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러니까, Jeong을 헤옹이라고 읽는다고요?”
“네. 스페인어에서 J 발음이 영어와 다릅니다.”
“나보고는 킴이라고 하던데요?”
“Kim은 스페인어로도 킴이니까요.”
지훈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우루과이 시간으로 저녁 무렵이었다. 눈을 뜨고 정신 차리자마자 자신의 코앞에 호준의 얼굴이 있는 걸 보고 다시 기절할 뻔했다. 다행히 호준이 그 사달은 간신히 막았다. 호준은 눈곱도 떼지 못한 지훈을 무작정 잡아끌고 일 층 라운지로 내려온 뒤 반 강제로 이상한 통에 들어 있는 따듯한 차를 먹였다.
이국적이지만 작고 귀여운 항아리 통에 대고 빨대로 빨아먹었다. 낯선 맛이었지만 의외로 괜찮았다. 말끔하게 비어 있던 속에 쌉쌀하면서도 따듯한 음료가 들어가자 지훈은 좀 정신이 들었다. 그 음료에 카페인이 왕창 들어가 있다는 건 나중에 잠들 때가 되어서야 알았지만.
그리고 미겔이 말하던 그 ‘미스터 헤옹’이 다름 아닌 정호준이라는 사실도 확인하고 말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백만 번 정도 생각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가 봐도 호준이 확실했다.
“그런데 왜 사무관님이 하필 우루과이에 있는 거죠? 설마 저를 따라오셨나요?”
지훈은 자기가 말하면서도 너무나 멍청한 질문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말은 이미 뇌를 거치지 않은 채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저는 여기에 어제 도착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김지훈 씨가 저 따라왔어요.”
“전 여기 한 달 전에 예약했다고요!”
발끈하는 지훈을 본 호준이 웃었다. 며칠 전 바보 같은 얼굴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지훈한테 차이고 말았던 불쌍한 멍청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사람 맞는 걸까? 어째서인지 호준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흘렀고 그걸 본 지훈은 짜증이 났다.
“근데 진짜 정호준 사무관님 맞으시죠? 옷도 다르고 머리 모양도 다르고 스페인어도 잘하시고……. 얼굴만 똑같은 쌍둥이 형제 아닙니까? 아니면 도플갱어?”
늘 검은색의 공무원 정장 차림을 고수하던 호준의 사복 차림을 보니 지훈은 영 낯설었다. 어쩐지 피케 셔츠 사이로 평소보다 실루엣이 더 드러났다. 그 사이에 숨은 가슴과 팔뚝 근육이 은근히 탄탄한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머리도 평소처럼 올린 게 아니라, 앞머리를 풀어 내린 편한 상태였다.
“쌍둥이 형제는 없고 도플갱어는 만나면 죽는다고 하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까 저 맞습니다. 옷은 여행 왔으니 편하게 입은 거고, 머리도 출근하지 않아서 편하게 내렸으니 평소와 좀 다를 수 있겠네요. 언어는…… 고등학교 때 전공이 스페인어였습니다. 대학 땐 서어 부전공 하고 바르셀로나로 교환 학생도 1년 정도 갔다 왔고요. 중급 정도 합니다.”
들을수록 모든 게 충격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잘하시는……. 근데 왜 여행을 스페인으로 안가고 우루과이로 왔어요?”
지훈이 가장 억울한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왜 호준이 여행 온 곳이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하필 우루과이일 것이며, 왜 수많은 숙박업소 중에서 하필 같은 호스텔일 것이냔 말이다! 우연이 아무리 겹쳐도 이럴 수는 없었다!
“작년에 여기로 출장 왔었는데 일정이 촉박해서 바다 구경을 한번 못 했거든요. 말 안 통한다면서 잡일은 나한테 다 시키던…… 곽 과장, 우 국장, 안 차장이 생각나네요.”
호준이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이 아무래도 맺힌 한이 많아 보였다. 지훈은 냉큼 화제를 전환했다.
