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7)

12.

아아아아아악!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지훈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침대로 파묻혔다. 숙소까지 전력 질주하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찼지만 피로보다는 쪽팔림이 더 컸다.

역대급 말실수였다. 이제까지 살면서 의도치 않게 내뱉은 말 중에 가장 멍청한 소리였다. 이를 깨닫자마자 지훈은 어떤 방법으로도 수습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방법은 도망뿐이었다. 지훈은 놀란 호준을 길에 버려두고 그대로 튀었다. 호준이 자신의 뒤를 쫓아왔는지는 기억도 안 났다. 무작정 질주했다. 간만에 심장이 터질 만큼 뛰었지만 그렇다고 쪽팔림이 사라지진 않았다.

“아! 씨발! 어떡하냐.”

도대체 ‘섹스 안 해요’가 뭐냔 말이다. 거기서 왜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그냥 섹스 한번 하자는 말보다 더 이상했다! 차라리 ‘좋아해 주세요’ 타령에서 끝났으면 어떻게든 뒷수습이라도 할 텐데! 살다 보면 그런 헛소리를 하게 되는 멍청한 순간이 가끔 오긴 하는데, 하필 그게 왜 정호준 앞에서였을까. 왜 망할 무의식은 쓸데없이 야한 생각만 해서!

세상 쪽도 한두 번 팔아야지, 이제 매진이다. 이제 얼굴에 깔 남은 철판이 없었다. 남은 여행은 어쩌지? 이 상태로 둘이 붙어서 여행을 다닐 순 없는 일이다. 호준의 말대로 이제 진정 따로 다녀야 했다. 그렇다고 따로 다니자니 지훈은 또 눈앞이 막막했다. 여행 가이드 없이 어떻게 다니느냔 말이다! 여태 꿀 빨았는데! 참담한 현실에 지훈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발을 동동거렸다. 매트리스 스프링 탄력이 좋아서 야속한 다리가 더 통통 튀어 올랐다.

죽을까? 그래. 죽자. 어차피 좆 될 인생 미리 죽자.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그것밖에 답이 없다. 하지만 창가로 달려간 지훈은 2층짜리 건물의 높이를 보자 무서워져서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야. 죽기 싫어. 내가 왜 죽어? 바다에 빠져서도 살아난 소중하고 고귀한 내 생명, 정호준 때문에 마감할 수 없다. 목숨을 구해 준 건 고맙지만 소소하게 복수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더 살아야 한다.

그래,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그냥 사실 적시 한 것뿐이다. 그냥 여행 같이 다니자고 했고, 나를 계속 좋아하라고 허락했고, 섹스는 안 한다고 했다! 내가 딱히 좋아한다고 고백한 건 아니잖아?

……은 개뿔.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이었다.

말실수라고 우길까? 그게 먹힐까? 정호준은 대체 어디까지 간파한 걸까. 설마 하루 종일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의 실루엣을 은근히 흘겨보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은 등에 업혔을 때부터 상체 근육을 눈여겨봤다는 것도? 호준이 눈꺼풀을 내리깔 때 길고 짙은 속눈썹 아래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넓이를 적분으로 구해 보려 했던 것도? 전부 다 알아차렸을까?

생각할수록 지훈 본인이 더 변태 같았다. 이쯤 되면 그냥 얼레리꼴레리 하고 싶어 하는 게 나을 거 같다.

“아, 씨발!”

객관적으로 성찰해 보자면, 여행 같이 다니자는 제안을 승낙할 때부터 의식을 하긴 했었다. 상대가 자길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호준이 싫어 죽겠는 이성과는 상반되는 은근한 감정을 지훈은 영원히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연애 안 한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정규직 확정되니까 사람이 긴장이 풀어져서 마음이 기우는 걸지도 몰랐다. 하필 가까이에 호준이 있었을 뿐.

아무튼 지훈은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갑자기 찾아오는 게 이해도 안 되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여행 좀 같이 다녔다고, 자길 좀 멋있게 구해 줬다고, 평생 원수 같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좋아진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지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정신 차려 보니까 좋아하고 있었다는 호준의 말이 떠올랐다.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자각하기 시작하니 사정없이 이끌렸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 맨날 봐서 그런 것 같았다. 한동안 안 봐야 정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도망치려니까 이미 도망쳐 온 거라서 지구 반대편이다.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한국이잖아. 180도 변하려다가 360도 변해 버린 수많은 새해 결심들이 떠올랐다. 지구를 반 바퀴를 돌았는데도 이 지경이면 지구를 벗어나지 않는 한 답이 없었다. 대기권을 뚫을까? 쪽팔림은 이미 성층권 정도는 뚫은 것 같으니까 몸도 같이 날아가면 완벽할 것 같다.

