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호준은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았다. 술병으로 고생은 했다만 잠 좀 잔 걸로 기력을 회복한 듯 다음 날 새벽에 벌떡 일어났다. 해장으로 찬물 한 컵을 마시고 스트레칭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씩씩하게 돌아다녔다. 언제 앓았냐는 듯이 멀쩡하게 다니는 통에 지훈은 저 인간이 어제 아파서 골골댄 게 맞는 건지, 자신이 간밤에 본 것이 정호준을 닮은 귀신은 아니었는지를 의심해야 했다.
물론 호준도 잠결에 지훈이 어제 자신을 간호해 준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등짝이 얼얼해서 옷을 벗어 봤다가 등짝이 시뻘게진 걸 발견하고는 지훈이 등짝 스매싱을 날린 건 사실임을 확인했다.
여러모로 서로에게 꿈만 같았던 하룻밤이었다. 악몽도 꿈이니까.
“진짜 어제 술병 난 사람 맞아요?”
“어제 그렇게 아팠으면 됐죠. 오늘 좀 쉬면 내일 또 마실 수 있을 겁니다.”
마테 차를 쪽쪽 빨아 마시며 호준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지훈은 혀를 내둘렀다. 하긴 저 정도 강철 체력이니까 그렇게 2년 반 동안 무사고 무결근으로 야근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술을 안 마실 건가 보네요.”
“대신 오늘 일정이 빡빡해요. 푼타 델 에스테에서 당일치기로 끝내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막차 타고 올 거라서 오늘 저녁에 술 마시긴 무리일 것 같아요.”
일정을 짜는 건 순전히 호준의 의지였고, 지훈은 따를 뿐이었다. 술병 나서 골골대는 사이에도 착실하게 여행 일정을 짜는 호준을 보며 지훈은 역시 간밤에 살려는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간밤에 엄청 때린 것 가지고 호준이 못해도 한 마디는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호준이 등짝이 아프다는 시늉조차 안 해서 지훈은 오히려 걱정되었다. 지금쯤이면 등짝이 따끔따끔할 텐데. 그리고 바보가 아닌 이상 토하는 걸 핑계로 일부러 때린 건 뻔히 알 텐데 왜 모르는 척하고 있을까.
혹시 지훈에게 큰 복수를 하려는 속셈은 아닐까? 호준은 머리도 좋으니까 지훈은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또 은근하게 엿을 먹일지도 몰랐다. 호준도 뒤끝이 있는 성격인 만큼, 지훈은 오늘만큼은 호준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 * *
푼타 델 에스테는 아름다운 바닷가 풍광으로 유명한 우루과이의 휴양지였다. 수도인 몬테비데오에서는 버스로 두 시간가량 걸렸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지훈은 버스 좌석에서 기절할 듯 곯아떨어지며 간밤의 모자란 수면을 보충했지만 곁눈질로 호준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제 얼음을 갖다 대 주긴 했지만 호준이 잠들어 버려서 찜질은 결국 안 했다. 이제 등짝에 손바닥 모양으로 맞은 부위가 부어올라서 어지간히 아플 터였다. 차마 의자에 허리를 기댈 수가 없었겠지. 뒷감당은 좀 겁나지만 아무튼 호준을 성공적으로 괴롭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지훈은 속으로 히죽 웃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을 잤던 거 같은데, 도착한 후에 깨어나니까 오히려 호준이 지훈을 보며 웃고 있었다. 뭐야, 저 변태 왜 저래. 혹시 나 자는 사이에 간밤의 복수라도 한 건가? 지훈은 이유 모를 찜찜함을 느끼며 얼굴에 무슨 낙서라도 있는지 확인했다. 물론 아무것도 없었다.
호준은 지훈이 자는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다. 그래서 지훈은 자기가 호준의 어깨에 기대서 한참 동안 잠들었던 사실을 영원히 모르게 되었다.
점심때쯤 도착한 푼타 델 에스테는 세계적인 휴양지답게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었다. 일단 호준의 계획에 따라 카사푸에블로라는 건축물을 둘러보기로 했다.
