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27)

16.

우루과이에서 한국까지 돌아오는 여정은 순수 비행시간만 34시간이 넘게 걸렸다. 중간에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다음 비행기를 놓칠까 봐 동동거리고 남의 나라 공항을 온통 뛰어다닌 지훈은 한여름 더위에 쉬어 버린 파김치의 상태로 인천 공항에 입국했다. 물론 귀국 후 여섯 시간 만에 바로 출근해야 했다.

아침 일곱 시 반에 홀로 빈 사무실에 출근한 지훈은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데다 여독이 쌓여 너무 피곤했다. 결국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였다. 절대 조기 출근 할 리 없는 팀원들 덕분에 정확히 8시 58분부터 주변이 시끄러워졌지만 지훈은 쉽게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러고도 엎드린 채로 더 잔 것 같았다. 누가 등을 콕콕 찔러 대기에 눈을 떴을 때가 오전 10시경이었다.

“흐아아아아암!”

“김 대리, 깼어?”

지훈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자마자 최 팀장이 즉각 반응했다.

“김 대리님 깼어요, 깼어!”

“김 대리, 일어나 봐!

양 주임과 유 과장이 차례로 지훈을 채근했다. 다들 지훈이 깨어나길 기다린 눈치였다. 뭔데? 뭔 일이야? 프로젝트는 저번 주로 거의 끝나서 협력 업체에서 피드백 오는 것만 처리하면 되었다. 게다가 오늘 지훈은 인사 발령이 새로 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연휴 전에 처리하지 못한 사소한 업무 외엔 딱히 급한 것은 없었다. 최 팀장이 지훈을 찾을 일이 딱히 없단 뜻이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팀장님?”

“김 대리. 흠흠. 휴가는 잘 갔다 왔나?”

최 팀장의 실없는 말에 지훈은 짜증이 났다. 고작 그거 물어보려고 사람을 깨우나 싶었다. 하지만 한마디 하려다 말고, 지훈은 최 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서 있는 이유를 눈치챘다. 다들 어미 새가 물어다 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의 표정이었던 것이다. 졸지에 어미 새가 되어 버린 지훈은 직장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시원하게 외쳤다.

“그럼요.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 물론 캐리어 빵빵하게 채워 왔죠!”

요란하게 팀원들에게 자랑하며 휴가를 갔다면 응당 팀원들에게 기념품을 헌납하는 것이 한국 전통의 회사 예절. 물론 보통은 이렇게까지 대놓고 달라고는 안 하지만 이 팀원들은 유달리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지훈은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팀원들을 대상으로 면세점 선물 증정식을 시작했다. 이럴 줄 알고 애초에 출국길에서 미리 사두고 여행 다니는 내내 짊어지고 다녔다. 최 팀장이 매일 피우는 담배 종류야 뻔했고, 유 과장은 아예 면세점 쇼핑을 지훈에게 부탁했었기 때문에 그 건만 처리했다. 양 주임은 명품 브랜드 핸드크림을 살까말까 맨날 고민하면서 온 팀원들을 달달 볶았기 때문에 소원 성취하라는 차원에서 지훈이 그냥 사 줬다. 지훈의 선물에 다들 만족했는지 그제야 진심으로 지훈의 귀국을 반겼다.

“대리님! 여행은 어땠어요? 북극곰 진짜 만났어요?”

양 주임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정말로 지훈이 북극곰한테 콜라 주러 갔다 왔다고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우루과이에 갔었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거기서는 뭐 했냐고 되물을 텐데, 거기서 정호준이랑 뽀뽀하고 떡 치다 왔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럼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기억에 남는 관광지는 있었던가? 솔직히 호준의 고추가 컸던 기억밖에 안 난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지훈은 그냥 설명을 생략하기로 했다.

“거대한 북극곰을 만나서 콜라도 주고 북극곰이 생선 잡아먹는 것도 봤어요.”

“우와! 북극 갔다 온 사람 처음 봐요!”

“김 대리, 진짜 북극곰이 콜라 먹어?”

지훈이 하도 능청스럽게 말하자, 지훈의 말을 안 믿고 있던 유 과장이 솔깃해했다.

