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7)

5.

“대리님. 그냥 전화를 하세요.”

한참 동안 사무실 키폰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는 지훈의 내적 갈등을 보던 양 주임이 참다못해 한 마디 했다.

“무슨 전화요?”

“그렇게 고민하면서 왜 안 하세요? 저도 무슨 전환지는 모르겠지만, 수화기 들었다 놨다 한 지 한 시간 지났어요.”

“그게…… 전화를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라서요.”

양 주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대리님. 제가 인터넷에서 명언 봤는데요. 할까말까 고민될 땐 그냥 하는 거래요. 살까말까 고민될 땐 사고.”

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양 주임은 무엇보다도 인터넷 쇼핑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지금 지훈의 입장에서 양 주임의 조언은 도움이 되었다. 하긴, 내가 언제부터 정 사무관을 이렇게 배려했다고 전화를 안 거는지. 정 사무관이 여태까지 갑질 했으니까 이번엔 나도 갑질 좀 해 보자.

지훈은 수화기를 들었다.

“근데 누구한테 전화하세요? 여자예요?”

심심했던 양 주임이 건수 하나 잡았는지 캐묻기 시작했다. 양 주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생활을 이 팀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다 알면서 필요할 때만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최 팀장이나 유 과장과 달랐다. 양 주임은 정말로 눈치 없을 때가 있었다. 지훈은 최대한 경계하면서 대답했다.

“여자였으면 이런 고민을 안 했죠.”

“그럼 남자?”

양 주임의 아무 말에 정곡을 찔린 지훈이 흠칫했다. 양 주임의 깊은 호기심을 물리치기 위해 지훈은 양 주임의 두 번째 책상 서랍을 흘깃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남자라뇨. 양 주임, 이상한 소설은 이제 그만 봐요.”

“대리님! 내 책상 언제 봤어요!”

양 주임 얼굴이 새빨개졌다. 앉아 있던 의자로 책상 서랍을 가리는 걸 보고 지훈은 혀를 찼다. 예전에 야근하다가 시건장치 단속이 떠서 양 주임의 책상 서랍을 대신 닫아 줬었다. 그때 수상한 책을 발견했던 것이 이런 순간에 도움이 될 줄이야.

하긴 호준의 말마따나 요즘 세상에 남자끼리 사랑하는 게 무슨 대수인가. 지훈은 호준이 남자라서 거절한 건 아니었다. 여자였어도 지훈은 그 마음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동안 당한 게 너무 많으니까!

다만 지금 전화를 거는 건 호준이 좋다거나 그런 건 결코 아니고,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서 안부를 묻는 것뿐이다.

지훈은 헛기침을 하며 다이얼을 눌렀다.

-전화 당겨 받았습니다. ㅇㅇ정책과 강씩씩 사무관입니다.

당연히 호준이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다른 목소리에 지훈은 당황했다.

“혹시 정호준 사무관님 자리에 안 계십니까?”

-정 사무관님 오늘 오전에 병가 내고 오후엔 반차 내셨어요. 메모 남겨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호준이 출근을 안 한 건 역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훈은 적잖이 놀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사람이 무슨 병가람.

지훈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어쩐지 다급한 손길로 다이얼을 마구 눌렀다. 이번엔 호준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종종 출장 중에도 연락을 해야 해서 개인 휴대폰 번호를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여태 전화를 받기만 했지 걸어 본 적은 없었다. 행여 메신저에 프로필이 뜰까 봐 저장도 안 하고 실수로라도 받지 않도록 아예 외워 버린 번호였다.

-전화기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삐이…….

지훈의 풍성한 머리털이 쭈뼛 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ㅇㅇ부 대표 프로 야근러 정호준이 휴대폰도 꺼 놓은 채로 병가를 냈단다. 지훈이 보아 온 호준은 지난 2년 반 동안 매주 90시간 이상 근무하면서 휴가 한번 낸 적 없던 무쇠 인간이었다. 그런데 병가라니!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던데……. 설마 정호준 죽는 거야?

