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7)

4.

“김 대리, 그냥 퇴근해.”

오전 11시였다.

최 팀장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지만 지훈은 그 말마저 듣지 못했다. 출근한 후 업무용 PC 전원도 켜지 않고 검은 화면만 쳐다보며 멍하니 있기를 세 시간째.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기만 했다. 지훈이 입사한 이래로 이렇게 멍한 모습은 처음 있었기에 팀원들 모두 지훈의 이상 행동을 걱정했다.

“김 대리, 무슨 일 있었어?”

유 과장이 조심스레 물었지만 지훈은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있었다. 무반응에 민망해진 유 과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인터넷 소설을 읽던 양 주임에게 물었다.

“양 주임.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저도 모르는데요. 그냥 되게 바보 같으신 거만 알겠어요. 김 대리님 어제 정 사무관님한테 엄청 혼나셨나 봐요.”

그 말에 유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정 사무관한테 깨졌으면 지금 빨간 줄이 좍좍 그어진 보고서를 보면서 폭풍의 수정 작업을 펼쳐야 한다고. 이렇게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거든.”

“그럼 이번엔 대박 칭찬받으신 거 아닐까요?”

“아니. 정 사무관은 만족을 모르는 남자야.”

이때 갑자기 나타난 최 팀장이 유 과장의 말을 반박했다.

“자네가 뭘 모르는구먼. 최종 보스는 ㅇㅇ정책과의 곽 과장 개새끼야. 정 사무관이 매의 눈으로 교정 본 보고서를 한 번만 훑어봐도 몇 층의 어느 프린터에서 출력했으며 그 프린터의 잉크 노즐이 얼마나 헐거워졌는지를 찾아내거든. 정 사무관이든 곽 과장이든 ㅇㅇ부에서 사람을 만나고 왔으면 지금 김 대리는 무조건 폭풍 수정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그럼 대체 무슨 일이지? 설마 정 사무관이 김 대리에게 고백이라도 한 건가?”

쓸데없이 눈치 빠른 유 과장이 의혹을 제기했지만 곧바로 묵살되었다.

“이보게, 유 과장. 말이라도 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니야. 정 사무관도 눈이 있지…….”

“맞아요. 정 사무관님이 얼마나 멋있는데요! ㅇㅇ부 및 산하 기관 전체 임직원 인기투표에서 일등 신랑감에 선정되었는걸요! 근데 아직 연애도 안 하시는 거 보면 눈이 되게 높으신가 봐요.”

그런 정 사무관이 고르고 고른 신랑감이 지훈이라는 건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정 사무관 얘기 좀 그만하고 다들 일하세요!”

자꾸 사람들이 호준의 얘기만 하자 지훈은 제대로 화가 났다. 지훈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꽥 지르자 팀원들 모두 반색하며 환호했다.

“우아, 말했어요! 대리님이 드디어 입을 열었어요!”

“김 대리, 살아났구나!”

“원래 살아 있었거든요!”

무심한 팀원들 때문에 졸지에 죽었다 살아나 버린 지훈은 그대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팀원들은 모두 갑자기 사라지는 지훈을 보며 황당해했지만 곧 일등 신랑감 정 사무관의 신붓감 후보에 대해 걱정하면서 지훈의 존재는 까맣게 잊었다.

* * *

지훈은 습관적으로 탕비실로 가려다가 말고 걸음을 옮겨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으아, 미치겠네!”

아무도 없는 비상구 계단에 주저앉은 지훈은 풍성한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아침부터 되도록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정말로 가만히 있었는데, 최 팀장부터 시작해서 모두 정 사무관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떠들어 대는 통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씨발, 이게 뭐냐고!”

아직 탈모의 무서움을 모르는 지훈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상이었다.

눈을 감아도 생각나고, 눈을 떠도 생각났다. 서 있어도 생각나고 앉아 있어도 생각났다. 예쁘고 좋은 것이 계속 생각나면 기분이나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지훈의 두뇌 활동 지분율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상은 바로 짜증 유발자 정호준 사무관이었다.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 할수록 지훈은 자꾸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그딴 질문을 던진 자신의 입을 꿰매어 버리고 싶었다.

