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개들의 오후 (18/18)

외전

1. 개들의 오후

이재하는 손톱 옆에 살짝 묻은 크림치즈를 발견했다. 묻은 것을 닦기 위해 손수건을 찾으려 외투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두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여러 장을 사두고 아침마다 새로운 손수건을 꺼내어 꼬박꼬박 챙겨 다니는 걸 본 태건이 저를 놀리는 게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재하를 얌전히 자라 깔끔떠는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손수건 매일 가지고 다니잖아. 따라 해 봤는데 난 자꾸 버리게 되던데.’

그러면서도 재하가 갖고 다니는 손수건을 절 좀 달란다. 그건 왜 달라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고 몇 장을 건네주었다.

그때부터는 태건도 손수건을 챙겨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꺼내어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사용하지 않을 거면 왜 가져갔을까 싶기도 했다. 시시콜콜 물어보는 성격이 아닌지라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생각날 때마다 궁금하기는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또 한 번 크림치즈가 손가락 끝에 조금 묻었다. 베이글 사이에 크림치즈와 케이퍼 절임, 훈제 연어를 끼운 걸 먹고 있던 재하는 손수건 대신 티슈로 손을 닦다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물티슈 있을까요?”

음식물은 다 넘긴 상태지만 혹시 몰라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하니, 카운터 직원이 멍하게 재하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티슈를 건넸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돌아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 사람이었나? 왜 저렇게 보지.

재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제 턱을 쓸었다. 입 주위에는 뭐 하나 묻은 것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상대의 시선이 희한하게 얼굴에 오래 머물렀던 게 어색했다.

어쩌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흔한 인상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각인 후 재하의 신체는 서서히 오메가의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옅게 남아 있던 물푸레나무 향이 완전히 사라져 쟈스민 향으로 고착화 되어 가고 있었다.

알파의 페로몬을 절제하는 법과 오메가의 방법은 또 달라서 주에 한 번 정도 비밀리에 센터를 방문하여 따로 교육을 받았다. 절제를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 가끔 태건에게 검사를 맡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렇다 말은 해 주지 않고 입을 맞춰 오는 통에 곤혹을 겪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한 번 제 페로몬은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장태건은 아직도 대답해 주지 않고 있었다. 다음에는 꼭 어떤 느낌이냐고 캐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몸에 일어난 변화는 페로몬뿐만이 아니었다. 혁대 사이즈가 줄어 한 칸을 더 당겨야 했고, 딱 맞던 옷들이 조금 더 커졌다. 근육량이 살짝 줄기도 하고 뼈대 자체가 얇아진 느낌이 들었다.

기껏 늘려 둔 근육량을 빼앗기는 건 탐탁지 않은 일이라, 재하는 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오늘도 수영장에 들렀다가, 태건의 회사 근처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음 주부터는 재하 역시 장한에 출근하기로 했다. 관리 본부의 본부장으로 역임하기로 했는데 낙하산 인사라 공부해야 할 게 많았다.

대표 이사 자리에 앉은 장태건은 재하에게 상무로 오라는 말을 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자리 욕심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건설 쪽은 처음이라 더 공부한 뒤 올라도 늦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택 사업부와 기획 관리부를 통솔하고 있는 관리 본부라 돈 다루는 것은 비슷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이쪽은 아예 문외한이니 업계 용어와 자금 흐름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결산 방식이 비슷한 듯 달랐다. 24시간 돌아가는 공장 단지에서 반자동 시스템화되어 있는 전자 쪽 산업에 비해 건설은 인력으로 행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선 여러 하청 업체들에서 올라온 견적들을 비교할 수 있어야 했다. 또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건설업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의외로 노력형인 성격이라 재하는 요즘, 쏟아지는 자료에 빠져 살았다. 태건과 점심 약속이 있음에도 베이글을 시켰던 것도 그 때문이다. 수영 후 공복 상태인지라 뇌가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아, 고민 끝에 베이글 샌드위치를 사 먹었던 것이다.

재하는 머그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물티슈로 손을 마저 닦았다. 종이를 집어 넘기려면 손이 깨끗해야 했는데, 뭔가를 먹던 손으로는 그게 안 됐다.

…이런 점이 깔끔떠는 것처럼 비친 걸지도 모르겠다. 재하는 숨을 크게 내쉬며 살짝 민망함을 감춘 뒤 자료의 다음 장을 넘겼다. 태블릿 PC에 띄워 둔 것과 비교해 가며 만년필로 무언가를 끄적거리기도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테이블 위에 커피가 놓였다. 보던 자료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수초가 지난 후에야 제가 커피를 추가 주문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재하는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앞에, 처음 보는 알파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서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남성 알파로, 꽤 호감형인 외모였다.

그가 재하의 테이블에 커피를 올려 둔 듯했다. 뭔가 싶어 재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집중하던 자료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터라 말이 잘 나오지도 않았다. 현실 감각이 조금 떨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너무 빤하게 보았기 때문일까, 알파가 피식 웃으며 멍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재하에게 말했다.

“드세요. 아까부터 컵이 비었는데 눈치 못 채시는 것 같길래.”

…이 카페는 커피를 다 마시면 바로 나가야 하는 게 에티켓인가? 벽면에 혹시 그런 문구가 써 있나 둘러보던 재하는 의아한 눈으로 다시금 알파를 바라보았다.

그런 에티켓이 있다고 해도, 왜 이 알파가 저에게 커피를 사는 건지 모르겠다. 가게 사장이 주는 서비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재하는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게 사장님이십니까?”

“아, 그건 아니고….”

“여보, 오늘도 내 옷 입고 나왔네?”

그때였다. 누군가 재하의 등 뒤에서 그를 껴안듯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관자놀이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내려앉듯 느껴지는 바다 소금 향에 재하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아, 오셨어요.”

재하는 태건을 돌아보며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웃음이 많은 편은 아닌데 근래 들어 그만 보면 그냥 웃음이 나왔다.

싱긋 웃는 재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태건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이번에는 입술에 입을 맞춘 뒤 말했다.

“뭐야, 커피? 버려. 배 속에 애는 어쩌고 카페인이야.”

…배 속에 뭐? 놀란 재하가 되묻기도 전에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번쩍 일으킨 태건이 그를 대신하여 테이블 위에 있던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아직도 멀거니 서 있는 알파를 흘끗 보며 말했다.

“가라, 그냥. 결혼했고 애도 있다잖아.”

알파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져 있었다.

“아…. 아, 실례했….”

“여보는 뭘 또 멍하니 있니. 빨리 옷 입어. 밖에 추워.”

그러나 태건은 그의 사과를 다 듣지도 않고 재하의 코트를 들어 얼른 입으라 종용했다. 등쌀에 떠밀려 옷까지 입은 재하 역시 카페를 나서야 했다.

태건은 먹던 컵을 정리해 퇴식구에 내려놓으며 자료와 태블릿 PC까지 단번에 챙겨 아직 얼떨떨한 재하를 부드럽게 카페 밖으로 이끌었다.

그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뭔가를 물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 재하는, 가만히 방금 있던 일을 복기하다 무슨 상황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뭔가를 깨달은 뒤에는, 아연한 안색이 되어 한 번 더 카페의 출입문을 돌아보았다.

“길거리에서 살 거 아니면 가자, 좀.”

태건이 그런 그의 손목을 잡아끌어 얼른 가자는 듯 재촉했다. 재하는 제게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아 입을 여러 번 달싹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

태건이 재하의 뺨을 살짝 눌러 고개를 정면으로 다시금 돌리게 한 뒤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거 뭐. 수작 부리던 거?”

“수작….”

수작이라니. 커피를 건넨 상대는 알파였고, 이재하 자신 역시 알파였다. 불시에 일어난 사고처럼 태건을 사랑하기 전까지, 재하는 같은 알파에게 일말의 감정도 느껴 본 적 없었다. 그건 상대들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감정이 있다고 해도, 우성 알파인 재하에게 호승심이 들어 정복해 보고 싶다는 객기가 다일 것이다.

-라고 재하는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시선을 해석한 답안은, 학창 시절 내내 훌륭한 성적을 유지하던 이재하답지 않은 오답이었다. 많은 알파가 그를 따르고 존경하다 못해 감정까지 품고는 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주위에 넘쳤기 때문에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에 덤비지 않았다. 덕분에 재하의 착각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르지 못할 나무 앞에 줄 서 있는 구경꾼들의 가장 끝자락에 서야 했던 태건이야말로, 재하의 그런 점을 공략하여 끝끝내 옆자리를 얻어 낸 수혜자였다. 다른 알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관심도 없던 사람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태건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냐는 얼굴을 한 채, 검지로 재하의 콧방울을 툭 건드렸다.

