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리 수난기 1
1.
김 대리는 얼음 가득한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만끽했다. 한 달 넘게 야근해 가며 겨우겨우 완성한 수탁 과제 보고서를 드디어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마감 전에 일을 해치운 김 대리의 얼굴엔 완연한 안도의 기색이 돌았다.
원래 그 보고서는 김지훈 대리가 속한 ㅇㅇ정책평가연구진흥원의 ㅇㅇ정책연구팀이 함께 작업해야 하는 정부 용역 사업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김 대리의 파트만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결국 김 대리는 보고서 내용의 90%를 완성하는 쾌거를 뜻하지 않게 이루게 되었다.
이는 리더인 최 팀장이 김 대리를 유독 싫어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른 팀원인 유 과장이 유달리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해당 과제 담당자인 ㅇㅇ부 ㅇㅇ정책과 정호준 사무관이 가진 악랄함의 공이 가장 컸다.
휴먼굴림체로 작성한 보고서가 첨부된 이메일을 전송하자마자 김지훈 대리는 곧바로 컴퓨터 전원을 끄고 사무실 키폰 전화선을 끊어 놨다. 앞으로 적어도 두 시간은 여유 있게 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빛의 속도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전화통을 울려 대는 정호준 사무관이라지만 선을 끊어 놓았는데도 전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똑똑한 공무원 중 한 명인 정호준 사무관과 일하는 김지훈 대리는 이렇게 멍청한 방법을 써서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휴일을 포함하여 한 달을 내리 야근한 자신에게 이 정도 휴식은 합당하다고 여겼다. 지훈은 막간의 틈을 타 사내 매점의 맛대가리 없는 커피 향을 음미했다. 원두를 볶다가 태워 버린 사내 매점의 커피 향은 마치 빚보증을 서 줬던 불알친구에게 배신당한 후에 느끼는 인생의 쓴맛 같았다.
전화선을 끊어 놓고 정 사무관의 시달림으로부터 벗어난 지훈은 더없이 평화로운 상태였다. 지금 당장 지훈이 퇴사하고 책을 쓴다면 제목은 ‘전화선을 끊어 놔도 괜찮아’일 것이다.
한 달 만에 처음 보는 지훈의 한가한 모습에 팀원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지훈이 다시 사람의 몰골로 출근할 수 있을 테니까. 지훈은 평소엔 단정한 사람이었지만 정 사무관의 마수에 빠질 때마다 너무 바쁜 나머지 노숙자만도 못한 몰골이 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지훈을 빼고 모두가 정규직이었지만 일은 계약직인 지훈이 제일 많이 했다.
“김 대리, 드디어 수탁 과제를 끝냈구먼. 그간 수고했으니 오늘은 아예 조퇴하고 쉬지그래?”
뒷자리의 최 팀장이 지훈을 보며 제안했다.
“아닙니다, 팀장님. 휴가 아껴야죠. 그냥 오늘 ‘그 자식’한테 또 전화 오면 저 조퇴했다는 말만 해 주세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자식’은 다름 아닌 정호준 사무관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지훈에게만 전화를 해 대는 정 사무관의 악명은 팀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최 팀장의 일도 지훈한테 시키는 정 사무관의 악랄함과 치졸함에는 모두가 치를 떨었다.
하지만 한동안 정 사무관은 지훈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지훈은 다가오는 명절 연휴에 맞추어 그동안 쌓아 온 소중한 월차를 알뜰살뜰하게 끌어모아 일주일 넘게 아주 먼 곳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장소는 누구도 상상 못 할 아주 먼 곳으로 정했으며, 교통편과 숙소는 이미 비밀리에 예약해 두었다. 정 사무관이 암만 5급 사무관이라고 해도 외무부나 국정원 직원이 아닌 이상 지훈의 출입국 기록까지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출국 전까지만 정 사무관을 피하면 이제 지훈은 완벽하게 한국을 탈출할 수 있다.
“‘그 자식’한테 전화 오면 김 대리 휴가 벌써 떠났다고 내가 확실하게 말해 두지. 이왕이면 김 대리가 한 보름 동안 사막에 간다고 해 버릴까?”
“남극이나 북극도 괜찮을 겁니다.”
“여행 갔다가 죽었다는 설정은 어때요?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고.”
지훈의 옆자리에 앉은 유 과장이 거들었다. 지훈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정 사무관과 또 일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북극곰에게 콜라를 주다가 바닷물에 빠져서 저체온증으로 얼어 죽었다고 합시다.”
