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꼬르륵.
점심때쯤 되자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보다 활발한 장운동을 자랑하는 지훈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허기를 느꼈다. 평소와 달리 관광한다고 돌아다녀서 그런지 오늘따라 장운동이 더 활발했다.
사진 찍다 말고 지훈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들어 버린 호준이 피식피식 웃으며 배고프냐고 물었다. 지훈은 상당한 굴욕감을 느꼈다.
“걱정 마요. 안 그래도 점심을 엄청 먹을 계획이니까요.”
“뭐 먹는데요?”
“소고기요.”
“정말요?”
“제가 살게요.”
그 말 한 마디에 여권에 우루과이 입국 도장을 찍은 이후 처음으로 지훈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너무 대놓고 좋아해서 누가 보면 민망할 정도였다. 정작 호준은 오히려 자신이 지훈을 만족시켰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상당히 변태적인 면모였지만 소고기에 정신 팔린 지훈은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은 사적인 자리이니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현금으로 뽑아 왔어요. 혹시 공직자의 해외 카드 사용도 추적될까 봐요. 내 카드지만.”
이쯤 되면 김영란 교수님의 사돈의 팔촌의 오촌 당숙의 아들 삼촌 며느리가 다 모여도 밝혀내지 못할 완벽한 계획이었다. 게다가 그 목표물이 다름 아닌 소고기라니, 아주 훌륭했다. 계획 변태가 세운 변태같이 완벽한 계획에 지훈은 처음으로 만족했다. 이참에 호준의 변태적인 계획력을 재평가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훈에게 소고기를 푸짐하게 먹임으로써 지훈의 기분을 좋게 하여 효용을 극대화하는 아주 유용한 변태력이었다.
“우루과이는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곳이라 가격이 저렴하기도 하고요. 기왕 왔으니 소고기를 먹어야죠. 저번에 한우갈비를 못 사 줘서 아쉬웠는데 잘됐어요. 한우보다 마블링이 적을지는 모르겠지만 맛없진 않을 겁니다.”
호준이 말하는 ‘저번에’라는 일은 며칠 전 태종시에서 지훈이 은밀한 접대 상황인지 아닌지를 헷갈려서 ‘한우…….’까지 중얼거리며 우물쭈물했던 바로 그 일 같았다. 물론 그때는 사무관을 대접해야 하는지 고민되어서 했던 말인데, 정작 호준은 지훈이 한우갈비를 먹고 싶어 했다고 오해했다.
옛날 일을 떠올리느라 겨우 정신 차린 지훈은 소고기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약간의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다시 세모눈을 뜨고 정호준을 면밀히 분석했다. 특히 이 인간이 과거의 개미 코딱지보다 작고 사소한 일까지 쓸데없이 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 그때 지훈은 ‘한우…….’라고 엄청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대체 언제 들은 걸까? 청각도 시각만큼 엄청난 건가?
저 정도 청각이면 분명 여름에 모기도 잘 잡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청각으로 모기의 위치를 파악한 후, 정확하게 손뼉을 날려 모기를 즉사시킬 것이다. 그리고 불을 켠 다음에 붉은 피를 선연히 흘리며 죽어간 모기의 흔적을 손바닥 위에서 발견하겠지. 물론 그 피는 호준이 모기에게 헌혈한 피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 호준의 차림새가 매끈한 팔뚝이 드러나는 티셔츠가 아닌 펭귄 친구 잠옷일 거라고 생각하니 지훈은 짜증이 치솟았다.
지훈은 속으로 호준을 욕하느라 예의 그 멀끔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지도를 보며 부두 시장을 찾아가던 호준이 문득 그 시선을 의식하더니 볼부터 얼굴을 붉혔다. 또 그걸 봐 버린 지훈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외간 남자가 한밤중에 모기 잡는 상상하다가 들키는 것도 좀 그런데 이상한 의도로 오해받기는 더 싫었다. 절대로 호준이 잘생겨서 쳐다본 게 아니다. 정호준은 펭귄 친구 잠옷을 입는 사람이란 말이다. 잘생기긴 했지만,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펭귄 잠옷을 입는다고!
“근데 사무관님, 진짜 펭귄……. 아니, 소고기 사 주시나요?”
“전부터 지훈 씨 사 주고 싶었어요.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요. 그리고 여긴 소고기가 싸니까 돈도 별로 안 쓰고 사 주면서 생색도 내고 일석이조죠.”
