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흠…….”
도어 록을 열고 들어선 호준의 집엔 냉기가 감돌았다. 당장에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음산함이 풍겨 왔다. 분명 신축 아파트인데, 왜 시멘트 벽 사이로 백 년 묵은 음기가 뿜어져 나올까. 순전히 살고 있는 사람의 인성 문제라고 지훈은 확신했다.
지훈의 표정이 썩어 가는 걸 본 호준이 헛기침을 하며 조명을 켰다. 체리색 몰딩이 유일한 인테리어인 썰렁한 집구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테리어가 깔끔하네요, 사무관님.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 인테리어인가 봐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한 마디 던졌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아부였다. 도둑이 들어도 훔쳐 갈 게 없는 여백의 미가 돋보였다. 호준은 변명했다.
“미안합니다. 저도 야근하느라 며칠 집에 못 들어와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흠흠.”
호준은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민망해했다. 이때다 싶어 진도를 좀 빼 보려고 계획에도 없이 지훈을 데려오긴 했는데 야근에 시달리느라 정돈을 못 한 집 안 꼬락서니를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지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훈의 집구석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집 안 꼴이 이상하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다. 누구 때문에 매일 야근하느라 지훈의 자취방에도 먼지만 켜켜이 퇴적되고 있었으니까.
지훈은 대체 어디서 잠을 자고 숙객으로서 진상을 부려야 호준을 엿 먹일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세모눈을 뜨고 집 안을 열심히 둘러보는 지훈을 호준은 오해했다.
“제 집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절대 아닙니다. 사무관님.”
자기가 너무 대놓고 적진을 탐색했나 싶어 민망해진 지훈은 강하게 부인했지만 호준은 만만치 않았다.
“더 많이 관심 가져도 됩니다. 그러다가 나한테도 관심 가지면 더 좋고.”
“네?”
지훈은 다시 한번 당황했다. 왜 사람 입에서 개소리가 나오지? 타임 워프로는 부족해서 이제 동물의 언어까지 들렸다. 호준이 행여 개로 변할까 봐 겁이 난 지훈은 얼른 화장실로 도망쳤다.
* * *
지훈이 세면을 마친 후 무려 정호준이 마련해 준 홈 웨어로 갈아입고 거실에 돌아왔을 때, 호준은 거실 옆 서재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호준이 입고 있는 홈 웨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씨발, 같은 옷이잖아!
호준의 옷을 빌려 입었으니 당연한 일이긴 한데, 그냥 비슷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똑같은 파자마라는 점에서 상당히 기분이 불쾌했다. 심지어 호준은 블루고 자긴 핑크였다. 물론 여자 색인 핑크라서 더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사실 핑크야말로 진정한 남자 색 아닌가?
다만 그냥 기분이 안 좋았다. 대체 왜 다 큰 총각 혼자 사는 집에 펭귄 친구 캐릭터 잠옷이 색깔별로 있는 건데? 덕분에 지훈은 아동용 만화인 펭귄 친구의 캐릭터 잠옷이 성인용 사이즈로 제작된다는 걸 알게 되는 대단히 유익한 경험을 했다.
“김 대리.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잠은 옆방 침대에서 자면 됩니다.”
서재 앞에 선 지훈이 펭귄 친구 잠옷을 입고 씩씩대는 사이 호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실은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호준은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과 커플 홈 웨어를 입은 지훈이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지훈이 자길 빤히 보고 있어서 멋있어 보이려고 일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지나친 흥분으로 심장이 위험했다. 호준은 지훈이 행여 자신의 흥분을 눈치챌까 봐 온 신경을 안면 근육에 집중하고 있었다.
짝사랑 2년 반 만에 드디어 지훈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쾌거를 이뤘다. 게다가 커플 잠옷까지 입다니! 앞으로 썸을 좀 더 타다가 고백을 1년 뒤에 할 작정인데, 그런 것치고는 진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싶어서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평소에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는 호준은 빠른 진도에 잔뜩 긴장을 했다.