“남극 펭귄의 귀여움으로 인한 심쿵사는 어때요?”
“정 사무관 정도면 김 대리 시체라도 주워서 좀비로 부활시켜 일 시킬 테니까, 유골은 한 100년 뒤에 발견된 걸로 하자고.”
팀원들이 완벽한 지훈의 사망 시나리오를 창조했다.
다들 지훈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지만 사실 팀원들은 일은 못할지언정 딱히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단지 일을 남에게 미룰 수 있으면 최대한 미루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었을 뿐. 지훈이 팀에서 가장 열심히 일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김지훈 대리의 수난이 있었기에, 망해 가기 직전이었던 ㅇㅇ정책연구팀은 지난 몇 달간 진행되었던 신임 원장의 시베리아 칼바람 같은 조직 개편 속에서도 간신히 유지될 수 있었다. 지훈이 정 사무관의 성질머리를 방어하며 그럭저럭 성과를 내 준 덕분에 팀원들은 그동안 꿀 빨며 지낼 수 있었다. 물론 지훈에게 개미 코딱지만큼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팀원들은 지훈이 진짜 휴가를 떠나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수상쩍은 타이밍에 수상쩍은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헛, 우리 팀에 전화가 왔네? 흠흠.”
하필이면 최 팀장의 자리에서 요란하게 전화가 울렸다. 지훈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책상 밑으로 숨으려 했다. 옆자리의 유 과장이 황급히 말리려 했지만 이미 전화벨 소리에 겁먹은 지훈을 말릴 수는 없었다. 지훈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자식입니까? 무조건 나 없다고 해요! 나 지금 북극이라고 해요!”
“걱정 마, 김 대리. 046은 아니야. 내선 번호인걸. 허허!”
최 팀장이 액정 화면에 뜨는 발신자 번호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046-xxx으로 시작하는 전화는, 99%의 확률로 행정혁신도시 태종시에 위치한 정부청사로부터의 전화였다. 특히 높은 확률로 정 사무관의 전화였다. ‘그 자식’은 지훈이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다른 직원의 전화기를 동원해 전화를 걸었다. 팀원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046으로 시작하는 전화는 무조건 경계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에 걸려온 전화는 9로 시작하는 내선 전화였다. ‘그 자식’일 리는 없었다. 최 팀장은 안심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ㅇㅇ정책연구팀 최훈탁 팀장입니다.”
-최 팀장, 감사실 장규원일세. 혹시 김지훈 대리 자리에 있나? 방금 걸어 보니 전화선이 아예 뽑힌 것 같아서 말인데.
하필 또 지훈을 찾는 전화였다. 정 사무관이 아닌 사람이 지훈을 찾는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첫째, 진짜 김지훈 대리와 관련된 일 때문인 경우. 둘째, 정 사무관이 시켜서 김지훈 대리를 찾는 경우. 하지만 일개 5급 사무관의 입김이 설마 공공 기관 감사실까지 닿을까. 최 팀장을 비롯한 모두 감사실에서의 전화를 첫 번째 경우라고 판단하며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옛 조상들의 지혜를 잊고 말았다.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김지훈 대리는 안타깝게도 오늘부터 휴가입니다. 아마도 지금쯤 부산 앞바다에서 타이타닉 호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는 북극 바다로 출항했을 겁니다.”
졸지에 북극 탐험가 아문센이 된 김문센 대리를 비롯하여 팀원들 모두 입을 다물고 최 팀장에게 주목했다. 역시, 본부장에게 갖은 아부를 다 떨며 무능력을 극복하는 환관 최 팀장의 유려한 거짓말이, 이번에는 지훈을 위해서 빛났다. 이 얼마나 이타적인 재능 기부란 말인가.
북극으로 가는 배가 정말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는 것인지, 지훈에게 러시아 입국 비자는 있는 것인지, 러시아는 혹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지에 대해 팀원들이 궁금해하는 사이 감사실장의 목소리가 팀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사내 문서 기록물 내역 보니까 김지훈 대리의 휴가계는 3일 뒤부터인데, 그럼 지금은 무단결근인가?
그 순간 최 팀장의 두꺼운 가발 사이로 땀방울이 한 줄기 흘렀다.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김 대리는 콜라값 폭등으로 인한 북극곰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장을…….”
-며칠 내로 일시 복무 점검이 있을 거라는 공문이 날아왔네. 특히, 방금 전에 메일을 발송한 직원이 전화를 받지 않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지. 행여 무단결근, 무단 외출, 무단 조퇴 등이 만연할 수 있으니 말이네.