세계적인 우루과이 건축가가 그리스 산토리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인생의 역작이라는 카사푸에블로는 외관부터 아름다웠다. 새 둥지 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바다의 풍경도 멋있었다. 마침 날이 좋아 남미의 타는 듯한 햇살을 잔뜩 느낄 수 있었다. 사진 기사인 호준을 시켜서 지훈은 인생 사진을 여러 장 건졌다. 지훈이 대충 각이 잘 나오겠다 싶은 곳에 서 있으면 호준이 알아서 척척 카메라를 들고 찍는 수순이었다.
둘은 서로의 생각보다 죽이 잘 맞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지훈과 호준을 동양에서 온 아시안 게이 커플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주변의 관광객들 모두 카메라를 든 잘생기고 몸 좋은 사진 기사가 키 큰 남자 모델을 어지간히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들 예의와 체면이 있었기에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물론 입으로 좀 중얼거리긴 했지만 대부분 스페인어였기 때문에 호준만 대충 알아듣고 지훈은 전혀 몰랐다.
여행 내내 자기만 사진에 찍히는 것 같았던 지훈은 호준의 사진을 한 장 정도는 찍어 주겠다고 생색을 냈다. 간밤에 등짝 때린 것 때문에 좀 미안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다 앵글 속 호준의 모습을 보던 지훈은 당황했다.
따사로운 햇살을 잔뜩 받으며 자연 풍경을 뒤로하고 서 있는 호준이 생각보다 더 멋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셔터를 여러 번 눌렀다. 잘생긴 건 원래 알고 있었는데 카메라 렌즈로 보니까 또 달라 보였다. 몸 좋은 것도 원래 알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지훈 씨, 안 찍어요? 저 지금 최대한 멋있는 포즈로 서 있는 건데.”
어쩐지 평소보다 멋있더라. 의도된 거였어. 지훈은 중얼거리면서 셔터를 눌렀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지훈은 호준을 찍은 자신의 사진에 사심이 너무 담겼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사진을 지우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며칠 후 그 사진을 확인한 호준은 묘하게 자기 얼굴보다는 가슴팍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굳이 지훈에게 연유를 묻지는 않았다.
박물관을 겸하는 카사푸에블로에는 남미의 정서를 가득 담은 공예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지훈은 예술 작품에 큰 흥미가 없었다. 본인의 셀카 외에는 모든 것에 심드렁했다. 하지만 호준이 눈을 반짝이며 모든 그림과 작품들을 굉장히 꼼꼼하게 살펴보는 걸 보고 놀랐다.
“사무관님은 미술 작품 좋아하세요?”
“네. 보는 거 좋아합니다. 지훈 씨는 안 봐요?”
“저는 이런 거 잘 볼 줄 몰라서요.”
“이 그릇은 이 건물을 설계하고 살고 있는 까를로스 비달로가 직접 디자인한 거예요. 비달로는 특히 피카소 오마주를 많이 해서 무늬가 피카소의 패턴이랑 비슷해요.”
“피카소. 음. 저도 들어 봤어요.”
호준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지훈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피카소는 들어 봤는데 나머지는 살면서 흥미를 가진 적이 없던 백색 잡음 같은 이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준은 스페인에서 잠깐 살았다니까 잘 알 테다.
하지만 심드렁한 지훈의 표정을 본 호준은 자신의 계획을 변경할 필요를 느꼈다.
“다 둘러본 것 같으니 이만 나갈까요?”
“아직 사무관님 계획상으로 카사푸에블로 관광은 28분 34초 더 남지 않았어요?”
“계획은 언제나 변하는 거니까요. 해변을 28분 34초 더 보면 됩니다. 날도 좋은데 바깥에 더 있죠. 햇볕도 쬘 겸.”
아까 버스에서 호준의 계획 노트를 훔쳐봤던 지훈이 빈정거렸지만 호준은 태연하게 응수했다. 순전히 지훈이 지루해해서 계획을 바꾼 것이었지만 괜히 날씨 핑계를 댔다.
건물 안에 인파가 좀 있었기 때문에 호준이 지훈을 밖으로 데려가려고 무심코 손을 잡았다. 지훈도 별생각 없이 손이 잡힌 채로 호준을 따라 나갔다. 전에도 굳이 느끼진 않았지만 호준의 손은 크고 따듯했다. 지훈과 호준을 주시하고 있던 수상한 눈빛의 관광객들은 카메라를 든 남자가 남자 모델의 손도 다정하게 잡아 주고 사람들하고 부딪치지 않게 어깨도 감싸 줬다며 감탄했다.