다시 길 찾기에 집중하는 호준을 보며 속으로 욕만 하던 지훈은 약간 기분이 묘해졌다. 전부터 사 주고 싶었다는 말이 맘에 걸렸다.
하지만 씩씩하게 몬테비데오의 우시장으로 걸어가는 호준의 너른 등판을 보며 지훈은 다시 짜증이 났다. 저 인간이 자신을 좋아하든 말든,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걸 생각하면 여행 다니는 동안에라도 복수를 좀 해야 할 테니까. 전에 태종시에서 갑자기 분위기 고백 타임이 되어서 미처 해내지 못했던 그 쪼잔한 복수를 마저 완성하고 싶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복수의 기회를 노리자. 지훈은 심기일전했다. 혹시 열심히 노려보면 호준의 등판에 앉은 모기를 발견하고는 모기를 핑계로 등짝 스매싱을 내리칠 기회를 잡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몬테비데오의 우시장엔 수많은 소고기 바비큐 식당이 몰려 있었다. 기본적으로 우시장인 데다가, 많은 관광객과 인파로 시끌벅적했다. 활기차지만 소란스럽기도 했다. 치밀한 호준은 그 와중에 변두리에 있는 적당히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찾아내었다. 호준은 지훈에게 혹시 못 먹는 부위가 있냐고 물었지만 지훈은 자신의 내장 기관은 소의 몸에서 나온 모든 걸 완벽하게 소화시킬 수 있다는 걸 강하게 어필했다.
실제로 지훈은 4대째 내려오는 돼지갈비 식당 출신으로 땅에서 나는 거라면 독버섯과 세균 빼고는 못 먹는 게 없는 강철 위장의 소유자였다. 호준은 그런 지훈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모든 소고기의 부위를 맛볼 수 있는 모둠 세트를 주문하더니 아사도(남미식 바비큐)를 하나 더 주문했고 더불어 레드 와인도 한 병 주문했다.
“한 잔 아니고 한 병 주문하셨어요, 방금?”
“한 잔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가요.”
“어제 새벽까지 달렸는데 괜찮으세요?”
“마시고 죽죠 뭐. 지훈 씨도 술 좋아한다면서요.”
아직 점심시간이었지만 술에 관해서 호준은 누구보다 관대했다. 일할 때도 좀 저러지. 오타 하나에 열을 내는 호준을 생각하며 지훈은 혀를 끌끌 찼다. 반나절 동안 여행을 같이 다녀 보니 민간인 정호준은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상사로서의 정 사무관은 여전히 진저리가 쳐지는 사람이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다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불판에서 활활 구워지는 고기는 기다릴 틈도 없이 바로 나왔다. 배가 무척 고팠던 터라 눈앞의 고기를 보자마자 지훈은 눈이 돌아갔다. 별다른 말도 없이 고기에 집중했다. 특히 잘 구워진 바비큐가 너무 맛있어서 숨도 안 쉬고 먹어 치웠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먹은 걸 다 게워 낸 후 다시 먹은 게 호텔 조식 정도였는데 그걸로는 지훈의 허기를 채우기엔 턱도 없었으니까.
지훈은 그간의 피로를 소고기로 모두 극복할 기세였다. 호준은 자기 몫을 썰다가 놀라서 지훈한테 그냥 다 내어줬다. 지훈은 고기에 눈이 멀어 고맙다는 말도 까먹고 열심히 먹어 치웠다.
한참 후 지훈이 정신을 차려 보니 호준은 고기를 한 접시 더 주문해 놓고는 지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호준과 눈이 마주치자 지훈은 민망해졌다. 지훈의 접시에만 뼈다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사 줄 걸 그랬어요.”
호준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많이 처먹었다. 이쯤 되면 모 인터넷 게시판에 식탐남으로 사연이 올라가 네티즌들에게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호준이 ‘썸남한테 소고기를 사 줬는데 자기 혼자 다 처먹습니다. 이 사람 계속 좋아해야 할까요?’ 하고 글을 올리면 베스트 댓글은 ‘그러다 나중에 사귀면 맛있는 거 자기가 다 처먹고 방송에 식탐 남편으로 출연한 뒤에 이혼 소송 함’일 것이다. 이대로 무개념 식탐남의 대표 주자가 될 수는 없다. 지훈은 상황을 수습해 보기로 했다.
“사무관님은 안 드세요?”
