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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몬테비데오로 돌아가는 길에서부터 생겼다. 버스 터미널에 갔는데 출발 준비를 하는 버스가 없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항의하면서 떠들어 대는 걸 보니 큰일이 벌어진 듯했다. 호준 역시 매표소에 가서 막 퇴근하려는 직원을 붙잡고 스페인어로 물었는데 결국 큰 소리로 언쟁을 하더니 결국 풀이 죽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오늘부터 최저 임금 인상 문제로 운수 노조가 파업해서 내일도 오전에나 차가 있답니다.”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 같은데? 전에도 공공 기관 계약직 김 모 대리가 철도 노조 파업 때문에 어느 행정혁신도시에서 예상치 못하게 막차를 놓쳤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관의 집에서 하룻밤 잔다는 게 펭귄 친구 잠옷을 입은 채로 상관한테 고백을 받아 버렸다지? 지구 반대편에서 강하게 느끼는 기시감에 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지훈은 이 운수 노조 파업 사태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파업은 노동자의 권리니까. 태종시에서 막차 끊긴 것 때문에 열을 냈던 건 그날 정말 피곤해서 그냥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뿐. 오랫동안 노조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계약직을 전전하다가 이제 간신히 정규직이 된 지훈은 높으신 경영진의 입장까지 생각하기엔 자기 코가 석 자였다.
지훈은 철도 노조 파업 때 정 모 씨가 제안했던 것과 비슷한 대안을 내놓았다.
“정 안 되면 여기서 하루 자도 되지 않을까요? 비수기라 호텔도 많을 텐데요.”
“그래도 일단 계획이 당일치기였으니까 돌아가 봅시다. 배 타고 가는 거 알아볼게요.”
호준은 항구 쪽으로 걸어갔다. 우루과이에서 마주친 이후로 계속 웃고만 있던 호준이 처음으로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호준은 여행이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자기가 세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사실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자기가 계획을 바꾸는 건 괜찮아도 타의로 계획 실행을 못 하는 것은 못 참는 듯했다. 매일을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지훈으로서 계획 변태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훈은 그냥 닥쳐오는 일을 그때그때 해결하면서 임기응변으로 살아왔다.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면 직장을 세 번이나 바꾸는 동안 매번 정호준을 만났을 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게 자기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호준은 그런 현실을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항구에서도 매표소에 가서 뭐라고 말하던 호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하긴 운수 노조가 파업을 한다는데 배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결국 속사포 같은 스페인어 사이에서 ‘씨발’이라는 말을 들어 버린 지훈이 헐레벌떡 뛰어가서 호준을 말렸다.
“사무관님,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이 됩니까!”
지훈은 일단 호준을 진정시켜야 했다. 나는 화내도 되지만 이 사람은 화내면 안 된다! 왜냐. 행여 깊은 분노로 혈압이 갑자기 오르는 바람에 평소에 대동맥에 쌓여 있던 콜레스테롤의 영향으로 뇌졸중이나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라도 오면 어찌한단 말인가? 아무튼 호준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무조건 건강해야 했다. 지훈은 쓸데없는 죽음 걱정에 자기보다 건강한 사람의 대동맥을 염려했다.
“그냥 여기서 하루 자고 가면 되잖아요. 아침엔 버스 운영한다면서요!”
“그러면 계획이 틀어지잖아요. 내일은…….”
“전 어차피 계획 없이 와서 틀어지든 말든 상관없거든요. 그리고 아까 계획은 언제든 변하는 거라면서요. 여기 더 머물 거면 전 오후에 서핑이나 하려고요. 그……. 이참에 해변에서 비타민 D나 합성하죠.”
호준을 설득시키려 지훈은 되는대로 내뱉었다. 다행히 호준이 이해할 만한 핑계인 듯했다.
“지훈 씨, 서핑 좋아해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핑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하는 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서핑만 했었다. 물론 한국에는 파도가 좋은 곳이 없기도 했고, 취직한 이후로는 정 누구 때문에 휴가 갈 시간이 없어서 전혀 못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여행의 실질적 의사 결정권자인 지훈이 한 괜찮다는 말에 호준은 언제 화냈냐는 듯 바로 평소의 침착하고 의연한 모습을 되찾았다. 화나면 발끈하긴 해도 납득이 되면 냉각 타임이 빠르게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하룻밤 지낼 곳을 찾아봅시다. 예산이야 초과되겠지만, 지훈 씨 말대로 계획은 다시 세우면 되니까요.”