지훈이 씻는 동안 호준이 펭귄 친구 잠옷을 입고 일하는 척하면서 휴먼명조체, 13p, 자간 –12%, 줄간격 160%의 공문서 스타일로 작성한 오늘 밤 ‘작업 계획안’은 다음과 같았다.
나라 살림을 책임지는 중앙부처 5급 관료 정호준 사무관의 계획안은 내용은 별거 없는데 양식만 쓸데없이 정교했다. 생각만 해도 스릴 넘치는 계획이었다. 거기다가 너무 치밀해서 실패할 리가 없었다.
물론 지훈은 소중하니까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도 적어 두었다. 아무렴, 매너 있는 모습에 지훈이 자신에게 반할지도 모르는 좋은 기회였다. 섣불리 행동해선 안 될 일이었다. 남자로서 조신하고 정숙한 모습을 보여 주어 신뢰와 믿음을 쌓고 앞으로 발전시킬 연애 감정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호준은 쓸데없을 정도로 신중하고 인내심 강하고 조신한 남자였다. 좋다고 무작정 들이대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진정한 고수는 먹잇감이 자신에게 넘어올 때까지 공을 들여 기회를 노리는 법. 잘생긴 얼굴을 낭비하면서 연애를 힘들게 하는 호준은 물론 자신이 고수 쪽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혹시 김 대리는 침대가 불편합니까?”
“아뇨, 감사합니다. 덕분에 푹 잘 것 같습니다. 하하!”
호준의 흑심 따위 전혀 알지 못하는 지훈은 나름대로 짱돌을 굴렸다.
여백의 미가 넘치다 못해 여백 그 자체인 집 안 꼴을 보아하니 게스트용 침대가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철천지원수의 침대에서 자는 건 역시나 불쾌한 일. 하지만 지훈은 호랑이 굴까지 기어 들어온 이상 호준에게 의도하지 않은 척 의도한 빅 엿을 먹이고 싶었다. 그러려면 호준이 싫다고 해도 자기는 호준의 침대에서 대자로 뻗어 자야만 했다, 그것도 방문을 잠근 채로. 그래야 침대를 빼앗긴 호준이 밤새 차가운 골방 바닥에서 웅크려 잘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광분해서 그렇지 평소엔 간이 콩알만 한 지훈은 이 정도 계획으로도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맨날 호준한테서 도망 다닐 생각만 했지, 이렇게 본격적으로 적진 한복판에서 엿 먹일 작정을 한 건 처음이다.
호준의 치밀한 계획안에 비해 방금 이 닦으면서 급하게 세운 김지훈의 작전은 좀 더 중구난방이었다.
“그런데, 사무관님은 왜 안 주무세요?”
단지 호준의 동태를 묻기 위한 질문이었다. 호준이 잠도 안 자고 집에서까지 잔업을 더 하는 것에 동정심이나 측은함을 가진 것은 단연코 아니었다. 오히려 쌤통이었다. 자신을 그렇게 괴롭혔으니 호준은 더 괴로워해야 한다.
하지만 집에서 펭귄 친구 잠옷을 입고 일하는 내추럴한 모습의 호준을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느낌이 다르긴 했다. 저 인간이 정말로 일을 열심히 한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으니까. 옛말에 윗물이 일하면 아랫물도 일한다는데, 호준이 저렇게 열심히 일하니까 지훈도 죽어나는 것이다. 상관의 제1 덕목은 자고로 게으름인데, 그런 면에서 호준은 한국형 관료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다. 아까 들어 보니 야근하느라 3일 만에 집에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번 주 내로 곽 과장이 시킨 일을 전부 끝내야 하니까요.”
하긴 다음 주부터 연휴가 시작되니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호준이라도 끝내 놓긴 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호준은 민족 대명절에도 출근하다 못해 초과 근무까지 할 것 같은 인간이지만.
“사무관님도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힘들어도 김 대리만큼은 아닐 겁니다.”
호준의 따스한 말에 지훈은 위로를…… 받기는커녕 억울해졌다.
뭐야. 씨발 저 새끼, 내가 힘든 거 알고 있었어? 여태 다 알고 시킨 거야?
