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17/18)

6.

강동혁은 경기 남부 중 외곽에 있는 도시에서 이제 막 개원한 페로몬 전문의로, 대출받아 차린 병원이 너무 자랑스러워 딱히 야간진료를 하지 않아도 저녁 늦게까지 홀로 병원에 남아 있고는 했다.

진료 대기실 벽면에 달린 커다란 TV로 예능 프로를 틀어 두고 맥주를 까는 일도 다반사였다. 굳이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경상도가 본가인 그는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아직 의대 학자금도 갚지 못해 집이 무척 좁았기 때문이다.

의사 면허만 들이밀면 대출을 꽤 해 주는 은행들이 많기에 병원은 차렸지만, 아직 집 살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레지던트 때까지 모아 온 돈은 개업 자금에 보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 나름으로는 휘황찬란하다고 생각하는 병원과 본인 자취방의 괴리가 너무도 심해 집에 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강동혁은 오늘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을 배달시킨 뒤 진료 대기실 소파에 누워 TV를 볼 작정이었다.

웬 덩치들에 의해 병원이 점령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이 이해가 안 가나?”

“그, 그런 건 아니지만….”

키가 멀대같이 큰 데다가 덩치가 산만 한 스킨헤드의 남자와 강동혁보다는 크지만 동행한 남자보다는 작은, 눈매가 무척이나 날카로운 남자가 강동혁의 작은 의원을 점령한 것은 20분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 닫아 둔 자동문을 두들기길래 강동혁은 당연히 배달시켰던 음식이 왔다고 여겼다.

불투명한 자동문으로 커다란 남자가 서 있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을 때도 굴절된 조명의 빛에 헬멧을 쓴 배달원이 커다랗게 보인다고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킨헤드의 남자는 키가 족히 2m는 되어 보였다. 일반적인 남성의 키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 했던 것이다.

그렇게 문을 열어 주자마자 두 남자는 강동혁의 병원 안으로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왔다.

“왜, 왜, 왜, 왜 이러세요!”

“왜를 몇 번 말하는 거야. 진료받으러 왔으니까 준비나 하세요.”

눈꼬리가 날카로운 쪽이 킥킥 웃으며 강동혁에게 말했다. 강동혁은 당황했다. 진료라니. 눈알을 데굴 굴려 흘끔 시간을 보니 오후 9시였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건지, 눈매가 날카로운 남자가 다시금 말했다.

“아, 늦은 거 아는데 사정이 급하다니까? 진료비는 섭섭하지 않게 줄 테니까 얼른 준비 좀 해 봐. 귀한 분 오시니까 그거 뭐야, 흰 가운 같은 것도 좀 입고.”

강동혁은 지금이라도 경찰을 불러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말없이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안에 든 것이 두툼하여 이음새가 살짝 벌어진 하얀색 종이봉투를 인셉션 데스크에 올려 두었다. 봉투를 향해 살짝 턱짓도 했다. 열어 보라는 뜻인 것 같았다.

강동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것을 열어 보았다. 무게가 묵직해 설마 했는데 5만 원권 지폐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강동혁은 침을 삼켰다.

“야, 명순아. 의사 선생님 진료해 줄 맛이 좀 도시나 보다. 설명드려라.”

눈매가 날카로운 남자는 강동혁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걸 보고는 낄낄거리며 병원에 비치된 정수기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이 병원을 다닌 지 10년은 넘은 단골 환자처럼 내원객들이 먹을 수 있게끔 두었던 믹스커피 봉지를 자연스럽게 찢어 종이컵에 쏟고는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받았다.

강동혁은 떨리는 시선으로 커다란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그럼 환자분 성함이랑 주소, 주민번호를….”

그는 무뚝뚝하고 험악하게 생긴 얼굴로 표정을 풀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다음 오실 분을 진료하면 되는데, 의료 보험 같은 기록 등을 안 남게 하면 되겠습니다. 기록이 남지 않을 거니, 환자 이름도 아실 필요 없겠네요.”

“아니, 그게 말이 되는….”

강동혁이 남자의 말을 부정하려던 찰나였다. 환자의 신상도 없이 진료를 보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레? 왜 말이 안 돼? 진료비가 그렇게 두둑한데 그게 다 의사 선생님 야간 수당인 줄 알았어? 원장님 그렇게 유능해? 허준 환생이야?”

저 멀리서 믹스커피를 타 홀짝거리던 남자가 대체 언제 다가온 것인지 강동혁을 쪼아 대기 시작했다.

강동혁은 눈물이 났다. 허준은 한의학인데…. 굳이 따지자면 난 히포크라테스….

“대답 안 하지.”

“네, 넵-. 준비하겠습니다.”

딱 봐도 절대 일반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남자 둘에 의해 코너로 몰린 강동혁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간호사들도 다 퇴근했으니까 나만 입 다물면 되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들이 귀한 분이 오실 거라 말하며 높임말을 쓰는 걸 보니 조직의 일인자가 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살면서 일반인이 조폭을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강동혁은 조직의 보스가 대체 어떤 이유로 페로몬․내분비계 의원을 찾는지 호기심 반, 오진했다가는 조폭들 손에 문 닫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반으로 덜덜 떨며 곧 도착할 환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강동혁의 예상과는 다르게 진료실에 들어온 이는 정숙하고 말끔한 생김새의 알파였다.

“안녕하세요.”

“아, 네, 네…. 이,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강동혁은 덜덜 떨며 스툴을 가리켰다.

굳이 따지자면 이쪽도 범접 못 할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지만 상상했던 조폭 두목과는 궤가 달랐다.

그는 잘 차려입은 캐주얼 정장에 얇은 캐시미어 소재의 목까지 올라오는 흰색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한 차림에도 건강한 체구가 살짝씩 엿보이는 것이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 어울렸다.

그러나 작정하고 꾸민 느낌은 나지 않아 연예인이라기보다는 극히 드물 정도로 잘생긴 일반인 같았다. 굳이 직업을 유추하자면 큰 사업을 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표정과 몸짓에서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하얀 얼굴의 알파는 연하게 분홍빛인 입술을 갖고 있었다. 자칫 여려 보일 수 있는 그 색마저 남자다운 생김에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였다.

언뜻 냉엄한 기운이 엿보이는 인상의 미남자가 살짝 웃는 얼굴로 진료실에 들어와 스툴에 앉는 동안, 강동혁은 약간 멍한 상태로 그의 생김을 훑고 있었다. 실례인 줄도 모르고 빤히 볼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너무도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이 좋다는 말 외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 죄송합니다, 선생님. 양해해 주셨다고 들어 감사했습니다.”

잠깐 멍하니 있던 강동혁은 그게 저를 향한 인사인 줄 그제야 깨닫고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네, 넵-.”

적당히 채워진 물 잔처럼 넘치지 않는 사과와 감사에 강동혁은 크게 긴장하여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음 이탈까지 해 버렸다. 저도 모르게 성대가 조인 듯한 소리가 나오자, 그제야 진정하려 노력하며 헛기침했다.

흠흠, 목을 가다듬는데도 눈앞의 알파는 들어왔을 때처럼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강동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 어떤 증상이….”

부드러운 분위기로 동혁이 긴장하지 않게끔 아주 살짝 웃고 있던 그는 자신의 증상을 설명할 때는 무감한 어조로 돌아갔다. 다른 이의 몸 상태를 설명하듯 감정이 깃들지 않는 목소리였다.

“페로몬 교란이 일어난 듯합니다. 고유의 페로몬 향이 변한 데다가 러트기와는 다른 증세가 일어나는 고열기가 있기도 했습니다.”

“…어, 그럴 리가….”

남자는 딱 봐도 우성 알파였다. 그것도 튼튼한 페로몬 샘을 갖고 있는 듯했다. 검사를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알파치고 슬림한 체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알파가 아닐 리 없었다. 베타인 자신에게까지 은근히 느껴지는 압박감이 쟁쟁했다. 다른 베타들보다 알파를 많이 만난 탓에 발전한 감에 불과했지만, 저런 느낌을 주는 이들은 임상 경험상 100퍼센트 알파였다.

강동혁의 부정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가 테이블 위에 약병을 올려 두었다. 강동혁은 병을 집어 들었다.

그는 강동혁이 집어 든 것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페로몬 교란제입니다. 유신 제약에서 연구 중인 약인데, 이와 비슷하지만 효과가 좀 더 떨어지는 약물을 장기적으로 복용해 왔습니다.”

질감 좋아 보이는 입술이 움직이는 걸 멍하게 보고 있던 강동혁은 그의 말에 놀라 새되게 소리쳤다.

“네에?”

강동혁은 안경을 고쳐 쓰며 생각에 빠졌다. 페로몬 교란제에 대한 연구 논문은 많았다.

알파를 오메가로 만드는 약물이나 오메가를 알파로 형질 변환시키는 것은 인류의 마지막 연구 주제라고 할 만큼 뜨거운 감자였다.

“아니 이걸 어쩌다 장기 복용을….”

“…모르고 복용한 일입니다.”

이걸 왜 장기간 복용해 왔냐는 말에 모르고 복용한 것이고 기간은 꽤 오래된 듯하다 말하면서도 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메가로의… 형질 변환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쉽지는 않지만-. 일단 몇 가지 검사를 좀 해 봐야겠습니다. 초음파로 자궁의 생성 유무도 검사해야 하고. 이쪽으로 오시겠-.”

남자에게 초음파실을 안내하려던 때였다. 갑작스레 원장 진료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문짝만 한 남자가 한 명 더 등장했다.

‘알파다. 그것도 극우성 알파.’

강동혁은 그가 등장하자마자 기색에 질려버렸다. 제 영역 안에 들어온 수컷들은 모두 짓눌러 죽여버리겠다는 듯 위협적인 페로몬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의 기운이 베타인 자신에게도 찌를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알파나 오메가도 아닌 베타의 피부를 무겁게 짓누를 수 있는 건 극우성 알파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절대 일반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검은색 셔츠에 노타이, 그 위로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데다가 깔끔하게 다듬은 앞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있는데도 전혀 단정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단조로운 옷을 입은 채로도 화려하고 위험해 보일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굵은 눈썹과 수려한 듯 위험해 보이는 눈매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한계를 두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오싹했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자, 웃는 듯 마는 듯 있던 알파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피었다.

‘아니 저 분위기에 저 압박감을 보고도 웃을 수가 있나…? 같은 우성 알파라 버티나 봐. …돈 돌려줄걸.’

강동혁은 빠르게 후회했지만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때, 알파가 대뜸 입을 열었다.

“남자 의사네?”

그는 딱 한마디 했을 뿐이지만 강동혁은 바로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인천 앞바다에 던져지는 상상까지 완료한 강동혁 대신 스툴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다.

“초음파 검사 할 거랍니다. 잠시 있어요. 다녀올게요.”

간단한 말이었지만 다정하고 다감하게 들렸다. 단정한 생김새의 미남이 살짝 풀어져 웃는 얼굴을 저도 모르게 빤히 보고 있던 강동혁을 향해 험악한 분위기의 알파가 말했다.

“이 병원은, 보호자도 같이 들어오세요, 이런 말도 안 해 주나?”

“보, 보호자도 같이 들어오세요.”

“그래요, 같이 들어갑시다.”

알파가 휙, 휘파람을 불며 강동혁을 따라 초음파실로 들어왔다.

기계와 베드를 놓을 공간이면 충분했던지라 평수를 많이 뽑지 않았던 초음파실에 알파 둘이 들어오자 그 여느 때보다 꽉 차 보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쟁쟁하던 압박감이 이제는 아예 밀폐된 좁은 공간에 느껴지자 아직 대출도 안 끝난 병원까지 버리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강동혁은 자신이 원장이며 아직 의료기기값도 갚지 못했다는 걸 떠올려야 했다. 남은 대출 금액을 속으로 몇 번이나 외친 후에야 얼른 진료한 뒤 이들을 보내자고 다짐할 수 있었다. 그는 몇 번을 더듬거린 후에야 초음파 검사 과정을 안내하기 위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베드에 누우시고 초음파 겔을 배에 발라야 해서요…. 셔츠를 걷어 주시면….”

“수작 아냐? 어디서 유부남 셔츠를 걷어라 마라….”

강동혁은 갑자기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놀라 히익, 소리까지 질렀다.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억울함이었다. 제가 궁금한 건 유부남 셔츠 안이 아닌 자궁의 생성 유무입니다, 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말이라고는 힉, 하는 숨소리뿐이었다.

강동혁이 바들바들 떨고 있던 때, 단정하게 생긴 남자가 베드에 누우며 피식 웃었다.

“태건 씨. 선생님께 그런 농담을 하면 어떡합니까.”

태건이라 불린 알파와 강동혁은 동시에, ‘농담 아닌데.’와 ‘농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자세로 누운 남자가 정장 팬츠 안쪽에서 니트 자락을 꺼내자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강동혁은 떨리는 손으로 폴리 글러브를 끼고 초음파 겔을 남자의 배에 뿌리며 말했다.

“차, 차갑습니다.”

“…….”

남자는 대답을 하지도 움찔 떨지도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꺼 두었던 기계가 세팅을 완료했는지, 내내 떠 있던 의료기 회사의 로고가 사라지며 초기 화면이 나타났다.

베드 위의 남자는 그 아무것도 없는 화면을 주시 중이었고,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알파는 그런 남자를 주시 중이었다.

강동혁은 딱 한 가지만 생각했다.

‘퇴근 말려….’

그러나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강동혁은 떨리는 손으로 검사기를 내려 겔을 남자의 아랫배에 천천히 도포시킨 뒤 살짝 누르듯 문지르며 화면을 주시했다.

그리고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은 침대 위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아, 이런….”

재하는 의사가 난감하다는 기색을 하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보던 화면에서 두 눈을 떼어 내고 그를 바라보았다.

재하가 보기에 화면에는 노이즈 가득한 회색 물체만 꿀렁거리며 뜰 뿐인데 왜 저런 탄성을 내뱉는지 궁금했다.

의사가 검지로 안경을 고쳐 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장기 복용 때문인지…. 이미 자궁이 생성되셨네요.”

“뭐?”

그 소리에 그르렁거리듯 소리를 낸 것은 태건이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로 의사를 내려다보았다. 고압적인 시선에 심약해 보이는 의사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재하는 짧게 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물었다.

“자궁이 생성되었다는 건 제가… 오메가가 되었다는 뜻입니까?”

“아, 그, 그건 아닙니다. 자궁이 제 기능을 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라…. 일단은 페로몬 파형도 검사를 해 보겠습니다.”

의사는 떨리는 손으로 티슈 각에서 티슈를 왕창 뽑아 재하에게 건네더니 좀 더 좋아 보이는 티슈로는 기계를 정성 들여 닦은 뒤 돌려놓았다.

