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지훈과 호준은 소고기를 배불리 먹은 후 몬테비데오 구시가지로 향했다. 두 남자는 계획한 여행 일정을 완벽하게 사수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행 그 자체에 최선을 다했다. 벼룩시장에서 온갖 신기한 수공예품들을 구경하고 박물관도 건성으로 대충 돌았다. 그럭저럭 알찬 일정이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최저가 비행기 티켓만 끊고 온 지훈에게는 대단히 이득이었다. 호준의 가이드는 그의 평소 업무 처리만큼이나 완벽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지훈이 이제까지 호준에게 당한 수모의 한 0.1%p 정도는 깎아 줘도 되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내일 날이 좋으면 푼타 델 에스테에 갑시다. 여기서 가까운 해안 휴양지인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버스 타야 하니까 지훈 씨는 일찍 자도록 해요.”
점심을 배불리 먹은 탓에 저녁 식사는 간단하게 마친 후, 호준은 오늘 치의 가이드 업무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아홉 시 뉴스 할 시간도 안 되었는데 지훈을 재우려 들었다. 요즘은 여덟 시부터 뉴스를 하기 때문에 괜찮다나? 시차 때문에 살짝 졸리긴 했지만 새 나라의 어린이가 아닌 지훈은 당황했다.
“사무관님은요?”
“방금 미겔이 한잔하자고 해서 늦게 잘 것 같아요.”
점심때 와인 한 병을 마셔 놓고는 또 뭔가를 마시려는 호준이었다. 술 못 마시고 죽은 우루과이 귀신의 원한이 호준의 간에 달라붙은 게 틀림없다.
“그럼 저도 마실래요!”
호준이 굳이 방 밖에서 매일 술을 마시는 이유를 정말로 몰랐던 지훈은 눈치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게 다 지훈과 호준을 한방에 몰아넣은 미겔 탓이었다. 호준은 아무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저랑 마시는 건데 괜찮아요? 저 있으면 싫다면서요.”
호준에게 완전히 간파당한 지훈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정호준이고 나발이고 일단 비싼 돈을 내고 온 여행지였다. 술 파티를 빠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기선 사무관님 아니고 정호준 씨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음……. 그럼 천천히 정리하고 뒷마당으로 내려와요. 난 먼저 나가 있을 테니까.”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저녁 먹고 반드시 재울 기세더니? 갑자기 너그러워진 호준이 수줍은 표정으로 귀까지 긁적이는 걸 보긴 했지만, 지훈은 자신이 방금 내뱉었던 말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 * *
호스텔에서 숙박하는 사람들도 다들 이 평화로운 도시가 무료했는지 죄다 바비큐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나왔다. 술자리는 생각보다 아주 성대해졌다. 정체 모를 곳에서 계속 흘러 들어오는 와인과 맥주가 넘실대는 가운데 파티 분위기는 잔뜩 달아올랐다. 지훈은 스페인어를 거의 못 했기 때문에 그나마 말이 통하는 영어권 여행자들과 되는대로 수다를 떨었다.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편한 건지 지훈과 거리를 두려고 했던 건지, 호준은 지훈의 반대편에 앉아서 미겔을 비롯한 호스텔 스태프들과 주로 대화를 나누었다. 도중에 누가 또 만국 공통이라는 뽕짝 리듬 가득한 라틴 댄스 음악을 음량 빵빵한 우퍼 스피커로 틀어놓았다. 덕분에 테이블 건너편에서 하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며 신나게 노는 사람들 옆에서 같이 놀던 지훈은 불현듯 시야에서 호준이 사라진 걸 눈치챘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호준이 보이지 않았다.
「미겔, 웨어 이즈 헤옹?」
어차피 정호준이니 정 사무관이니 하는 호칭을 미겔이 알아들을 리가 없어서 헤옹이라고 불렀더니 역시 미겔이 바로 알아들었다.
「히 이즈 씨크. 히 인 더 뻬드룸.」
어디에 갔냐고 물으니 아파서 방에 들어갔단다. 미겔이 하는 강렬한 스패니시 억양의 영어를 힘겹게 알아들으며 지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프다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호준이 아프든 말든 지훈은 정말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루과이에 오기 전날에도 지훈은 괜히 호준이 자기 땜에 죽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집까지 찾아갔었다. 지훈은 이번에도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호준의 생사를 염려했다. 아까까지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아프지? 이유 없는 돌연사인가?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데 이번에 그 설마가 도진다면 큰일이다.
