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27)

13.

둘은 그 작은 도시에서 하루 더 머물게 되었다. 사실 이틀이나 둘러볼 정도로 큰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시 자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워서, 그냥 꽃과 나무와 돌로 가득한 이국적인 분위기의 도심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이건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했다. 둘은 간밤의 일로 너무 들떠서 다른 곳에 가서 새로운 걸 볼 기분이 아니었다. 아침이 되자 간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맑게 인사했지만 긴장감은 있었다.

“오늘 계획은 그냥 돌아다니는 거라고요?”

초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계획 변태치고 굉장히 한가롭고 소박한 일정이었다. 호준의 말에 지훈은 놀라서 되물었다.

“오늘은 그냥 어제 못 가 본 등대도 가 보고, 또 새로운 식당이랑 카페도 가 보죠. 어제 사람들이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길거리 공연이 있을 거 같긴 해요.”

호준이 이렇게 헐렁하고 불확실한 계획을 세우다니 놀랄 일이었다.

“사무관님이 별일이네요.”

지훈의 반응에 호준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어젯밤에 다음 날 여행 계획을 세웠어야 했는데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었다. 2년 넘게 짝사랑하던 상대한테 좋긴 좋단 소리 듣고 키스까지 했으니 잠이 올 리가. 너무 좋아서 이불 차다가 하마터면 숙소 벽을 부술 뻔했다. 옆방에 있던 사람이 지훈이 아니었다면 정말 온 숙소의 벽을 허물었을지도 몰랐다. 설렘으로 벅차오르는 마음 때문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잠들어서 몸도 피곤했다. 물론 호준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신중했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는 일이 잠깐의 추억이 되리라는 걸 명심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중한 순간을 즐기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지훈은 호준이 속으로 이렇게까지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자신과 다르게 굉장히 침착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사무관님, 뭐 보세요?”

침착한 호준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어디 돌아다니다 온 건지 지역 조간신문까지 구해다가 읽고 있었다.

“신문이요.”

“저도 눈이 있거든요. 그게 신문인 건 알아요.”

지훈은 스페인어 까막눈이라 신문에 글자 같은 것이 쓰여 있다는 것만 알 뿐, 헤드라인조차 읽을 수 없었다.

“버스 파업 아직도 하는지 확인하려고요. 돌아갈 일정 짜야 하니까요.”

버스 시간표만 확인하는 것치고는 호준은 기사도 꼼꼼하게 읽었다. 지훈은 그런 호준의 옆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그냥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는 호준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호준의 얼굴을 보니까 간밤의 키스가 또 떠올랐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지만 결과적으론 엄청 좋았다. 한동안 육체관계가 없었어서 단지 욕구 불만이라 끌렸던 건지, 호준의 키스가 특별히 좋았던 건지. 지훈은 솔직히 헷갈렸다. 둘 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중요할까. 마음 가는 대로 하니까 엄청 좋았다. 그동안 혼자 내적 갈등 겪었던 게 부질없이 느껴질 정도로.

“근데, 사무관님. 키스 엄청 많이 해 봤나 봐요.”

풉!

놀란 호준이 그대로 신문 위로 커피를 뿜었다. 밑도 끝도 없이 던지는 건 김지훈의 특기일까? 지훈은 이제 입에 필터라는 게 없었다.

“아침부터 대체 무슨 소리예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몇 년 동안 안 했…….”

당황한 호준이 변명을 하다 말고 자기 무덤을 판다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지훈은 흐려진 말끝을 놓치지 않았다.

“왜요? 연애 얼마나 쉬었는데요?”

호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몰라서 묻느냐는 원망의 눈초리였다. 가만 보던 지훈이 한 박자 늦게 눈치를 챘다. 아, 나 때문에. 지훈이 얼른 수습했다.

“암튼 되게 좋았어요.”

좋긴 좋았던지 지훈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이런 소재로 대화하기엔 민망해진 호준은 화제를 좀 돌려 보려 했다. 사실 잘한다는 소리 들으니 좋긴 했지만 자꾸 말하니까 또 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지훈 씨는 그럼 전에 연애 안 했어요?”