생각만으로 멀쩡한 사람 하나를 죽인 지훈은 호준이 간밤에 펭귄 친구 잠옷만 입고 집을 나간 것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걸렸다. 위에 패딩을 입었어도 속은 얇은 잠옷 차림이었으니, 분명 새벽의 찬 바람이 솔솔 몸속으로 들어와서 꽤 추웠을 텐데.

어디 PC방이나 찜질방에 얌전히 앉아 있었던 게 아니라 실연당했답시고 멍하게 돌아다니면서 새벽 찬 공기를 그대로 맞았으면 필시 감기에 걸렸을 것이다. 감기 몸살 정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설마 기관지염, 폐렴, 폐결핵? 이거 다 죽을병이잖아? 실연 좀 당했다고 사람이 죽어서야 되겠는가?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장 호준을 만나서 생사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살아 있어도 문제인데 행여나 죽었으면 더 문제다. 절대로 호준이 걱정되어서 그런 건 아니다!

지훈의 삽질을 보고 있던 양 주임이 옆에서 한 마디 했다.

“대리님 어디 가세요?”

“지금 일이 좀 있어서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퇴근할 준비를 하던 지훈은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양 주임은 점잔 떨면서 연간 예산서를 펴 놓고 있었다. 자신이 정상적인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어필하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예산서 사이에 껴 놓은 휴대폰 화면이 이미 수상한 텍스트였다. 유 과장은 여성 휴게실에서 다른 과장급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듯했고 최 팀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시간을 흥청망청 쓰기 위해 절친한 친구 박 팀장과 담배를 피우러 나간 듯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지훈 혼자서 일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훈마저 일을 하지 않아 사무실엔 기계식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한 톨 들려오지 않았다. 내일부터 일주일 넘게 휴가인데 퇴근 전에 팀원들에게 인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 인간들이라면 또 이상한 헛소리를 할 게 분명했다. 지훈은 그냥 나가기로 했다. 연휴가 끝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테니 앞으로 볼 일이 계속 있을 것이다.

“대리님, 혹시 정 사무관님 보러 가세요?”

그 와중에 책을 보는 척하던 양 주임이 허를 찔렀다.

“내가 왜 조퇴까지 하고 정 사무관을 보러 갑니까!”

마침 그럴 작정이었던 지훈은 괜히 찔려서 아닌 척 잡아뗐다. 괜히 호준한테 신경 쓰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면서 정 사무관님한테 전화를 먼저 하셨어요? 이제까지 전화 먼저 하신 적 없잖아요. 거기다가 엄청 신경 쓰시고.”

“그거야…….”

이제까지는 지훈이 전화 걸기 전에 항상 호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으니까. 전화를 걸 일이 있으면 때마침 전화가 왔고, 전화 할 일이 없어도 전화가 왔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지훈이 전화를 먼저 걸었던 적은 없었다.

“내가 언제 그 인간한테 신경 썼다고 그래요.”

“신경이야 맨날 썼죠. 전화 피하느라고. 그런데 오늘은 전화를 기다리시는 것 같아서요.”

양 주임은 위험했다. 10년 차 로맨스 소설 독자의 촉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거야 맨날 오던 전화가 안 오니까 그렇죠. 양 주임님, 휴대폰으로 이상한 소설 그만 보고 연휴 잘 보내요.”

“헉, 대리님! 너무해요!”

지훈은 휴대폰을 숨기는 양 주임을 뒤로하고 다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호준이 딱히 걱정되는 건 아니지만 지훈의 발걸음은 급했다.

* * *

지훈은 두 시간 후 호준의 집 앞에 도착했다.

실연의 상처를 못 이긴 호준이 자살하기 전 유서에다 ‘김 대리 때문에 자살함’ 이렇게 써 놨을까 봐 지훈은 애간장이 탔다. 아니면 술에 취해 휘청휘청 걷다가 뺑소니 사고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바닥에 핏물로 ‘김 대리’라고 다잉 메시지를 써 놓았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전국의 수많은 김 대리가 죄다 용의자 선상에 오르겠지만 결국 호준과 가장 많은 전화 통화를 기록한 김지훈 대리가 잡힐 것이다.