호준이 아프다는 말만 들었는데 멀쩡한 사람을 상상만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지훈이었다. 아무튼 해외에서 죽으면 외교부에서도 관여를 할 텐데. 호준이 죽을 지경으로 술을 마셔 대는 걸 말리지 않았다고 하면 사망 책임이 다 동행인인 지훈에게 전가될지도 모른다. 해외에서 살인 용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사실 지훈이 호준을 염려하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호준이 오늘 죽어 버리면 남은 여행 일정 동안 가이드는 누가 해 준단 말인가. 솔직히 지훈은 오늘 호준이 해 준 가이드가 엄청 마음에 들었다. 자기 카드 탈탈 털어서 공짜로 소고기 사 주는 가이드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내일도 어떻게든 얻어먹으려 했는데. 우루과이에서 지내는 매일매일이 오늘만 같아야 했다. 그러니 호준은 적어도 지훈의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했다. 지금은 절대 죽으면 안 되고 나중에는 꼭 자신과 무관한 이유로 죽어야 했다.
지훈은 호준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사무관님……. 괜찮으세요?”
기껏 방에 들어갔더니 불은 꺼져 있고 호준의 침대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아프다는 인간이 어디로 갔담? 설마 지훈에게 차인 데다가 소고깃값도 너무 많이 내 버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옥상에서 자살한 건가? 유서에다 김지훈 대리한테 차여서 그 실연의 상처로 슬퍼서 죽는다고 써 놓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지훈이 창문을 열고 호스텔 뒷마당에 시체라도 떨어졌는지를 확인하려는데 화장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욱!
그 소리는 멀쩡하게 잘 살아 있는 사람이 위장에 있는 무언가를 게워 내기 위해 식도를 힘차게 움직여 활력 넘치는 구토를 할 때 단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우렁찬 소음이었다.
지훈은 토악질 하나로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호준이 며칠간 밤새 술 먹고 달렸다는 건 이 호스텔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일주일만 더 지내면 이대로 우루과이 주류 협회에서 명예 홍보 대사로 호준을 위촉할 기세였으니까. 심지어 오늘 낮에 와인 반병을 다 마시고도 저녁에 또 맥주 몇 병을 해치우는 걸 지훈은 곁눈질로 분명히 보았다. 신나게 놀던 와중에 호준을 멀리서 보고 있었던 일을 굳이 변명하자면, 호준이 마시는 맥주가 맛있을 거 같아서 따라 마시려고 그랬던 거였다.
아무튼 호준이 제아무리 강철 체력 야근왕이라고 해도 갑자기 많은 양의 술을 매일같이 마셔 대니 술병이 나는 건 당연한 일. 호준의 건강에는 절대로 관심 없는 지훈이라 해도 쉽게 추론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정황이었다.
죽을병이 아닌 단순 술병이라는 걸 확인한 지훈은 호준이 계속 혼자 변기 붙잡고 토악질하게 놔두려고 했다. 하지만 우렁찬 사운드를 의도치 않게 듣다 보니 호준이 구토에 약간의 곤란을 겪고 있다는 걸 눈치채 버렸다. 본인도 힘들긴 하겠다만 옆에서 듣는 일도 꽤나 고역이었다. 듣기 싫은데 그냥 방에서 나가 버릴까 하다가, 지훈은 불현듯 자신의 넓적한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다! 지금뿐이야! 지훈은 그대로 화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호준에게 다짜고짜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퍽!
“으헉!”
등짝을 타고 전율하는 매서운 손맛에 호준이 고개를 들다 말고 다시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 등이 너무 아파서 허리를 들 수가 없었다. 속도 미친 듯이 울렁거리는데 뒤에서 누가 등판을 쳐 대니까 미칠 것 같았다. 손도 엄청 매웠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마피아인가? 신흥 조폭? 미래에 남한의 고위 공무원이 될 인재를 미리 암살하려는 북한의 요원? 누군지는 몰라도 걸리기만 하면 조져 버릴 것이다.
“사무관님! 괜찮으세요?”
호준은 주먹을 쥐려다 말고 지훈의 목소리를 듣고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 감쌌다. 호준이 이 세상에서 절대로 조져 버릴 수 없는 유일한 상대였다. 게다가 지훈이 이 추한 상황을 보고 있다니, 개쪽팔렸다. 미겔한테 분명히 지훈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밖에서 잘 놀고 있어야 할 지훈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술이 깨고 나면 미겔부터 조질 것이다. 호준은 변기통에 대가리를 박고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분풀이 목표 대상을 바꾸었다. 차마 사랑하는 사람을 조질 수는 없었으니까.
“나, 나가요. 지훈 씨…….”