“누가 일을 존나 시켜 대서 몇 년 동안 존나 바빴어요.”

지훈은 자신에게 일을 존나 시켜 댄 그 누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호준은 할 말이 없어져서 신문지를 들어 지훈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화제 전환이 너무 성공적이었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지구 반대편에 빙하기가 찾아왔다.

말이 나온 김에 옛날 일을 생각하니 지훈은 호준에게 또 화가 났다. 키스는 키스고 복수는 복수 아닌가. 아직 저 인간은 사소한 일상 속 불행을 더 겪어야 했다. 지훈은 홧김에 탁자 아래에 있는 호준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아악! 갑자기 왜 때려요!”

호준이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무관님이 저 괴롭힌 거 생각나서요.”

하……. 그 얘기라면 호준은 또 할 말이 없었다. 예전에 지훈의 분노를 이미 봤기 때문에 호준은 할 말이 없긴 했다.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했더니 이제 지훈은 때리는 것도 마음대로 했다. 하지만 별안간 얻어맞으면 너무 아팠다. 지훈이 등짝만 때리는 건 아니구나.

“미리 예고하고 때리면 안 됩니까?”

“싫어요! 내 맘대로 때릴 건데요. 갑자기 맞으면 같은 강도로 더 효과적으로 고통을 줄 수 있거든요.”

고통받는 당사자인 호준은 억울했지만 그간 지은 죄가 많아 항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길 더 괴롭히겠다는 지훈의 말을 들으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훈의 성깔이 이 정도일 줄 미리 알았으면 이 사람을 안 좋아했을까? 사실 그랬어도 호준은 지훈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상보다 더한 성깔이라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지훈한테 한껏 얻어맞아도 좋았다. 물론, 지훈이 진심을 다해서 때리는 통에 진짜 아프긴 했지만.

“지훈 씨 어디서 때리는 법 강의라도 들었어요? 솔직히 군대에서 맞은 빠따보다 더 아파요.”

“저 군대에 있을 때도 잘 때린다고 소문나서 옆 부대까지 원정 간 적도 있어요.”

“그냥 날 잡고 폭주한 건 아니고요?”

“폭주라뇨. 그냥 참다 참다 안 되겠어서 내무반의 부조리한 행태를 몇 번 고발했는데 대장까지 와서 사과하더라고요. 그 후로는 별일 없었어요.”

호준은 대충 지훈의 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보아하니 몇 번 대난리를 쳤던 모양이었다. 선임한테 등짝 스매싱이나 안 날렸으면 다행이다. 아무튼 대단한 성깔이었다. 내가 하필 이런 사람에게 원한을 사다니. 맞은 데가 아파서 호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호준은 지훈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정강이가 얼얼하게 아파서 한동안 절뚝거려야 했다. 정작 지훈은 그런 호준은 내버려 둔 채 잘만 싸돌아다녔다.

도시 끝에 있는 등대에서 보이는 거대한 라플라타강과 바다가 만나는 항구의 전경은 특히나 아름다웠다. 입장료를 내고 계단을 걸어 올라올 만했다. 물론 좁은 계단을 직접 올라가야 해서 힘들었지만, 등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올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강가인 데다 높은 등대 위라 바람이 꽤 불어서 시원했다.

지훈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사정없이 날려서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호준은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등대 위에 바람이 많이 불어서 카메라는 소유주인 호준이 들고 있었고, 그래서 지훈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모습이 꽤 많이 찍혔다.

“왜 그런 걸 찍어요!”

“왜요. 귀여워요.”

“다 큰 남자한테 할 소리는 아니네요.”

큰 키 때문에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지훈은 호준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체격이 더 큰 호준의 눈에는 아닌 듯했다.

“그래도 전 지훈 씨 귀엽다고 생각해요.”

어제 이후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호준도 무심결에 더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지훈은 그런 호준의 개수작들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더 재밌었다. 호준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긴장을 많이 내려놓아서 지훈이 대하기 더 편해졌다.

