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2권) (11/27)

김 대리 수난기 2

10.(2)

“정신이 들어요? 김지훈 씨? 지훈 씨? 이봐요, 김 대리?”

「¿Estás bien?」3)

「¡Abrió los ojos!」4)

“지훈 씨! 정신 차려요!”

귓가에 소리가 들렸다. 낯선 외국어 사이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지훈은 대답을 하려다 말고 속이 답답해서 그대로 속에 있는 걸 토해 냈다. 입안에서 뭔가가 흘러나왔다. 몇 번을 크게 콜록거리면서 물을 죄다 뱉어 내자 눈이 겨우 떠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굉장히 빠르게 뛰었다.

「¡Mirá! ¡Está vivo!」5)

벌벌 떨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만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가운데 호준의 잘생긴 얼굴도 얼추 시야에 들어왔다. 호준은 지훈을 부축하고 있었다.

“지훈 씨, 괜찮아요?”

“왜……. 왜요?”

놀란 지훈이 맥락 없는 헛소리를 내뱉었다. 호준은 패닉 상태인 지훈이 하는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지훈 씨 바다에 빠져서 기절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아…….”

지훈은 마지막 기억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바다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호준의 얼굴을 떠올리고 욕한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니. 내가 살았구나. 미국 드라마처럼 인생에 시즌 2가 있었어. 지훈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면서 내심 안도했다.

“그럼 저 살았네요?”

“네. 살았어요.”

지훈이 제대로 몸을 일으키며 호준과 대화를 나누자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보내며 기뻐했다. 지훈은 그 외국인들이 자신이 걱정되어서 몰려온 사람들인 걸 알아챘다. 지훈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짧고 굵게 한마디 했다.

“아임 파인. 땡큐.”

제대로 알아들은 유쾌한 외국인들이 손뼉을 치며 축하했다. 그들은 지훈이 멀쩡해 보이자 각자 볼일을 보러 떠났다. 구조대원으로 보이는 몸 좋은 백인 남자는 지훈의 곁에 남았다. 호준을 통해 지훈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지훈 씨, 혹시 불편한 데 있으면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답니다.”

“음……. 일단 괜찮은 것 같아요.”

「Dice que se encuentra bien.」6)

「Si surge algún problema, debe acudir al hospital.」7)

「Vale.」8)

구조대원이 호준과 몇 마디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떠났다. 삼각 수영복만 덜렁 입은 백인 남자 구조대원의 몸이 엄청 좋았다. 태닝한 피부로 드러나는 가슴이랑 배, 그리고 허벅지의 근육이 매력적이었다. 지훈이 저도 모르게 구조대원의 몸을 한참 쳐다보자 호준이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지훈 씨. 놀랐을 텐데 좀 쉬어요.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게 좋겠……. 으아아아아!”

하지만 모래밭 위에서 몸을 마저 일으키려던 지훈은, 다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크게 휘청거렸다. 호준이 바로 옆에서 어깨와 팔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모래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을 것이다.

“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다리에 힘이 없었다. 지훈은 스스로에게 당황해서 호준만 빤히 쳐다봤다. 호준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부축해 주면 걸을 수 있겠어요?”

지훈은 눈을 깜박거리며 발을 내디뎌 봤다. 맨발에 닿는 모래알의 감촉은 좋았지만 도저히 힘을 줘서 딛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힘을 주려고 하면 근육의 힘이 쏙 빠졌다. 지훈은 통제 불가능한 스스로의 근육에 놀라서 어이없어했다. 걷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어?

“안 되겠어요! 몸이 왜 이러지?”

“순간적으로 놀라면 그럴 수 있어요. 그냥 저한테 업혀요.”

“네? 싫어요!”

지훈이 대뜸 싫다고 하자 호준이 어이없어했다.

“안 그럼 어떻게 돌아갈 건데요? 앰뷸런스라도 부를까요?”

앰뷸런스라는 말에 지훈은 돈 걱정부터 했다. 여행자 보험을 들어 놓긴 했지만 턱도 없을 것이다. 가난한 여행자인 지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훈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앞에 있는 호준의 등에 업혔다.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는 맨등짝을 보니 좀 미안했다. 이렇게 신세 질 줄 알았으면 어제 한 대만 때릴걸. 하지만 자기가 먼저 업어 준다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부끄럽고 미안해서 일단 싫다고 했다가 한 소리 들은 지훈은 일단 업혔다. 바다에 양심을 빠뜨리고 나온 듯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서핑 보드 탄다고 수영복만 입었는데, 호준도 어찌 된 일인지 반바지만 입고 있었다. 상체는 맨몸이었다. 맨몸끼리 부대끼니 좀 민망했다. 게다가 맨살이 닿다 보니 아까 혼자서 얼레리꼴레리 타령했던 것도 불현듯 생각나서 더 민망해졌다. 아니야, 그냥 사람 몸이라고 생각하자. 지훈은 애먼 생각을 안 하려고 호준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서로의 얼굴이 안 보여서 다행이었다.