* * *
까사푸에블로를 둘러본 다음, 두 사람은 유명 휴양지인 푼타 델 에스테의 해안가를 더 둘러보았다. 수영이나 서핑을 하기엔 버스 시간이 좀 애매했다. 숙박과 경비 문제 때문에 당일치기로 놀고 돌아갈 작정이었기 때문에 둘은 남는 시간 동안 해안가를 따라 걷기로 했다. 해안가의 풍광이 아름다워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투어가 되었다.
인근 해안에 유조선이 침몰한 이후, 기름을 피해 해안가에서 자연적으로 서식하게 되었다는 바다사자도 구경했다. 동물을 좋아하는 지훈은 어린이 관광객들과 뒤섞여서 바다사자에게 먹이를 주었다. 호준은 그런 지훈을 쳐다보며 굉장히 귀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시간이 되었다.
버스 출발 시간까지 28분 34초가 남았기 때문에 둘은 해안가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셨다.
“바다사자 옹옹거리면서 먹이 오물거리는 거 봤어요? 진짜 귀여워요.”
호준에게 자신이 귀여운 걸 봤다고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지훈은 그냥 자기가 귀여운 걸 봤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지훈 씨, 바다사자 좋아해요?”
호준의 입장에서는 비린내 나는 바다사자보다는 신나서 붕방방 상태인 김지훈이 더 귀여웠다. 하지만 귀엽다고 대놓고 말했다간 자신의 마음을 심각하게 부담스러워하는 지훈이 질색할 것 같아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호준이 씨익 웃는 걸 보고 지훈은 호준도 바다사자를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저렇게 많은 개체는 처음 봤거든요. 동물원에서 본 적 있긴 한데 동물원에서는 동물들이 다들 지쳐 있잖아요. 불쌍하게 갇혀 있으니까요. 자연 속에 있는 동물들이 활기가 넘쳐서 더 보기 좋아요.”
“지훈 씨는 동물을 좋아하나 봐요?”
“동물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북극 가서 야생 북극곰도 보는 게 소원이에요. 근데 남극에 가면 펭귄도 볼 거예요. 황제펭귄이랑 아델리펭귄이랑…….”
“저도 펭귄은 다 좋아해요.”
맞다. 이 인간, 펭귄 친구 캐릭터에 미친 자였지. 지훈은 호준의 펭귄 사랑을 떠올렸다.
“사무관님도 남극 가셔야겠네요.”
“언젠가는 갈 일이 있겠죠. 그럼 지훈 씨가 전에 말했던 북극 이민 계획은 진심이었군요.”
그건 정말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었는데 호준이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지훈도 장단을 맞춰 줘야 할 것 같았다.
“근데 그건 북반구인의 편협한 시야 때문이었을지도 몰라요. 지구 반대편 남반구에 와서 보니까 남극 이민도 괜찮을 것 같아요. 킹조지섬에 세종기지도 있으니까 한국 사람이면 좀 더 정착하기 쉽지 않을까요?”
“남극 영주권만 잘 받으면 성공적이겠어요.”
남극은 원래 영유권 선언이 금지되어 있어서 영주권도 없다. 하지만 그런 사실 관계는 두 사람의 아무 말 대잔치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펭귄 사육사 자격증을 딴 다음에 영주권 신청하면 아마 받을 수 있겠죠?”
“그거 3년 과정이라면서요? 꽤나 힘들겠어요.”
“마지막 1년은 펭귄 사육 실습이래요. 펭귄 알도 부화시키고요. 엄청 재밌겠죠?”
“남극은 일조량이 부족한데 그동안 지훈 씨 비타민 D 합성은 괜찮겠어요?”
아직도 지훈이 비타민 D 결핍이라고 믿고 있는 호준의 말에 지훈이 만만찮은 헛소리로 대꾸했다.
“요즘 비타민 D 보충제가 잘 나오잖아요. 특별히 고용량으로 먹으려고요.”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떠들어 대기엔 꽤나 개소리였지만 지훈과 호준은 죽이 잘 맞았다. 서로 이렇게 헛소리 만담을 잘하는 줄은 같이 일하는 내내 전혀 몰랐다. 각자 이 상황에 놀라고 있었지만 개소리의 핵심은 뻔뻔함이었으므로 둘 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누가 더 헛소리를 장황하게 이어 갈 것인지를 경쟁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남극 이민과 비타민 D 섭취에 이어 북극곰의 콜라 취향, 그리고 기후 변화와 그에 대한 대책에 대해서까지 논의했다.