“그래서 나 좋아해요?”

괜히 확인해 보고 싶어서 지훈이 던져 봤다. 느닷없는 질문에도 호준은 신중하게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럴지도요. 사실 딱히 이유가 없어요.”

지훈이 김 인턴이던 시절부터 좋아했지만 2년여 동안 온갖 수를 써도 영 진전이 없다가 얼떨결에 바보같이 고백하고 대차게 차이는 줄 알았는데. 마음 정리하려고 온 우루과이에서 키스까지 했다. 게다가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니든 콘돔까지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호준 본인도 이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눈 감았다가 뜨면 한국의 자기 집 천장이 보이고 이거 다 꿈이었다고 누군가가 놀릴 것만 같았다.

혹시나 해서 눈을 감았다가 떠 봤는데 지훈이 자길 보며 웃고 있었다. 보조개가 네 개였다. 바닷바람이 확 불어오는 바람에 눈은 살짝 찌푸리고 있었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그 천진한 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지훈이 장난스레 물었다.

“그런 것치고는 저를 너무 많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조금 좋아할 수는 없잖아요.”

당연하다는 듯 무심하게 답하는 호준의 고백에 지훈은 약간 두근거렸다. 저 인간은 뭐든 대충 하는 법은 없는 사람이니까. 좋아하게 되면 전력을 다해서 좋아할 테다. 그 대상이 하필 자신이었다.

며칠 사이에 호준과 심적으로 가까워졌다. 어제는 육체적으로도 가까워졌다. 큰일이었다. 이러니까 정말 사귀는 것 같잖아. 진짜 나중에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을까. 지훈은 걱정이 되었지만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여긴 지구 반대편이니까. 나중에 우주의 기운이 되돌아가면 알아서 정리될 것이다.

지금은 그냥 눈앞에 있는 정호준이라는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니까 점점 더 빠져 들어갔다. 상대가 남자라는 것도 신경 안 쓰였다. 대화하면 즐겁고 같이 다니면 재밌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성적으로 긴장도 되었다. 몸을 훑어보면서 근육이 어떻게 붙어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남자도 된다는 사실에 지훈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상대도 게이인 거만 빼면 원래 알던 사람이라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걸지도 몰랐다. 지구 반대편 우주의 기운이 강력해서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다.

물론 호준의 일방적인 감정 때문에 자신이 여태 고통받은 걸 생각하니 지훈은 다시 화가 울컥 치밀었다. 작작 했어야지!

생각난 김에 한 대 더 치려다가 지훈은 순간 중심을 잃었다. 바람이 훅 불어서 등대의 난간 아래로 떨어질 뻔한 걸 다행히 호준이 붙잡았다. 지훈도 무게 중심을 잡으려 호준의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

“조심해요. 저 때리는 건 이따 내려가서 하고요.”

때리려는 거 알고 있었어? 이번엔 들켰네. 머쓱해진 지훈은 괜히 호준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팔뚝은 이상하게 만지는 맛이 있었다. 지훈은 손을 댄 김에 저도 모르게 쓰다듬었다.

“지훈 씨? 제 팔은 왜 자꾸 만져요?”

“그냥…… 근육이 좋아서요. 몸이 좋으시잖아요.”

지훈은 기왕 들킨 김에 아예 작정하고 호준의 반팔 소매 아래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사실 전부터 좀 만져 보고 싶었는데 참고 있었으니까. 어제 키스도 했는데 이제 맘 놓고 만져도 되겠지.

지훈의 손가락이 유달리 길쭉해서 호준의 피부에 닿는 느낌이 묘했다. 사실 팔뚝 안쪽 살은 아무리 근육이라도 살갗 자체가 예민한데, 지훈이 조몰락거리면서 거침없이 만져 대자 호준은 혼란스러웠다. 지훈이 뭘 알고 이러는 건지, 정말 몰라서 이렇게 대놓고 만져 대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표정만 보면 신기해서 만지는 것 같긴 한데, 어떻게 보면 섹스어필 같기도 하고. 본인이 자각을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호준도 그 손길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진짜 딱딱하다. 근육이 이렇게 딴딴한 거 부러워요. 운동 얼마나 한 거예요?”