“잘만 마시던데요. 콜라 먹고 취해서 주정 부려요. 그것 때문에 북극 여우들도 자꾸 맞아서 생태계 문제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오오, 진짜 북극에 갔다 왔나 보네. 나는 또 김 대리가 원래 계획했지만 우리가 모르는 다른 여행지에서 그만 만나선 안 될 사람을 만났는데 어쩌다 보니까 남들에게 차마 말 못 할 관계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서 대충 북극에 갔었다고 둘러대는 건 줄 알았지 뭐야?”

유 과장은 원래 쓸데없이 촉이 좋았는데 오늘따라 심각하게 정확했다. 하지만 지훈이 반박도 하기 전에 최 팀장이 최강의 꼰대력으로 모든 의혹을 원천 차단시켰다.

“무슨 소리야! 김 대리 북극 가는 거 내가 인천 공항에서 봤어!”

최 팀장이 개소리를 하는 덕분에 다행히 묻혔다. 양 주임이 한술 더 떠서 신나게 외쳤다.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요즘에 북극 직항이 있다면서요? 근데 그거 방사능 위험 있다던데요? 김 대리님 괜찮아요?”

북극 직항이 아니라 북극 항로겠지. 지훈은 말을 덧붙이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기 싫었다. 면세점 선물 증정한 걸로 팀에 대한 의무는 다했다. 오늘은 무조건 칼퇴 하고 집에서 뻗을 작정이었다. 남은 휴가를 다 써 버렸기 때문에 조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오늘 일도 별로 없으니 회사에서만 어떻게 버티면 될 것 같다.

“저 방사능 보호복 입고 다녔어요, 양 주임님. 저 오늘 업무 따로 없죠? 업무 보고 별도로 없으면 커피 좀 마시고 올게요.”

이제 슬슬 일어나서 모니터를 쳐다보는 척이라도 해야 할 듯했다. 지훈은 오늘도 사내 매점에서 파는 불알친구에게 배신당한 인생의 쓴맛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최 팀장이 그런 지훈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김 대리. 공람 확인 좀 해 봐.”

“맞아요. 대리님! 오늘 인사 공고 떴어요!”

지훈은 대충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혹시 모를 반전을 대비하여 다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내 인트라넷에 접속하여 공람을 확인했다.

[인사변동: ㅇㅇ정책연구팀 김지훈을 일반직 5급(정규직)으로 임명함. 끝.]

여행 가기 전에 미리 들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공람으로 딱 박힌 것을 보니 지훈은 새삼 기뻤다. 공공 기관 정규직으로 취직 성공이다!

“와! 됐어요, 됐어!”

“대리님, 축하해요! 와!”

“김 대리. 정규직 된 것 축하해!”

“김 대리. 축하해. 그간 수고했어. 내 덕분인 거 알지? 내가 우리 김 대리를 적극 추천했다고!”

눈치 없는 최 팀장이 또 숟가락을 얹었다. 남이 뭘 하든 다 자기가 잘난 덕분이었다. 여태 지훈이 쓴 보고서를 다 자기가 가로채 놓은 주제에 대체 뭘 추천했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최 팀장은 지금 사내 줄타기 줄 잘못서는 바람에 본인 목숨이 간당간당했다. 누굴 추천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장 실장에게 들은 얘기가 있었던 지훈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굳이 최 팀장의 심기를 거슬러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최 팀장님! 다 팀장님 덕분이죠!”

날로 알랑방귀가 늘어 가는 지훈을 측은하게 쳐다보며 유 과장이 어깨를 두드렸다. 지훈은 개고생한 끝에 이제 이 망해 가는 팀을 성공적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서무인 양 주임은 어차피 다음 인사 개편 때 다른 팀으로 옮길 테니 이제 멍청한 최 팀장 밑에 남은 건 사실상 유 과장뿐이었다.

육아 휴직 이후 복직하자마자 보복성으로 최 팀장 밑으로 좌천된 건데 이걸 이제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김 대리도 없으면 일은 이제 자기가 다 해야 할 텐데. 다음 계약직은 누가 오려나. 유 과장의 잔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양 주임만 신나서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에 회식 어때?”

최 팀장이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지훈에게 공람을 빨리 확인하기를 종용한 이유였다. 연휴 끝나자마자 회식이라니 미친놈임에 틀림없다. 최 팀장 성격을 보건대 집에서도 저 지랄일 것이다. 연휴 내내 부인과 딸들에게 바가지 긁힌 게 틀림없었다. 회식이 달갑지 않았던 양 주임과 유 과장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 우리 법인 카드는 이제 못 써요. 경영지원실에서 법인 카드로 퇴근 시간 이후 일반 음식점 결제하지 말라고 공문 내려왔어요.”