그 순간, 지훈은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지구 반대편! 지구 반대편에 오니까 모든 게 반대로 되어 버린 거다. 중력도 180도 바뀌고 상황이 180도 바뀌는 바람에 지훈의 정신도 180도 돌아 버린 것이다. 지극히 과학적인 원리로다가 우루과이는 한국에서 정확하게 지구 반대편이라서 우주의 기운과 지구의 자기장이 반대로 작용하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어쩔 수 없이 정호준에게 끌리는 것뿐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360도 돌아가는 거니까 감정도 생각도 원래대로 되돌아갈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불가항력이야! 우주의 기운 때문인 걸 어떡하느냐고! 우주의 기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무관님한테 좀 끌렸다고 하자.

대차게 차 놓고는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게 쪽팔리지만, 그 무엇도 지구 반대편에서 당신이랑 섹스 안 한다고 외친 것보다 더 쪽팔릴 수는 없었다.

그래, 어차피 여기서 있었던 일은 돌아가면 없는 일로 한다면서. 일단 이렇게 둘러대고 나중에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다. 그런 약속 같은 걸 해 두길 천만다행이었다.

마음 정리를 이상하게 끝낸 지훈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아까 얼핏 소리를 들었는데 호준도 숙소로 돌아온 것 같았다. 호준을 찾아가 볼 요량으로 지훈은 방문을 힘차게 열었다.

“으아악!”

쿵!

때마침 노크하려던 호준은 하필 지훈의 방문이 바깥으로 열리는 바람에 그만 문과 마빡 박치기를 하며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헉! 사무관님, 괜찮아요?”

단단한 철문과 호준의 해골이 부딪치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렸다. 지훈은 얼른 달려 나왔다. 호준은 두 손으로 이마를 붙잡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지훈이 다가가며 묻자 호준이 심약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안 괜찮아요…….”

보통은 아파도 괜찮다고 하지 않나? 빈말도 안 나오는 거 보니 진짜 아팠나 보다.

“미안해요. 저는 마침 밖으로 나가려고 한 건데…….”

“네, 그랬겠죠.”

어쩐지 말에 뼈가 있다.

“절대로 사무관님이 들어오실 줄 알고 일부러 절묘한 타이밍에 문을 연 건 아닙니다.”

“믿을게요.”

호준의 떨떠름한 말투와 원망의 눈빛을 보니 절대로 안 믿는 눈치였다.

“마빡에 얼음찜질해 드릴까요?”

“그냥 볼일 보세요. 나가려고 했다면서요.”

호준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는데 가만 보니 눈가가 좀 촉촉한 것 같다. 많이 아팠나 보다.

“사무관님은 제 방에 들어오려던 거 아녜요?”

“급한 일은 아닙니다.”

“마침 저도 사무관님한테 할 말 있어요.”

* * *

그날 여행은 그대로 망했지만 밥은 먹어야 했다. 대형 사고를 친 와중에도 눈치 없는 위장은 정직하게 일을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숙소 근처의 로컬 식당에 가서 고기 같아 보이는 걸 몇 인분 주문했다. 둘은 맨정신으로 서로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병맥주도 주문했다. 단둘이서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었지만 둘 다 그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지훈은 이제 결심은 섰지만 대체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식사하는 내내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기만 하다가 그만 음식에 더 집중해 버렸다.

호준은 그런 지훈을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맥주를 몇 모금 마셨다. 하지만 식사가 거의 끝나고 접시에 감자튀김 정도만 남았을 무렵에도 지훈이 아무 말 없자 호준은 못 참고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지훈 씨가 갑자기 도망가서 대답을 못 했는데요.”

“무슨……. 아, 그건!”

도망가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 버린 지훈이 당황해서 수습하려 했지만 호준의 입이 더 빨랐다.

“저도 지훈 씨랑 섹스 안 합니다.”

“네? 지금 저 밥 먹는데 왜 그래요! 다 먹고 얘기하지!”

심각한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남은 감자튀김을 야무지게 케첩에 찍어 먹던 지훈이 팔짝 뛰는 데 반해 호준은 너무나 태연했다.

“지훈 씨도 아까 뜬금없이 저랑 섹스 안 한다고 했잖아요.”

“아, 그걸!”

내면에서 다시 벅차오르는 쪽팔림 때문에 지훈은 괴성을 지르며 테이블에 고개를 파묻었다.

“제가 절대로 사무관님이랑 그걸 할 생각을 했던 게 아니거든요? 그건 진짜 너무나도 말실수…….”

혼자 횡설수설하는 지훈이 새삼 귀여웠다. 호준은 이럴 때가 아닌 걸 알지만 조금만 놀리고 싶어졌다.

“안 하겠다는 말이 말실수면, 결국 하겠다는 건가요?”