“안 그래도 제 거는 더 주문했어요. 메뉴판의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문했으니까 지훈 씨도 더 먹어요.”
다행히 호준은 자기가 먹던 거 내어주고는 쫄쫄 굶으면서 뒤에서 눈물 흘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너만 입이냐, 나도 입이다. 호준은 뽑아 온 현찰에 자신감이 있었는지, 호기롭게 메뉴판에 있는 소고기를 죄다 주문했다. 역으로 지훈이 배 터져 항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먹이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이쯤 되면 인터넷 게시판 사연은 지훈이 올려야 했다. ‘누가 저한테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이려고 드는데 이건 무슨 뜻인가요.’ 이 글의 베스트 댓글은 ‘비싼 소고기를 사 주다니 그건 참사랑입니다. 당장 사귀세요.’일 것이다. 그 댓글의 아이디는 아마 프린스 헤옹일 텐데 등잔 밑을 잘 못 보는 지훈은 작성자가 누군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지훈은 네티즌들의 댓글 반응을 보며 눈물을 한 방울 찔끔 흘린 다음에 새 글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댓글 보고 덧붙입니다. 여긴 우루과이고 소고기가 엄청 싸답니다.’ 그럼 우루과이라는 배경 때문에 사람들은 소고기에 대해서 까맣게 잊을 것이다. ‘수아레즈 짱’ ‘우루과이 축구 강국!’ 등의 맥락 없는 댓글이 베스트 댓글에 올라갈 것이다. 쪽지함으로 ‘죄송한데 우루과이는 이민 가신 건가요? 팁 공유 부탁드립니다.’ 따위의 쪽지만 날아와서 지훈은 결국 글을 삭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소고기를 너무 많이 사 주는 상대에 대한 고민은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헐, 이거 엄청 비싸지 않아요?”
“흠. 다 합치면 지훈 씨한테 한국에서 한우갈비 4인분 사 주는 가격 정도 되겠어요.”
호준이 그 얘길 하면서 테이블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지훈의 접시를 보면 이미 혼자 3인분은 거뜬히 먹어 치울 인간이라는 걸 눈치챘다는 뜻이다.
“저한테 그렇게 사 주면 안 아까워요?”
“사 주고 싶어서 사 주는데 뭐가 아까워요. 지훈 씨 그동안 열심히 일했잖아요. 성과급도 못 받는데 고기라도 먹어야죠.”
아참. 나 저 사람 때문에 2년 반 동안 미친 듯이 일만 했지. 자기가 여태 당한 걸 다시금 떠올린 지훈은 지금 이 상황을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호준의 주머니라도 열심히 뜯어야 울분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이다.
“그럼 확실히 더 먹어야겠네요.”
지훈이 그렇게 말하는 찰나에 식당 안쪽에서 바비큐 직접 굽던 바비큐 장인 사장님이 직접 나왔다. 수많은 소고기를 직접 서빙하면서 아사도, 초또, 어쩌고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온갖 고기 종류를 신나게 설명했다. 턱 수염은 무성하지만 정작 머리엔 털 한 가닥 없는 바비큐 장인은 외국에서 온 낯선 동양인이 참된 소고기 맛을 알고 잔뜩 주문하는 것에 아주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 설명을 듣던 호준은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Muchas Gracias!(매우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면서 이 집 고기가 세계 최고라고 갖은 아부를 떨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지훈도 조심스럽게 만국 공통의 보디랭귀지인 따봉을 내밀었다. 결국 기분이 좋아진 식당 사장은 당신들은 와인이 서비스니까 공짜로 먹으라고 외치면서 훈훈한 결말을 맺었다.
“지훈 씨가 고기를 잘 먹어서 결국 와인 서비스 받았어요.”
호준이 신나서 해맑게 소리쳤다.
“사무관님 아부 못하신다는 소문 있던데 뻥이었나 봐요.”
“지훈 씨 같으면 곽 과장한테 아부하고 싶습니까? 차라리 야근을 백날 더 합니다.”
와인 서비스의 기쁨이 순식간에 가셨는지 호준이 정색하며 질긴 소갈비를 격렬하게 썰기 시작했다.
“와. 사무관님도 상사 욕을 하시네요.”