방금 호준에게 생겼던 일말의 동정심이 깡그리 사라졌다. 태도 돌변한 지훈은 큰 눈을 부라리며 호준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 커피라도 한잔 있었으면 ‘아이쿠, 실수입니다!’ 하면서 노트북 위로 바로 쏟아 버릴 텐데. 안타깝게도 책상 위는 깨끗했다.
더 대단한 복수의 기회를 엿보기 위해 지훈은 잠은 나중에 자고 호준의 옆에 붙어 있기로 했다. 하지만 지훈이 부스럭거리며 자신의 노트북을 꺼내는 걸 본 호준은 되레 놀라 되물었다.
“김 대리, 뭐 합니까? 지금 늦은 밤입니다. 빨리 자요.”
곽 과장이 시킨 지랄맞은 일들은 진작 다 해 놨던 호준이야말로 속이 탔다. 호준의 ‘작업 계획안’대로 일이 진행되기엔 불확실성이 컸는데, 최대 변수는 바로 목표물 김지훈이었다. 같이 일한 지 2년이 넘었는데도 호준은 사석에서 지훈을 따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직 지훈의 진면목을 잘 모르고 있었다.
“아까 사무관님이 지시하신 대로 보고서를 수정하려고요.”
“그딴 일 안 급해요. 내일 해도 됩니다. 피곤할 텐데 푹 쉬어요.”
호준이 평소와 다르게 관대한 척했지만,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지훈의 입장에서는 이럴 때 가련한 척이라도 해서 호준의 죄책감을 증폭시켜야 했다.
“저도 급합니다, 사무관님. 3일 안에 최종 보고서 결재받아야 하거든요.”
“마감은 연휴 끝나고 해도 됩니다. 기한 연장이 필요하면 내가 상부에 요청할 수도 있어요.”
“사무관님. 제가 3일 뒤에…….”
“설마 회사를 그만두기라도 합니까? 그냥 멀리 휴가 가는 거잖아요. 김 대리 오랜만에 제대로 쉬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냥 연휴 끝나고 마무리하고 지금은 당장 방으로 들어가서 자요.”
“제가 회사를 그만두기라도 하면요?”
지훈은 그냥 연휴 전에 미리 다 해 놓을 생각이라고 답하려고 했는데,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본심이 흘러나왔다! 정규직이 되는 것이 목표이긴 하나, 실은 회사를 안 다니고 월급만 받고 싶은 것이 세상 모든 직장인의 원초적 본능이니까.
지훈이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는 사이, 활짝 웃고 있던 호준의 표정은 고생대의 암모나이트 화석처럼 굳었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회사를 그만둔다고요? 정규직 전환 발표 아직 안 났잖아요.”
“그게…….”
방금은 말실수라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진심으로 당황하는 호준의 표정을 보니 더 괴롭히고 싶어졌던 것이다. 지훈은 호준을 엿 먹일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무관님. 연휴 전까지만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훈이 웃음을 꾹 참고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자마자, 호준의 손에 들려 있던 만년필이 방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갔다.
이대로라면 예상치 못한 사실 관계로 인한 계획안 전면 수정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플랜 B가 따로 없었던 호준은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김 대리, 북극으로 휴가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휴가 동안 북극곰한테 콜라 먹이는 투어 패키지 신청했다고 알고 있는데?”
호준의 반응에 지훈이야말로 당황했다. 세상에 그딴 투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지훈의 정규직 전환 발표 일정부터 휴가 계획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는 걸까?
지훈은 정호준이 왜 화를 내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그만두는 거지, 제가 화낼 일인가? 저 자식은 진짜 나를 자기 부하 직원으로 알고 있는 건가? 우린 서로 엄연히 다른 회사를 다니는데!
호준의 사적 감정을 오해한 지훈은 복수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참에 본격적으로 북극 이민 준비 중이거든요. 북극 투어 패키지는 이민 전 사전 답사고요. 남은 휴가를 다 쓴 후에 퇴사 절차를 밟기로 했습니다.”