팀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양 주임이 1차 방어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해장국 집 옆에 인당 9800원 무한 리필 냉동 삼겹살집 새로 생겼잖아! 오늘은 내 카드로 쏜다!”

어지간히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최 팀장이 간만에 개인 카드를 내밀었다. 저 짠돌이가 자기 카드 쓴다고 말할 정도면 진짜 회식을 하고 싶은 거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른 팀원들은 더 회식에 참여하기 싫어졌다. 그 무한 리필 냉동 삼겹살집은 더럽게 맛없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최 팀장의 잔대가리라면 필시 2차를 비싼 데에 가서 팀원들 보고 쏘라고 할 게 틀림없었다. 이미 그 수법에 몇 번 당한 팀원들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

“저 오늘 수영이 수행 평가 있어요. 꼭 엄마 아빠랑 같이 해야 한대요! 요즘 입시 사정관제 준비하려면 초등학교부터 학생부 관리해야 하는 거 아시죠? 저 오늘 일찍 퇴근해야 합니다.”

유 과장이 육아로 2차 방어를 했다. 수영이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하지만 대학 입시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모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최 팀장의 얼굴에 위기감이 서렸다.

“우리 딸들은 그런 거 없어도 공부 잘했어!”

“팀장님! 입시 정책이 매년 바뀐다고요! 팀장님 땜에 수영이 대학 못 가면 팀장님이 책임지실 거예요?”

유 과장이 다다다다 쏘아 대자 최 팀장이 눈알을 굴리다가 지훈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회식이 중요하다지만 남의 따님 앞길까지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유 과장은 아쉽지만 다음에 함께하고! 어쩔 수 없이 나랑 양 주임이랑 김 대리만 함께하지?”

이럴 수가. 유 과장을 아예 빼 버릴 줄이야! 혼자 회식 탈출한 유 과장은 자기라도 살겠다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양 주임이 마지막 희망이 되어 버린 지훈을 애타게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칼퇴 하고 집에 가서 뻗을 거라고 결심했던 지훈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 정규직 전환 축하 파티인데, 대체 무슨 수로 빠진단 말인가?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데 대체 왜 회식 따위를 하는 거지? 제발 축하하지 말아 주세요.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제발 기절이라도 해서 병가라도 내지 않는 한 도저히 회식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참에……. 기절할까?

때마침 지훈의 자리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지훈은 양 주임의 시선을 피하며 자기 자리에 있는 키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키폰에 뜬 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는 최 팀장에게 강렬하게 어필했다.

“팀장님! 046입니다! 아시죠? 정 사무관님일 가능성이 99.9%입니다! 전화를 피했다간 또 감사실까지 뒤집어질 테니 어쩔 수 없이 전화 받겠습니다!”

최 팀장이 뭔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지훈은 냉큼 전화를 받았다. 예상대로 호준이었다. 지난 2년 반 동안 지훈이 이토록 호준의 전화를 기다린 적이 있었을까. 세상에 다시없을 기회였다.

“ㅇㅇ정책연구팀 김지훈 대리입니다.”

-김 대리. 저 정호준 사무관입니다. 축하하려고 연락…….

“네? 사무관니임. 뭐어라고요? 아주아주 긴급한 회의를 오늘 저녁까지 해야 한다고요? 제가 피할 수 없다고요? 근데 저만 가면 된다고요? 지금 당장 가야 한다고요? 예! 아주 잘 알겠습니다, 사무관님! 지금 당장 가도록 하겠습니다!”

-김 대리, 대체 무슨…….

딸깍.

수화기 너머로 호준의 당황이 느껴졌지만 지훈은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당장 살고 봐야 한다.

“최 팀장님, 어쩌죠? 사무관님이 또 저를 부르시는데요? 지금 당장 태종시 출장 가야겠는데요? 아, 이런. 어쩔 수가 없군요. 제가 빠지니 제 정규직 전환 기념 축하 회식도 이루어질 수 없겠는걸요? 양 주임, 삼겹살 먹고 싶었을 텐데 미안해요! 어쩔 수 없이 일찍 퇴근해야겠어요!”