“숙소는 왜 하필 여기로 했어요?”
“숙박 어플에서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곳입니다. 게다가 별 다섯 개에 리뷰에 밤마다 술도 마신다고 나와 있고, 가격도 제일 싸잖아요. 위치도 몬테비데오 한복판이고요. 김지훈 씨도 그래서 온 것 아닙니까?”
“네…….”
호준의 무자비한 사실 적시에 지훈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지훈은 호스텔의 위치나 가격까지 꼼꼼하게 따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호준이 그렇다고 하니 어쩐지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방금 들었다. 지훈과 달리 호준은 평소 습관대로 꼼꼼하게 알아본 후 예약한 듯했다.
어쨌거나 우연이 겹쳐도 어떻게 이렇게 소름 끼치게 겹칠 수가 있는 걸까.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는 말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분명 예외도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우연이 반복되지만 인연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다! 지훈은 자신이 그 예외가 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사무관님도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독이 덜 풀려서 일단 좀 자야겠…….”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지훈을 호준이 붙잡았다. 지훈은 고작 팔목이 붙잡혔을 뿐인데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힘에 이끌렸다. 호준이 생각보다 악력이 세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지훈은 얼떨결에 다시 자리에 앉아 버렸다.
“왜요?”
“김지훈 씨, 혹시 여행 계획은 세우고 왔어요?”
“제가 무슨 여행 계획도 안 세우고 무작정 어플에 최저가만 뜨면 비행기 표를 끊을 사람 같은가요?”
“…….”
본의 아니게 자기소개를 한 지훈은 헛기침을 했다.
“계획은 당연히 내일부터 세울 겁니다. 여행 계획은 원래 당일 아침에 세우는 거니까요.”
사실 내일의 해가 뜬다고 해서 지훈이 여행 계획 따위를 세울지는 미지수였다. 공항을 경유하는 동안 지훈은 모바일로 급하게 검색을 해 봤다. 우루과이가 볼거리 많은 여행지는 아니라고 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남들은 하루 만에 보고 떠나는 나라에서 5일이나 머무를 예정이니 그저 빈둥빈둥 놀다가 갈 생각이었다. 다만 생각보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그래서 지훈에게 호준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저랑 같이 다니는 건 어떻습니까?”
“네?”
“저는 아무래도 김지훈 씨보다는 스페인어를 잘하고, 길도 잘 압니다. 그리고 여행 계획도 철저하게 세웠……. 한번 볼래요?”
호준은 말하다 말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서 지훈에게 보여 주었다. 수첩 속의 메모에는 우루과이 여행 계획안이 작성되어 있는데 제목이 ‘우루과이 여행 계획안’이었다. 목차는 ‘1. 일정 2. 숙소 3. 교통편’ 등등이었다. 전형적인 정 사무관의 보고서 스타일이었다. 분명히 손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휴먼명조체가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훈은 그 정갈한 손 글씨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글씨체뿐만 아니라 일정한 자간, 완벽한 줄 간격도 지켜지고 있었다. 형식도 개조식 보고서였다. 별첨 문서로 몬테비데오와 콜로니아(Colonia del Sacramento) 지도, 그리고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로 가는 교통편까지 첨부되어 있었으니 쓸데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나저나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수첩에 메모를 이렇게까지 하냐?
지훈이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그 미친놈을 쳐다봤는데, 어째서인지 호준은 대단히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그건데, 칭찬해 달라고 으쓱으쓱하는 건데?
“제 계획안 어떻습니까? 깔끔하게 모바일로 작성할까 했는데, 그래도 직접 메모하는 게 더 편해서요.”
손으로 글씨를 이렇게 쓸 바에야 차라리 내년도 사업 계획서를 하나 더 만들고 말겠다. 호준의 말이 기가 막혀서 한마디 하려다가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서 호준의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 빛을 발했다. 하긴 원체 저런 인간이 아닌가. 물론 일할 때만 저런 줄 알았지, 놀 때도 저러는 줄은 미처 몰랐지만. 이쯤 되면 병이다. 그것도 불치병. 어떡하냐. 건강 보험도 안 될 텐데.