아니면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호준이, 옆에 있던 의사한테 ‘제가 죽거든 김 대리도 같이 묻어 주세요.’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말로만 듣던 순장…….

얼른 호준을 찾아내야 했다. 뒤끝 있는 인간을 어제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

순장당할까 봐 불안해진 지훈은 호준이 아무것도 없는 집구석에서 죽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호준의 집으로 가려다가, 혹시 아직까지 살아 있으면 감기에 걸려서 아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훈은 일단 죽집에 들러 죽을 샀다. 가장 싼 야채죽을 살까 하다가 그래도 씹는 맛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좀 더 고급스러운 참치야채죽으로 결정했다.

참치는 오메가3와 DHA가 풍부한 등 푸른 생선으로 호준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비싼 전복죽이나 열량이 높다고 소문난 삼계죽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참치야채죽 정도면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다했으니 자신을 같이 묻어 달라는 소린 안 하겠지 싶었다.

지훈은 비밀번호를 눌러야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럭셔리캐슬스테이트시티 아파트의 입구에서부터 막혔다. 벨을 여러 번 눌렀는데 안에서 반응이 없었다. 호준이 집에서 죽었거나, 집에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벨을 열 번 정도 누르다가, 날도 추운데 정호준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개고생을 해야 하나 싶어졌다. 지훈이 빠르게 포기하고 되돌아가려는 순간, 건물 안에서 나오던 행인 덕분에 아파트 입구의 문이 열렸다. 지훈은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지훈은 호준의 미니멀 인테리어 하우스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줄은 알지만 혹시나 싶어서 초인종을 계속 눌러 봤는데 역시 반응이 없었다.

지훈은 괜히 짜증이 났다. 이쯤 되면 조퇴까지 하고 두 시간을 걸려서 달려온 보람도 없었다. 평소에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질을 하던 인간이 이게 뭐람. 심지어 전화선을 빼 놓아도 기가 막히게 주변 사람 쪼아 대면서 전화를 해 놓고는, 정작 먼저 찾으려니까 연락이 안 된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입사 추천해 줬다는 것도 고맙고 해서 간만에 인간 된 도리를 좀 하려고 했더니 완전히 엿 먹었다.

사실 호준이 잘못한 건 그냥 그 시간에 집에 없었다는 것뿐이었지만 지훈의 논리에 따르면 호준은 이미 대역 죄인이었다. 당장 체포 영장이라도 발부해서 잡아 놔야 할 판이다.

혼자 분에 못 이겨 씩씩대면서 아파트를 나온 지훈은, 그냥 곧바로 돌아갈까 하다가 아파트 경비실에 들렀다.

“경비원님, 혹시 xxx호 사는 사람 죽었습니까?”

느닷없는 사망 문의에 경비원은 깜짝 놀랐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서 CCTV로 지훈이 찍히는지부터 확인했다. 직업 정신 투철하고 평소 미드 수사물을 열심히 보는 럭셔리캐슬스테이트시티 아파트 103동 남자 경비원 원 모 씨는 나중에 경찰 조사가 나오면 수상한 사람이 이상한 질문을 하고 갔다고 진술하기 위해 지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려 메모했다.

오후 4시 30분경 찾아온 남자. 키는 180센티미터 정도이고 체격은 마른 편이나 뼈대가 있음. 흰 피부에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진한데 아무튼 수상함. 한 손에 수상한 비닐봉투를 들고 있음.

하지만 지훈은 경비원의 경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집 사는 잘생긴 청년이라면 오늘도 멀쩡하게 걸어 나가던데.”