재하는 약간 민망해졌다. 오메가로 변하는 와중이라 그런가, 별일을 다 겪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건 없는 일이라, 얌전히 태건에게 손목이 잡힌 채로 걷던 재하는 몇 걸음 못 가 또 멈춰 섰다. 지난 일들 중, 미심쩍었던 사건들이 연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 그게 다….”

요즘 들어 다른 알파들이 부쩍 말을 걸기 시작했던 게 떠올랐던 것이다. 수영장에서도, 오늘처럼 카페에서도, 하다못해 장을 보기 위해 갔던 마트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다 알파였고, 오메가나 베타 여성들이 말을 거는 경우가 가끔 있어도 알파가 그러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재하는 그것이 스몰 토킹의 일종인 줄로만 알았다.

수영장에서는 접영을 잘한다는 칭찬과 함께 다가온 알파가 다음에는 시간을 맞춰 같이 시합해 보자고 했었다. 재하는 웃는 얼굴로 거절했다. 장태건이 가슴에 울혈이 맺힐 정도로 여기저기 빨아 두면 나흘은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당신 때문에 수영을 못 하니,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걸 굳이 말리지 않는 것이 이재하가 장태건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 때문에 웃는 얼굴로 거절한 것인데, 아쉬운 태도로 몇 번 더 왜 묻는지 알 수도 없는 사소한 질문들을 하길래 대충 대답해 주다가 풀장을 떠났었다.

장을 보러 갔을 때도 엇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벤트 중이라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증정해 준다는 문구가 적힌 작은 카드가 붙여져 있는 상품 앞에서 고민하고 있자 혹시 자신과 나누면 어떠냐고 알파 하나가 말을 걸어왔었다. 재하는 웃으며 거절했다. 상품은 냉동 군만두였는데, 어차피 그냥 사가도 뱃골이 큰 장태건이 다 먹을 테니 낭비는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게 모두 상대의 수작 아니었나 싶어졌다. 이재하는 그저 근심거리가 사라지고 태건과 합가하며 얼굴에 즐거운 기색이 떠올라, 전보다 사람들이 저에게 말을 걸기가 편해진 줄로만 알았다.

오메가들이 말을 걸던 것도, 있는 집 자식이라는 걸 딱히 밝히지 않고 다니던 학부 시절이나 태건과 신혼 초 단꿈에 젖어 있을 때가 다였다. 캠퍼스는 기회의 땅이니 상대가 다소 굳은 얼굴을 하고 다녀도 상관없는 용기 있는 오메가들이 도전했을 것이고, 신혼 초에는 얼굴이 헤실 풀어져서 다녔을 때라 누군가 말을 붙이기에 쉬웠을 것이다.

그 외에 다가가기 쉽지 않은 인상이라는 건 재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것들이 모두 일종의 플러팅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미인 남편 두고 사느라 노심초사 걱정이 많아요, 내가.”

태건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재하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옆구리에 딱 붙이며 쯧, 혀를 찼다. 그는 다소 불만에 찬 듯한 눈으로 재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왜 세탁해 둔 옷을 입어. 당신 입으라고 챙겨 둔 건 어쩌고.”

“그건… 아침에 나오다가 기름때가 묻어서….”

서로의 페로몬으로 각인을 안정시키려고, 두 사람은 자주 옷을 바꿔 입고는 했다. 재하의 옷은 태건에게 좀 작은 편이라 출근할 때 입기에는 알맞지 않아 주로 홈 웨어를 바꿔 입고는 했는데, 태건은 재하에게 외출 시에도 본인의 옷을 입으라고 요구했다.

그가 출근 전 잠시 입었다 벗어 둔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늘도 그가 벗어 둔 얇은 캐시미어 니트를 입고 나오려던 재하는 차의 주유구가 열려 있길래 그걸 닫다 손에 기름때가 묻은 걸 인지하지 못하고 옷에까지 묻혔다.

시동 버튼을 누른 다음에 발견해 그대로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장태건의 드레스 룸에서 비슷해 보이는 니트를 빼 온 건데 그걸 또 어떻게 들켰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하가 보기에는 아침에 입었던 것이나 이 니트나 구분 가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뭘 입든 재하에게는 다소 커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키 차이는 대략 반뼘쯤인데도 불구하고 근래 들어 재하의 근육량이 빠져 그런 건지 옷이 묘하게 커 보였다. 태건이 입으면 딱 맞을 만한 크기를 재하가 입으니 묘하게 순순한 분위기를 내고는 했다.

근래 들어 마음이 편해진 덕분에 재하의 분위기는 더없이 유해져 있었다. 품이 큰 니트를 낙낙하게 입으니 그런 분위기가 가중된 것 같았다. 그러니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덤벼들겠지.

태건은 각인을 해도 신경 쓸 게 많은 자신의 남편을 보다가 다시금 고개를 내려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길거리에서 그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재하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다음엔 내 페로몬 묻은 거 입어. 아님 지금 묻혀 줘? 차에서 한 발 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점심 먹기로 했지 않습니까.”

재하가 살짝 질린 낯으로 대꾸했다. 태건은 피식 웃으며 허리를 조금 더 끌어당겨 안았다. 꽤 쌀쌀한 날씨 핑계를 대며 더 붙으라고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재하는 저 나름으로 열심히 태건 옆에 붙어 보아도 더 붙으라 하니 살짝 당황했지만, 그게 얼굴에 티가 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태건은 그 기색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낄낄거렸다.

“알겠어. 더 안 괴롭힌다, 진짜로.”

상관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태건이 즐거워 보여 재하 역시 픽 웃었다. 그러다가 아까 일이 생각나 그를 올려다보았다.

“배 속에 애, 는 무슨 얘기입니까.”

카페 안에서 태건이 알파에게 한 말에 대해 물었다.

“뭘 무슨 얘기야. 자지 새끼들 떼어 내는 데는 유부남이다, 애 있다 하는 게 최고지.”

그가 하품을 쩍 하며 대답하고는 몇 걸음 더 걸어 재하를 인근 식당 건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깔끔한 한정식집이었는데 음식이 소담하고 맛이 딱 떨어져 먹을 만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재하는 그렇구나 싶어 그것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식사 자리는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웠다. 장태건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그릇을 비우면서도 게걸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게끔만 양껏 먹었다.

보다 보면 저절로 재하 역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게 되었다. 바쁜 와중에 끼니를 때우려고 아무것이나 입에 넣는 건 재벌이나 일반인이나 비슷할지도 모른다.

재하는 회사에서 야근을 하며 한 김 식은 도시락을 제일 많이 먹었었다. 그때는 그냥 몸을 움직일 에너지가 필요해 먹는 일이 많아, 소중한 사람과의 식사가 즐겁다는 것도 잠시 잊은 채였다. 그러다 신혼 초에 그와 무언가를 만들어 먹기 위해 요리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점점 즐거워졌던 것 같다.

재하는 그가 제 앞접시에 얹어 준 보리굴비 살점을 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했다.

“그, 라면 가끔 끓여 주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태건 씨 바쁜 건 알지만….”

“라면이 뭐, 밀반죽까지 해 와야 끓일 수 있는 건가. 먹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테이블 아래로 발을 뻗어 재하의 구두 끝을 톡 쳤다. 장난스레 타박하는 듯한 그 작은 움직임에 재하 역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은 라면을 먹고 싶은 게 아니라, 그날의 분위기가 계속 생각났다. 그의 마음을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얼떨떨하던 자신과 밀도 있게 밀려들던 태건의 태도들이 울리던 밤.

누군가의 사진 앞에서 밤새 향이 타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재하는 그때의 모든 것들이 좋았다. 그냥 그날의 모든 것들이 가끔 생각나 태건이 끓여 준 라면을 먹고 싶은 것뿐이었다. 일종의 추억하기에 가까운 식욕이었다.

그도 그런 걸 느꼈을지 모르겠다. 태건은 여전히 말없이 재하의 앞에서 꽤 수려한 젓가락질로 생선 살을 바를 뿐이었다. 얇고 투명한 생선의 잔가시들을 헤쳐 가며 발라낸 수고스러운 살점은 모두 재하의 접시 위로 올라왔다.

그걸 보며, 재하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 이를테면, 아까 전 그가 했던 말에 대해서 말이다. 배 속에 아이라는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각인 이후로 두 사람은 임신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도 저도 꽤 바빴던 데다가 합가하여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컸다.

각인을 안정시키기 위해 내내 붙어 있던 3주간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리해야 할 일들이 꽤 많아 정신이 없었다. 사촌 고모들이 재하를 불러 자문을 요구할 때도 있었다.

그 3주간, 서로를 탐하며 지내느라 바빠 잠시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까지 들었었다. 큰고모님께 말해 기업의 전용기를 타고 제주도 별장에서 3주를 보냈다면 좋았겠지만, 그냥 한남동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저를 위해 사 둔 집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집을 마련하려고 개처럼 일만 한 남자가 어이없고 안쓰러웠다.