“고시 공부 할 때부터 웨이트 했어요. 근데 제 팔뚝이 그렇게 좋아요?”

“저도 제가 남자 팔뚝 좋아할 줄은 몰랐거든요?”

분명 자기가 먼저 만져 놓고는 적반하장이었다. 하긴 호준도 놀랐다. 지훈은 앞으로 보고 뒤로 봐도 헤테로였고 물구나무서서 봐도 헤테로였다. 게이이거나 바이일 거라고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별안간 자신이 좋다고 지훈이 먼저 말을 꺼내서 호준도 놀랐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 팔뚝을 만지는 걸 보니 호준은 자신의 예측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호준은 장난삼아 농담을 던졌다.

“지훈 씨는 근육질 몸매를 좋아하나 봐요?”

“저는 근력 운동 하는 거 싫어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남의 걸 보는 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에 서핑하던 형들이랑 놀았나 봐요.”

보는 걸 좋아한다니. 진작 웃통 벗고 출근할 걸 그랬다. 호준은 지훈의 취향을 몰랐던 지나간 과거를 아쉬워하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서핑하던 형들이요?”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 할 때 같이 서핑하던 백인 형들 몸이 되게 좋았거든요. 꽤 친하게 지냈는데……. 형들이 저한테 엄청 잘해 줬어요. 낮에 서핑하고 나면 맨날 자기 집에 게임팩 있다고 밤에 게임하다가 자고 가라고 그러고요. 근데 그 집에 침대 하나밖에 없는 거 알아서 게임만 하고 잠은 안 잤어요. 저 카우치에서 자는 거 싫어하거든요.”

“몇 명이나 그랬어요?”

호준이 정색하더니 목소리가 극도로 차분해졌다.

“세 명하고는 엄청 친했고 그 형들 친구들하고도 같이 잘 놀았는데……. 근데 왜요?”

“혹시 아직도 연락해요?”

“아뇨, 연락 다 끊겼어요. 누구누구 때문에 몇 년 동안 바빠서 연락 못 했더니…….”

호준의 소개팅 방해 전략이 이상한 데에서 성공적이었다.

“다시는 그 형들이랑 연락하지 마요. 영원히.”

호준이 정색하자 지훈이 어이없어했다.

“회사도 아닌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요. 사무관님 지금 제 상사 아니거든요.”

김지훈, 역시 그냥 헤테로 아니었다. 이미 살아오면서 게이들한테 인기 진짜 많았다. 눈치가 더럽게 없어서 본인만 여태 자각을 못 했을 뿐. 그래도 그러길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딴 놈들한테 먼저 뺏길 뻔했다.

호준은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어진 시간이 며칠 안 남았지만 그동안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잘해 줄 생각이었다. 지훈에게도, 그리고 호준에게도 다시없을 시간일 테니까.

최선을 다하는 건 호준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 * *

“사무관님, 무슨 생각 해요?”

“미안합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었어요.”

저녁노을 녘의 길이 예쁘다며 지훈은 길 배경으로 자신의 사진을 찍어 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지훈을 찍어 주던 호준이 문득 카메라를 든 채 별다른 반응이 없자 지훈이 카메라 렌즈에 얼굴을 들이밀고서 물었다.

“뭔 생각을 했는데요?”

“그냥 지훈 씨 생각?”

“뭐야. 사람이 앞에 있는데 뭔 생각을 또 해요. 사진이나 잘 찍어 줘요.”

지훈이 투덜거리자 호준은 미안한 마음에 다시 사진 기사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다.

“여기 앞에서 잘 나오겠어요. 한번 서 봐요.”