지훈이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 사이 호준이 첨언했다.
“오늘은 숙취 때문에 좀 늦게 일어났거든요. 관광은 내일부터 하려고 오늘은 미겔과 함께 여행 계획을 세웠어요.”
“안 그래도 미겔이 말해 주던데요. 자기가 미스터 헤옹이랑 새벽 네 시까지 술을 달렸다고…….”
“미겔이 그런 불필요한 정보까지 말하던가요? 흠.”
호준의 눈빛이 살벌해지더니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지훈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호준이 그답지 않게 허술하게 가리는 바람에 그냥 눈에 보여서 봤다. 휴먼명조체로 ‘미겔 입단속’이라고 적는 것 같았다. 정말 쓸데없이 치밀했다.
“푸흡.”
지훈이 순간 저도 모르게 웃었다가 입을 가렸는데, 이미 호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런 지훈을 쳐다보았다.
“왜 웃어요?”
“앞으로의 여행이 기대돼서요…….”
실없는 웃음을 변명하려고 아무 말이나 뱉었는데 하필 저 멘트였다. 호준의 얼굴에 서서히 기쁨이 차오르는 걸 보며 지훈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그럼 같이 여행 다니는 거죠?”
자, 잠깐.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지훈은 단 한 번도 ‘같이’ 여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 없었지만, 호준은 지훈의 의사를 확정해 버렸다.
“대신 김 대리, 아니 김지훈 씨 마음에 안 드는 일정이 있으면 도중에 수정해도 좋습니다.”
이봐, 지금 당신의 계획 자체를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게 당신이라고! 누가 휴가 와서 직장 상사를 만나냐! 하지만 지훈이 뒷수습을 해 보기도 전에 호준이 약간 수줍은 표정으로 사족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 평소에는 그렇게 술 헤프게 마시는 사람 아닙니다. 절대로. 어제는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푸하하하하!”
뜬금없이 이미지 관리 들어가는 호준 때문에, 지훈은 여행 같이 안 갈 거라는 말을 하려다 말고 그만 웃음보가 터지고야 말았다.
사실 지훈은 호준이 술을 많이 먹든 말든, 알코올 분해를 하든 말든, 그러다가 간경화가 오든 말든, 그로 인해 간암으로 죽든 말든 정말 관심 없었다. 태종시까지 죽도 사다 바쳤지만 지훈은 그래도 호준의 생사에 정말 신경 안 썼다. 그런데 이미 바닥인 이미지를 자기 혼자 되게 신경 쓰면서 남한테 입단속까지 시키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그만 웃음이 터져 버렸다. 장장 2년 반 동안 인간이 아닌 모습만 봐 왔는데 이제 와서 저렇게 쓸데없는 부분에서 괜히 인간적인 모습을 봐 버릴 건 또 뭐란 말인가.
지훈은 이제까지 호준을 그저 공적으로 만난 사람, 미친 듯이 일 시키고 자기 괴롭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직장에서 보는 ‘정 사무관’의 모습은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고 철저하고, 한편으로는 악랄했으니까. 지금 같은 허술한 모습은 지훈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낯설었다. 어쩌면 이젠 호준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도 몰랐다.
실연당한 사람치고 너무 태연한 데다, 무려 여행을 같이 다니자고 뻔뻔하게 꼬셔 댄다. 지훈은 저 인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 싶었다.
지훈의 입장에서는 여행지까지 와서 상관을 만난 셈이었다. 호준의 감정도 아직 불편했다. 하지만 우루과이라는 곳은 생각보다 낯선 곳이라서 의지할 데가 필요하기도 했다. 여행 준비 다 해 오고 현지인과 말도 통하는 호준 쪽에서 먼저 당당하게 같이 다니자고 제안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지훈이 굳이 거절하고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정 사무관님, 아니 정호준 씨.”