“그 정 사무관이란 놈은 왜 연휴 끝나자마자 회의를 잡는 건데! 이것참, 어쩔 수가 없구먼. 어이 박 팀장!”

회식길이 완전히 막혀 버린 최 팀장이 툴툴대더니 파티션 너머에 있는 솔메이트 박 팀장을 불러냈다. 그러곤 지훈이 선물로 갖다 준 담배를 나눠 피우러 떠났다. 호준은 최 팀장이랑 공식적으로는 급이 비슷했지만 최 팀장은 워낙 하는 일이 없어서 호준한테 완전히 주도권이 밀렸다. 호준이 미팅을 요청하면 최 팀장으로서는 별수 없었다.

“김 대리님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최 팀장이 나가자마자 양 주임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일하는 척하면서 지훈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있던 유 과장도 다시 돌아앉았다.

“김 대리. 방금 공람 하나 더 떴어. 확인해 봐.”

출장 갈 준비를 하던 지훈은 사내 인트라넷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인사이동: 일반직 5급 김지훈을 ㅇㅇ정책연구팀에서 ㅇㅇ부(파견직)으로 이동을 명함. 끝.]

“파견…… 파견직? ㅇㅇ부 파견직?”

지훈이 눈을 흘겨 뜨며 다시 확인했다.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파견직이었다. 설마 백 번 보면 달라질까? 맙소사!

“김 대리, 축하해! ㅇㅇ부에서 2년 일해야겠네. 그래도 돌아오면 본사에서 더 좋은 팀으로 배정될 거야.”

유 과장이 확인 사살을 했다.

“ㅇㅇ부라고요?”

“응. 앞으로 김 대리는 태종시 정부 청사로 출근하는 거지. 2년 동안. 월급이랑 복지는 우리 쪽 기준으로 하고. 이거 나름 승진 코스일수도 있어.”

승진이고 나발이고 ㅇㅇ부라면 정호준 코앞이잖아! 까딱 잘못하다간 정호준을 매일 봐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에! 지훈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이상하네. 몇 년간 신입을 파견직으로 잘 안 보냈는데. 김 대리는 전환형이라 경험이 좀 있어서 그런가 보다.”

유 과장의 말에 지훈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연휴 전, 장 실장님과 밥을 먹으면서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지금 있는 부서와는 아무런 상관없고 물리적으로도 아주 먼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멀리요!’

‘자네가 정 그렇다면야.’

사실 그건 정호준한테서 멀어지게 해 달란 소리였는데! 회사랑 ㅇㅇ부랑 멀긴 멀었으니까 한참 멀어진 게 맞긴 한데, 정작 회사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호준과 더 가까워져 버렸다. 이 회사의 그 어느 누구보다 물리적으로 정호준과 가까워지게 생겼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다! 한국 가면 모르는 척하기로 했는데 자주 마주치면 어쩌느냔 말이다!

호준과 자주 마주치기엔 이제 켕기는 게 많았던 지훈은 기가 막혔다. 일단 커피를 사러 사내 매점으로 내려갔다. 불알친구에게 배신당한 인생의 쓴맛 커피가 간절했다. 안 그래도 시차 적응 중에 피로 누적인데 과도한 스트레스가 쌓였다. 가만히 있다간 아주 그냥 죽을 것만 같았다.

사내 매점 카페테리아에서 연휴 내내 썩혀 뒀던 원두로 씻지 않은 머신에서 대충 내린 인생의 쓴맛 커피를 마시며 지훈은 인사실에 문의했다. ㅇㅇ부 파견직 출근은 당장 다음 주부터라고 했다. 이번 주는 원래 일하던 ㅇㅇ정책연구팀에서 잔여 업무 및 인수인계하고 다음 주부터는 ㅇㅇ부로 출근해야 했다.

고민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태종시 어디에서 머물면서 출퇴근을 해야 할 것이며, 방은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 걸까. 지금 지내는 원룸은 계약이 3개월이나 더 남았는데 이는 어찌해야 할 까. 그리고 호준은 대체 무슨 수로 피하느냔 말이다. ㅇㅇ부의 어느 과로 배치되는지부터 확인을 해야 하나? 지훈은 제발 호준과 같은 곳만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때마침 키폰이 아닌 개인 휴대폰으로 호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물론 휴대폰엔 저장된 이름 없이 번호만 떴지만 지훈은 알아볼 수 있었다. 업무 때문에 이미 호준의 전화번호를 아예 외우고 있었으니까.

