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7)

2.

ㅇㅇ부 ㅇㅇ정책과 정호준 사무관은 대내외적으로 평판이 좋았다. 지훈의 회사에서도, 지훈만 집중적으로 괴롭힌다는 점을 제외하면 굉장히 평이 좋았다. 지훈에게는 낯선 이야기겠지만, ㅇㅇ부 장차관부터 정부청사 매점 사장님까지 호준의 올바른 품성을 극찬해 왔다.

줄을 잘못 타서 그렇지 사람이 일은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목소리와 풍채도 좋고 얼굴마저 잘생긴 호감형이라 뭇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한마디로 다 가진 남자였다. 그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스펙에 비해 다소 부족한 공무원 연봉이리라. 하지만 그에겐 시간이 흐를수록 쌓인다는 호봉과 공무원 연금이 있었다.

어쨌든 겉으로만 봐서는 그렇게 치졸하게 누군가를 괴롭힐 거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김지훈 대리가 겪은 눈물의 수난기를 모르는 사람은 정호준 사무관의 다른 일면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못했다. 물론 지훈을 제외하곤 아무도 호준에게 피해 본 일이 없었으니 하는 소리다.

정호준의 실체를 알고 있는 지훈조차도, 정작 호준을 직접 대면하면 특유의 반듯하고 자상한 분위기에 말려 들어가곤 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호준은 지훈을 만날 때마다 그 잘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서 친절한 멘트만 내뱉었다. 지훈은 매번 화낼 타이밍을 놓치곤 했다. 최 팀장에게는 그렇게 잘 날아가는 손바닥이 왜 정호준의 앞에서는 멈추는지.

하여간 웃는 얼굴 앞에서 싫은 소리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돌아서고 나서 일감이 산더미만큼 떨어진 걸 보고는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인생사가 다 그렇듯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지훈의 삽질도 반복되었다.

물론 정호준도 직접 얼굴 보고 대화하면 자신이 아무 말 못 하는 거 아니까 일부러 불러 대는 게 틀림없다. 지훈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이메일이나 전화로 해도 되는 일을 직접 불러다가 시킬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지훈이 너무 바빠서 출장을 못 가면 호준이 직접 찾아왔을 정도였다. 물론 지훈은 호준이 매번 굳이 단둘이서만 참여하는 대면 회의를 요구하는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봤으면, 지훈은 그 이유를 좀 더 빨리 눈치챘을까?

지훈과 호준은 카페의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음료를 마셨다. 창가 자리에 앉으면 지훈의 비타민 D 합성에 도움이 될 거라는 호준의 깊은 배려였지만 지훈은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가볍고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었다. 보통은 누구네 팀장이나 과장, 혹은 관련 전공 교수님의 근황 따위였다. ㅇㅇ부와 그 산하 기관인 지훈의 회사는 업무 특성상 인사가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훈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호준은 지훈의 회사 직원들뿐만 아니라, 지훈이 졸업한 학교의 학과 교수님들과도 연이 닿아 있었다. 호준이 장규원 감사실장을 통해 ㅇㅇ정책연구팀에 전화를 넣은 것도 예전 장 실장과 호준이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연 덕분이었다. 물론 지훈이 그 사정까지 알 리는 만무했다. 호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도 동공만큼은 흔들리는 지훈의 반응이 재밌어서 그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훈와 호준은 영혼 없는 대화를 오래 이어 갔다. 사실 지훈의 경우는 정말 영혼이 없었는데, 호준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오로지 우주의 기운으로 이 상황을 버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훈은, 호준이 대화의 내용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준의 입장에서는 모처럼 찾아온 지훈과 더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대화의 소재가 고갈되는 듯했다. 호준은 지훈의 정서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생산적인 주제로 대화를 전환했다.

“그럼 이제 일 얘기 좀 해 볼까요. 김 대리의 보고서는 잘 봤습니다. 전반적으로는 괜찮은데 몇 가지 수정할 점이 있어요. 사소한 부분입니다만…….”

‘이제’가 무려 해가 뉘엿뉘엿 져 가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지훈은 어이가 없었다. 지훈과 일체 상관없는 옆 본부의 얼굴도 모르는 박사의 사돈의 팔촌의 손자의 대학 입시까지 걱정하다가 허송세월한 시간이 무려 한 시간. 그 시간에 진작 일 얘기를 시작했으면 퇴근을 한 시간 더 빨리 할 수 있었다. 이는 필시 자신의 퇴근을 늦추려는 호준의 간악한 음모임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 수법을 뒤늦게 알아챈 자신의 멍청함에 대해서도 후회했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법이다.