그러니 그 집에서 더 즐길 날이 남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태건은 더 큰 집으로 옮길 생각을 하는 듯했다.

더 큰 집이라고 하니 자연스레 가족 계획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하는 혹시 태건도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하고 추측했다. 당시에 태건이 보인 부정적인 반응을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의논할 상대를 앞에 두고 거기서 더 생각하는 것도 시간 낭비이지 싶어 혼자만의 고민을 마친 재하는 그날 식사를 마친 뒤 태건을 회사로 돌려보내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좀, 얌전히 있어. 이제 내 거잖아.”

이전한 장한의 사옥 주차장에 차를 대놓았었는데, 배웅한답시고 따라 내려오더니 기어코 조수석에 올라타 입맞춤을 요구했다. 이재하가 자신의 것이 되었으니 입맞춤 정도는 하게 해 달라는 말이었다.

가볍게 입만 맞춘 뒤 떨어져 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본인 회사에서 그러는 것이 민망하지도 않은지, 숨을 크게 내쉬며 귓불을 물어 오는 것이 아닌가. 재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슬슬 떨려 오는 척추에 난감해졌다.

각인 이후 태건은 속된 말로 발정 난 개에 가까웠다. 전에도 딱히 담백하게 섹스를 하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점점 더 집요해지고 게걸스러워졌다.

재하는 태건의 방식이 변한 게 아니라, 어쩌면 그게 바로 그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재하에게 행하는 것들은 모두 노골적이고 추저분하면서도 애정이 듬뿍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바지춤에서 꺼낸 제 성기를 손으로 문지르며 재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헉헉거리고 있지 않은가.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표 이사가 사옥 내 주차장에서 이러고 있다는 걸 들켰다가는 어떤 구설수에 오를지 아찔한 건 재하뿐이라는 듯, 제 좆을 문지르고 있는 태건의 손길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끄트머리에 물이 배어 나와 찔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재하는 그가 요구하는 키스를 피하지 못하면서도 곁눈으로 언뜻 보이는 그의 검붉은 귀두가 투명하게 젖어 있는 걸 보고 등골에 소름이 일었다.

그러다가 그의 기둥을 문지른 손에 감겨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재하는 쫓아오듯 입술을 비비는 태건을 밀어내며 당황했다.

“태, 태건 씨, 잠시만….”

“왜, 좀만 더-.”

그의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도대체 그동안은 무슨 정신으로 이성을 유지하고 산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재하는 그를 떼어 내며 말했다.

“…그거, 제 손수건 아닙니까?”

성기를 감싸고 있는 천은 전에 재하가 그에게 주었던 손수건이었다. 어이가 없어 묻자 거친 숨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로 태건이 대답했다.

“맞는데.”

“그걸 왜…. 왜 그걸로 거기를 문지르고 있는….”

물음이 끝까지 나오지도 않았다. 너무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가져가 잘 사용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손수건을 성기를 감싸고 문지르는 것에 쓰다니. 재하로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용도였다.

정액이 튀어나와 옷을 더럽히는 것이 걱정되었다면 귀두와 요도구를 틀어막으면 될 일인데 그 부위는 또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누가 봐도 손수건을 이용하여 수음하고 있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하가 황당해하자 태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걸로 딸 치면 기분 죽여.”

“…….”

재하는 말을 잃었다. 그들이 합가하여 시간이 꽤 지나는 동안, 두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를 탐했었다. 그런데도 …을 치다니. 그와의 섹스가 버거워 체력이 모자란 저와는 달리, 그 후에도 힘이 넘쳐 혼자 자위했다는 말로 들리는 건 제 억측일까.

그렇다면 대체 언제? …아니, 궁금하지 않았다. 재하는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태건은 여전히 그의 목덜미를 핥고 턱을 빨아 대며 신음했다. 윽윽거리는 막힌 신음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그걸 귓가에 불어오는 뜨거운 호흡과 함께 느끼고 있는 재하의 얼굴에도 홍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태건이 사정했다. 어느새, 손수건은 옆에 둔 채로 티슈를 뽑아 귀두를 틀어막고 있었다. 태건은 재하의 쇄골에 이마를 박고 부들부들 떨어 댔다. 재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그의 손짓에, 태건이 또 한 번 몸을 떨더니 이내 숨을 훅 내뱉었다. 재하는 입을 다물까 하다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물었다.

“…그럼 여태껏 그걸로 내내….”

차마 끝마칠 수 없었던 뒷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건이 대답했다.

“여기에 당신 향 배어 있는 거 알아? 당신이 가슴에 품고 다닌 거라 생각하면 흥분돼.”

손수건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것은 기본 에티켓인데, 그것이 누군가의 성적 취향이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재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어져 피식 웃으며 태건의 뺨에 입술을 붙였다.

“저랑 하는 걸로는 부족합니까? 혼자 …수음까지 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회사에서 한 발 빼고 가야 당신 덜 힘들지.”

태건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재하가 오메가로 변하는 과정에서 미묘하게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재하는 놀라 되물었다.

“제 체력이요?”

“두 번 사정하면 축 늘어지잖아. 자는 사람한테 박는 거 같아서 그것도 꼴리긴 한데, 굳이? 같이 즐기는 편이 좋던데.”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탈진감이 들었다. 오늘치 충격적인 이야기는 모두 들은 것 같았다. 재하는 이제 그만 집으로 향하여 지친 심신을 다스리고 싶어졌다. 하루 종일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회사에서 저를 떠올리며 제 손수건으로 수음하는 광경 같은 건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재하가 홀로 번뇌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태건은 저 혼자 아래를 처리하더니 퍼스너를 채우고 벨트를 잠그며 재하의 뺨에 또 한 번 쪽 하고는 담백하게 차에서 내려 주었다. 나머지는 이따 집에서 하자는 말도 함께였다.

재하는 대답하지 않고 간신히 손만 흔들었다. 그런 다음 누가 볼세라 사옥의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그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내려 두었던 창문을 올리자마자 차에 고여 있는 태건의 페로몬 때문에 뒤늦게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짙은 바다내음과 해당화의 꽃 내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페로몬은 재하의 비강에 달라붙어 그가 숨 쉴 때마다 각인한 알파의 존재를 일깨우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운전하는 내내 안전벨트에 닿아 짓눌리는 유두가 간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신호 대기를 위해 서 있을 때도 핸들을 꽉 쥔 상태로 턱을 악물었다. 다리 사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반쯤 발기한 것이 바지춤을 팽팽하게 만들어 괴로웠다.

결국 집에 도착한 뒤 샤워를 하며 재하 역시 수음을 해야 했다. 몸의 변화가 생기며 점점 더 살구색으로 짙어진 유두와 성기를 연신 문지르며 태건의 이름을 부른 뒤 절정을 맞이했다.

그러고도 발기가 죽지 않아 반쯤 일어선 채로 가운만 입고 침대에 기대어 누워 아까 보던 것들을 마저 보았다.

글자와 숫자들을 읽다 보면 저절로 흥분이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도 아니었다. 한 자세로 오래 있다가 불편하여 몸을 뒤척일 때마다 발기한 성기가 허벅지와 복근에 부딪혀 야릇한 감각을 이끌어 냈다.

그거 만져 주고 마냐고 항의라도 하듯 일어선 유두도 마찬가지였다. 샤워 가운에 닿을 때마다 달큼한 아릿함을 주는 유두 때문에 괴로워졌다. 재하는 결국 보고 있던 서류를 제 얼굴 위에 얹어 둔 채로 자괴감에 휩싸였다.

사춘기 어린애도 아니고 이제는 아예 뒤까지 젖고 있었다. 태건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며 온 것이 문제인 듯했다.

각인은 안정이 된 상태라고 했는데, 두 사람의 금슬이 너무 좋은 탓인지 서로의 페로몬에 과하게 흥분하는 것 같다고 의사는 설명했다.

당분간은 계속 이럴 거라고 했기 때문에 불편함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재하는 결국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온몸에 미열이 나는 사람처럼 서성이다가 다시금 침대에 누워야 했다.

아래가 질척하게 젖어 다시 한번 씻어 내도 마찬가지였고, 그 상태로 옷을 입는 것도 웃긴 일이라 태건이 퇴근할 때까지 내내 가운 차림이어야 했다.

중간에 일어나 얼음도 넣지 않은 브랜디를 먹기도 했는데, 흥분감은 여전히 그대로라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침대에 누워 태건을 맞이해야 했다. 흥분의 존재감이 여실한 아래를 가운으로 겨우겨우 가린 채 말이다.

그가 집에 온 소리가 들리자 재하는 민망함을 참을 수 없어 이불 안으로 숨어 버렸다.

낮에 제 손수건으로 자위하는 태건을 두고 어이가 없다는 듯 굴어 놓고, 이제는 자신이 그러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태건이 방문을 열어 보며 말했다.