“무슨 문제 있어요?”
호준이 자꾸 ‘김 대리’ 대신 ‘김지훈 씨’라고 본명을 불러 대는 게, 아무래도 휴가지에서는 일부러 직급으로 부르지 않으려는 나름의 배려 같아서 지훈도 호준을 일부러 이름으로 불러 봤다.
그런데 그 순간 호준의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랐고, 지훈은 그걸 봐 버렸다. 살면서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호준의 이런 민망한 표정을 볼 일이 또 언제 있겠는가.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이 빨개져서 더 웃겼다. 웃음이 또 터지려는 걸 참으려고 지훈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별문제는 없고요. 저는 너무 피곤해서 일단 더 자러 갈 테니까 사무관님은 일단 그 ‘미겔 입단속’을 잘 하세요.”
지훈이 한술 더 뜨는 바람에 호준의 얼굴이 그야말로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버렸다. 지훈은 그 사이에 서둘러서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휴가 와서 상사를 만나 버린 불쾌감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기서는 어차피 호준이 지훈의 상관도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지훈은 호준을 가이드로 부려 먹으면서 여행 내내 엿이나 먹이자 싶었다.
* * *
시차 때문에 다음 날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뜬 지훈은 곧바로 일 층 식당으로 내려왔다. 호스텔에 오는 길에 차에서 요란하게 모든 걸 토해 낸 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허기진 상태였다. 지훈은 낯선 외국인들 사이에서 불어 터진 오징어 같은 얼굴로 모닝 빵을 베어 무는 호준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회사나 태종시였으면 절대로 지훈이 호준의 옆자리에 자진해서 앉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면 진보와 보수도 힘을 합쳐야 하는 법. 낯선 외국의 공간에서는 어쩐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과 붙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지훈은 얼른 호준의 테이블로 향했다.
“김지훈 씨, 잠은 푹 잤어요?”
다가온 지훈을 보고 호준이 인사를 건넸지만, 그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래도 정호준 본인 같았다. 얼굴에 가득한 숙취는 아무래도 감출 길이 없었다.
“덕분에 푹 잤습니다. 사무관님은 어제 대체 몇 시까지 달렸…….”
“노코멘트할게요.”
지난밤 시차 때문에 잠을 설치는 동안 지훈은 호준이 방에 들어오는지 살펴봤었다. 새벽녘이 되도록 빈 침대를 지키는 건 오로지 펭귄 친구 파우치뿐이었다. 게다가 1층에서 남자들 여러 명이 억양 강한 스페인어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었다. 호준은 역시 술로 날밤을 새운 게 분명했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이라도 저렇게 숙취로 불어 터지는 수가 있다는 걸 지훈은 새삼 깨달았다.
“사무관님 오늘 여행은 가능하세요?”
지훈이 접시에 조식을 퍼 담으며 물었다.
“안 될 이유가 있어요?”
행여 안 될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렇게 말한 인간의 불어 터진 얼굴일 것이다. 지훈은 혀를 차며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까는 정호준 씨라고 이름을 불러 봤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지훈은 그냥 계속 사무관님이라고 불렀다. 호준은 그에 대해서는 별말 하지 않았다.
지난 2년 반 동안 호준과 술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어서 호준이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 줄, 지훈은 전혀 몰랐다. 생긴 거나 평소 행동으로는 입에 술 한 방울 안 댈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이제까지 술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무관님은 한국에서는 술 많이 드세요?”
“회식 아니면 잘 안 마셔요.”
“그런데 여기서는 왜 폭주하세요?”
“여긴 곽 과장이 없잖아요.”
“아…….”