* * *

“정 사무관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

쓸데없는 의혹을 없애기 위해 가볍게 한 질문이었다. 하하 호호 웃으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해 보려고 나름대로 짱돌을 굴려 던진 농담이었다.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는 확신하에, 더욱이 서로 펭귄 친구 잠옷을 입은 상태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되었던 그 질문.

하지만 그 말과 동시에 시종일관 진지했던 호준의 두 눈동자가 커지고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지훈이 호준의 대답을 듣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사무관님! 하하하! 그냥 농담이었어요. 제발 대답하지 마세…….”

“어떻게 알았어요?”

지훈이 아는 호준은 매사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성대부터 벌벌 떨리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지훈은 그때 처음 알았다.

문제는 그 말에 담긴 의미였다. 장난이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생각했지만 누가 봐도 진심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자길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트집 잡는 것도 아니었으면 호준의 그 집요한 집착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20년 전 모부님의 원수? 그게 아니라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설마 저 인간이 나를 좋아해서 그 난리였나, 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바로 정답이었다. 답을 맞히고도 이렇게 우울한 건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시력 검사할 때 이후 처음이었다.

“대체 왜요?”

충격받은 지훈의 입에선 대단히 포괄적인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냥 전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행동들이 다 저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면, 좀 잘해 주지 왜 그렇게 괴롭혔나 싶기도 했고. 같은 남자인 자길 왜 좋아하는지도 이해가 안 되었고. 같이 악연을 맺어 온 세월이 몇 년인데 언제부터 자길 그렇게 생각한 건지도 궁금했다.

“저한테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호준은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했고,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준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한숨을 쏟아 냈다.

“한 1년쯤 뒤에 제대로 고백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알려서 미안합니다. 김지훈 씨. 제가 누굴 이렇게 많이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서툴렀어요.”

그 말을 듣던 지훈은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그냥 가볍게 좋아한 것도 아니고, 진지한 거였어? 1년이나 지나서 고백할 정도로? 그럼 올해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년에도 나를 좋아할 계획이었다는 거잖아! 혹시 작년에도 좋아한 거 아냐?

게다가 늘 부르던 ‘김 대리’가 아니라 묵직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김지훈 씨’라고 부르는 호칭은, 어쩐지 가슴 떨리기도 했다. 저렇게 사랑과 열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오직 자신만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이름을 불러 준다면, 누구라도 반하…… 지는 않았다. 같은 남자끼리 무슨!

“저는 남자인데요!”

“요즘 세상에 그게 중요합니까?”

지훈도 다양한 성적 지향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까지 남자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여자였다면 호준한테 반할 뻔했다고 생각하며 지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저 인간한테 당한 게 얼만데, 고백 좀 받았다고 반해 버리면 큰일이었다. 심지어 제대로 고백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호준이 일방적으로 들킨 거였다.

그리고 세상에 어떤 바보 멍청이가 펭귄 친구 잠옷을 입고 고백한단 말인가! 근데 그 바보 멍청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심지어 고백을 받는 지훈마저 핑크색 펭귄 친구 잠옷이었다. 지훈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암전 같은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비주얼부터 대사까지 엉망진창이다.

“물론 김지훈 씨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주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훈 씨가 회사를 아주 그만두고 멀리 이민을 간다고 하니,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지훈은 그만 아찔해졌다. 그러니까 호준은 고백하기 전에 차였는데, 차이고 나서 자백을 강요당한 거였다. 검찰 특수부도 못 시킬 자백이었다.

물론 지훈은 호준의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거절할 필요도 없이 거절된 건 약간 아쉬웠다. 왜 아쉬움이 드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뻥 차 버리고 호준을 엿 먹일 기회를 놓쳐서 그럴까?