그 과정에서 태건의 눈썹이 살짝 치솟았지만, 재하는 그러지 말라는 듯 태건에게 고개를 젓고는 제 배에 묻은 것을 닦았다.

의사는 곧이어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선을 하나 끌고 와 초음파 기계와 연결한 뒤에 재하의 검지에 알코올 솜을 문질렀다.

“이, 이게 저희 병원에서 이제 그, 최신식으로 돌입한… 독일제 월프 쓰리라는 건데요….”

“짧게 말해. 퇴근 안 할 거야?”

태건이 짜증 난 듯 짓씹으며 말하자 의사가 또 뜨끔하더니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연신 재하의 손가락에 알코올 솜을 문질러 댔다.

“그, 여기에 이제 혈액 방울을 떨어트리면 알파면 알파의 페로몬 파형을, 오메가면 오메가의 페로몬 파형을 검사해 주거든요. 이건 진짜 대학 병원급에만 있는데 제가 이번에 대출을 급하게 댕겨 받아서-.”

“안 궁금해.”

태건이 커다란 주먹으로 초음파 기계의 모니터를 툭 내려쳤다. 본인 딴에는 힘준 것도 아닌 일에 모니터에 살짝 노이즈가 튀었다. 의사가 펄쩍 일어나 기계를 살피다가, 태건의 시선에 다시금 쭈그러든 풍선처럼 스툴에 앉아 들고 있던 선의 끄트머리에 바늘을 끼우고는 재하의 검지를 톡 찔렀다.

“따끔합니다.”

“씨발, 찌르고 따끔하다 하는 건 또 뭐야.”

“태건 씨, 나가 계셔도 됩니다.”

태건이 또 한 번 짜증을 냈다가 재하의 만류에 입을 다물었다. 옅은 바다 내음이 끼치는 걸로 봐서는 화가 난 듯했다.

안 그래도 오늘 오후, 태건은 이익형과 김란희를 상대하며 위협적인 페로몬을 쏟아 내었었다. 아직도 제 옷에는 그의 페로몬이 묻어 있을 것이다. 태건의 차를 타고 이곳에 올 때까지도 그는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재하는 그가 이익형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차에 오른 뒤 어떤 얼굴로 어떤 말을 했는지 떠올렸다.

차 안에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위험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익형의 집은 넓은 편이라 괜찮은 것 같았는데 밀폐된 공간에 둘만 남게 되자 그의 페로몬이 무척이나 요동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가 핸들을 쥔 채로 말했다. 재하는 그의 옆모습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네가 그딴 집에 살았다는 게 열받아.”

“…….”

“진작 데려올걸, 씨발. 누구는 손대기도 아까워서-. 씹, 좆병신 짓만 하고 살았네.”

마지막 말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약간 애매하기도 했다. 재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조금 더 묻고 싶었지만, 그때 태건의 손에 감아 둔 붕대에 피가 흐르는 걸 발견한 탓에 바로 병원으로 향했었다.

병원으로 가 그의 손을 꿰매고 나자, 태건이 이상한 말을 했다.

“나도 당신 말 듣고 대가리 터지게 성질 뻗치는 거 끌려와 줬으니까, 당신도 나랑 어디 좀 가자.”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가 그런 말까지 하지 않아도, 태건이 가자고 하는 곳을 제가 거절할 리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태건은 명순에게 뭐라 전화하는 듯하더니 어느 건물의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한참을 기다린 뒤 이 병원으로 함께 올라왔다.

개인 병원이 야간 진료도 하나 싶었는데 눈치를 봐서는 정길이나 명순이 우격다짐으로 진료를 보게 한 듯했다.

원장 강동혁이라는 이름이 오버로크된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기 전 간판으로 페로몬 전문의라는 걸 알아서 다행이었다. 병원으로 들어가려는 재하에게 태건이 먼저 들어가라 말했다.

재하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같이, 안 들어가요?”

태건은 말없이 재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한 대 피우고 온다는 뜻 같아 그를 보다가 등을 돌리려는데 그대로 손목이 붙잡혀 병원 출입문 바로 옆 벽과 그 사이에 갇혀 키스를 당해야 했다.

조급하고 사정을 봐주지 않는 키스였다. 오늘 이익형을 끌어다 저와 이재호에게 사과시킨 남자답지 않은 초조함이었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저의 알파가 조금 더 편하게 입을 맞출 수 있도록 고개를 살짝 들어 주었다. 그의 등을 쓸어 주기도 했다.

장태건이 잇새로 살짝 한숨을 흘렸다. 그의 한숨 소리가 무척이나 야하게 들렸다. 입을 떼어 냈을 때는, 두 사람 다 입술이 발갛게 물들어 젖어 있었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 있어. 한 대만 태우고 갈 테니까.”

“같이 가요.”

“눈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자지 선 거 안 보여요? 가라앉히고 갈 테니까 들어가 있어.”

그 말에 그의 다리 사이로 저절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멈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병원으로 혼자 들어와 진료실로 향했었다.

아마 보안 문제 때문에 이미 닫혀 있던 병원 문을 열게 한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제가 뭘 걱정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어딘가에서 소문이 새어 나갈까 봐 병원 고르는 것이 어려웠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재하는 병원 안으로 들어오기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다시금 미간을 좁힌 채 초음파실 한구석에 험악하게 서 있는 태건을 바라보았다.

“이제 한 1분만 기다리시면 결괏값이 나올 겁니다.”

의사는 내도록 말을 더듬던 주제에 기계를 자랑할 때는 긴장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설명했던 것처럼, 정말로 대학 병원에서 진료 봤던 때처럼 결과가 금세 나왔다.

의사가 모니터에 출력된 결괏값을 보며 말했다.

“아, 이게 또 애매해서…. 제가 일단은 진료실에서 상세하게 설명드릴게요. 환자분은 정리하신 다음 따라오실게요.”

“…….”

“이, 이번에도 보호자분도 함께 오시면 되, 됩니다….”

의사는 태건의 눈치를 흘끗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태건은 의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재하에게 다가와 아까 전 의사가 기계를 조심히 닦아 내던 고급 티슈를 왕창 뽑아 재하에게 건넸다. 의사가 힉, 숨을 삼키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심약한 의사는 항변할 수는 없었는지, 곧이어 초음파실을 조용히 나가 버렸다. 재하는 그 상황이 약간 어이없기도 하고, 무언가 불만이 많아 보이는 태건이 신기해 티슈를 받아 든 채 겔이 닦이지 않은 곳들을 닦은 뒤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다 닦은 휴지를 태건이 재하의 손에서 뺏어 가듯 가져가 버렸다.

“아, 제가 해도 됩니다.”

“…….”

태건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가 변죽을 두들기는 말이나마 제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재하는 태건을 흘끗 살피다가 그가 다가와 제 셔츠와 바지춤을 정리해 주자 풋 웃었다.

“어린애 아닌데.”

“누가 몰라? 웃긴 왜 웃어.”

그는 으르렁거리듯 말한 뒤 다가와 재하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으며 뒤돌아 먼저 진료실로 향했다. 재하 역시 베드에서 완전히 내려와 구두를 신고 그를 뒤쫓았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의사가 스툴 두 개를 나란히 끌어와 양손으로 권했다. 아마 재하와 태건더러 앉으라는 것 같았다. 재하가 앉자, 태건이 제 몫의 스툴을 발로 퍽 차 버렸다. 바퀴 달린 스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밀렸다가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의사는 놀라 뜨끔한 얼굴이었지만 재하는 그저 그가 앉기 싫어 저러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익형의 집에서 나온 뒤 계속해서 화가 나 있던 태건을 슬쩍 보다가 그의 손을 한 번 잡았다. 태건은 그런 재하를 흘끗 내려다보았지만 손을 빼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금씩 그의 기색이 누그러져 가고 있었다.

의사는 진료실을 꽉 채울 만큼 커다란 알파가 다른 알파의 손을 잡고 있는 광경 앞에서 진땀을 빼며 결괏값 검사를 읊기 시작했다.

“그, 여기 파형을 보시면 이 부분이 오메가 파형과 겹치기는 하는데, 아직 완전히 오메가 파형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거든요….”

의사가 진료실에 있는 파형 디스플레이를 지시봉으로 짚으며 말했다. 재하는 태건의 손을 꾹 한 번 잡았다 놓으려고 했다. 그의 손이 쫓아와 기어코 깍지를 껴 재하의 어깨 위에 두 손을 겹쳐 올려 두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오메가로 형질 변환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두 가지 상태가 공존하는 중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의사의 설명을 축약하자면 이러했다.

재하의 형질 변환은 이미 어느 정도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상태였다가, 중간에 갑자기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난입하는 바람에 신체가 알파로서의 경쟁심을 기억해 내며 알파 페로몬을 끌어내어 외부에서 유입되던 다른 알파의 페로몬과 경쟁했다고 한다.

재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난입했다는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태건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저의 러트기를 챙겼던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태건은 이미 김란희가 제게 형질 변환 약물을 먹인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저를 알파로 머물게 하기 위해 애를 써 준 걸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어깨에 올려진 손에 고개를 살짝 기대자 그가 검지만 툭 올려 볼을 찔렀다. 허물없는 장난이었다.

많이 화나 보였는데 작은 스킨십을 말없이 받아 주는 게 기꺼웠다. 또 그가 극우성이라는 건 몰랐던 사실인데 오늘 처음 알게 되어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의사는 설명을 계속했다.

“파형을 보시면 알겠지만 오메가로의 변환은 멈춘 상태지만, 이는 가변적인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우성 알파와의 각인을 맺어 짝 알파의 페로몬 샤워를 받으면 오메가로 발현시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태건의 알파 페로몬이 이재하를 오메가 형질 변환을 시킬 수도, 알파로 계속 살게 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내내 덜덜 떨던 의사는 설명을 하다가 본래의 직업 정신을 되살렸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일단 각인을 맺게 되면, 형질 변환을 시작했던 신체에서 제 몸을 짝 알파를 맞이한 오메가로 인식할 테니까요.”

각인.

이재하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어째서 각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애초에 너무도 극명한 알파와 알파의 결합이었던지라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인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이 심상치 않았다. 오메가가 되면 장태건과 각인을 맺을 수 있게 된다. 그의 겉껍데기만 붙잡아도 좋을 거라 생각했던 청혼의 날처럼 심장이 뛰었다.

“더 지켜봐야 하긴 합니다. …일단은 제가 환자분의 이전 러트 페로몬 파형도 모르니까…. 오메가가 된다면 임신은 가능하실 겁니다. 자궁이 생성된 상태니까요. 그러나 이건 그저 가능성의 이야기입니다. 이론상으로 봤을 때, 마찰 계수가 0인 쇠구슬이 똑같이 마찰 계수가 0인 평면 위를 영원히 굴러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의사는 실제로 임신이 어려울뿐더러, 된다고 해도 짝알파의 페로몬 샤워가 지속적으로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산모에게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짝알파의 페로몬 샤워가 없다면 더욱더 빨리 위험도가 증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각인…을 하면 오메가가 될 수 있다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그와의 각인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러트기를 맞이하여 아무런 감정적 교류 없이 관계를 맺을 때도 그가 끼고 있는 왼손 약지의 반지가 무척이나 반가웠었다. 각인은 그보다 더 큰 만족감을 선사할 것이다.

재하는 어쩐지 긴장되어 손끝이 저릿거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태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태건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예의 그 심드렁한 얼굴도 아니었다. 얼굴 위에 떠오른 감정을 완전히 지운 듯 그야말로 백지였다. 그 얼굴에 잠시 놀랐던 재하는, 의사가 다시금 설명을 시작하자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자궁이 생성된 상태니까 두 가지 중 택일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 번째, 오메가가 되는 걸 포기하고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알파의 페로몬 샤워를 러트기마다 수여받아 알파로 머무느냐. 두 번째, 오메가가 될 생각으로 알파와 각인하여 짝 알파 되신 분의 페로몬 샤워를 받고 중단되었던 자궁의 성장을 가속시켜 완전히 오메가로 발현하느냐. …위 사항 중에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사가 말을 마치자 진료실에는 침묵이 몰아쳤다.

재하는 어느새 제 어깨에서 손을 떼어 낸 태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문득 그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이 났다. 공중에서 얽혔던 시선과 불현듯 지펴진 제 안의 불길. 갑작스러운 러트를 맞이했던 그날이.

두 사람 다 온전히 이해한 것 같았는지, 침묵을 지키던 의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각인하여 짝 알파의 페로몬을 받게 된다고 해도, 원래 오메가로 태어난 것이 아니니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체내에 생성되어 있던 오메가 페로몬을 모두 잃어 다시 알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부분인데…. 출산이라는 것이 원래 인체에 극도로 부담을 주거든요. 안 그래도 나약해져 있는 상태에 열 달을 지탱했던 오메가 페로몬까지 소실되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건 산부인과의 진료를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때 내내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장태건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일어나.”

“네?”

“못 들었어? 가자고.”

그는 재하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그가 다친 손으로 저를 잡는 것이 마음에 걸려 손목을 빼내려 하자 짧은 신음이 나올 정도로 세게 틀어쥐어 왔다.

결국 재하는 태건의 손에 끌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하가 갑작스레 일어나는 바람에 스툴이 밀려 어딘가에 툭 닿는 소리가 났다.

약간 민망한 얼굴로 의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의사는 마지막까지 긴장한 얼굴로 진료실을 나서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가, 각인하실 거면 저희 병원 들르셔야 해요! 각인에는 처방 약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소리가 멎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기 때문이다. 태건은 아무 말 없이 재하를 끌고 나왔다. 진료실에 앉아 있던 정길과 명순이 빠르게 뛰어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었다.

시간이 늦어 건물을 찾는 이가 없는지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병원이 있는 층에 멈춰져 있었다.

문이 열리자 재하의 손을 끌고 올라탄 태건이 명순에게 말했다.

“걸어와.”

정길과 명순은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차피 지하 주차장에 갈 거니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이상했다. 그러나 재하도 눈치는 있는지라, 거기에 대고 ‘이 겨울에 어떻게 걸어오란 겁니까. 같이 타고 갑시다.’하고 덧붙이지는 못했다.

태건은 곧바로 B1 버튼을 누르고 계기판만을 바라보았다. 이익형의 집을 나섰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뭐에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각인 얘기 때문일까? 저는 정말 좋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오메가가 된 이재하를 보기 싫은 걸 수도 있다. 기본 골격은 어디 가지 않겠지만 오메가가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근육이 빠지고 선이 갸름해질 것이다.