“네? 아니요! 절대요! 아무튼 안 할 건데요! 저는 사무관님의 몸이 좋다거나 힘이 좋다거나 그런 생각도 하나도 안 했어요!”

지훈의 말실수는 변명을 할수록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본인은 자각 못 하는 것 같았다. 호준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참느라 안면 근육에 힘을 많이 줘야 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음. 믿을게요.”

호준은 안 믿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지훈은 많이 초조해졌다.

“지금 안 믿잖아요!”

“그럼 지금부터 믿을게요.”

“믿어 주셔야 해요…….”

지훈의 얼굴이 새빨개지다 못해 터지기 직전의 토마토 같았다. 저러다간 얼굴 터지겠다. 호준은 가까스로 농담을 거두고 진담만 말했다.

“아직 저는 관계 부처 상관이고 지훈 씨는 산하 기관 직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지금 휴가 중이고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사소한 언어나 행동에 의해서 위력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고요. 저는 절대 그걸 행사할 생각이 없고, 더군다나 지훈 씨가 안 하겠다고 선언까지 했으니 지훈 씨가 염려하는 그런 관계는 없을 겁니다.”

정호준은 안 하겠다고 결심하면 절대로 안 할 사람이었다. 게다가 지금 지훈이 미처 생각 못 했던 부분까지 짚어 버렸다. 지훈을 조금 놀리긴 했지만 지훈의 말실수를 추궁하지 않고 그냥 여지를 깔끔하게 차단하는 것도 정호준다웠다. 지훈은 자신의 역대급 말실수를 호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선에서 정리해 버린 것에 새삼 놀랐다.

물론 뒤끝은 있었다.

“저는 대답했으니까, 이제 지훈 씨가 대답해 줘요. 아까 좋아해 달라고 한 말, 무슨 뜻이에요?”

호준은 지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호준에게는 계속 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지훈의 말이 더 중요해 보였다.

지훈은 자신이 무척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러워졌다. 방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긴 했는데 그래도 영 말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말을 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호준에게 회피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지훈는 사실 알고 있었다. 기껏 도망쳐 놓고는 결국 이렇게 다시 마주 보고 앉아 있지 않은가. 이 인간은 방금 본인이 했던 것처럼 언제나 정공법뿐이었다.

지훈이 김 인턴이었을 시절, 업무 중 큰 실수를 뒤늦게 발견한 적이 있었다. 난생처음 큰 사고를 쳤다는 생각에 겁이 나서 호준의 연락에 반응도 안 하고 퇴근 시간만 기다리며 벌벌 떨고만 있었다.

하지만 호준은 옆자리 직원을 통해서 기어코 전화를 걸었다. 지훈이 느끼기엔 굉장히 짜증 내는 듯한 목소리로, 무슨 일 있냐고 문제가 생겼으면 바로바로 보고를 해야 하는 게 회사 일이라고 조곤조곤 잔소리를 퍼부었다. 지훈이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실토했는데, 엄청 혼을 내리라는 예상과 달리 호준은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몇 분 후에 연장된 일정과 상황 수습 방안을 적은 이메일을 보내왔었다. 호준의 일 처리를 보면서 회피는 그다지 좋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훈은 그때 알았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솔직히 지훈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호준에게 할 수 있는 만큼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방금 전 말실수도 수습하는 걸 보니, 호준은 사적인 일도 잘 정리할 것 같았다. 어쩐지 이해해 줄 것도 같고. 그러니 조금 쪽팔리지만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 도망치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지훈은 한숨을 크게 들이쉰 후에 입을 열었다.

“제가……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봤는데요.”

“네.”

지훈이 하도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아서 호준은 침착하게 들을 준비를 했다.

“저 사무관님 싫어요. 솔직히 아직 쌓인 거 많아요.”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새삼스러웠다. 호준의 가슴에 괜히 비수가 꽂혔다. 2년 반 동안 짝사랑 상대를 향한 눈치를 밥 말아 먹은 대가는 참혹했다. 자기가 2년 반 동안 달달 볶아 댄 것 때문에 지훈이 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는 건 이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알고 있어요.”

“볼 때마다 좀 때리고 싶어요.”

문득 호준은 지훈에게 처맞은 등짝이 따끔거렸다. 방금 전 문짝과 부딪치느라 혹이 난 이마도 얼얼하게 아파 왔다. 모두 지훈의 작품이다.

“아직 덜 때렸어요?”

“멀었어요.”

아직 멀었다니……. 대체 얼마나 더 때릴 셈이지? 그래도 완전히 죽이려 들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호준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요…….”

지훈은 저 혼자 속으로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의도치 않게 굉장히 뜸을 들였다. 그거 기다리는 동안 남북통일 선언문이 먼저 발표될 기세였다. 호준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근데 좋아요.”

“뭐가요?”