지훈은 이쯤 되자 그냥 이민은 거짓말이었고, 멀리 여행만 갔다 오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할지를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다고 정호준이 그걸 좋아할까 싶었다. 이 마당에 사실대로 말하면 외려 화를 내지 않을까? 사실대로 말해서 무얼 할까, 정호준이랑 사귈 것도 아닌데? 자신은 남잔데 어떻게 호준과 교제할 수 있겠는가? ㅇㅇ부와 그 산하 기관 네트워크가 얼마나 좁아터졌는데, 둘이 손이라도 잡은 걸 누가 목격했다간 다음 날 사내 게시판에 공지로 올라오고도 남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정호준은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호준을 일로 만났고, 그동안 당한 게 너무 많았다.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인생의 원수와는 사귈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다. 그냥 이대로 이민 간다고 거짓말하고 잠적하자.

하지만 휴가 끝난 후에 회사를 때려치우면, 지난 11개월 동안 고생한 거 다 날리고 다시 계약직부터 시작해야 했다.

어렵게 버텨서 정규직 전환을 앞두게 된 회사가 아쉬웠지만, 어차피 장장 2년 반을 계약직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몇 년 더 계약직으로 일한다고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시궁창 인생이라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다만 앞으로 호준을 만나지 않으려면 ㅇㅇ부와는 전혀 관련 없는 회사로 옮기는 수밖에.

지훈이 내적 갈등을 하는 사이 호준은 펭귄 친구 잠옷 위에 패딩점퍼를 걸쳤다. 뒤늦게 그걸 발견한 지훈이 깜짝 놀라 물었다.

“사무관님? 어디 가세요, 이 밤중에?”

시곗바늘은 벌써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살짝 넋이 나간 표정의 호준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냥 잠깐 바람 좀 쐬려고요. 김지훈 씨는 편하게 쉬다 가세요.”

그 말만 남기고 집주인은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곤 잠깐만 바람을 쐰다더니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남의 집에 혼자 덜렁 남은 지훈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원래 복수의 목적으로 차지하려 했던 침대에는 도저히 누울 수 없었고, 그렇다고 바닥에서 웅크리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밤새 뜬눈으로 허공만 쳐다보던 지훈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출근을 위해 호준의 집을 나섰다.

* * *

그 후로 호준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훈은 알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고백한 것도 정호준이고, 차인 것도 정호준이다. 지훈은 원래 호준을 싫어했으니까,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인데. 왜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찜찜한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매일 이 시간쯤 되면 전화를 걸어서는 오늘 점심은 뭐 먹느냐고 시비 걸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거 먹고 일은 제대로 하겠냐며, 샌드위치나 먹으니까 힘이 없어서 맨날 보고서가 오타 천지인 거 아니냐고, 밥 먹고 제대로 일하라고 잔소리를 퍼붓던 호준의 전화가 오늘따라 없었다. 사실 없을 만도 했다. 간밤에 대차게 차였는데 어떻게 전화를 하겠는가.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전화는 사람 열 받게 만들어서 점심시간까지 일을 시키려는 호준의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호준은 정말로 샌드위치를 끼니로 먹는 지훈이 걱정되어서 전화했던 건지도 몰랐다. 물론 지훈은 한 끼에 두툼한 샌드위치를 종류별로 5개쯤 먹어 치웠고 거기에 각종 간식까지 수시로 챙겨 먹긴 했지만 호준은 그런 사정을 몰랐으니까.

지훈은 상당히 기분이 묘해졌다. 따지고 보면 관심은 관심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집요할 수가 없을 정도로.

사실 둘 다 남자라는 점을 배제하고 생각하면, 호준의 전화와 집착은 흔한 청춘 비즈니스 수완이었다. 알고 나서 돌이켜 보면 누가 봐도 수작이고 작업인데, 왜 2년이 넘도록 눈치채지를 못했을까. 아무리 눈치를 밥 말아 먹은 지훈이라도 둘 중 한 명이 여자였다면 바로 알았을 것이다. 그저 남자 대 남자라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처 닿지 못했을 뿐.