호준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봤다. 지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장 실장과의 대화에서 유추해 보면 호준은 곽 과장을 비롯한 여러 윗선한테 찍혀서 나름대로는 시달리는 중이랬다. 물론 지훈은 호준이 시킨 일이 너무 많아서 2년 반 동안 술을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지훈 씨는 술 많이 안 마시죠?”
조식을 두 그릇째 먹는 지훈을 보며 호준이 물었다. 예의상 던진 말 같았는데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열심히 답했다.
“없어서 못 먹는데요.”
“술 못 마셔서 계속 회식 안 왔잖아요.”
“사무관님이 계셔서요.”
“아…….”
이제 정규직도 확정인 데다 사무관님이 싫다고 대놓고 말했겠다, 더 이상 건강한 간 기능을 속일 필요가 없었던 지훈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태 너 싫어서 일부러 회식 안 갔다.’ 지훈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들은 호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오는 한국과 정반대로, 우루과이의 2월은 무더웠던 여름과 작별하고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조금 더웠지만 바닷바람이 불어 걸어 다닐 만했다. 마침 날씨가 좋아 따사로운 햇살이 푸른 하늘에 펼쳐졌다. 바닷가의 훈풍을 느끼며 몬테비데오의 구시가지를 거니는 두 동양인 남자의 손에는, 주변의 몬테비데오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동그란 봄비야가 들려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에 호준이 커피 대신 항아리 같은 통에 빨대를 꽂아 뭔가를 먹는 걸 본 지훈이 곧바로 호기심을 느낀 것이 시작이었다. 간밤에 정신 줄 놓은 지훈에게 호준이 먹였던 바로 그 음료이기도 했다. 보니까 지훈을 제외한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한 손에 항아리를 들고 빨대를 쪽쪽 빨고 있었다. 어쩐지 뒤처지는 느낌이 든 지훈은 호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먹는 그걸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눈빛을 지훈이 강하게 쏘아 보내자 호준은 곧바로 지훈에게 마테 차에 대해 알려 주었다. 마테 차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미겔이 지훈에게 마테 차 전용 빨대인 봄비야를 얻어 주기까지 해서 지훈과 호준은 봄비야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이거 뭐 별거 없는데 계속 마시게 되네요.”
“안 그래도 찻잎을 계속 우려내려고 보온병도 가져왔어요. 지훈 씨 것도 가져왔으니까 마셔요.”
“세상에, 이건 또 대체 언제…….”
호준이 등에 진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보온병을 보면서, 지훈은 호준의 쓸데없는 준비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럽식 건물 양식 사이에 들어선 각종 동상들과 현대식 건물, 그 사이에서 남미의 햇빛을 받은 야자수가 자라는 몬테비데오 구시가지의 거리에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낯선 풍경 속에서 지훈은 자신이 한국을 떠나왔다는 사실을 마침내 실감했다. 물론 자신이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호준이 곁에 찰싹 붙어서 걸어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일단 호준이 일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몬테비데오의 구시가지를 활보하는 사람들 중 거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두 남자는 꽤나 주목을 받았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다들 한 번씩은 눈길을 주는 듯했다. 기분 좋게 누군가가 인사를 하면 호준이 호기롭게 스페인어로 대답하면서 대응하곤 했다. 지훈은 어차피 말도 못 알아듣고 글자도 못 읽는 마당에 호준이 알아서 가이드 노릇을 다 해 주니 그저 팔자 좋게 호준만 따라다녔다.
사실 길을 찾는 것도, 안내문을 보면서 설명하거나 건물을 찾아보는 것도, 간간이 펼쳐지는 거리 공연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도 전부 호준의 몫이었다. 호준은 군말 없이 가이드 노릇을 하면서도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일단 본인이 자처한 일인 데다가 일정이 수첩에 적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될 때마다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그 바람에 호준은 지훈의 비난을 샀다.
“버스에서 내린 시각이 11시 14분입니다. 우리 이제 6분 17초 동안 도보로 쭉 직진하면 20분까지 도착할 수 있어요. 예상보다 13분 56초 빠르겠네요.”