대체 누가 그따위로 치졸한 공문을 보낸 건지는 결코 모를 수가 없었다. 입을 굳게 다문 지훈의 입에서 ‘정 사무관 개새끼’라는 욕이 음소거로 흘러나왔다.
“그런 사람이 우리 회사에 있단 말입니까? 놀랍습니다. 하하하!”
-우리 회사에 그런 사람은 없어야겠지, 물론. 김지훈 대리가 이메일을 발송한 후 그간 부족했던 비타민 D 합성을 위해 건물 옥상에 광합성을 하러 갔고, 그 사이에 보통 사람이면 유독 밟기 힘든 전화선이 잠깐 뽑힌 것이고, 김지훈 대리는 광합성을 하느라 오래 자리를 비워 그 사실을 모르는 것뿐이라고 일단 ㅇㅇ정책과 정 사무관에게 설명해 두었네.
푸흡!
최 팀장보다 한술 더 뜨는 감사실장 때문에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모니터에 뿜어 댄 건 졸지에 비타민 D가 결핍된 지훈이었다.
미안하다, 김 대리. 나는 할 만큼 했어. 최 팀장의 재능 기부는 여기까지였다.
“네, 김 대리가 요즘 현대 직장인의 고질병이라는 비타민 D 결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연광이 필요하다며 직접 옥상으로 가 광합성을 하고 다니는데, 요즘 식물도 인공조명으로 자라는 마당에 가당치도 않습니다. 현대 의학의 정수인 비타민 D 보충제와 수액으로 대체하도록 조처하겠습니다. 비타민 D 수액은 건강 보험이 적용되지 않지만 회사 일을 위해 그 정도는 자비로 지출해야죠. 네, 앞으로도 김 대리가 지나친 광합성으로 장기간 자리를 비워서 정 사무관의 전화를 못 받는 일은 결코 없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이참에 김 대리의 자리도 남향의 창가 자리로 옮기고 창문의 블라인드도 모두 제거해서, 일 년 내내,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뜨거운 직사광선을 온몸으로 쬘 수 있도록 조처하겠습니다. 효율적인 비타민 D 합성을 위해 자외선 차단제 같은 건 손도 못 대도록 제가 다 갖다 버리겠습니다. 과도한 햇볕 노출로 김 대리의 피부암 발병 위험이 높아지는 건 제 알 바가 아니죠. 아무래도 사무관님의 전화가 먼저 아니겠습니까…….”
최 팀장의 횡설수설을 듣다 못한 양 주임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니 차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3일 뒤부터 시작되는 김 대리의 휴가는 원장 결재로 다시 올리라는 지시가 있었네. 내가 정한 건 아니고, ㅇㅇ부에서 요청이 들어왔어. 게다가 내년도 그 팀의 사업 예산이 확충될 거라고 하네. 김 대리가 일을 아주 잘하나 봐? 물론 김 대리가 최대한 빨리 정 사무관 전화를 받을 때 이야기지만 말이야!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감사실장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지훈의 표정이 썩어 갔다. 이러다간 당장 정 사무관의 전화를 받는 건 둘째 치고 휴가 일정까지 날아가게 생겼다.
어떻게 얻어 낸 휴가인데! 몇 달 만의 휴식인데! 이렇게 사라질 수는 없다! 본부장도 아니고 무려 원장 결재로 휴가를 올리라니! 이건 그냥 죽을 때도 회사에서 죽으란 소리 아닌가! 죽어서도 무덤에서 나와 일해야 할 판이다!
지훈의 콧구멍에서 거친 콧김과 불안한 숨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팀원들은 지훈이 폭발하리라는 걸 직감했다.
모두의 예상대로, 전화가 끊기자마자 지훈은 최 팀장한테 달려갔다.
“뭐라고요? 옥상에서 광합성? 최 팀장님이나 일 년 내내 남향 통유리 옆에서 통구이처럼 달구어지시든가요!”
마침 회사 건물을 잘못 짓는 바람에 모두가 앉기를 기피하는 정남향의 통유리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 앉으면 기상 조건에 따라 낮 12시부터 3시까지 잔뜩 달구어질 수 있었는데 겨울철 건물 중앙난방이라도 작동되면 그야말로 사우나였다. 그런 까닭에 보통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사원 전용 자리가 되곤 했다. 지훈도 입사 시에 그 자리에 배치받았다가 필사적으로 탈출한 경험이 있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김 대리, 진정해!”
회사 컴퓨터로 지뢰 찾기를 하고 있던 유 과장이 곧바로 달려 나와 하극상을 말렸지만 지훈의 절박함을 말릴 수는 없었다.