* * *
지훈의 말대로 비수기여서 호텔은 금방 잡을 수 있었다. 공무원 월급과 공공 기관 계약직 월급에 5성급 유명 호텔은 무리였다. 와이파이 존에 앉아서 두 남자가 머리를 맞대고 여행 어플을 열심히 뒤적거린 결과 적당히 무난한 3성급 호텔을 잡았다. 가격이 저렴한 에어비엔비나 호스텔은 도심 쪽에 위치해서 곧바로 서핑하러 가기엔 무리였다. 지훈은 모처럼 기회가 온 김에 얼른 해가 지기 전에 나가서 서핑을 하고 싶었다.
문제는 방이었다. 직접 호텔에 가서 방을 문의했더니 인터넷에 올라온 것과 말이 달랐다. 호텔 직원은 영어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그냥 호준과 호텔 직원이 스페인어로 소통하는 게 더 빨랐다. 지훈은 뒤에서 뒷짐 지고 숙박비를 결제할 카드만 들고 있었는데, 한참을 떠들던 호준이 곤란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지훈 씨. 가격이 다르긴 한데 그냥 싱글베드 룸 두 개 따로 잡을 게요.”
“싱글베드 두 개짜리 방 하나 잡는 게 더 싸지 않아요?”
“그편이 더 싸긴 한데 원래 방 두 개 잡으려고 했으니까요.”
계획을 변경하는 게 더 저렴해도 아무튼 계획한 대로 해야 하는 호준이었다. 문제는 지훈은 딱히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근데 방 하나짜리가 더 싸면 그게 낫지 않아요?”
“안 됩니다.”
“왜요?”
“안 돼요.”
“왜요?”
눈치를 상실한 지훈의 ‘왜요’ 공격에 호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편견 없는 카운터 직원은 커플끼리 싸우지 말고 자기가 특별히 욕조가 있는 럭셔리 더블베드 룸을 싸게 해 주겠다고 어필했다. 혼자 그 말을 이해하는 호준의 속은 더 썩어 갔다. 커플이 아니라고! 심지어 상대방에게 차인 상태인 호준은 정말 골이 지끈거렸다.
“그 설명은 제가 나중에 해도 될까요?”
“근데 방금 직원이 떠블베드 디스까운뜨 어쩌고 하지 않았어요? 뭐 할인해 준다는 거예요?”
성실한 직원이 뒤에 있는 지훈에게 어필하기 위해 영어로도 외쳤는데 지훈이 운 좋게 주워들었다.
“지훈 씨는 몰라도 돼요. 아무튼 방 두 개 합시다.”
호준은 묘한 데서 강경 쇄국 정책을 펼쳤다. 아무튼 더블베드 방이 더 싼데 굳이 돈을 더 써 가며 방을 두 개나 잡는 정호준 흥선 대원군을 보며 지훈이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지금 예산 초과인데! 사무관님은 정규직이고 또 수당도 많이 받으니까 괜찮겠지만 저는 2년 반 동안이나 취준생이었고 계약직 뺑이 돌았다고요. 지금도 전 재산 달달 털어서 여행 온 건데!”
“미안해요.”
“미안하면 방값 더 나온 만큼 사무관님이 저녁 사요.”
“알겠어요.”
호준은 순순히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내일 아침밥도요.”
“호텔에서 조식 나와요. 여기 조식 평점 4.8이었어요.”
“그럼 여기 조식 먹어야겠네요……. 대신 내일 점심도요.”
“내일 저녁도 살게요. 걱정 말아요.”
“소고기로요. 또 먹고 싶어요.”
“알았어요.”
사실 소고기는 오늘 점심때도 먹었지만 호준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방금 영수증에 찍힌 카드 결제 금액 때문에 눈치가 상실되다 못해 아주 멸종해 버린 지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며 계속 투덜거렸다.
“사무관님 근데 나랑 방 같이 쓰는 게 그렇게 싫어요? 저 한국 남성 평균보다 훨씬 깨끗해요! 악당은 아니지만 화장실 갔다 오면 손도 비누칠해서 잘 씻고 잘 때 코도 안 곤다고요!”