“퇴직도 모자라서 아예 이민이라고요? 하필 북극으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호준은 지훈이 멀리 갈수록 더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지훈은 그 꼴을 보는 게 신이 나서 시작된 구라에 박차를 가했다. 최 팀장은 어쩌면 이 맛에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북극에 있는 콜라 공장에 취직하면 북극 영주권이 나온대요. 지금 회사보다 시급도 더 높고 콜라도 많이 마시고요. 저 콜라 좋아하거든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정규직 전환을 코앞에 두고 왜 이민을 갑니까! 나보다 북극곰이 더 좋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히 정호준 새끼보다 거대하고 흉포하고 비타민 A가 풍부한 북극곰이 더 좋다.
하지만 솔직하게 대답하면 이 집에서 한밤중에 쫓겨날 것 같았기 때문에 지훈은 눈치를 슬쩍 봤다.
“제가 북극곰 생태가 걱정되어서 어쩔 수 없이 이 한 몸 다 바쳐 평생을 환경 보호에……. 저, 사무관님?”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정호준의 얼굴이 바로 지훈의 코앞에 있었다. 호준의 반듯한 눈, 코, 입이 오로지 지훈을 향해 있었다. 호준의 표정은 나라 잃은 사람인데 눈빛만은 알 수 없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호준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지훈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지훈보다 먼저 정신 차린 호준이 시선을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추운 데로 가면 어떡해요.”
“예?”
이번엔 지훈의 얼이 빠졌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허를 찔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말을 하는 호준의 표정이 너무나 멍청하고 진지했다. 농담이라고는 절대로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사무관님. 뉴스 안 보세요? 요즘 빙하가 녹고 있어요. 기후 위기 때문에 북극이 한국보다 따듯할 수도 있다고요.”
“그래도 한국보다는 꽤 추울 텐데……. 게다가 북극은 일조량이 적어서 어떡합니까. 체내 비타민 D 부족으로 면역력이 저하될 텐데요.”
지금 이민 가는 마당에 비타민 D가 대수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호준의 말에 반박하려다 말고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호준을 화나게 하려고 시작한 일인데 지금 분위기는 너무 이상했다. 호준의 태도는 평소에 무지막지하게 일 시키던 때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일단 지훈의 가짜 이민 소식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으며, 쓸데없이 북극의 추운 날씨와 지훈의 비타민 합성을 걱정했다. 이건 마치 지훈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평소에 무자비하게 일만 시키는 호준이 그럴 리가 없는데?
“사무관님, 설마 지금 저 걱정하시는 거예요?”
“그럼 안 됩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시뻘게진 호준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 대답에 지훈은 갑자기 화가 났다. 평소에도 자기 걱정을 했으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인데, 호준이 이러니까 당황스러웠다.
“이제까지 그런 적 없잖아요! 쥐뿔도 걱정한 적 없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지 마세요!”
“내가 김 대리 걱정을 한 적이 없다고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호준이 진심으로 놀라자, 지훈은 순간 혈압과 분노가 치솟았다. 작전이고 나발이고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지훈은 다짜고짜 호준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일을…… 일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시키면서 걱정은 무슨 걱정입니까! 그것도 팀원들 다 놔두고 나만 골라서 시키잖아! 나만! 팀장 새끼는 허구한 날 처자고 과장 새끼는 지뢰 찾기나 하는데 맨날 나만 일하고 나만 야근하고! 짜증 나서 전화선 뽑아 놨더니 감사실에다 찔러서 근태 관리를 어쩌고 저째? 씨발 새끼야! 네가 시도 때도 없이 시켜 대는 거 존나 열심히 하는데 왜 맨날 나한테만 시비 걸고 난리야! 잘생기면 다냐? 어? 내가 왜 북극으로 이민을 가겠어? 너 때문이잖아! 너 없는 데로 가려고 그런다, 이 새끼야! 그런 대단하신 분이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걱정을 해 주니 감격해서 눈물이 다 나겠네!”
“…….”
“……요.”
정신 줄 놓고 막말하는 중간에 반말이 튀어나온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훈은 호준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황급히 ‘요’를 덧붙였지만 소용없었다.
분위기는 이미 시궁창에 처박혔다.