지금 꼬락서니를 보여 주기 싫었던 호준이 팔을 내저었지만 소용없었다. 지훈은 호준의 넓은 등짝을 보면서 손바닥에 다시 우주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걱정하는 척하면서 호준을 사심 가득 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사무관님 아프신데 어떻게 나갑니까! 도와 드릴게요!”
“그만!”
퍽!
참고로 지훈은 손이 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전국 어린이 매운 손 대회 금상에 빛나는 수상 경력을 자랑 삼아 학창 시절에 신나게 사람들을 패고 다녔다. 어찌나 손이 매운지 남고 다닐 땐 선생님들이 야구 방망이 대신에 지훈을 불러다가 한 대씩 때리게 했을 정도였다. 성인이 된 후로는 평범하게 살면서 그 특별한 능력을 숨기고 있는 재야의 무림 고수 지훈이었다. 그 손바닥이 호준의 등판 위에서 간만에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속을 거의 다 게워 냈던 호준은 이젠 등짝이 너무 아파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군 시절 자기만 집요하게 패던 또라이 선임을 만났을 때도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맞지는 않았는데.
“그, 그만…….”
“사무관님! 힘내세요!”
퍽!
지훈은 호준이 다시 구토를 시작한다고 생각해 아주 신명 나게 호준의 등짝을 때렸다. 호준은 속절없이 맞아 가며 울렁거림과 등짝의 고통을 이중으로 느껴야 했다. 이쯤 되니까 정말 울고 싶었다. 가만히 있어도 술기운 때문에 죽을 거 같은데, 뒤에서 정말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하는 손바닥의 고통이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구토를 멈춘 지 오래였지만 호준은 계속되는 등짝 스매싱 때문에 오열했다.
“그…… 그만! 그만, 지훈 씨! 제발 그만!”
“사무관님! 죄송해요. 저는 도와 드리려고 그런 건데!”
“아흑……. 아, 알겠으니까…… 제발 그만해요…….”
만약 호준이 지금 당장 죽어서 부검을 하게 되면 사인은 과도한 등짝 스매싱일 것이다.
“사무관님, 우세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속이 안 좋으신 것 아닙니까?”
술병 난 위장보다 등판이 더 아팠다.
“아닙…… 니다……. 제발 부탁이니까 잠깐 나가 줄래요?”
“왜요?”
지훈도 알고는 있었다. 자기 손바닥이 어지간히 아프다는 것을. 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딴청 피웠다. 호준의 속 타는 표정이 가관이라서 지훈은 광대가 승천할 것 같았지만 일부러 안면 근육에 힘주고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호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에게 화내지 않고 대신 대단한 인내심을 풀 가동시켰다.
“저…… 볼일 좀 보게요.”
“아, 넵!”
볼일이라는 말에 지훈은 얼른 물러났다. 닫힌 화장실 문 너머로는 변기 물 내리는 소리와 이 닦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아무튼 방에서 나와 손바닥을 살펴본 지훈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고 얄미운 정호준을 때렸어! 지훈은 후련함을 느꼈다. 정신 공격은 실패했지만, 뜻밖에도 물리적 공격에 성공했다. 호준이 술병으로 자멸하는 바람에 뜻밖의 성공을 거둔 복수였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비틀거리면서 호준이 기어 나오자 지훈은 호들갑을 떨며 호준을 부축했다. 하지만 지훈의 손이 등에 닿자 호준은 재빨리 그 손길을 피했다.
“사무관님, 괜찮으세요?”
“아뇨, 하나도 안 괜찮습니다. 등 만지지 마세요, 제발…….”
호준은 비틀거리면서도 지훈의 도움 없이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지훈이 얼핏 보기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는데 정말로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했다. 2년 반을 봐 왔지만 저렇게 병약한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늘 활기차게 야근하고 힘차게 사람을 쪼아 대던 호준이 저렇게까지 약해질 줄은 몰랐는데. 아마 정부 부처 사람들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 나약한 정호준의 모습은 모를 것이다. 지훈은 그 모습이 딱히 가엽다기보다는…… 호준을 통해 알코올 중독의 위험성을 새삼 실감했다. 과도한 음주는 여러 가지 이유로 건강에 해로웠다.
호준은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도 차마 똑바로 눕지 못했다. 등이 매트리스에 닿지 않도록 옆으로 돌아누웠다. 얼음찜질 안 하면 저 등이 한 3일은 계속 화끈거릴 텐데, 지훈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얼음을 가져오진 않았다. 여태 호준한테 당한 게 있는데, 이대로 얼음찜질 서비스까지 제공할 수는 없었다.