타고나길 알파로 태어나 강건해 보이던 선이 오메가로 발현한 뒤 무너지면 보기에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비쩍 마른 전봇대 같아지면 어쩌지 싶었다. 많이 흉하려나….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가 각인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게 걸렸다. 뭐라도 말을 해봐야겠다 싶어 입을 열려는데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태건은 곧바로 내려 바로 차로 가로질러 갔다. 재하는 뒤쫓아가려다가 명순과 정길이 다른 차에 올라타려 차 문을 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상계단으로 빠르게 뛰어 내려왔나 보다. 재하가 그쪽을 바라보자, 명순과 정길이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재하 역시 그들을 향해 살짝 묵례하고는 태건을 다시금 쫓아갔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고, 그건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태건이 자신을 가리켜 실패한 사업이냐 물어보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의 등을 보자니 그때가 생각나 참기 힘들었다.

재하는 평소답지 않게 조급한 태도로 그를 불러 세웠다.

“태건 씨.”

장태건은 그 자리에 서긴 했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재하는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얘기 좀 해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알고 싶었다. 바다 소금 향의 페로몬이 일렁여 재하에게 툭 닿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일렁거리는 페로몬임에도 불구하고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재하는 뒤를 흘끗 바라보았다. 명순과 정길은 이미 차에 올라타 차마 이쪽을 보지 못하겠는지, 뒤로 의자를 젖혀 누워 버린 듯 차 전면 유리에서 사라진 채였다. 그들이 그렇게 저와 태건의 눈치를 보는 게 민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건을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그를 그냥 보내고 얼마나 많이 슬펐는지 모른다. 울적하고 우울한데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늘 괴로웠었다.

이재하의 인생에 있어서 장태건이란 존재는 전무후무했다.

어릴 적부터 교양을 위해 읽은 고전문학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폭풍의 언덕과 위대한 개츠비, 시몽과 폴, 베르테르와 로테.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방문하던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카르멘, 푸치니가 들려주던 모든 사랑의 찬가들.

그것은 그저 옅은 감동만을 주고 떠나 버렸다. 이재하는 자신이 고요히 고여 있는 거대한 물이라고 생각했다. 해일이 일어나지도, 폭우가 쏟아져도 불어날지언정 일렁이지 않는.

그러나 그런 이재하에게 장태건은 파도였다. 만 가지의 사람에게 만 가지의 사랑이 있다면, 이재하에게 장태건은 오로지 홀로도 만 가지의 감정을 일깨워 주는 이였다.

재하는 그를 만난 뒤에야 푸치니의 곡들을 이해하고 개츠비의 사랑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가 주는 슬픔조차 사랑스러웠다. 그렇다고 해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뒷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재하는 그때 그를 잡지 못한 걸 그답지 않게 후회했고, 더할 나위 없이 슬퍼했으며 돌이키고 싶다고 통렬히 생각했다.

“…각인 때문에 그래요? 나는 솔직히 하고 싶어요.”

그러니 조금 더 솔직해지고 싶었다. 재지 않고 사랑을 고백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재하는 여전히 자신의 방법대로 사랑하는 중이었다.

그러자 거칠게 숨을 몰아쉰 장태건이 뒤돌아 재하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각인?”

“네…. 물론 태건 씨가 보기에 오메가가 된 내가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태건이 거칠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하의 말을 뚝 잘랐다.

“좆 같은 소리 그만하고. 내가 알파, 오메가 따져 가면서 당신 구멍에 환장하는 걸로 보여?”

재하는 입을 다물었다. 장태건은 입이 험한 편이지만, 재하를 향해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편이었다. 음담패설이 심한 구석이 있지만 그것도 둘이 있을 때만 그랬다. 그런데 이렇게 입이 험해졌다는 건 화가 많이 났다는 뜻 같았다. 일렁이는 페로몬은 분노를 품은 알파의 것인데 여전히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척이나 화가 났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재하의 마음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말 조심히 해요.”

이재호나 옛 약혼자에게는 가끔씩 하던 경고였다. 태건에게는 심한 음담을 할 때나 곤란하고 민망하여 말한 적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그걸 알고 있는 건지 태건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거기서 개좆 같은 소리 들을 땐 아무 말 않고 앉아 있다가 무슨 말을 조심히 하라는 건데.”

재하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각인을 하고 싶기는 했지만 그가 원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제게 말하면 될 일이다.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저도 모르게 낮게 가라앉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그걸 느낀 건지 장태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살짝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로서는 재하가 그러는 걸 처음 보는 것일 테다. 그의 그런 표정을 보니 뒤늦게 아차 싶었다. 장태건에게 위협적으로 보일까 봐 페로몬을 갈무리하려 노력해야 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 페로몬을 풀어 봤자 극우성 알파를 자극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장태건이 제 페로몬을 그렇게 여기지 않았으면 했다.

이런 쪽의 훈련은 자라면서 꾸준히 받아 온지라, 감정의 동요에 페로몬을 흩트리는 일이 드물었는데 낭패였다. 보호해 주고 아껴 주고 싶었던 사람 앞에서 그런 것이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재하의 페로몬이 빠르게 가라앉자 태건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더니 쯧, 인상을 찌푸리며 재킷 안쪽을 뒤적거려 담뱃갑을 꺼냈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불도 붙이지 않고 말했다.

“각인 같은 소리 하네.”

입술 사이에 물고 있는 것 때문에 발음이 살짝 뭉개져 있었는데도 그 말이 그대로 재하에게 꽂혔다.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던 다시 마음이 울컥거렸다.

“…싫으면 말지 왜 그렇게 비꼽니까.”

“누가 싫대? 이게 좋고 싫은 문제로 보여?”

“그럼 왜 아까부터 태도가 그런 건데요. 내가 장태건 씨한테 각인 안 해 주면 목매 달고 죽겠다고 협박이라도 했습니까?”

재하의 말에 태건이 입술 사이에 담배를 문 채로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재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됐는데. 그의 모친이 마지막에 어떻게 갔는지는 재하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게 초조한 마음이 든 탓에, 재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 그러니까 각인에 확신이 있으시다?”

“…뭐라 했습니까?”

“그 좆같은 확신은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네. 난 확신 같은 거 없거든.”

그 말에 속 안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재하는 전혀 자신답지 않은 반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화를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확신이 없다고? 그럼 이제까지 했던 건 뭔데. 당장에라도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는 건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는 무슨 말을 해 봤자 오해만 낳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실낱같은 이성이 재하의 충동을 억제하고 있어 그런 것뿐이라, 우리 지금 격해져 있으니 가라앉히고 얘기합시다, 같은 좋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사실 저라고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그와 이어지고 싶었다.

각인 시 가장 처음 일어나는 반응은 상대를 향한 핵심적인 기억이 상대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게 된 순간, 상대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졌던 바로 그 순간이 상대에게로 전이되어 꿈처럼 나타나게 된다.

그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반응으로는 각인 상대가 겪는 극한적인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인 상대가 위험에 빠졌을 때, 절명의 순간에 느끼는 공포 등을 공유하게 된다. 강렬한 감정일수록 상대에게 쉽게 전이되는 것이다.

재하는 그렇게 태건을 제 안에 새겨 넣고 싶었다. 그와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필요했다.

물론 각인을 한 뒤 일정 시간 동안 상대를 보지 못하거나 물리적으로 헤어져 상대의 페로몬을 받지 못하게 되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기도 한다. 매년 사별한 각인 상대를 그리다가 그를 따라가는 ‘연리지 신드롬’이 사회적으로 이슈일 정도이다. 그러나 재하에게는 그런 불편함까지 사랑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재하는 이미 사랑이 주는 아픔을 겪어 봤다.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러니 아프더라도 그를 온전히 제 안에 새긴 뒤 아프고 싶었다.

그에게 제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가정만으로 아침마다 새롭게 상처받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구차하게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재하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매로 손을 내밀었다.

“장태건 씨, 차 키 주십쇼.”

“…뭐?”

태건이 짜증 나게 하지 말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재하는 여러 말하지 않은 채 다가가 그의 재킷 상의 주머니에 손을 쑥 넣었다. 태건은 늘 왼쪽 주머니에 차 키를 두었고, 그의 그런 사소한 습관을 알고 있던 재하는 손에 닿는 걸 그대로 빼냈다. 이재하는 차 키를 손에 쥐자마자 그의 세단 운전석을 열고 올라타 시동 버튼을 눌렀다.

사이드 미러를 통해 물고 있던 담배를 툭 뱉어 버리며 이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알파가 비쳤다. 재하는 운전석 창문을 내린 채 기어를 풀고는 핸들을 돌려 차를 움직이며 말했다.

“장태건 씨는 명순 씨 차 얻어타고 오세요.”

그러고는 창문을 올린 뒤 액셀을 세게 밟았다. 주차장에서는 시속 10km를 유지하는데 그럴 정신도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난 적이 몇 없었다. 이재하는 늘 고요하게 잔잔한 호수 표면 같은 제 성정을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러나 그 표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이는 늘 장태건이었다.

룸미러를 통해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뚫어지게 제 차를 보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후회가 들었다.

…화내지 말 걸 그랬나.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분노는 가라앉고 뭔지 모를 서운함이 들어찼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한남동으로 향했다. 차는 빠르게 달려 각 세대가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귀가하여 씻자마자 제 침대에 누워 버리려던 이재하는 장태건이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쯧, 혀를 차며 그의 방으로 향했다.

외출한 사이 사용인들이 들여 둔 건지, 함께 산 침대가 배달되어 있었다. 그걸 보자니 제 방으로 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태건이 이제부터는 자신의 방에서 함께 자자는 말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런 말을 들어 놓고 혼자 제 방에서 문을 걸어두고 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겠지만, 또 저 역시도 열이 받은 상태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각자의 방에서 잠드는 것이 좋은 선택 같지는 않았다.

이재하가 해 온 싸움은 모두 전투에 가까웠다. 이런 식으로 애정 싸움을 해 본 일이 없어 어떤 것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곧 들어올 태건을 두고 제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재하는 어린애처럼 삐져 있을 나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방으로 향했던 건데,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그의 페로몬에 마음이 차차 안정되었다.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침대에 누운 재하는 덕분인지 의외로 빨리 잠이 들었었다.

조금 더 깊이 잠들려는 차에 다시 일어난 건, 옅은 진동 소리가 계속해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콘솔 위에서 지잉, 하고 울려 대다가 진동에 못 이겨 핸드폰이 추락하기 직전, 재하는 반만 뜬 눈으로도 그걸 받아 냈다.

그러고는 액정에 뜬 불빛 때문에 잠시 눈을 못 뜨다가 간신히 누구에게서 걸려 온 전화인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여보세요.”

재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며 다시금 베개에 몸을 뉘었다. 하, 하고 낮은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몇 시지, 하는 생각과 함께 수화구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렀다.

- 마누라가 이 시간까지 밖에서 방황하는데 잠이 와?

귀 옆에 핸드폰을 붙이고 있는 손 대신 반대편 팔뚝으로 눈을 가리며 대충 대답했다.

“잘 자다 깼습니다.”

- 서운하네. 우리 오늘 처음 싸웠는데 기념도 안 하고 그냥 잔다고?

그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올려 두었던 팔뚝을 내리며 얼굴을 쓸던 재하는 제가 웃고 있는 걸 깨닫고 두 눈을 깜빡이며 저를 한심스러워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혼한 사람이 왜 이 시간에 밖에 있습니까.”

살짝 숨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듯했다.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여닫는 맑은 소리도 거리감 있게 들려왔다.

- 남편이랑 싸우고 가출했는데.

“…….”

- 근데 남편이 찾아 주지도 않고, 자기 혼자 먼저 자 버리고.

“…못됐네요. 누굽니까.”

수화구 반대편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찬 바람에 섞여 있을 희뿌연 담배 연기와 그 연기를 가르고 들려올 웃음소리가 그리웠다.

재하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보고 싶었다.

- 일이 있어서 못 들어간 거야. 화나서 집 나간 거 아니니까 오해 말라고 전화한 겁니다.

약간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싸우지 말걸. 각인 같은 건 안 해도 되는 일이었다. 장태건을 사랑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저와 이혼하지 않는 것만으로, 태건 역시 이재하의 마음에 차고 넘치게 보답했다.

그리고…. 재하는 불 꺼진 태건의 방, 벽 쪽에 놓인 커다란 수납장을 바라보았다. 저기 어딘가에 재하가 몇 년 전에 주었던 바로 그 만년필이 있다. 유리 케이스 안에 소중히 모셔져 늘 보는 것처럼 꺼내져 있었다.

그에게서 별다른 말은 듣지 못했지만, 재하의 사랑은 큰 욕심이 없는 탓에 유리 케이스 안에 모셔진 만년필의 존재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보답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시간이 아까워졌다.

“…아까는 가출했다면서요.”

- 쪼지 마. 당신 눈치 보느라 애쓰고 있잖아.

그 말에 실실 웃음이 흘렀다. 그는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담배를 물고 있어 흐려진 발음으로 먼저 전화했으니 봐 달라는 신호인데 알아먹지를 못한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재하는 나직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일이 바빠요? 내가 갈까요?”

그 말에 태건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숨소리가 훅, 하고 뱉듯이 나더니 곧이어 은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 …화해한 기념으로 폰섹 할래?

더 참을 수가 없어 크게 웃었다. 웃는 재하의 목소리 사이로 태건이 말했다.

- 진심인데 왜 웃어. 나 바지 깐다.

야외인 것 같았는데 어떻게 바지를 내리겠다는 건지. 재하는 태건이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를 먼저 저었다.

“일 끝내고 와요. 아니면 내가 가도 됩니다. 급한 일 있어서 간 거잖아요.”

태건이 흠, 하고 목을 울렸다.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금 지포 라이터의 부싯돌 돌리는 소리가 났다. 담배를 한 개비 더 깨문 듯했다.

- 당분간은, 좀 바쁠 것 같은데 잠은 집에서 잘 거니까.

“…….”

- 어디 가지 말고 내 방에서 자요.

재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태건 씨 방입니다.”

그러자 조금 더 정적이 남겨지더니, 태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반쯤 섰는데. 폰섹 진짜 안 돼?

하하, 웃음이 다시금 터졌다. 진심인데 왜 웃냐는 타박이 들렸다. 재하는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의 방에서 그의 페로몬 향을 맡으며 그와 통화하는 것. 각인이 주는 안정감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날이 조금 흘렀다.

태건은 그가 말했던 대로 꼬박꼬박 한남동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대부분 다섯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거나 어느 때는 두 시간도 쉬지 못한 채 일어났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어렵지, 그의 옆자리에서 기다리는 일은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더욱이 태건이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새벽에나 겨우 들어와 짧은 잠을 청하면서도 내내 재하를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어느 날은 등 뒤에 그의 가슴팍이 닿은 채 끌어안겨져 있었고, 어느 날은 그의 팔을 벤 채로 품 안에 끌려 들어가 있었다.