호준이 시킨 대로 정체 모를 동물의 동상 앞에 선 지훈이 또 혼신의 힘을 담은 허세 가득한 포즈를 취했다. 호준이 그런 지훈을 렌즈 가득히 담고 있는 중에 그 곁을 지나가던 노부부가 호준에게 다가왔다

「¿Querés que te saque una foto?」9)

호준과 지훈이 일행인 거 같은데 같이 사진 찍기를 원하느냐는 뜻이었다. 나쁘지 않은 지구 반대편의 오지랖이었다. 관광지의 흔한 카메라 도둑 같아 보이진 않았다. 호준이 지훈에게도 의향을 묻자 지훈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각자 개인 사진만 찍었지,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은 없었다. 어차피 한국 가면 다시 안 만난다고 쳐도 사진 한 장 정도 남겨 두는 건 괜찮을 것이다.

「Muchas gracias.」

호준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카메라를 노부부에게 건넸다. 호준은 지훈의 곁에 가서 섰고, 지훈이 호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보통의 친구 사이라도 가능한 정도의 스킨십이었지만, 호준은 사심이 있는 터라 약간 긴장했다. 지훈이 카메라를 쳐다보며 웃는 모습을 곁눈질하면서 보는데 괜히 떨렸다. 어제 키스할 때도 이렇게까지 떨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땐 깜깜해서 눈에 뵈는 게 없었으니까. 눈에 뭐가 보였으면 그렇게까지 못 했지 싶다.

「¡Mirá la cámara, bo!」10)

호준이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으니 노부부가 카메라를 보라며 재촉했다. 호준은 퍼뜩 정신을 차려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았다.

「Uno, dos, Tres!」

하나, 둘, 셋! 찰칵. 카메라에 불빛이 들어오며 사진이 찍혔다. 노부부는 두 남자의 모습이 보기 좋다며 껄껄 웃으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었고 호준은 여러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지훈도 며칠 사이에 ‘Muchas Gracias’ 정도는 입에 익어서 같이 고맙다고 인사했다. 노인이 특히 호준을 향해 한 마디 던졌는데 그걸 들은 호준의 볼이 약간 달아올랐다. 다행히 해가 완전히 지는 바람에 길거리가 어둑해져서 다른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저분들이 뭐라고 했어요?”

“사진 잘 나왔다고요.”

호준이 대충 둘러댔는데 다행히 지훈은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어디 한번 봐요.”

공원 구석 벤치에 앉은 후에 카메라로 찍힌 사진들을 확인하느라 지훈이 호준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지훈이 가까이 오자 호준은 또 긴장했다.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행여 들릴까 봐 애를 써야 했다. 지훈은 호준이 개수작을 잘 건다고 생각하는데 오해였다. 호준은 지훈한테 손 한번 닿을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안 그런 척하는 것뿐이다.

카메라 메모리에는 지훈이 눈을 감거나, 호준이 다른 데를 쳐다보느라 망한 사진들도 여러 장 찍혀 있었다. 노부부는 센스 있게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하지만 맨 처음 찍힌 사진을 보고 지훈은 약간 멈칫했다. 사진 속에서 호준은 오로지 지훈만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빤해서 두 사람 모두 민망해질 정도였다. 지훈이 그 사진을 한참 보자 부끄러워진 호준이 사진을 넘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지훈은 오히려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사무관님 언제 이렇게 나 보고 있었어요?”

“기억 안 나는데요?”

“흠. 기억은 없어도 사진이 남았네요.”

호준은 괜히 딴청을 피워 봤지만 소용없었다. 어쩌면 항상 그렇게 지훈을 바라보았을 것 같지만, 사진으로 찍힌 걸 보자 호준도 놀랐다. 새삼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 들어 호준도 말없이 사진만 한참을 쳐다봤다.

둘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어제 왔던 길을 다시 지나게 되었다. 지훈이 섹스 안 한다고 외쳤던 바로 그 골목이었다. 구시가지의 돌담길은 유럽과 남미의 느낌이 뒤섞인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장소였지만, 호준은 전날 난데없는 추격전을 벌였던 걸 떠올렸다. 감회가 새로웠다. 어제 지훈이 어찌나 빨랐던지, 올림픽 육상 국가 대표 선수가 쫓았어도 놓쳤을 것이다.