“뭐야, 좆 빠지게 왔더니 자나 보네.”

말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타박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져 재하는 저도 모르게 유두가 찌릿거렸다. 그것도 기가 막혔다. 다정한 음색을 듣고 흥분하는 몸이라니. 나가 죽고 싶어졌다.

원체 성적인 욕구가 드물었는데 태건과 살다 보니 몸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재하가 그렇게 또 한 번 번뇌에 휩싸여 있을 때, 침대의 매트리스가 푹 꺼지더니 몸 위로 음영이 생기는 듯했다. 태건이었다.

재하는 숨을 죽였다. 그가 저를 들여다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걱정에도 불구하고 태건은 그냥 고개를 숙여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그 뒤 태건은 담백한 태도로 침대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가 버렸다. 아마, 욕실로 향한 듯했다. 재하는 두 눈을 살짝 떠 욕실 불이 켜진 걸 바라보았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재하의 몸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태건이 욕실에서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밤이 이른데도 불구하고 재하가 누워 있자 걱정됐는지 태건이 대충 물기만 닦은 채 샤워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재하는 또 한 번 숨을 죽여야 했다. 이불 안으로 들어온 태건이 그를 끌어안았다. 차마 깨어 있다는 걸 티 내지 못해 뻣뻣하게 딸려가 안겨야 했다. 당혹스러움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거 이벤트 같은 건가?”

태건이 재하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인 채 낄낄거리며 웃었다. 재하는 두 눈을 감은 채로도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손을 뻗어 완전히 발기한 제 성기를 꾹 쥐어 왔기 때문이다.

“읏-.”

“뭐야, 안 잤어?”

그가 벌떡 일어나 제 샤워 가운을 벗었다. 이재하는 자는 척했던 것도 잊은 채 경악이 담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왜 벗는….”

“입고 하는 게 취향이야? 여태 그런 말 없었잖아.”

재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태건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려 이불을 걷어 그 안에 누워 있던 재하를 당겨 올렸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성기게 묶여 있던 가운의 끈이 벌어졌다. 판판한 복근 위로 샤워 가운의 끈이 툭 떨어졌다. 태건이 그 아래를 슬슬 간지럽히듯 문지르기 시작했다.

신음이 한숨처럼 나왔다. 근육이 살짝 빠져 몸이 전만큼 좋지 못한 것이 걱정이었다. 밝은 불을 걱정하여 뒤척이자 그가 재하에게 어디 불편한 곳이 있냐 물었다.

“…불이, 너무 밝습니다.”

“우리 대낮에도 씹 떴잖아. 갑자기 왜 내외해.”

“그게 아니라… 최근에는 몸도 안 좋아지고….”

“몸이 안 좋다고? 어디 아파?”

태건이 재하의 이마에 입술을 붙이며, “열은 없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재하는 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형질 변환 때문에… 근육이 자꾸 빠져서….”

“자꾸 빠져서 뭐.”

“보기에 좋은 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태건이 답지않게 잘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확인차 질문하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당신 몸이 좋은 것 같지 않아서 그렇다고?”

“…….”

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열등감은 없으면서도 기준 자체가 높아 그 기준에 자신이 부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재하는, 오늘도 사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태건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허공을 보며 하, 숨을 내뱉더니 재하의 손목을 끌고 가 제 국부에 닿게끔 했다.

“무슨….”

손이 닿자마자 놀란 재하가 태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것은 단단하다 못해 이미 축축했다. 선액에 젖어 있던 것이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됐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 놀리려고 그런 말 하는 건 또 아닌 것 같고.”

“놀리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난 그저….”

형질 변환된 뒤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재하의 자기 인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가까웠다. 재하가 생각하던 자신과 실제의 괴리가 격차를 넓히고 있던 것이다.

심하게 차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언뜻언뜻 보기에 덩치가 줄고 근육량이 없어진 몸이 익숙하지 않았다. 원래도 피부가 하얗고 색소가 옅은 편인데, 요즘의 재하는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나 하얘 보였다. 꼭 햇빛 하나 보지 않고 자란 도련님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부러 태닝 숍에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타구니나 유두 역시 모두 분홍빛이 섞인 살구색으로 변해 가고 있어 조금 괴로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하가 보기에 지금 자신의 몸은 조금 재수 없었다. 그 자신이 극히 보수적인 취향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른 이가 이렇게 허여멀건 얼굴에 팔꿈치까지 분홍색이라고 한들 재하와는 상관없는 얘기겠지만 본인이 그런 식으로 변해 가자 왠지 재수 없어 거울을 보는 것이 꺼림칙했다.

거부감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태건에게도 그렇게 비칠까 두려웠다. 그 말을 들은 태건이 짜증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자지에 털 나기도 전에 나한테 찍힌 거 잊었어? 당신이 박명순처럼 무식하게 우락부락해졌어도 상관없어.”

“명순 씨처럼은 좀….”

“지금 박명순 산적같이 생겼다고 무시한 거지?”

재하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픽 웃음이 났다.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불을 켠 채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재하는 일단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불을 꺼 달라고 했다.

태건은 고개를 저었다.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 말해 줄게.”

“안 해 줘도 됩니다.”

“일단 여기 색이 존나 진해졌어.”

태건이 재하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더니 혀를 넓게 펴 회음부를 핥아 올리며 말했다. 안 해줘도 된다고 분명 대답했는데 말을 들어주지 않는 태건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던 재하는 놀라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모았다. 태건은 머리가 눌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붙이고 핥기 바빴다.

“읏, 잠깐-.”

재하의 밑을 빠는 건데도 혼자 흥분한 건지 태건이 그곳에 대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재하의 성기가 갑작스레 힘을 받더니 그대로 빳빳해져 아랫배에 퉁 튕겨 올랐다.

어느새 고여 있던 것인지 모를 선액이 질척하게 아랫배에 묻어 나왔다. 재하는 고개를 젖힌 채 앓았다. 태건의 혀가 회음부를 진하게 문지르다 말고 떨어졌다.

다 젖은 입술을 핥으며, 태건이 베개를 끌어와 재하의 허리 밑에 대어 주고는 그의 양 오금 밑을 꾹 눌러 엉덩이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가 이 자세를 할 때마다 너무 느끼는 것이 싫었던 재하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앓았다.

“흐윽-. 읏-.”

“아….”

앓는 소리는 태건에게서도 들렸다. 츠읍 거리는 소리와 함께였다. 재하의 비문을 빨아들이면서 제 성기를 문질러 자위 중인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문질러 쳐 대는 소리가 심하게 났다. 재하는 그럴 때마다 태건의 전완근이 움찔거리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내전근에 심이 섰다. 회음부가 묵직해진 것이다.

태건이 그를 알았는지 들린 엉덩이를 살짝 치며 웃었다.

“벌써 조이면 어떡해.”

대답하지 못했다. 성기가 다시 한번 꺼덕이며 맑은 물을 쪼록 뱉었기 때문이다. 재하의 뺨이 붉어졌다. 태건이 그를 보다가 다리 사이에 제 몸을 끼운 채로 내려와 재하에게 키스했다. 그러면서도 몸을 위아래로 움직여 국부끼리 비벼지게끔 만들었다. 불뚝 선 재하의 유두가 태건의 단단한 가슴팍에 스쳐 앵두 알처럼 단단해지기도 했다.

“당신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에는 아래 젖는 게 더 쉬워진 거 알아?”

“읏, 흐…. 모릅니다….”

“하, 안쪽이… 존나 찐덕거린다니까. 윽-.”

태건이야말로 근래 들어 신음이 늘었다. 전에는 집요할지언정 자신의 욕구를 한 꺼풀 참는 느낌이 들었었다. 당시에는 못 느꼈는데, 각인 이후에 저를 탈탈 털어먹는 걸 보고 든 생각이다.

턱을 악물고 참던 것들을 그대로 내뱉기도 했고, 사정을 참지 않아 전보다 횟수가 더 많아졌다. 발기가 죽지 않은 채 사정하는 횟수가 많기는 했지만 지금은 넣자마자 내벽 안에 사정한 뒤 정액을 윤활유로 쓰기도 했다.

의사는 정액에 섞인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으로 오메가의 성기로 변해 가는 안쪽을 적시는 게 중요하다 첨언했다. 원래도 콘돔을 쓰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아예 안쪽에 정액을 들이붓다시피 했다. 머금은 채 안에 박은 걸 빼지 않고 후희를 즐길 때도 있었다.

원래도 섹스 중에 재하를 바라볼 때는 눈이 살짝 풀려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넣지도 않고 애무 중간에 저 혼자 흥분하는 일이 잦아졌다.

태건은 제 성기를 잡은 채로 그대로 귀두를 재하의 비문에 밀어붙였다. 덜 자란 사과 알처럼 퉁퉁하게 부푼 것이 안을 젖히며 들어왔다.