하도 뜸을 들인 탓에 말은 목적어를 잃었다. 호준이 되묻자 지훈은 곧바로 덧붙였다.

“사무관님이요.”

“방금은 저 싫다면서요.”

“그러니까요. 싫은데 좋아요. 저라고 이 사실을 쉽게 인정할 수는 없었어요. 제가 여태 당한 걸 생각하면 사무관님을 엄청 싫어해야 하는데 역시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지구 반대편이라서 자기장이 반대로 작용하는 거 같아요. 우주의 기운이 역행한달까? 지금 상황이 180도 돌아 버린 거잖아요.”

“뭐라고요? 우주의 기운이요?”

“사무관님은 문과라서 잘 모르시겠지만요, 과학 법칙 중에 그런 게 있어요.”

호준은 비록 문과 출신이었지만 사이비 유사 과학은 구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조신한 남자의 덕목을 다하기 위해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는 지훈이 이어서 한 말 때문에 호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여행하는 내내 되게 좋았어요. 사무관님이. 여기 와서 만나니까 일할 때랑은 좀 다른 사람 같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요. 저한테 여행 내내 엄청 잘해 주시고, 어제도 저 구해 주셨잖아요. 그때 등에 업혔을 때도 솔직히 좀 좋았거든요. 사실 제가 사무관님을 좋아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끌리는 거 같긴 해요. 그런데 사무관님이 갑자기 마음을 접을 거라고 말하니까 기분이 좀 별로였어요. 난 이제 막 생각 중인데.”

“…….”

“이상하죠. 좀 이기적인 것 같은데. 한국 돌아가면 다시 달라질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까 저보고 계속 좋아해 달라고 했어요?”

“네…….”

사실 지훈이 말하는 모든 것들이 호준에게는 뜻밖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뭔 꿍꿍이가 있나 보다 했더니 이런 얘길 꺼내들 줄은 정말 예상도 못 했다. 지훈의 모든 행동이 늘 호준의 예상과 계획에서 벗어나곤 했지만 이번엔 정말 궤도 밖이었다. 지훈의 입에서 자기 좋단 소리가 나올 줄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별안간 자기가 좋단다.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겠단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가면 또 바뀔 것 같단다. 상당히 우발적이면서 체계적인 마음가짐이었다. 그렇게 싫다고 치를 떨더니 대체 또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여행 다니는 내내 옆에 있었는데 호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같이 여행 다니는 건 재밌다고 했던 건가?

어찌 되었건 지훈이 너무 혼란스러워해서, 호준은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호준의 입장에서는 잠시나마 자기 좋다는 지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일단 진정은 시켜야 할 것 같았다.

“전에 얘기했잖아요. 여기서 있었던 일은 없던 일로 하기로. 어차피 한국 돌아가면 피차 볼 일 없을 텐데.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전 아직 지훈 씨 좋아해요. 적어도 여기 있는 동안은 계속 좋아할 거고요. 지훈 씨가 그런 방향이면 나한텐 좋은 일이죠. 그러니까 지훈 씨는 눈치 보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된다니!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진작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던 지훈은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냥 자존심이 좀 상해서 자신의 감정을 납득 못 했을 뿐이다. 그리고 호준은 자기 입으로 이런 애매한 마음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니 정말로 지훈은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된다.

지훈이 쓸데없는 것들을 걱정하는 사이 호준은 이번에도 간단한 솔루션을 가져왔다.

“그런데 한국 돌아가면 진짜 없었던 일이 되나요?”

“서로 볼 일도 없고, 만나도 모르는 척하죠, 뭐. 그리고 지훈 씨 말대로 여긴 지구 반대편이니까요.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 낯설었던 감정도 사라질 테고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죠.”

“그러니까 결론은 지금 지구 반대편이라 우주의 기운이 반대로 작용해서 이렇다는 거죠?”

호준의 설명을 지훈이 논리 점프와 유사 과학으로 간단히 압축시켰다. 아무튼 의미는 통한 것 같아서 호준은 그냥 맞는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사무관님은 마음이 마음대로 되세요?”

“저도 잘 안 돼요. 그냥 그런 척하는 거지. 근데 그건 지훈 씨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요.”

호준은 태연한 척하며 앉아 있었지만 도대체 지훈이 무슨 생각인지를 알 수 없었다. 보통 좋으면 좋다고 어필을 하고 싫으면 싫다고 피한다. 이렇게 사람을 앞에 두고 당당하게 내적 갈등을 겪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호준도 그런 지훈을 꼬실 마음이 영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우물쭈물하는 지훈을 낚아채서 홀랑 잡아먹자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호준은 지훈의 혼란을 이용하거나, 그 감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오랫동안 지훈에게 상관이었다. 그 관계에서 은연중에 비롯되는 위력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지훈이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물론 남이 보면 연애를 할 때도 정도定道만 걷는 호준이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는데,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너 나 좋아한다며! 일단 계속 좋아할 거라며! 작정하고 꼬셔도 모자랄 판에 저 인간은 벽을 치고 앉았다. 대체 왜 저럴까.