지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끊기기 전에 최대한 빨리 미팅을 끝내야 했다. 그런데 호준이 작정하고 꼬투리 잡으면 회의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곤 했다. 심지어 호준은 은근히 그걸 즐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훈은 오늘 회의가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퇴근 시간 다 되어 가서야 일 얘기를 시작하는 정호준에게 마음 같아서는 귀싸대기를 한 대 날리고 싶었다.

지훈은 소매 안으로 손을 쓸어 넣으며 나름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눈앞의 이 얄미운 인간을 언젠가 한 번은 꼭 때려 보고 싶었다. 얼굴은 잘생겼으니까 봐주고, 등짝 정도? 정말 차지게 때려 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상대는 사무관인데. 을 중의 을, 지훈은 이를 악물고 웃었다.

“수정할 곳이 어느 부분인가요, 사무관님?”

사실 마감에 쫓기는 바람에 비몽사몽 상태로 작성한 거라 보고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지훈은 빈곤한 기억력을 되살리려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어차피 목차 페이지가 잘못되었다거나, 또 점을 두 개 찍었다거나, 표 굵기가 0.2mm가 아니라 0.15mm라는 식의, 인간의 정상적인 시력이라면 알아챌 수 없는 나노 단위의 실수일 테지만, 호준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면 지적 사항을 모두 적어 둘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호준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려고 부스럭대는 지훈을 보며 활짝 웃었다.

“넣어 두세요. 적을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김 대리 기다리는 동안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 뒀습니다.”

“네. 그럼 오늘 밤 중으로 수정해서 다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메일로 보냈다는 건 결국 퇴근하고 집에 가서 하라는 뜻 아니냐. 게다가 미리 이메일로 보낼 거면 뭐하러 사람을 여기까지 부르는 건데! 지훈은 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관료 행정의 폐해임이 틀림없었다. 차비 낭비, 시간 낭비, 체력 낭비, 이게 다 뭐란 말인가.

“그리고 사소한 부분은 제가 김 대리 기다리면서 그냥 수정했습니다. 폰트도 제가 휴먼명조체로 다 수정했고요.”

정호준이 자랑스럽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지훈은 그 얘길 들으며 두 번 분노했다. 첫째, 정호준 본인이 직접 수정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지훈을 시킨 것. 둘째, 그걸 핑계로 출장까지 불러낸 것.

결정적으로,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해 놓고는 잘했냐고 물어보는 건 대체 무슨 저의인지! ‘답정너’ 질문에는 ‘넌씨눈’ 대답이 정답이라던데! 마음 같아서는 지금 무슨 말 하시는지 잘 안 들린다고, 아무래도 달팽이관이 막힌 것 같다고 빈정대고 싶었지만 지훈은 이번에도 역시 잘 참았다.

“네, 감사합니다. 사무관님. 다음에는 제가 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김 대리는 다 좋은데 너무 깍듯해요. 같이 일한 지도 몇 년 됐는데 이제 편하게 말해요.”

호준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지훈은 편해지다 못해 쌍욕을 날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지훈이 호준과 같이 일한 지는 오래되었다. 인턴 시절까지 따지면 거의 2년 반을 매일 전화 통화 한 사이였다. 매일이 다 뭐냐, 하루에도 수십 번씩 통화하고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한쪽이 여자였으면 완전히 오해받을 뻔했다. 천진난만했던 인턴 시절, 나름대로 잘 보이겠다고 ‘편하게’ 말을 던졌다가 어떻게 되었더라?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사무관님!’이라고 이메일 말미에 메시지 하나 남겼다가 퇴근 5분 전에 호준한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었다. 혹시 주말에 좋은 일이 있는 거냐며 급한 목소리로 묻기에 소개팅이 있어서 기대가 된다고 솔직하게 대답해 버린 게 화근이었다.

지훈은 그때만 생각하면 자신의 주둥이를 때려 주고 싶었다. 전화 통화를 마치자마자 갑작스럽게 업무 메일이 왕창 쏟아져서 그 주 주말은 오롯이 일과 함께 보내야 했다. 대학 선배가 간만에 주선해 줬던 그 소개팅은 완전히 박살 났고, 과에는 어째서인지 소개팅 펑크 내는 배은망덕한 놈으로 소문이 났다. 그 후로는 소개팅이고 뭐고 어떠한 기회도 잡을 수 없었다. 그 후로 지훈의 사생활은 꾸준하고 성실하게 황무지였다.