지훈의 걱정과 달리 정작 호준의 표정은, 화를 내기보다는 약간 넋이 나간 듯했다.
“그건…… 김 대리가 너무…….”
호준은 지훈의 말에 무슨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
“…….”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에도 여백이 생겨 버렸다. 여백의 미가 넘치는 방 안에서 펭귄 친구 잠옷을 입은 두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각자 생각할 게 많았다.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내일 다시 제정신으로 회사에서 일할 수 있을지 가늠도 안 되었다.
지훈은 뒤늦게야 자신이 대단한 일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나 방금 정 사무관 앞에서 씨발이라고 했나? 심지어 중간에 슬쩍 ‘너’라고 반말한 것 같았는데? 계급장 까고 나이로 붙어도 네 살 위인데! 나 좆 됐다.
지훈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2년 반을 꾸역꾸역 잘 참았는데,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이렇게 폭발하다니. 이젠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퇴사하게 생겼다. 내년도 팀 예산 전액 삭감되기 전에 무조건 튀어야 했다. 안 그러면 최 팀장이 지훈을 죽이고 본부장이 그 시체를 능지처참할 것이다.
퇴사로는 부족했다. 북극으로 튀어야 했다. 그럴 거 아니면 지금이라도 호준의 바짓가랑이 붙잡고 방금 전 말은 순간적으로 귀신이 빙의해서 한 말이라고 변명해야 했다. 머리 한 대 친 다음에 기억이 안 난다고 잡아떼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지훈이 오만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침묵을 깨고 호준이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김 대리가 상황을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그동안 전혀 몰랐습니다.”
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지훈은 예상치 못한 호준의 반응에 힘이 쭉 풀렸다.
모르긴 뭘 전혀 몰라? 여태 나한테 그러는 줄도 모르고 일 시켰다는 건가? 이건 무슨 다이어트한다고 닭 가슴살 치킨 먹는 소리야.
어이가 없는 동시에 지훈은 당황했다.
원체 치졸하고 꼼꼼한 호준이었다. 지훈의 말에 열 받아서 당장 감사실에 전화해서 정책팀의 법인 카드 사용 내역을 다 뒤지라고 시키거나, 아니면 휴가를 포기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 폭탄이라도 던질 줄 알았다. 그런데 호준이 점잖게 나오자 지훈은 괜히 멋쩍어져서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사이 호준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동안 김 대리한테 일이 많았던 건 사실입니다. 김 대리는 성실하고 실수도 적은 편이고, 피드백도 빠르고 일 처리도 정확하니까요. 제 쪽에서 급한 일을 많이 부탁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괴롭히려고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이번 사업의 경우에는 특히 최 팀장이나 유 과장에게 시키기에는…… 일이 몰려서 김 대리를 계속 찾았고요. 나도 모르게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김 대리가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점에 대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뭐지. 이 훈훈한 사과와 해명의 시간은?
게다가 방금 전 호준의 발언을 곰곰이 곱씹어 보던 지훈은 깜짝 놀랐다. 맨날 틀린 거만 지적하는 호준이 자신을 그렇게나 좋게 평가하는 줄 지훈은 꿈에도 몰랐다. 일 잘한다고 진작 말해 줬으면 지훈도 그렇게까지 싫어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훈은 다시 세상 억울해졌다.
그러나 지훈이 뭔 생각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호준은 자기 할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그동안 김 대리랑 같이 일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이전 부서에서도 그랬고, 정책과로 옮기고 나서도 김 대리랑 같은 사업을 진행해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았어요. 김 대리와 만날 때마다 반갑기도 했고요. 하지만 김 대리 쪽에서 그런 어려움이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물론 정호준은 좋았을 것이다. 만년 호구가 찰떡같이 일을 해다 바치니까.
그간 했던 개고생을 생각하며 만년 호구 지훈은 콧방귀를 흥 뀌었다. 호준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가는 걸 보는데 세상 속이 다 시원했다. 호준이 한마디 덧붙이기 전까지는.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오늘 김 대리를 만난다고 들떠서는……. 내가 너무 철이 없었군요.”
“네?”