경비원의 대답에 지훈은 일단 안심했다. 호준이 골방에서 혼자 고독사 한 건 아니구나. 그럼 이제 집 밖에서 병 걸려 죽거나 차에 치여 죽었을 가능성만 확인하면 된다. 구급차에 실려 간 게 아니라 걸어 나갔다면 일단 많이 아픈 상태는 아닌 듯했다.

정작 지훈은 자신이야말로 용의자로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비원은 그런 지훈을 더 수상쩍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총각은 누구지? 왜 xxx호 청년에 대해서 묻는 거지?”

“저는…… 직장 동료인데요.”

부하 직원이라고 말하려니 쪽팔려서 대충 동료라고 둘러댔는데 경비원은 지훈을 수상하게 바라보며 메모를 추가했다.

직장 동료라고 거짓말을 함. 거짓말을 할 때 눈동자에 흰자가 보임.

“직장 동료라는 사람이 생사도 확인을 안 하는 건가?”

“오늘 그분이 아파서 병가 냈다는데, 휴대폰이 꺼져 있고 연락도 안 되어서 죽 사 온 겁니다!”

지훈은 손에 들고 있던 참치야채죽을 경비원에게 내밀었다.

“여기 보세요. 몇 분 전에 아파트 단지 앞 죽집에서 정성과 화학조미료를 가득 담아 만든 따끈한 죽입니다. 집까지 찾아왔는데 정작 동료가 집에 없고 연락도 안 되어서 여쭤본 거고요. 요즘 청년 빈곤으로 집에서 고독사 하는 청년들이 간혹 있으니까요. 집만 크지 그 인간 혼자 살잖아요.”

물론 태종시 아파트 중 최고 매매가를 자랑하는 럭셔리캐슬스테이트시티에서 빈곤으로 고독사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혹시 호준이 하우스 푸어라서 쥐꼬리만 한 공무원 월급으로 학자금 대출과 아파트 중도금 대출과 자동차 할부 이자를 갚느라 생활고에 시달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지훈의 말을 듣던 경비원은 또 메모를 했다.

보기보다 달변. 저러다 옥장판도 팔겠음.

“그래, 그렇구먼. 그나저나 총각 이름은 뭔가?”

지훈은 아직 뜯지도 않은 참치야채죽을 경비원에게 내밀었다.

“저는 김지훈이고요, 나중에라도 오거든 죽 좀 전해 주세요. 혹시 그 인간이 안 오면 그냥 경비원님이 죽 드시고요. 오메가3와 DHA가 풍부한 참치가 들어갔거든요.”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 떠나는 지훈을 보면서 경비원은 그 청년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것을 약간은 걱정했다. 지훈의 풀이 죽은 표정도 떠올랐다. 그 청년이 xxx호에 사는 잘생긴 청년과 정말로 아는 사이이고 범행 동기가 없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사실 xxx호에 사는 잘생긴 청년은 오늘 새벽에 비실거리면서 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점심 무렵에 평소와 달리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러더니 연휴 잘 보내라는 인사를 남긴 후 여행용 캐리어와 함께 아주 멀리 가 버렸던 것이다.

지훈은 아파트 단지 근처의 파출소에서 차에 치여 죽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태종시 인근의 대형 병원에서 잘생긴 남자가 죽었는지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호준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논두렁이나 인적이 드문 강가에서 실족사 한 게 아니라면 호준은 분명 살아 있을 것이다.

모처럼 왔는데 마주치지 못해서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튼 호준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지훈은 안도했다. 그 인간이 행여 살아 있다면 당분간 열심히 피해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지훈은 9시 46분 마지막 기차를 타고 별다른 미련 없이 태종시를 떠났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지훈은 본인이 그토록 염원하던, 한국에서 가장 먼 나라라는 지구 반대편 남미의 우루과이에 도착했다.

북극에 가서 북극곰한테 콜라를 주며 북극 이민을 준비하는 일정은 순전히 최 팀장의 구라가 발전하다 생긴 허풍에 불과했다. 사실 지훈이 긴 연휴를 위한 여행을 계획한 나라는 우루과이였다.