호준의 바로 그 속 터지는 점이, 이제 막 마음 가는 대로 하려는 지훈의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뜻밖의 효과가 있었다. 지훈은 이참에 아침나절부터 생각만 하고 있던 걸 그냥 말해 버렸다.

“사무관님, 그래서 말인데요. 저한테 뽀뽀하셔도 돼요.”

푸흡!

호준은 놀라서 그만 마시던 맥주를 뿜어 버렸다. 다행히 지훈은 호준의 반응을 예상했던 터라 요령 있게 몸을 돌려 피해를 막았다. 호준이 콜록거리는 동안 지훈은 얼른 냅킨을 건네줬다.

“안 할 겁니다.”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연 호준의 대답에 지훈은 실망했다. 해도 된다고 하면 바로 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았다. 줘도 못 먹는 호준을 보며 지훈은 다시 호준 대원군의 척화비를 실감했다.

“왜요? 사무관님 저 좋다면서요.”

“저라고 무작정 스킨십하고 싶진 않아요. 특히 지금 당장은요.”

호준은 대체 지훈이 무슨 맥락으로 저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웠다. 혼자서 진도를 저 멀리 빼고 있었다. 호준은 문득 이 사람을 따라가기 벅차다는 생각을 했다.

“사무관님 저 좋아하는 거 맞아요? 저 같았으면 상대가 긴가민가할 때 꼬셔서 홀랑 잡아먹었겠어요.”

김지훈,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했더니 진짜 제 맘대로 하고 있었다. 이건 뭐 자기가 긴가민가하니까 지금 대놓고 홀랑 잡아먹어 달라는 말인 건가? 안타깝게도 호준은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그런 건 제 방식이 아니라서요. 상대가 긴가민가하면 확신을 주는 게 먼저 아닐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러니까 연애하는 데 백만 년씩 걸리는 거였다. 지훈은 압력 밥솥도 아니면서 뜸 들이는 데 오만 정성을 다 들이는 호준이 좀 답답했다. 그러니까 명색이 일등 신랑감인데도 계약직 대리한테 쩔쩔매는 솔로구나.

“전 연애를 ‘잘’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상대한테 진심인 게 더 중요하죠.”

호준이 덧붙인 말에 성질 급한 지훈은 속이 터졌다. 호준은 진심만 있는 인간이었다.

“사무관님, 그 진심이 통하려면 가끔은 의식적인 요령이 좀 필요하거든요.”

호준은 정말이지 그 요령을 좀 익힐 필요가 있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지훈은 일부러 호준의 옆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오며 말했다.

“아무래도 사무관님한테 요령이 필요한 것 같아요.”

분명 내가 호감 있는 것보다 저 인간이 나를 더 좋아할 텐데 대체 왜 내가 이러고 있는 거지? 지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며 호준에게 다가갔다.

“어떤 요령이요?”

호준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진심을 표현하는 요령?”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데요?”

호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지훈은 일단 호준의 맥주잔을 뺏어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호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제가 남자 꼬시는 법을 어떻게 알아요. 사무관님이 저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저도 잘 모르는데……. 이러면 될까요?”

호준은 손을 살짝 뻗어 지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더니 귓바퀴를 훑고는 귓불을 살짝 꼬집었다. 곧바로 내려온 따끈한 엄지손가락이 지훈의 입술을 살짝 훑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손을 떼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점잖은 표정으로 이만 나가자며 빠르게 계산을 하더니 후다닥 떠나 버렸다.

난데없는 호준의 스킨십에 얼이 빠진 지훈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곧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인간……. 모르는 게 아니라 다 알고서도 그냥 안 한 거였다! 완전 능구렁이였잖아! 그냥 지훈이 먼저 안달 날 때까지 기다린 것뿐이었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지훈은 허둥지둥 호준을 뒤따라 나갔다.

“사무관님, 그런 개수작은 어디서 배웠어요?”

늦은 밤의 구시가지는 인적이 드물었다. 간간이 있는 가로등 아래의 나뭇잎이 빛을 반사할 뿐이었다. 한국과 반대로 여름이 끝나고 가을에 접어드는 바닷가 마을의 밤공기는 적당히 서늘했다.

지훈은 약간의 술기운과 방금 전 호준의 수상한 스킨십 때문에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타고났어요.”

호준의 뻔한 거짓말에 지훈의 코웃음을 쳤다.

“사무관님 연애 겁나 많이 해 봤죠? 남자들한테 인기 엄청 많았죠? 사무관님 엄청 잘생기고 몸도 좋잖아요.”