호준의 태도는 지훈에겐 꽤나 의외였다. 조직에 삶과 영혼을 팔아 버린 것 같았던 자발적 야근맨도 속으로는 상사를 욕하고 있었나 보다. 고기를 써는 단단한 팔뚝에 핏줄까지 서는 걸 보니 밤마다 이를 갈아 대면서 욕한 것 같은데. 지훈은 어쩐지 그 모습이 친숙하게 다가왔다. 바로 호준을 욕하던 지훈의 모습이었으니까. 호준은 자기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런 상사라는 걸 알고 있을까. 역지사지라는 말을 알려 줘야 할지 지훈이 고민하는 사이 호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욕이라뇨. 아직 씨발 새끼들이라고는 안 했어요.”
“푸하하하!”
지훈이 고기를 먹다 말고 진심으로 웃어 대기 시작하자 호준이 어이없어했다.
“지훈 씨 앞에선 욕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재밌어요?”
호준은 진심을 다해서 투덜거렸는데, 그마저도 반듯한 얼굴과는 매치가 안 되었다. 그 괴리감 때문에 지훈은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아야 했다. 바른 생활 교과서 표지 모델처럼 생긴 얼굴의 호준이 욕도 하고 다닐 줄은 몰랐다.
“대박이에요. 사무관님은 조직과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나도 회사 가기 싫어요. 노는 거 좋아해요.”
호준이 고기를 썰어 먹으며 푸념했다. 회사 싫어하고 노는 거 좋아하는 인간이 2년 반 동안 그렇게 야근을 했다니. 지훈은 믿기지 않았다. 계획 변태인 만큼 야근도 자발적으로 즐기는 야근 변태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세요?”
“일은 조금만 허투루 하면 누군가가 피해를 볼 수도 있잖아요. 위에서 다 뜯어고치긴 해도 제 선에서는 열심히 해야죠. 물론…….”
사무관의 정석 같은 대답을 하던 호준이 흥미진진하게 자기 말을 듣고 있는 지훈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일이 적으면 더 좋겠죠.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까지 많이 하고 싶진 않아요.”
“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무관님만큼은 일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제가 좋아하는 건 지훈 씨뿐입니다.”
호준은 분이 풀린 듯 다시 고기 써는 일에 열중하면서 툭 던졌지만, 그런 것치고는 파급력이 큰 말이었다. 지훈의 얼굴이 굳었다. 맞다. 저 사람이 나 좋아하지. 잠깐 잊고 있던 그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지훈은 아무리 호준을 좋게 봐 줘도 그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었다. 자신은 게이가 아니니까. 더군다나 호준을 좋게 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정호준의 저 미친 업무 때문에 고통받은 지난 2년 반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억울함이 치솟았다. 이쯤 되면 좋아도 대놓고는 싫다고 말해야 할 판.
상황은 이미 호준이 지훈에게 대차게 차인 걸로 일단락되었다. 그 이후에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 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호준이 마치 그날 일은 없었던 일인 것처럼 굴어서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소고기까지 먹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다시 훅 치고 들어오니 지훈은 심란해졌다.
고백받고 찬 건 난데 왜 내가 심란해야 하는 거지? 태연하게 고기 썰어서 입에 쑤셔 넣고 있는 호준을 보니 지훈은 배알이 꼴렸다. 지훈은 반드시 저 인간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이 아닌 정호준이 괴로워해야 했다. 지훈은 다시 복수의 칼날을 갈며 고기를 썰었다. 아까부터 소소하게 복수 좀 하려고 간을 보고 있었는데 무기가 없었다. 물리적 공격은 안 될 것 같은데, 대안은 역시 정신 공격인가?
맨정신엔 못 하겠어서 지훈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사무관님은 저 진짜 좋아해요?”
한국이었으면 남자 둘이 앉아서 이런 얘기를 마음 놓고 못 했을 것이다. 누가 옆에서 듣다가 게이 치정극으로 오해하면 지훈마저 게이로 오해받을 테니까. 지훈은 말을 하면서도 주변에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 건너편의 소고기 식당에 검은 머리라고는 지훈과 호준 단둘뿐이었다.
“네. 진심이에요.”
호준은 뜯던 고기를 내려놓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표정만 봐도 내적 갈등이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든 건 애당초 지훈이 아니라 고기 잘 먹다 말고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정호준이었다.
“언제부터요?”
“궁금해요?”
비록 대답은 태연하게 하고 있었지만 호준은 살짝 달아올랐다. 방금 홀짝였던 와인 핑계를 대도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지훈 때문이었다.
“네. 전 감도 안 잡히거든요.”
네가 나를 괴롭힌 기억밖에 없어서, 나는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라는 게 지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호준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순순히 털어놓았다.