우루과이라면 한국에서 완전히 반대편에 있어서 모든 것이 한국과 반대라는 말만 들었다. 거리로만 보면 북극보다 더 멀었다. 비행깃값부터 엄청 비싸서 지훈은 그동안 계약직을 전전하며 번 푼돈을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했다.

하지만 여행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 공항에 도착한 시점에서 지훈은 넋이 나가 있었다. 비행하는 데만 30시간 넘게 걸렸고 경유를 네 번 하는 동안 공항 노숙까지 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로 어깨에 담 결린 채 시차에 적응하느라 지훈은 사실상 폐인 상태였다. 게다가 간단한 영어는 통할 거라 생각했는데,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Montevideo)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스페인어는 갓 태어난 신생아 수준인 지훈은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패닉에 빠졌다.

“헐, 이게 뭐야.”

몬테비데오 공항 내부는 깔끔했고 사람이 많았지만 그중에 한국인, 아니 동양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주로 라틴계 백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굳이 다른 인종이 있다면 간혹 나타나는 흑인 정도뿐. 다들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멍청하게 걷는 지훈이 신기한 듯,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갔다. 유쾌한 사람들은 “¡Hola!”를 외치며 검은 머리인 지훈에게 기분 좋게 인사하긴 했지만 지훈은 도저히 받아 줄 기력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외톨이가 되는 경험은 과거 호주 워킹 홀리데이 시절 소 목장 한복판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었다. 지훈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심지어 자유 여행이랍시고 무작정 비행기 표와 숙소만 달랑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앞으로가 더 큰일이었다.

순전히 한국만 떠나면 될 줄 알았는데……. 무조건 한국에서 제일 먼 곳에 오고 싶어서 지구본 반 바퀴 돌려서 발견한 나라인 우루과이에 왔다.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려고 일부러 여행 계획도 안 세웠다. 하지만 이쯤 되자 너무 먼 곳을, 너무 대책 없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색 여권에 우루과이 입국 도장을 찍은 지 십 분 만의 일이었다.

다행히 지훈은 공항 입국장에서 손 글씨로 휘갈긴 ‘KIM’이라고 적힌 팻말을 발견했다. 지훈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픽업 서비스를 신청해 둔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곧 머리가 홀랑 까진 활기찬 중년 가이드의 영어 발음을 들으며 다시 패닉에 빠졌다.

「¡올라! 세뇨르 킴! 웰껌! 웰껌! 어 유 쁘롬 꼬레아?」

「예, 예쓰.」

「미스터 킴! 아 유 오께이?」

「아임…… 파인…… 땡큐……. 앤유?」

자신을 미겔Miguel이라 소개한 유쾌한 가이드의 영어는 스패니시 억양이었다. 호주에서 잠깐 살았던 것도 오래전의 일이었다. 오랜 비행으로 체력이 방전된 지훈은 악센트 강한 영어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지훈은 본의 아니게 굉장히 과묵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이드는 지훈이 대꾸를 잘 안 하니 심심했는지 더 이상 대화를 시도하진 않았다. 대신 호스텔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켜더니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시끄러운 라틴 뽕짝 노래까지 더해지자 지훈은 그만 해골이 깨질 것 같았다. 게다가 승차감이 엉덩이 테러 수준인 똥차 때문에 진심으로 토할 것 같았다. 지훈은 반기절 상태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창백한 안색의 지훈을 발견한 가이드가 재빨리 종이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오, 킴! 돈 워리! 릴렉스! 어나더 꼬레안 인 더 호스뗄! 헤옹 깬 스피끄 에스빠뇰라! 위 드랭크 얼나잇 언띨 뽀어클락. 헤옹 이즈 쏘 나이스. 히 깬 헯유!」

「오케이, 오케……. 우우욱!」

숙소에 스페인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한 명 더 있다는 소식에 지훈도 반가움을 표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필 그때 차가 크게 요동치는 바람에 지훈은 그만 모든 걸 쏟아 내고 말았다.

“우우우우웨에에에에에엑! 아오, 씨발!”