“최 팀장님은 잘못이 없어. 원래 팀장님이 입만 열면 거짓말과 아부인 걸 어떡해. 최 팀장님 본심이 아닌 것 알잖아. 최 팀장님은 단 한 번도 진심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멀쩡한 사람을 비타민 D 결핍 환자로 만들어요!”
평생을 감기 한번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건만, 깊은 오해를 받은 지훈이 울먹였다. 양 주임이 그런 지훈을 달래 보려 하였다.
“그래요. 최 팀장님 아부 덕분에 김 대리님은 무단결근을 면하셨잖아요. 비타민 D 결핍 환자로 오인받는 게 낫겠어요, 감사실에 끌려가는 게 낫겠어요? 당연히 비타민 D 결핍 환자죠.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9명이 비타민 D 결핍인걸요. 무단결근은 걸리면 인사 고과도 떨어지고 그러면 성과급도 낮아지고 승진도 못 하고 여러모로 불리해요. 비타민 D 결핍은 그냥 만성 피로에 면역력이 낮아지고 골격계 질환이 생기는 건데요.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어차피 돈, 시간, 건강 중에서 둘은 포기해야 해요.”
비타민 D 결핍으로 오만 죽을병이 다 생기느니 차라리 성과급이 깎이는 게 나았다. 대한민국 국민 10명 중 건강한 1명이 되고 싶었던 지훈은 억울했다. 사실 그것보다도 휴가가 간당간당해진 것이 더 위험했다. 지훈의 분노한 표정을 본 최 팀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김 대리. 미안하네, 내가 자네 인사 고과는 최고점을 줄 테니 진정해! 성과급 200% 보장!”
저번 주에 노사가 합의한 연봉 협상 결과에 따르면 인사 고과 1등급을 받아도 성과급 200%는 안 나왔다. 결정적으로 지훈은 아직 계약직이라 정규직 전환 전까지는 성과급이 없다. 숨 쉴 때마다 구라를 치는 최 팀장 때문에 더 열 받은 지훈은 콧김을 잔뜩 내뿜었다.
“지금 나오지도 않는 성과급이 중요해요? 내 휴가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참다못한 지훈이 최 팀장의 머리채를 붙잡고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벗겨진 적 없던 가발을 기어코 벗기려는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유 과장의 자리였다. 유 과장은 헛기침을 하며 키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046인데요?”
그 뒤의 번호는 볼 필요도 없었다.
“…….”
“…….”
지훈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받으세요, 유 과장님.”
그 순간 지훈의 눈에서 찔끔 흐른 것은 어쩌면 닥쳐올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의 눈물이었을까.
침묵을 깨고 유 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ㅇㅇ정책연구팀 유진영 과장입니다.”
-유 과장. 오랜만입니다. 저 정 사무관인데, 옆에 김 대리 있습니까?
키폰 너머로 느끼한 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 과장은 눈알을 굴리며 지훈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대답했다.
“네. 김 대리는 무사히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지훈은 유 과장한테 달려들려 했지만 최 팀장이 말렸다.
“그나저나 김 대리 자리의 전화선이 빠져 있었나요? 아마 김 대리도 정말 몰랐을 겁니다. 고의라뇨, 김 대리는 심각한 기계치라서 전화선과 랜선도 구분 못 하는걸요. 김 대리 바꿔 드릴까요?”
전과하기 전까지 공대생이었던 지훈은 이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유 과장의 자리에 연결되어 있던 랜선을 힘차게 뽑으며 지훈은 유선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바꿨습니다. 김지훈 대리입니다.”
-김 대리. 나 정호준 사무관인데요, 아까 보내 준 보고서 잘 받았어요. 설마 이 보고서 때문에 비타민 D가 부족해진 겁니까?
“아닙니드아.”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던 지훈이 간신히 대답했다.
-비타민 D가 한번 결핍되면 만성 피로에 면역력도 약화됩니다. 김 대리 안 그래도 피부가 흰 편이라 걱정됐어요.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야외에서 자주 자연광을 쬐면 괜찮을 겁니다.
지금 누구누구 때문에 지훈은 자연광은커녕 일출 전에 출근해서 일몰 후에도 퇴근을 못 했다. 하루 종일 사무실 형광등 불빛을 쬐며 일만 한 것이다. 지훈은 자신의 흰 피부를 더욱 창백하게 만든 정 사무관의 병 주고 약 주는 행태에 고마워서 감읍할 지경이었다.