“지훈 씨가 ㅇㅇ원에서 일할 때 ㅇㅇ프로젝트 중간 회의 한다고 처음 만났죠. 지훈 씨가 인턴이었을 때요. 그때 마이크가 고장 나서 한참 고생했었는데, 잠깐 쉬는 사이에 저 데리러 올 때부터 관심이 갔어요.”
지훈은 잊고 지냈던 아득한 옛날 일을 기억해 냈다. 지훈이 회사에서 이름만 들어 봤던 호준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러고 나서 보고서 작업을 같이 하는 동안 지훈 씨랑 계속 연락하면서 좋은 감정이 생겼어요. 프로젝트 끝나고 밥 한번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다음 날 연락하니까 지훈 씨가 퇴사를 했다더라고요. 살면서 그렇게 빨리 퇴사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지훈이 다름 아닌 호준을 피하려고 전화로 퇴사 통보한 바로 그때였다. 호준이 그때만 생각하면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른 회사에서 다시 만나긴 했지만요. 지훈 씨도 알겠지만 2년 넘게 사적으로 지훈 씨를 만날 일이 없어서 친해질 기회가 없었어요.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적인 감정을 좀 자제하다 보니까 이렇게 티도 안 나게 되었습니다. 지훈 씨는 많이 놀랐겠지만 저는 꽤 오래됐어요.”
그럼 거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한 거잖아? 호준의 말을 들은 지훈은 정말로 놀랐다. 그동안 정말 감도 못 잡았다. 아무리 과거를 돌이켜 봐도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그럼 나 좋아하는데 왜 괴롭혔어요?”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일부러 괴롭힌 건 아니었는데 지훈 씨가 그렇게 괴로워할 줄 몰랐습니다. 물론 변명은 안 되겠지만,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사과하는 것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호준의 잘생긴 얼굴은 정말로 자책감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지훈은 더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미안해할 거면 애초에 왜 그런 거야?
“전화는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했어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래서 다른 생각은 별로 안 했는데…….”
지훈은 허탈해졌다. 일을 효율적으로 시키려는 채찍질의 일환이라고만 생각해 왔건만, 고작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니. 지난 2년 반의 오해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목소리 듣고 싶으면 전화해서 노래를 시키지, 왜 일을 시켜요?”
“부탁하면 노래 불러 줄 겁니까?”
“아뇨.”
“그러니까요.”
“아…….”
대답하던 지훈은 짜증이 났다. 또 호준한테 말려든 기분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역시 명문대 졸업하고 어려운 고시까지 합격한 사무관이라 머리가 좋은 건가? 지훈이 씩씩거리는 사이 호준이 덧붙였다.
“그리고 요즘엔 부하 직원한테 업무와 무관한 노래시키면 갑질이에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이미 시도 때도 없이 전화 걸어 대는 걸로 정호준 사무관의 갑질은 인권위원회 진정감이었다. 그럼 여태까지의 말도 안 되는 트집과 각종 갑질은 업무 연관성이 있어서 괜찮다는 건가? 뭐라 항변하려던 지훈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여태 호준이 트집 잡은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업무 연관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자식 일부러 업무 연관성이 있는 거리만 잡아서 집요하게 트집을 잡았단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저 진정성 넘치는 호준 때문에 지훈은 더 짜증이 났다. 이쯤 되면 정신 공격도 실패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저 인간에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일단 오늘은 한 수 접고 다음을 기약하자. 여행 중에 붙어 다니면 반드시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지훈이 짱돌을 열심히 굴리는 사이 호준이 입을 열었다.
“고백을 좀 멋지게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것도 미안합니다.”
“헉, 아뇨! 절대로 괜찮습니다! 이 정도가 완전 딱 좋아요!”
그것만큼은 정말 호준이 미안할 일이 아니었다. 게이가 아니라서 호준을 좋아할 일도 없는데 고백을 멋지게 받으나 얼떨결에 받으나 상관없지 않은가.
하지만 호준이 진심으로 아쉬운 눈치를 보이기 시작하자 지훈은 슬슬 겁이 났다. 만약 저 계획적이고 치밀한 성격에 멋지게 고백한다고 작정을 하면 대체 무슨 짓을 해 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며칠 빌린 명품 스포츠 렌터카 트렁크를 열면 풍선이 주렁주렁 나오는 그런 촌스러운 건 아니겠지?