“지훈 씨. 다음엔 혼자 할게요…….”
호준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누가 들어도 기력 없는 목소리였다.
“사무관님 그냥 술병 난 거죠?”
“…….”
호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부끄러운데 지훈이 확인 사살까지 하니까 몇 배로 쪽팔렸다. 호준은 대답 대신 이불을 뒤집어썼다. 지훈은 이불 위쪽으로 삐져나온 호준의 검은 머리카락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이 생각보다 순진했다. 이렇게 심술부려 놨으면 한 번은 화낼 법한데 끝까지 참는 걸 보니…….
호준도 가끔 욱하는 성격인 걸로 아는데 지금 꾹 참고 있는 거 보면, 화낼 힘도 없이 등짝이 너무 아프거나, 성질머리를 잘 참고 있다는 뜻일 테다.
“더 놀지 왜 벌써 들어왔어요…….”
지훈이 굳이 나가지 않고 자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호준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창밖에서는 분위기가 무르익다 못해 우렁찬 라틴 뽕짝 사운드가 창문을 울릴 정도였다. 사실 지훈이 신나게 노는 사이 몰래 방에 들어와서 얼른 약 먹고 잘 작정이었던 호준은 지훈이 작정하고 의자까지 꺼내 오자 완전히 좌절했다.
“사무관님이 안 보이셔서 혹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찾아왔어요.”
“저는 정년 퇴임 후에 자연사 할 테니까 걱정 마요…….”
호준이 저렇게 힘없이 중얼거리는 건 또 처음이었다. 지훈은 순수하게 호기심을 느꼈다. 이 인간도 아프면 저렇게 작아지는구나. 웅크린 등이 좀 측은하기도 했다. 일단 때린 건 때린 거니까, 얼음찜질을 좀 해 줄까?
“술을 그렇게 마셔 대다가 간 기능 악화로 돌연사 하시는 거 아니고요?”
“내심 제가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닙니까?”
등짝이 아직도 얼얼하게 아파 왔던 호준이 한에 사무친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 설마요. 다음에 아프면 말해요. 등은 두드려 드릴게요. 제가 그거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
호준은 한 번만 더 입 열면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아예 입을 다물었다. 지훈을 너무 사랑하지만 아픈 건 아픈 거였다. 처음에 맞을 때는 따가웠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화끈거렸다.
호준이 그답지 않게 너무 풀이 죽어 있는 걸 보니, 지훈은 그제야 아픈 사람한테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우루과이에 오기 전 죽까지 사다가 호준의 집 앞을 찾아갔던 일도 생각이 났다.
“아깝네요. 전에 샀던 죽 가져왔으면 내일 드실 수 있었을 텐데. 하긴 비행기를 30시간을 넘게 타니까 가져올 수도 없었겠지만요.”
“죽이요?”
“사무관님 집에서 잤던 다음 날 출근 안 하셨잖아요. 병가 내셨다고 해서 오메가3와 DHA가 풍부한 등 푸른 생선이 들어 있는 참치야채죽을 사 들고 사무관님 집에 다시 갔었거든요. 그런데 안 계시더라고요. 경비원도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고요.”
“지훈 씨가 내 집에 다시 왔었다고요?”
충격적인 사실에 놀란 호준이 이불 걷고 벌떡 일어나려는 걸 지훈이 다시 눕혀서 이불을 덮어 버렸다. 호준도 힘이 꽤 센 편인데 지훈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몸을 일으키자마자 다시 눕혀져서 이불까지 덮였다.
“계속 누워 있어요.”
“잠깐만요. 집에는 왜 다시 왔습니까?”
호준이 놀라서 누운 채로 쳐다보자 머쓱해진 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사무관님 아프시다고 해서요. 사무관님 2년 반 동안 결근한 적 없잖아요. 평소엔 수시로 밥은 먹었느냐, 일은 하고 있느냐, 보고서는 왜 이 모양이냐 하면서 전화가 오는데 그날은 전화가 한 통도 안 오니까 좀 걱정됐어요. 만약에 사무관님이 죽기라도 하면 제가 살인 용의자가 될 수도 있잖아요.”
지훈의 말인즉, 걱정이 되었던 건 호준이 아니라 졸지에 살인 용의자가 되어 경찰서에서 고생할 자기 자신이었다. 호준은 지훈의 진의를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그렇다면 설마 오늘도 살인 용의자가 될까 봐…….”
“네?”
“아, 아닙니다.”
호준이 오늘의 목적도 눈치챈 건가 싶어서 지훈은 약간 긴장했다.