“너무나 잘 아시는 걸 보니 사무관님도 역시 비타민…….”
-저는 영양제 잘 챙겨 먹고 있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씨발, 개자식아. 너 이러려고 감사실까지 쪼아 가면서 전화했냐. 지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참 다행입니다, 사무관님.”
그 말을 하면서 지훈은 최 팀장을 노려보았다. 그 옆에서 쇼핑몰 중독인 양 주임이 비타민 D 보충제를 찾아보는 사이, 수화기 너머로 정 사무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무튼 건강 챙겨 가면서 일해요, 김 대리.
당장에라도 닥치라고 외치며 수화기를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은 정 사무관이 갑이고 김 대리가 을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정 사무관이 내년도 ㅇㅇ정책연구팀의 예산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김지훈의 인생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 중 하나였다. 이번 예산을 잘 따내야 사내 인사위원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훈의 운명은 사실상 정 사무관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이 점을 정 사무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달달 볶는 걸 보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훈은 꿈의 정규직 전환을 되새기고 이를 갈며 분노를 억눌렀다. 내가 정규직만 되면 저 새끼를 그냥!
“사무관님.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부들거리는 주먹과 달리 지훈의 목소리는 더없이 온화했다. 옆에 있던 팀원들 모두 지훈의 포커페이스와 포커보이스에 음소거 박수를 보냈다. 꽤 다혈질인 지훈이었지만 정 사무관의 앞에서만큼은 절대로 분노하는 법이 없었다.
-이거참. 좀 쉬면서 일하도록 해요.
누구보다도 쉬고 싶은 건 바로 지훈이었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건데? 너 때문이잖아!
억울함이 차오른 지훈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지훈이 진정한 사나이가 아니었다면 진작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나이가 되고픈 지훈은 인생에 세 번밖에 없다는 남자의 눈물을 정 사무관 때문에 쓸 수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그저 속으로 삼키며 지훈은 영혼 없는 대사를 읊었다.
“아닙니다. 죽으면 평생 쉬는데 미리 쉴 필요 있나요. 이러다 내일 죽어도 일이 먼저죠. 방금 보내 드린 보고서는 검토하셨습니까?”
-물론 읽었습니다. 그런데 김 대리도 알겠지만 좀 의문이 생기는 부분들이 있어서요. 특히 폰트가 휴먼명조가 아닌 휴먼굴림체던데, 의도가 있는 겁니까?
공문서와 공문은 휴먼명조나 신명조로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공공 기관 계약직으로만 2년 넘게 일한 지훈이 휴먼굴림체로 문서를 작성한 데엔 물론 깊은 의도가 있었다.
“의도라니요. 스타일 설정에서 오류가 있었나 봅니다.”
지훈이 무능한 최 팀장 밑에서 1년 넘게 일하면서 배운 거라곤 누구보다도 능청스러운 거짓부렁 스킬이었다.
-물론 꼼꼼한 김 대리가 그런 실수를 할 리는 없겠죠. 그것 외에도 검토할 사안들이 좀 있는데,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오늘 중으로 태종시로 올 수 있습니까? 내가 가기에는 좀 바빠서요.
그렇게 바쁜 새끼가 남의 회사 감사실에 쓸데없는 공문 보낼 시간도 있고 말이지!
하지만 지훈은 간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 사무관의 말은 질문이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무조건 오라는 뜻이다. 어차피 오라고 할 거면서 왜 굳이 시간이 되냐고 물어보는지, 그 사고 구조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을 중의 을 지훈은 오늘도 굴복했다.
“도착하면 오후 5시인데 괜찮으십니까?”
-나는 야근할 예정이라 괜찮아요. 그럼 도착하는 대로 청사 로비에서 봅시다. 기다릴게요.
딸깍.
전화가 끊기자마자 지훈은 수화기를 바닥으로 내리꽂으며 저주했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 개자식!”
정 사무관의 가장 가증스러운 점은 바로 틈만 나면 지훈을 불러 댄다는 점이었다.
회사에서 태종시까지는 차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만년 계약직 신세인 지훈에게 자기 소유 승용차가 있을 리 만무했다. 시민의 발이라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고속버스를 타고 기차를 탔다가 다시 버스로 갈아타서 청사까지 굽이굽이 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편도 두 시간이었다.