“흐아-!”

“헉-.”

태건이 턱을 악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목덜미가 젖혀지며 동맥이 피하에 가까워진 것인지 경동맥 부근이 팔딱팔딱 뛰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재하는 제 위에 올라탄 알파의 무게감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척였다. 안쪽이 심하게 간지러워졌다. 잔뜩 젖은 점막이 태건의 성기에 착 달라붙어 그 기둥 위로 올라온 혈관을 긁듯이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은 태건이 눈꺼풀 안쪽에서 눈동자가 뒤로 까뒤집히는 걸 느끼며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하복부에 혈관이 잔뜩 돋았다. 계속해서 성기로 피가 몰리는 듯했다.

재하가 그런 태건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자 안에 처박힌 성기에서 물이 튀어나왔다. 재하는 안을 달구는 태건의 선액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체액에 묻은 짝알파의 페로몬이 점막에 닿자마자 재하를 극치로 몰아세웠다.

안쪽 허벅지 근육이 발발 떨며 태건의 몸통을 조이고 있었다. 태건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선액을 싼 뒤에 안쪽에서 빠금 거리는 요도구를 타고 재하의 애액이 태건의 요도 안으로 침입한 것이다. 점막에 닿은 짝오메가의 페로몬에 태건 역시 극한까지 흥분했다.

“훅…. 흐윽-.”

“아, 아아-! 흐응, 읏-!”

두 사람은 또 한 번 허리를 움직이지도 못한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각인 이후에는 관계를 맺을 때마다 매번 이랬다. 두 사람은 온몸을 핥고 지나가는 쾌감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서로를 붙든 채로 견뎌야 했다.

태건의 등에 사선으로 그어진 흉터 위에 재하의 짧은 손톱이 긁어 둔 붉은 줄이 생기기도 했고 태건이 너무 꽉 껴안은 탓에 재하의 어깨 위로 살짝 멍이 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눈이 돌아가는 쾌감을 인내하며 떨다가 여러 번의 사정 후에 감각이 조금 가라앉은 다음이면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의 페로몬에 너무도 쉽게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각인을 나눈 다른 알파와 오메가들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태건과 재하는 정도가 심했다.

여유 있게 서로를 탐하고 싶은 날에도 감각이 주는 홍수에 잠겨 들어 허우적거리다 보면 재하가 먼저 지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뒤늦게 정신 차린 태건이 정액과 애액이 범벅된 성기를 발기시킨 채로도 군말 없이 재하를 닦아 주고 재워 준 뒤 혼자서 남은 욕망을 처리해야 했다.

재하는 그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으며, 어쩐지 귀엽기도 했다. 오늘은 끝까지 상대해 주고 싶어 극치감이 조금 가라앉자 아래서 살짝씩 움직여 봤는데 태건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그냥 좆물 다 빨아 먹어라. 가만히 못 있어?”

그게 정말 짜증을 내는 건 아니라는 걸 아는 재하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킥킥거렸다. 그럼 또 게게 풀린 눈으로 쳐다보던 태건이 끙, 하고 앓으며 재하의 쇄골에 제 이마를 툭 얹어 둔 채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안쪽에서 태건의 것이 꿈틀거리나 싶더니 극치점에 대고 정액을 쏘아붙이고 있었다. 내벽이 살짝 따뜻해지는 느낌과 함께 방대한 양의 정액 때문에 묵직한 물리감이 들었다.

재하는 그럼 태건의 엉덩이를 쓸어 주었다. 태건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거긴 왜 만져.”

“…제 거니까 한번 만져 봤습니다.”

이제는 재하도 그런 말에 다소 뻔뻔하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태건이 허리를 살짝씩 움직이며 킥킥거렸다.

부부 사이의 섹스에는 가끔씩 웃음이 끼어들었다. 재하는 그런 관계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더없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그 감동을 상대에게 전할 생각은 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감동을 자신에게 선사한 상대를 더 사랑하는 것은 재하의 성격적 특성이었다. 태건은 이재하의 그런 점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건 그가 재하를 오래도록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를 갖지 못해 들개처럼 쏘다니던 시절 동안, 장태건은 속으로 몇 번이나 제 품에 안긴 이재하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태건은 재하를 상상함으로써 그 시기들을 견뎌 낸 것이다. 그 상상들이 더없이 뻔뻔하며 제 주제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성기에 내벽 안쪽을 허락한 상대를 마음껏 사랑하기 위해 살아온 날들이었다.

재하는 점막을 쿡쿡 찌르는 태건의 것에 얕게 신음하며 그의 엉덩이를 발뒤꿈치로 지그시 눌렀다. 못 견디게 간지러운 기분에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해 그런 것이었는데 더 잘하라는 압박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태건의 허리짓이 격해졌다.

그가 재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헉헉거렸다. 숨소리조차 사랑스러웠다. 관계가 끝나면 아이에 대해서 확실히 상의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하여 피임하고 있지는 않지만, 재하의 몸이 알파에서 오메가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임신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짝알파와 짝오메가의 각인이 생성된 상태지만 몸은 아직도 변화 중이었다. 형질 변환이 완료되면 재하의 몸도 임신할 준비를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간헐적으로 오던 러트기가 사실은 슈도-히트 사이클, 즉 위-발정기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와 같은 히트 사이클이 형질 변환 완료 후 더 찾아올 수 있다고 들었다.

임신은 그 후에 가능할 것이라는 게 의사의 설명이었다.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임신에 대한 생각을 하겠지만, 재하는 어쩐지 빨리 태건과 상의하고 싶었다.

그가 임신에 대해 부정적이기는 해도, 자신은 원래 알파의 몸으로 타고나 건강한 체질이니 나쁘지 않을 거라고 설득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다가 태건에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들킨 재하는 몰아치는 그를 감당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트는 새것처럼 보송했고 자신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두꺼운 팔이 제 허리에 올라와 있었다. 그가 등 뒤에서 뻗은 팔을 베고 있었는데 태건이 무거울까 봐 살짝 내려놓은 뒤, 몸을 돌려 그를 마주 껴안았다.

“…더 자.”

“내가 깨웠어요?”

“어. 그러니까 더 자자고.”

태건이 대충 대답하며 재하를 끌어안았다. 팔이 저릴 것 같아 제 머리를 내려 둔 건데 또 한 번 팔베개 해 주며 품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두 눈을 깜빡였다.

아침 수영을 가고 싶었는데 온몸에 울혈이 가득 남아 버렸다. 지난밤 태건이 잔뜩 씹어 둔 곳이다. 그가 두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이 가슴팍에 닿아 간지러운지, 태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운동 갈 생각 하지 말고. 아니면 이따가 나랑 가볍게 뛰러 가든지.”

“알겠어요. 더 자요.”

이번에는 재하가 태건을 다시 재우기 위해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등을 토닥이듯 쓰다듬었다.

태건은 금세 잠이 들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남자라도 근래 들어 피곤하기는 했나 보다. 재하는 어둠 속에서 간간이 보이는 그의 윤곽에 안심했다.

그의 일정한 숨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재하 역시 잠이 왔다. 총각 시절에는 누군가와 한 침대를 쓰는 건 상상도 못 했었다.

잠귀가 밝아 금세 깨어 버렸기 때문에 잠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다는 생각으로 결혼하면 각방을 쓰자고 요구할 참이었다.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각방을 사용하는 건 부부 사이에 아무런 문제 없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태건과의 결혼생활은 조금 달랐다. 신혼 초부터 그의 옆자리에서 잠드는 일이 잦았다. 밤새 섹스를 통해 시달리다 보면 아침까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가 침대를 떠나도 눈을 뜨지 못했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다 보니 한 침대에서 잠이 들어도 상관없어졌다. 오히려 그가 없는 침대가 허전하기도 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장태건이면 괜찮아지는 일들이 이재하에게는 너무 많아진 것이다.

속으로 그와 같은 일들의 개수를 헤아리다가, 재하 역시 가물가물 잠이 들었다. 암막 커튼 사이로 새벽의 푸른 여명이 들어왔지만, 두 사람의 침대 근처에는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 * *

새롭게 해가 시작되자, 재하의 첫 출근을 앞두고 두 사람은 강원도로 향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설산을 타고 내려오는 스노우 보더를 TV로 보던 재하가 그러고 보니 올해는 못 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태건은 스키를 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재하는 그 말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저도 몰래 그가 안쓰러워져 제가 알려 줘도 괜찮겠냐 물었었다.

‘그럴래요? 그럼 강습료는 몸으로 내도 되나?’

장태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느물거렸다. 그 밤에는 또 섹스를 했고 이번에는 TV가 틀어진 거실 소파 앞에서 그의 성기에 꿰뚫려야 했다.