“아무튼 아프시면 죽 먹으라고 죽을 사 갔는데 집에 안 계셔서 그냥 아파트 경비원 드렸어요. 근데 그 경비원이 저를 되게 이상하게 쳐다보더라고요.”
“그 경비원님이 드라마를 좋아하세요. 특히 수사물이요. 그래서 혼자 상황극 많이 하십니다.”
“아……. 그럼 나를 살인 사건 용의자로 몰아갔을 수도 있겠네요.”
어쩐지 경비원이 자신을 훑어보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설마 내가 드린 죽에 독극물 들었다고 생각한 거 아냐? 늘 잘 맞지 않는 지훈의 촉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만큼은 쓸데없이 정확했다. 지훈이 넘긴 죽의 성분 일부는 경비원의 사돈의 팔촌의 오촌 당숙의 아들의 손자며느리의 경찰 친구를 통해 현재 국립과학수사원에서 검사 중이었다. 물론 나머지 반은 경비원의 몸 속에서 안전하게 소화되었고, 잔해는 다시 세상 밖으로 무사히 배출되었다. 럭셔리캐슬스테이트시티 아파트의 103동 경비원은 아직까지 아주 건강하다.
“그래도 살인 사건은 없었으니까요. 물론…….”
“물론?”
“실제로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경비원님은 지훈 씨부터 의심할 수도 있어요.”
지훈은 순간 호준의 등짝을 한 대 더 때리고 싶었다. 사석에서 보니까 사람이 진지하다가도 가끔씩 저렇게 신경을 긁었다.
“사무관님, 혹시 그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사양할게요.”
“그건 사무관님이 정하는 게 아닌데요.”
“살려 주세요.”
호준이 아파서 앓는 와중에도 깐죽거리자 지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냥 호준이 자기 앞에서 살려 달라고 비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복수를 반쯤 성공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등짝을 때리길 잘했다. 지훈은 뿌듯해졌다.
“앞으로 하는 거 봐서요.”
“그럼 이제까지 한 건 봐주는 겁니까? 저 때문에 괴로웠다면서요.”
“누가 봐준대요? 그건 따로예요.”
“그럼 전 이미 죽은 목숨이군요.”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은 죄가 많은 호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늘 등짝 때렸으니까 한 반년 치는 봐 드릴게요. 남은 2년 치는 이율을 연 100%로 해서…….”
강원랜드 앞에 있는 전당포 불법 대출보다 더한 이율이었다.
“그러면 죽어서 백골이 진토 되어도 못 갚아요.”
“그럼 등짝을 좀 더 맞으실래요?”
“지금 창문 열고 뛰어내리면 되나요?”
차라리 죽겠다는 소릴 하는 걸 보니 등짝이 어지간히 아픈 듯했다. 지훈은 마음을 바꾸었다.
“일단 내일은 제 여행 가이드를 해야 하니까 안 되고요. 냉장고에서 얼음이나 좀 가져올게요.”
“얼음이요? 지훈 씨 더워요?”
“저 말고 사무관님 등이요. 그거 얼음찜질 안 해 주면 내일 옷도 못 입어요.”
“알면서 때렸습니까?”
호준이 울컥했는지 억울함을 성토했다. 하지만 억울한 걸로 치면 지훈도 만만치 않았다.
“안 그럼 상사를 언제 때려 봐요!”
“…….”
호준이 어이없어하는 사이 지훈은 후딱 방에서 튀어나왔다. 호준과 농담 따먹다가 정말로 본심이 나와 버린 것에 지훈 본인도 놀랐다. 때리고 싶었단 얘길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해 버리다니. 스스로의 입방정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더군다나 호준은 뒤끝 장난 아닌데, 이거 큰일이다. 등짝에 얼음찜질이라도 해야, 병 주고 약 줬다는 핑계를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훈은 호스텔의 식당 냉장고에서 찾은 얼음을 어딘가에서 발견한 천 주머니에 넣어서 방으로 가지고 올라왔다. 얼음찜질이라도 해 주면 나중에 용의자로 잡혀가도 정상 참작은 해 주겠지.
하지만 정작 호준은 지훈이 없는 사이에 완전히 잠들어 버렸다. 기껏 얼음 가져왔더니 새근새근 잘 자고 있는 호준을 보며 지훈은 좀 어이없었다. 잘해 주려 해도 사람이 이 모양이다.
간만에 제대로 자는 사람을 깨우긴 뭣해서, 지훈은 제일 심하게 때렸던 부위 근처에 얼음을 올려놓은 후에 방 불을 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