호준의 전화야 출근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오곤 하지만 지금은 필시 올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헛소리를 해 놨던 지훈은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김 대리, 저 정호준입니다. 왜 전화했는지 알죠?

우루과이에서 듣던 꿀 떨어지던 목소리와는 딴판인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게다가 지훈 씨라고 안 부르고 김 대리라고 부르는 걸 보니 업무 얘기만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지훈도 지극히 공적으로 대하면 그만이긴 했다. 호준이 다정하게 지훈 씨라고 불러 주지 않으니 내심 아쉽긴 했지만 지금은 그걸 논할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일단 무턱대고 출장 가겠다고 한 것부터 수습하자. 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사무관님. 죄송합니다……. 실은 방금 최 팀장님이 회식을 잡으려는 찰나에 사무관님 전화가 오는 바람에……. 아무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한 10분만 만나 주시고 출장으로 쳐 주시면 안 될까요? 안 그러면 저 오늘 회식 가야 하는데요.”

-최 팀장이 회식……. 그럼 일단 태종시로 오세요. 마침 보고서 수정할 거 있어서 메일 보내려던 참인데 만나서 얘기하죠. 그러면 출장 보고서 쓰기도 편하죠?

호준의 목소리는 지난 2년 반 동안 같이 일하던 때와 다름없이 건조했지만 지훈은 어쩐지 친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전히 기분 탓이다.

“네, 감사합니다. 사무관님. 지금 출발하면 점심시간 지나고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럴 것 없고요, 급한 일 아니니까 나와서 점심 먹고 한숨 자고 천천히 오세요.

딸깍.

평소와 다른 점은 호준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는 점이었다. 전에는 호준이 자꾸 헛소리를 하려고 해서 지훈이 겨우겨우 애를 써서 먼저 끊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호준이 나름대로 지훈과 전화를 오래 해 보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할 말만 하고 끊고. 아무튼 칼 같은 사람이었다.

한숨 자고 오라는 건 지훈이 수면 부족임을 알고 있는 것일 테다. 귀국 비행기가 새벽 도착이라 바로 출근해야 한다고 잠깐 말했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자고 해 놓고는 티 다 냈다. 진짜 어이없어. 그래 놓고 김 대리라고 부르다니. 지훈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 * *

호준과 그렇게 거사를 치른 다음 날부터는 기억에 남은 게 없었다. 여행을 거의 안 다녔으니까. 다음 날 허리랑 다리가 너무 아파서 지훈은 숙소의 침대에 드러누운 채 호준을 부려 먹기만 했다. 그래 놓고는 호준의 마빡에 난 혹 두 개를 하루 종일 놀려 댔던 것 같았다.

호준이 뒤늦게 변명한 바에 따르면, 지훈을 따라서 우루과이에 온 건 맞았다. 하지만 순전히 지훈에게 차인 후 너무 울적해서 다음 날 아침에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였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계획 없이 온 여행이라고도 했다. 아무튼 숙소가 같을 줄 본인도 정말로 몰랐고, 여행 같이 다니자고 한 것도 될 대로 되라 싶어서 즉흥적으로 건넨 제안이었다고 했다. 지훈이 설마 넙죽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나.

넙죽 받아들였던 기억이 없는 지훈은 어이가 없었다. 더불어 호준은 지훈이 정말 그 정도로까지 무계획으로 왔다는 사실에도 놀랐다고 덧붙여서 또 한 대 맞을 뻔했다. 스페인어를 오랫동안 배운 건 공교롭게도 진짜였다. 예전에 갔다던 남미 출장은 원래 온두라스였다고 했다. 자기 업무는 아니었는데 스페인어 할 줄 안다고 끌려갔었단다.

구구절절 변명이 이어진 후에도 역시 딱밤을 맞을 만했다며 지훈은 얼음찜질을 해 주진 않았다. 그렇게 호준은 이마에 혹 두 개를 영광의 상처로 간직하게 되었다.

