이 정씨인 걸 아쉬워하시겠네요.”
“그러게요. 그건 좀 아쉬워하셨던 것 같아요. 옛날엔 어머니 성을 따를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김 대리 집안은 누나가 대를 잇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훈의 집안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가모장제였다. 외할머니의 외할머니로부터 내려져 온 돼지갈비 양념 비법은 당연히 누나가 이어받을 예정이었다. 출가외인인 지훈이 평생직장 취직에 필사적인 이유였다.
“네. 조카부터는 누나 성을 붙일 거래요. 외할머니가 법 바뀐 거 알고 동네잔치 하셨어요. 메뉴는 또 돼지갈비였지만.”
“외할머니가 정말 좋아하셨겠어요.”
지훈은 통상적이지 않은 호준의 사고방식이 흥미로웠다. 별명은 일등 신랑감인데 이렇게까지 결혼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지훈은 그런 호준이 오히려 편했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마다 느끼는 갑갑함이 없었다.
“그나저나 아쉽네요. 야근만 아니었으면 소주 한 병 까는 건데. 지금 이거 딱 안주상인데…….”
얼큰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마시더니 호준이 아쉬움을 표했다. 소주 한잔을 부르는 맛이었다. 그런 호준의 표정을 보며 지훈은 호준이 우루과이에서 술병이 날 정도로 마셔 대던 사람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다만 자기 말마따나 인내심이 대단해서 누구보다 잘 참을 뿐이다.
“사무관님은 밥만 먹고 빨리 들어가 봐야 하는 거죠? 일 많다면서요.”
“밥 먹고 바로 일하면 체해요. 소화시켜야 되니까 산책은 해야죠. 오늘 날씨도 좋은데요.”
호준이 능청을 떨자 지훈이 피식 웃었다. 저 인간 바쁘다면서 할 건 다 하고 있었다. 굳이 지훈 때문에 시간을 내는 거겠지만. 또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표를 세워 놓고 나왔을 테니까 별로 걱정은 안 됐다. 지구 반대편에서만 잘해 주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한국에 돌아와서도 일 얘기 할 때 빼고는 마찬가지였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보다. 일할 때 보면 하도 좀생이 같아서 연애할 때도 그럴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였다. 여태 계속 일하면서 만나느라 자세히 알아볼 여력이 없었던 것뿐. 행여 작정하고 계속 만나게 되어도 계속 잘해 줄 사람이라서 지훈은 자꾸 마음이 동했다. 그냥 계속 만날까? 어차피 여기로 파견 오면, 층은 다르다지만 맨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실은 계속 고민 중이었다.
* * *
순댓국에 수육과 모둠 순대까지 걸게 먹어 치우고 깨끗하게 비운 지훈과 호준은 직원의 감탄을 받았다. 하도 많이 먹은 터라 금액이 커서 한 사람이 몰아서 내면 접대로 의심받는다는 지훈의 주장하에 반반 계산했다.
두 사람은 후식으로 지훈의 취향인 과일 음료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그러고는 소화를 시켜야 한다며 호준의 차를 타고 태종시 변두리에 있는 공원 끝자락으로 향했다. 산책한다기에 근처의 공원에나 갈 줄 알았더니 한참을 멀리 오자 지훈은 호준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여기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안 그럼 아까처럼 아는 사람 잔뜩 만납니다.”
“아까는 대놓고 뽀뽀해도 다들 뭐라 안 한다면서요.”
“여긴 다르죠. 공원에서 단둘이 걷다가 뽀뽀하면 누가 봐도 데이트잖아요.”
호준의 말을 들은 지훈의 콧구멍 평수가 넓어졌다. 식당에서 뽀뽀하면 우정이고 공원에서 뽀뽀하면 데이트인 건 어느 나라 법인데? 정말 대한민국이 그렇게까지 편협한 나라인가? 하지만 최 팀장과 박 팀장에 공원에서 뽀뽀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수상쩍어지는 그림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훈도 이성애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타고난 DNA는 어쩔 수 없었다.