바지를 다 내리지도 않은 채라 다리가 묶여 어딘가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소파의 등받이를 잡고 엎드려 뒤에서 그의 것을 받는 일은 유신 전자 시절 이사실에서 했던 섹스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처럼 재하의 다리가 풀렸고 위는 벗지도 못하고 밑으로는 바지와 속옷을 무릎에 걸친 채로 태건의 부축을 받는 자신이 한심하고 민망했다. 태건은 꼭 어린아이의 뒤처리를 도와주는 것처럼 사정한 뒤라 축축하게 젖은 채 말랑해진 재하의 성기를 손으로 몇 번 더 짜내어 주었다.

재하가 못 견디고 고개를 젖혀 뒤통수를 그의 쇄골과 가슴팍에 문지를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스키를 타러 가자는 말은 섹스로 끝났지만, 그 짧은 약속이 성사되기는 했다. 어쩐지 당초에 계획보다 대인원이 되었지만 말이다.

“흐흐, 저는 동생님한테 배우면 됩니다.”

정길의 그 말에 재하는 한쪽 눈썹이 저절로 솟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이재호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성격이 못 된다는 것은 손위 형제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강원도행에 이재호와 정길이 끼어든 것은 어제 오후의 일로, 재호로부터 간만에 스파링 하자고 귀찮은 연락이 너무 많이 와, 하는 수 없이 체육관에 나갔다가 성사된 일이었다.

주말에도 스파링할 수 있냐고 하길래 스키를 타러 간다고 했더니 저도 끼워 달라고 생떼를 부렸다. 재하는 거기서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장태건을 몹시 싫어하는 제 이복동생이 굳이 나서서 여행에 끼워 달라 조르는 게 수상했기 때문이다.

유신 호텔에서 세운 평창의 스키 리조트는 설질이 좋아 겨울이면 가끔 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재하가 안 된다고 해도 혼자 따라올 것 같아 그러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정길이 어디서부터 끼어든 것인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단출하게 둘만 떠나자고 했던 태건이 정길을 데려온 것도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재하가 넌지시 물어보니 태건은 짜증까지 냈다.

“몰라. 몇 대 패 놔도 굳이 오겠다는 걸 어떻게 말려. 명순이 새끼도 저녁에 온다니까 대충 놀게 냅두다가 밤에는 우리 둘만 온천 가든지.”

태건은 드물게 짜증 난 얼굴을 풀지 않았다. 둘만 올 거라고 기대한 것 같아 귀엽기도 했다.

그리고 근처에 온천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언제 온천은 또 알아 온 건지 궁금했다. 어쨌든 태건에게 스키를 알려 주기 위해 초급 코스에서 내렸는데 리프트 타는 곳쯤에서 정길과 재호가 아웅다웅하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둘이 왜 저렇게 싸우는 걸까. 그러고 보니 김장 담글 때도 둘이서 계속 투닥거리다가 어느새 사라지기도 했었다.

재하는 막연히 무언가 기억날 것 같다가도 휙 사라지는 바람에 약간 답답한 기분이 되었다. 두 사람에 관한 무언가를 잊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뭐더라…. 한참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때마침 태건이 딱 한 번 알려 준 동작으로도 무리 없이 숏 턴을 해내는 걸 보고 감격하는 바람에 또 한 번 잊어버렸다.

“아, 지금 완벽했어요.”

재하는 폴의 끈을 손목에 끼운 채로 박수까지 쳤다. 사진을 찍어 둘 걸 아쉽게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거 재미있네.”

“그럼 바로 중급 코스 가 볼까요?”

“무서운데. 자기가 나 잡아 줄 거야?”

태건은 무서움 따위는 털끝도 느끼지 않는 얼굴로 느물거리며 말했다. 그의 표정만 봐도 장난이라는 걸 알아 재하는 어이가 없었다. 대답하지 않고 먼저 초급 코스를 내려가 버리자 뒤에서 곧잘 따라 내려왔다.

어릴 적부터 전문 선수에게 배운 것이라 재하의 폼은 완벽했고, 그걸 그대로 사사한 태건의 A자 모양 역시 훌륭했다. 몸을 잘 쓴다고 생각은 했지만 운동 신경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재하는 살짝 신이 나, 그와 함께 권투도 배우고 수영하는 상상까지 했다. 지난번에 수영을 알려 달라고 했었는데 그건 태건이 바빠 아직 시도하지 못한 참이었다.

재하는 드물게 신난 얼굴로 고글을 고쳐 썼다. 리프트로 가는 줄에 서자 태건이 짧게 턴을 돌아 재하의 옆자리에 붙어 섰다. 아직은 컨트롤이 조금 부족하여 태건의 스키 톱이 재하의 스키판 위로 올라왔다. 엉킬까 봐 발목을 휙 돌려 빼내자 태건이 재하를 빤히 보다가 그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엉겼다.

“나 넘어질 것 같아.”

“잘 서 있잖습니까. 너무 기대면 넘어져요.”

“무서우니까 손잡아 줘.”

심드렁한 말투로 하는 말이 그거였다. 재하는 스키 장갑까지 뺀 채로 손을 내미는 태건을 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반사광이 심한 고글을 쓰고 있어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표정까지 빤히 보이는 듯했다.

초급 코스라 한들 경사 있는 표면에서 잘만 타더니 평지에 가까운 길에서 갑자기 무섭다니 신뢰가 가지 않았다.

재하는 웃음이 나왔지만, 저도 장갑을 벗고 폴을 한쪽 손으로 옮겨 잡은 다음 태건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가 재하의 손가락을 깍지 껴 맞잡았다.

“태건 씨는 보드를 배워도 되는데 제가 보드는 잘 못 탑니다.”

“당신이 못 하는 것도 있어?”

태건은 정말 의아한 듯 물었다. 재하는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저야말로 못하는 것이 투성이인 사람인데, 태건은 가끔 재하를 완벽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고 대답하자 태건이 흠, 목을 울렸다.

“아냐. 그냥 스키 탈래.”

다른 이한테 배우는 게 마땅치 않아 그럴까. 재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뻐근해져 웃고 말았다.

뺨까지 가리고 있던 넥워머도 내린 상태라 그 웃음을 태건에게 들킨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내려 재하의 볼에 입을 맞추려다가, 툭 튀어나온 서로의 고글이 깡 하고 부딪쳤기 때문이다.

재하는 어쩐지 계속해서 웃음이 났고, 태건은 고글과 모자를 휙 벗어 버려 엉킨 머리를 하고도 잘도 재하의 뺨에 입술을 붙여 댔다. 리프트 줄이 짧아져 그들의 차례가 돌아왔는데도 말이다. 결국 안전 요원이 놀리듯 휘파람을 불고 나서야 두 사람은 리프트에 올라탔다.

날씨가 청명했다. 밤에는 눈 소식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밤늦게 그와 한 번 더 스키를 타러 올지, 아니면 온천에 갈지 차후 정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재호와 합류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리조트 근처에 있는 강원도식 두부 전골집이었는데 민물새우로 담근 토하젓으로만 간을 하여 국물이 맑은 편이었다.

잘 먹는 태건과 정길 때문에 전골은 두 냄비를 따로 시켜야 했다. 전골냄비 안의 국물이 끓어오르자 앞접시에 전골을 덜어낸 정길이 저도 모르게 재호에게 그릇을 내밀려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재하의 앞에 접시를 놔주었다.

태건이 정길의 뒤통수를 살짝 때렸다.

“잘하는 짓이다. 아주 눈 뒤집혀서는.”

“흐흐, 죄송합니다. 형님.”

정길이 헤죽 웃었다. 재호의 얼굴이 붉어진 듯해 재하는 태건의 앞으로 제육볶음이 든 철판을 밀어 넣다가 물었다.

“너 얼굴 탄 거 아냐? 원래 여름보다 겨울철 눈을 더 조심해야 하는데.”

설원에 반사된 햇빛에 반사되어 피부에 화상을 입었나 싶었다. 재호나 저나 피부가 하얀 편이라 타지 않고 빨개질 때가 많아 묻자 괜히 짜증을 낸다.

“뭐, 뭐가. 그냥 밥이나 먹지 웬 참견이야.”

까칠한 반응에 재하는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렸다. 원체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놈이라 더 참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사는 그렇게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리조트로 돌아가려 야외 주차장에 서 있는데 정길이 먼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십쇼. 저랑 동생님은 스키 한 번 더 타러 가겠습니다.”

“아, 그러실래요?”

쉬다가 온천이나 갈까 고민하던 재하가 생각 없이 대꾸했다. 옆에 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태건이 볼을 홀쭉하게 만든 채로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재호와 정길을 보더니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재하에게 물었다.

“저대로 둘만 두게?”

“아, 같이 온천이라도 갈까요?”

“…뭘 또 온천을 같이 가. 그 말이 아니라… 아니, 됐다. 무슨 상관이야.”