“어제 보니까 지훈 씨 달리기 잘하더라고요.”

호준은 순수하게 지훈의 속도감에 감탄했다.

“저 초딩 때 키 크다고 육상부도 했었어요. 그때 전문적으로 뛰는 법을 배웠거든요. 코치가 자꾸 때려서 금방 그만두긴 했는데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요.”

“어쩐지. 어제 너무 빨라서 못 잡았어요.”

“요즘에 그렇게까지 전력으로 잘 안 뛰는데. 어제는 너무……. 아, 씨발. 또 생각났네…….”

어제의 쪽팔린 기억이 몰려오자 지훈은 괴로워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가리를 좀 쪼개 버리고 싶었다. 어제의 일을 제발 호준이 잊어 줬으면 좋겠는데. 눈치를 보니 절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뒤끝 있는 성격상 영원히 기억할 것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호준은 정작 다른 생각 중이었다.

“사실 어제 그 말 듣고 좀 걱정했어요. 저랑 다니는 걸 지훈 씨가 부담스러워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지훈 씨가 혼자 다닐 만한 곳을 알려 주고 먼저 돌아가려고 했어요.”

지훈이 지구의 자기장과 우주의 기운 따위를 생각할 때, 호준은 꽤나 현실적인 고민 중이었다. 지훈은 어제 자신이 말했던 헛소리들을 호준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더 쪽팔려했다.

“그건…….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심지어 섹스 안 하겠다고 해 놓고는 몇 시간 후에 콘돔은 왜 없냐고 투덜거렸다. 지훈은 정말이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사태의 주범인 지훈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그 페이스에 끌려간 호준이라고 한 치 앞을 알았을까.

“저도요. 지훈 씨에 대해서만큼은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서, 이젠 지훈 씨에 대해 계획 세우는 걸 포기했어요.”

계획 변태가 무려 계획을 포기하다니. 지훈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호준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의 인생에 비중 있는 족적을 남겼다는 부담감이 들었다.

“그럼 나는 무계획이에요?”

“저한테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지훈 씨는. 예측이 안 돼서 좋은 것 같아요. 그냥 지훈 씨가 하고 싶은 대로 따라 하는 게 유일한 계획이에요.”

호준의 새로운 무계획의 계획은 어쩐지 지훈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계획 변태 정호준이 하는 말이면 진정성 오백 프로였다.

그리고 예측 불가 김지훈의 생각은 순식간에 또 다른 쪽으로 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 길에 아무도 없는데, 이건 제가 계획한 건 아니에요.”

지훈의 말에 호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인적이 드물었다. 저녁 어스름으로 주변이 어두워서 사람이 지나간다고 한들 골목 안쪽이 보일 리도 없었다. 호준은 지훈의 의도를 눈치챘지만 괜히 딴청을 피워 봤다.

“해가 다 졌네요. 위험한데 이만 들어갈까요? 지훈 씨 오늘 피곤할 텐데 일찍 자야죠.”

“사무관님이나 들어가서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찍 처주무세요.”

지훈이 대놓고 빈정거리자 호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아직 볼일이 남아서 안 되겠어요.”

“그 볼일이 뭔데요?”

호준은 더 지체하지 않고 지훈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지난밤의 설렘을 기억하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곧 온기에 뒤덮였다.

사실 오늘 하루 종일 여행이고 나발이고 이것밖에 생각 안 했던 두 사람은, 해가 져야만 용기가 나는 것처럼 이제야 조심스럽게 서로를 탐색했다. 호준은 어제보다 좀 더 과감하게 지훈의 뒤통수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두 혀와 입술은 더 질척이며 어제보다 익숙해진 입안을 더듬었다.