간혹 잠든 재하를 깨워 가벼운 페팅을 하기도 했다. 섹스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몇 시간 잠들지도 못하고 나가야 할 텐데 끝까지 하기에는 그의 피로에 좋지 못할 것 같아 재하가 매번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러길 여러 번, 하루는 장태건이 살짝 짜증 난 목소리로 말했다.

“자지에 거미줄 치겠네.”

비비고 빨고 할 건 다 하는데 삽입만 하지 않는 거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 뺨에 입을 맞춰 주자 달려들어 재하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놓았다.

그럴 때마다 제자리에만 돌려놔 달라는 듯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 주면, 어느새 입질하던 게 얌전해져 여기저기에 입을 맞춰 오고는 했다.

그리고 오늘, 한동안 계속해서 그를 기다리며 지내던 재하에게도 다른 스케줄이 생겼다. 이재호가 만나자는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재하는 시간 좀 내 달라는 이복동생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재호치고 무척이나 풀 죽은 목소리기도 했고, 그날 그대로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만남이 약속된 장소는 한남동 빌라에서 멀지 않은 카페였다.

얼마 전, 태건의 집에 모조리 짐을 푼 덕에 입고 나갈 옷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운동 갈 때마다 입던 청바지와 후드 티에 캐주얼 정장풍의 코트를 걸친 게 다였다. 웬만하면 패딩 점퍼를 입고 싶었는데 구매한 지 너무 오래되어 꼴이 너무 후줄근해 보일 것 같았다.

사실 오래된 옷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사용인들이 잘 세탁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날근날근한 흔적이 남은 게, 그 옷을 구매한 게 꽤 오래전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임 과장이 간섭하지 않는 재하의 옷장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다행인 건, 전체적으로 무채색인 옷의 색감 덕분에 이상하게 매치해도 신장과 몸매에 의해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옷을 잘 입고 패션을 좋아하는 이재호의 눈에는 아니었나 보다. 재하의 후드티를 알아본 재호가 카페에 들어선 그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것이다.

“…넌, 그 옷 좀 버려라. 10년 넘었지 않나?”

“용건.”

역시 10년이 넘었구나. 재하는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는 자리에 앉으려다가, 재호의 앞에만 커피 잔이 있는 걸 보고 한쪽 눈썹을 쓱 올렸다. 제 것도 주문해야겠다 싶어 종업원을 부르려고 하는데 재호가 살짝 다급하게 말했다.

“…미리, 시켜 두면….”

“…….”

“형이 안 먹을까 봐.”

그렇게 말하는 재호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귓등까지 붉어진 얼굴로 종업원을 부르더니 재하 대신 커피를 시켰다. 재하는 이복동생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김란희가 이재하의 식용수나 식사 등에 약을 타 온 세월은 꽤 길었다. 끈질긴 것 하나만은 칭찬할 만한 여자였다. 정 선생의 눈을 피해 식사에 약을 타기 쉽지 않았을 텐데 용의주도했다.

재호는 그걸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빨개져 고개를 푹 숙인 이복동생을 바라보던 재하는 탁자에 올린 팔을 접어 턱을 쓸다가 말했다.

“너 어머니 대신 사과하러 왔지.”

“…….”

재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속을 여지없이 들켰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가 종업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받아 들며 짧게 고맙다 인사했다.

재호는 아직도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빨간 눈가가 며칠 밤을 새웠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이재호는 항상 저랬다. 겨울방학 동안 재하와 놀고 싶어 스위스로 스키 캠프를 가는 형의 짐을 멋대로 망쳐 두거나, 형이 모으던 소설책 시리즈에 낙서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왜 이런 장난을 치냐 물으면 눈이 빨개져 입을 꾹 다물었다.

본인 잘못은 아는데 인정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 도를 넘으면 기다려 주다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는 날에만 두들겨 팼었다.

머리가 굵어지니 반항도 많이 하는 걸 묶어 놓고 패니 조금 조용해지고는 했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며 재하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 태건의 커피 취향을 몰랐다. 언제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재호가 입을 열었다.

“…엄마, 가 설령 살인자라고 해도…. 내가 먼저 버릴 수는 없어.”

이재호도 알고 있었다.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저를 개 패듯 패는 부친보다, 잘못이 확실할 때만 깔끔하게 벌을 주는 이복형이 훨씬 더 어른스럽다는 것을. 앞으로는 ‘당연히 우리 재하가 유신의 주인이지요.’ 하면서 뒤로는 재호에게 유신은 네 것이라고 말하는 모친보다, 늘 묵묵한 얼굴로 경영하던 이재하가 더욱 정의롭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친은 이재호의 많은 것에 기여했다. 이재하에게는 더없이 나쁜 인물일지 몰라도 그녀의 욕심이 갖는 궁극적 목적이 이재호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재호가 나서서 모친을 버릴 수는 없었다. 대신….

“미안해, 형.”

그녀가 그렇게 살게 된 이유에는 이재호도 있었다. 철이 없고 생각이 없어 그렇지, 양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재호는 그녀의 공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공범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공범의 죄를 반성하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그런 재호를 물끄러미 보던 재하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고.”

“…….”

“그렇게 말해서 어느 정도 다행이기도 하고.”

재하는 이재호가 자신에게 사과할 거라 생각했다. 그 집에서 반성이란 걸 하는 유일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제 할 일을 끝내지 않고 놀아서 그렇지, 이재호의 천성은 악하지 않았다.

들었던 커피 잔을 내려놓고 재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 어머니 용서해 달라는 거야?”

“…….”

재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호는 이제 아예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형의 스키 가방을 어질러 스키 고글을 깨트렸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차마 용서를 바라지도 못할 만큼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아는 얼굴.

그걸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용서하고 말 것 없어. 내가 굳이 복수하지 않아도, 어머니 성격에 충분히 불행하게 사실 테니까.”

“…….”

“난 그거면 돼. 어머니가 평생을 불행하게 사실 거란 거.”

재호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빨개졌던 안색은 나아졌지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은 조금 더 크기를 키운 상태였다.

“고마, 윽, 내가 반성하도록 만들 거니까….”

“퍽이나.”

이재하는 반만 믿었다. 김란희 성격에 반성이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키 고글을 깨 먹고 난 뒤 이재호는 밤새 내내 앓았었다. 형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김란희나 이익형에게는 없는 것들이었다.

오히려 이재하에게 있으면 모를까. 그 때문인지 이재하는 이재호를 완전히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자신을 어느 정도 닮은 형제라는 사실을 말이다.

재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재호는 약간 후련해진 얼굴로 말했다.

“…내, 내가 밥 살까?”

“됐어. 요즘 기획사 쪽은 어때. 상장됐던데.”

“어, 그게, 이번에 드라마 하나가 해외 수출 돼서….”

그제야 밝은 얼굴을 한다. 기획사 하나 차려 줄 테니 해 보라는 말에 처음에는 반색하더니 김란희의 눈치를 보며 전자 쪽 일과 병행하고 있나 보다.

저러니 제가 회사 털어먹기가 쉬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신나 보이니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자본이 뒷받침되어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가 상장되었다고 하니 그쪽으로는 나름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더 뭐라 떠들려는 이재호가 귀찮아지기 시작해 일어섰다. 이재호가 눈치를 보며 다시 한번 밥 먹고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재하는 태건이 늘 그러하듯 살짝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네 형수랑 먹을 건데.”

“…와, 그 호칭 이제 그냥 고정이네.”

재호는 살짝 질린다는 듯 말하고는 울어 빨개진 눈으로 카페 앞에 세워 둔 제 차로 향했다. 울던 눈이 부어 있는 걸 보고 저놈과 자신이 형제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평행 주차에는 재주가 없는지 주차선을 넘어 주차했다가, 앞차가 보복 심리로 아주 바짝 가깝게 댄 모양인지 울상을 지으며 그 차의 전면 유리로 돌아가 핸드폰 번호를 보고 있었다.

더 자리를 지키면 귀찮아지겠다 싶어 대충 인사한 뒤 빌라로 돌아온 재하는 집에 들르지 않고 주차장에서 차만 꺼내 바로 태건의 사무실로 향했다.

장한 본사와 통칭 사무소라 불리는 곳 중 어디 있을까 싶어 고민하다가 일단 장한건설의 본사로 가 봐야겠다 싶어졌다.

일부러 연락은 하지 않았다.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명순에게는 연락해 두는 게 좋나 싶어 핸드폰을 꺼내 보니, 밤에 자기 전 충전을 하지 않아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충전 잭을 두는 차를 끌고 나오지 않고 다른 차를 끌고 나온 탓에 차에서 충전할 수도 없었다. 바쁘다 하면 얼굴만 보고 나올 생각이었는지라, 그냥 바로 본사로 향했다.

장한 건설의 본사는 내년에 사옥 이전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규모가 꽤 커져 사옥 이전을 서두르고 있는 형편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주차장도 협소하다 들었는데, 다행히 재하가 갔을 때는 주차장 자리가 남아 있었다. 지하에서 올라온 재하는 리셉션으로 향했다.

그제야 옷차림이 걸리긴 했다. 포멀하진 않더라도 캐주얼 정장이라도 입고 올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리셉션의 안내원에게 말을 전했다.

“이재하입니다. 장태건 본부장 만나 뵈러 왔어요.”

안내원은 눈을 크게 떴다. 장한의 본부장이 누구와 결혼했는지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명순이나 정길을 부르는 수고는 덜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안내원은 곧장 리셉션을 지나 자신의 보안 카드를 태그하여 재하에게 길을 터 주었다. 감사하단 의미로 묵례와 함께 웃어 주자 그이의 눈이 또 한 번 커졌다. 아무래도 저를 신기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렇게 차림이 이상한가 싶어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장태건의 사무실이 있다는 최상층 버튼을 누르려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고, 그 틈 사이로 익숙한 누군가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태건이었다.

재하는 놀라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부터 눌렀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몸을 내밀려는데 재하보다 먼저 태건을 부르는 이가 있었다.

“태건 씨.”

키가 큰 편에 늘씬한 느낌을 주는 오메가였다. 재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봤더라. 익숙한 느낌인데. 재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닫혔다. 때마침 태건이 재하가 탄 엘리베이터를 돌아보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최상층을 먼저 눌러 둔 탓에 막힘 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멍하니 방금 보았던 오메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디서 봤지…. 기억이 흐릿했다. 엘리베이터는 속도 모르고 쾌속으로 상승하여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재하를 뱉어냈다. 주인 없는 사무실 앞에서, 재하는 계속해서 그 오메가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 * *

결국 홀로 사옥을 나선 재하는 혹시 몰라 예약해 뒀던 식당부터 취소했다.

태건이 선약이 있다면 혼자라도 먹고 올 생각으로 한 예약이었는데, 어쩐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 대신에 예약해 두었던 호텔의 지배인에게 프라이빗 풀을 비워 줄 수 있냐 물었다.

지배인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다. 재하는 곧바로 그 호텔로 향했다. 수영복이 없어 호텔 지하에 있는 부티크에 갔다가, 남아 있는 수영복이라고는 초미니 비키니뿐인 걸 보고 반쯤 질려 버렸다.

어차피 사람이 없는 곳에서 수영할 거라 상관없긴 한데 민망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비키니를 입긴 하지만 이렇게 천이 모자란 건 또 처음이었다. 계산할 때 얼굴이 조금 화끈거릴 정도였다.

밥맛이 없으니 조금 운동하다 보면 배가 고플 거라 생각했다. 바로 수영장으로 올라간 재하는 간단히 샤워 후 젖은 몸을 닦지 않고 수영복을 입고 가운을 챙겨 프라이빗 풀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 오메가에 대해서. 몇 년 전 그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유신 제약의 행사를 위해 방문한 호텔에서 태건을 친근하게 부르던 바로 그 오메가였다.

재하는 음, 하고 짧게 신음했다. 그때도 이렇게 신경 썼던 게 연상 작용으로 함께 기억났다.

장태건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약간 쪼잔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어쩌겠는가. 자신은 사랑에 빠진 알파고, 상대를 제 영역 안에 가둬 두지 않으려는 이성과 상대를 머리카락 한 올까지 독점하고 싶은 욕구가 늘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인 것을.

이재하가 장태건에게 보일 수 있는 사랑은 그가 최대한 자유롭기를 바란다는 마음에서 표출되었다. 그런 탓에 재하의 사랑은 늘 태건을 옭아매고 싶은 욕구보다 이성의 손을 들어 주고는 했다.

그것은 이재하가 어린 시절 마주한 사랑의 형태가 너무 기형적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제 안에 이익형의 피가 흐르는 이상, 재하는 늘 상대를 구속하고 싶은 욕망을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의심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 오메가가 누군지 정도는 물어도 되지 않았나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물어볼 거였다면 그때 바로 엘리베이터에 내려 물어볼 것이지 왜 머뭇거렸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심하게 행동한 구석이 없지 않다는 걸 인정하며 어깨를 천천히 돌려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핸드폰에는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재하는 가운 위에 그것을 내려 두고는 바로 다이빙하여 풀장을 두 번 왕복했다.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으며 호흡을 진정시키는 걸 느끼다가 전화가 오길래 바로 풀장 사다리를 잡고 나왔다. 물기 가득한 손이 주룩 미끄러져 허벅지를 살짝 부딪쳤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선베드로 가 젖은 얼굴을 닦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액정에 뜨는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아버지]

“…….”

재하는 짧게 침묵했다가 무음으로 변경한 뒤 그대로 핸드폰을 다시금 가운 위에 던져두고는 이번에는 쉬지 않고 세 번을 자유형으로 왕복했다.

귀에 물이 살짝 들어갔다고 느꼈을 때 겨우 멈췄다가 배가 고픈가 생각해 보았으나 아직 시장하지 않았다.

배영을 해 보려고 뒤로 누워 힘을 빼 봤지만, 근골격 무게가 꽤 나가는 탓에 자꾸 가라앉길래 그냥 접영을 했다.

그것도 왕복 두 번을 하니 꽤 힘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재호 생각이 났다. 하나 있는 모친을 지키기 위해 나름으로 애를 쓰던 것이 기특하면서도, 저에게는 없는 가족이 재호에게는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례식 때나 조금 울고 말았지만, 이재하는 사실 시시때때로 모친의 빈자리를 둔중한 충격으로 느끼고는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속이 조금 허했다. 드디어 배가 고파지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그러다가 태건이 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자 약간 기분이 나아졌다. 부부 사이는 무촌이라고 하지 않는가.

각인을 하지 못해 서운하기는 했지만, 원래도 이 정도면 넘치게 행복한 거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그에게 닿지 못해 아주 죽을 맛이었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어떻게 그러고 평생을 살 생각을 했지.”