뭔 소리인지 모르겠어, 재하는 그냥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제가 알아야 할 만한 일이라면 태건이 알려 주겠지 싶었다.

식당에서 스파로 가는 길에는 태건이 운전을 한다기에 한잔 얻어 마신 옥수수 막걸리 때문인지 그가 태우는 담배에 유난히 시선이 많이 갔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씨를 보고 있자, 킥킥 웃으며 태건이 재하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와 연기를 넘겨주었다.

불시에 공격받아 콜록거리자 손을 내리더니 엉덩이를 두들겼다.

“그러게 왜 그렇게 빨고 싶은 얼굴로 봐요. 더 두꺼운 거 물려 줄게. 보채지 말고.”

그 말에 숨겨진 성적인 함의에 재하는 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무어라 투닥거리던 재호와 정길이 한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태건이 다 태우지도 않은 장초를 야외 재떨이에 던져 넣더니 숨을 훅 크게 두어 번 몰아 쉬어 폐 안쪽에 고여 있던 담배 연기를 빼내고는 옷을 툭툭 털었다. 제 목덜미를 끌고 가 담배 연기를 건네줄 때는 언제고 꼭 저런 식으로 뒤늦게 매너를 챙기는 그 모순이 좋았다.

재하는 자연스레 조수석에 올랐고 태건이 곧이어 따라 탔다. 두 사람은 온천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 * *

목적지는 리조트에서 멀지 않은 호텔 스파였다.

골프장과 함께 붙은 곳이라 시설이 나쁘지 않았다. 호텔 역시 유신 계열이었고, 지난번 태건을 피해 나름 가출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풀장의 수질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천 전에 수영 하자고 하려다가 그냥 피로만 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편백 나무 탕 하나를 비워 달라고 했다.

마사지를 받는 게 어떠냐고 묻자 태건이 싫어했다. 그냥 저에게 받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제가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태건의 피로가 풀렸으면 했던 거라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저야말로 태건에게 안마를 해 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샤워 후 탕 안에 들어간 두 사람은 나란히 어깨를 붙이고 앉았다. 태건은 젖은 앞머리를 모두 뒤로 넘긴 채 하품을 크게 했다.

“피곤해요?”

새벽 일찍 운전하고 온 사람이 난생처음 스키를 탔으니 긴장이 풀려 피곤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재하는 그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태건이 피식 웃으며 목덜미 부근의 긴장을 누그러트렸다.

“아, 시원해. 남편밖에 없다.”

딱히 시원한 것 같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재하는 더 열심히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하면 또 잘하는 것만 있는 이재하에게 안마 역시 그러한지, 태건이 노곤한 얼굴로 고개를 젖혔다.

그걸 바라보다가 물기 젖은 귓불에 입술을 붙였다. 재하 역시 태건에게 그런 식으로 입을 맞추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감촉에 한쪽 눈썹을 올린 태건이 그를 돌아보더니 아예 몸을 틀어 재하의 허리에 두 팔을 두르고는 목덜미에 제 고개를 묻었다.

“결혼했는데 또 결혼하고 싶어.”

“그게 무슨….”

“당신 안에 들어가 있는데도 또 들어가고 싶을 때랑 똑같아. 목말라 죽겠어.”

처음 말에는 목적어가 불분명해 자신과 결혼했는데도 다른 이와 또 결혼하고 싶다는 줄 알고 몸을 굳혔던 재하는, 이어진 뒷말에 피식 웃으며 손을 그의 뒤로 둘러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태건의 등 근육이 긴장을 푼 듯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애 취급하는 것 같단 말야.”

등을 만져 주는 게 꼭 어린애 어르는 듯하다는 말이었다. 그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태건이 재하의 목덜미를 입술로만 살짝 물며 불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좋다는 거야. 손 놀리지 말고 더 쓰다듬어.”

그제야 그것이 남자의 어리광임을 짐작한 재하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갔다. 더 토닥이듯 손바닥을 움직이다 척추를 쓸어 주자 몸을 움찔 떤다.

“안 되겠네. 그만 만져. 싸겠다.”

언제는 쓰다듬지 않고 뭐하냐고 하더니. 재하는 그 말에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태건이 본인이 사정하는 게 웃기냐고 따지더니 상처받았다며 재하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재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태건이 재하가 팔뚝을 탕의 턱에 짚은 채로 상반신을 일으키는 걸 보더니 휘파람을 휙 불었다.

밑에 놓인 약탕용 향낭을 집어 올리려던 재하가 갑작스러운 휘파람 소리에 그를 돌아보자 태건이 깍지 낀 손으로 제 후두부를 짚어 팔베개하듯 하고는 씩 웃었다.

“경치 좋네.”

재하는 그제야 제 둔부가 그를 향해 있다는 걸 알고 어이가 없어져 빨개진 얼굴로 금세 탕 안으로 주저앉았다.

“…장태건 씨.”

“왜요, 여보. 저 섰어요.”

“알아서 가라앉히세요. 여기 공공장소입니다.”

“그래? 사람이라고는 당신이랑 나밖에 안 보이는데. 좀만 빨아 보면 안 돼?”

안 된다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재하가 태건에게 향낭을 집어 던졌다. 태건이 공중에서 향낭을 잡아채고는 또 한 번, 씩 웃었다.

그 느물거리는 태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크게 터졌다. 태건이 그걸 오케이 사인으로 알아들은 것은 조금 곤란한 일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두 사람은 함께 온천을 즐겼다.

나중에는 태건의 무릎 위에 재하가 올라가 있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벗은 엉덩이 골 사이에 그의 묵직한 성기가 와 닿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반사적으로 나온 애액 때문에 물이 더러워질까 걱정되기도 하고, 애써 그를 밀어냈는데 제 뒷사정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태건은 상관없다는 듯 가슴팍에 달린 유두를 베어 물다가 재하의 손바닥에 이마가 밀렸다. 그가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할 수 있는 게 뭐야.”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목욕이 답니다.”

“상심이 크다. 난 씹질도 하고 자기 뒤도 빨아 보려고 했는데.”

“그만…. 그만 말해요, 태건 씨.”

태건이 재하의 질색하는 말투가 웃긴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킥킥거렸다. 재하 역시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의 뒷머리를 쓸어 주다 물었다.

“…태건 씨.”

“왜.”

재하는 몇 번 망설이다가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 가질까요?”

태건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의 가슴팍에 묻은 얼굴을 떼어 내지도 않았다.

각인 당시 그가 보인 반응이 떠올라 재하는 말없이 뒷머리를 만져 줄 뿐이었다. 한참 지나서야 고개를 떼어 낸 태건이 재하를 올려다보며 그의 턱에 키스했다.

“당신이 나 같은 놈 애를 갖는 게 싫어.”

그가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 알 것 같아서, 재하는 태건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 채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럼 정자 제공만 하시면 됩니다.”

“까분다.”

태건이 피식 웃었다. 그가 재하를 안고 있던 팔을 둘러 으스러질 듯 껴안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애가 갖고 싶어?”

“우리 둘만으로도 행복하겠지만… 태건 씨랑 가족을 이루고 싶은 게 더 커요.”

그 말에 태건이 읊조리듯 따라 했다. 가족, 하고 조음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낮고 또 묵직했다. 재하는 그의 외로워 보이는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미간에 입을 맞춰 주었다.

입술에 물기가 달라붙었다. 태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천천히 결정해 보십쇼. 태건 씨 결정에 따를 겁니다.”

“…애 낳는 건 당신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결정해. 위험할 수 있다는 소리 못 들었어?”

“의사들은 원래 위험하다는 소리부터 해요. 그래야 소송을 피할 수 있으니까.”

아픈 적이 별로 없는 데다가 위 각인에 대한 진찰은 김 원장 같은 돌팔이에게 맡겼던 태건이 살짝 헷갈린다는 얼굴을 했다.

그가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저에게만 보여 주는 얼굴인 것 같아 귀여웠다. 재하가 피식 웃으며 태건에게 다시금 말했다.

“올해 결혼기념일까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알겠어.”

드물게 순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태건이 다시금 재하를 꽉 끌어안더니 말했다.

“그럼 이제 떡 쳐도 돼?”

“안 된다니까요.”

어이가 없어 그를 밀어냈다. 무릎에서 내려오려는데 쫓아와 발목을 잡길래 뿌리치려다가 물이 편백 나무 탕 밖으로 요란하게 흘러넘쳤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을 멍하니 보던 태건이 풀린 눈으로 다가와 재하의 몸 위로 엎드리듯 끌어안았다. 발기한 성기가 물속에서 재하의 아랫배를 찌르고 있었다. 등을 쓰다듬어 주자 몸을 또 벌벌 떤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극히 원하느라 성감이 극에 치닫는 부작용을 따로 또 같이 견뎌 내고 있었다. 언젠가는 열락도 가라앉을 것이다.