잠깐, 그럼 뽀뽀만 하면 지금 이것도 데이트라는 거잖아? 졸지에 데이트를 하게 되어 버린 지훈은 또 걱정되었다. 우리가 데이트할 사이인 건가? 이거 완전히 연애하는 거 같잖아! 서로 모르는 척하기로 한 거 맞아? 지금 할 거 다 하는데? 나만 모르는 척하는 거 아냐? 물론 애초에 먼저 순댓국 먹자고 한 시점에서 이미 늦었는데 지훈만 모르고 있었다.
호준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태종시를 관통하는 강변을 따라 조성된 공원의 끝자락이라고 했다. 인적이 드물어서 사람들이 자주 찾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가로등이 고장 났던 게 얼마 전에야 수리되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른단다. 가끔 몰래 담배 피우러 오는 불량 고등학생들 말고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이렇게 대놓고 으슥한 곳에 사람을 데리고 오다니. 호준의 의도는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근데 김 대리, 이제 파견 나오면 지낼 곳은 어떻게 할 겁니까?”
“잘 모르겠어요. 지금 사는 원룸 계약이 아직 석 달이나 남아서 돈을 더 내야 하거든요. 보증금도 그때까지 묶여 있고요. 그리고 어차피 당장 다음 주까지는 집 못 구할 것 같으니까 며칠 동안은 호텔에서 지내려고요…….”
“사실 김 대리만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그때까지 지내도 괜찮아요. 봐서 알겠지만 빈방 있으니까요.”
그 말에 지훈은 호준의 럭셔리캐슬스테이트시티 아파트를 떠올렸다. 태종시 최고 매매가를 자랑하지만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호준의 집은 무소유의 정신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철학적인 공간이었다. 경비원은 좀 수상하지만 맛대가리 없는 유기농 브로콜리를 듬뿍 넣은 죽을 몇 번 더 갖다 주면 깊은 오해를 풀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일단 객관적인 조건 자체는 땡큐였다.
물론 정호준과 같이 산다는 점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반쯤은 농담으로 지훈이 물었다.
“저 진짜 들어가도 돼요?”
“시세보다 낮은 월 20만 원 정도에 해 줄게요.”
당연히 공짜일 줄 알았는데! 호준의 뻔뻔한 돈 얘기에 지훈이 기겁을 했다.
“공무원이 돈 받아도 돼요? 그리고 무슨 달랑 방 하나에 월 20만원이에요!”
“저는 맨날 야근하느라 잠만 자고 나오니까 김 대리 혼자 거실이랑 부엌 다 써요. 냉장고도 다 써요.”
“돈도 내고 지내는데 혼자 심심하게 독수공방까지 하라는 거예요? 별로다, 진짜.”
쿨럭! 쿨럭쿨럭!
이번엔 독수공방이라는 말에 호준이 기겁을 했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침을 잘못 삼켰는지 자기 혼자 사레 걸렸다. 심하게 걸렸는지 걷지도 못하고 주저앉아서는 기침을 해 댔다. 사람이 작은 돈에 욕심을 부리니까 이렇게 또 자기 침 삼키다가 사레 걸리는 천벌을 받는 것이다.
지훈은 기침을 도와준답시고 잠깐 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어쩐지 넓은 호준의 등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우루과이에서 등짝 스매싱을 겁나게 날렸던 것도 생각났다. 그땐 토하는 거 도와준다는 핑계로 때렸는데. 지금은 어차피 기침하는 거 도와주는 거잖아? 게다가 방 한 칸 내어주면서 돈도 월 20만 원이나 받겠다는 게 괘씸하기까지 하다. 전에 때렸던 등짝 스매싱은 거의 다 나았을 것 같다. 그러면 또 새로운 고통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온 세상의 오만 핑계가 다 호준의 등짝을 때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지훈은 숨을 한껏 고른 뒤에 기침이 잦아들어 가는 호준의 등판에 또 힘차게 스매싱을 날렸다.
“아악!”
별안간 또 얻어맞은 호준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지훈을 흘겨보았다. 기껏 시간 내서 순댓국도 먹고 후식도 사 주고 산책도 하는데 별안간 등짝이나 얻어맞았다. 여느 때보다도 보람 없는 하루였다. 호준은 애초에 허술하게 등을 내보인 자기 잘못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렇게 허구한 날 등짝이나 맞다간 비타민 F로 마빡을 회복해 봤자 소용이 없다.