“화장실 갔다 와서 손 씻는 건 자랑할 게 아니라 하루 세 번 이 닦는 것처럼 사회인이라면 당연히 하는 일이예요. 그리고 지훈 씨가 새근새근 잘 자는 건 저도 잘 압니다.”
“제가 새근새근 자는 걸 대체 어떻게……. 암튼 저번에는 사무관 님 집에서 자라고 하더니 이번엔 왜 따로 쓰자는 거예요? 침대 정리해 두는 꼴 보니까 딱히 결벽증도 아니면서! 생각해 보니까 호스텔에서도 같은 방 쓰는데 술병 나서 토한 날 빼고 같은 방 쓴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설마 일부러 나 피하는 거예요?”
“네.”
홧김에 와다다다 쏟아부은 말이었는데 호준이 한숨 쉬면서 순순히 인정하자 이번엔 지훈이 충격을 받았다.
“왜요? 그럼 이제까지 일부러 나 피하느라고 밤마다 술 마신 거였어요? 내가 더러워요?”
이상한 쪽으로 오해가 튀었다. 호준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지훈 씨 깨끗한 거 알아요. 그냥 저 때문에 그럽니다. 저는 지훈 씨한테 차이긴 했지만 아직 많이 좋아해요. 알고 있겠지만 마음 정리도 아직 못 했습니다.”
호준은 방 앞까지 가더니 호텔 방문에 키를 꽂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훈 씨가 제 감정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게이예요. 제가 인내심이 강한 편이긴 하지만 지훈 씨랑 한 침대는 절대 못 써요.”
자칭 인내심이 강하다는 호준은 지훈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성급하게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문 앞에서 어리둥절해하던 지훈은, 정확히 5초 뒤에 호준의 말뜻을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헉!”
지훈의 경악과 동시에 작고 앙증맞은 배낭이 호텔 복도에 철퍼덕 떨어졌다.
* * *
지훈은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곧바로 서핑을 하러 나갔다. 수영복과 서핑 장비는 대여가 가능했다. 수온과 파도가 꽤 괜찮았기 때문에 지훈은 곧바로 서핑 보드에 올라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마음이 복잡해서 보드 위에서 제대로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워낙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준비 운동을 꽤 했는데도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덕분에 연이어 보드를 타는 걸 실패했다. 지나가던 다른 서퍼들이 힘내라고 응원해 주면서 떠났는데 지훈은 그것 때문에 더 속상했다. 왕년에도 그다지 잘하진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3년 사이에 이렇게나 실력이 녹슬다니. 졸업과 취업 준비 하는 동안 바빠서 바다에 한 번도 오지 못했더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게다가 파도를 탈라치면 자꾸 호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파도의 흐름을 놓쳐 버렸다. 팔의 힘이 풀려서 일어서지를 못하거나 다리의 힘이 풀려서 중심을 잃고 자빠졌다.
“아아아아! 씨발!”
결국 보드를 집어 던져 버리고 지훈은 모래사장에 엎어졌다. 뜨거운 오후의 햇빛에 달구어진 모래사장에 젖은 몸을 데울 필요가 있었다. 공기는 적당히 후덥지근하고 등에 닿는 모래는 따끈했다.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면서 지훈은 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저 게이예요’라니, 이게 대체 무슨 되도 않는 개소리야. 헤테로 인간들이 남녀칠세부동석이면 게이인 사무관님은 남남칠세부동석이라는 건가? 그 말인즉, 나랑 섹스하고 싶다는 거야? 물론 상식적인 수준의 지성과 준법정신을 가진 사회인이고 인내심도 강하니까 아무 사이도 아닌 나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겠지만 자기가 못 참겠으니까 방을 따로 쓰겠다는 그런 건가?
근데 사무관님이 나랑 섹스를 하고 싶어 한다고? 대체 왜? 나를 좋아해서? 좋아한다는 게 그런 뜻이었어? 하긴 사무관님도 애가 아니라 어른인데 당연히 그렇겠지! 여자와 남자가 좋아하게 되면 그 얼레리꼴레리를 하는 것처럼 사무관님은 나랑 얼레리꼴레리를? 히익!