5시에 도착해서 회의한다고 치면 말 많은 정 사무관 성격상 못해도 7시에 끝날 테다. 그럼 다시 돌아오는 길이 구만리였다. 집에 도착하면 밤 9시나 될까. 도로라도 밀렸다간 몇 시에 퇴근할지 감도 안 잡혔다. 이미 이번 주 근무 시간은 야근을 포함해서 주 52시간을 넘겼기 때문에 추가 야근 수당도 신청 못 했다. 주 52시간 이상 근무하면 안 되기 때문에, 결국 공무원이 시키지만 정부는 몰라야 하는 비밀 야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정 사무관이 김 대리 좋아하는 거 아냐? 좋아하니까 괴롭히는 거지.”
촉이 귀신같은 유 과장이 조심스럽게 의혹을 제기했지만 바로 묵살당했다.
“그런 미친 소리 마세요!”
“맞아, 유 과장. 정 사무관이 초등학생도 아닌데 설마 그러겠어? 그리고 말이야, 좋아하면 일을 안 시켜야지. 그렇게 무식하게 일 폭탄을 던지겠냐고. 그냥 폭탄도 아니고 핵폭탄급으로 말이야. 일 폭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김 대리 자리에서 방사능이 느껴질 정도라니까. 옆에 있다간 피폭당하겠어.”
최 팀장의 말투는 늘 그렇지만 오늘따라 묘하게 재수 없었다.
“김 대리, 혹시 정 사무관한테 원한 산 거 있어?”
“원한이요? 하. 정호준 그 새끼야말로 내 원수거든요!”
도움은 하나도 안 되는 팀원들의 농담 따먹기에 두 배로 지친 지훈은 소리를 꽥 질렀다. 대충 짐을 챙겨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나갔다. 팀원들 모두 지친 지훈의 뒷모습을 보며 오늘도 개고생할 지훈을 속으로만 애도했다.
다만 최 팀장은 조용히 팀 서무인 양 주임을 불러 태종시 출장이면 거리야 어찌 됐든 관내 출장이니까 출장비는 차비만 계산하라고 일러두었다. 그 사이에 유 과장은 지훈이 3일 안에 정 사무관의 일을 무사히 끝내고 북극행 타이타닉 호에 탑승해서 탈출에 성공할 것인지 궁금해했다.
지훈이 사라진 사무실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지훈이 놓고 간 사내 매점 커피만이 빈자리에서 인생의 쓴맛을 뿜어냈다.
* * *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철도 노조 파업으로 운행 열차 편수가 줄어드는 바람에 지훈은 남는 열차에 간신히 입석으로 탑승하게 되었다. 지훈은 객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인생을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 사무관에게 찍힐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 사무관은 왜 자기만 이렇게 괴롭히는지, 지훈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긴 잘못한 일이 한 개도 없었다. 물론 그 반대, 정 사무관이 자신한테 잘못한 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애초에 갑과 을 관계에서 지훈은 항상 굽실거렸다. 어차피 을 중의 을인 자신의 위치에서는 정 사무관한테 뭔가를 잘못할 수조차 없었다.
오늘에야말로 큰맘 먹고 정 사무관이 자신을 특별히 미워하고 괴롭히는 이유를 물어볼까 싶었다. 하지만 내년도 팀 예산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치졸하고 뒤끝 있는 정 사무관이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 자신에게 예산 삭감의 책임을 뒤집어씌울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 회사는 계약직 인생인 지훈의 세 번째 회사였다. 계속 옮겨 다닌 이유는 순전히 정 사무관 때문이었다.
첫 번째 회사에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ㅇㅇ부의 다른 산하 기관에 학생 인턴으로 뽑혀 근무를 하게 되었던 사회 초년생 김지훈 인턴은 당시 지극히 소박한 꿈을 꾸었다. 열심히 일해서 경력을 쌓아 공공 기관에 정직원으로 취직하자. 작고 귀여운 월급을 받으며 가늘고 길게 소시민으로 살아가리라.
정 사무관을 처음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당시 인턴 사원이었던 지훈은 회의 참석차 자신의 회사를 찾아온 정 사무관을 처음 보았다. 그때 정 사무관은 ㅇㅇ부의 ㅇㅇ복지과 소속이었다.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일 잘하고 성격 좋은 사무관이라고 했다. 얼굴까지 잘생겨서 여자 직원들 사이에서는 일등 신랑감이라며 인기도 많다고 했다.
처음엔 김지훈 인턴도 정 사무관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일단 남자가 봐도 엄청 잘생긴 데다가, 일개 인턴이었던 지훈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니까.
지훈은 어느 날 공석이었던 팀장 대신 정 사무관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정 사무관이 업무차 지훈에게 직접 전화를 걸면서 정 사무관에 대한 환상은 와장창 깨졌다.