재하는 오히려 그때가 기다려졌다. 지금처럼 뜨겁지 않다고 해도 그를 향한 사랑과 그가 주는 사랑은 모두 이렇게 따뜻하고 안온할 것이다.

세상 모두에게 자극적일 수 있는 그의 알파는 오로지 재하에게만은 안정적인 따스함을 나눠 줄 것이다.

이재하는 그 순간을 고대했다. 태건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 여겼다.

* * *

온천을 나와 사우나에 들어간 후, 야외에 있는 노천탕에도 나가 봤다. 밤사이에 눈이 내린다더니 해가 지자마자 눈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맞으며 노천탕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해 소원을 빌었는지 묻자, 태건은 제 소원은 모두 이뤘다고 했다.

“욕심이 없네요.”

재하가 장난처럼 대꾸하자 태건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욕심 장난 아니라 당신이랑 결혼한 거야. 내 욕심이 간장 종지만 했어 봐. 방구석에 처박혀서 당신 뉴스 나온 거 보면서 자위나 하다가 좆 빠져 뒈졌을걸.”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가 정신이 어지러워 입을 다물었다. 노천탕에서도 장난을 치려고 하길래 겨우 뿌리친 재하는 스파의 프라이빗 욕탕을 이용하는 이들을 위한 탈의실에서 머리를 말렸다.

태건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몇 번 털고 그냥 나가려고 하길래, 의자에 앉혀 두고 직접 드라이를 해 줬다. 그가 앉은 자세고, 그 앞에 재하가 서 있자 또 한 번 장난이 시작되었다. 가슴을 몇 번 꼬집힌 후에야 태건의 머리를 다 말려 줄 수 있었다.

온천에서 나온 다음에는 태건의 핸드폰으로 명순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 몇 개를 처리하고 뒤늦게 내려온 명순은 두 사람의 운전기사를 하려고 온 것이라 했지만, 재하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는 바람에 이미 재호, 정길 일행과 합류해 있다고 했다.

풀빌라 형식의 리조트인지라 바베큐장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명순이 장을 봐 두겠다고 했다. 저녁 정도는 다른 이들과 같이 먹자고 설득한 후에야 태건은 좁혔던 미간을 풀었다.

“눈치 없는 새끼들 천지야.”

“다음에는 우리 둘만 갑시다. 스위스로 가도 될 것 같은데.”

오늘 처음 스키를 배운 실력에도 불구하고 곧잘 따라 하는 것이 다음 해에는 경사가 가파른 알프스의 스키장으로 가도 될 것 같았다. 내년을 기약하는 재하의 말에 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분이 좋아진 듯해 재하도 살짝 웃었다.

뭘 더 사 가야 하나 싶다가 그냥 빈손으로 온 두 사람이 풀빌라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코너를 돌 때였다.

말소리가 들렸다.

“음, 하지, 마아-.”

“하, 씨발, 이재호, 재호야…. 형이랑 살자, 제발, 응?”

“읏, 또라이야, 너? 내가 너랑 어떻게 살, 앗, 잠깐…, 거기-.”

바베큐장 바로 옆, 식사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 둔 나무 벤치 테이블 위에 눕다시피 한 알파 둘이서 게걸스레 입을 맞추고 있었다.

재하는 태건의 손을 잡고 걷다가 그대로 멈췄다. 온몸에 소름처럼 불쾌감부터 일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건 그다음 일이었다. 손아래 형제가 다른 상대와 키스하고 있는 걸 목격하는 일은 놀랍도록 불쾌한 일이었다.

재하는 그 때문에 뒤늦게서야 재호의 입술을 빨고 있는 상대가 정길이라는 걸 깨닫고 눈이 커졌다. 태건이 낄낄 웃으며 재하의 두 눈을 그제야 가려 주었다.

“뭐야. 진짜 몰랐어? 난 모른 척하는 줄 알았는데?”

모른 척이라니. 재하의 안색이 아연해졌다. 몰랐다기보다는 까먹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그러한 기류를 발견한 것은 벌써 몇 년 전에다가 그사이에 저와 태건의 일에 사력을 다하느라 그 외의 것들은 신경을 꺼 버렸던 것이다.

사고가 다소 기계처럼 시스템화되어 있는 이재하는 위기의 상황에서는 그것을 타계하기 위한 회로 외의 모든 것들의 전원을 꺼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배다른 동생의 연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얘기다.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재하와 옆에서 낄낄거리는 태건을 그제야 발견한 것인지 재호가 소리를 꽥 지르며 일어났다.

“혀, 형-!”

잘못했을 때만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버릇은 나이를 한두 살 더 먹어도 어디 가지를 않았다. 잔뜩 젖어 붉게 부풀어 오른 재호의 입술을 봤다가, 못 볼 걸 봤다 싶어 눈을 질끈 감은 재하의 미간 사이에 골이 깊게 패었다.

“공공장소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혀, 형 난 그게 아니라-.”

“이사님! 제가, 제가 먼저 그런 겁니다. 제가 재호한테, 아니, 이사님 동생분께….”

정길이 재호를 막아서며 말했다. 한쪽 눈썹을 올린 재하가 그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뒤편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명순이 커다란 덩치로 고개를 쭉 내밀며 당황한 얼굴로 서 있다가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소갈비, 안 드시는 분 없죠?”

결국 바베큐 파티는 숯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끝났다. 재하는 재호와 정길을 앉혀 두고 말없이 그들을 압박하다가 가족 단위 이용객들이 오는 바베큐장에서 그런 짓을 한 것에 대한 반성문을 받고 끝을 냈다.

태건은 피식 웃으며 한쪽에서 명순과 함께 화투를 치고 있었다. 그날 밤, 정길은 재하의 앞에 자진해서 머리를 박고 엎드려뻗쳐를 시도했다가 명순에게 끌려 나갔다.

재하는 재호에게 언제부터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나름 형으로서 중요한 말을 하기는 했다.

“결혼할 거면 어머니는 너 알아서 설득해라. 난 모르는 일이야.”

“겨, 결혼은 무슨-! …형이 좀 도와주면 안 돼?”

재호는 언제나처럼 형이 아끼는 프라모델을 깨 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재하는 이것 또한 자신의 일거리로 추가될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재하가 한숨을 쉬자 그걸 어떻게 인식한 것인지 이재호는 금세 울상이 되어 울먹였다.

“나, 나도 밀어내 봤단 말이야. 근데 저 바보가 너무 끈질긴 걸 어떡해…. 나 정말 안 그러려고 했는데…. 혀엉….”

“…너 울어?”

재호는 그때부터 아예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자신도 고민이 많았다는 둥 아직 확실하게 사귀는 건 아니라는 둥, 알파끼리 이러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둥 횡설수설했다. 재하는 이재호의 모든 울먹거림에 집중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상황을 파악할 만한 정보를 추려내어 물었다.

“정길 씨랑 관계도 맺었어?”

“으악-! 그런 건 왜 물어봐!”

사실 자신도 묻고 나서 후회했다. 속이 매슥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재호의 반응을 보니 두 사람은 이미 나갈 수 있는 진도를 모두 뺀 상태 같았다. 재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지 마! 형도 내가 빡대가리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되었는데 그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태건이 벽면 시계를 흘끗 보더니 그들 곁으로 다가와 재하에게 그만 일어나자 말했다. 형에게 다양한 어휘로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찡찡거리고 싶었던 이재호는 대번에 꽥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가! 나 형이랑 말 안 끝냈다고!”

엉엉 우는 재호를 흘끗 보며, 태건이 재하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친 채로 물었다.

“쟤는 몇 살인데 저래?”

“태건 씨랑 동갑입니다.”

방을 나서려는 그들의 뒤에서는 재호가 여전히 울고 있었다. 어지간히 서러워 보여 뒤돌아보려다가 태건이 성질을 내길래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묵기로 한 객실로 돌아와야 했다.

재하는 그날 밤, 과거의 순간순간을 떠올리며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리고 그때도 이상했다며 중얼거리다가 으르렁거리는 태건에게 목덜미를 물렸다.

관심을 주지 않으면 금세 험악해지는 와이프의 등을 토닥이며, 재하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같이 여행을 가자며 달랠 수밖에 없었다.

“태국에서 오프로드 오토바이를 빌린 다음에 계속 달리는 건 어떻습니까. 해변이 나오면 해수욕도 하고….”

“다 좋은데 제발 둘만 가자.”

질린 음색으로 대꾸하는 태건의 말투에 재하는 작게 킥킥거렸다. 그 웃음소리는 그대로 그들이 베고 있던 베갯잇에 고여 들었다.

그들의 오후는 그렇게 저물어, 어느새 깊은 밤으로 향하고 있었다.

외전 1. 개들의 오후 <끝>

개의 가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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