지훈은 호준의 마지막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업무 회의 하러 만나는데 들뜰 이유가 뭐란 말인가? 게다가 그 말을 하는 호준의 표정은 대단히 슬퍼 보였다. 마치 실연당한 사람의 허망함이 얼굴에 한가득했다.
머쓱해진 지훈은 화제 전환의 필요성을 느꼈다. 홧김에 욕해 버린 건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심했다. 게다가 정중한 사과를 들어서 화가 조금 풀리기도 했다. 이쯤에서 마무리를 해야 지훈이 먼저 욕 한 사발 퍼부은 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채, 이 모든 상황은 순전히 호준의 잘못이었으며, 너그러운 지훈이 그런 호준을 용서하는 것으로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세상 무너진 듯한 호준의 표정을 보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복수는 이쯤 하면 된 것 같기도 했다.
“흠흠. 뭐, 그렇게까지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말이 심했고요. 이제부터라도 좀 배려해 주시면 됩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민 간다면서요, 김 대리.”
호준이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걸 본 지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까 신나서 구라 쳐 놓은 게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이렇게 회사 그만두는 척해 놓고 연휴 끝나고 출근하면 호준이 정말 지구 반대편까지 쫓아와서 시비를 털 게 분명했다. 연휴 끝나면 무조건 직렬 전환에 부서 이동이다. 지훈은 각오를 다졌다.
“제 후임으로 들어올 사람한테 잘해 주시면 됩니다. 저는 뭐…….”
“누가 오더라도 김 대리만 못할 겁니다.”
진짜 퇴사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호준의 말은 약간 감동이었다. 자신이 그 누구도 대체 못 할 특급 인력이었다니. 사실 호준이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편할 대로 생각한 지훈은 뜻밖의 감동을 받았다.
“흠흠. 제가 그 정도였습니까? 맨날 트집 잡고 구박하셔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 전혀 몰랐는데요.”
“그건 미안합니다. 제가 말투가 직설적이라 가끔 오해를 사긴 하는데…….”
호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틀린 건 틀렸다고 그냥 면전에다 말하는 말투 때문에 오해를 사곤 했다. 지내다 보면 오해가 풀리는 편인데 안타깝게도 일터가 다른 지훈과는 그 오해를 풀 기회가 없었다. ㅇㅇ부에서는 이미 유명한 얘기였지만, 다른 회사를 다니는 지훈에게까지는 그 주의 사항이 전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프로젝트 끝나고 한가할 때 식사 약속을 따로 잡으려고만 하면 지훈은 회식이 싫다며 요리조리 기가 막히게 도망쳤다. 호준을 사석에서 본 적 없었던 지훈은 이제까지 대단히 오해를 해 왔던 것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지훈의 머릿속엔 궁금증이 일었다.
정호준 본인에 따르면, 자긴 지훈을 일부러 괴롭힌 것도 아니고, 하다 보니까 일을 많이 시키게 된 거고, 일부러 트집 잡은 것도 아니란다. 딱히 지훈을 싫어한 것도 아니란다. 그럼 이제까지의 그 이상 행동들은 대체 뭐지? 북극 간다는 말에 추위 걱정이나 하고, 회사 그만둔다는 말에 저 실연당한 사람 같은 침울한 표정을 짓는 건 대체 뭘까?
모든 상황을 종합하는 순간, 지훈의 머릿속에서는 떠올리는 것조차 위험한 의심이 일었다. 아닐 거라 믿고 싶고, 반드시 아니어야 했지만, 그냥 무시하기엔 너무나 강력한 의혹. 자각하는 순간 지금의 모든 요상한 상황을 한 방에 설명하는, 한 가지 강력한 가설.
지훈은 분위기상 지금 그 가설이 맞느냐고 호준에게 직접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아니, 굉장히 물어보고 싶었다. 이제까지 상대에 대한 오해는 충분한 것 같은데 다른 오해를 더 추가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의심이 행여 오해가 아니라면 더 큰 일이 아닌가. 확실하게 아니라는 걸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사무관님, 혹시 말인데요.”
지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요. 이런 거 여쭤봐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사무관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