“아파요!”
너른 마음으로 맞아 주기에 지훈의 손바닥은 정말 고통스러웠던 호준이 우는 소릴 했다.
“그러게 누가 빈틈을 보이래요. 등짝을 보니까 자꾸 때리고 싶네.”
“월세 면제해 주면 안 때릴 건가요?”
등짝 스매싱의 고통에 그만 눈가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호준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지만 지훈도 매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돈을 낼게요.”
“농담한 겁니다. 돈을 어떻게 받아요. 그냥 지내요. 등짝도 그냥 공짜로 때리고.”
호준은 때리라고 말하는 지점에서 잠깐 주저하는 것 같았지만 지훈은 무시했다.
“그건 좋은 조건이긴 한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저요?”
“네.”
집은 문제가 없었다. 집주인이 문제였다. 물론 집주인도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럼 김 대리가 방 구하는 거까지만 도와줄게요. 여기 아직도 부동산 떴다방 많아서 조심해야 돼요.”
같이 지내자고 제안한 건 그냥 지훈의 편의를 생각해서 던져 본 말이었는지 호준은 더 강요하진 않았다.
역시 집주인이 문제였다. 저 인간은 삼국지도 안 읽은 게 틀림없었다. 게임과 만화로 삼국지를 배운 지훈은 화가 났다. 제갈공명보다 귀한 자신을 집에다 모시려면 삼고초려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두 번쯤 거절하다가 세 번째쯤에 마지못해 승낙할 작정이었던 지훈은 짜증이 났다.
정호준의 이런 점이 좋으면서 싫었다. 사람이…… 맺고 끊는 걸 너무 잘했다. 아니, 맺는 건 못하는 것 같은데 끊는 것만 기가 막히게 잘했다. 도무지 밀당이 안 된다. 밀어내면 그대로 밀려나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지금 호준이야말로 지훈을 열심히 당겨야 하는 입장 아닌지? 지훈은 또 자기가 당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안 그럼 서로 영원히 우주 끝과 끝으로 밀려나게 생겼다.
우루과이에서도 자기가 더 급한 주제에 정작 내가 키스하고 섹스하자고 매달렸잖아. 나 좋다고 한 건 정호준인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오늘도 순댓국 먹자고 했으면 다음은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냐? 눈치는 지구 반대편에 두고 온 건가? 아쉬운 사람은 저 인간인데 왜 내가 맨날 당겨야 하느냔 말이다.
자기가 먼저 호준의 제안을 거절해 놓고는 열 받은 지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걸 들어 버린 호준이 걸음을 멈췄다.
“뭘 맨날 당긴다고요?”
“같이 사는 거 그냥 한 번 더 물어보면 안 돼요?”
“네?”
“사무관님이 그러니까 등짝을 계속 맞는 거예요. 두 번은 더 물어볼 수 있잖아요! 사람이 왜 그래요. 내가 오늘 피곤해 죽겠는데 굳이 순댓국도 먹자고 했잖아요!”
지훈의 말에 호준이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오늘 하루 종일 애매모호하고 지지부진한 지훈을 상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지훈이야말로 적반하장이었다. 오늘 누가 더 말 안 하고 티만 내는지 내기하는 날이었나?
“그래서 지금 산책도 왔고 같이 지내자고도 했잖아요. 근데 싫다면서요.”
“독수공방하라니까 그렇죠!”
“그건 농담이잖아요! 나 때문에 거절했다는데 어떻게 또 물어봅니까?”
호준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훈도 나름대로 할 말이 많아서 참지 않았다.
“사무관님과의 관계가 애매모호하고 지지부진하니까 당연히 같이 못 지내죠! 섹스까지 해 놓고 모르는 척하는 상태인데 어떻게 같이 살아요!”
지훈의 말에 호준은 억울했다. 여행을 끝내면서 그렇게 하자고 신신당부를 한 건 다름 아닌 지훈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모르는 척해 주고 있었는데 정작 지훈이 나서서 하루 종일 사람을 들쑤셨다.
“여기서 그건 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거 당장 취소예요. 사람 마음이 스위치처럼 껐다 켜는 게 아닌데 그게 되겠냐고요! 그렇게 염병 첨병을 떨어 놓고는 없던 일로 하는 게 더 어렵네요!”