그때의 사건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남겨, 지훈은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호준이 편했던 적이 없었다.

“사무관님. 저는 지금이 딱 편하고 아주 좋습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일 얘기를 계속 해도 되겠군요.”

이참에 그냥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 버릴까?

지훈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정호준을 노려보았다. 노려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얼굴은 또 정말 잘생겨서 짜증이 났다. 저 인간은 왜 얼굴만 착하고 성격은 지랄맞을까. 나이 서른셋에 사무관 4년 차면 합격을 빨리 했다는 뜻이니 머리도 좋을 텐데. 도대체 사회에 무슨 불만이 있어 이렇게 사람을 못 잡아먹어 안달일까.

“양식은 이대로 가면 될 것 같고요. 2장 34페이지를 보면 표 2-2에서 합계가 안 맞던데요?”

“그건 오류값은 제외한 결과라서 그렇습니다. 요청하신 것처럼 표본이 정확하지 않아서 리서치 회사 쪽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각주로 다시 달아 주시고요.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보니까 또 이상한 표가 있던데…….”

하지만 지훈이 속으로 욕을 하든 말든, 조판 부호 감별사인 호준은 너덜너덜해진 지훈의 보고서를 펼쳐 들고는 역시나 마이크로 나노 단위로 분석했다.

눈을 크게 뜨고 억지로 찾아내면 굳이 찾을 수 있는 호준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남한테 자기 일까지 떠넘기고 노는 무책임한 인간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한테 일을 시켜 대는 만큼 본인도 정말 일을 많이, 그리고 열심히 했다. 덕분에 같이 일하는 아랫사람도 죽을 맛이었지만.

그리고 상급자로서 책임도 확실히 졌다. 일을 잘 관리하기도 했고, 윗선에서 날아오는 얼토당토않은 무리한 요구는 알아서 쳐 내기도 했다. 자기 일과 책임을 남한테 떠넘기고 돈과 명예만 챙겨 가는 수많은 상사들을 생각하면 호준은 양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이 힘들어 죽겠는 건, 그냥 일 자체가 미친 듯이 많기 때문이었다.

쉴 새 없이 빨간 줄이 벅벅 그어져 가는 보고서와 함께 지훈의 마음도 암담해졌다. 과연 3일 안에 저걸 다 수정하고 자신은 무사히 휴가를 떠날 수 있을까?

하지만 정작 그런 지훈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호준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 차 있었다.

* * *

겨울은 해가 빨리 졌다. 여러 정부 건물과 연구소 등지에 야근의 불빛이 빛나고 있긴 했지만, 제 역할을 다한 도시는 빠르게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피곤에 찌든 지훈의 눈꺼풀은 잠에 감겼다.

“김 대리? 김 대리님?”

“음……. 그만 좀 깨우……. 네?”

자다 깬 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가, 눈앞의 호준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쓰읍. 불안한 느낌이 들어 입가에 살짝 흐르던 침을 닦았다. 설마, 저 인간이 내가 조는 모습을 본 건 아니겠지? 언제부터 졸기 시작한 건지 기억은 안 났지만,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얼마 되지 않았어야 한다! 무려 업무 회의 중에 졸다니! 게다가 최 팀장도, 본부장도 아닌 바로 정호준 사무관 앞에서!

내가 미쳤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지훈은 죽을 맛이었다. 상대는 실수로 꼬투리 잡으면 백만 년은 물고 늘어질 인간이 아닌가.

하지만 도무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다. 잠깐 졸았던 건지, 몇 시간을 푹 처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 몸이 엄청나게 개운했으니까.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개운하면 불길한 징조라는데. 왜 기억이 조금도 안 나는 걸까. 지금 상황에서는 호준한테 자신이 몇 시간을 처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지훈은 궁금증만 삼켰다.

일단 빠르게 눈치를 봤다. 호준이 눈만 깜박이는 걸 보니 아예 자신이 졸았다는 사실 자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지훈은 대충 분위기를 보다가 호준의 손에 들려 있는 보고서의 참고 문헌 목록을 보고 대충 적당한 대답을 때려 맞혔다.

“음…… 그럼…… 방금 말씀하신 것까지 참고해서 수정하겠습니다. 내일까지 보내 드리면 될까요?”