정 사무관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개 인턴에게 시킨 업무는 당시 인턴의 소관을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일을 처음 배우는 지훈이 실수할 때마다 정 사무관은 지훈의 영혼을 추수철 탈곡기처럼 달달 털었다. 물론 예의 그 느끼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친절하게 말했지만, 그 내용마저 친절하진 않았다.
지훈은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그 회사를 냉큼 그만두었다. 정규직으로 채용될 가능성도 없었고, 정 사무관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당시 지훈이 인턴 시절 겪은 정 사무관은 세상에 둘도 없는 진상이었다. 얼굴이 잘생겨 봤자 이성애자인 지훈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취직한 회사에서였다. 갑자기 블라인드 채용이다 뭐다 해서 지훈이 열심히 쌓았던 학점과 학벌이 소용없게 되었다. 지방 출신이었지만 서울에서 대학 나온 지훈은 다시 맨땅에 헤딩해야 했다. 오랜 취업 준비 끝에 간신히 계약직으로 ㅇㅇ부 산하 공공 기관에 취직했다. 그런데 하필 김지훈 주임이 들어간 팀은 정 사무관이 담당하는 정부 사업을 진행하는 곳이었다.
첫 전화 통화에서 “설마 김지훈 인턴? 아니지, 이제 김 주임인가요?”라고 묻던 정 사무관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지훈은 아직도 기억했다. 등골에 돋은 소름이 손가락 끝까지 이어졌을 정도였다. 그래도 처음엔 과거는 잊어버리고, 신입 사원의 마음가짐으로 이메일에 친절한 인사말도 남기면서 정말 잘 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요령 없는 김지훈 주임의 어설픈 인사말이 가식인 걸 들켰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부터 일 폭탄이 쏟아졌다. 금요일 오후 5시 58분에 전화해서 월요일 오전 8시 30분까지 보내야 하는 자료를 주문하는 건 정 사무관의 주특기였다. 심지어 일요일 저녁에 메일을 보내서 월요일 중으로 해 달라고 하거나, 사장이 휴가 간 사이에 사장 결재를 받아 오라는 불가능한 일까지 시키기도 했다.
그런 주제에 성격은 되게 꼼꼼했다. 보고서에 점 하나 안 찍은 것까지 일일이 불러다가 지적했다. 특히 정 사무관은 고정폭 빈칸 오류나 자간 간격 따위를 육안으로 식별할 줄 알았다. 눈깔에 기본적으로 조판 부호 보기 기능이 탑재된 걸까. 그렇다면 진정한 재능 낭비가 틀림없었다. 그 정도 눈깔이면 국가직 사무관이 될 게 아니라 과학수사대의 필체 감식반에 가야 했다.
그 악몽 같은 일 년을 어떻게 버텼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간신히 계약직의 마지노선인 11개월을 겨우 채우고 그만둔 지훈은 자신의 진득한 인내심에 경의를 표했다.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는 회사 측의 꼼수로 12개월을 일할 수 없다는 건 지훈에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정 사무관에게서 벗어날 좋은 핑계였으니까. 한 달의 달콤한 휴식 뒤,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지훈에게 재계약을 요청했다. 하지만 지훈은 행여 정 사무관을 다시 볼까 두려워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훈은 다시 취업 준비생이 되었다. 영어 시험과 한국사 시험 성적을 추가하고 NCS 인강도 들었다. 인생의 역경과 고난 극복 사연을 구구절절 첨가한 자소서도 썼다. 입사 지원서를 여기저기 넣다가 지금의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돌고 도는 바닥인 탓에 지금의 회사 역시 ㅇㅇ부 산하였지만, 다행히 정 사무관과는 일절 상관없는 ㅇㅇ정책과와 일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지훈이 합격한 자리는 일정 기간 일하면 심사 후 정규직 전환이 보장되는 전환형 계약직이었다. 계약직에게 다짜고짜 대리 직급을 달아 주는 거 보면 체계는 더럽게 없어 보였지만, 공공 기관 특유의 한가로운 근무 환경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몇 년간의 취업 준비와 계약직 인생에 너무 지쳤던 지훈은 어지간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계속 이 회사를 다니고 싶었다. 다행히 지훈은 사내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회사에 무던하게 적응해 갈 무렵, ㅇㅇ부 내부에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 바람에 지훈이 참여하는 사업의 담당 사무관이 바뀌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새로운 담당 사무관이 정씨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지훈은 약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정씨는 ‘김이박최’의 뒤를 잇는 대한민국의 5대 성씨였다. 설마 정 사무관이 지훈이 아는 그 정 사무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호준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도, ㅇㅇ부의 규모가 아주 크니 이름과 급수가 같은 또 다른 사무관이 있으리라고 지훈은 믿었다. 그리고 정 사무관과 첫 전화 통화를 했을 때, 이름도 정호준이고 느끼한 목소리도 똑같은데 자신을 알고 있기까지 한, 제2의 정호준 사무관이 있기를 지훈은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이쯤 되면 그냥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었다.