앞뒤 정황을 따져 보니 호준은 정말로 자신을 좋아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훈은 더 암울해졌다. 호준의 입장에서는 꽤나 진지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고백도 하기 전에 지훈이 북극으로 이민 간다고 못을 박아 버렸으니 나름대로는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물론 지훈이 그동안 받은 상처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어제 밤에 본 표정만 봐도 호준의 감정적 대미지가 심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훈은 새삼 호준에게 아주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왜 자신이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고백을 거절해 놓고 이렇게 찜찜하기는 처음이라 지훈은 대단히 심란했다.

“김 대리, 여기서 뭐 하나?”

갑자기 들려온, 익숙하면서 낯선 목소리에 지훈은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제 전 사내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던 감사실의 장규원 실장이었다. 계약직 처지에서는 아무래도 높은 사람인지라, 지훈은 90도로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장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런데 왜 감사실장이 엘리베이터도 아니고 비상계단에 나타난 걸까?

“김 대리는 점심 먹으러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가?”

“저는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사내에 휴게실 많은데 굳이 비상구 계단에서 쉬고 있다니. 지훈은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도 궁색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외엔 적절한 대답이 없었다.

장 실장은 그런 지훈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내 얘기를 좀 들어 주는 건 어떻겠나? 마침 점심시간도 됐으니 식사나 하면서 말이지.”

이쯤 되면 누가 봐도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일부러 지훈을 찾아온 정황이었다. 그런데 장 실장이 대체 왜? 지훈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장 실장의 제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지훈은 장규원 실장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봤던 적이 없었다. 부서도 업무도 완전히 다른 데다가, 근무하는 층까지 달라서 전혀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냥 감사실장이면 높은 사람이니, 사내에서 가끔 마주칠 때 종종 인사했을 뿐. 더군다나 장 실장이 일개 계약직 사원인 지훈의 존재를 알 리도 없었다. 지훈이 장 실장과 가졌던 유일한 인연은 어제 전화선 뽑아 놓았다가 걸린 것뿐이었다.

지훈은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걱정되었다. 식당으로 가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드라마에서 보니까 이런 경우는 은은한 클래식이 흐르는 사무실에서 회장님이 흰 봉투를 내밀면서 ‘이 돈 받고 내 아들한테서 떨어져!’라는 대사를 던지던데. 그러면 이런저런 말다툼을 벌이다가 둘 중 한 명이 김치 귀싸대기를 맞는 결말로 이어졌던 것 같다. 지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벌 3세와 연애 관계였는지를 의심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지훈이 회심의 휴가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 호준을 마주칠 확률만큼이나 없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감사실장과의 식사는 소박했다. 상대가 실장님이니까, 회사 근처의 1인분에 29999원으로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을 만큼 단가를 낮춘 고급 한정식집에라도 갈 줄 알고 지훈은 내심 기대를 했다. 현실은 구내식당에서 한 끼에 4000원도 안 하는 식당 밥을 먹는 게 전부였다. 지훈은 실망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긴 다름 아닌 감사실장이니 누구보다 청렴결백해야 할 것이다. 지훈은 식판 위의 조각난 배추김치를 보면서 이걸로는 김치 싸대기를 맞아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아 안도했다.

식사하는 동안 장 실장은 지훈을 향해서 회사 생활은 어렵지 않은지, 하는 일은 어떤지 등 사소하지만 뻔한 질문을 던졌다. 지훈은 열심히 대답하는 와중에 장 실장과 친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호준 사무관을 욕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다행히 그건 잘 피해 갈 수 있었지만, 정작 지뢰는 정호준이 아니라 맨날 지뢰 찾기를 하던 최 팀장과 유 과장에게 있었다.

“그럼 김 대리가 지금 ㅇㅇ정책팀 사업의 실무를 다 진행했다는 거로군?”

“아닙니다! 최 팀장님과 유 과장님이 다 하시고 저는 옆에서 도왔을 뿐입니다.”

최 팀장이 한 거라고는 지훈이 예쁘게 기안을 올린 전자 결재 문서에 전자 서명을 덧붙인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훈은 그간의 고생을 적당하게 둘러대었다.