풀장 벽에 기대어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장창식의 장례 이후 재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던 게 살짝 억울했다가도, 장태건 같은 사람이 흔하지 않을 것이란 데 생각이 미치자 그 행복을 오로지 저만 느끼는 것 같아 기뻐졌다.

그렇게 여기니 기분이 많이 나아져, 접영 왕복 두 번으로 마무리하여 룸서비스를 시켜 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호텔은 다른 것보다 해산물 짬뽕을 잘했다. 간만에 햄버거가 먹고 싶기도 했다. 체중이 늘어날까 봐 자중하는 편인데 탄산의 톡 쏘는 청량함이 끌렸다. 탄산음료를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가끔 유학 시절 먹었던 기억이 나면 찾고는 했다.

아니면 클럽 샌드위치를 같이 시켜 먹을까 고민하며 잠영부터 시작하려는데, 밖에서 소음이 들렸다. 누군가 프라이빗 풀인 걸 모르고 들어오려다, 앞을 지키고 있는 가드가 저지한 듯했다.

곧 조용해지겠거니 여기며 다시금 잠수했다. 그러고는 물 밖으로 올라오지 않고 그대로 풀장 밑에 가라앉아 부풀린 폐의 공기를 조금씩 소비하며 잠영했다.

풀장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려고 타일 벽을 발로 차고 회전하여 턴 하려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재하는 놀라 물 밖으로 나왔다. 수경을 벗자마자 눈 위로 쏟아지는 물을 닦아 내며 어룽진 시야를 회복하려 애썼다. 프라이빗 풀이니 다른 이가 들어올 리도 없는데 버틀러인가 싶어 한 번 더 손바닥으로 물 묻은 얼굴을 닦아 냈을 때였다.

“물놀이 재미있어?”

장태건이었다.

“태건 씨.”

재하는 놀라 풀 밖으로 나가기 위해 헤엄쳤다. 어떻게 그가 이곳에 왔을까. 의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 밖으로 나가려는데 등을 돌린 태건이 선베드 위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전원 버튼을 눌러 보고, 곧 그것의 배터리가 방전되어있음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약간 민망해져 움직임이 둔해졌던 재하는 놀라 밖으로 나가 태건에게 향했다.

“아,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네. 그치?”

그렇게 말하는 어투는 무척 다정했다. 지난 며칠간 이재하가 질리게 듣던 바로 그 음색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구석이 있었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곧이어 발밑에 스멀스멀 깔리는 페로몬을 눈치챘다. 태건의 것이었다.

“회사에 왔다 갔다는데 연락은 안 되고.”

“…아, 보고받았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태건이 재하의 말을 갈랐다. 그러고는 물이 묻은 재하의 상반신을 손바닥으로 훑어 내렸다.

“읏….”

“여기 당신밖에 못 들어오는 데라며.”

“아…. 프라이빗 풀장을 대여한 거라서.”

화제가 이리저리 튀는 것 같았다. 발밑에 깔린 알파의 페로몬은 태건의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분노의 이유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저 제가 연락받지 않아서 그랬다기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는데 아까 그의 회사에서 잠깐 봤던 것과는 다르게 묘하게 흐트러진 그의 차림도 이상했다. 셔츠 단추가 몇 개 풀어 헤쳐져 있기도 했고, 실외에서 왔을 텐데 코트 하나 입고 있지 않았다.

재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너무도 다급하게 저를 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응.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다니까.”

태건이 재하의 비키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재하는 그제야 민망하여 가운을 집으려 했지만 그가 놔주지 않았다.

그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각인, …당신 생각은 변함없어?”

재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각인에 대한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라앉히며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나는 무척…. 장태건 씨가 나와 이어져 있었으면 하고….”

그랬으면 하고 무척이나 고대했다. 어쩌면 그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말이다. 다소 흰 편인 재하의 피부가 저도 모르게 붉게 달아올랐다. 물에 젖어 있어 더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재하는 붉게 물든 제 몸 위로 태건의 시선이 느릿하게 문질러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하는 떨리는 손으로 태건의 손을 찾아 쥐었다. 손끝까지 빨개진 채로 말이다. 그에게 각인을 청하는 이 순간이 더없이 긴장되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태건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도록….”

그 말에 바다 소금 냄새가 나던 태건의 페로몬이 달큼하게 느껴질 정도로 흐드러진 해당화의 향으로 변했다. 재하는 아, 하고 짧게 신음했다.

태건이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재하는 약간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정장 젖는데.”

“시끄러워요. 수영복은 왜 또 이따위야. 당신 용돈 부족해? 천 모자란 걸 입고 난리야.”

가격은 더 비싼 거라 말하고 싶은데 슬쩍 본 태건의 귓등이 빨개져 있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항상 여유라고는 없는 연상이었지만, 이왕 그가 당황한 것 같을 때 치고 나가 연상의 위엄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은요. 왜 안 해 줍니까.”

“…….”

아래쪽에 불쑥, 단단한 것이 지그시 눌러졌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쓸어 내렸다. 움찔 떨던 태건이 느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하자, 씨발. 무조건 당신보다 하루 늦게 죽으면 되지.”

그러더니 각인이 얼마나 위험한지 당신이 아냐는 둥, 이제 둘이 절대 떨어지지 말고 화장실도 같이 가게 생겼다는 둥 투덜거렸다. 재하는 하하 웃었다. 그의 낮은 웃음이 가슴팍을 타고 태건에게 전해졌다.

그 울림이 장태건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제 알파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물기에 젖은 살결이 닿아 있는데도 그리웠다.

장창식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고 비서가 사라졌다. 장창식이 제 아들인 장한용보다 신뢰하던 인간인데 귀신같이 사라진 게 이상해 밑의 놈 몇을 붙였다.

명순이 관리하는 놈들이라 꽤 용의주도하고 일을 잘했다. 그들은 금세 고 비서의 위치를 찾았다. 충청도 옥천의 한 모텔에서 생활 중이라고 했다. 태건에게 숙청당할까 봐 숨는다기에는 그 행보가 이상했다.

충성심이 대단한 편이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영감이 죽었을 때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하는 걸 장태건이 직접 목도한 바 있다.

애초에 장창식의 죽음은 뜻이 있으면 하늘이 돕는다는 말처럼 정해진 수순으로 흘렀다. 사실 장태건이 준비했던 장창식의 죽음은 그것보다 좀 더 특별했는데 말이다.

일단 장한과 유신에 관련된 것을 몇 개 떠넘긴 다음 빵에 보내 칼잡이 하나를 들여보낼 계획이었다. 성경책의 속을 파 반입시킨 회칼로 배를 쑤시면 밖에서 회장 소리를 듣던 장창식의 내장도 말랑한 것은 마찬가지라 쉽게 죽어 버릴 것이다.

하나뿐인 손자로서, 갱생 시설에서 조부를 보내 드리겠다는 계획이 얼마나 효심 가득한지를 남들 앞에서 피력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료를 모아 터트리기만 하면 되는 시점에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불러다가 자꾸 긁길래 말 몇 마디 했더니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태생이 잘못됐지, 어딜 굴러먹던 오메가가 한용이랑 결혼해서는 너 같은 새끼를 싸질러 놓고 죽어 버려. 알파 새끼한테 미쳐서 하나 있는 할애비 가둬 두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웃기는 말을 하네, 창식 씨. 쭉 개로 길러 놓고 인제 와서 사람 새끼를 찾아. 나 혼자 컸어요. 그리고 옛날부터 생각한 건데 창식 씨 말을 조금 섭섭하게 하더라. 결혼할 때 이재하 앉혀다가 혼수네 뭐네 하며 뜯어 간 건물이 몇 채인데 이재하 욕을 해. 창식 씨, 양심 없는 건 여전해.”

“뭐?!”

“다 들었으면서 왜 되물어. 됐고, 괜히 짐 챙기지 마. 빵에 가면 옷도 주고 다 줘. 내가 세금 많이 낼게, 손주 덕에 늘그막에 요양원 갈 거 정부 시설로 가는 거다 생각해. 법무부 이불 덮고 자는 거야. 즐겁겠지?”

장창식은 부들부들 떨어 댔다. 힘없는 손으로 태건의 뺨도 쳤다. 간지럽지도 않아 맞아 줬다.

대신 가져왔던 것을 보여 줬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이재하가 몇 년 전부터 명순이나 정길의 정보망에 걸리게끔 유신 전략기획부에서 빼돌린 장한 쪽 비리 내용을 흘리고는 했다. 개중에는 유신의 것도 있었다.

어쨌든 그가 자신과 결혼한 목적 중 하나가 유신의 몰락인 것 같았으니 일단은 받아들여 자양분으로 썼다. 장창식을 넝쿨째로 삶아 다시는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급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장창식이 이재하를 건드렸으니까.

집에 앉혀만 두고 온갖 걸 둘러 호사스럽게 살게 만들어도 모자랄 사람이었다. 이딴 개종자 집구석으로 들어오게 만든 것도 염치가 없어 배때기가 쑤실 지경인데 예단비로 주식을 요구하질 않나, 명원 놈들과 짝을 맞춰 이재하를 납치하질 않나.

그때가 하필 태건더러 명원을 치게 만든 뒤 칼빵 좀 난 걸로 놀란 이재하가 명원을 흔들어 놓았던 때였다. 나는 모르는 일이고 우리 손자랑 그 배우자가 벌인 짓이다. 걔들 좀 어떻게 해 봐라. 그렇게 말한 뒤 개좆 같은 영상을 찍어 재하의 나머지 재산을 털어먹으려던 수작이 틀림없었다.

하고 싶은 짓거리들을 다 하고 살았으면서 예고 없이 비명횡사할 수 있다는 걸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넘어가기엔 열이 받아 몇 마디 했더니 바로 쓰러져 버렸다. 원래도 혈압이 높았다. 그 나이 먹도록 주색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혈압약을 비타민제로 바꾼 지 오래이기도 하고. 효심이 지극해 어르신 비타민 좀 잡수게 한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몇 년 동안의 투자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저 나이에 심근경색이면 못해도 뇌가 맛이 가기 때문에 좀 놀란 척하며 장창식의 서재를 빠져나와 고 비서를 불렀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무슨 일이십니까, 본부장님.”

“아, 고 비서님. 오랜만입니다. 가내 평안하시고?”

장태건은 안부를 물으며 손톱 밑을 후 불었다. 몇 년 전, 이재하가 이 집 별채에 들어왔을 때 기존에 있던 CCTV를 전부 제거하고 직접 다시 공사시켰다.

장창식이 별채의 CCTV를 볼까 봐 그런 것도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이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사각지대에서 선 태건이 과장되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노인네들은 그 나이에 쓰러지면 좀 위험하지 않나.”

“…그게 무슨.”

“아니, 방금 창식 씨 쓰러져서. 지금 서재에 있는데. 앰뷸런스 같은 거 불러야 하잖아요. 그쵸?”

놀라 안색이 퍼레지는 고 비서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서로의 접촉 없이 장창식이 먼저 쓰러지는 것이 혹시 몰라 심어 두었던 서재 CCTV에 찍혀 있고, 놀란 척 나와 신고하라는 말을 전달하기도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뺨은 태건이 맞았다. 이대로 노친네가 깨어난다면 폭행죄로 먼저 유치장 신세를 지게 했다가 여러 가지 죄목을 검찰에 넘겨 그대로 구속시킬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왕 쓰러진 김에 일을 쉽게 가는 편이 좋았다. 나이가 있으니 뇌부터 망가지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잭팟이었다. 영감은 그대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은 이재하가 제게 이혼을 요구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불 꺼진 별채를 보며 정길에게 연락하여 이재하의 행방을 찾았었다. 웬 강원도 호텔에 처박혀 냅다 수영만 하고 있다길래 끌고 올라왔다. 그날 장태건은 자유를 만끽했다.

늘 묶여 있던 개새끼가 드디어 주인 찾아간 진돗개처럼 이역만리 먼 땅을 달려 이재하를 찾아간 것이다. 애새끼들처럼 후드 티를 입은 채 제 옆자리에 타고 있던 말간 얼굴을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사실 장태건에게는 세상을 갖는 일보다 이재하 하나 갖는 게 그렇게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힘 키울 때까지 두고 보던 영감도 골로 보낸 뒤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문제들은 산재해 있었다. 가장 거슬리는 건 이재하의 친부와 계모.

금 같은 신혼에도 한달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좆 빠지게 일한 결과, 몇 년 후 장태건의 손아귀에는 장한 건설이 떨어졌다. 유신이 보기에는 구멍가게 같아 보이겠지만 어쨌든 태건의 것이었다. 이제야 좀 이재하 앞에 설 구색이 갖춰진 느낌이었다.

그전까지는 웬 거렁뱅이 새끼한테 코가 꿰인 건 아닐까 생각할까 봐 더 좆 빠지게 일한 것도 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마무리를 잘할 생각으로 고 비서를 단속하려고 했더니 최근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는 거다.

“모텔에 드나드는 놈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회장님 남은 세력 같습니다.”

명순의 보고에 장태건은 오메가 선수 하나를 불렀다. 박장원 의원을 공사 칠 때 도움 줬던 선수였다. 고 비서 쪽에 얼굴은 알려지지 않아 아직 쓸 만했다.

들어가 데리고 나오기만 하라고 전했는데 쉽지 않다는 거다.

“어휴, 모르겠어요. 뭐 방에만 처박혀서 뭐 하겠다는 건지. 떡 치는 건 또 환장하면서. 나 이 늙은이 언제까지 상대해야 해요?”

선수가 짜증을 내길래 정길더러 달래 주라고 한 뒤 시댁으로 향했었다. 그날 바로 병원까지 섭외하여 이재하의 페로몬 상태를 알아봤는데 개 같은 말을 들었다.

“각인을 하시면….”

비실비실한 의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장태건은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위각인만으로도 좆같이 고생스러운데 잘못하다가 칼이라도 맞으면 남은 이재하는 어쩌라고.

게다가 임신이라니. 저 같은 놈이라도 태어나면 대책이 안 섰다. 정신이 멀쩡한 놈이 나온다고 해도 당분간 딴 놈에게 이재하를 빼앗길 생각도 없었다.

이재하를 닮은 딸…을 생각해 보면 약간 다른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몸에 부담이 간다니 개좆 같은 소리를 들은 것같이 기분이 더러웠다.

그런데 웃긴 건, 화를 내는 재하를 보며 정수리에는 열이 뻗쳐 뜨거운데 바지춤에 넣어 둔 자지가 계속 단단해지는 것이었다.