그러고 보니 호준이 지훈을 좋아한다는 말이 절대 플라토닉 러브일 리가 없었다. 하물며 이성 간의 연인 관계에서 좋아하면 침대까지도 가는데 게이라고 다를까. 살면서 LGBTQ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지훈은 남자끼리 좋아한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지 구체적으로 육체적 관계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왜 같은 방 안 쓰냐고 투덜거렸던 자신이 배려가 없었다. 물론 지훈은 휴가 내내 호준이 작고 소소한 일로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긴 했지만, 길가다 맨홀에 빠져서 골탕 먹는 걸 보고 싶단 거였지 이런 식은 아니었으니까.
지훈은 몸을 벌떡 일으켜서는 머리에 묻은 모래를 털어 냈다. 긴 팔다리와, 군살은 없지만 근육도 별로 없는 자신의 몸을 한번 씩 훑어보았다. 지훈은 자신의 몸에 불만이 없지만 객관적으로 그렇게 남자다운 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굴도 살면서 잘생겼다는 소린 들어 본 적 없었다. 자기애가 있으니 셀카야 열심히 찍지만 자기 외모에 대해서 지훈은 꽤나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무관님은 대체 뭘 보고 날 좋다고 하는 거야? 나를 보면 키스하고 싶다는 건가? 물론 사무관님이 함부로 그럴 인간은 아니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긴 한다는 거지? 사무관님이 얼레리꼴레리한 측면으로도 나를 좋아하는 거였다니!
다시 보드를 끌고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지훈은 계속 생각했다.
그래서 여태까지 일부러 술 마시고 같은 방 쓰는 것도 피해 왔던 건가? 앞으로 남은 여행도 계속 그럴 건가? 물론 지훈은 호준과 얼레리꼴레리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쪽으로 신경이 쓰였다.
아무튼 나랑 상관없어! 나는 서핑이나 할 거다! 사무관님이랑 섹스 절대 안 해 주고 휴가 내내 열심히 사무관님한테 복수할……. 푸합!
지훈이 오랜 내적 갈등 끝에 중대하지만 쓸데없는 결심을 하며 보드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이 갑자기 예상한 것보다 더 거대한 파도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지훈을 덮쳐 버렸다.
헉!
순간적으로 큰 파도에 지훈의 몸이 휩쓸렸다. 이런 경우 보통은 잠깐 가만히 있다가 파도가 가라앉은 후에 움직이면 되었다. 서핑 보드라도 붙잡고 있으면 되는데. 하지만 수면 위로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지훈은 눈을 떴다. 보드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긴 했는데 너무 멀리 있었다. 보드는 수면 위에 둥둥 떠 있었는데, 지훈이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거리였다. 빨리 올라가야 한다.
지훈은 다리를 움직여 수면 위로 나아가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나아가지 않았다. 물의 흐름이 이상했다. 해변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어엇. 이게, 설마.
나 망했네.
지훈은 직감했다. 이건 못 빠져나간다. 너무 깊이 내려왔다.
몸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호준과 섹스 안 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이미 너무 멀리 흘러와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처음 온 바다니까 좀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오랜만의 서핑이라 방심했다.
아무리 바동거려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럴 때 안전 수칙이 뭐였더라? 어떻게 하는 거였지? 몸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나? 그 반대인가? 이미 온몸이 패닉 상태였다. 지훈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심장이 벌렁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는데 숨은 모자랐다. 몸이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음만 다급했다. 하지만 초반에 당황해서 숨을 빠르게 뱉어 버린 탓에 머리가 점점 어지러웠다. 몸이 가라앉았다.
아, 씨발. 정호준의 죽음을 걱정할 게 아니었는데. 정작 내가 먼저 죽는구나. 지훈은 울고 싶어졌다. 거대한 파도보다 더 큰 절망이 밀려왔다.
그 순간 시야에 뭔가가 나타났다. 사람의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지훈에게 팔을 뻗어 왔다. 본능은 이성보다 빨랐다. 지훈은 다급하게 그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을 붙잡은 사람이 힘을 꽉 주는 게 느껴졌다. 지훈의 몸이 그 힘으로 쑥 들어 올려졌다.
뭔가를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살았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숨이 모자랐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와중에 지훈의 눈앞에 호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하필 그 자식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눈앞에 떠오르다니……. 지훈은 욕이 절로 나왔다.
내 인생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는 게 엄마도 아빠도 누나도 아니고 하필 정호준이라니……. 이런 씨발, 인생 헛살았다.
지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2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