그 문제로 며칠을 고민하고 오늘 하루 종일 또 고민했건만. 고민한 보람도 없이 이렇게 홧김에 취소해 버릴 줄은 김지훈 본인도 몰랐다. 열이 뻗친 채로 듣고 있던 호준도 갑작스러운 지훈의 선언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 이제 와서 있던 일로 하자는 겁니까?”
“사무관님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마음 정리도 바로바로 되겠지만 나는 못 해요! 한국 와서도 계속 신경 쓰인다고요! 이제 와서 이런 말 해서 웃긴 거 저도 아는데, 저 사무관님이 너무 좋아졌…….”
호준은 더 들을 것도 없이 지훈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바로 입을 맞췄다. 이번에도 지훈은 호준의 예상 밖이었다. 벌써 모든 스텝을 다 뛰어넘고는 저 멀리서 호준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없던 일도 아니고, 있던 일로 하자는데 굳이 더 참을 필요는 없었다. 실은 오늘 하루 종일 참고 있었으니까. 지훈이 오늘 밥 먹자고 할 때부터 호준은 예상했었다. 우루과이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는 척하기는 자기의 인내심으로도 더 이상 어려울 거라고. 그런데 지훈이 얼떨결이지만 대놓고 말해 주니까 정말로 참기 어려웠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호준은 이제 지훈을 절대 놓고 싶지 않았다. 카드값이야 어떻게 되든 맨날 소고기 사 주고 싶었다. 호준은 지훈을 온몸으로 꽉 끌어안고 진하게 키스했다.
호준이 달려들자 처음엔 당황하던 지훈도 곧 호준에게 매달렸다. 팔을 목에 감고 설왕설래하면서 적극적으로 지훈이 매달리자 호준도 지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마음 정리 한다는 거 거짓말이에요. 저도 못 해요. 지훈 씨 계속 좋아할 겁니다. 이제 절대 못 놓아요.”
잠깐 입술을 뗀 호준이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드디어 호준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들은 지훈의 얼굴에 네 번째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자기도 내심 이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는 걸, 지훈은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깨달아 버린 몸과 마음은 한국에 돌아왔다고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주의 기운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지구 어디서라도 여전히 이 남자가 좋았다. 그리고 이 남자가 자길 이렇게까지 격정적으로 좋아해 주는 것마저 좋았다.
격렬하고 다급하게 부딪쳤던 입술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곧 진득하고 질척해졌다. 며칠 동안 익숙해진 입안을 탐색하는 혀 놀림은 상대방을 맹렬하게 공격하다가 곧 둘만의 엎치락뒤치락으로 흘러갔다. 나흘을 넘게 참았던 터라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누듯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집중하다가 잠깐 숨 쉬는 걸 까먹은 지훈이 헐떡거릴 즘에야 호준이 입술을 뗐다. 하도 서로 비벼 댄 탓에 입술이 부어올라서 민망할 정도였다.
“하아. 그렇게 갑자기 키스하면 어떡해요. 놀랐잖아요.”
먼저 혀 마중 나온 사람치고는 다소 뻔뻔한 투덜거림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참아요. 너무 좋아서 못 참겠어요.”
“사무관님 인내심이 강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어이! 정 사무관! 여기 웬일인가!
호준이 자신의 성급함을 변명하기도 전에 아득한 곳에서부터 구수하고 수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준은 사색이 되더니 재빠르게 슈트 윗옷을 벗어 지훈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우 국장님입니다. 진짜 미안한데, 저기 벤치 뒤로 숨어요!”
호준이 속삭이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지훈은 얼른 벤치 뒤 어두운 풀숲 사이로 숨었다. 국장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호준은 뒤로 한참 물러나서야 둔덕 위에서 성인병 예방을 위해 저녁 조깅 중인 건강한 국장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지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구, 국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하하…….”
호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사람 좋은 국장님은 오지랖도 좋아서 문제였다. 오늘 국장이 뭔가를 봤다면 필시 내일 온 동네에 소문 다 난다.
“나야 요 옆에 아파트 사니까 운동하러 나왔지! 정 사무관은 반대편 살지 않나?”