모든 대화 소재가 고갈될 무렵 호준이 먼저 항복을 선언하며 대뜸 딴소리를 했다.
“지훈 씨의 여행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펭귄 얘기 잘 하다가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싶어서 지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무관님 덕분에 여행 완전 재밌어요. 저는 이런 관광지는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귀여운 바다사자도 봤잖아요.”
호준이 보기에 자신과 동행하는 동안 지훈은 불편해하는 기색을 표하진 않았다. 재미있다는 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처음에는 좀 어색해했지만 점점 긴장을 푸는 게 보였다. 결정적으로 어젯밤에 요란하게 호준의 등짝을 때린 이후엔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더 허물없이 호준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준은 이쯤에서 한 가지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지훈 씨가 저한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그렇게 말해 주는 건 정말 여행이 즐거워서일까요, 아니면 제가 오랫동안 지훈 씨의 상관이었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훈은 생뚱맞게 진지해지는 호준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호준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걸 지훈이 속으로만 부글거리는 것과 당사자가 대놓고 말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지훈 씨와 저 사이엔 위계가 있어 왔잖아요. 꽤 오랫동안. 그것 때문에 지훈 씨는 갈등도 있었고요. 그래서 지금 이 시간들이 사적인 자리 같지만 사실 그렇게 사적이진 않을 겁니다. 아마 저보다는 지훈 씨가 더 실감하고 있을 거고요. 그래서 지훈 씨가 혹시 내심 불편한데도 말을 못 하는 게 있다면…….”
“어제 제가 등짝 때린 것 때문에 그러시죠?”
지훈이 호준의 말을 대뜸 끊었다. 호준이야말로 말을 돌려 하는 법이 없는 지훈 때문에 놀랐다.
“조금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사무관님이랑 여행 다니는 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때려 놓고는 조금만 미안하게 생각하다니. 지훈의 말에 호준의 등짝이 억울해했다.
“제가 여행 재밌다고 한 건 정말 재밌어서 그런 거예요. 싫었으면 오늘 안 따라 나왔어요. 어제는 그냥…….”
“알아요. 상사 한번 때려 보고 싶었다면서요. 저한테 그동안 쌓인 거 다 푸는 거 같던데.”
쌓인 걸 ‘다’ 풀었다는 것만 빼면 사실이었다. 사실 그 정도로는 덜 풀렸으니까. 하지만 그 상사가 대놓고 말하자 지훈은 더 할 말이 없었다. 호준에게 밑천이 다 털린 기분이었다. 하긴 바보가 아닌 이상 우루과이에 오기 전에 그렇게 난리를 떨었는데 호준이 지훈의 원한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사무관님은 이제 저랑 여행 다니는 거 싫으세요?”
호준도 사람인데, 어제 등짝 맞은 것 때문에 지훈을 좋아하던 마음 같은 건 싹 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대랑 여행을 같이 다니고 싶을까?
하지만 호준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뇨. 전혀요. 제가 먼저 같이 다니자고 한 건데요. 다만 저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지훈 씨의 회사 일에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제가 만약 어제 일로 등짝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기더라도 지훈 씨의 지위나 업무에는 영향이 없을 겁니다.”
정작 지훈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기가 어제 등짝을 때릴 때 그 점까지 고려했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호준이 작정하고 마음먹으면 거기까지 손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지훈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날아오는 동안 직장인으로서의 기본 개념을 놓고 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지훈은 호준이 말하는 바를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정호준 사무관은 평소에 일을 엄청나게 시키는 데다가 말과 논리로 사람을 자근자근 씹어 대고 전화와 출장을 많이 요구하는 지독한 상사이긴 했지만, 적어도 자신의 위계를 이용해서 비상식적이고 부당한 일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리고 호준이 뒤끝이 좀 있을지언정 자기가 먼저 편하게 대해 놓고 나중에 뒤통수칠 사람은 아니었다. 저번에 호준의 집에서 지훈이 소리를 버럭 질러 대며 욕까지 했는데도 호준은 그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걸 보면. 물론 그 직후에 본인이 차여서 쪽팔려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지훈은 호준을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후로는 상하 관계를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사무관님은 치사하게 사석에서 일어난 일로 업무에 불이익 줄 사람이 아니잖아요. 저 사무관님이 싫지만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세상엔 사석에서 있었던 일로 업무에 불이익 주는 상사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정호준은 예외였다. 그건 호준의 덕목 중 하나였고, 그를 2년 넘게 봐 온 지훈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호준은 새삼스럽게 지훈이 생각보다 더 직설적인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2년 넘게 이런 성격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전에도 할 말은 꽤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알고 있었던 모습들도 그동안 지훈이 정말 정말 많이 참은 거였다.