호준은 대답도 없이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지훈은 긴장했다.

내 대답이 틀렸나? 보고서 얘기 하고 있었던 거 아녔어? 뭐가 잘못된 거지? 다른 지시 사항이 있었던 건가? 정호준 저 자식 또 열 받은 거 아냐?

겁이 난 지훈이 정호준의 구두라도 닦을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호준이 다시 지훈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단 한 번도 지훈의 앞에서 미소를 잃은 적 없던 호준이 돌연 정색한 것이다. 2년 반 동안이나 같이 일하면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지훈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저 자식 진짜 화났나?

“사무관님. 제가 뭔가 잘못을…….”

“김 대리, 배 안 고파요?”

“네?”

“나는 좀 출출한데.”

지훈은 또 당황했다. 저 자식 왜 뜬금없이 밥 타령이야?

그나저나 이럴 때 대체 뭐라고 대답하는 게 정답일까? 지훈은 번뇌에 빠졌다. 자신을 앞에 세워 놓고 잠을 자는 무례를 범했으니 이 핑계로 식사를 접대하라는 뜻일까? 김영란법에 저촉되니까 3만 원 이하의 메뉴를 참신하게 고르거나, 아니면 호준의 촌스러운 공무원 정장 주머니에 미리 현금 좀 쥐여 주고 더치페이 하는 척 한우갈비 세트를 먹으러 가야 하는 걸까? 뭘 드시고 싶은지 여쭈면서 자연스럽게 자진해서 한우갈비라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걸까? 지훈은 지금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처세술에는 젬병인 지훈이 안 돌아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지만 안타깝게도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대답을 잘못 했다간 이 사업이 완전히 작살나는 수가 있었다. 호준이라면 지금 눈앞의 보고서를 인간 파쇄기처럼 좍좍 찢은 다음, 이메일 첨부 파일까지 날려 버리고 ‘저런, 파일이 죄다 날아갔네요. 우리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겠어요. 내일까지 부탁해요, 김 대리! 아하하하!’ 하면서 처웃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적어도 지훈의 머릿속에서는 그랬다.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네요, 사무관 님. 하하하! 저도 때마침 출출한데 딱 생각나는 것이 한…… 한우?”

“음, 고기를 구워 먹긴 좀 늦었지만, 출출하니까 뭐라도 먹죠. 갑시다.”

호준은 그대로 지훈의 손을 덥석 잡아끌더니 곧바로 카페를 나섰다. 호준의 손이 참 크고 따듯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지훈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잠깐, 7시도 아니고, 8시도 아닌, 9시 반?

저녁 아홉 시 반?

분명히 5시에 태종시에 도착해서 쓸모없는 수다를 떨다가 6시쯤에 회의를 시작한 것 같은데, 뭐 했다고 벌써 아홉 시 반?

아무리 꼼꼼한 조판 부호 눈깔 정호준이라고 해도 고작 78페이지짜리 보고서를 가지고 세 시간 반이나 회의를 할 리가 없었다. 그사이에 필시 차원의 균열이 일어나 시공간을 뛰어넘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었다. 혹시 호준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능력자? 그렇지 않고서는 이건 말도 안 된다!

자기가 사무관을 앞에 앉혀 두고 무려 세 시간을 졸았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지훈은 혼자서 큰 착각에 빠졌다.

지훈이 시계를 보며 머리털을 쭈뼛 세우는 사이 호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지훈의 시선을 피해 피식 웃고 말았다.

* * *

호준이 얼빠진 지훈을 데려간 곳은, 최고급 한우를 엄선해 최고의 서비스와 함께 대접하는 고급 한우 전문점, 의 옆에 있는 30년 전통 전주 콩나물국밥집이었다. 누가 봐도 생긴 지 1년도 채 안 된 가게였지만, 3대째 내려오는 할머니 비법의 콩나물국밥집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있었다. 1인분 팔천 원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적혀 있는 광고판을 보고 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 대리, 혹시 콩나물국밥 못 먹습니까?”

정신 줄 놓은 지훈의 표정을 바라보며 호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콩나물 알러지가 있다거나…….”

쓸데없이 건강해서 병가도 못 내는 지훈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아뇨. 너무 잘 먹어서 탈입니다. 사무관님은요?”

“저는 좋아합니다. 여기 나름대로 전통 있는 맛집이거든요. 작년 겨울쯤에 생기긴 했지만 11개월도 전통은 전통이니까…….”