맙소사. 국장님 이 아파트 사는구나. 하필……. 호준이 고른다고 고른 장소가 호랑이 굴이었다. 다시는 이곳에 안 오리라 결심하는 호준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쩐지 사람이 잘 없는 곳엔 이유가 있었다. 국장님 출몰 지역이었다니. 다들 국장님 조깅 코스를 알아서 이곳에서의 데이트를 피하는 거였는데 다른 구역 주민인 호준은 미처 몰랐다.
“여기 가로등이 수리되었다기에 한번 와 봤습니다! 하하…….”
호준의 궁색한 변명에 국장님은 사람 좋게 웃었다.
“이 사람아. 가로등 수리된 지가 언젠데! 하긴 여기가 으슥하니 데이트하기 좋긴 하지. 저 아파트 위에서는 다 보이긴 하지만 말이야, 하하! 아무쪼록 좋은 시간 보내고 너무 싸우지들 말게!”
“예?”
호준의 얼굴이 다시 파랗게 질렸다. 대체 어디까지 보신 거야?
“그나저나 만나는 사람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지 그랬나!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일등 신랑감하고 딱 맞을 선 자리를 알아보고 다녔구먼!”
“아, 아닙니다. 자세한 건 내일 보고드리겠습니다.”
호준은 자기가 말하면서도 헛소리라는 걸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긴장해서 입에서 망발이 튀어나왔다.
“보고는 무슨. 됐어! 나중에 청첩장이나 보내게!”
“예! 예? 국장님……. 저기, 아무튼 살펴 가십시오!”
국장님은 다시 둔덕 위의 길을 따라 조깅하며 떠나갔다. 호준은 행여나 국장님이 뒤라도 돌아볼까 봐 국장님의 자그마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국장이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즈음 되어서야 긴장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 씨발.”
욕까지 하는 걸 보니 정말 놀란 듯했다. 지훈은 벤치 뒤에서 다시 기어 나와 슈트 재킷에 붙은 풀벌레들을 열심히 털어 냈다.
“여기 아무도 없다면서요.”
지훈이 정색하며 물었다. 아무도 없다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키스까지 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국장님이 근처에 사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엔 새로운 장소 확보해 둘게요.”
작은 도시에 그런 곳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사람 사는 데니까 찾으면 뭐라도 나오겠지 싶었던 호준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지훈은 잠깐 귀를 의심했다. ‘다음엔?’ 이거 다음에 또 데이트하자는 거지? 하지만 이 동네에서라면 어쩐지 사양하고 싶었다.
“혹시 국장님이 다 본 거 아니에요?”
“모르겠습니다. 대충 보긴 보신 거 같아요.”
“그럼 아까 키스한 것도 봤대요?”
“제가 내일 수습할게요.”
내일 출근하자마자 일이고 나발이고 국장실가서 무릎부터 꿇어야 할 판이다. 이 좁아터진 도시에서 한번 발발한 소문이 동네 슈퍼 사장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이틀이 채 안 걸릴 텐데.
“근데 청첩장 보내라고 한 거 보면 저는 못 본 거겠죠?”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설마 저한테서 청첩장을 받으려고 국장님이 동성혼 법제화를 시켜 줄 생각은 아닐 테고요. 역시 국민 청원을 넣으려는 걸까요? 국민적 합의를 얻어야 하는데…….”
벤치에 겨우 걸터앉은 호준이 헛소리를 해 대는 걸 보니 넋이 나간 듯했다. 이 동네에 그래도 정부 기관이 몇 개고 연구소가 몇 개인데 다름 아닌 같은 부처 국장한테 시작부터 털릴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옆에 앉은 지훈은 풀벌레를 대충 털어 낸 슈트 재킷을 다시 호준의 어깨에 걸쳐 주면서 말했다.
“같이 있던 사람이 남자인 줄 모르면 그냥 애인이랑 데이트했다고 둘러대요. 사무관님이 그랬잖아요. 단둘이 공원에서 뽀뽀하면 데이트라고.”
지훈은 호준이 했던 말을 충실하게 되돌려 주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아까 격렬하게 뽀뽀를 해 버리는 바람에 어차피 데이트가 되어 버린 산책이었다.