30시간 동안 비행기를 네 번 갈아타며 먹어 치운 기내식을 모두 비워 낸 지훈은 해탈의 상태에 다다랐다. 그나마 스페인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숙소에 있다니 안심이 되었다. 미겔이 나이스 가이라고 폭풍 칭찬을 하는 걸 보니 ‘헤옹’이라는 한국인은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 한국인이 새벽 네 시까지 미겔과 술을 처마셨다는 말이 맘에 걸렸다. 게다가 이름이 너무 수상쩍었다. 도대체 한국 사람의 이름이 ‘헤옹’일 수가 있는 건가? 얼핏 들어 본 요상한 단어인데 지훈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속이 편해진 채로 호스텔에 도착한 지훈은 곧바로 체크인을 했다. 여행 경비를 아끼려 싱글 룸이 아닌 도미토리로 예약했지만, 미겔은 특별히 다른 한국인 미스터 헤옹과 너를 ‘단둘이’ 같은 방으로 해 주겠다고 편하게 쓰라고 생색을 냈다. 덧붙여서 지훈이 혹시라도 한 침대에 토하면 다른 침대에서 자고 요금만 더 내면 된다며 요란을 떨었다. 빨리 방에 가고 싶었던 지훈은 무조건 땡큐를 외친 후 설명도 안 듣고 2층의 숙소로 뛰어올랐다.

방은 다행히 깔끔했다. 창문이 커서 대낮의 도심 풍경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방 안에는 세 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하나에는 이미 짐이 놓여 있었다. ‘헤옹’이라는 한국인의 자리였다. 지훈이 좀 더 주변을 살폈다면 그 한국인의 침대에 놓인 수상한 펭귄 친구 캐릭터 파우치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국적인 방 분위기에 만족하느라 지훈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인천 공항을 출발한 지 30여 시간 만에 등을 대고 누울 수 있는 침대를 본 지훈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곤 곧바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우루과이 시간으로 대낮인 만큼 한국 시간으로는 한밤중이라, 시차 적응을 못한 지훈은 정말 졸려 죽을 맛이었다. 곧바로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신발과 겉옷은 벗고 자야 할 것 같았다. 지훈이 다시 몸을 일으키는데 방 바깥에서 요란한 말소리가 들렸다.

「Hace rato vino un coreano, y ese boludo vomitó en mi auto.」1)

「¿Y eso no es porque manejaste mal?」2)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명 정도가 대화하는 것 같았다. 하나는 시끄러운 게 미겔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다른 하나는 유창하긴 했지만 발음에서 한국적인 억양이 느껴지는 것이 그 ‘헤옹’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한국인이 틀림없었다.

지훈의 컨디션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그 한국인의 목소리도 익숙하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펭귄 친구 파우치라는 중요한 단서를 놓친 지훈에게 그런 정신적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방문이 열리고 그 미지의 한국인을 마주쳤을 때 지훈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헉! 정 사무관님!”

“김지훈 씨?”

지훈은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갑작스러운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쇼크 증상이었다. 대체 왜 자신의 눈앞에 피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정호준이 서 있는 건지 지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피곤한 나머지 헛것이 보이는 게 분명했다. 대체 왜 지구 반대편에 정호준이 있는 걸까? 여긴 정호준을 피하려고 전 재산을 털어서 온 곳인데? 며칠 전에는 태종시에서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던 인간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야?

지훈은 자신이 이미 잠들어서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확신했다. 이게 현실일 리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여행지까지 와서 이런 악몽을 꾸어야 한단 말인가? 지훈은 제대로 잠들기 위해 멍한 표정으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우루과이까지 와서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다시 꿈을 꿀 것이다…….

“김지훈 씨? 괜찮아요?”

“저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나 봐요. 왜 헤옹 씨가 정 사무관님으로 보이는 건지…….”

“저 맞습니……. 지훈 씨, 김지훈 씨?”

호준이 뭘 설명할 틈도 없이 지훈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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