“대박. 사무관님 완전 계획 변태네요.”
호준은 무려 21세기에 한 손으로는 지도 어플로 길을 찾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수기로 적은 수첩을 들고 분 단위로 이동 시간을 계산했다. 지훈은 그걸 힐난했지만 호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지훈 씨 말대로 계획을 변태같이 짜는 편인 건 인정합니다. 사실 다른 것도 변태인데, 혹시 궁금해요?”
“절대로 안 궁금한데요!”
대단히 진지한 표정으로 엉뚱한 소릴 하는 호준을 보면서 지훈은 약간 충격받았다. 물론 호준이 어떤 면에서 변태인지 궁금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호준은 평소에 일하듯이 꼼꼼하게 여행 일정을 챙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외로 농담도 잘하고 실없는 장난도 잘 치는,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지훈은 같이 여행 다닌 몇 시간 만에 호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지훈은 자신이 원래 알던 정 사무관이 아닌, 정호준이라는 새로운 사람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태종시에서 만났을 땐 이런 버릇없는 농담은 꿈도 못 꾸고 그저 잔뜩 긴장한 채로 아부만 떨었다. 하지만 지금은 호준이 먼저 ‘지훈 씨’라고 불러 주며 편하게 대하니 지훈도 점점 긴장이 풀렸다. 풀리다 못해 평소 성격이 나와서 슬슬 기어오르기까지 하던 참이었다. 안 그랬으면 계획 변태라고 놀리지도 못했다.
“13분 56초 동안 이거나 보고 가죠. 이건 호세 아르티가스의 동상인데, 우루과이의 전설적인 독립 영웅이라고 해요.”
구시가지의 광장 한복판에 웅장하게 말을 타고 서 있는 동상을 가리키며 호준이 말했다. 지훈은 스페인과 아르헨티나로부터 힘겹게 독립한 우루과이의 역사를 13분 56초 동안 들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사무관님. 우루과이에서 몇 년 살았어요?”
“이틀쨉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의 나라 독립 영웅이 밥 먹다 체한 사연까지 아는 거죠?”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어때요? 몇 년 산 사람 같아요?”
호준이 정말로 뿌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훈은 그동안 쌓인 게 많아 결코 칭찬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13분 56초에 집착하는 계획 변태 같은데요.”
“누구처럼 계획도 없이 비행기 표부터 끊는 것보단 낫죠. 덕분에 이렇게 지훈 씨 가이드도 하고요.”
“뭐라고요? 그 ‘누구’가 누군데요?”
“지훈 씨, 동상 옆에서 사진 찍어 줄 테니까 빨리 앞에 서 봐요.”
“말 돌리지 마세요!”
“하나, 둘…….”
“아, 잠깐만요! 머리 좀 만지고!”
“괜찮습니다. 지훈 씨는 가만히 있어도 멋있어요.”
“물론 난 360도 각도에서 전부 다 멋지지만 셀카의 세계는 또 다르거든요!”
지훈은 화내다 말고 얼른 포즈를 취했다. 당장 말싸움은 져도 사진은 평생을 남지 않는가. 행여 구린 사진이 찍혔는데 호준이 수틀렸을 때 SNS에 유포하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단 한 장도 허투루 찍히지 않기 위해 지훈은 촬영에 엄청 집중했다. 게다가 호준이 성능 좋은 DSLR 카메라까지 들고 왔던 터라 지훈은 아주 대놓고 호준을 사진 기사로 부려 먹었다.
물론 호준 역시 그런 사진 기사 역할을 충분히 즐겼다. 호준의 입장에서는 지훈의 얼굴을 마음껏 쳐다보면서 사진까지 당당하게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풍경을 찍는 척하면서 기회가 되면 아이돌 팬처럼 지훈의 얼굴 솜털까지 드러나는 초근접 사진을 찍기도 했다.
결국 지훈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루과이까지 와서도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어 버리는 본인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