지훈은 공공 기관 언저리에서 몇 년을 굴러다녔다. 이 바닥은 시키는 일만 잘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내 정치에 휘말리지 않는 이상, 굳이 남의 몫을 뺏을 필요는 없다. 자기 밥그릇은 챙겨야 하지만 자신의 공을 유달리 내세울 필요도 없다. 채용 시 조직 문화와 잘 어울리는지를 평가하는 항목은 사실 고분고분 말은 잘 듣는지, 모난 성격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최 팀장에 대해서라면 다들 잘 알고 있거든. 물론 같이 일한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아, 아닙니다!”

장 실장은 호기롭게 말했지만 지훈은 영 불안했다. 지훈은 속으로 다른 사람 흉을 볼지언정 입 밖으로 내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같이 일하면서 최 팀장이 골 때리는 인간이라는 건 지훈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한 적은 없었다. 호준의 경우에는 제삼자가 봐도 지훈이 시달리는 모습인지라 팀 내에 소문이 퍼졌을 뿐.

“그래도 좋은 분이십니다. 말씀도 유려하게 잘하시고요. 옆에 있으면 배울 점이 많습니다.”

지훈은 최 팀장의 몇 안 되는 덕목을 쥐어짜 내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최 팀장 밑에서 일하는 동안 감언이설과 아부, 구라 스킬은 많이 늘었다.

“한데 자네 일은 정 사무관이 다 가르치지 않았나?”

“예?”

맛대가리 없는 밍밍한 시래깃국을 뜨다 말고 지훈은 기겁했다.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정호준한테 시달렸으면 시달렸지, 일을 배운 기억 같은 건 전혀 없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정 사무관님께 일을 배운 적이 없는데요?”

“김지훈 대리가 올린 보고서가 정호준 사무관 스타일이라고 ㅇㅇ부에서 소문 돌던걸.”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쥐던 손에 힘을 주었다. 차라리 발가락이 닮았으면 닮았지, 그 인간과 보고서가 닮았다니! 지훈은 정말이지 호준과는 아무것도 닮고 싶지 않았다. 억울했다. 인턴 시절부터 호준이 시키는 대로 보고서를 쓰느라 그게 이 바닥의 일반적인 보고서 형식인 줄로만 알았을 뿐이다.

“정 사무관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야. 김 대리가 그런 사람한테서 일을 잘 배웠다는 건 김 대리 본인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 입장에서도 앞으로 좋은 일이거든.”

장 실장의 말엔 뼈가 있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갈치조림 수준이었다. 지훈은 드디어 오늘 식사의 목적을 이해했다. 장 실장에게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었지만, 지훈은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앞으로도’라뇨?”

“우리 회사 정직원이 되는 걸 미리 축하하네, 김지훈 대리. ‘앞으로도’ 같이 잘 일해 보지.”

지훈은 놀라서 쥐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버, 벌써 결과가 나왔습니까? 발표 결과를 못 받았는데요?”

멍한 표정의 지훈을 보며 장 실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공식적으로는 연휴 후 발표인데, 김 대리 연휴 즐겁게 보내라고 내가 미리 알려 주는 걸세. 어디 가서 미리 소문내지는 말고.”

“가, 감사합니다. 실장님!”

감격한 지훈은 눈앞의 식판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서 장 실장에게 90도로 인사했다. 아무리 밥 잘 먹는 지훈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밥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드디어 정규직이다! 2년 반 동안 꿈에 그리던 공공 기관 정규직 취업! 평생직장! 인생의 가장 큰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취업에 성공한 지훈은 벅차오르는 기쁨에도 불구하고 멈칫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시점인가? 나 이제 북극으로 이민 가야 하는데? 정규직 되면 앞으로 정호준 얼굴은 어떻게 보고! 나만 철밥통인가? 호준도 고위 공무원 뇌물 수수 혐의를 받지 않는 이상 평생 철밥통이다. 앞으로 이 바닥에서 평생 마주칠지도 모를 일인데, 이거 큰일이었다.