“저도 콩나물국밥 엄청 좋아합니다.”

누가 봐도 아부성 멘트였지만 열심히 애쓴 아부도 지훈 나름대로의 매력이기에 호준은 웃으면서 콩나물국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사실 호준은 지훈을 내심 걱정했다. 열심히 보고서의 수정 사항을 조목조목 지적하는데 어느 순간 지훈의 리액션이 잠잠해졌다. 지훈은 내내 등에 짊어지고 다녔던 노트북 가방을 품에 끌어안은 채로 졸고 있었다. 보고서의 오타 빈도수를 보아하니 며칠 밤새워서 쓴 것 같던데, 피곤할 터였다.

호준도 사실 일을 그렇게까지 몰아치듯 시키고 싶진 않았지만 이번 사업은 특히 승진에 눈이 먼 곽 과장이 엄청나게 쪼아 대는 통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정부 공약 사업 중 하나라서 위에서 압박이 엄청났다. 그 때문에 최근 며칠간 호준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연휴 직전까지 꼼짝없이 야근할 예정이었다. 연휴 때 쉴 수나 있으면 다행일까. 게다가 업무 능력이 빙하 속으로 침몰하기 직전인 ㅇㅇ정책연구팀에서 호준의 스타일대로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오로지 지훈밖에 없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지훈만 죽어라 고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지훈이 평일에 일을 몰아서 하다가 몸살이라도 날까 봐 염려한 호준은 지훈이 업무를 일주일 내내 조금씩 하도록 야무지게 배분했다. 지훈의 입장에서는 피곤할 만했다. 행여 시간을 내서 소개팅이라도 나갈까 봐 불안해서 주말에도 쉬지 못하게 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때문에 멀리 출장까지 나왔으니 얼마나 피곤할까. 따듯한 카페의 푹신한 소파에서 몸을 녹이다 보면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훈이 끔벅끔벅 조는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관 앞이라는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제법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호준은 그런 지훈의 대범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참에 지훈의 얼굴이나 마음껏 감상할 겸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중간에 입가에 흐르는 침도 좀 닦아 주고 고꾸라지는 어깨도 세워 주었다. 지훈이 조는 도중 가방에 있던 휴대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기도 했지만 호준은 행여 새근새근 잘 자던 지훈이 깰까 봐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사람이 늘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일벌레 정호준 사무관은 지훈의 수면을 감상하며 자신도 잠시나마 휴식 시간을 가졌다.

카페 영업 종료를 앞둔 알바생이 일부러 호준의 주변에서 물걸레질을 미친 듯이 해 댈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어쩔 수 없이 호준은 지훈의 단잠을 깨웠다. 물론 지훈이 그렇게까지 세상 망한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랄 줄은 몰랐다. 잔뜩 주눅 들어서는 자기가 또 무슨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며 눈치를 살피는 지훈의 모습이 안타깝고 귀여웠다.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려야 했을 정도였다.

웃지 않으려고 아무 생각이나 떠올리다가, 문득 지훈에게 밥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저녁때를 놓쳤으니까. 호준도 허기가 졌는데 자다 깬 지훈도 배고플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우갈비 정식을 먹이고 싶었지만 김영란법 때문에 자제했다. 공무원과 공무상 관련이 있는 유관 기관 직원 간에 3만 원 이상의 밥을 사 주려면 친밀한 사이, 가족이나 연인이어야 했다. 정부 카드가 아니라 자기 카드를 직접 긁어도 흠을 잡히는 수가 있었다. 호준은 공무원의 품위 유지를 위해 이리저리 짱돌을 굴리다가 나중에 지훈과 정식으로 사귀게 되거든 그때 한우 정식을 사 주겠다고 결심하며 오늘은 일단 서로에게 부담 없는 메뉴를 선택했다.

밥은 그렇다 치고, 호준은 지훈의 숙박도 걱정되었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김 대리. 오늘 밤엔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네? 기차 타고 돌아가면 되는걸요. 저 앞에서 버스 타면 기차역까지 곧바로 갑니다.”

태종시에 한두 번 온 게 아닌 지훈은 낯선 도시의 버스 노선을 외울 지경이 되었다. 짠돌이 최 팀장이 분명 숙박비는 출장비에 포함시키지 않을 테니 1박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호준 때문에 출장 온 것도 억울한데 사비 들여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그런 지훈을 본 호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시내버스가 아직 다니긴 하는데, 오늘은 서울 가는 막차 시간이 9시 46분일 겁니다. 지금 9시 43분이라 타고 가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네? 설마요! 막차 11시까지 있을 텐데요!”