호준은 지훈의 이런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큰일이었다. 고작 며칠 붙어 다니면서 지난 2년 동안 알았던 것보다 김지훈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아 갔다. 지훈를 알아 갈수록 마음을 정리할 자신이 더 없어졌다. 괜히 같이 다니자고 했나. 너무 좋아서 후회될 정도였다.
“사무관님, 그럼 혹시 제가 어제 때린 것 때문에 사적으로는 불이익이 있는 건가요? 공적인 얘기만 하시는데…….”
호준의 속도 모르고, 그저 호준이 업무와 상관없는 치졸한 사적 복수를 할까 봐 불안해진 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적인 불이익이야 없겠지만, 사적으로는 정호준이 어떻게 보복할지 누가 아는가. 아직 여행이 며칠 남았기 때문에 지훈은 나름대로 진지했다.
“사적으로는 제가 지훈 씨한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호준이 사적으로 지훈을 대하면 큰일이었다. 지금도 그냥 붙잡고 끌어안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었으니까. 물론 지훈이 그런 호준의 속을 알 리는 없었고, 호준도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호준은 지훈과 이렇게 여행 다니며 좋은 추억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더 욕심부릴 생각이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마 호준이 먼저 지훈과 거리를 둬야 할 테다.
“여기서 있었던 사적인 일들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마 없었던 일이 되겠죠. 여행지에서의 추억으로나 남지. 한국에 돌아가면 따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 점은 걱정 마요.”
호준을 말을 듣고 지훈은 자신이 등짝을 얼마나 때리든 여행이 끝나면 더 추궁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지훈 씨는 휴가 끝나면 퇴사하고 북극 이민 간다면서요.”
“아! 그러네요. 나 북극으로 이민 가지, 참.”
자기가 먼저 거짓말해 놓고는 깜박하는 지훈의 반응에 호준은 피식 웃었다. 저렇게 허술할 거면 애초에 거짓말은 왜 했나 싶지만 지훈의 반응이 귀여웠기 때문에 호준은 끝까지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혹시 나중에 이민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와도 모르는 척할게요.”
이민이 아니라 호준의 코앞에 정규직 취직을 해 버린 지훈은 내심 똥줄이 탔다. 다른 부서로 배정되어도 적어도 한 번은 마주칠 텐데? 이대로 점점 커져 가는 거짓말을 대체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지훈은 누구도 안 믿을 농담으로 말한 거지만 호준은 진지하게 믿는 것 같았다.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거짓말해야 할 것 같았다.
“사무관님, 방금 여기서 있었던 일 한국으로 돌아가면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셨죠?”
나중에 돌아가서 들키면 모르는 척하기 위해서 지훈은 나름대로 짱돌을 굴렸다.
“어차피 그렇게 되겠지만…… 아예 확실히 하고 싶은 건가요?”
“네…….”
“그래요, 그럼.”
호준은 생각보다 흔쾌히 수긍했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말하면 절대로 못 믿을 텐데, 호준이 그러자고 하니 믿음이 갔다. 지훈이 2년 동안 봐 온 호준은 자기가 말한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람이었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면 정말로 모르는 척할 것이다. 지훈은 나중에 모르는 척해야 할 일들을 이미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예요.”
“혹시 딴소리할 만한 일을 할 건가요? 지훈 씨?”
호준이 미심쩍은 투로 묻자 지훈이 긴장했다. 지훈은 이미 벌인 일 때문에 그런 건데, 호준은 미래형으로 묻고 있었다.
“아뇨, 그냥 확실히 해 두자는 거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지훈은 그 말을 하면서도 정말 몰랐다. 이 여행에서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물론 호준 역시 자신이 계획하지도 않은 일들이 난데없이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라, 두 사람 모두 방금 전의 약속을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