그 다음 날엔 호준이 귀국해야 해서 다시 공항이 있는 몬테비데오의 호스텔로 돌아갔다. 눈치 더럽게 빠른 미겔이 너희 뭔 일 있었냐고 자꾸 추궁해서 난감했다. 다만 호준과 공항 가기 전에 작별 인사 하면서 여기서 있었던 일들은 없었던 걸로 치고 한국에서 만나도 모르는 척하기로 정리했었다. 호준이 공항으로 떠난 후 지훈은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몬테비데오에서 남은 하루를 혼자 지내는 동안 지훈은 호준이 알려 준 카페와 공원을 찾아다녔는데 딱히 즐겁지는 않았다. 혼자 다니니까 일정은 여유로웠지만 말동무가 없으니 심심했다. 역시나 길도 한두 번 잃었다. 있다가 없으니까 아쉬운 여행 가이드였다.

지훈은 자신이 한국에 가서 과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의심스러웠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계속 호준이 이상할 정도로 그리웠다. 그래도 한국에 돌아가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 아침까진 호준이 전혀 그립지 않았다. 공항에서 곧바로 출근한 데다가, 출근하자마자 일어난 일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호준의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를 듣고 나니 지훈은 다시 심란해졌다. 호준은 티가 조금 나긴 해도 자신이 말한 약속을 아주 잘 지킬 것만 같았다. 문제는 김지훈 본인이었다. 호준을 여기서 다시 만나면 과연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최대한 만남을 피해야 할 판에, 오늘 아주 자발적으로 출장을 잡아 버렸다. 된장 피하려다 똥 밟은 신세였다. 게다가 ㅇㅇ부 파견직까지 발령받아 버렸다. 운 나쁘면 호준을 아주 매일 보게 생겼다.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이는지. 정규직 되면 뭐 하냐! 파견직인데! 정규직 됐으니까 노조부터 가입해야 하는 거 아냐? 노조에서도 파견직은 나 몰라라 하는 거 아닌가? 사내 노동조합 사무실 앞을 괜히 기웃거려 보던 지훈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풍성한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 * *

태종시로 향하는 여정은 오늘도 괴로웠다. 버스와 기차 번갈아 가면서 타는 동안 모자란 잠을 좀 보충하려 했지만 좌석이 딱딱해서 턱도 없었다. 게다가 출발 전에 마신 커피 때문에 졸린데 잠들지도 못해서 지훈은 거의 좀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호준을 청사 앞에서 만났을 땐 이미 완벽하게 좀비였다.

“김 대리, 괜찮아요?”

“저 안 죽었어요.”

호준은 지훈을 몇 번 툭툭 쳐 보더니 죽진 않았지만 반시체 상태인 걸 확인했다. 그대로 지훈을 커피 전문점으로 데려갔다. 저번에 지훈이 세 시간이나 졸았던 그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호준은 지훈이 저번에 졸았던 그 푹신한 소파에 앉힌 다음, 당분이 가득한 디카페인 음료를 먹였다. 여행하는 동안 지훈의 음료 취향을 파악해 버린 티가 났다.

지훈은 호준이 건네준 달콤한 음료를 종이 빨대가 녹기 전에 호로록 빨아 먹었다. 몇 분 지나자 설탕물 먹은 꿀벌처럼 간신히 기력을 되찾았다.

“커피는 회의비 지출이에요?”

지훈은 기력을 되찾자마자 돈 걱정부터 했다.

“제가 그냥 사는 겁니다.”

“잘 마실게요.”

지훈은 상대방의 호의를 사양하기는커녕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무튼 그 덕에 정신을 차린 지훈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말끔한 정호준 사무관을 쳐다보았다. 여행지에서의 가벼운 모습은 없고 다시 고루한 공무원 정장에 이마도 훤히 깐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온몸에 일하는 중이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그것도 잘생기긴 했는데, 핏이 맞지 않는 기성품 슈트로는 호준의 팔뚝도 가슴팍도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저렇게 다 가리고 다닐 거 몸은 왜 만들었나 싶다. 물론 저렇게 입고 다니는 덕에 정호준 몸 좋은 건 지훈만 아는 비밀이 되어 버렸지만.

“김 대리, 업무 얘기 가능합니까?”

딴생각 중인 지훈 앞에 노트북을 내밀며 호준이 눈치 없이 보고서를 열었다. 허튼소리는 절대로 안 하는 인간답게 정말 회의 준비 해 왔다.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 했던 지훈은 골이 아팠다. 평소에는 그래도 딴소리 한참 하다가 일 시작하면서 오늘은 왜 다짜고짜 일부터 한담. 정호준을 일로 만나면 반드시 화딱지가 난다는 걸 지훈은 잠깐 잊고 있었다.