“어째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은 듯한데, 혹시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너무 기뻐서요.”

이걸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지훈은 기쁘고도 슬픈 심정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미뤄 뒀던 고민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이민 소식을 듣고 슬픔에 젖은 호준의 잘생긴 얼굴이 떠오르면서……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그 눈을 다시 마주치게 되면 대체 어떻게 쳐다본단 말인가!

장 실장은 그런 지훈을 너무 좋아서 얼떨떨해하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뭐, 사람이 너무 기쁘면 그럴 수도 있지. 연휴 끝나고 복귀하면 정 사무관한테 밥이라도 크게 쏘게.”

“네?”

안 그래도 그 인간 생각 중이었는데, 장 실장의 입에서 또 정 사무관 얘기가 나오자 지훈은 화들짝 놀랐다.

“제가 왜 그 인간, 아니 정 사무관한테 밥을 삽니까?”

“그거야 정 사무관이 인사위원회에 자네를 추천했으니까. 사람을 잘 가르쳐 놓기도 했고. 듣기로는 정 사무관하고 되게 오래전부터 일했다고 하던데?”

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걸 장 실장이 어떻게 아는 걸까? 지훈은 아까 느꼈던 두 번째 궁금증이 다시 떠올랐다.

“실장님, 혹시 정호준 사무관을 따로 아십니까?”

“내가 정 사무관을 잘 알지. 내 대학 후배고, 내가 감사실로 옮기기 전엔 ㅇㅇ팀에서 사업도 같이 진행했었지. 그 후로도 연락을 자주 했거든. 그 친구 사람 참 좋아. 안 그런가?”

지훈은 참담해졌다. 장 실장이 호준과 대충 아는 사이일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각별한 사이인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 휴가 끝나면 장 실장도 피해 다녀야 하는 건가? 지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사람 좋은 친구가 어제 자신한테 차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정 사무관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훈이 개인적으로 원한이 깊을 뿐, 사람 자체가 나쁘진 않았다. 지훈도 그 점은 인정했다. 그런데 장 실장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새삼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네가 경력직 사원으로 우리 회사에 원서를 냈을 때, 정 사무관과 일한 경력이 있어서 레퍼런스 체크 차원에서 연락했었지. 그랬더니 정 사무관이 자네에 대해서 극찬을 하더군. 성실하고 열정 넘치는 데다가 일 머리도 좋다고. 난 정 사무관이 누군가를 그렇게 칭찬하는 건 그때 처음 봤어. 자네도 알다시피 칭찬에는 좀 박한 사람이거든. 아부도 일절 못해서 지금은 곽 과장 밑에서 독박 쓰고 있지만 말이야. 하여간 입사 후에도 자네를 쭉 지켜보았는데, 확실히 정 사무관이 추천할 만하더군. 아, 오해하지 말게. 자네가 이곳에 입사하고 또 이번에 정규직으로 채용된 건 자네의 실력이 충분해서 그런 것이니까.”

식사를 마치고 장 실장과 인생의 쓴맛 커피를 마시는 동안 지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장 실장이 무슨 말을 해서 열심히 맞장구는 쳤지만, 실상 지훈의 머릿속은 거대한 충격으로 거의 마비 상태였다. 다만.

“김 대리. 혹시 정규직 전환 후 특별히 가고 싶은 부서가 있나? 정규직 전환하면서 인사이동을 하는 경우가 있거든. 안 그래도 지금 김 대리를 노리는 팀장들이 몇몇 있지.”

장 실장의 제안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라 지훈은 반색했다. 북극으로 이민 간 척하면서 호준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지훈은 냉큼 답했다.

“지금 있는 부서와는 아무런 상관없고 물리적으로도 아주 먼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멀리요!”

“자네가 정 그렇다면야.”

예를 들면 북극 지사 파견 같은 걸 바라면서 지훈은 간절히 외쳤다. 장 실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적극 검토해 보겠다고 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훈은 자신이 뱉은 말이 어떻게 되돌아올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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