‘김지훈 주임님. 아니 이젠 김지훈 대리님.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그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듣고 당장 도망가지 않은 것은 김지훈 인생에서 가장 잘못한 일 톱 3 안에 드는 짓이었다. 그 즉시 대답 없이 그냥 끊고 도망쳤어야 했다. “반갑습니다, 사무관님”이라고 형식적인 대답을 하는 순간 과거의 악몽이 재현되었으니까. 그 후로 랭보도 아닌데 지옥에서 보낸 한철 같은 시간이 흘렀다.
“씨발.”
오늘도 그 자식을 보러 가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태종시로 향하는 자신의 두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왜 두 다리는 쓸데없이 길고 튼튼할까. 제발 아프기라도 해서 휴가나 병가에 도움이라도 되란 말이다! 분명 내 다리인데 왜 이렇게 내 인생에 협조를 안 하는 건지!
하지만 멀쩡한 두 다리를 잔뜩 원망해 봤자 소용없었다. 지훈의 몸은 착실하게 정 사무관을 향해 갔다.
* * *
갑이 일방적으로 지정한 약속 장소인 정부청사 ㅇ동 앞에 도착한 지훈은 곧바로 정호준 사무관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치 몇 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지훈이 도착하자마자 정 사무관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암만 봐도 일도 안 하고 모니터로 지뢰 찾기를 하면서 빈둥대다가 튀어나온 타이밍이다.
하지만 지훈은 정 사무관의 반듯한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걸 잊었다.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정 사무관의 잘생긴 얼굴이 쓸데없이 해맑게 웃고 있어서 순간 더 짜증이 났다. 잘생기면 얼굴값 한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멀리서 오느라 힘들었나 봅니다. 안색이 영 안 좋네요.”
입석으로 오느라 힘들긴 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닐 것이다.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정 사무관의 인사에 지훈은 애써 웃어 보였다.
“아, 아닙니다. 사무관님.”
당장에라도 튀어나오려는 욕을 자제하려 지훈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최 팀장의 가발도 벗기는 지훈이었지만 정 사무관은 감사실장도 극진히 모시는 사무관님이었다. 멱살을 잡았다가는 회사 내년도 예산이 날아갈 수 있었다.
“그러지 말고 어디 카페라도 갑시다. 커피는 내가 살게요.”
내가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는 당연히 네가 사야 하는 거 아니냐? 지훈은 울컥했다. 커피 한 잔으로 생색내는 정 사무관이 정말 싫었다. 어차피 회의비로 지출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애초에 정 사무관이 여기로 불러내지 않았으면 지훈이 커피를 또 마실 일도 없었다.
하지만 정 사무관이 지훈을 데려간 곳은 프랜차이즈 카페로, 커피 가격이 꽤 비싼 곳이었다. 당황한 지훈의 눈빛을 본 정 사무관이 “사비로 지출할 테니까 마음껏 마셔요.”라고 말하는 순간 지훈은 일부러 카페에서 가장 비싼 메뉴인 그린티 프라푸치노에 커스텀 메뉴로 자바칩과 시럽과 샷을 추가하고 사이즈까지 업그레이드했다. 지훈은 내심 음료의 가격에 당황하는 정 사무관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즌 음료에 샷 추가하고 시럽은 반으로 줄인 뒤 휘핑크림까지 추가하고서는 골드 카드로 결제하고 리워드까지 받아 낸 정 사무관을 보니 이상하게 더 짜증이 났다. 물론 주문자 닉네임이 ‘프린스 헤옹’이라서 먹기도 전에 음료를 뿜을 뻔했지만.
“역시 김 대리님은 제대로 마실 줄 아네요.”
엿 먹이려고 했는데, 뿌듯한 표정을 짓는 정 사무관 때문에 지훈은 괜히 더 배알이 꼴렸다. 야무지게 주문한 건 난데 왜 네가 좋아하냐?
“뭘요.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사무관님!”
문제는 정 사무관도 아니요, 북극곰 콜라값도 아니었다.
셀프 팔자 트위스터인 김지훈 본인이 가장 큰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