화내는 건 또 처음 봐서 색달랐다. 박을 때나 그렇게 노려봐 주지. 허리를 움직이지 않고도 네댓 발은 뺄 수 있을 텐데. 욕도 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 타이밍에 영감 뒤 닦던 종놈 새끼가 도망쳤다는 것이다. 선수가 자는 사이에 모텔에서 도망쳤다는데, 정길도 명순도 서울로 올라와 있었던 데다가 명순이 모텔 주위에 붙여 둔 놈들은 일제히 누군가에 맞아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아마 남아 있던 장창식 라인의 이사 몇이 벌인 일 같았는데 행보가 이상했다. 조직 애들을 썼다면 인원이 비니 소문날 텐데 그런 것이 없었다.

결국 종놈 새끼 잡으랴 이사들 단속하랴 이재하랑 떡도 못 쳤다. 화해 기념으로 폰섹 하자는데 웃기만 하니 자지에 거미줄을 치는 기분이라 자는 사람 깨워서 몇 번 허벅지나 다리 사이에 문지르는 것만으로 위로 삼아야 했다.

박고 흔들 시간도 없이 좆 빠지게 바쁘다니. 팔자가 왜 이렇게 사나워.

개발씨발 욕을 하며 출근했더니 선수 새끼가 뭐 잘났다고 회사까지 찾아와서 앵앵거렸다.

“태건 씨.”

…저게 지금 부른 게 내 이름이야? 기가 막힌 얼굴로 돌아보다가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희미하게 익숙한 향이 맡아져 멈칫했다. 물푸레나무와 쟈스민 향이었다.

이제는 아예 후각까지 헛걸 맡는구나. 그래요, 네가 일등 정신병자 새끼세요. 태건은 이재하한테 미쳐도 단단히 미친 저를 욕하며 짜증을 냈다.

“내가 네 친구야? 어디서 씨, 씨 거려.”

어차피 돈 달라고 쫓아온 놈이라 정길에게 말해 정산해 주라고 한 뒤 떼어 냈다. 그런 다음 들은 보고가 고 비서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급하게 나서려는데 선수에게 정산을 마친 뒤 뒤쫓아오던 정길에게 전화가 한 통 왔다. 정길은 전화를 받더니 낯빛을 굳히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재호에게서였다.

- 그, 아버지, 아버지가 좀 이상해서….

심심해서 전화한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 집 식구들은 이재하 빼고 전부 사람 참 귀찮게 했다. 태건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니네 아버지 원래 이상해요.”

- 그게 아니라! 집에 이상한 사람이 많이 왔다 갔어요. 꼭 그쪽네 사람들처럼 분위기가 이상했는데…. 형은 전화도 안 되고…. 아버지가 형을 집으로 부르겠다고 하던데 형이 일단 집으로는 안 왔거든요?

그 말에 바로 명순에게 이재하 위치 파악해 보라고 말한 뒤 수화구에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또 해 봐. 더 있을 거 아냐.”

- …형 이름이 자꾸 나와서 설마 했는데 형이 전화를 안 받아요. 혹시 같이 있어요?

같이 있으면 전화를 받았겠냐? 애새끼가 얼빵해 가지곤. 태건은 대꾸 없이 전화를 끊고는 출발하려다 멈칫했다.

“왜 처남이 너한테 전화를 하냐?”

먼저 가 차 시동을 걸어 두려던 정길이 멈칫하더니 콧잔등을 긁어 댄다. 바쁘니 더 묻지 않았다. 바로 집으로 향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재하는 그쪽에 없었다. 그때 명순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하가 고작 몇 시간 전에 장한 본사에 저를 만나러 들렀었다는 것이다.

길이 엇갈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되지 않으니 갈 만한 곳을 찾아봐야 했다.

이익형이 뭘 노리고 이재하를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사 쪽 애들이 몇 명 비는 걸로 봐서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때부터는 또 좆 빠지게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강원도에서 그를 찾았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수틀리면 처박혀서 수영만 주야장천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상한 취미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수영장 샤워실에서 제모한 아래를 그대로 내놓고 씻고 돌아올 생각을 하면 속이 홧홧 뒤집어지는 것 같아서 싫었는데 오늘로 그 평가가 반전되었다.

이재하가 갈 만한 호텔은 몇 되지 않았다. 지배인에게 연락해 보니 고객 정보는 알려 줄 수가 없단다. 개좆 같은 소리만 하길래 거기 있구나 싶어 그 호텔로 향했다.

프라이빗 풀에 이재하가 있을 것이 뻔해 들어간다니 지배인이 앞을 막았다. 이재하가 태건과 결혼한 걸 모를 리도 없어 비키라 하자, 결혼한 사이라도 고객 정보는 알려 줄 수가 없단다.

남편 바람 현장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보안상의 문제일 뿐이라고, 일 잘못되면 책임질 거냐 물었다.

“아니, 나는 괜찮지. 근데 우리 바깥양반 성격이 진짜 더럽거든? 일 그르치면 책임은 지배인님이 지시게? 일을 씨발, 상당히 열심히 하네.”

지배인은 잠시 어리벙벙한 얼굴을 하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풀장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발견한 게 웬 천 쪼가리 같지도 않은 걸 수영복이랍시고 입은 채 다 젖은 이재하였다.

어이없고 화가 나는데 좆이 벌떡 서는 게 제일 짜증 났다.

각인을 하면 상대의 위험을 알 수가 있다. 태건의 반쪽짜리 온전치 못한 위각인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각인의 경우에 말이다.

호텔까지 신호 다 무시하며 밟을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사람이 온전하다는 걸 알지 못한다면 그냥 당장 뒈져 버릴 것 같다고.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로우니 각인을 통해 저 목덜미에 제 것이라는 표식을 박아 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각인에 대한 말을 꺼낸 건데 온몸이 빨갛게 변해 덜덜 떨면서 자기랑 각인해 달란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너라는 사람이 나에게 메이는 게 얼마나 아까운 건지, 짐작하지도 못하면서.

장태건은 이재하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충동을 참기가 힘들어 목이라도 축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방울방울 매달린 물방울을 싹 핥아먹자 읏, 하고 잇새로 신음을 낸다. 욕이 절로 나왔다.

“당신 산수 달려?”

“글쎄요.”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게, 유학까지 갔다 온 사람에게 못 하는 말이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당장 눕혀놓고 여기저기 빨아먹고 싶을 정도로 도도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태건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산 능력도 멀쩡한 양반이 왜 저 같은 걸?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러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가만히 보니 정말 저를 사랑…, 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아, 미치겠네.”

바지춤이 뜨끈했다. 한쪽 허벅지 상단부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뭐라도 좀 더듬어보고 그런 다음 이 지경이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래 뭐, 각인하면 시도 때도 없이 발정 난 개처럼 이재하가 숨만 쉬어도 사정하는 증세도 나아질 것이다.

나머지는 차차 생각해 보기로 했다. 태건은 재하를 끌어안아 다시금 목덜미를 핥으며 그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

“…아픕니다.”

“아파? 당신 찾아다니면서 벌렁거린 내 심장은 어떨 것 같은데.”

예쁘고 미워 살짝 떨어진 다음, 이번에는 젖꼭지를 꼬집었다. 발갛게 뺨을 물들이고 있는 재하가 움찔 놀랐다. 그의 품에서는 쟈스민 향이 났다.

결국 태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집에 가자. 기운 빠져서 당신 구멍에 자지 박고 낮잠이나 자고 싶어.”

이재하가 제 음담에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킥킥 웃음이 나왔다. 다음에는 수영장 좀 같이 가자고 꼬셔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이익형이 장창식 라인을 타던 장한의 이사들과 결합하여 이재하를 어떻게 해 보려던 것은 사실이었다.

장한의 이사들은 장창식이 급사하자 장한을 먹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끈 떨어진 장창식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속셈이 따로 있었던 듯했다.

이익형은 그들의 욕심을 자극했다. 고 비서 역시 이익형이 대피시켰다. 장한에 남아 있는 장창식의 라인을 찾아 빠르게 결탁하기 위함이었다.

재하를 감금하여 태건에게는 장한 지분을 넘겨받고 재하에게는 그가 갖고 있던 유신의 주식을 증여받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근래 들어 경영난이 심각한 터라 숨죽이고 있던 재하의 오촌 고모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이익형은 사면초가에 몰린 상태였다.

이재하가 갖고 있던 지분으로 이사회에서 어떻게든 눌러 보려고 했는데 실패하게 되자 이익형의 퇴진은 유신 내에서도 명실상부해졌다.

“결혼식 때 보고 처음 보네요, 장 서방은.”

“말씀 낮추시면 됩니다, 고모님.”

재하는 또 살짝 아연한 얼굴로 옆자리에 앉은 태건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아예 머리를 넘기고 안 하던 타이까지 맸다.

스리피스 슈트를 단정하게 갖춰 입은 태건은 낯선 탓에 집에서 나올 때부터 계속 흘끔거리게 된다. 태건이 워터 고블릿을 입가에 가져가다가 그런 재하를 보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윙크했다.

재하의 첫째 오촌 고모인 이익연은 그런 둘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왜 결혼했나 했더니 잘생겨서 했구나?”

재하를 향한 말이었다. 놀라 반문하려는데 고모가 슬쩍 웃으며 태건에게 말했다.

“재하가 얼굴 밝혀요. 보고 자란 게 희영 언니라서. 언니가 엄청 미인이었거든.”

“압니다. 생전에 뵌 적 있어서. 이 사람이랑 닮으셨습니다.”

태건이 대답했다. 얼굴 밝힌다는 소리에 작게, “고모.” 하고 그녀를 부르던 재하는 그게 무슨 소리냐 물을 뻔했다. 지난번 정 선생 때도 그렇더니 태건은 꼭 돌아가시기 전 모친을 본 듯 말하고는 했다.

…어머니가 평창동에 방문한 적이 있던가. 태건의 모친을 만나러 갔다가 보았을 수도 있다. 둘 사이의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던지라 그런 건 묻지도 못하고 지난 며칠간 눈만 마주치면 물고 빨기 바빴다.

오늘도 고모님이 먼저 고맙다고 밥 한 번 사겠다 말하지 않았다면 외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저녁, 태건과 재하는 각인을 치를 예정이었다.

나름 준비할 게 꽤 되었기 때문에 외출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태건이 계속 휴가를 낼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익연이 포크로 참치 타르타르를 집어 올리며 말했다.

“희영 언니를 언제 또 봤나 봐. 그때 결혼 허락받아 둔 거야?”

“그건 아닙니다.”

태건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중하고 조용한 미소였다. 재하는 놀라 벌어진 입을 고블릿으로 간신히 가려야 했다.

익연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재하를 향해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오빠도 손쉽게 끌어냈네. 소스 준 보답 받아야지. 다음 달부터 다시 출근할래?”

“아닙니다.”

지난주, 이익형은 주가 조작 혐의와 비자금 조성, 탈세 등의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였다. 그걸로 감옥에 보낼 수는 없겠지만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릴 명분으로는 충분했다.

이재하는 여러 가지 소스들을 이익연과 고모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했다. 개중에는 김란희가 재호를 통해 갖고 온 소스도 있었다.

김란희 입장에서는 물 새는 배에서 탈주하려는 것이겠지만 이재호는 그것이 반성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재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모친이 혼례 시 가져온 것들은 고스란히 재하의 몫으로 떨어진 상태니, 더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게다가 사옥 이전 후에는 장태건을 도와 같이 장한 본사로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다.

각인을 치른 후에는 3주간 한 시간 이상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알파와 오메가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텐데 재하의 오메가 페로몬이 불안정해 그렇단다.

제대로 된 각인이 세포 단위로 스며들 수 있게 상대에게 제 페로몬을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럼 오빠는 어디에 팔 거니?”

익연은 샤프란 소스를 뿌린 메추리 고기가 맛있다는 말과 곁들여 물었다. 재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고모님들 쓰고 싶은 곳에 쓰십시오. 저흰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럼 연말에 한 번 와서 밥 먹어. 장 서방 데리고.”

“네, 고모님.”

대답은 또 장태건이 했다. 재하는 이제 놀라지도 않고 그를 보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식사 자리는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조카 부부가 바쁘니 한잔하고 싶어도 즐길 수가 없다며 익연은 푸념을 했다. 그녀는 기사가 모는 세단을 타고 파인 다이닝 건물 앞을 떠났다.

그다음은 태건과 재하의 차례였다. 명순이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며 그들에게 말했다.

“댁에 의사 선생 와 있답니다.”

보통의 알파와 오메가라면 가정에서 복용할 수 있는 약을 먹은 뒤 각인을 맺는다. 성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보통의 알파와 오메가가 아닌지라 관계가 아닌 약물로 각인을 맺어야 한다고 했다.

1차로 의사의 처치하에 각인 약물을 주입한 뒤, 같은 장소에서 서로의 가까운 곳, 즉 포옹한 상태로 두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면 각인이 반쯤 완성된다고 했다. 그다음으로 관계를 맺으면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명순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자, 의사는 명순의 말처럼 이미 한남동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부는 각자 다른 욕실에서 씻고 나온 뒤 한 침대에 누워 의사가 상완에 주사한 후 생긴 작은 핏방울을 탈지면으로 닦아 냈다.

“알람을 맞춰 놨으니 이제 숙면하시면 됩니다. 그 이후에는 관계를 꼭 맺으셔야 각인이 완성되니 유념을….”

“떡칠 기회 넘길 생각 없으니까 돌팔이도 얼른 퇴근해. 얘, 명순아. 선생님 가신단다.”

태건이 귀찮다는 듯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재하를 제외하고 말이다.

“네, 네, 그러면 무슨 이상 있으시면 연락을….”

“가시죠, 선생님.”

연신 꾸벅거리는 강동혁이라는 의사의 등을 밀다시피 하여 내보낸 명순이 가볍게 묵례 후 문을 닫았다.

침실의 문이 닫히자 홈웨어로 갈아입은 태건이 젖은 앞머리를 내린 채 재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서방님, 안기셔요.”

피식 웃음이 나 그대로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기며 재하는 태건의 허리를 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두 시간 동안 잠만 자라고?”

“일어나서 관계해야 각인이 완성된답니다.”

“그럼 지금은.”

“일단 자라고 했으니까….”

“그럼 사까시는. 사까시도 안 되나?”

구음을 해 주겠다며 들러붙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고는 얌전히 그의 등을 토닥였다. 태건이 재하의 머리 위에 턱을 툭 올려 두더니 나직이 하품했다.

“이거 수면제 성분도 있나 본데.”

“졸려요?”

그러고 보니 재하도 조금 나른해졌다. 태건의 품이 따끈한 탓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바로 잠들지는 않았다. 두 알파는 도란도란 쓸데없는 얘기를 한동안 계속했다. 고모님과 갔던 레스토랑에서 나온 와인이 괜찮았다는 말을 하면, 태건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정길이 새끼 감시 잘해야 한다는 말로 화답했다.