지훈이 길쭉한 다리를 내디디며 호준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호준은 평소보다도 더 천천히 걷고 있었다. 지훈은 호준과 나란히 걸으려고 보폭을 느긋하게 맞추었다.

“지훈 씨가 저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사람 아니에요. 지훈 씨도 알잖아요. 저 별로 재미없는 거.”

“사무관님은 얼굴이 재밌어서 괜찮아요.”

“제 얼굴이 재밌어요?”

“잘생기면 얼굴만 봐도 좋거든요.”

지훈의 플러팅도 만만치 않았다. 본인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마음대로 하라고 한 이후로 지훈은 정말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술을 좀 마셔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아까보다 기분은 확실히 좋아 보였다. 그런데 순진하게 내뱉는 말 사이에 은근히 노림수가 있었다.

“제가 잘생겼어요?”

일부러 딴청 부리면서 물어봤더니 지훈이 어이없어하면서 발끈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사무관님한테 잘생겼다고 하지 않느냐고요. 제가 그 얼굴이었으면 사무관님처럼 공부 안 했어요. 아이돌 되려고 오디션 보러 갔지.”

솔직히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유의 절반은 호준의 얼굴이었다. 물론 나머지 반은 잘 키운 몸 때문이었고. 안 그럼 여행지에서까지 만나 버린 지긋지긋한 상사한테 넘어갈 이유가 하등 없었다.

“지훈 씨한테 잘생겼으면 됐어요.”

일단 지훈의 장단을 맞춰 주는 호준이었다. 이거, 설마 술주정인가? 어쩌면 지훈의 술버릇일지도 모른다. 혼자 맥주만 다섯 병을 마셨다. 적은 양은 아니지만 취할 정도는 아닐 텐데. 지훈을 보면 딱히 취한 것 같진 않았지만 확실히 평소보다 들떠 보이긴 했다.

호준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언제 또 지훈과 이러고 놀까 싶었다. 지훈한테는 돌아가면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지만, 호준은 평생 기억할 작정이었다.

“근데 사무관님은 지금 상황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이랬다저랬다 해서 싫은 건가요?”

“설마요. 지금 엄청 좋아요.”

지금 터질 것 같은 호준의 광대가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호준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지훈을 끌어안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일부러 숙소까지 천천히 걸어갈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마냥 즐기기엔 너무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런데 별로 티가 안 나요. 하긴 그러니까 저도 2년 넘게 몰랐잖아요.”

“회사에서는 티를 내면 안 되니까요.”

“그럼 지금은 티 내 봐요. 아까 장난 아니던데.”

“개수작이라면서요.”

식당에서 귓불 만진 걸 지훈이 언급하자 호준이 좀 민망해했다. 그런 식의 접근은 호준의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훈이 원하는 눈치라서 한번 해 줬더니 너무 당황하기에 약간 후회하던 차였다.

“그럼 개수작 한 번 더 해 봐요. 잘하는데 왜 안 해요.”

“내가 개수작 잘하는 것 같아요?”

그 정도면 긴가민가한 사람을 홀랑 꼬셔 버리기엔 충분한 것 같다고 말하려다가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호준이 걸음을 멈추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옆에 있던 지훈을 길 안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준의 팔 힘에 이끌려 안겨 버린 지훈은 놀랐다.

“거봐요. 이러면 놀라잖아요.”

“갑자기 안으니까 그렇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훈은 잠자코 있었다. 사실 호준은 장난삼아 한번 힘 줘서 안은 후에 살짝 풀어 주려고 했는데 지훈이 품에서 안 나가고 버티고 서 있었다. 싫진 않은 듯해서 호준도 계속 안고 있었다. 사실 이러고 있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호흡을 가다듬느라고 뭘 더 할 수도 없었다.

지훈은 호준의 따끈한 몸도 좋았고 옷자락 아래로 느껴지는 탄탄한 몸도 좋았다. 여행 다니는 내내 은근히 눈길이 갔으니까 지훈에게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려니 이제 대놓고 좋아할 뿐. 호준의 몸에서 은근히 나는 달짝지근한 냄새도 의외로 좋았다.

둘의 키가 엇비슷했기 때문에 가슴팍이 거의 맞닿았다. 지훈은 조용히 손을 올려 호준의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다. 물론 탄탄한 가슴팍에도 흑심이 있긴 했지만 지훈은 다른 것 때문에 놀랐다.

“사무관님. 혹시 고혈압이세요?”

“저 정상 혈압인데요.”

“적어도 지금은 아닐걸요. 지금 심장이 엄청 빨리 뛰는데…….”

“지훈 씨 때문에요.”

지훈의 손이 가슴에 올라와 있으니 호준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사무관님 건강에 좀 해로운가 봐요.”