오늘은 작정하고 자극하겠다는 듯, 호준의 혀가 지훈의 예민하고 말캉한 입 안쪽 피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지훈은 격렬한 자극에 헐떡이면서도 본능적으로 호준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온 얼굴에 열이 올라 목덜미까지 뜨거워졌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두 사람에게서는 알큰한 땀 냄새가 향수 냄새와 묘하게 뒤섞여 났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자극적이었다. 지훈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호준의 뜨거운 체향을 잔뜩 들이마셨다.

그 와중에 멀리서 행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둘은 곧 입술을 떼어 냈다. 제정신이 든 호준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어때요? 하루 정도 더 생각을 해 봤을 거 아니에요.”

여전히 지훈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호준이 속삭였다. 지훈은 그 낮게 깔린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 목소리로 하는 말은 속이 터지지만. 지훈은 호준이 자기 좋다면서 왜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늘은 섹스하자고 말하면 되는 건가요? 저 안 볼 때 술 안 마셨죠? 콘돔 샀어요?”

“생각해 본 거 맞아요?”

호준이 지훈을 흘겨보며 되물었다. 아무리 봐도 지훈은 당장 아랫도리 사정이 급해서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투였다.

“지구 반대편에 온 김에 상사랑 한번 해 보고 싶거든요? 자기장의 기운을 거역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남자랑 할 생각이 들었어요?”

이쯤 되자 지훈은 호준이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훈은 한숨을 크게 내쉰 다음 호준의 품에서 벗어났다. 거리를 좀 두려고 상대를 밀쳐 내고는 그 상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 남자 아니고 호감이 있는 상대라고 해야죠. 인생의 원수 같은 놈이긴 한데 휴가 왔다가 만난 거니까 상사도 아니고 위력이니 그런 것도 없고. 같이 놀다 보니까 좋아져서 제 자유 의지로 섹스할 맘이 생겼어요. 나도 아무하고나 섹스하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사무관님하고는 왠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남자지만 너무 잘생기고 몸이 좋아서 한번 해 봐도 괜찮을 것 같고요. 혹시 사무관님이 이걸 다 떠나서 진지하게 사귀는 관계 아니면 섹스 못 한다는 주의라면 나도 할 말 없어요. 솔직히 진지하게 사귈 정도로 좋은 건 아니니까.”

지훈은 자기 딴엔 호준이 걱정할 만한 요소들을 하나하나 다 꼼꼼하게 분석해서 발표했다. 이쯤 되면 ‘정호준-김지훈 간 섹스 타당성 검토 보고서’라고 제목 달고 나와도 될 정도다. 나름대로 정호준 사무관이랑 일한 지 2년이 넘은 김지훈 대리였다. 지훈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둘은 업무 호흡도 잘 맞는 편이었다.

“솔직히 사무관님도 나를 좋다고 하고, 또 몇 대 때렸더니 여태 쌓인 분도 좀 풀렸어요. 어제는 자존심 세웠던 게 좀 쪽팔리기도 하고 나도 긴가민가해서 솔직히 말을 잘 못했어요.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생각을 잘 해 봤는데, 그냥 계속 좋았어요. 하고 싶어졌고요. 이쯤 되면 충분한가요? 저 가볍게 말하는 건 아니에요.”

“알겠어요. 지훈 씨가 무슨 생각인지. 말해 줘서 고마워요.”

다행히 섹스 타당성 평가 결과 적합 판정을 받았다. 지훈은 호준이 얼른 결재 올리고 시행하길 기다리면서 호준을 빤히 쳐다봤다. 저 속 터지는 인간한테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반듯한 얼굴을 보니까 또 그럴 만한 것 같았다. 짜증이 났다.

“사람을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만들어야 속이 편해요?”

민망해진 지훈이 투덜거렸다. 호준이 그런 지훈의 어깨를 붙잡았다.

“미안해요.”

미안해하는 얼굴이 잘생겨서 또 지훈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전에는 얼굴만 봐도 화딱지가 났는데 대체 왜 이러지.

“사무관님이 저한테 미안한 게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지금. 그러니까 빨리 몸으로 갚으라고요.”

마음이 급해진 지훈이 호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더 이상 지훈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도 지훈은 호준의 생각을 훌쩍 앞서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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