왜냐고 물어보니 갑자기 재호는 애인이 있냐 물었다. 재하는 그걸 본인이 어떻게 알겠냐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다음, 부부는 똑같은 타이밍에 잠이 들었다.

이재하는 불현듯 자신이 꿈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것은 너무도 작고 마른 장태건이었다. 그가 고모에게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재하가 모친과 닮았다며 저를 보며 웃던 얼굴도.

의사는 각인 시에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 핵심적인 기억이 떠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하가 본 것은 장태건의 모든 날이었다.

이재하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시작된 그 모든 날들.

그리고 다음에 본 것은 그들의 결혼식 날이었다.

장태건은 이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식장 앞에서 하객들을 맞이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는 이재하를.

그는 이재하가 입은 검은색 턱시도가 죽여주게 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가 입고 있던 크림색 턱시도의 가슴팍을 더듬거려 습관적으로 담뱃갑을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였다. 장태건은 오늘 결혼을 하는 날이었고, 담배 냄새를 풍기며 꽃들이 가득한 식장으로 걸어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니코틴으로도 달래지 못한 긴장감이 손끝을 저미게 만들었다. 제 부친 옆에 얌전히 서서 싱긋 웃으며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알파가 미치도록 예뻤다. 그이가 곧 저와 식을 올릴 상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대로 꿈처럼 사라질까 봐, 옆으로 다가가 괜히 툭 쳤다. 잠시 하객들의 발걸음이 드물어져 짬이 났는지 재하가 바로 태건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장 실장.”

네가 나 같은 새끼랑 결혼하기 싫다고 그대로 토껴 버릴까 봐 말을 걸었던 거라고 할 수 없었던 태건은, 제 배우자 될 사람의 새초롬한 눈썹 끄트머리나 남자다운 눈썹뼈, 곧은 콧날과 살짝 예민해 보이는 눈매 등을 훑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중에는 밥도 못 먹는답니다. 식사라도 하고 오세요.”

“아, 괜찮습니다. 아직 인사 중이라.”

“말 들어요. 저 사람들은 다 공짜 밥 처먹고 갈 건데 이사님 혼자 굶을 생각이에요?”

말이 조금 부드럽지 못하게 나갔다는 반성은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저는 이렇게 태어났는걸.

나는 묶여 살았는걸. 너를 만나기 전까지. 너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묶여 있는지도 모르고. 너를 만난 뒤에는 그걸 한번 풀어 보겠다고. 내 목에 묶인 무언가를 풀고 너를 한 번 다시금 보러 가겠다고.

그러니 말투가 이런 건 어떻게 해결 못 할 문제였다. 차츰 나아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사람이 내 옆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재하가 말간 얼굴로 저를 잠시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장 실장도 같이 요기하러 갑시다.”

한숨이 나올 만큼 다정한 말이었다. 너는 왜 나 같은 새끼랑 결혼해 주는 걸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물어본 적이 있다.

‘존나 이해가 안 가네.’

‘…….’

‘내가 좋아요?’

‘아니, 아닙니다.’

그때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았었다. 대체 뭘 기대했길래. 하긴, 당연한 얘기였다. 저 위에 높은 곳에서 살던 대단한 사람이 깡패건달새끼가 좋아 결혼할 리가 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이재하는 무언가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늘 위에 사는 그가 땅 밑을 기어 다니며 버러지처럼 연명하던 자신에게 얻을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태건은 제 손아귀에 버젓이 걸어 들어온 보석을 내게 걸맞지 않다며 사양할 만한 교양은 쌓지 못했다. 가정 교육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장태건은 형편없는 제 가정 교육 때문에 코가 낚인 건지도 모르고 단정한 얼굴로 제 왼쪽에 서 있는 알파를 평생토록 놔주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네가 아무리 헤어져 달라고 해도. 네가 이혼을 말해도. 나는 네 옆에서 떨어질 양심은 배우지 못했으니까.

태생으로 타고난 거머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이 재하의 머릿속으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바다 소금 냄새가 지천을 적셨다. 파도에 젖은 해당화 꽃잎이 제게로 흘러 들어왔다. 재하는 서서히 감은 눈을 떴다.

저를 안고 있는 태건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나른하게 뜬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물었다.

“다 봤어?”

“…….”

“쪽팔리네.”

그의 말에 재하는 웃음이 터졌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눈앞의 이 알파가 자신을 언제부터 사랑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태건이 말했다.

“나도 다 봤거든? 근데 당신 내숭 장난 아니더라? 내가 그렇게 좋아 미치겠으면 말하지. 시간 아까워 죽겠네.”

재하는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웃고 있는데도 눈 앞머리에 눈물이 고였다. 태건이 정확히 그 눈물방울 위에 입을 맞추며 재하를 껴안았다.

그들은 각인하는 중이었다. 서로를 서로에게 말이다.

태건은 웃으면서 우는 재하의 뺨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즉시 입술을 붙였다. 혀가 섞이다 말고 떨어졌다. 재하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내민 채 눈을 떠야 했다. 태건이 입술을 완전히 떼어 내더니 그 위에 묻은 재하의 타액을 핥아먹었다.

“날 너무 사랑하셔서 주가 조작하고, 유신까지 말아먹고.”

“…….”

“그래 놓고 이혼 얘기를 해.”

장태건이 일렁이는 눈으로 재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모두 본 것처럼 태건 역시 제가 숨기고 있던 모든 걸 본 듯했다.

그가 재하의 위로 올라탔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침실의 등이 장태건에게 가려져 그의 얼굴이 어둡게 보였다.

그 사이로, 일렁이는 밤바다 같은 눈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은 날 너무 사랑해서.”

다리가 얽혀 들었다. 재하는 제 허벅지에 와 닿는 묵직한 무게감에 그가 흥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그 부위에 묘하게 척척하고 습윤한 느낌이 들었다.

재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태건의 눈동자가 살짝 풀려 있었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래가 뭉근히 닿았다.

“아, 하-. 그러니까 당신이, 씹-.”

태건의 고개가 내려왔다. 그가 재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깊은 호흡을 내뱉었다. 축축한 숨이었다. 맞닿은 곳들, 모두에서 그런 느낌이 났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떴다.

“헉, 아-.”

“…….”

태건이 계속해서 재하의 아랫배에 무언가를 문질렀다. 옷을 입고 있음에도 그 장대한 감촉이 여실했다.

“…그게 다 진짜라고?”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재하의 귓불과 목덜미가 이어지는 부분에 태건의 입술이 닿았다. 그가 살점을 빨아들여 입 안에서 혀로 삭 핥는 느낌이 났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100m를 전력 질주 한 사람처럼, 태건은 재하의 위에 올라탄 채로 흉곽을 크게 부풀려 호흡하고 있었다. 숨이 가쁜 사람처럼 헉헉거리기도 했다. 광대와 뺨, 귓불과 눈썹 끄트머리에 태건의 입술이 계속해서 닿았다.

그의 입술은 전에 없이 젖어 있었다. 재하는 간지러운 느낌에 다시 한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아랫배에 문질러지는 두꺼운 것은 점점 더 뜨거워져만 갔다.

“청혼한 것도…. 그럼 그게 다…. 하, 윽-.”

태건이 재하의 뺨에 입술을 붙인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꽉 맞물리게 닿은 무게감과 감촉이 너무도 야했다.

정확히는 태건의 흥분이 그러했다. 그는 풀린 눈으로 재하의 얼굴 이곳저곳에 키스하며 계속해서 제 것을 재하의 하복부에 문질렀다.

축축한 걸로 보아 이미 사정한 듯했다.

“말해 봐, 응? 진짜야?”

“…진짭니다.”

“…아, 윽, 하아-.”

그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악다문 턱이 불거졌다. 재하는 그의 등에 손을 올려 기립근의 둔덕 사이로 팬 골을 쓸어내려 주며 사정을 도왔다.

그가 재하를 꽉 끌어안은 채로 몸을 떨었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달게 느껴졌다. 재하는 태건의 흥분이 좋았다.

제 것도 이미 흥분한 채로 태건의 허벅지에 쓸려 조금씩 물을 흘리고 있는 듯했다. 바지춤에 습기가 찼다.

재하는 제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태건의 뒷머리를 만져 주었다. 그의 귓불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그러는 태건 씨는요.”

태건은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경련이 잦아드는 듯하다가도 허리를 털듯 움직이는 걸 보면 계속해서 사정하고 있는 듯했다.

재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위각인, 했어요? 나를 상대로?”

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쪽팔리게.”

작게 내뱉는 태건의 목소리가 푹 잠겨 있었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했던 말을 다시금 내뱉으며 끙, 하고 앓았다.

목덜미에 묻은 고개를 비비적거리며 재하의 어깨에 키스하기도 했다.

“…어떻게 혼자 버텼습니까.”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가 걸어온 모든 길이 저를 향해 있었다. 그가 버텨 온 시간이 재하의 마음을 쪼개질 듯 아프게 했다.

눈물이 없는 편이었는데, 장태건과 관련되면 눈가가 쉽게 뜨거워졌다. 태건이 그런 재하의 눈꼬리에 입술을 붙였다. 그의 호흡이 더웠다.

“뭘 또 울어, 참을 만했는데.”

그는 심드렁하게 말한 뒤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살짝 빨개진 귓등을 하고 재하를 내려다보았다.

“그 얘기 그만해. 밤새 하려면 바빠, 우리.”

재하는 믿을 수 없어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쑥스러워서 그래요?”

그 말에 태건이 쯧, 혀를 찼다. 그는 심정을 들킨 사람치고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뭘 들은 거냐며 재하를 타박했다.

“아까부터 말했잖아. 쪽팔린다니까. 모자라서 당신 갖겠다고 개지랄 떨고 산 게 자랑도 아니고.”

“왜,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러다가 저 역시 태건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재하 또한 태건에게 모든 걸 주고 싶었다. 그를 제일 우선순위에 두었었다. 그게 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재하는 상체를 살짝 일으키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왜 계속 그런 생각을….”

인상을 찌푸린 태건이 재하의 입술을 검지와 엄지로 살짝 집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아, 씨발-. 그만 말해. 자지 터질 것 같으니까.”

그가 허리를 숙여 검지와 엄지로 집어 살짝 튀어나온 재하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는 상의를 벗었다.

곧이어 홈 웨어 팬츠를 벗었는데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정액과 선액에 잔뜩 젖은 검붉은 기둥이 툭 튀어 올라왔다.

그건 몇 번 더 꺼덕이더니 태건의 아랫배에 찰싹 달라붙었다. 재하는 멍하니 그걸 보다가 중얼거렸다.

“속옷은… 왜 안 입으셨습니까.”

“벗을 건데 뭐 하러. 당신도 벗어.”

태건이 재하의 팬츠 밴드 부분에 양손 검지를 갈고리처럼 건 다음 쑥 벗겨 냈다. 속옷까지 벗겨 내 버리는 바람에 재하의 것도 퉁 튕겨 올랐다. 똑같이 기둥이 잔뜩 젖어 있었다.

연해진 성기의 색이 태건의 것과 대조되어 보였다. 재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하여간 꽤 엉큼해. 반한 주제에 말도 안 하고.”

그가 투덜거리며 재하의 성기를 잡아챘다.

“읏-!”

엄지로 선단을 둥글게 문지르는 감각에 놀라 고개를 젖혔다. 태건이 재하의 상의를 걷어 내 가슴을 주물러 댔다. 예의라고는 없는 손짓이었다.

“그 개새끼들한테 반항한 이유도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랬다는 거 진짜야?”

“…….”

“응? 재하야, 진짜냐고 묻잖아.”

태건이 아예 고개를 내렸다. 다리 사이에 들어온 태건은 입술부터 재하의 것을 삼켰다. 점막이 있는 부분으로 귀두를 감싸고 혀의 넓은 면을 기둥에 딱 붙여 쓸어내리며 재하의 성기를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흐아-!”

놀라 골반이 저절로 튕겨졌다. 츄릅 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가 요도구에 입술을 붙인 채 요도에 고여 있던 선액을 쫍 빨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재하의 허벅지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읏, 잠, 깐…!”

“어? 말해 봐. 진짜냐니까.”

중간중간 발음이 뭉개져 있었다. 재하의 것을 빨아들이느라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앓는 소리가 나왔다. 대답을 강요받았는데도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입을 여는 즉시 신음만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흐읏, 아, 그, 그만-.”

“난….”

그가 성기의 기둥에 입술을 붙인 채 핥아 가며 말했다. 무언가를 게걸스레 핥는 소리와 못 견디겠다는 듯한 숨소리와 섞인 어조가 허벅지 사이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난 진짜야.”

태건이 재하의 다리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태건의 입술은 젖은 채였다. 재하는 가쁜 숨으로 호흡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재하에게로 몸을 내렸다. 다리 사이에 그의 하반신이 딱 맞게 들어왔다.

재하는 제 성기에 비벼졌다 퉁 튕겨 오르는 태건의 것에 짧게 신음했다. 서로의 가슴팍이 맞붙었다. 태건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거 다 진짜라고.”

맞닿은 곳에서부터 먼저 소리가 울렸다. 재하는 홀린 듯 태건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태건이 무언가를 말하기 전 망설이는 걸 처음 보는 터라, 재하는 성감에 들뜬 상태로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쯧, 혀를 찬 태건은 고개를 내려 재하의 귓불을 입술로 물며 속삭였다.

재하는 그 말에 태건의 헐벗은 등을 손톱으로 긁었다. 저도 모르게 말이다. 짧은 손톱에 그의 기다린 흉터가 걸렸다. 재하 역시 태건이 속삭인 말 한마디로 사정할 수 있었다.

그는 제 사랑을 꽉 껴안았다. 태건이 재하에게 키스했다. 혀가 섞이기도 전에 충족감이 차올랐다. 맞닿은 복근에는 서로의 정액이 튀어 미끌거렸다.

두 알파는 그때부터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태건이 재하의 양 오금을 아래로 눌러 꼬리뼈를 살짝 들뜨게 만들었다.

그대로 드러난 비문은 애액에 잔뜩 젖어 있었다. 태건이 그걸 내려다보며 헉헉거렸다.

“자지를 너무 많이 먹였나, 애액이 존나 찐득거려.”

그 말에 부정하고 싶었지만 재하 역시 태건의 말처럼 자신의 비문에서 나온 투명한 액체의 점성이 점점 더 진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차마 부정하지 못한 나머지 재하의 얼굴이 빨개지자 태건이 제 자지를 손으로 잡아 훑으며 말했다.

“어, 칭찬인데. 빨아 먹기 좋다는 뜻이었어요.”

그런 칭찬이 대체 어디 있냐 따지고 싶었지만, 재하는 한 손으로는 제 한쪽 오금을 지그시 누르고, 나머지 손으로는 굵은 좆 대가리를 문지르고 있는 태건에게 시선을 빼앗긴 후였다.