호준은 지훈의 허벅지만 받친 채로 걸어갔다. 팔뚝 힘이 좋아서 건장한 사내인 지훈도 무리 없이 업혀 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호준은 등 근육도 탄탄하게 잡혀 있었다. 지훈은 업힌 채로 호준의 승모근과 어깨 근육을 무심히 쳐다보다가 하마터면 쓰다듬어 볼 뻔했다. 야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언제 또 틈틈이 운동을 했담?

가까이서 체온을 느끼면서 살펴보니까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지훈은 아직 등짝에 남아 있는 자신의 손바닥 자국을 좀 쓰다듬다가 슬쩍 호준의 등에 몸을 은근슬쩍 기대었다. 맨정신에는 못 할 짓인데…… 우루과이에서 있었던 일은 한국 돌아가면 없던 일로 하기로 했으니 다행이었다. 이것도 없던 일이 될 테니까, 지훈은 뜨끈한 호준의 등에 좀 더 기대 보았다.

그나저나 호텔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나타난 거지?

“사무관님, 어떻게 알고 나왔어요?”

“심심해서 바다나 좀 보려고 나왔는데 누가 바다에 빠졌다고 해서 구경 가 보니까 지훈 씨더라고요.”

호준은 서핑하고 있을 지훈을 구경 나온 거였다는 속사정을 자세하게 언급하진 않았다.

“그랬구나. 이제까지 이런 일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근데 갑자기 큰 파도가 몰려와서……. 정신 차려 보니까 물속이었어요.”

“어쨌든 무사하니 다행이에요. 구조대원 말이 그쪽 부분 물살이 불규칙해서 종종 있는 사고랍니다. 그래서 지훈 씨도 바로 구조된 거고요. 원래 그쪽으로 못 가게 막아 두는데 지훈 씨가 거기로 가기에 경고하려던 참이었대요.”

지훈이 기절한 시간은 엄밀히 말해서 3분도 채 안 되었다. 구조되던 지훈이 놀라서 기절하느라 일이 커졌지 그렇게까지 큰 사고는 아니었다.

“어쩐지 누가 바로 왔더라고요. 그래서 그 손을 잡았는데…….”

물에 빠졌을 때의 상황을 곰곰이 떠올리던 지훈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자신을 붙잡았던 손의 악력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지금 자신을 지탱하며 업고 있는 호준의 손.

아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분명 동양인의 팔이었다. 기절하기 전에 호준의 얼굴을 떠올렸던 것도 그냥 눈앞에 있던 사람이 호준이어서 그랬을 확률이 높았다.

“사무관님이죠? 저 구하러 온 거.”

“구조대원도 곧바로 왔어요. 같이 끌어 올렸으니까.”

어쨌든 호준도 왔단 거였다. 지훈은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튼 지훈이 물에 빠진 걸 보고 호준이 구조대원보다 먼저 달려왔던 것이다.

아깐 정말 이대로 죽는다고만 생각했었고 그 사실 때문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밀려와서 너무 무서웠다. 정말 눈앞에 있는 이 사람 때문에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원수가……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심연에서 가라앉는 순간 나타난 팔의 존재에 그 순간만큼은 필사적이었다. 지훈은 그걸 허겁지겁 붙잡았다. 그게 다름 아닌 호준이었다고 생각하니 간밤에 등짝을 때린 게 많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지훈은 손을 뻗어서 호준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고마워요. 사무관님.”

지훈은 거리낌 없이 감정을 표현했다. 미운 건 미운 건데, 고마운 건 또 고마운 일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괴롭힘이 탕감되는 건 아니지만 약간은 봐줄까 싶은 것이다. 복수를 원래 100년 치 해야 하는데, 한 80년 정도로 줄여 볼까.

“지훈 씨, 배는 안 고파요?”

호준은 민망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괜찮아요. 근데 나중에 배고플 거 같아요.”

“놀랐을 텐데 좀 쉬어요. 나중에 먹으러 가요.”

두 사람은 숙소에 금방 도착했다. 호준은 지훈을 업은 채로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아직도 다리에 힘이 풀려 있던 지훈은 물 한 모금을 마신 후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사무관님, 옆에 잠깐만 있어 주면 안 돼요?”

호준이 곧바로 방을 나가려는 걸 지훈이 말렸다. 몇 시간 전 남남칠세부동석을 주장한 게 무색하게, 호준은 곧바로 침대 옆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지훈은 혼자 있으면 또 무서워질 것 같았다. 그냥 아무하고나 의미 없는 수다나 떨고 싶었고 마침 한국말이 통하는 상대가 호준뿐이었다. 절대로 호준에게 업혀 오는 동안 의지가 되었다거나 계속 기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지훈의 심장은 아직도 벌렁거렸다. 물에 빠져서 기절한 건 둘째 치고 그 직전에 너무 놀란 것이 문제였다.