놀라운 사실에 흥분한 지훈은 화들짝 놀라며 어플을 이용해 곧바로 기차표를 확인했다. 하필 오늘따라 철도 노조 파업 때문에 막차 시간이 평소와 달랐다. 오늘은 정말로 9시 46분이 막차였다. 심지어 이미 입석까지 전부 매진! 지훈의 얼굴은 폼페이의 마지막 날처럼 굳었다.

“괘, 괜찮습니다. 저는. 기차가 없으면 버, 버스를 타면 됩니다. 버스는 남아 있을…….”

“서울행 막차가 9시 27분에 떠났어요. 터미널 문 닫았을 겁니다.”

지훈은 버스 어플을 조회했다. 사실이었다. 운수 노조도 파업을 하나? 아니다, 버스는 그냥 막차가 빨랐다. 충격받은 지훈은 그대로 망연자실했다. 카페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임 워프 한 것도 충격적인데 막차가 이렇게나 빨리 끊길 줄이야! 오늘은 어째서 끊임없이 충격과 공포가 이어지는 것일까! 지훈은 행정혁신도시의 버스 체계가 혼란스러웠다. 아니지, 애초에 철도 공단이 제대로 정규직을 채용했으면 기차가 일찍 끊길 일도 없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10시도 안 됐는데 무슨 차가 다 끊겨요!”

“말도 안 되는 일이 여기서는 일어나기도 합니다. 가끔은 나도 환장할 것 같으니까.”

태종시 주민인 호준이 진심을 담아 씁쓸하게 대답했다.

호준이 공무원 연수를 끝내고 처음 태종시에 부임했을 당시엔 정말 땅에 풀과 흙밖에 없었다. 수도권에서만 자라 온 호준에게는 당시 매일매일이 충격과 공포였다. 한번은 감자탕을 먹기 위해 근처 읍까지 차를 타고 20분이나 가야 했는데 밥값보다 차 기름값이 더 나왔다. 지훈과의 다정한 전화 통화가 아니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인내와 고난의 시간들이었다.

아연한 지훈의 표정을 보며 호준은 나지막하지만 강한 어조로, 누가 들어도 혼잣말이 아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 김 대리만 괜찮으면 제 집에서 자고 가도 됩니다. 집이 좀 넓거든요.”

누가 들으면 하룻밤이 아니라 아주 들어와서 살라는 소리인 줄 알겠다. 지훈은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네?”

“특별히 김 대리한테는 숙박비는 안 받겠습니다. 최 팀장이 워낙 구두쇠라서 관내 출장은 숙박비를 안 달아 줄 겁니다.”

호준이 되게 선심 쓰는 척 말해서 하마터면 고마울 뻔했다. 애초에 누구 때문에 태종시까지 와서 기차와 버스를 죄다 놓쳤는지를 생각하면 아주 당연한 처사였다! 호준의 생색에 지훈은 기가 막혀서 콧구멍 평수를 넓혔다.

망할 정호준의 집에서 하룻밤 지내느니 내 돈 내고 편하게 호텔에서 자는 게 나을까? 물론 지훈은 그 생각도 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종시에는 지훈 같은 불행한 출장인들을 위한 비즈니스호텔이 몇 군데 있었지만 더럽게 비쌌다. 별도의 출장비 없이는 가당치가 않았다. 그렇다고 모텔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 가족과 떨어져 지방 도시로 유배 온 남자 공무원들이 바글거리는 행정혁신도시의 유흥 사업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는데, 모텔은 그 최전방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최선의 선택은 놀랍게도 정호준의 제안을 덥석 무는 것이었다. 비록 호준이 미치도록 싫었지만, 지훈은 작고 귀여운 월급을 받는 일개 계약직 직원이었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사무관님. 흠흠!”

그리하여 지훈은 호준의 쥐똥만 한 정성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냥 자면 억울하니까 하룻밤 같이 지내면서 코나 좀 요란하게 골아서 호준의 숙면을 방해할 참이었다. 소심한 지훈의 복수 계획은 대략 이 정도 되었다. 치졸한 호준의 뒤끝이 걱정되지만 어차피 3일 뒤에 출국하니까 상관없지 않은가.

하지만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가는 지훈의 대답을 듣는 호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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