“제가 주말 동안 검토를 해 봤는데, 사업 결과 분석 파트를 좀 늘려야 할 것 같아요. 일자리 증대와 출생률 영향 분석을 넣으면 좋을 것 같고요. 어차피 위에서 넣으라고 할 테니까 미리 넣죠. 그리고 경력 단절 여성 부분은 여자 박사 위주로 자문단 따로 구성하고요.”

그 와중에 요구 사항은 호준답게 꼼꼼했다. 피곤했던 지훈은 그냥 노트북을 호준의 얼굴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정규직 되었다고 갑자기 게을러졌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정호준 사무관의 꼼꼼한 지시 사항을 다시 적어 내려갔다. 다행히 용을 쓰면 이틀 정도면 끝날 일이었다.

호준의 말대로 이메일로 지시하고 전화로 설명할 정도의 일이었다. 지훈이 굳이 출장을 오겠다니까 회의를 한 것이다.

“그래프도 넣나요?”

“그래프 들어가면 좋습니다. 범례랑 레이블 크게 해 주세요. 국장이 요즘 노안이 와서 안 그래도 글씨 크게 뽑으라고 난리거든요.”

눈 밑에 다크 서클이 드리워진 채로 반쯤은 졸고 있는 상태에서도 꼼꼼하게 체크하는 지훈을 보면서 호준은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먼저 일 시킨 게 본인이므로 할 말은 없었다.

“사무관님, 그럼 언제까지 작업하면 될까요?”

“모레까지면 됩니다.”

“제가 오늘은 도저히 무리고 내일 저녁까지 보내 드릴……. 하암.”

“…….”

“죄송해요.”

지훈이 결국 쏟아지는 잠을 못 참고 하품을 했다. 벌어지는 입을 수습하려고 얼른 입을 가렸다. 그걸 본 호준이 급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웃느라 콧바람이 살짝 터지는 소리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냥 웃어도 돼요.”

“흠흠. 미안합니다.”

호준이 볼을 씰룩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 호준이 갑자기 귀여워 보여서 지훈도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왜 지구 반대편에서 돌아왔는데도 호준이 귀여워 보일까. 우주의 기운이 되돌아올 때가 됐는데?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 걸까? 전엔 잘생겨 보이기만 했는데 이젠 귀엽기까지 하다.

잘생긴 건 한철이지만 귀여운 건 평생 간다는 호준의 개수작이 생각났다. 혹시 저 인간이 평생 귀여우면 어쩌지? 안 돼. 지훈은 다시 일에 집중하려 했다.

“추가 업무 더 있어요?”

“아뇨. 이게 끝입니다.”

집중할 일이 없었다. 큰일이다. 지훈의 속도 모르고 호준이 말을 이어 갔다.

“이 보고서만 마무리되면 아마 김 대리가 더 작업할 일은 없을 겁니다. 다음 주부터 여기로 파견 오죠?”

파견이라는 말에 지훈은 다시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참담한 현실에 다시 눈앞이 캄캄해진다.

“네. 파견직이라고 하더라고요. 혹시 제가 어디로 배치되는지 아세요?”

“걱정 말아요. 김 대리는 5층이니까. 저랑 분야도 다르고요.”

호준은 다른 층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한참 떨어지게 생겼다. 한시름 놓은 지훈이었지만 그걸 호준이 대놓고 말하자 약간 민망해졌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사무관님하고 멀리 떨어지길 그렇게까지 바랐던 건 아니거든요…….”

“제 쪽에서 불편할까 봐 알아봤습니다.”

호준이 딱 잘라 말했다. 사실 오전 내내 아직 결정 안 됐다는 운영지원과를 들쑤셔서 지훈이 어디로 배치되는지 알아봐 놓고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지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급격히 서운해졌다.

“사무관님, 이제 제가 불편하세요?”

“아뇨. 제가 실수할까 봐요.”

호준의 표정은 진지했다. 농담 아니고 진심이다. 실수라니. 저 사람이 실수라는 걸 하는 걸까? 지훈이 먼저 시비 걸지 않으면 절대 실수 안 하는 사람이었다.

“사무관님은 실수 같은 거 안 하시잖아요.”