“원래 맛있는 게 몸에 안 좋…….”

말을 하다 말고 호준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바짝 붙어 있는 지훈을 얼른 품에서 떼어 냈다. 골목이 어두워서 얼굴이 새빨개진 게 안 보였다.

“미안합니다. 괜한 소릴 했네요.”

자기가 말해 놓고 민망해하는 호준을 보면서 지훈은 생각했다. 이 인간, 겉으로는 점잖은 일등 신랑감이지만 한번 고삐 풀리면 누구보다 야한 농담 잘할 거라고. 얼마나 잘할지 궁금해졌다.

“저 맛있는 거 사무관님이 어떻게 아는데요?”

지훈이 놀리자 호준은 그런 말을 잘도 한 주제에 상당히 난감해했다.

“그건……. 제 말실수도 한번 봐줘요.”

“실수 아니잖아요. 안 궁금해요?”

지훈이 그대로 호준의 몸을 끌어당기더니 작게 속삭였다.

“저 아까도 말했는데. 뽀뽀해도 된다고.”

호준은 속절없이 당하는 기분이었다. 자길 진짜 조금만 좋아하는 거 맞아?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 주면 제아무리 인내심 대단한 정호준이라도 더는 참기 어려웠다. 방금 전 포옹으로 이미 달아오른 몸이었다.

호준은 그대로 지훈의 얼굴을 붙잡고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이 아주 조심스럽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주 짧았지만 델 듯이 뜨거웠다.

호준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점에 본능적으로 눈을 잠깐 감았던 지훈은 자신의 입술에 닿는 낯선 감촉을 제대로 느꼈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로 뽀뽀했다.

호준이 입술을 떼자 지훈은 다시 눈을 떴다. 잘생긴 호준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지훈은 순간 확신이 섰다. 나 이 남자 좋아하나 봐.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 버린 지훈이 그대로 팔을 뻗어 호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호준도 지훈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시 키스했다. 축축한 입술이 이번엔 더 깊숙하게 맞닿았다. 호준에게선 맥주의 단내가 뒤섞여 났다. 숨은 뜨거웠고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번엔 좀 더 본격적이었다. 호준은 지훈의 턱을 붙잡고 조금씩 입술을 달싹이며 움직였다.

몇 년 동안 상상만 해 왔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터라 호준은 자제하기 어려웠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믿기지도 않았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벅차올랐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붙잡느라 호준은 숨을 골라야 했다. 상대를 당장 어떻게라도 하고 싶은 내면의 본능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상대가 놀라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나아갔다. 숨은 거칠었지만, 입술의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윗입술을 벌리면서 아랫입술까지 입안에 머금으며 빨아 당겼다. 말랑하면서도 축축한 감각을 느끼며 지훈도 서서히 입술을 벌렸다. 꽤나 집요하게 호준은 지훈의 입술과 입안 곳곳을 끈적하게 핥았다. 입안의 모든 영역을 천천히 진득하게 탐색했다. 입안의 빈틈을 파고들면서 두 혀와 타액이 질척하게 뒤엉켰다. 뜨거워진 숨을 간간이 교환했다. 느긋하고 끈기 있고 친절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입안의 뜨거움을 더 이상 감당 못 할 때가 되어서야 지훈이 살짝 입술을 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호준이 그런 지훈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아쉬운 듯 입술을 떼어 냈다.

남자와의 키스는 처음이었지만 생각보다 좋아서 지훈은 내심 놀랐다. 살다 살다 인생의 원수 정호준과 키스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마음이 이렇게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니까 정말 좋았다.

지훈은 다시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호준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았다. 표정은 침착해 보이지만 두 볼은 달아올라 있었다. 자길 쳐다보는 눈은 끓어오를 것 같았다. 입술은 타액 때문에 반들거렸다. 솔직히 야했다. 당장 이 남자가 자길 덮쳐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이 두렵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러길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번 자각한 마음은 이제 거침이 없었다.

“만약에 불쾌했다면 지금 당장 없던 일로 해도 좋아요.”

호준은 한껏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는 잘도 그런 말을 했다. 나름대로 남자와는 처음 경험해 봤을 지훈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려면 키스를 좀 못하셨어야죠.”

“네?”

“일단 지금은 계속해요.”

“그건 안 됩니다.”

호준의 말에 지훈은 당황했다.

“왜요?”

“더 하면 저 진짜 못 참아요.”

“뭐를요?”

몸을 황급히 떼어 내는 호준을 보면서 지훈은 눈치챘다. 지훈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 인간의 몸이 지금 자신과 얼레리꼴레리를 하고 싶어 한다. 그 사실이 지훈을 기분 나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들뜨게 했다. 남자한테 욕망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아무튼 호준은 같은 남자가 봐도 자극적인 면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만 봐요.”