“저도 어릴 때 큰 사고를 당한 적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한동안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자꾸 생각나서 고생했었거든요.”

지훈의 굳어 있는 표정을 본 호준은 분위기도 전환할 겸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훈은 괜히 궁금해져서 되물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일곱 살쯤인가, 놀이공원에서 기구를 타는 도중에 기구가 멈췄어요. 공중에서. 복구하는 데 1시간 정도 걸렸던 거 같아요. 근데 어릴 때니까 그런 상황은 잘 몰랐고 영영 땅 밑으로 못 내려가는 줄 알았어요. 엄마는 보고 싶은데 안내 방송은 자꾸 나오고, 분위기는 심각하고. 게다가 옆에 같이 탔던 애들이 소리 지르면서 울었거든요. 그 한 시간이 지옥 같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재밌는 일화인데, 그땐 나름 심각했죠.”

호준은 그때 일을 떠올리는지 낯빛이 안 좋아졌다. 지금도 심각해 보였다. 아직 극복 못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지훈은 다른 게 궁금했다.

“사무관님도 울었어요?”

“저도 그땐 애였어요.”

호준은 마지못해 답했다. 무섭다고 엉엉 우는 정호준 어린이를 생각하자 지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사자야 무서웠겠지만, 호준이 어렸을 때도 지금처럼 눈이 크고 잘생겼었다면 꽤나 귀여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게 생겼으니까. 아니지, 의외로 저렇게 강직하게 생겨서는 꽤 잘 울지도 모른다. 어제 등짝 맞을 때도 조금 울었던가?

“웃어서 미안해요. 사무관님도 무서웠을 텐데, 근데 생각하니까 귀여워서요.”

“괜찮아요. 어머니도 제 표정이 웃겼다면서 사진으로 찍어 두셨거든요. 재밌었는지 자꾸 얘기하셨는데 정작 전 그날 이후로 한동안 악몽을 꿨어요. 놀이 기구도 못 탔어요. 대학 갈 때까지는.”

“헉. 심각했네요.”

“학창 시절엔 놀이공원으로 소풍 갈 때마다 반장이랍시고 놀이 기구 안 타고 친구들 챙기는 척했는데, 사실 무서워서 그런 거였어요. 아무도 몰랐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요.”

호준은 딱 봐도 학창 시절 내내 반장이었을 것 같았는데 진짜 반장이었던 모양이다. 근데 지금은 진짜 괜찮은 것 맞아? 우루과이에 있는 동안 놀이공원 가야 하는 거 아냐?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호시탐탐 호준을 괴롭힐 기회만 노리던 지훈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사무관님, 말 나온 김에 내일 놀이공원 갈래요? 여기 관광지랬죠? 그럼 유원지 하나쯤은 있지 않아요?”

남의 트라우마고 나발이고 속도와 스릴을 즐기는 편인 지훈이 신나서 입방정을 떨자 호준이 정색했다.

“그건 계획에 절대 없어요.”

계획은 바뀌는 거라던 호준은 이제 척화비를 세우고 있었다. 내일은 무조건 계획을 따르겠다는 계획 변태 정호준 흥선 대원군의 의지는 단호했다.

“저런……. 근데 우리 이미 내일 계획이 바뀌었잖아요.”

“안타깝게도 제가 이미 새로운 계획을 세웠어요.”

“뭔데요? 그 계획 수첩 봐요.”

“수첩은 지금 제 방에 있어요.”

“그럼 됐어요. 놀이공원도 안 갈 거면서!”

지훈이 쓸데없는 소릴 하는 걸 보니 긴장이 풀린 듯했다. 호준은 웃으면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놀이공원을 가려면 걷긴 해야 할 텐데 이젠 걸을 수 있겠어요?”

“그러게요.”

지훈도 문득 생각이 난 듯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다리를 다시 바닥에 내디뎠다. 조금 휘청거리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다리에 힘이 좀 들어갔다. 간신히 서 있을 정도는 되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걸을 수 있겠다.

지훈은 호준이 일부러 딴 얘기를 하면서 자신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고맙다고 했는데 또 말하긴 민망해서 그냥 아무 말도 안 했다. 대신 자신의 다리를 빤히 보고 있는 호준을 보면서 살짝 웃었는데, 그걸 본 호준은 갑자기 당황했다. 얼굴이 좀 빨개진 것 같았다. 뭘 잘못했나? 지훈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빤히 쳐다보자 호준은 시선을 돌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따가 괜찮아지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아까 식당 알아 놨어요.”

“벌써요?”