발기를 위해 피가 잔뜩 몰린 탓인지, 그의 단단한 하복부에는 정맥이 돋아나 있었다. 그 아래에 수풀이 수북하여 좆에서 흘러내린 선액이 투명하게 방울져 있었다.

태건의 손은 굉장히 큰 편이었는데도, 성기를 붙잡은 것에는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전완근이 꿈틀거렸다. 재하는 그 광경에 넋을 놓았다.

태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우리 남편 시장하시다는데 얼른 먹여 드려야지.”

그 저질스러운 말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임에도, 뒤가 발씬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 혼자 뭘 먹듯 오물거리는 비문에 두꺼운 귀두가 와 닿았다.

“읏….”

“하….”

두 알파 모두 신음을 삼켜야만 했다. 재하가 느끼기에도 제 뒷구멍이 태건의 자지를 너무 씹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두만 넣어진 게 아쉬운지 사탕 빠는 입술처럼 연신 움직이며 애액을 찍, 뱉어냈다.

“이거는, 씹…. 각인이라고 좀….”

재하는 태건의 숨겨진 그 뒷말을 단숨에 이해했다. 저도 같은 생각 중이었기 때문이다.

각인을 위한 성관계여서 그런지 두 사람 모두 피부가 잘잘 끓듯 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감각이 두려울 정도라 저도 모르게 버둥거리다가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가만히 계세요. 지금 나만 좋자고 이러는 줄 알지.”

“읏, 흐윽-.”

“아, 윽-.”

성기를 반도 집어넣지 않았는데 안이 오물거리는 것이 딱 죽을 맛이었다.

내벽이 조여들며 태건의 구슬 옆을 쪽 빨았다. 안쪽에 틈이 없어지자, 조개가 바닷물을 내뱉듯 접합부에서 애액이 찍, 하고 튀었다. 그 애액이 덜 집어넣은 성기 기둥 위로 투둑 떨어졌다. 각인할 상대에게서 나온 페로몬이 섞인 애액이 기둥에 묻자 그 부위와 이미 삽입되어 있는 귀두가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아, 미치겠네-.”

“흐아-! 잠, 깐-!”

태건이 욕을 짓씹으며 재하의 골반을 잡고 그대로 쑥 밀어 넣었다. 굵고 기다란 것이 쑤컹, 하고 박히자 재하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바들바들 떨어 댔다.

재하의 성기가 꺼덕이며 요도구에서 쪼록, 물을 흘렸다. 선액이 조금 많이 나온 정도라 아쉽기는 했다. 넣자마자 가는 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씹, 쌀 것 같은데.”

아니, 지금 바로 사정하고 싶은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각인을 나눌 상대의 페로몬이 잔뜩 묻어 있는 곳에 성기를 박았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안쪽에서 성기가 발발 떨어 대는 것 같았다.

미칠 듯 오르는 성감을 더 못 견디겠다고 엄살을 부리는 듯 성기 뿌리가 발딱거렸다. 태건은 입술을 앞니로 꾹 씹으며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엉덩이에 우물이 파일 정도로 퍽 밀어붙이자 재하가 손을 뻗어 침대 시트를 움켜잡은 채로 바들거렸다. 꺽꺽거리는 숨소리만 내뱉고 있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성기를 만져 주자 애원한다.

“안, 안 돼, 흐익, 거기는-. 아, 아-!”

몇 번 훑어 주지도 않았는데 요도구가 크게 빠끔거리더니 백탁액이 튀어 올라 재하의 쇄골 위로 투둑 떨어졌다.

그의 유두에도 떨어진 정액을 문지르며 태건은 둔근에 힘을 주고 사정을 버텼다.

“아, 씨발, 헉-.”

저절로 허리가 무너졌다. 절정에 틈바구니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재하의 호흡근이 눌릴까 봐 그의 옆에 팔뚝을 짚고 허리를 자잘하게 떨어 성기를 박아 댔다.

제가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안쪽에서 성기가 내벽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미친 듯이 선액을 뿜어 대고 있었다.

내벽에 대고 소변이라도 본 듯 방대한 양이었다. 좆 됐다 싶어 허리를 조금 뒤로 물려 성기를 반쯤 뽑아내자, 양이 어지간히 많았는지 접합부를 비집고 투명한 액체가 와르르 쏟아졌다.

매트리스를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안까지 스며들 정도로 많은 양을 쏟아 낸 것이다. 골치가 아프기도 하고, 눈앞에 별이 보일 지경이라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제 밑에서 신음하는 이재하가 죽여주게 예뻤다.

재하는 아직도 저를 놔주지 않는 극치감에 몸을 떨어 대는 중이었고, 그로 인해 내벽이 사정없이 조여들어 안쪽에 박혀 있던 성기가 사정도 하지 못하고 선액만 오줌 지린 것처럼 마구 쏟아 내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러트도 아닌데 노팅할 것 같아서 성기를 잡아 뽑아냈던 태건이, 허리에 두 손을 짚은 채로 무릎을 꿇고 서서 헉헉거리는 동안 재하 역시 몸을 뒤척이며 줄어들지 않는 극치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재하의 성기가 붉게 달아올라 몇 번이나 꺼덕였다. 태건은 그걸 검지로 퉁 튕겨 본 다음, 웬만해서는 계속 삽입해 있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다시금 안쪽에 성기를 박았다.

“흐아-!”

“윽-.”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여 있던 온갖 액체들이 두꺼운 성기가 틈을 좁히며 들어오자 푹, 하고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재하의 골 사이에 잔뜩 묻거나 태건의 아랫배와 허벅지에 옮겨붙어 번들거리게 만들었다.

그들의 정사는 그런 식으로 계속되었다. 두 사람 다 몇 번의 추삽질을 견디지 못하고 삽입을 멈췄다가 잡아끄는 듯한 성감에 못 이겨 사정하고 또 애액을 쏟아 내기도 했다.

태건은 저 혼자 흥분하여 노팅을 준비하느라 사과 알처럼 굵어진 귀두를 손바닥으로 때려 감각을 죽이려 노력해 봤지만, 재하의 애액이 잔뜩 묻어 있는 구멍에 박아 넣을 때면 얼얼한 성기로도 환장할 정도의 느낌이 오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재하는 제 상태에 대해 살펴볼 만큼 이성이 남은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태건이라도 이를 악물고 두 사람의 각인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봐야 했는데, 그때마다 눈알이 뒤로 휙 돌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두 사람 다 너무 물을 쏟은 나머지 침대가 축축해질 지경이었다. 결국에는 침대를 떠나 콘솔 위 물병을 가져와야 했다. 태건은 제 각인 상대를 살피며 물을 먹이려고 했다가 재하가 받아먹지 못하자 입에 머금고는 키스했다.

변변찮은 애무도 하지 못했다. 삽입만 해도 서로 덜덜 떨 정도로 느끼느라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각인이 반쯤 완료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흘러 버린 뒤였다.

재하는 제 목이 완전히 상해 버린 것을 느끼며 두 눈을 깜빡였다. 생리적인 눈물이 고인 것인지 그때마다 눈물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태건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진짜 징하다.”

“…프흐.”

그 말에 재하 역시 웃음이 튀어나왔다. 서로가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태건은 성기를 박은 채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있고, 재하는 그가 움직이는 걸 견디지 못해 성기에서 줄줄 물을 흘려 댔다.

“웃어?”

태건 역시 웃어 놓고 그렇게 말했다. 웃음을 숨기지 않는 눈이 재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상황이 웃겨 웃음 짓다가도 태건은 고개를 숙여 재하의 눈물이 말라붙은 눈꼬리와 뺨 등에 입술을 꾹꾹 눌러 붙였다. 그의 집요한 입맞춤을 견뎌 내며, 재하는 아까 전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오래전부터, 당신밖에 없었던 거. 그거 다 진짜라고.’

재하는 눈을 감았다. 태건이 그런 그의 눈꺼풀 위로도 키스했다.

가슴속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충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재하는 그것이 각인의 첫 껍질임을 깨달았다. 두 알파는 서서히 각인을 완성시켰다. 그 무엇도 갈라낼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함께하자고, 그들의 결혼식 날 맹세했던 것처럼.

* * *

“안 추워요?”

“더운데.”

김장철이 지났는데 독 묻을 사람이 없다고 정 선생이 차일피일 미루던 걸 전해 듣고는 성북동으로 왔다.

얼마 전, 김란희가 프랑스로 출국했다. 이재호가 차린 기획사에서 상장을 기념하는 축하 파티가 열린 날이었다. 고 비서가 이익형이 제게 이재하의 납치를 도모하자 협박했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국내가 시끌시끌하긴 했다. 이 땅에 널리 퍼진 삼강오륜의 정서가 친자식의 납치를 사주한 이익형을 용서하지 않았다. 보여주기식 수사라는 비난을 받기 전, 검찰은 이익형을 향해 다시 물릴 수 없는 칼을 빼들었다. 물론 이재하의 오촌 고모들이 검찰의 총탄을 가득 채워 주었지만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출국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당연했지만, 하필이면 이재호의 기획사 상장 축하 파티 날이었다는 것이 공교롭기는 했다.

김란희가 그 자리에 온다면 저는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부르길래 이상하다 싶어 슬쩍 물어보았다. 재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엄마는 마음에 안 들겠지. 아직 회사도 너무 작고….’

김란희를 설득하여 이익형을 치기로 한 이재호는, 그 일로 사촌 고모들에게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친에게 말하지 않았나 보다. 모자는 그 일로 틀어졌으나, 그들이 가족인 이상 영원히 그 상태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성북동은 한참 앓았던 몸살을 끝낸 참이었다. 덕분에 초겨울에 끝냈어야 하는 김장이 밀리고 밀렸다.

정 선생이 혼자 사는 재호가 걸린다며 성북동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김장은 올해도 어김없는 집안의 행사가 되어 버렸다.

정 선생은 재하까지 호출했다. 김장이 왜 밀렸는지 그녀가 조목조목 짚어 주기 전에, 재하는 모친의 젖동무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다 명순이 양평댁까지 모셔 오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손이 큰 두 여사님이 돼지 수육을 한답시고 동네 정육점을 동낼 듯이 고기를 사 온 것이다.

물론 심부름은 정길과 명순이 했다. 절인 배추가 온 거실 한구석을 차지했다. 양념이 놓인 대야들도 가득했다. 집 안에 매운 냄새가 흘러넘쳤다.

비린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재하를 위해 정 선생은 새우 간 것과 채수를 넣고 다시 물을 우려 배춧속 양념의 젓갈 대신으로 썼다. 그걸 보던 양평댁이 우리 대표님은 굴 무침을 좋아하신다며 정길에게 생굴을 사 오라고 심부름시켰다.

서로 아들 먹이겠다고 아웅다웅하시더니 이제는 김치에 홍시를 조금 넣으면 감칠맛이 산다고 또 의기투합했다.

재하는 태건을 빤히 봤다. 양평댁이 대표님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지난주에 승진한 장태건뿐이었으니까.

“굴 무침 좋아해요?”

“응. 정력에 좋다는데.”

태건은 또 어이없는 말을 했다. 재하가 그 말에 뒤따라 나올 것들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리자 쫓아와 입술을 귓불에 붙이고는 속삭거렸다.

내 정력 너한테 다 쓸게. 오늘 바로 쓰자. 지금 한 발 빼러 갈까? 형, 태건이 자지 아파요. 형이 좀 봐주시면 안 돼요?

재하는 절대 대답하지 않았다. 형이라고 부르는 게 귀여워 대꾸했다가 말려들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웃음이 나오긴 해서 피식 웃고 있는데 그걸 김장 김치가 담긴 봉투를 들고 거실로 들어오던 양평댁에게 들켰다.

“허이고, 인제는 땅이 몽땅 얼어 버려서-. 명순 씨 아니라 명순 씨 할아버지가 와도 땅 파기가 쉽지 않겠는데. …어머, 어머…, 두 분 다정하신데 주책이야, 내가.”

그러더니 재하가 뭐라 붙잡기도 전에 밖으로 휙 나가 버렸다. 재하는 애꿎은 태건만 밀어내며 경고 조로 말했다.

“장태건 씨.”

“왜, 여보.”

좋다고 웃을 때는 언제고 미냐며, 제 얼굴을 밀어내는 손바닥 위에 태건이 입을 맞췄다. 그 감촉이 간지러워 주먹을 조금 오므렸다 편 재하가 화제를 돌렸다.

“땅이 얼었대요. 파기가 쉽지 않다는데.”

“땅이란 건 파면 다 파져. 당신은 군필이면서 언 땅 안 파 봤어?”

미필 주제에 군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웃겨 재하가 물었다.

“그러는 태건 씨는 어디서 파 봤습니까?”

“시체 묻을 때.”

태건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입고 있던 재하의 후드 티를 훌렁 벗어 버리더니 밖으로 나간다.

요즘은 페로몬으로 상대의 각인을 안정시키려고 서로 옷을 자주 바꿔 입었다. 재하가 크긴 해도 태건만큼 큰 것은 아니라 재하의 옷 중 태건이 입을 만한 것은 한 치수 크게 사 넉넉하게 입고 다니던 저 후드 티가 다였다.

재하 역시 그 뒤를 쫓아 나가며 태건이 분홍색 슬리퍼를 찍찍 끌고 앞서 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반소매만 입고 있는데 안 춥냐 묻자 곧 더워질 거란다.

명순과 정길도 겉옷을 벗고 민소매와 반소매 티셔츠 차림이었다. 태건이 합류하자 겨울이라 꽝꽝 언 땅에 무 자르듯 손쉽게 삽질이 먹혔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정 선생이 달려가 인터폰을 받더니 띡- 하는 전자음과 함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손님을 맞이하러 다시금 정원으로 달려오는 그녀에게 눈으로 누구냐 묻자 웃으며 대답한다.

“으응, 작은 이사님. 오늘 김장 한다구 일찍 퇴근하셨대요.”

이재호가 왔다는 말에 정길의 삽질이 멈췄다. 명순이 삽을 툭 건들며 비웃는 것 같았다. 정길이 티셔츠를 들어 올려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 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형님, 잠시 신세 지겠습니다.”

태건에게 하는 말이었다. 태건이 어이가 없다는 듯 정원 아래 대문 쪽으로 사라지는 정길을 보더니 재하를 돌아보며 대문 쪽을 삿대질했다.

“저거 그냥 둘 거야?”

“뭘요?”

뭘 그냥 둔다는 건지 몰라 되묻자 태건이 됐다, 하며 다시금 삽질을 시작했다. 멀리서 재호가 머리 위로 와인병을 들어 올린 채 흔들며 웃고 있었다.

겨울 하늘이 청명했다.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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