휴먼명조체로 ‘김 대리 사랑해요’라고 쓰인 현수막이 하늘로 두둥실 올라가는 와중에 호준이 무릎 꿇고 반지 케이스를 활짝 여는 광경을 생각하고 지훈은 진저리를 쳤다. 닭살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돋았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으니 그럼 꽃다발 말고 뭘로 패야 할까. 차 트렁크에 이유 없이 들어 있던 멍키 스패너에게 존재의 이유를 찾아 주어야 하는 건가?
지훈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호준을 쳐다보았는데, 호준은 그런 걸 생각하는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이벤트 같은 거 엄청 싫어해요.”
“아, 그렇습니까?”
태연한 척하지만 호준은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맞구나. 저 인간 분명 한국 드라마에서 재벌 3세가 여자 주인공에게 해 줄 것 같은 이벤트를 생각 중이었다. 호준이 행여 여행 중에 허튼 짓을 하기 전에 지훈은 자신이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려야 했다.
“매형이 누나랑 사이가 되게 좋거든요. 근데 매형이 맨날 누나한테 서프라이즈 이벤트 한다고 저 부려 먹었어요. 저 취직하기 전까지는 허구한 날 불려갔거든요. 그래서 인터넷이랑 드라마, 영화에 나오는 어지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다 기획해 봤어요. 차 트렁크에 넣을 풍선 같은 거 제가 다 바람 넣고 야구장에 전화 예약하고 청계천 프러포즈 이벤트 예약하고 현수막 주문하고 꽃다발 픽업하고……. 아무튼 그때 완전 질렸어요. 그런 건 싫어요.”
“그래요? 흠.”
호준이 뭔가 아쉬워하는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대체 왜 아쉬워하는지 모르겠지만, 지훈은 더 큰 재앙을 막았으니 되었다고 안심했다.
“근데 사무관님은 제가 게이가 아닌 거 알면서, 저한테 고백을 하려고 하셨어요?”
“좀 친해지면 게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계획이었습니다.”
“저런. 계획이 많이 어긋나셨네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서 일을 시킬 때부터 계획이 어긋난 것 같다고 덧붙이려다가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호준이 프로젝트 끝날 때마다 자꾸 식사를 하자고 했던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제 보니 지훈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진짜 친해지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팀 전체가 만나서 먹자고 하니까 절대로 사적인 목적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훈은 순전히 회식이 싫어서 있지도 않은 간염부터 사돈의 팔촌의 경조사 핑계까지 다채롭게 둘러대며 요리조리 빠져나왔었다. 그러니 호준의 입장에서는 기회가 없었을 수밖에.
친해지기 전에 고백부터 얼떨결에 했으니 저 계획 변태가 얼마나 상심했을까. 물론 지훈은 호준이 절대 불쌍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호준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면서 실연의 상처로 처절하게 고통받기를 바랐다. 거기에 복수까지 해야 되는데 뭐라고 사나운 말을 덧붙여야 할까? 자신을 향한 정호준의 순정에 비수에 꽂는 매정한 말을 멋지게 한 방 날려 주어야 하는데…….
“그래도 제가 사무관님 같은 분을 사적으로 만났다면 틀림없이 좋아했을 거예요.”
이런, 씨발. 이렇게 훈훈한 덕담을 해 줄 생각이 없었는데. 지훈은 이번에도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주둥아리를 저주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말실수가 그렇듯, 이것도 아주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지훈은 눈앞의 호준이 쓸데없이 잘생기긴 했다는 생각을 옛날부터 시작해서 오늘도 하루 종일 계속 했다.
평소처럼 정장 차림도 아닌 편한 모습으로 활짝 웃고 있으니 상당히 새로워 보였다. 식당의 큰 창문으로 사정없이 쏟아지는 남미 특유의 뜨겁고 선명한 햇살 속에 앉아 있는 호준의 모습은, 이를테면 유명 모델의 비공식 화보 촬영 같았다. 솔직히 고작 밥 먹는 모습인데도 멋있었다. 촌스러운 공무원 정장을 입었던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이 저 인간을 일로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저 인간이 평소에 펭귄 친구 잠옷을 입는다는 걸 몰랐다면 지훈은 저 모습에 정말로 반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눈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지훈을 마주한 호준은, 문득 지훈의 보조개가 평소에 늘 보던 세 개가 아니라 작게 숨어 있던 하나까지 포함해서 네 개라는 걸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