“어차피 사무관님한테 애인 있다고 해도 아무도 의심 안 할걸요.”
“정 안 되면 키 크고 늘씬하고 귀엽고…… 힘도 센 미인을 만난다고 해야겠네요.”
“그 힘도 센 미인한테 한번 맞아 볼래요?”
아직 등짝이 아팠던 호준은 지훈의 불끈 쥔 주먹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대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실하게 확인하고는 지훈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지훈은 자연스럽게 호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무튼 엮여서 소문나는 건 저도 사양이에요. 취직도 이제 겨우 했고, 게다가 난 남자랑 만나는 것도 처음인데! 나도 지금 나를 이해하기 힘들다고요!”
자기 생각에 집중하느라 지훈은 자신의 말실수를 눈치채지 못했다. 호준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지훈이 이미 자기랑 자연스럽게 연애 시작 중인 게 귀여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생각한 거야? 사실 순대국밥집에서 혼자 눈치 볼 때부터 귀여웠다.
“왜 웃어요?”
“지훈 씨 너무 귀여워서요.”
“그런 말 좀 그만해요. 나 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사무관님밖에 없거든요?”
“당연하죠. 딴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가만 안 둘 겁니다.”
“딴 사람들 아무도 안 그러거든요? 웃기지도 않아.”
지훈은 호준의 수작에 치를 떨었다. 이런 인간의 별명이 일등 신랑감이라니, 사람들이 몰라도 한참 모른다.
“근데 우루과이에서 있었던 일은 모르는 척하기로 한 거 왜 취소했어요? 설마 화나서 그냥 말한 거예요?”
“쪽팔리니까 물어보지 말아요.”
“왜요. 궁금한데.”
원래 마음의 준비를 한 후에 좀 진지하고 멋있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홧김에 토해 버릴 줄은 지훈도 몰랐다. 호준을 강제로 고백하게 만들었을 때보다 더 황당했다. 결과적으론 잘된 건데 절차상의 문제 때문에 약간 수치스러웠다. 간만에 하는 연애를 이렇게 홧김에 시작해도 되는 것인지. 하긴 처음에 섹스할 때도 안 한다는 말부터 시작했었다. 왜 항상 이 모양일까.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호준도 처음에 펭귄 친구 잠옷을 입고 얼떨결에 고백했다 차였으니까.
“몰라요. 지구 자기장이 고장 났대요.”
역시 지구의 자기장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그렇게 말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우주의 기운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것참 큰일이네요.”
자기 좋다는 말을 굉장히 유사 과학적으로 하는 지훈을 호준이 꽉 끌어안았다.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둘러대는 걸 보니 진심이겠거니 싶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여태 왜 그렇게까지 삽질했나 싶지만, 가끔은 이렇게까지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와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일도 있다. 물론 아무리 먼 길을 돌아왔다고 해도 원래 내년에나 고백할 계획이었던 호준의 입장에서는 지훈한테 머리채 잡혀서 빠르게 끌려온 거였다. 자신이 이렇게 될 줄 한 달 전만 해도 몰랐던 호준은 지금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물론 자기한테 몸을 기댄 채 또 딱밤 때리기 연습을 시작한 지훈은 너무나 현실이었지만. 앞으로 지훈에게서 등짝을 한 백만 대쯤 맞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근데 사무관님 이제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완전 깜깜한데.”
“지구 자기장이 고장 나서 좀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요.”
“너무해요! 놀리지 말라고요!”
“아악! 또 때리면 어떡해요!”
“누가 맞을 짓을 하래요?”
아니다, 이왕이면 지훈이 덜 때렸으면 좋겠다고, 호준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훈과 호준은 결국 그 수상하고 으슥한 공원에서 한참을 더 옥신각신했다. 호준의 등짝과 옆구리가 여러 차례 희생되긴 했지만, 두 사람의 미소와 하늘로 승천하는 광대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지훈은 결국 정규직 취직도 성공했고, 지긋지긋하게 자길 괴롭히던 상관으로부터도 벗어났다. 무려 그 상관과 연애도 시작했다.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앞으로 지훈에게 새로운 수난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훈의 미래는 그리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지훈이 힘들 때마다 옆에서 등짝을 맞아 줄 호준이 있을 테니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