“실수 안 하려고 노력하니까요. 김 대리, 피곤할 텐데 오늘 일찍 퇴근해요. 회의는 6시까지 한 걸로 잡아 줄 테니까.”

호준이 할 일 끝났다는 듯 노트북을 덮고는 일어나려 했다. 누가 봐도 실수 안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저걸 내버려 두자니 지훈은 내심 아쉬웠다.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기엔 너무 정이 들어 버렸다. 얼굴 보니까 더더욱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기로 약속해 놓은 거 취소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먼저 일어나겠다며 짐 싸는 호준의 마빡에 남은 선연한 두 개의 혹을 본 지훈은 충동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모르겠다. 쪽팔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사무관님!”

“네. 김 대리.”

“아니, 아니. 정호준 씨. 마빡은 괜찮아요?”

지훈이 뜬금없이 직급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자 놀란 호준은 그런 지훈을 빤히 쳐다봤다. 이번에도 예측 불가인 지훈 때문에 호준은 또 당황했다.

지훈은 분명 우루과이에서는 한국 가면 절대 쳐다보지도 않고 영원히 모르는 척할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호준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마음 정리 열심히 해 놨다. 그런데 한국에 오자마자 있지도 않은 출장을 잡아 스스로 오지를 않나. 시키는 대로 모르는 척 열심히 하고 있었더니 별안간 이름을 부른다. 예측 불가 김지훈은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인 걸까. 지훈이 맨날 저렇게 밑도 끝도 없이 나오니까 지훈의 앞에만 서면 맨날 실수하는 것 아닌가.

호준은 골이 아팠다. 하지만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애초에 이렇게 휘둘릴 일도 없었다. 먼저 좋아한 죄다.

“누구 때문에 아직도 아픕니다.”

그 누구를 흘겨보며 호준이 말했다. 누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그것참 큰일이네요. 근데 그거 아세요? 마빡에 난 혹엔 순댓국이 좋대요.”

카페 밖에 하필 순댓국집이 있어서 지훈은 되는대로 소리쳤다.

“금시초문이지만 딱밤 전문가가 말하니까 신뢰가 가네요.”

“그럼요. 순대에 비타민 F가 풍부해서 혹이 빨리 가라앉는대요.”

“그럼……. 제 마빡의 미관을 위해 꼭 먹어야겠네요.”

먼저 먹자고 안 하면 지훈이 입안에 순대를 쑤셔 넣을 기세였다. 호준은 순순히 비타민F 섭취에 응했다.

“사무관님 퇴근 언제 하세요?”

“밤 10시?”

사실이었다. 오늘도 일할 게 산더미 같았다. 망할 곽 과장이 호준의 장기 휴가에 대한 응징으로 일을 산더미같이 쌓아 뒀다. 주말부터 미리 나와서 일을 했는데도 끝이 없었다. 이번 주 내내 야근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 바쁜 와중에 지훈이 출장 나오겠다는 바람에 굳이 시간 내서 카페까지 나온 사정을, 지훈은 전혀 몰랐다.

“히익! 엄청 바쁘시네요. 그럼 다음에 먹어야겠네요.”

아무리 상대가 호준이라도 밤 10시까지 기다릴 자신은 없었다. 지훈은 집에 가서 잠이나 자려고 휴대폰으로 기차표를 검색하려 했다. 호준이 그런 지훈의 손을 붙잡았다.

“야근을 해도 밥은 먹어야죠. 마빡도 아픈데요. 6시까지만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순댓국 먹고 저녁 기차 타요, 지훈 씨.”

안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려다가 호준이 야근해야 한다는 말에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바빠 죽겠는 와중에도 굳이 밥 먹을 시간을 내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실수 안 하겠다고 해 놓고는 자기한테 순순히 휘둘려 주는 게 역시 정호준다웠다.

호준이 자기랑 순댓국을 먹느라 밤 10시까지 할 수 있는 야근을 밤 12시까지 하든 말든 지훈이 알 바는 아니다. 아무튼 정호준이랑 오늘 순댓국을 먹고 싶었다. 뭐, 순댓국 먹여 두면 과로사는 안 하겠지. 순댓국엔 비타민 F가 풍부하다니까. 지훈은 순순히 호준의 제안에 응했다.

“저 그럼 한숨 자다 올게요. 정호준 씨, 일 열심히 하시고 6시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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