한곳을 바라보는 지훈의 시선이 노골적이라 호준이 한마디 했다.

“죄송해요. 근데 제가 아까 섹스 안 한다고 했던 거 지금 취소해도 되나요? 말실수는 봐준다면서요. 제가 하자고 하면 사무관님도 취소하는 거죠?”

지훈이 아까 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 했다. 그냥 지금 침대로 가도 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소용없었다.

“지훈 씨가 취소해도 오늘은 안 됩니다.”

지훈을 대할 때면 예상과 다른 전개 때문에 호준은 늘 당황했다. 낮에 지훈이 도망갈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호준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까는 섹스 절대 안 한다고 해 놓고 이건 또 무슨 전개란 말인가. 지훈에 관해서는 단 한 스텝도 예측이 불가능했다.

“지훈 씨, 아무리 마음 가는 대로 한다지만 섹스는 하루 정도 더 생각해 봐요.”

“그럼 키스까지는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건…….”

누가 꼬셨든 간에 먼저 입술 박치기를 해 왔던 당사자인 호준은 난감해했다.

“농담이에요. 사무관님이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요.”

지훈 스스로가 생각해도 모든 게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더 놀랐을 호준의 신중함을 존중하기로 했다. 못내 아쉬워하는 와중에 호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원래 사귀는 사이 아니면 술 먹고 섹스 안 합니다.”

“뭐라고요? 왜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그럼 술김에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건 제 원칙이라서요. 미안합니다.”

상상도 못 한 호준의 건실한 가치관에 큰 충격을 받은 지훈은 뒷목을 잡았다. 이 사람이 일등 신랑감인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인류의 훌륭한 자원인 정호준의 얼굴과 몸은 이렇게까지 도덕적으로 완벽한 스스로의 원칙으로 인해 즉흥적인 욕망으로부터 보호되고 있었다.

이 인간, 그래서 몬테비데오에서 맨날 술 마셨구나. 지훈은 이제야 호준의 속셈을 완전히 이해했다. 아무튼 딱 봐도 아랫도리 사정은 저쪽이 더 급한 것 같은데 왜 자신이 더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섹스하자고 하면 호준이 냉큼 덤빌 줄 알았던 터라 지훈의 충격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내일은 일단 술 먹지 마세요.”

“네. 그리고…….”

“이유가 또 있어요?”

“사실 지금 콘돔이 없어요.”

호준이 민망했는지 마지막 말은 굉장히 낮게 속삭였지만 지훈은 아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훈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기에, 비상용 콘돔 같은 건 준비조차 안 했다. 순식간에 좆 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순순히 수긍했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노 콘돔 노 섹스는 안전한 성 생활을 위해 필수였다.

지금 당장 섹스를 못 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아서 지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적인 호준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훈의 입장에서는 오늘 계획에도 없었던 개수작이랑 입술 박치기를 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다.

“내일부터는 혹시 모르니까 계획에 넣어 주세요.”

“명심할게요.”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까지 하고 싶다는 건 아닌데요. 아무튼. 혹시 모르니까 가능성을 고려해 달란 거예요.”

“알겠어요.”

호준은 지훈의 마지막 자존심을 존중해 주었지만 피식 웃느라 콧바람이 새어 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이 마당에 지금 웃음이 나와요?”

지훈은 지금 당장 욕구 불만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게 불쾌해졌다.

“그냥 지훈 씨가 좋아서요. 이만 들어가요. 더 있다간 너무 좋아서 어떻게 되어 버릴 거 같아요.”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으면 그냥 어떻게 해 버리지 그러냐. 잔뜩 달아올랐다가 팍 식어 버린 지훈은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호준이 말한 섹스 못 할 이유들이 구구절절했다. 지훈은 뭘 더 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저 요령 없는 인간이 이 정도 해 준 것도 감지덕지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 맛있었어요?”

일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오늘도 방을 두 개 잡아 뒀었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서기 전, 방문 앞에서 지훈이 장난삼아 물었다. 아까 호준이 말실수했는데 대답을 못 들었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호준은 문손잡이를 붙잡은 채로 생각보다 심하게 당황했다.

“그게…….”

“유기농 브로콜리였나 보네. 알겠어요.”

“지훈 씨! 그게 아니라…….”

호준이 지훈을 끌어당겨서는 방문 앞에서 한 번 더 키스했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맛을 보겠다는 듯 진득하게 서로의 입안을 헤집어 댔다. 둘은 아쉬워서 한참 더 입술을 맞대었다가 겨우 떼어 내야 했다. 하다 말아서 더 아쉬운 키스였다. 몸이 잔뜩 달아오른 채로 호준은 지훈의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였고, 지훈은 피식 웃으며 호준의 대답에 만족했다.

그날 밤 두 사람 다 쉽게 잠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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