역시 한 톨의 공백도 허용하지 않는 알찬 시간 계획자였다. 분명 회색 신사들이 저 인간의 시간 뺏으러 왔다가 가져갈 시간이 없어서 울고 갈 테다.

“여기서 가까워요. 걸어가도 괜찮지만 우버 타고 갑시다.”

일할 때도 누구보다 꼼꼼하게 하던 사람이라 타인을 챙겨 줄 때도 꼼꼼한 것 같았다. 일하면서 개수작을 걸 때도 누구보다도 집요하긴 했지만. 문득 지훈은 정호준이 지독하게 싫었던 게 아득한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여행 며칠 좀 같이 다녔다고 그 사이에 정이 들었나 보다. 게다가 방금 전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지훈은 처음으로 저 사람이 자길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보다. 원래 드라마도 시즌 2에서는 이것저것 바뀌는 법이니까.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사무관님”

뼛속부터 한국인인 지훈은 역시 고맙다는 인사를 밥으로 했다. 하지만 호준도 역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밥으로 어필하려 했다.

“괜찮아요. 원래 제가 저녁 산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가자 아까 호텔 방을 정하면서 싸웠던 일이 생각나서 지훈은 머쓱해졌다.

“사실 아까는 화내서 미안했어요. 제가 생각이 짧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오늘은 제가 밥 살게요. 안 그러면 사무관님한테 너무 죄송할 거 같은데요. 구해 주신 것도 고맙고.”

결국 지훈은 자기 속 편하자고 밥 사겠다는 거였다. 목숨값 더하기 등짝을 때린 것과 성질까지 냈던 걸 고작 밥 한 끼로 때운다는 거였다. 호준은 그 속셈을 빤히 알았지만 지훈의 호의를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저도 고생을 했으니까 지훈 씨한테 얻어먹죠. 식당을 비싼 데로 바꿔야겠어요.”

호준이 휴대폰 어플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리자 지훈의 표정이 굳어 갔다. 말로는 한턱 쏘겠다고 말했지만, 자고로 군자의 주머니는 가벼운 법이다. 놀란 지훈이 호준의 휴대폰을 뺏으려 했다.

“잠깐만요? 사무관님? 얼마나 비싼 데를 가려고요!”

“글쎄요. 관광지라 비싸고 고급스러운 데가 많네요. 근데 지훈 씨 방금 걸은 거 알아요?”

지훈은 그 말을 듣고서 자기가 방금 멀쩡하게 걸었다는 걸 알았다. 카드값을 걱정하다 혈압이 오르면서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참나. 열 받게 만들어서 걷게 하려는 속셈이었어요? 알프스의 소년 정 하이디 나셨네요.”

“어쨌든 효과가 있었어요. 김 클라라 씨.”

고마운 마음은 다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사라졌다. 저 정호준이라는 인간이 2년 반 동안 인생의 원수였던 사실이 다시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래도 오늘은 빚진 게 있으니까 참자. 일단 살려 준 건 결초보은 한 후에 다시 맘 놓고 불행을 빌어 줄 테니까. 지훈이 분노를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하는 사이 호준은 덧붙였다.

“사실 지훈 씨 기절한 거 보고 걱정 많이 했어요. 지훈 씨가 혹시 기절한 채로 못 깨어나면 어쩌나, 깨어나도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겁나더라고요. 지훈 씨 영영 못 볼까 봐……. 지훈 씨가 금방 회복된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호준은 지훈이 두 발로 걷는 걸 보고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저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가 자신을 정말 많이 걱정했다는 걸 지훈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진심에 놀란 지훈은 아무 말 못 했다. 호준이 머쓱해하며 헛기침을 했다.

“괜한 소릴 했네요. 그럼 마저 쉬어요.”

호준이 방을 나선 후, 지훈은 말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공포 때문은 아니었다. 호준이 던진 말의 여파가 너무 컸다. 바로 어제였으면, 그냥 저 인간이 나를 좋아해서 저런다고 치부하고 잊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이젠 그렇지 않았다.

감정에 무게가 있다면 호준의 감정은 몇천 톤은 될 것이다. 아주 깊은 곳에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겉으로 보기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건드리거나 움직여 보려 하면 그제야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깊이와 무게를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진중한 감정이 불현듯 지훈을 덮쳐 왔다.

더 큰 문제는 지훈은 이제 그 감정이 싫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게 대체 뭘까. 물에서 기껏 빠져나왔는데 도리어 호준의 팔에 이끌려 감정의 심연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그것 말고는 지금의 이 찜찜한 기분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물에 빠졌던 일을 떠올려 봐도 죽음의 공포보다는, 자신의 손을 잡아 주던 호준의 얼굴이, 혹은 자신을 업어 주던 호준의 따끈한 등이 더 선명하게 지훈의 눈앞에 떠올랐다.

지훈은 호준이 앉아 있었던 자리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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